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정치적 현실은 정말 암울하다 못해 처절하다. 두대의 열차가 마주보고 무한대의 속도로 달려드는 형국이며, 소위 한명이 죽고서야 경기가 끝나는 모탈컴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왜 이렇게 우리의 정치가 이렇게 절대절명의 극한상황으로 몰려져야 하는가? 끝이 보이지 않는 정치권의 이분법적 대결의 장이 언제쯤 갈무리가 될수 있을까?
오늘은 기나긴 침묵을 깨는 이 선비의 생각을 좀더 세분화시켜 의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우리는 지난 10월이후 노통의 재신임 국민투표로 길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보고자 한다. 우리 국민들은 갑작스런 노통의 재신임말에 다시 재시임을 하든지 아니면 파국적인 혼란을 감수하든지 양자택일의 선택을 하게금 내몰리는 극한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민생이 힘들다는 이야기는 접어두자. 선비는 여기서 도대체 이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영역에서 자율과 창의를 최대한 발휘해야할 국민의 각각의 본분에서 왜 이토록 극한상황으로 국민들을 내모는지에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선비는 이 재신임정국을 접하면서 느끼는 것은 이른바 한국정치의 패러다임상실이 아닌가 진단해본다. 그런데 이른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야할 대통령이 포플리즘을 내세운 비젼없는 소모적인 정치적 대립구도를 자초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한국정치의 반시대적조류를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본다. 민주화라는 정치권의 패러다임이 80중반이후의 큰 흐름이었다면, 우리는 21세기에 우리나라에 걸맞는 정치적 패러다임은 화합과 중용의 패러다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 노통의 당선으로 그가 보여준 10개월간의 정치역정을 보자면 분명 우리나라의 정치적 패러다임은 대결형 정치의 장으로 접어든 느낌은 선비만의 생각이 아닐것이다.
이미 이 대결형 정치의 장은 지난대선에서 나타나 대립하는 세력과의 관계를 선과 악의 대결구도로 설정하는 도덕주의적 태도의 정립과 사상적인 수렴보다는 분열과 이슈만이 압도하는 정치경쟁의 구렁텅이로 이나라를 몰아넣고 있다. 이것은 소위 정치적 성향에서 정치경쟁의 중간층, 이념적 스펙트럼에서의 중간층, 소위 중용의 사상과 이념을 몰락하게 하는 비운을 태생적으로 품고있다고 할것이다. 그러므로 대립형 정치의 장은 공존과 중용의 이념을 용납하지 않는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소위 20세기 후반의 선진민주주의 사회를 지배햇던 이른바 합의형 정치와는 상극의 위치에 서있는 것이라고 볼수 있다.
물론 합의형 정치의 장에서도 경쟁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선진사회에서의 경쟁의 방식은 지금 노통이 제시하는 사즉생의 경쟁이 아니며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분이 아니며 한배를 타고 있다는 인식이 분명한 각각의 세력간의 대안을 둘러싼 경쟁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프랑스,영국,미국등 2차세계대전이후의 이들 합의형 정치를 표방한 국가들의 장기적인 호황과 안정된 정치를 이끌었던 것만 보아도 자명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이른바 이들의 경쟁의 방향은 원심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거대한 구심력에 의해서 좌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합의형 정치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틀속에서 국가의 핵심역략을 향한 구심력으로 경쟁이 작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합의형 경쟁구도가 가능했던 것은 본 선비의 생각으로는 이른바 깨어있는 두터운 정치적 경제적 중간층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한국정치는 왜 대결과 대립의 정치의 장이라는 퇴행적 악순환에 빠져든 것일까? 이 문제는 좀더 그 기저에 위치한 정치적,제도적,사회적 변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먼저 앞서도 지적했지만, 우리나라의 두터운 중간계층의 몰락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분은 아무도 없을것이다. 여기서 선비가 중간계층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경제적 중간층인 중산층의 몰락으로 몰고간 경제적 양극화보다는 더 복합적이고 구조적이라는데 그 의미를 두고자 함이다. 물론 일차적인 원인은 바로 97년 IMF이후에 날로 심해지는 경제적 격차의 확대와 그에 따른 경제적 중산층의 쇠퇴에 기인한바 크다. 소득과 자산 격차의 확대, 평생직장의 쇠퇴, 엄청난 사교육비의 부담, 부동산 가격의 거품으로 인한 경제적 중간층인 이른바 중산층은 거의 빈사상태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이와 같이 경제적 중간층의 소멸과 더불어 나타난 것이 현상이 바로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정치적 중간층의 쇠퇴현상이다. 각종 여론조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사회에서 중도성향의 정치인이 설자리가 줄어들고, 그들을 지지하는 층이 엷어지고 있으며, 소위 자신을 보수성향 또는 진보성향이라고 생각하는 유권자의 비율은 증가하는 반면에 중도성향이라고 생각하는 유권자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 비율이 20%이하로 맴돌고 있는 것이 여론조사가 보여주는 결과이다.
