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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감람나무와 참 감람나무
로마서 11:13-24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롬 11:13-24 / 여러분도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방인 여러분을 도울 사도로 임명해 주셨습니다. 나는 이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가능한 한 자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14)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방인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원하게 하여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라도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15)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의 그 놀라운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버리심으로써 세상의 다른 민족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때는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6) 아브라함과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으니 그들의 자손도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나무 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도 거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7) 가령 올리브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그 가지 얼마를 잘라 내고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들을 접붙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는 올리브나무 뿌리에서 양분을 공급받지 않겠습니까? 올리브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는 여러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복을 함께 받고 있는 것입니다. 18) 그러나 여러분은 잘려져 나간 가지 대신에 접붙임을 받았다 해서 자만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귀중한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나무의 한 부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가지에 불과할 뿐 뿌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점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19)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내게 접붙일 자리를 마련해 주려고 저 가지들이 잘려져 나갔으니 나야말로 선한 사람이 분명하군.' 20)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참 올리브나무 가지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려 나간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며, 여러분이 접붙여진 것은 다만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니 자랑하기보다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 감사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21) 하나님께서는 원가지들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니 여러분을 아까워하실 리 없습니다. 22)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운 동시에 매우 준엄하신 분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매우 준엄하실지라도 꾸준히 자신만을 사랑하고 믿는 여러분에게는 큰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여러분도 잘려져 나가고 23)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시 접붙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능력을 지내고 계십니다. 24)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에 불과한 존재를 기쁘게 받아들여 좋은 나무에 접붙여 주셨는데 하물며 원가지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돌아온다면 언제든지 다시 접붙일 준비를 하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돌감람나무로 불리는 이방인이 그리스도를 믿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믿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근신할 것을 권고합니다.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13-16)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라는 직분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골육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큰 애정을 품고 있으며 그들이 이방인의 구원을 보고 시기하여서라도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배타적인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을 세상의 화목 즉, 이방인과의 화목을 위해 한시적으로 버리지만, 그들을 다시 받아들여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하실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16절에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뿌리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조상들을 가리키며 떡덩이와 가지는 유대민족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유대인들이 믿음의 자취를 이어받아 은혜 안에 들어올 것을 말합니다.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어(17-22) 참감람나무 원가지인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거부하여 참감람나무에서 꺾여지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돌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어 함께 그 뿌리의 진액을 받아 구원의 은혜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께서 원가지인 유대인들이 믿지 않아 심판을 받은 것처럼 접붙임 받은 이방인인 로마 성도들도 믿음에 머무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유대인을 향하여 자랑하기보다 겸손한 마음으로 근신하여 하나님의 인자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을 권고합니다.
원 가지도 접붙일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23-24) 하나님의 능력은 본성이 다른 돌감람나무 가지인 이방인들도 참감람나무에 접붙임 하는 것이 가능하십니다. 그렇기에 원가지인 유대인들을 다시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일 능력 또한 하나님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불신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적용: 하나님께서 이방인인 당신을 크신 능력으로 그리스도에게로 접붙임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신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십니까? 혹시 주변에 비신자 가운데 그리스도께로 접붙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복음을 전하지 않고 계신 분은 없습니까?
보화는 길거리에서 쉽게 발견되지 않고 깊은 광맥을 찾아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보화도 깊은 곳에 있는데 그 깊은 곳이 바로 ‘고난’입니다. 역사의 진리와 교훈이 발견된 때도 민족이 고난을 당한 때였습니다. 영국의 저술가 C.S.루이스는 말했습니다. “평안할 때 인간은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해 속삭이시는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보내시는 것이다. 고난은 ‘인간의 잠든 감각’을 깨우시는 하나님의 ‘큰소리’이다.”
호크마 주석
=====11:13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 '만큼'으로 번역된 '에프 호손'(* )은 일시적 제한의 의미가 아니라 자격(資格)을 말한다. 즉 자신의 신분이 이방인을 위한사도이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에고'(* , '나는')라는 대명사 앞에 '에이미'(* , '...이다')를 두어 자신의 자격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바울은 자기 인식을 명확히 가지고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임무를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임무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을 충만케 할 뿐만 아니라(25절)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하며(14절) 충만케 하려는(12-15절) 하나님의 구속 경륜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자기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이유는 그의 이방인에 대한 사역이 성공하면 할수록 이스라엘의 구원도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표현은 바울이 자신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겨 이방인 구원에 최선을 다한 것을 말한다(Godet).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의 사도직을 힘써 감당함으로써 이방인들의 구원이 유대인들을 시기나게 하여 몇몇 유대인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14절). 이렇게 자기의 직분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짐을 생각할 때에 더욱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Barmby).
=====11:14
내 골육 - 바울의 이 표현에는 따스함이 깃들어 있다(Harrison). 이러한 표현은 대개 혈통적인 형제를 가리키는 말이지만(창 29:14;삿 9:2;삼하 5:1), 본절에서는 완악해진 이스라엘 가운데 구원이 보장되어 있는 '남은 자'를 의미한다(Dunn). 바울은 비록 현재 상태로는 완악해 있으나, 장차 몇몇 이스라엘인이 구원에 동참할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시기케 하여 - '시기'가 흠정역(KJV)에는 '경쟁'(emulation)으로 번역되어 있고, 그 대상은 '온 백성'(10:19)으로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충만함을 보고 질투심과 어울러 경쟁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저희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 '얼마'라는 말속에서는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실족했으나, 바울은 그들 중에 얼마라도 구원받기를 원했음을 알 수 있다.
=====11:15
저희를 버리는 것 - '버림'에 대해 혹자는 12절의 실패와 연결해서 해석하며(Godet), 혹자는 하나님께서 추방한 것으로 이해하는데(Meyer, Murray, Shedd), 후자가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즉 '버리는'은 '받아들이는'(* , 프로슬렘프시스)과 대조가 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호의와 축복으로부터 거절당함과 그의 나라에서 박탈된 것을 말한다.
세상의 화목 - 이는 하나님과 사람의 화목을 의미한다(Kasemann). 혹자는 세상의 화목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게 하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복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Lenski). 어쨌든 화목은 원수된 처지에서 예수의 공로로 친선의 교통을 얻게 된 것을 의미한다(엡 2:13). 과거에는 하나님의 거절을 받았지만 이제는 그의 총애를 받게 된 것이다(Murray).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 - 본 구절은 어떤 뜻인지 확언하기가 다소 어려우나 유대인이 장차 회심하게 될 것을 부활에 비유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이스라엘로 인해 이방인들의 구원에 활기를 띠게 될 것이다.
=====11:16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데 헤 아파르케 하기아, 카이 토 퓌라마'(* , )가 70인역(민 15:20-21)에서는 '아파르켄 퓌라마토스'(* ,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처음 익은 곡식 가루는 떡덩이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혹자는 '처음 익은 곡식'을 이스라엘의 남은 자로 이해한다(Harrison). 그러나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성을 가진 족장이나 조상들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Murray). 반면에 '떡덩이'는 회심한 이스라엘 민족을 뜻한다. 이러한 상징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대표성을 의미한다. '처음 익은 곡식가루'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파르케'(* )는 '최초의 것'이라는 의미로 제사에 있어서 전체 큰 덩이에서 일부를 떼어 내어서 하나님께 바친 것이다. 이것은 민 15:17-21에 나오는 거제의 규례에서 온 것으로 떼어낸 부분이 원덩이를 대표한다는 개념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처음 익은 곡식인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한다. (2) 거룩성을 나타낸다. 첫열매가 전체 떡덩이를 거룩하게 한다는 것이다(Barmby). 결국 이스라엘과 믿는 자들을 대표하는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조상들이 거룩했으니 남은 그의 자손들도 거룩하다는 의미이다.
=====11:17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 돌감람나무는 야생 감람나무로서 (1) 원래부터 돌감람나무 종류가 있고, (2) 원래는 좋은 감람나무였으나 주인의 손질을 받지 못하고 자란 것이 있다. 통상적으로 감람나무를 접붙이는 방법은 돌감람나무에 참감람나무를 접붙이는 것인데, 본문에서는 이를 거꾸로 비유한다. 이처럼 참감람나무의 가지 일부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돌감람나무를 접붙였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이방인이 원가지가 아님을 명백히 한다. 아마도 바울은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의 뿌리에 연결되어 좋은 진액을 받아 품질이 낫게 변화되는 것만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Murray). 이러한 접붙임으로 원가지와는 전혀 무관하던 돌감람나무 이방인들이 유대인과 동일한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이다.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 이방 그리스도인도 이스라엘 족장이 누렸던 구속의 은혜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여기서 주요한 것은 진액이라기 보다는 그 뿌리이다. 즉 이스라엘과 무관했던 이방인이 참 이스라엘에 접붙임을 받은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12족장과 맺은 구원의 언약과 연관된다(Hendriksen, Lenski). '참감람나무'는 16절의 '처음 익은 곡식'과 통하는 것으로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모든 혜택의 근원(根源)을 상징한다. 이처럼 이방인과 유대인이 모두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11: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 유대인들의 일부가 구원의 길에서 벗어났다고해서 그들을 향해 우월감을 가질 만한 이유가 없다고 충고한다. 여기서의 '가지'는 꺾여진 가지로 원가지에서 벗어난 유대인을 말한다(Murray, 19, 20, 22, 24절). 이방 그리스도인은 이들에 대해 자긍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긍(* , 카타카우코)이란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높이며 자랑한다는 뜻이다. 당시 로마 교회의 구성원 중 일부가 영적 자만심을 가지고 동료 유대인 신자들을 업신여기는 일이 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원가지인 이스라엘에 대하여 자긍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자만심에 빠져 유대인이 원가지에서 꺾여졌다고 주장해도 자신들이 뿌리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가지들을 지탱시켜 주고 가지들에게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뿌리와도 같기 때문이다(Calvin). 여기서 강조된 '너'(* , 쉬)가 단수형으로 쓰여 마치 개인을 대상으로 구원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바울은 교회에서의 이방적 요소를 하나의 단위로 다루고 있는 것뿐이다. 오히려 문제의 핵심은 이스라엘 민족의 복음 거부로 인해 이방인 교회가 탁월한 위치에 있게 됨을 가리킨다(Harrison). 그러나 바울은 이것으로 인해 교만과 자만심을 갖게 하지 않도록 이방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구원의 기원을 생각하도록 한다.
