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牛山)과 우해(牛海)
입춘을 하루 앞둔 이월 첫째 금요일은 벗과 근교 산행을 나서기로 한 날이다. 지난해 여름 주남지 인근 학교에서 퇴직한 벗은 의령에 전원주택을 지어 귀촌을 결행했다. 시내의 아파트는 그대로 두고 시골과 도시를 오가면서 노후를 보낼 구상이다. 나와는 산행이나 트레킹을 가끔 다니는데 새해 정초 진전면 대정에서 발산재를 넘어 2호선 국도를 따라 반성 장터를 구경하고 왔더랬다.
이번에는 진동으로 나가 해안의 야트막한 우산을 오르기로 했다. 우산은 진동과 진전이 경계를 이룬 낮은 산으로 그곳 지명 유래의 연원이 된다. 진동은 예전에 진해현 현청이 있던 곳으로 여태 동헌이 남아 있다. 지금의 관아 터 이전에는 고현마을에 현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고현이라는 지명이 붙었고 그 곁에는 한국 전쟁 때 개교된 우산초등학교가 명맥을 이어온다.
조선 후기 천주교 전래 과정 신유사옥 당시 정약전은 흑산도로 귀양 갔고 김려는 다른 사건과 겹쳐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 갔다가 진해로 이배 되었다. 그가 유배살이했던 진해는 지금 고현 갯가 율티로 짐작된다. 동시대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남겼듯 김려도 진동 갯가에서 어류 도감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를 남겼다. 우해이어보는 남녘 해안 기이한 물고기에 관한 기록이다.
사실 김려는 부령 유배 시절 천주교 전래 초기 강이천 옥사 누명은 벗어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었음에도 그와 겹친 신유사옥에 다시 연루되어 귀가를 못 하고 진해로 이배되었다. 당시 함경도 부령은 변방이었지만 한양에서 온 유배객은 귀한 손님으로 대접받은 듯했다. 김려는 그 당시 한양에서 간 식자층이었기에 풍류도 알아 관기 연희와 사랑을 나눈 시첩 ‘사유악부’가 전해 온다.
벗과 우산 등정을 위해 마산역 광장에서 진전 둔덕으로 가는 76번 버스를 타고 시내를 벗어났다. 밤밭고개를 넘어간 버스는 동전터널을 지나 진동 환승장에 들렀다가 해병 전적비를 지난 암하에서 내렸다. 암하는 율티라고도 하는데 율치(栗峙)의 입천장소리가 율티였다. 우리말로 바꾸면 밤티고개나 밤고개가 될 테다. 지금은 볼 수 없으나 예전에는 밤나무가 많던 고개였지 싶었다.
고현의 뒷산이 우산(牛山)인데 그것을 따서 초등학교 이름도 우산이다. 김려가 남긴 어보에도 우해(牛海)가 붙게 되었다. 진동에서 진전 해안 갯가를 돌아가는 남파랑길 구간이라 간간이 트레킹을 나선 이가 지나긴 하나 전에는 한적한 갯가였다. 율티마을 회관 앞에는 우해이어보 탄생지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고현 포구에도 같은 내용이 소개되어 스토리텔링의 흥미를 더했다.
율티마을에서 조선소로 납품될 선박 구조물을 만드는 공장을 지나 개를 사육하는 농장에서 견공들이 와글거렸다. 얕은 연안은 밀물로 채워지는 즈음으로 바닷물이 무척 깨끗했다. 논밭이 없는 작은 포구 선두마을에 이르러 야트막한 고개로 올라 산불감시원으로부터 등산로를 안내받았다. 정상이 빤히 보인 산을 오르며 뒤를 돌아보니 섬이 점점이 뜬 바다는 호수를 연상하게 했다.
전주 이 씨 무덤가에서 벗이 가져온 담금주를 비우고 정상을 향해 올랐다. 운동기구가 설치된 정상에 ‘우산봉’이라는 표석이 나왔다. 쉼터에서 남겨두었던 담금주를 마저 비우고 고현 방향의 등산로를 택해 하산했다. 비탈길을 내려서니 장기마을이 먼저 나오고 해안을 돌아가니 그보다 더 큰 포구가 고현이었다. 고현은 미더덕과 오만둥이 양식으로 소득이 높은 어촌으로 알려졌다.
고현에도 김려의 우해이어보를 소개한 안내판이 있었다. 포구 바깥은 몇몇 어민들이 사는 송도와 양도가 쌍둥이처럼 나란히 떠 있었다. 연안을 따라간 산책로에서 물 재생 공장을 지나니 진동만은 광암 해수욕장으로 이어졌다. 덕곡천이 바다와 합류하는 기수에는 고방오리들이 떼 지어 놀았다. 진동 환승장 맞은편에서 칼국수로 점심을 들면서 맑은 술을 몇 잔 비우고 시내로 들어왔다. 23.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