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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수필에 관하여 (수필문학 하계세미나 참가기)
신성범
수필을 쓸 때 항상 고민되는 일이 있다. 수필은 과연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일까? 수필에는 형식이 없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이는 결단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수필도 엄연한 문학 장르 중 하나다. 그냥 막 쓰는 글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필도 문학적으로 형상화 된 글이어야 한다.
이번 27회 수필문학 하계세미나에서는 이런 나의 고민을 풀어줄 수 있는 강연이 있었다. 이유식 수필가가 쓴 ‘가계수필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주제발표였다. 수필을 쓰는 사람으로서 흥미로운 주제였다. 수필은 소설과는 달리 사실에 기초한다. 사실적이어야만 독자로부터 감동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수필에도 소설처럼 픽션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내용이 다 픽션이라면 수필이라고 할 수 없다.
가계수필을 쓰면 가장 사실적인 수필이 될 수 있다. 내가 가장 알기 쉬운 내용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집안 이야기는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 쓸 수 없다. 족보가 점점 그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그 이유는 점점 핵가족화되고 있고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점점 자녀수가 줄어들고 있는 마당에 족보가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때 가계수필을 쓰게 되면 족보를 대체할 수 있다. 가계수필은 한 가족사로 기록이 될 수 있다.
개인 이야기를 쓰면 자서전이 될 수 있다. 자서전은 태어나서부터 현재까지 이야기를 서술식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서 가계수필은 상당히 부분적인 내용을 집약적으로 쓸 수 있다. 수필은 역사기록이 아니다. 아주 사소한 일반적인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훌륭한 수필이 될 수 있다. 수필은 소설처럼 긴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그 점 때문에 쉽게 읽을 수 있다. 짧은 글이지만 사건과 반전이 있기에 더욱 흥미롭다. 남이 겪지 않은 독특한 경험은 독자로부터 충분한 관심을 끌 수 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일을 잊을 수 없다. 당시 버스를 탔는데 전날 먹은 음식이 체해서 토를 하고 말았다.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어서 토가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내 앞에는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토사물이 그녀 치마에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나는 놀라서 어쩔 줄 몰랐고 젊은 여자도 놀라며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때 놀란 그녀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녀는 내게 뭐라고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린 학생이 속이 안 좋아서 토를 했다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만약 성질이 있는 사람을 만났더라면 크게 혼났을 게 틀림없다. 이런 사건은 아주 좋은 수필 소재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나만이 경험했던 독특한 일이다.
가계수필은 꾸밈이 없어야 한다. 마치 자기 집안 자랑을 하듯이 쓰면 독자로부터 거부감을 받을 수 있다.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기 때문에 집안에 좋은 점만 늘어놓을 수 있다. 그런 사실은 전혀 흥미롭지가 않다. 오히려 집안에 숨기고 싶은 점과 나쁜 점을 보여주면 더 흥미로운 수필이 될 수 있다.
내게는 안 좋은 유전 인자가 있다. 그것은 ‘적록색약’이라는 점이다. 초등학교 때 신체검사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반에서 나를 포함해서 단 두 명만이 적록색을 구분하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가 적록색약이고 어머니가 색맹 보인자이기 때문에 색약이 되었다. 그 색약 때문에 장교시험에도 떨어졌다. 색약이 있으면 장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사장교가 되기 위해서 영천까지 가서 시험에 응시했다. 체력검진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지만 신체검사에서 색약이 발견되어 마지막 단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은 색약자를 위한 콘텍트 렌즈가 개발되었다고 한다. 그 렌즈만 쓰면 정상인과 똑 같이 색 구분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당시 그 렌즈가 없었던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나는 미리 색약대조표를 보고 암기해서 테스트에 응했지만 기억했던 부분이 나오지 않아서 검사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우리 아이들은 색약이 아니다. 그것은 아내가 보인자가 아닌 정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계사는 좋은 수필 소재가 될 수 있다. 이번에 둘째가 육사시험에 응시했다. 만약 둘째가 색약이라면 응시 하나마나 신체검사에서 떨어질 게 뻔한 일이다. 정상이기 때문에 신체검사에 당당히 합격해서 육사생도가 되기를 기원해본다.
여동생에게 아들이 한 명 있는데 색약이라고 한다. 여동생 남편은 정상인데 왜 아들이 색약일까? 그것은 여동생이 보인자이기 때문이다. 그 소리를 듣고 색약인자가 대대로 내려간다는 사실에 마음이 씁쓸했다. 보인자는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정상인과 똑 같이 색 구분이 된다. 그렇지만 그 인자를 갖고 있기 때문에 후대에 나타날 확률이 높다. 형제간에도 내 바로 밑에 남동생은 정상이다. 그것은 나처럼 색약 인자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필문학 하계세미나에서 가계수필을 접하며 사소한 집안 이야기도 소중한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앞으로 이 분야가 상당히 전망이 밝은 수필이 되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