다시말해서, 민주화이후에 우리사회에서는 좌대-중소-우대라는 양극의 분포가 커지는 덤밸형 구도로 이념구도가 변화하면서 정치적 중간층의 쇠퇴현상이 극에 달하고 있다고 볼수 있을것이다. 가령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을 예로 들면 적으로 보는 시각 과 감싸안아야 할 형제로 보는 시각은 매우 늘어난반면 그 중간에서 고민하는 중용의 길을 찾는 사람들은 위축되어 졌다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정치적 중간층의 급격한 쇠퇴로 인한 덤밸형 구도의 이념구도는 필연적으로 대결현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이념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두번째로, 대결형정치구도를 불러온 것은 바로 우리 정치제도가 갖는 이중적 특성에 대한 이해가 국민모두가 부족하고, 또한 이러한 제도적 특성을 살리지 못한채 대결현 구도로 몰아가는 대통령과 그측근의 이른바 정치엘리트들의 안목부족이 아닌가 의구심이 많이 든다. 이미 우리에게 잘알려진바, 87년 민주화 이후에 우리국민들은 대통령제 정부 특히나 승자독식의 논리가 가미된 대통령제 권력구도를 채택을 했다. 대선이건 국회의원 선거이건 단순 다수를 차지하는 후보가 엄청난 권력을 차지하는 소위 위너 테이크스 잇올방식을 채택한것이다. 왜 이렇게 우리국민들은 강력한 제도적,비제도적 권력을 독점하는 승자독식의 권력제도인 대통령제를 선택한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짐작하듯이 민주화의 회복이 바로 대통령직선제의 회복이라는 등식과 매치될수 있었기 때문일것이다. 또한 민주화와 자유화의 물결속에서 대통령에게 권력을 집중시킴으로써 정치와 행정의 효율과 집중을 유지하려는 뜻도 내포되어 있을것이다. 그런데 우리국민들은 현명하게 승자독식의 권력의 집중의 남용과 오용에 대한 방지책 혹은 안정장치를 강하게 유지해 놓았다. 즉 대통령의 일방적인 독주를 막기위해서 대통령과는 다른 정치적 파트너에게 이른바 야당에게 국회의 지배권을 맡겨왔던 것이다. 소위 여소야대라는 말이 바로 국민들이 만든 안정장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여기서의 문제는 바로 대통령과 국회를 각각 다른 정파에게 맡긴 국민들의 위대한 선택을 관리하고 운용하는 정치적 엘리트들의 태도와 자질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 노태우정권이나,YS정권의 명분없는 합당이나, 의원빼내가기라는 국민의 뜻인 여소야대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구태의 정치적 행태가 있어왔다. 그런데 참여를 표방하는 노무현정권의 시대에서는 이와 같은 해법이 가능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상상도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노통과 국회가 이와 같은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것인가라는 문제는 노통의 딜레마 일뿐만아니라 바로 이나라의 대통령제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게 하는 중대한 사인이 아닐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중차대한 시기에 지난 노통이 들어선후 보여준 행태는 분노와 실망만을 안겨주는 오직 대결과 교착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정책사안의 내용보다 정치논리를 좇아 대통령을 견제해 온 야당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러나 갈등과 대립을 풀어가는 핵심적인 열쇠는 결국 대통령의 능력과 의지의 문제가 아닌가말이다.
