선수들은 대체로 익숙한 역할을 선호한다. 퍼디난드는 어린 시절 잠머를 우상으로 삼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은 전통 센터백으로 뛰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확신했다. 애쉴리 콜 역시 전성기에는 세계 최고의 왼쪽 풀백이었지만, 맥클라렌 시절에는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왼쪽 윙백을 맡으라는 지시에는 적잖이 당황했다.
따라서 라이스가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오른쪽 풀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하는 것에 불편해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오른쪽 풀백을 거부할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선수들은 국가를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그가 오른쪽 풀백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오히려 필요한 자질 대부분, 아니, 거의 모든 능력을 갖추고 있다.
문제는 한 가지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두 자리, 어쩌면 세 자리의 포지션까지 바꾸면서 다른 부분까지 약화시킬 가치가 있느냐는 점이다. 더욱이 그 실수는 대표팀 명단이 발표된 순간부터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투헬은 후회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콩고민주공화국전에서 쉴 새 없이 외쳐댄 모습은 오히려 자신의 실수를 거의 자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스펜스에게 화를 냈다. 이유는 간단했다. 스펜스가 그저 '스펜스다운 플레이'를 했기 때문이다. 투헬이 대표팀에서 제외한 선수만큼 영리하지도, 공격적이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스펜스는 스로인을 뒤쪽으로 연결했다. 그러자 투헬은 폭발했다. "제드!" 그는 앞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1대1 상황이잖아! 앞으로 넣어!" 지시는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장면에서 잉글랜드가 누구를 그리워하고 있는지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아놀드는 잉글랜드가 배출한 풀백 가운데 가장 공격적인 성향을 보인 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투헬이 라이스를 오른쪽 풀백으로 내린 이유는 라이스가 아놀드의 가장 가치 있는 장점들을 상당수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라이스 역시 패스를 읽는 시야가 뛰어나며(물론 아놀드만큼은 아닐 수 있지만), 정확한 크로스를 올릴 수 있고, 세트피스 능력도 훌륭하다. 연계 플레이 역시 수준급이다.
투헬은 라이스가 재능 있는 공격진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해주길 바랐다. 이는 과거 아놀드가 리버풀에서 수행했던 역할과 같다. 실제로 살라도 아놀드가 팀을 떠난 뒤에는 예전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애초에 아놀드가 대표팀에서 제외된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설명이 나온 적이 거의 없다. 투헬은 뛰어난 소통 능력을 갖춘 감독이지만, 해당 결정에 대해서만큼은 늘 모호한 말만 남겼다. 그는 이를 “순전히 스포츠 결정”이라고 했고, “어려운 결정”이라고도 했다. 심지어 “어쩌면 공정하지 않은 결정일 수도 있다”라고 인정하기까지 했다.
물론 감독은 투헬이다. 대표팀 명단을 꾸리는 것도 그의 권한이다. 어쩌면 그는 아놀드를 선수로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도 있다. 혹은 인간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거나, 팀 분위기를 해칠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콴사는 대표팀에 승선했고, 지금은 부상으로 이탈했지만 실제로 오른쪽 풀백으로도 기용됐다.
만약 투헬이 슬롯보다 먼저 리버풀 감독이 됐다면, 첫 시즌부터도 아놀드 대신 콴사를 기용했을까? 그렇다면 리버풀이 리그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또 살라가 해당 시즌 리그 29골을 넣을 수 있었을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
물론 지금 와서 결정을 되돌릴 방법은 없다. 하지만 리브라멘토가 부상으로 낙마했을 때 대체자로 찰로바를 발탁한 것은 에릭손이 2006년 월드컵에서 월콧을 깜짝 발탁한 이후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의 월드컵 선수 선발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으로 남아 있다.
잉글랜드의 오른쪽 풀백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수많은 대안이 거론되고 있다. 만약 라이스가 멕시코전에서도 오른쪽 풀백으로 나선다면, 이제는 단순한 고민이 아니라 진짜 위기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그런데 모든 논의 속에서 찰로바의 이름은 단 한 번도 거론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대표팀에 선발했을 당시에는 오른쪽 풀백도 소화할 수 있는 멀티 능력이 발탁의 근거로 제시됐었다.