=====11: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 여기서는 '꺾이운 가지'와 '접붙임을 받은 나'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Murray, Dunn).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예증은 이방인들을 교만케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려는 것이다(Calvin).
=====11:20
옳도다 - 이에 해당하는 '칼로스'(* )는 '바로 그렇다', '맞다'의 뜻으로 앞절의 내용을 시인하는 것이다. 구속사에 있어서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보장되었던 것이 이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유동적으로 적용됨으로 인한 구원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긴장을 보충 설명하려는 것이다(Dunn).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 유대인이 버림을 받은 것은 불신 때문이고, 이방인이 접붙임 받은 것은 믿음 때문이다. '믿지 아니하므로'(* , 테 아피스티아)와 '믿으므로'(* , 테 피스테이)가 모두 여격으로 쓰여져 이유, 수단, 원인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궁극적으로 믿음으로 인해 두 가지 상반되는 현상이 나타났을 뿐임을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은 불신으로(9:30-32;10:3, 16) 인하여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자리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이방인은 서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믿음 때문이다. '믿으므로'가 강조된 것은 견고히 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믿음인 것을 보여준다.
=====11: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 헬라어 본문에는 접속사 '가르'(* , '왜냐하면')가 있는데,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자긍하지 말아야 할 두번째 이유를 제시한다. '원 가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퓌신 클라돈'(* )은 본래 자연적으로 생성된 가지를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았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이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구원얻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스라엘'이어야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고, 원뿌리에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 흠정역(KJV)에는 '너도 남기지 아니하실까 유의하라'로 되어 있다. '유의하라'(take heed)는 표현은 공인 본문(TR)에 의거해서 번역했다. 공인본문에 의하면 이 구절 앞에 '메 포스'(* , '...하지 않을까')가 있다. 흠정역(KJV)은 이를 따라 20절의 '두려워 하라'와 연결시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것은 원 가지도 믿음을 떠났을 때 꺾어 버렸는데 접붙여진 가지가 믿음을 버렸을 때 남겨둘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11:22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 - 이는 하나님의 품성 안에 오묘하게 조화(調和)를 이루는 것이다. 실패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엄위를 경험하고 있지만, 복음에 반응하여 구원얻은 이방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누리고 있다(Harrison). '인자'의 헬라어 '크레스토테스'(* )는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말한다(2:4). 한편 이와 상반되는 개념으로 엄위가 제시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근거한 것이다(Murray).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 '넘어지는'의 헬라어 '페손타스'(* )는 부정과거로 쓰여 완전히 넘어져 믿음에서 타락했음을 의미한다(14:4;고전 10:12;히 4:11).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심판을 행할 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잘라버린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의 약속의 백성마저도 제하여 버리는 엄위의 하나님이시다.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 헬라어 본문에서는 접속사 '데'(* , '그러나')가 있어서 앞 문장과 연관되어 있다. 앞구절에서는 하나님의 엄위를 말하나 이제는 인자에 거할 것을 권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엄위하심은 불신앙으로 인해 계속되며,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의 반응으로 인해 더욱 풍성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11: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 본절에서 24절까지 이스라엘이 회복돌 가능성에 대하여 말한다. 전에 그들이 원 나무에서 잘리운 이유는 불신 때문이었으므로 이제 그들의 회복은 오직 믿음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것이 접붙임 입는 조건이다.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이방 그리스도인이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자비는 그 대상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변덕 때문이 아니고 인간의 응답으로 말미암은 것이다(Harrison).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 본 구절에서는 일반적인 원예 상식을 벗어난 특수한 경우를 언급하는데, 바로 꺾여진 가지를 다시 접붙인다는 것이다. 일단 꺾여진 가지는 재생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불가능한 예화를 사용하여 유대인의 회복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강조는 문자 구조상으로도 잘 나타나는데, '능력'에 해당하는 '뒤나토스'(* )가 문장 첫머리에 나온다. 구약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깁보르'(* )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세운 언약에 신실하다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느 9:32;사 10:21;렘 32:18).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나 이방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11: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 이방인이 구원얻게 된 사실을 감람나무 비유를 통해 요약 정리하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가능한 일임을 논증하고 있다. '원 돌감람나무'의 '원'과 '본성'의 헬라어 '퓌신'(* , '자연적인')은 전치사 '카타'(* , '...따라', '...로 부터')와 '파라'(* , '...거스려')와 함께 쓰여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대조는 접붙이는 과정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게 아니라, 다른 나무에서 잘라낸 가지를 성공적으로 접붙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Dunn). 따라서 이러한 재접목은 이스라엘 대신 이방인만을 은혜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즉 유대인도 이방인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 유대인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는 일종의 예정된 조화(pre-established harmony)라고 하는 본질적인 유사성(類似性)이 있다. 그래서 때가 되면 유대인들의 회복이 성취될 터인데 이는 이방인의 동참보다 쉬워질 것이다(Godet). '얼마나 더'의 헬라어 '포소말론'(* )은 문맥상 '얼마나 더 쉽겠는가'(How much more easily)라는 의미임이 확실하다. 하나님은 유대 민족이나 이방 민족이나 상관없이 당신의 뜻대로 행하시는 자를 자녀로 삼아주신다(요 6:40).
< 설 교 >
자긍치 말아야 할 이방인
로마서 11:13-18 / 민병석 목사
서 론 :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분에 대하여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갈2:8).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골육의 형제들인 유대인들에 대한 구원에 대하여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견딜 수 없이 마음에 분함을 안겨준 것은 그리스도안에 들어온 이방인들의 자긍이었습니다. 로마교회는 이방인 교회의 표본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불신적인 유대인들을 향하여 교만하고 자긍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구원의 뿌리를 밝히면서 자긍치 말아야 할 것을 경종 했습니다. 이 같은 경종은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 교회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에게 호감을 갖게 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 할 수 있게 한 힘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이 버림당함으로써 세상이 화목된 복음
바울은 15절에서 참으로 의미 있는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복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의 구약적인 섭리의 구분을 의미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I)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있어서 분명히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은 적어도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된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모든 육적인 자손이 구원의 혜택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고 하셨습니다(롬9:6-8). 물론 이 약속의 자녀가 신약시대에 와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들인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하고 있지만 복음이 이방에 전파되기 이전까지는 이 약속의 자녀가 이스라엘 중에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2) 그런데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저희를 버렸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구원의 은혜가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구약시대에 이미 그 수를 채우셨습니다. 이제는 그 구원의 은혜가 이방인에게 미쳐야 할 시기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구원의 하나님의 섭리이심을 바울은 밝혔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만의 선택이나 구원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일차적인 구원은 이스라엘에게로 돌아갈 것이지만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참 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정된 모든 백성들에게 적용하시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복음으로 나타나는 사실에 대하여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구약을 읽을 때 모세의 얼굴에 씌운 수건을 벗기지 않은 채 읽었기 때문에 율법에 숨겨져 있는 복음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구원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3) 바울은 이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세상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가져 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기 전에는 모든 세상이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상과 하나님과의 화평을 가져온 것입니다(엡2:16-18.)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심으로 언제나 공평하시며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균등하게 부여되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받아드림으로 소생하는 역사
바울은 이스라엘의 버림당함과 함께 그들이 다시 받아드려질 일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 드리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은 영원히 버려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장차 회복될 일에 대하여 19절 이하에서 여러 가지로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증거한 바로는 이스라엘의 구원은 두 가지 모습으로 보여줄 것입니다. 하나는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의 구원”입니다. 바울은 모든 이스라엘이 버림당한 것 같은 이제도 “그런즉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 11:5). 바울의 뜨거운 염원은 바로 이 같은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키게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롬11:14).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전체의 구원의 시기입니다. 바울은 이 시기가 반드시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이스라엘은 받아 드려질 때가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25절에서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 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 가 그리스도안에 들어와야 그 시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시기가 바로 예수님의 지림 때이며 이때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의 마지막 추수의 구원이 있을 것입니다(슥12:10).
3. 자긍하지 말라
하나님의 구원은 이처럼 공평하십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방인중에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의 택한 모든 백성들을 한 명도 상실함이 없이 모두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일과 그 순서에 있어서 이방인보다 이스라엘을 우위에 두었습니다.
(1)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적용한 이 말은 처음 익은 곡식가루의 떡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명령에 근거를 둔 것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제물을 드림으로 그들이 수확한 곡식 전체를 드린 것으로 간주했던 것입니다(신15:17-21). 제사하는 처음 곡식가루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처음 선택한 아브라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식이나 야곱 등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다분히 처음 익은 곡식 가루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이방인에게 보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우위를 둘 수 있습니다.
(2) 이방인은 꺾여진 가지에 접부침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꺾여졌다는 것은 그들의 불신을 말합니다. 사실인즉 유대인의 불신이 이방인에게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접부치기 위하여 그 가지를 꺾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방인들은 그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된 것입니다.
결 론
바울의 이 같은 경종은 바울이 자신의 골육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울분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생명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니라 반드시 회복될 날이 올 것임을 바라보고 이스라엘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아니했습니다.