하지만 다들 알듯이 지금까지 대통령이 국회를 상대로 충분하게 대화하고, 접점을 찾으려는 진지한 대화와 설득의 리더십이 있었는가 ? 오히려 대통령은 혼란과 대립의 책임이 국회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서 국민들에게 재신임을 하라고 벼랑끝으로 내몰고, 측근비리에 대한 특검에 대한 소모적인 거부권행사, 대선자금에 대한 정치적 성향이 다른 정파를 해체하라는 정도에 까지 몰아넣는 대립의 극한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 12월 15일이 바로 노통이 재신임을 묻겠다는 구체적인 시안을 잡겠다던 그 데드라인이다. 그러나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정치적 대결을 국민들에게 까지 확장시킨 재신임정국을 고안해낸 노통의 자질이 여과없이 보여준 실례가 아닐수 없는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목도하는 이 대결현 구도의 정치의 장이 변화와 개혁을 기대하면서 선택한 노통이 만들어 낸 것이라면, 진정 우리국민들이 바라보는 21세기의 새로운 정치적 패러다임은 찾을수 없단말인가? 노통의 헛발질을 통하여 우리가 배울수 있는 것은 차세대에 우리가 선택할 지도자를 뽑는 시금석과도 같은 것이기에 21세기에 맞는 정치의 패러다임을 찾는 것도 매우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이 아닐수 없는것이다.
선진민주국가들이 보여준 합의형(중용형) 정치구도가 바로 노통이 지금 구사하고 있는 대결형(대립형)정치구도를 대치할 정치적 패러다임인 것은 자명하다. 이 합의형(중용형) 정치구도가 경제발전, 민주주의 질의 성숙, 시민들의 참여라는 관점에서 뚜렷하게 성과가 높다는 것은 미국,프랑스,영국등 선진국의 정치제도를 조금만 들여다 보면 쉽게 알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노통이 헛발질을 해서 만들어놓은 이 대립형 정치를 벗어나서 공존과 경쟁이 어우러지는 한 차원 높은 민주주의로 나아갈수 있는가이다.
앞서도 선비가 말하였듯이 제세력들 사이에 경쟁의 룰이 제대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즉 경쟁의 방식이 모탈 컴뱃으로 나타나는 원심력 경쟁이 아니라 공존공생하는 구심력 경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즉 각각의 정파들 사이에 각각의 핵심 지지기반을 주로 의식하는 선명성 경쟁대신에 소위 정치적 완충지대를 점령하기 위한 온건화 경쟁을 벌일때에 한차원 높은 화합형 정치의 장으로 나아갈수 있을것이다. 보수와 진보의 대결에서 온건화 경쟁이 양쪽 모두에게 더 현실적인 전략이라는 점은 상식에 속한 일이 아닌가 말이다. 정치권에서 이러한 온건화 경쟁을 실천해온 홍사덕 한나라당 원내총무의 정치적 소신과 행보는 바로 화합형 (중용형) 정치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분명 발맞추어 온것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자명할것이다. 이점에서 홍사덕원내총무의 행보에 관심이 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여야, 진보/보수 모두가 현실적인 정치적 전략보다는 선과 악중에 선만을 선택하는 선명성 경쟁을 벌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몰락하는 경제적,정치적 중간층을 향한 구애는 그들의 몰락을 보고서 무의한 것이라고 판단한것인가? 아니면 당내에서의 권력경쟁에서 언제난 온건파보다는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게 마련인 정당정치의 현실때문인가?