분명 라이스를 오른쪽 풀백으로 내린 변화는 콩고민주공화국전에서는 효과를 봤다. 하지만 경기 시작부터 멕시코전을 위해 같은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훨씬 더 큰 도박이 될 것이다. 더구나 라이스에게 멕시코의 가장 위협적인 퀴뇨네스를 전담 마크하게 하는 것도 상당한 위험 부담이다.
퀴뇨네스는 이번 대회 4경기 가운데 두 차례나 MOTM에 선정됐고, 지난 시즌에는 사우디 리그 득점왕에도 올랐다. 무엇보다 라이스는 햄스트링에 신경성 불편 증세를 안고 있어 현재 관리가 필요한 미드필더다. 게다가 본인도 풀백으로 뛰는 것을 썩 원하지 않는다. 풀백은 순간적인 폭발적인 스피드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포지션이다.
라이스는 콩고민주공화국전 승리 후 이렇게 말했다. “오른쪽 풀백으로 뛰었던 12분이 경기에서 가장 힘들었습니다. 다음 경기에서 어떻게 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오른쪽 풀백으로 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의미는 매우 분명하다. 라이스를 오른쪽 풀백으로 내리면 또 다른 변화도 불가피하다. 벨링엄이 10번에서 빠지고 로저스가 대신 들어갈 수도 있고, 아니면 마이누가 이번 대회 첫 출전 기회를 얻으며 선발에 포함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흐름을 보면 투헬이 마이누를 선호하는 선택지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지금까지 마이누를 교체로도 거의 기용하지 않았고, 파나마전에서도 오히려 헨더슨이 경기 막판 6분을 뛰었다.
어느 쪽이든 이상적인 해법은 아니다. 흔히 그렇듯, 선수의 멀티 포지션 능력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각과 선수 본인의 생각은 다를 때가 많다. 라이스 역시 10대 시절에는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재목으로 평가받았다. 오른쪽 풀백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가장 많이 거론된 포지션은 센터백이었다.
램파드가 첫 번째 첼시 감독 시절 라이스를 영입하려 했을 때도 그의 구상은 분명했다. ‘차세대 John Terry로 키우겠다.’ 당시 라이스는 21세였고 이미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미드필더로 7경기를 뛰고 있었지만, 램파드를 비롯한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의 천직이 수비라고 믿었다. 그러나 라이스는 늘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라이스는 자신의 최적 포지션이 더 전진한 자리라고 확신했고, 실제로 아스날에서, 그리고 조금 덜하긴 하지만 투헬의 잉글랜드에서도 공격적으로 더 자유로운 역할을 맡으며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필요가 있으면 희생해야 한다. 릴리앙 튀람은 원래 센터백이었지만, 에메 자케의 요청을 받아 1998년 월드컵에서 오른쪽 풀백으로 뛰었다. 그는 대회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A매치 142경기 동안 오른쪽 풀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슈바인스타이거 역시 원래는 윙어이자 공격수였지만, 요하임 뢰브가 2014년 월드컵 도중 그를 6번으로 전환했고, 결국 독일은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가장 최근 대회에서도 스칼로니는 프랑스와의 결승전에서 디 마리아를 오른쪽에서 왼쪽 측면으로 옮겼고, 결승골에 버금가는 활약으로 기대에 완벽히 보답했다.
투헬은 더 단순한 선택지도 있다. 콘사는 빌라와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모두 오른쪽 풀백을 소화한 경험이 있다. 그를 오른쪽으로 보내고 센터백에는 스톤스를 투입하면 된다. 다만 스톤스는 크로아티아전 이후 선발 출전이 없다. 지난 시즌 경기 감각이 부족했던 영향이 경기에서도 드러났다.
리스 제임스가 정상 컨디션이라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다. 적어도 월드컵 특유의 빡빡한 일정이 다시 그의 몸을 시험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잉글랜드가 예상대로 계속 승리한다면 월요일-토요일-수요일-일요일처럼 이어지는 강행군을 리스 제임스가 끝까지 버텨낼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결국, 투헬은 스펜스가 언젠가 아놀드처럼 성장하길 바라거나, 아주 빠르게 배우길 기대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것이 투헬의 플랜A라면, 계획이 현실이 되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아마 라이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