우리를 접붙이신 하나님의 은혜
이수영 목사 / 롬 11:13-24
사도 바울은 본문 첫 절에서 말한 대로 비록 스스로를 “이방인의 사도”로 자처하며 자기의 그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동족인 유대인들에 대한 관심 또한 지극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동족에 대한 마음을 이미 로마서 9장과 10장에서 숨김없이 드러낸 바 있습니다. 9:1-3에서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습니다. 10:1-3에서는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했으며 10:16 상반절에서도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했습니다. 계속되는 11장에서는 이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실족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사도 바울의 생각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서서 이스라엘이 복음을 순종하지 않았다고 말한 사도 바울은 “그러면 이스라엘은 완전히 버림받은 것인가?” 하는 물음을 먼저 던집니다. 물론 바울이 준비하고 있었던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11:1에서 그는 쓰기를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전하시고 가르치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이 통째로 모두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 증거로서 자기 자신을 보라 합니다: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11:1)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의 사도 바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열심히 전하며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알고 계시던 자신의 택하신 백성을 통째로 버리신 것이 아니라는 증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통째로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로서 자기 자신을 제시한 사도 바울은 또 다른 예로서 선지자 엘리야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듭니다. 11:2-5입니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왕상19:10)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왕상19:18)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그 남은 자가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자마자 그 의미를 설명하기를 잊지 않습니다. 11:6을 봅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택하셨다는 것은 그 택하심을 받은 이들의 행위를 보시고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만일 행위를 보시고 선택하셨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말 뒤에 있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제시하신 “오직 믿음에 의한 의” 즉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구원을 거부하고 끝까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다가 그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한 데 반해, 남은 자들 즉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택하신 이들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이 선택받은 남은 자들 외의 모든 유대인들은 우둔하여져서 볼 것을 보지 못하고 들을 것을 듣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1:7-10을 봅니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사29:10; 신29:4) 함과 같으니라.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시69:22 이하) 하였느니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신분이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이 보장해주는 것인데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구원은 사람의 의지적 선택에 달린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달린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11:1에서 던졌던 물음과 같은 뜻의 물음을 다시 한 번 던집니다. 그리고 그 답 또한 여전히 “아니라”는 것입니다. 11:11 상반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비록 많은 유대인이 실족하기는 했지만 모든 유대인이 완전히 다 넘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러면 일부 유대인은 남겨놓으시며 다른 자들은 실족하게 내버려두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리고 그 신학적인 답을 내놓습니다: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1:11 하반절)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졌습니다. 즉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의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사도들로 하여금, 특히 사도 바울로 하여금 이방인에게로 향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열렬히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는 사실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래서 이스라엘도 결국에는 복음을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완전히 버림받은 백성이 되지 않을 것인데,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으로 실족한 것이지 전적이고 결정적으로 넘어진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리라는 자기의 숨은 믿음을 내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내심 이스라엘이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리라고 믿는 바울은 다시 묻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의 12절입니다: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이스라엘이 거부함으로써 복음이 이방인들에게서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면, 만일 이스라엘이 복음으로 충만해진다면 얼마나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믿는 이방인을 유대인이 시기하게 해서 결국은 자기 동족들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 자기가 열심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유라고 설명합니다. 그것이 사실은 유대인이 실족하게 내버려두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3-14절입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이렇게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의 실족의 긍정적 의미를 제시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궁극적 회복에 대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본문 15절을 봅니다: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은 것이 다른 백성으로 하여금 구원받는 결과 즉 하나님과 화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받아들이시는 것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에 의한 의에 매달리는 사람은 영적으로 다 죽은 자들인데 하나님께서 다시 받아들이시게 된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다른 하나의 뜻은, 복음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완악함 때문에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는 기쁜 일이 생겼다면,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것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만큼이나 더 큰 기쁨이 되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뜻은,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받아들이시는 것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 즉 부활의 때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때가 주님이 다시 오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종말이 되리라고 믿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회복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언급한 사도 바울은 그 근거를 제시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민15:20-21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 익은 곡식 가루로 떡을 만들 때 떡반죽에서 일부를 떼내어 과자를 만들어 하나님께 거제로 드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뿌리”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와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을 물려받은 족장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떡덩이”와 “가지”는 누구겠습니까?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현재의 모습은 하나님 보시기에 많이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그 근본은 거룩한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 속에는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이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유대인들을 일방적으로 멸시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권고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또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그들 스스로 이룬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고 교만하지 말아야 할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교만해지면 바로 이스라엘이 버림받은 것과 꼭 같이 버림받을 것이라는 준엄한 경고도 예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관심이 자기 동족으로부터 다시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에게로 갑자기 돌아오는 것을 봅니다. 본문 17절 이하를 봅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22절에서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이라 한 것은 “너희가 만일 계속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신뢰하면”이란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믿음을 갖게 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접붙임을 받은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의한 것임을 잊지 않고 늘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살면 하나님께서 항상 은혜로 함께하시리라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냉철하게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본래 돌감람나무에 붙은 가지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나무에 접붙여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인정된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온전히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찍혀지고 버려질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뿐 아니라 한국교회를 향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감람나무에 접붙여주신 하나님에 은혜에 겸손함과 신실함과 충성됨으로 응답하는 한국교회가 되어 하나님나라의 건강하고 튼튼한 가지로 영원히 남도록 모든 힘을 기울여 기도하며 날마다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믿음과 접붙임
로마서 11:29-24 / 민병석 목사
서 론 :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차이점을 참 감람나무와 돌 감람나무와의 경우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구원의 나무는 참 감람나무뿐입니다. 돌 감람나무는 구원의 여망이 전혀 없습니다.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이 구원을 얻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입니다.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 의 열매를 맺게 된 것은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참 감람나무의 얼마간의 가지를 꺾으시고 돌 감람나무 가지인 이방인들을 그 꺾이운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셨음을 명심하라고 바울은 모든 교회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원가지가 꺾인 이유
원가지로 비유된 이스라엘이 꺾이운 이유는 그들의 불 신앙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이 믿음으로 참 감람나タ?접붙임 받으므로 원 가지와 같이 열매를 맺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원 가지가 꺾이운 것은 이방인으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돌 감람나무와 참 감람나무의 예를 들어 버림받은 유대인과 구원을 얻게된 이방인의 경우를 비교하는 논리를 펴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바울의 논리를 들은 로마교회 교인들은 자연히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 아니냐? 유대인은 불 신앙으로 꺾인바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꺾인바 된 것인가? 물론 그들의 불 신앙이 이유이지만 그것은 또한 하나님이 영원한 구원섭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이 꺾이운 것은 이방인으로 하여금 그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려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논리에 질문할 로마교회 교인들의 물음을 스스로 질문하면서 또 이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고 했습니다.
(2) 그러면 참 감람나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바울이 비유로 들고 있는 참 감람나무란 하나님의 구원의 줄기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참 감람나무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해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브라함을 통한 언약으로 비로소 세상에 그 비밀을 들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나무의 뿌리는 아브라함으로 그 뿌리로부터 줄기가 뻗어나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구약시대에 있어서 이 나무는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은 이 나무에 전혀 관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이방인중에도 혹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겠지만 여기서 바울이 다루고 있는 문제는 그같은 개인적인 구원문제인 것이 아니라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포괄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참 감람나무의 뿌리가 되게 하시고 이스라엘로 그 줄기로 하신 일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실로 이방인들도 그 나무에 접붙이어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약속은 그의 혈통적인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요, 땅의 모든 족속과 연관된 것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 라”고 말했습니다(롬4:16).
(3) 열매를 맺는 나무는 오직 참 감람나무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사역을 때를 따라 역사 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을 기점으로 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방인에게 전파하게 하셨는데 이것이 복음입니다. 육신적으로 말하면 아브라함과 이방인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방인과 아브라함과 이어지게 되었으며 아브라함의 약속이 전체 이방인에게 미치게 된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갈3:29).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자손들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그때가 세례 요한의 때까지입니다. 그 후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하심에 참 감람나무의 원가지를 꺾으시고 그곳에 돌 감람나무 가지들을 접붙이심으로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2.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
바울은 이방인 교회들에게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고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들이 높은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할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잠정적으로 버리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 가지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우리들도 그들처럼 불신 중에 처하면 버린바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버리고 인간의 지식으로 의를 얻고자 하면 꺾이운 바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우리를 버리시는 일에 있어서 이스라엘처럼 아끼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우리가 높은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할 일은 우리는 돌 감람나무의 처지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참 감람나무의 뿌리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가지들도 아니었습니다. 아무 쓸모 없는 돌 감람나무였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서 아무짝에도 쓰지 못할 돌 감람나무 열매를 맺어온 가지였습니다. 이 가지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인바 된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에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전에 그 원 가지였던 이스라엘을 향하여 자긍하며 높은 마음을 품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3)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넘어지는 자에게는 엄위가 있으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나 사랑에는 언제나 공의가 있으며 엄위가 그것을 지탱해 주고 있습니다. 복음에 넘어지는 자에게는 사랑과 긍휼 대신에 엄위가 그를 다스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얻으려면 죄를 멀리하고 회개하는 생활을 철저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의 경우에 비취어 참 감람나무 가지였던 이스라엘이 불신에서 돌이킬 때 그들의 접붙임이 얼마나 확실하겠느냐고 강조하므로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바울의 소망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24절에서 “네가 원 돌 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 실인즉 우리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것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린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돌 감람나무에서 찍으시고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 주셨습니다. 하물며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있으며 하나님을 섬겨 온 이스라엘이 회개하는 날, 이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시는 일이야 하나님께 얼마나 쉬운 일이며 당연한 일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돌 감람나무에 속한 가지들로 하나님의 구원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아무 쓸모 없는 이 같은 존재를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 주심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두려움과 겸손으로 믿으라
롬 11장 13~24절 / 박조준목사
사도 바울이 로마서 9장, 10장 그리고 지난 시간 생각한 바 있는 11장 첫 부분까지 유대인의 구원에 대한 말씀을 하여 왔습니다. 그가 얼마나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사랑했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애타게 기도하고 힘썼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이와같은 열심과 간절한 마음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임할 것 같은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에 업신여김을 당하고 핍박을 받으면서까지 복음 전파를 위해서 애쓴 것입 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중에 복은 전파하는 자세를 이렇게 기록한 것 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 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 가 여러 보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고전 9장 19-23절)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아무쪼록 몇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하여 얼마나 간절하기 그리 고 안타깝게 애쓴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지금까지 유대인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논해 온 사도 바울은 이제 그 초점을 이방인에 게 돌립니다. 그렇다고 그가 자기의 백성에 대해서 결코 잊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실상 그는 그의 목적 중 하나가 유대인들이 이방 사람들도 예수 믿어 구원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들로 하여금 질투하게 하자는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원하게끔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기독교가 우리 실생활 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전장에서 부상당한 군 인 하나가 있었습니다. 군목이 그에게 가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그를 도와주었습니 다. 다른 군인들이 다 후퇴할 때까지 그 부상병을 간호하기 위해서 남아 있었습니다. 뜨거운 대 낮이 되었을 때 군목은 자기도 목이 마르지만 자기 물통에 있는 물을 따라 목말라 하는 부상병 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밤이 되어 차가운 서리가 내리자 그 군목은 자기 코오트로 부상병을 덮어 주었습니다. 그래도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추워하는 부상병에게 그를 춥지 않게 하려고 자기 옷을 더 벗어서 폭 싸 주었습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부상병이 나중에 목사님, 목사님이 믿으시는 기독교가 무엇인지 저에게 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목사님이 믿으시는 그 기독교를 믿고 싶습니다. 무엇이 이 부상병으로 하여금 이런 마음을 갖게 하였습니까? 그것은 행동하는 기독교였습니 다.