좀더 살피자면 선비는 물론 위의 점도 작용이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정치세력들이 한결같이 선명성 경쟁이라는 낡은 전략을 곤집하는 이유는 바로 이들의 정치적인 시계가 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이전의 시기에 멈춰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노통과 지금의 한나라당의 일부강경세력, 5/6공세력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다시말해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한결같이 민주화 이전 시대의 논리 즉 정치의 논리라기 보다는 도덕의 논리를 통해서 상대방과 자신을 파악하는 이분법적 양단론적 시각을 깔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결형 정치구도를 낳게 하는 필연적인 요소일수밖에 없다.
소위 민주화의 선두에 섰던 진보세력은 민주화의 선이고, 권위주의 체제는 악이라는 7~80년대의 도덕적 이분법을 21세기 새로운 정치적 패러다임을 목놓아 갈구하는 국민의 의식을 외면한채 오늘까까지 고수하고 있고, 이를 통해서 대립형(대결형) 정치구도를 끌고 가고 있고, 이와중에 국민들은 힘들고 지치고 무너지고 있다. 보수세력도 예외는 아니다. 소위 남한은 선이고 북한은 악이라는 70년대의 도덕률을 내세우고 있고, 나아가 경제적 효율과 강한 국가는 선이고 나머지는 악이라는 도덕률안에 여전히 갇혀있다는 생각을 지울수 없다.
이렇게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는 이념적 갱신을 거부한채 낡은 세계관에 함몰되어 있는 한 한국의 정치는 대립형 정치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올수 없을것이다. 이분법적 세계관을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담을수 있는 이념적 실험이 경쟁적으로 시도될 때 비로소 우리는 대결형 정치의 암흑을 벗어날수 있을것이다. 이런점에서 본다면 한나라당에 속한 홍사덕 원내총무가 87년 이후 줄곧 걸어온 온건화 중용의 정치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정치적 이념과 지향점이 될수 있는 것이기에 우리가 매우 관심있게 바라보아야 할것이다.
그리고 대결형(대립형)구도에서 벗어나는 두번째 방법으로 정치제도의 유연한 전환과 정치엘리트들의 태도 전환을 들수 있을것이다. 앞서도 말을 던졌지만, 지금의 현상에서 민주화의 상징인 대통령제도는 기본적인 골격을 유지해야 겠지만, 소위 현재의 대결형 승자독식구조는 완화되어져야 할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은 여러가지가 나올수 있을것이다. 민주당에서 나오는 분권형대통령제라든지, 한나라당 홍사덕원내총무가 주장하는 책임총리형대통령제라든지, 도농복합선구제의 병행, 또는 선출방식에서 결선투표제 도입등 새로운 시도가 계속적으로 연구 시도되어져야 할것이다.
이러한 제도의 변화와 더불어 필요한 것이 소위 정치적 권력을 잡은 엘리트들의 태도와 의식의 전환이다. 지금과 우리가 목도하는 바와 같이 대통령과 국회가 끝이없는 대립과 반목으로 가게된다면 이나라의 앞날은 민주주의 질의 향상이 아니라 남미형 국가로 전략할 기로에 서있게 된다. 이러한 기로에 벗어나는 해법은 대통령에 의한 설득의 정치가 대안이 될수 있다. 지난 측근비리 특검에 대한 국회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태도와 의식은 아닐것이다. 미국의 대통령은 야당뿐만 아니라 소속당의 의원들을 설득하는 데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간혹 회유하는 과정의 문제가 들어나 비위가 되는 영화도 가끔나오지 않는가? 그리고 이러한 설득의 성패가 바로 대통령직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기에 가능한것이다. 국회에 책임을 떠넘기고, 울어버리면서 대통령직을 못해먹겠다는 방말과 감정에 호소하는 정치는 미국에서는 애초에 찾아볼수 없는것이다.
