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의 무리수
마오쩌둥(毛澤東)은 현대 사회주의 중국 건국을 이끌었던 큰 인물이다. 비록 한국전 참전을 결정함으로써 우리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커다란 충격과 아픔을 던진 인물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는 현대 중국의 건국과 그 이후의 전개 과정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쟁의 시각에서 볼 때 그에게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마오쩌둥은 정치적인 싸움에서는 대단한 성공을 거둔 사람이다. 그러나 피를 흘리는 싸움터의 큰 방략을 읽는 점에서는 어쩐지 정치적 성공에는 견주기 힘든 면모가 눈에 띈다. 그 역시 대규모의 싸움을 직접 이끌었던 전선 사령관은 아니었다.
그는 6.25전쟁에서 전선 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彭德懷)가 현장의 문제점 등을 거론했음에도 불구하고 1951년 ‘춘계 대공세’에 관한 지시를 내린다. 앞 회에서 적었던 대로 초반에 미군을 상대로 올린 승리에 도취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이는 대목이다. 그에 따라 잠시 휴식기를 가졌던 중공군은 2월 들어서 다시 공세에 나선다.
- 지평리 전투가 벌어진 지역
양평의 지평리는 야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의 지역이다. 이곳에서의 싸움은 한쪽의 다부진 전의(戰意), 다른 한쪽의 방심과 우연에 가까운 접근으로 이뤄졌다는 특징이 있다. 미군은 리지웨이가 전선에 부임한 이래 중공군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준비에 몰두했다. 그런 기회는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리지웨이의 지시에 따라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위력수색에 계속 나섰다. 그러나 중공군의 자취는 한강 이남 지역에서는 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면서 유엔군은 리지웨이의 지시에 따라 차츰 한강과 서울을 향해 다가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내가 이끌었던 국군 1사단도 미군 1군단에 여전히 속해 있으면서 한강 남안을 향해 조금씩 진출하고 있었다.
1월 초 휴식기에 접어들었던 중공군은 중국 최고 지도자인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다음 단계 공세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고, 차츰 중부지역의 전선에 출몰하면서 다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먼저 중부 전선이 출렁거렸다. 횡성에서 국군 8사단이 전멸의 상태로 다시 중공군에 무릎을 꿇었다. 이는 나중에 다시 서술할 대목이다.
횡성 싸움은 리지웨이 부임 후 다시 공세를 벌이려던 중공군이 작심하고 나선 작전이었다. 먼저 강력한 전투력의 미군들이 버티고 있던 서부전선을 피해 상대적으로 화력 등이 열세인 국군의 지역을 공략하려는 의도에서 펼쳐졌다. 그에 따라 중공군은 횡성의 국군 8사단과 평창의 국군 3사단을 먼저 공격했다. 8사단은 특히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 6·25전쟁 중 몇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의 치욕스런 패배를 기록하고 말았다.
상대의 상황에 둔감했던 중공군
그를 우회한 중공군이 다음 지역으로 노린 곳이 지평리였다. 먼저 국군이 지키는 중동부 전선에 커다란 구멍을 뚫은 뒤 그 병력을 서쪽으로 우회시켜 북쪽으로 진출한 미군을 공격한다는 작전 의도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지평리에서 상대를 잘못 골랐다. 우선 기본적인 체력이 매우 떨어진 상태의 중공군 전투력이 문제였고, 아울러 그들은 치밀하지 못한 적정(敵情) 탐색과 상황에 대한 오판 등의 실수를 저질렀다.
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13일에 벌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이틀 전인 2월11일 횡성에서 국군 8사단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중공군의 공격이 벌어진 4시간 뒤에 벌써 와해의 조짐을 보였고, 하루 만에 사단 전체가 무너지고 말았다. 병력의 3분의 1만 잃어도 그 부대는 전투력을 거의 상실한 것으로 간주된다. 기록에 따르면 8사단은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 철저하게 와해된 셈이다.
그렇게 전선을 몰아친 중공군이 다음에 다가선 곳이 바로 지평리였다. 그곳에는 평북 군우리에서 중공군에게 처참하게 당한 미 2사단의 23연대가 지키고 있었다. 폴 프리먼이라는 연대장이 이끄는 부대였다. 그는 군우리에서 운 좋게 중공군의 매복로를 우회했다. 그런 그가 몇 개월 뒤 자신의 사단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 중공군을 지평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의 연대 병력에 랄프 몽클라르라는 인물이 이끄는 프랑스 1개 대대가 가세했다. 그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여러 전장을 다녔던 직업 군인이었으며, 원래는 중장의 계급이었으나 한국에서의 전쟁을 위해 대대급의 파견 부대 지휘관 계급에 맞춰 중령으로 스스로 계급을 낮춰 한국에 온 사람이다.
- 지평리 전투에 나섰던 프랑스 대대 부대원들이 전투를 끝낸 뒤 휴식을 취하고 있던 무렵 찍은 사진. 프랑스군은 몽클라르 장군의 지휘로 미 2사단 23연대와 함께 압도적 병력의 중공군 공격을 막아냈다.
리지웨이는 아예 작정하고 지평리 싸움에 나섰다. 그는 불퇴전의 각오로 미군이 지닌 장점을 최대한 발휘했다. 우세한 공군력을 최대한 동원했고, 강력한 화력으로 전선을 지원했다. 그런 그의 강력한 지원으로 프리먼은 놀라울 정도의 전투력을 발휘한다.
- 지난 2010년 10월 2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 전투 프랑스군 참전용사 추모비 앞에서 지평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몽클/김충령 기자
현대전과 재래전의 차이
중공군 병력은 적어도 8개 연대였다. 일부 다른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4~5개 사단에 이르는 병력이라고 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초반부터 여러 측면에서 우를 범했다. 지평리를 지키는 상대의 병력 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상대가 지닌 전투력의 크기를 전혀 짐작하지 못한 상태였다. 중공군 공세의 지휘부는 나중에 개성과 판문점에서 열렸던 양측 휴전회담의 중공군 대표 덩화(鄧華)였다.
- B-26 경폭격기(미군)의 비행 장면. 미군은 중공군에게는 없는 공습 능력을 최대한 활용했다.
지평리 전투는 몇 가지 점에서 상징적이다. 전격적인 중공군 참전에 갈피를 잡지 못했던 미군이 체력과 정신력을 제대로 회복해 그 특유의 장점인 현대적 전술과 장비를 모두 동원했으며, 중공군은 승세에 취해 매복과 우회 및 기습의 전통적인 전술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공중에는 아주 많은 미군 공군기가 떴고, 155㎜의 강력한 화력을 지닌 미군의 포가 전선에 다가오는 중공군을 유기적으로 맹폭했다. 수적인 우세에 의존하던 중공군의 전법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첨단의 무기와 전술에다가 조직적으로 나서는 미군의 맹위는 시간이 갈수록 빛을 더했다.
- 미군에 붙잡힌 중공군 포로들의 모습
다른 하나는 전세(戰勢)의 전환점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중공군의 공세는 이로써 결정적으로 꺾였다. 이후에 중공군은 거듭 공격을 벌여오지만 지평리 전투를 전환점으로 예전과 같은 물밀 듯한 공세에 나설 수 없었다.
리지웨이의 강인한 성격과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강한 공격력, 군인으로서의 매서운 싸움 의지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런 지휘관의 후원을 받아 폴 프리만의 전투력이 역시 빛을 발했고, 몽클라르가 이끄는 프랑스 대대의 명성도 덩달아 높아졌다. 전세가 뒤집어진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이를 것이다. 그렇게 1951년 2월 중공군의 공세가 꺾이고 있었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