사도 바울의 소망과 기도와 포부는 언젠가는 유대인이 기독교를 갖기 원하게 될 날이 있으 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돌아온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래서 지금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거절하여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것이 절대적이고 전적인 그리고 영원히 버림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두 가지 예를 든 것 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돌아오게 된다면 그것은 마치 죽음에서부터 재생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십시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 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이 말씀은 구약 민수기 15장 19-21절의 인용입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땅의 양식을 먹을 때에 여호와께 거제를 드리되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을 거제로 타 작 마당의 거제같이 들어드리라.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가루 떡을 대대에 여호와께 거제로 드릴 지니라 하였습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루 반죽을 했을 때 그 첫 부분을 하나님께 바쳐야만 했습 니다. 그렇게 되면 반죽 덩어리 전부가 거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한 입 한 입 먹을 때마다 따로 따로 하나님께 바쳐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첫 부분을 드리는 것이 전체를 거룩하게 합니 다. 이 첫 뭉치는 이스라엘의 조상들, 특히 아브라함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조 상이 거룩했으니까 그 남은 자손들도 거룩하다는 논리입니다.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리라. 이것도 곡식 가루 비유와 비슷한 비유입니다. 뿌리는 조 상들, 가지는 그 자손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장소에 거룩한 나무를 심는 것 은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어린 나무가 심겨졌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그 후에 이 나무에서 나오는 모든 가지는 모두가 하나님께 거룩한 것입니다. 매 가지마다 하나님께 따로 따로 바칠 필요는 없습니 다. 다만 어린 나무를 드림으로써 나무 전체가 거룩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고 하나님께 바쳐 진바 되었습니다. 그들로부터 전 민족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떡가루 반죽 한 줌이 반죽 전체를 거룩하게 한 것같이 그리고 어린 나무의 봉헌이 나무 전체를 거룩하게 한 것같이 민족의 창시자들의 특별한 봉헌이 민족 전체를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거룩하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중에 남은 자들은 그들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닙 니다. 그들은 그들 조상으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과거의 영 적인 자본에 의해서 삽니다. 우리는 누구도 스스로 된 자는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우리의 조 상이 만들어 놓은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혹시 하나님을 멀리 떠나 헤매이고 우리 유전을 부끄럽게 하였을지라도 우리는 만들어 준 선한 것과 성실성에서 우리 자신을 완전히 갈라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유대인들은 특히 조상 자랑에 사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상 자 랑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그것은 현재 자기 자신이 형편없다 는 것을 자인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은 비유 하나를 더 사용합니다. 본문 17절 이하를 보십시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 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 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음으 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 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구약의 선지자들은 여러번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감람나무로 비유했었습니다. 이 감람나 무는 지중해 지역에서는 가장 흔하고 가장 유용한 나무였기 때문에 그런 예를 든 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해하는데 퍽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가량 예레미야 11장 16절에 나 여호와가 그 이름을 일컬어 좋은 행실 맺는 아름다운 감람나무 라 하였습니다. 호세아 14장 6절에는 그 가지는 퍼지면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 같고 하였습니다. 원래 감람나무는 유대인, 그 뿌리는 유대인의 조상, 꺾이운 가지는 불신 유대인들, 접붙인 돌 감람 나뭇가지는 믿게 된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방 사람들이 이 탈락한 유대인의 위치에서 유대인의 조상을 믿음의 조상 으로 삼아 그 토대에서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내용을 따지면 문제가 없지 아니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방 사람을 참 감람나무인 이스라엘에 접붙임을 받은 돌 감람나무의 가지로 생각했습니다. 원예술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이 이 비유는 사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접목법은 야생 의 뿌리에다가 좋은 가지를 붙여 좋은 나무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가령 감나무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돌감나무 뿌리에다가 좋은 감나무 가지를 접붙이면 좋은 감나무 가지가 자라서 좋은 감을 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에 대하여 빈센트같은 사람은 바울이 접목하는 법을 몰라서 이런 가벼운 과오 를 범함 것이 아닌가 합니다. 혹은 고데같은 분은 그 당시 이와같은 접목법이 실제로 있어서 젊 은 야생목의 가지를 고목에 접붙임으로 그 노목을 소생시킨데서 온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감람나무는 성지에 흔한 나무로서 사도 바울이 그 접목의 상식이 없을리 만무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런 과정을 무시하고 자기의 소론을 따라 이와 같이 해석하였다는 해석 이 타당하게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접목의 기술이 아니라 그의 목적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바울 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매우 명확합니다. 이방 사람들은 사막과 광야에 있었고 들장미 속에 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로 그들은 참 감람나무의 부유함과 비옥함에 접붙임을 입 은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8절에 뭐랬어요? 그 가지들은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방인들은 유대인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방 사 람들이 유대인들에 대해서 경멸의 태도를 가지게 되기가 쉽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무리를 해가면서도 이런 비유를 들게 된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가지가 뿌리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가지를 유지하기 때문에 이방인은 자랑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찰스 호즈같은 분은 유대인이 이방인의 축복의 그릇이었지 이방인이 유대인의 축복의 그릇은 아니었다 고 하였습니다. 이방인의 믿음은 유대인의 조상의 믿음을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격히 따지면 가 지도 뿌리를 보존합니다. 가지가 있어야 뿌리가 삽니다. 가지가 전혀 없는 나무 뿌리는 결국은 죽고 맙니다. 여기서도 사도 바울은 이런 깊은 곳까지를 따지지 않고 대체의 진리로써 자기의 소론을 밝히고 있습니다. 접붙임을 받은 가지 그러니까 이방 사람이 뿌리, 유대인의 조상에 대해서 자긍할 수 없는 것 은 분명합니다. 꺾이운 가지들,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자긍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 것은 접붙이는 마당에서 사실입니다. 그러나 접붙임을 받는 가지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큰 착각 일 것입니다. 물론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이방 사람 너는 믿음으로 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인한 것은 그들의 논리였지 자긍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이 꺾이운 것도 이방인이 접붙여진 것도 모두 믿음의 표준에서 였습니다. 더구나 믿음 은 본래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자기가 벌어서 한 것처럼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 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 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면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도 자긍할 아무 런 조건이 없는 것입니다. 그저 감사하고 감격스러울 것 뿐입니다.
절대로 높은데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조금도 교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조금 잘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믿지 않는 사람은 마귀 자식이라고 해서 경멸하기 쉬운 데 이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의 것을 자랑할 데가 무엇 있습니까? 바울이 말한 것처럼 자랑하려면 우리의 약한 것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세계에는 겸손과 감사 뿐이요 거기에 진정한 확신이 깃들이는 법입니다. 하 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리라. 원문에는 (왜냐하면)으로 시작하여 이방인 신자가 자긍해서는 자긍해서는 안될 이유를 설명하 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 가지, 생래의 가지도 아끼지 아니하셨는데 접붙여진 가지는 원 가지 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논리입니다. 원 가지도 믿음을 떠났을 때 꺾였다면 접붙여진 가 지가 믿음을 버리면 꺾여 버리고 말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여기 자긍한다는 말을 썼는데 이 말은 진정한 믿음을 버리는 징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사울 왕을 보세요. 그가 처음에는 얼마나 겸손했습니까? 그러나 그에게 교만한 생각이 들어갈 때 하나님의 신이 떠나게 되었고 그 마지막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습니까? 교만은 멸망의 선봉 입니다. 반면에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 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제일 먼저 가르치는 최고의 덕은 겸손입니다. 옛날부터 우리 동양에서는 세 가지 덕을 가르쳤는데 지(知), 인(仁), 용(勇) 다시 말하면 지 혜롭고, 어질고, 용감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서양에서는 특히 헬라의 윤리 사상을 보면 여기에다 절제를 더해서 네 가지 덕을 말했습니다. 동양이나 서양의 윤리 사상에서는 겸손을 그렇게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제일 먼저 겸손의 덕을 가장 귀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것 뿐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겸손의 본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 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 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그의 몸으로 겸손을 보여 주셨습니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 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르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고 할 것이면 우리는 주 님의 겸손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는 주님의 겸손을 배워야겠습니 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십니다. 대적하십니다. 전에 파사 나라의 재상 하만이 교만해서 유대 사람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인사 잘 안한다고 그 사람과 그 가족, 나아가서는 유대인 전부를 학살하려는 음모를 세웠습니다. 그러다가 그 마지막 이 어떻게 된 사실을 여러분이 아십니다. 교만한 자의 마지막이 그렇게 됩니다. 구약 다니엘서를 보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교만해서 자기 궁전 높은 꼭대기에 올라가서 자기 궁전을 내려다보며 내 능력과 내 지혜로 이 모든 성을 건설하였다 고 호언장담하며 교만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 말을 한 지 얼마 안되어서 느부갓네살 왕이 정신이 나가서 미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 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이 들에 나가서 소처럼 풀을 먹고 그 머리털이 독수리 머리털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전에 벨사살 왕은 얼마나 교만했었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쓰던 거룩한 기명을 내다가 술 을 부어 마셨습니다. 천여 명의 고관 대작들을 불러다가 연회를 하며 먹고 마셨습니다. 그날 저 녁 메데와 파사의 연합군이 쳐들어와 벨사살 왕은 죽고 온 나라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 교만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신앙의 교만이 제일 위험합니다. 이거 무서운 죄입니다. 구약 이사야 14장 12절 이하에 보면 계명성이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겠다 하는 말이 다섯 번 나옵니다.이것이 영적 교만입니다. 영적인 교만은 우주의 모든 죄 가운데 첫 번째 죄입니다. 영적인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보다도 자기 자신의 덕을 더 내세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 판을 면치 못합니다. 바리새인의 교만을 하나님은 물리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의 롭게 생각하였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보면 모두가 하나님을 잘못 섬기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거 매우 위험합니다. 말하자면 신앙의 교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신앙의 교만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는데 접붙인 가지 정도를 아끼시겠습니까? 교 만하면, 자긍하면 잘라버립니다.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서 겸손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사람이란 본래가 약하기 때문에 조금 무엇이 남보다 나은 것 같으면 교만해지가 쉽습니다. 조 심해야 합니다. 22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하나님은 인자와 엄위의 양면을 가지시고 믿음 을 떠난 유대인에게는 엄위하시고 믿음으로 사는 이방 사람에게는 인자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구원의 확실성이란 개인의 신앙을 두고 하는 말이고 누구나 믿음을 떠나면 유대인처럼 버림을 당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벧후 1장 10-11절) 하였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완성하라. 히브리서 3장 12절 이하에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 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 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하였습니다. 우리 신앙 생활은 매일 매일 힘써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만이 약속의 땅을 차지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하자면 돌 감람나무와 같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 셨으니 얼마나 감사, 감격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리고 겸손한 자세로 신앙 생활 바로 해서 약속의 땅을 다 차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힘쓰십시다. 애굽 떠난 것, 장망성 떠난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뒤를 돌아도 보지 말고 시온성을 향해서 전진해야 합니다. 이 시간 이 일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십시다. 곁길로 나가지 않게, 교만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롬 11장 13~36절 / 조상호목사
EX) 지난 금요일 저녁 시드니에서 27회 올림픽이 시작되었습니다. 200여 나라에서 참가한 사상 최대 규모의 올림픽입니다. 우리 한국도 3백수십명의 많은 선수를 파견하여 종합 10위를 목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올림픽경기에 들어가기 전에 한국선수단으로부터 불행한 소식이 들렸습니다. 몇몇 선수들이 본 경기에 임하기도 전에 연습경기를 하다가, 혹은 훈련을 하다가 부상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뛰어난 수비수라고 불리우는 축구의 홍명보선수는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홍 선수는 일본 프로 축구에서 활약하는 선수로서, 조국의 명예를 위해 일본에서의 활동을 잠시 멈추고 한국 올림픽 축구팀에 합류한 선수였는데, 부상을 당해 중도에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허정무 축구감독은 홍명보선수 대신에 급히 한국으로부터 강철이라는 선수를 불러들이어 홍선수의 자리를 메꾸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야구팀에도 마찬가지로 부상선수가 생겼습니다. 송지만이라는 선수가 이탈리아팀과 연습경기 도중에 발목의 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갑자기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송선수는 그 동안 무명에 가까운 선수였는데, 올해 한국 프로야구에 샛별같이 등장한 선수입니다. 홈런, 안타, 타점, 장타율, 출루율 등 거의 모든 공격부분에서 10위안에 들어있는 참으로 성실하고 유능한 선수였는데 이 송지만 선수도 중도에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김응용 야구감독은 송지만선수 대신에 이승호라는 19세의 젊은 선수를 급하게 불러들여 선수보강을 마쳤습니다.
