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이란 학습되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미각이나 음식에 대해 연구하고 공부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것저것 많이 먹어보고 경험하며 얻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에 엄마가 만들어준 맛에 익숙해진다.
후에 이집 저집의 김치찌개를 먹어보고 난 뒤에야
나는 어떤 김치찌개를 좋아하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최고로 인정 하는 김치찌개라는 것은 존재할까?
무슨 타이어회사가 어느정도 이것을 해보겠다고 노력하는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의도를 가진 자본주의적 발상이다.
미슐랭 별을 받은 삭힌 홍어회집이 있다고 하자.
어떤 외국 관광객이 구글 지도의 별을 보고 찾아와서
처음으로 그것을 먹는다면 그는 맛을 알 수 있을까?
코가 뻥 뚫리는 순간 그는 기겁을 할 것이고
그때 주인은 이런 말을 해 줄 것이다.
“이것은 한국인 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이랍니다.”
그림은 어떨까?
이십세기의 천재라는 서양화가의 그림이 한국에 온 적이 있다.
어떤 한국인이 지인과 함께 가서
‘이게 뭐야? 그냥 낙서잖아?’하고 말하는 순간,
실제 그곳에 걸린 그림이 입체파적인 그림이 아님에도
그는 입체파의 대가를 이해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아무도 ‘이것은 호불호가 갈리는 그림이요’하고 말해주지 않는다.
미술계의 타이어회사 같은 역할을 하는 평론가나 비평가들도
그에게 미술적 소양이 부족해서 이해를 못하는 것이라고 말 할 것이다.
‘이해’란 무엇일까?
예술에서 이해라는 말은 예술가의 관점에서 관람자를 교육시킨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미 눈치 챘는지 모르겠지만
앞의 두 에피소드의 주체는 서로 다르다.
전자의 주체가 ‘음식을 먹는 자’라면
후자의 주체는 ‘그림을 그린 자’ 그리고 ‘그것을 이해 시키는 자’ 이다.
언제부터 예술이 순수라는 말을 앞에 붙이고
도덕보다도 높은 지위로 올라갔던 것일까?
왜 우리는 요리사의 생각을 알고 그것을 먹게 되었을까?
또 누군가의 설명을 듣고 나서 그것을 먹어야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