국회와 대통령의 이중적 권력의 충돌과 대립의 또다른 해결책은 프랑스식 동거정부를 생각할수 있을것이다. 소위 이원집정부제라는 모티브는 바로 여기서 나온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과거 미테랑대통령은 야당인 우파가 의회를 장악했을 때, 헌법적으로 주어진 의회해산을 하기 보다는 야당의 리더에게 수상과 정부를 맡기고 동거정부라는 새로운 정치적 실험을 감행해서 정치적 대립과 대결을 화합과 경쟁으로 이끌어낸 경우가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소수정파 출신의 대통령이 의회와 끝없는 대결을 벌이면서 대립과 교착에 빠져 아무런 일을 하지 못하고 국가경제가 나락을 추락시킨 정치의 장이 바로 남미형 대통령제의 현주소입니다. 우리의 현실을 심각하게 목도하게 되면 바로 이 남미형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염려하는 식자들이 매우 많은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대선자금과 측근비리와 같이 과거의 관행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엄청난 단죄가 과연 이 나라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떠나서 최대한 빨리 끝이 나야 한다는 것이 국민들의 현심정일 것입니다. 불법적으로 거둬들인 대선자금을 당시에 중심에서 선 사람들은 솔직하게 국민앞에 밝히고 용서를 빌어야 할것이며, 당시의 책임자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죄를 받을것이 있으면 받아야 할것이다. 옹호를 할수 있다고 해서 가려질 문제가 아닌것이다. 나아가 노통은 측근들의 비리를 감싸지 말고 적극적으로 밝혀서 단죄를 하고 가신정치와 온정정치를 던져버려야 할것이다. 지금의 대선비자금과 대통령측근비리는 범죄행위로서 바라볼문제이지 이것을 계기로 정략적인 이용 가령 정계개편과 특정당 해체론까지 거론하는 것은 국민들의 온당한 민의가 아님을 스스로 되새겨야 할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대통령과 국회가 교착과 대립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의 장을 해결하는 해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대통령과 국회 야당 지도자들 사이에 소통과 대화의 정치가 먼저 시도되어져야 할것이다. 어제의 여야대표들의 모임은 특정 사안 ‘이라크파병’안에 대한 협조를 구하기 위한 자리였지만 ‘대선비자금’과 관련된 이야기가 무게의 중심을 갖는 사안이라 반복되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단초를 제공하는 좋은 계기가 된것으로 본다. 이러한 모임은 정례화 시키는 것이 향후 정국의 안정화에도 도움이 될 기초가 된다고 판단된다.
향후 여야당 모두는 대결의 장을 이끄는 강경파를 후퇴시키고,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상생정치를 내세우는 온건파들을 전면적으로 내세워 홍사덕 의원이 주창하는 21세기 새로운 정치의 패러다임인 화합형(중용형) 정치의 장을 이루는 단초를 세워야 할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체제의 정치를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바로 정치가 최선의 도덕적 선을 얻기 위한 도덕적 운동이 아니라 여러 정파들의 경쟁사이에서 현실적인 차선을 찾아가는 타협과 양보의 게임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홍사덕 의원의 정치적 인생과 역정은 바로 이러한 정치의 개념을 간파한 인물이기에 새로운 시대에는 기본을 알고 실천하는 정치인이 시대정신을 관통하는 흐름을 주도해 나가게 될것이며, 그것만이 바로 오늘날과 같은 반정치적 정치로부터 벗어나 우리민족의 역사가 새롭게 웅비하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첫댓글 오랜만에 올리는 선비의 생각..잘 읽었습니다..예전보다 글 쓰시는게 약간다르지만 여전히 안구건조증을 일으키게하는 긴~~~~~~~글 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가슴이 철렁내려앉는 일들이 하두 많이 일어나니까 대통령이 그만둔다고해도 이제는놀라지않습니다. 아마 대통령이 그걸 노리나 모르지만.... 중용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정치하는것같아 홍의원님이 안스럽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사회지도층이나, 국민들의 다양한 시각에 귀 기울이지 않는 노통의 고집스러움이 국정을 더 꼬이게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편으로는 해봅니다.
훌륭한 글..공감가는 글에 감동입니다.///...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