아무튼지 올림픽이라는 큰 경기를 앞두고 이러한 불상사가 일어나서 마음은 아프지만, 새로이 교체되어 대표팀에 합류한 선수들이 잘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스포츠의 감독들은 선수들을 선발할 때, 대표선수 뿐 아니라, 예비선수까지도 미리 선발합니다. 이것을 상비군 제도라고 합니다. 감독들은 이 상비군제도를 적절하게 활용합니다. 선발한 대표선수에게 부상이나 컨디션 등의 문제가 생기면, 상비군에 있는 예비 선수로 대체하여 경기를 꾸려갑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와 유사한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도구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보하는 제사장나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온 인류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복음을 나누어줄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교만해져서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스포츠 감독이 대표선수를 교체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맡기신 역할과 사명을 취소하고 그 잔을 옮기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을 사용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원을 포기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느 누구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요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이스라엘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나 사명의 잔은 다른 사람에게 옮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에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그들 이스라엘 대신에, 이방인인 우리들에게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복음이 이방사람에게 전해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사람들에게 전해진 복음이 다시 우회하여 이스라엘로 전해지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시기 나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이 받아야할 놀라운 축복을 이방인들이 대신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사도 바울은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의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참감람나무의 가지가 꺽였습니다. 그 꺽여진 자리에 돌감람나무를 접붙였습니다. 그랬더니 참감람나무의 뿌리를 통해서 영양분과 수액을 돌감람나무의 가지가 받게 되었습니다. 또 19절과 20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 여기에서 참감람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돌감람나무는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참감람나무인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그 가지를 꺽었습니다. 그 대신에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을 그 자리에 접붙였습니다. 그리고 뿌리에서 빨아올린 양분을 받는 것처럼, 접붙인바 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고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축복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1) 하나님의 지혜는 측량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세계 역사의 긴 안목으로 볼 때, 결코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방인의 구원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전세계의 열방들에게 복음이 증거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감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33절을 보겠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방법을 통해서 이방인들까지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을 통해서 다시 이스라엘에게 복음이 증거되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경험과 생각과 상식을 초월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러한 사실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서 120명의 제자들은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에게 큰 핍박이 찾아왔습니다. 잡아 가두고 돌로 쳐죽이고 목베는 극심한 핍박이 났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행8:1)을 보겠습니다. "..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예수의 복음을 믿고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이 복음을 들고 사방팔방으로 퍼지지 않자,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 즉 핍박이라는 방법으로 그들을 동서남북으로 흩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또 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바울의 사역이 이제 끝장났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빌:12,13)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들어가게 됨으로 온 시위대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돌감람나무인 우리 이방인들을 먼저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돌감람나무인 우리들을 통해서 참감람나무인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경로입니다. 원래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그리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전해졌고, 결국 주후 1세기에 이르러 당시 세계의 중심지로 일컬음을 받던 로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복음은 게르만 민족과 앵글로색슨 민족에게 전해져 복음이 전 유럽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102명의 청교도들에 의해 영국에서 미국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신실한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 일본, 중국 등지에 전해졌습니다. 이 복음은 이제 서쪽으로, 서쪽으로 향하면서 이슬람권을 거쳐 이제 마지막 남은 이스라엘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26절을 보겠습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할렐루야! 여러분! 하나님의 지혜는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부요합니다. 감히 우리의 지혜로 하나님을 판단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엄청난 용량의 슈퍼컴퓨터를 만든다해도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2) 우리는 자긍하지 말아야
그러므로 우리는 자긍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보통 처음에 예수님을 믿을 때는 은혜로 받아들입니다. '내가 뭐 잘난것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구원받게 되었지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그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립니다. 구원받았다고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나도 처음에는 다 그랬어. 그런데 시간이 흘러봐! 별 것 없어. 그렇게 예수 믿는다고 요란 떨지마!'하고 교만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대단히 위험합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여러분!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의 진액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 돌감람나무 자신의 힘으로 되었습니까? 스스로 똑똑해서 참감람나무의 영양분과 수액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참감람나무의 가지가 꺾여짐으로 돌감람나무가 접붙여졌습니다. 그리고 돌감람나무는 접붙임을 받은 참감람나무의 뿌리로부터 올라오는 수액을 받게 된 것입니다. 돌감람나무 스스로는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복음을 믿게 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 뿌리가 있습니다.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들은 누군가를 통해서 복음을 받았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고, 누군가 나의 구원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 주었고, 누군가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믿음생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기독교 역사상, 성 어거스틴 만큼 자기 자신의 내면세계를 잘 분석한 사람도 드문데, 그는 기독교의 핵심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싫어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EX) 어느 날 흰 수탉과 검정 수탉 두 마리가 열심히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마리의 암탉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놓고 하는 싸움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혈투를 했습니다. 말리는 사람도 없는 터라 그 두 마리 닭은 날개를 퍼덕이며 날카로운 부리로 상대방을 쪼아서 서로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흰 닭이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툇마루 밑으로 슬금슬금 도망쳤습니다. 싸움에서 이 검정 수탉은 우쭐해졌습니다. 그는 울타리 위로 올라가서 목청을 높여 크게 외쳤습니다. "어때? 누구든지 나를 이길 수는 없을 거다. 앞으로 내 암탉들에게 손을 대면 그냥 두지 않을 테야. 너도 다시 그 툇마루 밑에서 나오면 혼을 내줄 거야." 바로 그때였습니다. 가까운 산으로부터 한 마리의 매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내려왔습니다. "앗" 검정 수탉은 소리쳤으나 피할 틈이 없었습니다. 매는 검정 닭을 발톱으로 단단히 움켜쥐고 쏜살같이 올라갔습니다. "싸움에 이겼다고 뽐내지마..." 매는 중얼거리며 하늘 높이 올라갔습니다. 툇마루 밑에서 나온 흰 수탉은 그 꼴을 보고 암탉들에게 눈웃음을 보내며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습니다.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지 모르는 법이지."
여러분! 우리는 이 우화를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교만과 거만을 싫어하십니다(잠8:13). 하나님께서는 원가지인 이스라엘이 교만하여 복음을 거절하자, 그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찍어버리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스라엘처럼 교만하여 복음을 거절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21절과 22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분들은 겸손하게 복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 길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찍히지 않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미 구원받은 분들은 구원을 주신 주님 앞에 겸손하십시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만유의 주재되시며 역사의 주권자되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3) 하나님을 찬양하라
우리는 역사를 영어로 History라고 합니다. 그런데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이 History는 His와 Story 두 개의 단어가 결합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역사는 그의 이야기, 즉 하나님의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시작하시고, 역사를 주장하시며, 역사를 종결지으십니다. 믿으십니까?
36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이 36절을 영어로 읽어보시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세 개의 전치사가 나옵니다. 첫 번째는 '주에게서(From Him)'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복음도, 구원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둘째로 '주로 말미암고(Through Him)'입니다. 이 세상의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하에 움직입니다. 복은 주님을 통해서 옵니다.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세 번째 만물이'주에게로(To Him)' 돌아갑니다. 세상의 종국은 주님께로 입니다. 모든 만물은 주님에게로 돌아갑니다. 믿는 사람은 주님께서 준비하신 슬픔도 없고, 애곡도 없는 천국에 갑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주님이 준비하신 영원히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이 세가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만물의 생성, 발전, 종국을 주권적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사실을 과거에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제가 어디에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 세상의 주관자이신 주님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36절의 '만물'이라는 단어에 저의 이름을 넣어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상호는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할렐루야!
여러분! 여러분은 '만물'이라는 단어에 여러분들의 이름을 집어넣어 고백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한번 다같이 심령으로 고백하겠습니다. "OOO는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할렐루야!"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깨달음 앞에 감격하며 주님을 찬양함으로 오늘 11장 말씀을 마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 되시는 주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 이러한 사도 바울의 찬양과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찬양과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것 대신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세세토록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자랑할 수 없는 이방인들
롬 11장 17~34절 / 하용조목사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가 개인의 구원, 이방인의 구원에 관한 것이라면 9장부터 11장까지는 이스라엘의 구원, 곧 인류의 구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강원도만한 크기의 땅에 인구 5백40만~50만 정도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많은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군사적으로 이스라엘과 PLO의 대립관계 같은 식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교회도 중국이나 스리랑카에 선교사를 보내는 것처럼 그저 이스라엘을 선교대상국가 중 하나로 봅니다.
하지만 성경적인 견해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모든 이방세계를 하나로 보고 이스라엘을 하나로 봅니다. 모든 이방세계가 구원받고,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통하여 하나님의 우주적인 영원한 계획이 완성되는 것, 이것이 성경적인 구원론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구원이 인류의 구원이요 구원의 완성이라고 교회는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구원의 뿌리
먼저 구원의 뿌리에 대 해서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구원은 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먼저 나를 택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전에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셔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에는 감격과 감사가 있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내가 원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때, 내가 받을 자격이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심판받아야 할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천국백성으로 만들어주셨다는 이 감격스러운 사실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감격으로, 이 감사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런 감격과 감사대신에 원망, 불평, 불순종, 교만, 종교적 기득권을 주장했기 때문에 선택받은 백성의 축복을 잃어버리고 실패를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이방인들의 구원의 뿌리는 이스라엘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실패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이방인들은 구원받은 것을 감격해 하면서, 하나님께 받은 구원에 감격해 하면서, 구원의 뿌리를 생각하면서 자만하거나 자긍해서는 안됩니다.
요즘 우리 이방인 크리스천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방인들에게 교회도 많아지고, 믿는 사람도 많아지니까 거꾸로 우리가 이스라엘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이방인처럼 느껴져서 우리는 영적으로 자고하고 자만해 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은 결코 자랑할 수 없다. 결코 교만해서는 안된다. 너희의 축복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잘 살펴 보아라.라고 경고하십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로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16절을 보시겠습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여러분, 떡덩이가 거룩해서 가루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첫 열매 즉 가루가 거룩하기 때문에 떡덩이가 거룩한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이스라엘이 거룩하기 때문에 이방인이 거룩한 것입니다.
꺾여진 가지, 접붙여진 가지
좀더 구체적인 비유를 17절에서 보게됩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이 비유는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의 비유입니다. 참감람나무의 가지가 꺾여져서 돌감람나무가 접붙임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꺾여짐이 이방인의 접붙임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꺾여짐이 없었다면 이방인의 접붙임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방인들은 시간이 갈수록 자신들이 잘났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믿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은혜로 믿습니다. 하지만 한 3년 정도 지나면 율법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처음믿으면 감사와 기쁨이 있지만, 오래 지나면 이스라엘처럼 강퍅해 집니다. 교만해지고 감격을 잃어버립니다.
17절은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서 참감람나무의 진액을 받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돌감람나무의 뿌리는 어디입니까? 바로 참감람나무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뿌리입니다. 참감람나무가 부러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돌감람나무가 은혜를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참감람나무가 꺾어진 것은 돌감람나무에게는 은혜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만하거나 교만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18절에서 가지의 비유를 듭니다. 18절을 보시겠습니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찌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가지가 우선이 아닙니다. 뿌리가 우선입니다. 뿌리가 있기 때문에 가지가 있고, 가지가 있기 때문에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가지가 거룩하기 때문에 뿌리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뿌리가 거룩하기 때문에 가지가 거룩한 것입니다.
여기서 뿌리는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그리고 「가지」는 이스라엘의 실패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된 모든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지는 그 사람의 영적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영적태도에 구원에 대한 감격과 감사와 기쁨이 배여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오만하고, 방자하고, 겸손이 없고, 기쁨도 없다면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자랑한다면 이 사람이 받은 구원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태도는 항상 겸손하고, 눈물이 있고, 온유하며, 감격이 있습니다. 이 감격은 조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서 전할 정도인 것입니다.
이방인 사도의 가슴앓이
로마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 민족들을 향해서 눈물을 흘립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지만 사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믿는 사람을 핍박하다가 예수를 알게 되었고, 그 후 사도 바울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가게되었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 복음을 거부하게 하시고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불러주셨구나!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그는 복음을 부인한 자기 동족을 생각했습니다. 가슴앓이가 있었는데 바울의 이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기쁜 일이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아, 이스라엘아하셨던 그 마음을 하나님은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지난 2천년 동안의 기독교 역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2천년의 기독교 역사란 간단합니다. 모든 이방인이 구원받는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이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빌립보로, 아덴으로, 고린도로, 에베소로, 그리고 그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를 뒤집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로마가 어떻게 기독교국가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로마는 전 유럽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유럽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우주적인 것이고 전 인류가 받아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카톨릭의 핍박과 학살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유래없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미국은 그 후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 열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싶었던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전세계의 복음화가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미국이 복음을 받고 나서부터입니다. 이 미국을 통하여 전 세계로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로, 남미로, 아시아로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1백년 전에 한국이 복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몇 번이고 말씀드리지만, 우리나라가 이스라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성경과 무슨관계가 있습니까? 우리는 무당의 자식이요, 역사적으로 단군을 믿고 산 민족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 서 선교사를 보내셔서 이 땅이 눈을 뜨게 하셨고, 세계에서 유래없는 기독교 강국을 만드셨습니다. 이 짧은 시간 동안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을 주셔서 기독교 지성인들을 만드시고,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제사장 나라로 만들어주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이렇게 전 세계가 사도행전 1장 8절 이후로 복을 받았지만, 그러나 이 축복의 발상지였던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메시야를 거부하고 영적 빈곤상태에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고, 복을 받았습니다. 전 유럽, 전 미국,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모두 복음을 받게 되어서 이제는 기독교가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AD와 BC를 쓸 만큼, 역사는 기독교 중심으로, 예수 중심으로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의 실패 때문이었습니다.
마지막 카드, 이스라엘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셨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놓치기 쉬운 메시지를 접하게 됩니다. 그것은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함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9장과 10장에서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와 믿음으로 나가지 아니하고, 행위와 율법으로 나가려고 하는 기득권을 주장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여지없이 쳐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실패원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실패가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잘못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의 영적인, 구원론적인 의미는 19절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하여 희생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온 인류의 구원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양이 된 것 처럼, 이방인이 구원받기 위해 이스라엘이 희생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은 「그들이 학살을 당하고 전 세계로 방황하게 된 것은 그들이 메시야를 죽였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오만하고 자긍하면 안됩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이 회개할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때문에 이스라엘이 희생당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6백만명이 희생당할만큼 큰 죄가 어디있겠습니까? 2천년동안 전 세계를 떠돌아다녀야 할 이유가 어디있습니까? 이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아직도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왜 그런줄 아십니까?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차기까지 그들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돌아오고 이스라엘이 돌아오면 역사가 완성됩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돌아오기까지 이스라엘은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을 겪으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스라엘을 많은 다른 국가중의 한 국가로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적으로 이스라엘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남겨두신 마지막 카드가 될 것입니다.
예언의 성취
이스라엘이 실패해서 이방인이 구원을 받았다면,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서 충만하게 되면 이 세상이 얼마나 많은 복을 받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감정적으로, 민족적으로 굉장히 먼 나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이스라엘을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은 약 1천만명이라고 합니다. 미국에만 6백만명이 살고, 뉴욕에만 2백만명이 산다고 합니다. 그리고 구소련과 유럽에 많은 유대인들이 지금도 유리하며 살고 있는데, 놀랍게도 5년전부터 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든지, 고국으로 돌아온다든지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이 응답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을 줍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요? 고난때문입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일제시대와 6·25와 보릿고개를 겪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살면 예수믿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국민소득이 1만불이 넘고, 민주화가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보다는 인권에 더 관심을 갖게됩니다. 쾌락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여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신앙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먹고살기 어려울 때, 한국교회는 그때 부흥했습니다.
고통은 우리를 순수하게 만듭니다. 이스라엘은 그 고통 가운데서 마음의 문을 열고 메시야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통계를 보니까 구 소련에서 돌아오는 유대인들의 50%가 예수님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스겔과 예레미야와 이사야가 예언한 것들입니다. 이것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루살렘은 황무지입니다. 누가 그들을 도와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 두셨듯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겸손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했을 뿐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이 말씀은 무엇을 더 아끼신다는 말씀입니까? 원가지를 더 아끼신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입니다. 이방인을 위하여 평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습니다. 내가 저주를 받을지라도 이스라엘이 구원받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희생시키셨습니다. 희생을 시켰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은 이스라엘을 볼 때마다 아픕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회복되기를 원하십시오. 이스라엘은 자체힘으로는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방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을 통하여 구원을 얻었듯이, 이스라엘은 우리를 통하여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접붙여질 때
2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하나님에게는 두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사랑과 정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정의이십니다. 이것을 여기서는 인자와 엄위라는 말로 썼습니다. 여기 한 죄인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죄인을 대하면 그 죄인은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공의로 나가면 이 죄인은 살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사랑과 용서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삽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정의로 판단하시면 하나님 앞에서 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나를 대해주시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의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마십시오. 자신이 정의롭지 못한데 어떻게 남에게 정의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정의를 부르짖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정의로 대하면 다 죽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되는 말씀입니다.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이스라엘이 다시 믿으면 접붙임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실줄로 믿습니다.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시 건져주실줄로 믿습니다.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 불러 모아주시고, 이제 그들에게 복음의 계절이 올 것을 믿습니다.
그 일을 여러분과 제가 도와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나의 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평안을 비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없이 역사의 완성은 없습니다. 예레미야 31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열방이여 너희는 나 여호와의 말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무리에게 행함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흩으셨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모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예언입니다. 역사는 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진정한 구원은 개인의 구원에서 시작되어서 민족구원을 넘어서서 온 인류의 구원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이방인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방인을 통해서 얻게 하십니다. 이것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실패를 대하는 자세
롬 11장 13-24절 / 이병권목사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촌이 대출을 받아 땅을 샀는데 땅값이 폭락해서 망하면 어떨까요?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갑니다. 이런 말들은 약간 비꼬면서 교훈을 주기 위해 과장해서 하는 말들이지만 우리는 충분히 사람에게 있는 죄의 성품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실패를 통해 만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실패한 사람을 봤을 때 상대적인 안도감을 느낄 수 있고 나는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우월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실패한 사람과 비교하며 나를 높이는 일입니다.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이 그러한 일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실패를 듣고 있는 로마 성도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로마 교회의 대다수는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들었을 때 그들은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끼거나 실패한 이스라엘보다 그들 자신이 낫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을 예방하기 위해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들을 경고합니다.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신 것은 이스라엘보다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생각을 가진다면 이스라엘이 했던 실수를 되풀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특정한 민족이나 특정한 공동체로 제한하는 것,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만 누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만 받을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말 조심하고 경계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하는 이 경고의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명령을 중심으로 실패를 대하는 자세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은 나의 실패를 극복하는 방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실패를 바라보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실패를 보면서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향한 자신의 경고가 오해 없이 전달되도록 먼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라는 사실을 다시 말합니다.
롬 11: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롬 11: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자신의 사명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충성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울의 헌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생각하면 오해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방인을 위해 수고하는 바울, 유대인인 바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보며 유대인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유대인은 포기하고 이방인에게만 집중한다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수고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유대인을 포기하거나 그들의 구원을 위한 수고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이방인을 위해 수고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내 골육, 이스라엘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시기하게 만들어서 다만 “얼마”라도, 단지 몇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고 싶은 것이 바울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는 일이기에 하나님이 때가 되면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말하지만 실패와 함께 그 후에 있을 회복, 미래의 밝은 전망을 함께 말합니다.
롬 11: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주어가 되는 하나님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라는 놀라운 일이 되었는데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얼마나 더 놀라운 일이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이스라엘의 회복, 그 충만함에 이른 이스라엘의 모습이 죽은 자의 부활로서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11장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버리셨냐고 질문했습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여기 말씀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두 경우에서 버린다고 했을 때 서로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본문의 문맥에서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1절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은 총체적인 이스라엘, 그들 모두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에 남은 자가 있음을 말했습니다. 또한 영구적인 버림이 아니기에 그 기간에 있어서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실족해서 완전히 망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시적인 징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15절에서의 버리심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징계하시고 그 선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그들을 거절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루시기 위해서 그들 대다수를 징계 가운데 두셨습니다. 그 결과, 이방인에게 구원이 이르게 되어 세상의 화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5절은 앞서 언급했던 12절을 다시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인 것과 이스라엘의 실패와 회복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서 경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준비를 마칩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경고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합니다. 먼저는 그 비유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전제되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롬 11: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바울이 쌍으로 짝지어서 말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떡덩이”, 그리고 “뿌리”와 “가지”는 어떤 것의 ‘일부’와 ‘전체’를 말합니다. 일부에게 있는 거룩함이 전체의 거룩함으로 확장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구별된 첫 열매는 일부이지만 그 수확한 곡식의 전체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첫 열매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렸을 때 그 모든 열매도 하나님께 구별된 것으로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나무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뿌리가 거룩하면 그 나무의 전체라 할 수 있는 가지도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부와 전체가 비유하는 실제 대상이 무엇일까요? 일부가 비유하는 대상에 대해서 몇몇 견해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받아들이고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견해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28절에 이스라엘의 조상들에 대한 언급이 직접적으로 나오기에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이스라엘의 조상, 구약의 족장들을 택하셨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나무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뿌리에서 가지가 자라나는 것처럼 이스라엘 나라가 성장했습니다. 그런 나무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롬 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이스라엘은 감람나무로 설명이 됩니다. 당시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널리 재배되는 과실나무였습니다. 구약에서 감람나무는 이스라엘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좀 더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하면 올리브나무입니다. 그리고 감람나무와 대조되는 돌감람나무는 야생올리브나무입니다.
농부가 감람나무를 심었습니다. 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감람나무가 농부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랍니다. 그래서 농부는 가지들을 꺾고 대신 그 자리에 돌감람나무를 접붙입니다. 나무를 심은 주인은 그 뜻대로 두 가지 일을 했습니다. 참감람나무 가지를 꺾는 일과 돌감람나무 가지를 접붙이는 일입니다.
이 비유에서 참감람나무 가지는 복음을 거절하는 이스라엘을 말하고 돌감람나무의 가지는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복음을 거절함으로 그 가지가 꺾이게 되었고 대신에 이방인이 접붙임을 받아서 뿌리로부터 그 양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은 이스라엘 조상에게 주어진 언약 바깥에 있던 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언약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뿌리로부터 진액을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사실 이 비유 자체는 일반적인 상식에 반하는 일입니다. 열매를 잘 맺는 가지를 나무에 접붙이는 것이 일반적인 일인데, 이 비유에서는 오히려 열매를 잘 맺는 않는 돌감람나무 가지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바울이 수목 재배에 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실수를 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바울이 실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참 저자이신 성령님은 실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비유를 이해할 때는 비유가 말하는 것만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유 대상의 모든 점을 세세하게 빗대는 것은 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우리는 비유를 우리 상황에 맞게 뜯어 맞추려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비유가 강조하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열매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단지 주인이 원가지를 꺾고 다른 가지를 접붙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하나님이 그분의 계획 가운데 이스라엘을 잠시 제쳐두고 이방인을 넣으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가지가 더 낫다거나 더 쓸모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드디어 첫 번째 경고의 명령을 전합니다.
롬 11: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첫 번째 경고는 “자랑하지 말라”입니다. 접붙임을 받은 가지가 꺾인 가지들을 보며 자기 자랑을 하면 어떨까요?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방인이 복음을 거절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해 우쭐하는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실패한 그들을 보면서 우월감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불행, 실패를 보며 우리는 나를 자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랑은 합당치 않습니다. 나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자랑할 근거도 없고 자랑할 내용도 없습니다.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네가 지금 어디에 붙어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네 힘으로 네 노력으로 네가 잘나서 지금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뿌리가 아닙니다. 스스로 뭔가 된 것처럼 착각하면 안 됩니다. 나를 내세우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들면 그 때마다 다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난 뿌리가 아니야!’ 뿌리가 없는 내가 지금 이렇게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은 오직 은혜입니다. 자랑하지 말라는 명령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랑하지 말라는 바울의 경고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 11: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이게 무슨 말이냐면, 바울의 경고에 대해서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다른 가지들은 나를 위해 꺾인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이며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착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두 번째 경고의 명령을 전합니다.
롬 11: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바울의 대답은 옳도다 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완악하게 하심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게 되었으니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을 두고 나를 위한 일로만 제한할 수는 없습니다. 원래 있던 가지를 꺾으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훨씬 더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단지 나에게만 맞추어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택배기사님이 나에게 택배를 배달했습니다. 그럴 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저 택배기사는 나를 위해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구나!’ 그 상황만을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오해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이방인의 구원으로만 생각하는 것,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그릇된 태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훨씬 더 크고 넓고 깊은 것입니다. 그래서 명령합니다. 두 번째 명령,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면, 그분을 향한 경외심이 없으면 우리는 쉽게 높은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나만 생각하게 되고 나 중심적이 되어서 이기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높아지는 것은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롬 11: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이 원 가지, 원래부터 그 나무에 붙어있었던 가지를 꺾으셨습니다. 그런데 접붙임을 받은 가지에 대해서 다르게 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에 대해서도 그 뜻에 맞지 않는다면 꺾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경고의 말씀을 보면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이런 경고의 말씀이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말씀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택하심을 받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고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두려워하라고 경고하는 걸까요?
그의 대답입니다.
롬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하나님은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한없이 인자하신 분이지만 또한 한없이 두려우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이스라엘처럼 악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찍히는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과거의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해서 이루어가야 할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를 중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며 믿음이 없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준엄하심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그 인자하심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을까요? 그 인자하심이 우리에게 머물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두 명령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두려워하십시오. 저는 두 명령을 하나로 요약해서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겸손하십시오.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바울의 전하는 경고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합당한 자세로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과 그분의 자비하심을 생각하며 그분을 경외할 때,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해서 교만한 마음을 품는다면 하나님은 그에 따른 보응을 하실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알고 그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23). 하나님이 그 뜻대로 꺾으시고 접붙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그 뜻대로 택하십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그 사람의 어떠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연중에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받은 은혜를 근거로 높은 마음을 품으려고 합니다. 때로는 누군가의 실패가 나를 교만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그 마음이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이야! 난 저 사람보다 겸손하고 마음이 좋으니까 구원을 받은 거야! 하나님을 믿는 나는 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야!’
합당한 자세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우리가 택함을 받은 이유는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나에게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것이 있어서, 더 괜찮은 사람이라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교만할 수 있는 근거가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발견하시고 그것 때문에 우리를 받아주셨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할 일은 은혜로 받은 구원에 대해서 감사하며 계속해서 겸손함으로 그 인자하심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이며 우리에게 합당한 자세입니다.
우리를 접붙이신 하나님의 은혜
롬 11:13-24 / 이수영목사
사도 바울은 본문 첫 절에서 말한 대로 비록 스스로를 “이방인의 사도”로 자처하며 자기의 그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동족인 유대인들에 대한 관심 또한 지극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동족에 대한 마음을 이미 로마서 9장과 10장에서 숨김없이 드러낸 바 있습니다. 9:1-3에서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습니다.
10:1-3에서는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했으며 10:16 상반절에서도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했습니다. 계속되는 11장에서는 이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실족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사도 바울의 생각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서서 이스라엘이 복음을 순종하지 않았다고 말한 사도 바울은 “그러면 이스라엘은 완전히 버림받은 것인가?” 하는 물음을 먼저 던집니다. 물론 바울이 준비하고 있었던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11:1에서 그는 쓰기를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전하시고 가르치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이 통째로 모두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 증거로서 자기 자신을 보라 합니다: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11:1)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의 사도 바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열심히 전하며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알고 계시던 자신의 택하신 백성을 통째로 버리신 것이 아니라는 증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통째로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로서 자기 자신을 제시한 사도 바울은 또 다른 예로서 선지자 엘리야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듭니다. 11:2-5입니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왕상19:10)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왕상19:18)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그 남은 자가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자마자 그 의미를 설명하기를 잊지 않습니다. 11:6을 봅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택하셨다는 것은 그 택하심을 받은 이들의 행위를 보시고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만일 행위를 보시고 선택하셨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말 뒤에 있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제시하신 “오직 믿음에 의한 의” 즉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구원을 거부하고 끝까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다가 그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한 데 반해, 남은 자들 즉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택하신 이들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이 선택받은 남은 자들 외의 모든 유대인들은 우둔하여져서 볼 것을 보지 못하고 들을 것을 듣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1:7-10을 봅니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사29:10; 신29:4) 함과 같으니라.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시69:22 이하) 하였느니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신분이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이 보장해주는 것인데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구원은 사람의 의지적 선택에 달린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달린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11:1에서 던졌던 물음과 같은 뜻의 물음을 다시 한 번 던집니다. 그리고 그 답 또한 여전히 “아니라”는 것입니다. 11:11 상반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비록 많은 유대인이 실족하기는 했지만 모든 유대인이 완전히 다 넘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러면 일부 유대인은 남겨놓으시며 다른 자들은 실족하게 내버려두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리고 그 신학적인 답을 내놓습니다: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1:11 하반절)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졌습니다.
즉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의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사도들로 하여금, 특히 사도 바울로 하여금 이방인에게로 향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열렬히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는 사실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래서 이스라엘도 결국에는 복음을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완전히 버림받은 백성이 되지 않을 것인데,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으로 실족한 것이지 전적이고 결정적으로 넘어진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리라는 자기의 숨은 믿음을 내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내심 이스라엘이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리라고 믿는 바울은 다시 묻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의 12절입니다: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이스라엘이 거부함으로써 복음이 이방인들에게서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면, 만일 이스라엘이 복음으로 충만해진다면 얼마나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믿는 이방인을 유대인이 시기하게 해서 결국은 자기 동족들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 자기가 열심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유라고 설명합니다. 그것이 사실은 유대인이 실족하게 내버려두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3-14절입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이렇게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의 실족의 긍정적 의미를 제시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궁극적 회복에 대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본문 15절을 봅니다: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은 것이 다른 백성으로 하여금 구원받는 결과 즉 하나님과 화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받아들이시는 것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에 의한 의에 매달리는 사람은 영적으로 다 죽은 자들인데 하나님께서 다시 받아들이시게 된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다른 하나의 뜻은, 복음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완악함 때문에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는 기쁜 일이 생겼다면,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것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만큼이나 더 큰 기쁨이 되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뜻은,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받아들이시는 것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 즉 부활의 때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때가 주님이 다시 오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종말이 되리라고 믿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회복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언급한 사도 바울은 그 근거를 제시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민15:20-21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 익은 곡식 가루로 떡을 만들 때 떡반죽에서 일부를 떼내어 과자를 만들어 하나님께 거제로 드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뿌리”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와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을 물려받은 족장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떡덩이”와 “가지”는 누구겠습니까?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현재의 모습은 하나님 보시기에 많이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그 근본은 거룩한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 속에는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이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유대인들을 일방적으로 멸시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권고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또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그들 스스로 이룬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고 교만하지 말아야 할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교만해지면 바로 이스라엘이 버림받은 것과 꼭 같이 버림받을 것이라는 준엄한 경고도 예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관심이 자기 동족으로부터 다시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에게로 갑자기 돌아오는 것을 봅니다. 본문 17절 이하를 봅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22절에서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이라 한 것은 “너희가 만일 계속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신뢰하면”이란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믿음을 갖게 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접붙임을 받은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의한 것임을 잊지 않고 늘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살면 하나님께서 항상 은혜로 함께하시리라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냉철하게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본래 돌감람나무에 붙은 가지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나무에 접붙여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인정된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온전히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찍혀지고 버려질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뿐 아니라 한국교회를 향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감람나무에 접붙여주신 하나님에 은혜에 겸손함과 신실함과 충성됨으로 응답하는 한국교회가 되어 하나님나라의 건강하고 튼튼한 가지로 영원히 남도록 모든 힘을 기울여 기도하며 날마다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이방인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구원
롬 11:13-24 / 더온누리교회
이스라엘이 잘못된 지식과 열심으로 결국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실패했으니 그들에게는 회복이 없는 건가? 이제 끝인가? 하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답하며 자신의 사도직과 가지 접붙임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본문은 한 번의 실패가 영원한 실패가 아니며 반드시 회복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본문을 포함한 11-34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다룬다. 그들이 크게 실패했다면 회복은 아예 주어지지 않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11-12절이 이와 같은 질문이다. 유대인들이 과연 회복불능으로 끝났는가를 질문하고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회복을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먼저 바울 자신이 감당하는 사도의 사역을 통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일이 결국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일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13-14절). 이러므로 믿은 유대인은 더 온전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15-16절). 또한 이방인들의 회복과 관련되어 원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유대인들이 순종의 자리로 나아오는 것은 더 쉬울지 모른다는 것을 감람나무 접붙임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17-24절).
1. 유대인의 구원을 바라는 바울(13-16절)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자신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긴다(13절). 이방인의 사도로역할을 감당하는 그는 이 직분과 관련하여 또 다른 동기가 있음을 밝힌다. 그것은 “동족들을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는” 것이다. 11절에서 밝혔듯이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이방인들이 구원이 이르고 이방인들의 풍성함을 통해 유대인들을 시기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획에 근거한 것이다.
이와같은 기대함으로 유대인들의 돌아옴으로 완성될 미래의 일들을 내다본다(15절). 유대인들이 거절 당함으로 현재 “세상의 화목”이 실현 되었음을 상기시키고 장차 “죽은 자들로부터의 생명(유대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의 수가 찰 때,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얻게 될 완전한 생명을 의미한다)”은 미래적 현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첫 열매가 거룩하다면, 나머지 열매로 만든 떡덩이도 그러하다(16절)”는 것은 첫 열매가 전체를 대표하기 떄문이다. 첫 열매는 15절과 연결하여 “이스라엘의 버림과 세상의 화목을 통해 얻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나머지 떡덩이 전체는 “이스라엘이 받아들임을 통해 얻게 될 이방인과 유대인 전체로 구성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뿌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지는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2. 참 감람나무의 가지에 접붙임을 받은 돌 감람나무(17-21절)
바울은 17-18절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야생 감람나무에 비유한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가지 얼마가 꺽이는 것으로 표현되고 거기에 돌감람나무(이방인)가 접붙임을 받아서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다. 그러니 자고하는 자가 되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 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원가지도 아끼지 않았다면 접붙임을 당한 이는 어쩌겠냐는 것이다.
야생 감람나무는 그 열매가 쓸만하지 않다. 그래서 통상 밭에서 재배되는 감람나무에 접붙여서 길렀다. 이와 같은 풍습에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접목했다. 유대인들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지위에 비하면 이방인들의 그것은 야생 감람나무와 닮았다. 당연히 야생 감람나무 가지들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 그것의 뿌리로부터 진액을 받게 된 것에 감사해야 한다.
이방인들이 받은 구원에 관한 언약의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맡겨져 왔다. 유대인들이 이르지 못한 구원에 이르렀다고 해서 자랑할 수 없는 것(18절)이다. 혹시 자랑한다고 해도 “뿌리가 접붙임 받은 가지를 보전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맡아온 언약의 말씀으로 인해 그들이 혜택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19-21절에서는 접붙임을 받은 자의 자세에 대하여 언급한다. 참감람나무의 원가지들이 꺽인 결과 자신이 접붙임을 받는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있다(19절). 바울은 이러한 이방인들의 말을 긍정한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하난미의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아서 꺽였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그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여 은혜 가운데 세워 진 것이다(20절).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더욱 겸손하고 오히려 두려워 하라고 권면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20절).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라는 것이다(21절)
*새 이스라엘인 로마교회의 이방인 뿐 아니라 초대교회의 공동체 모두에게 적용될 말씀이다. 오늘날의 우리도 모두 다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이들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구원 받은 것이기에 은혜로 된 것이면 결코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믿음으로 서고 높은 마음(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도리어 더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원가지인 이스라엘이고 해산의 수고를 통해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신 이스라엘 일지라도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안다면 접붙임을 당한 가지라면 더욱 경각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3. 잘려 나간 원가지들의 회복에 대한 소망(22-24절)
2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신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 공평하심은 그의 구원과 심판 모두에 나타난다. 하나님의 준엄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할 것 없이 ‘넘어지는 자들’ 즉 하나님의 복음에 불순종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준엄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누구든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하심을 누리게 될 것이다.
특히 이방인 그리스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목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22절) 그리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라”는 당부가 자연스레 눈길을 끈다. 하나님꼐서 우리게 베풀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다. 반대로 지금은 믿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한다면 유대인들도 얼마든지 다시 접붙임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23절). “믿음”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구원은 주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인자하고 준엄하시다. 이스라엘의 회복의 가능성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사랑을 베푸실 때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며 돌이키는 이를 언제든 사랑하신다. 그러나 불의와 죄악에 대해 반드시 준엄한 심판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인자하시고 준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
나는?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영광스러운 직무를 수행하면서 자신의 민족인 유대인들이 몇 사람만이라도 구원받게 되기를 소원하고 있다. 바울의 마음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먼저 복음의 문이 열린 다른 이들에게라도 최선을 다해 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리라
-바울은 로마의 이방인 신자들에게 유대인을 향해 자랑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유대인들도 불신앙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면 이방인 신자 역시 자기 행위를 자랑하다가 하나님 백성의 신분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받아 누리고 있는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믿음에 대해서 바울과 같은 자세로 살아가야 하리라.
-하나님의 인자하심 가운데 거하지 않는 자를 잘라내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붙드는 자들은 회복시켜 주신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고 떨어져 나간 자에게는 준엄하지만, 주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지극히 인자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버림받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믿음을 가진다면 그들을 다시 하나님의 백성의 반열에 속하게 해주신다. 돌감람나무 가지가 본래의 나무에서 잘려 나와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졌다면 참감람나무 가지가 본래의 참감람나무 가지에 접붙여지는 일은 얼마나 쉽겠느냐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을 증언한다.
*자기 백성의 완전한 회복을 열망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애타게 그 마음을 전하는 사도의 심정을 함께 헤아려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돌감람나무였던 나를 하나님의 백성인 참감람나무에 접붙여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유대인은 돌아올 것이다. 이방인은 자긍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구원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으므로 그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늘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을 무시하던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신 능력으로 지금 불순종하는 유댕니들도 하나님의 백성들로 회복시킬 수 있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아무리 가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민족도, 나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복음을 전하고 보여주어야 한다.
*주님,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하고 준엄하심을 기억하겠습니다.
*주님, 돌감람나무였던 저를 구원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