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처럼
그 흔해빠진 낙엽위에 나자빠져ㅎ 뒹구는 게 행복이던
누구처럼
마당쇠질 ㅋ 뒈지라 하고 겨우 입에 풀칠하는 신세이던
마음만 편하다면야 무슨 짓인들 못할소냐 ㅎ~ .... 조와롸니메 신념이며 처락이다!!!
존경하는 울횐님들 생가근 어떠요이ㅇ ㅎ~
방태원 -마음의 자유천지
1955
손로원 작사, 백영호 작곡
방창만 = 방태원 = 방운아
백금에 보석 놓은 왕관을 준다해도
흙냄새 땀에 젖은 배적삼만 못하더라
순정에 샘이 솟는 내 젊은 가슴 속에
내 맘 대로 버들 피리 꺾어도 불고
내 노래 곡조 따라 참새도 운다
세상을 살수 있는 황금을 준다해도
보리밭 갈아 주는 얼룩소만 못하더라
희망에 싹이 트는 내 젊은 가슴 속엔
내 맘 대로 토끼들과 얘기도 하고
내 담배 연기 따라 세월도 간다
이 노래는 원래 2절이 따로 있는 3절 구성으로 만들어졌다.
높다란 벼슬자리 걸상을 준다 해도/ 밤이면 새끼 꼬는 사랑방만 못 하더라/ 청춘의 꽃이 피는 내 젊은 가슴 속엔/ 내 맘대로 갈 수 있는 주막도 있고/ 내 사랑 꿈을 따라 샛별도 뜬다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방창만은 고향에서 16세에 중학교를 마치고 1948년 사촌형이 운영하던 두부공장에서 일하며 노래로 힘든 노동을 견디었다. 동네 선배가 기타를 가르쳐 주면서 가수의 길을 적극 권유했다. 여기에 용기를 얻은 방창만은 나이 스물이 되던 1951년,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 주최 전속가수선발대회에 출전했다. 상주 출신의 도미(본명 오종수), 방초양, 신행일 등과 함께 우수한 성적으로 뽑혔다. 오리엔트사장이던 작곡가 이병주가 방태원(方太園)이란 예명을 지어주었고, 이 회사의 전속가수로 ‘망향의 곡’ ‘무정항구’ ‘부산항구’ 등을 발표했다.
하지만 전쟁 시기, 지방에서 운영되던 레코드사에서의 활동은 더 이상 히트곡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여러 해가 지나도록 밝은 전망을 갖지 못했다.
1954년 휴전 협정이 조인된 이듬해 방태원은 어느 지인의 소개로 부산의 유능한 작곡가 백영호(1920~2003)를 찾아가 문하생이 되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하나의 운명적 결속이었다. 백영호는 그 무렵 부산 미도파레코드사의 자회사였던 빅토리레코드사의 운영책임자로 이미 다수의 히트곡을 내고 있었다. 여기서 전속가수가 되고 작사가 손로원(1911~1973)의 가사에 곡을 붙여 취입 발표한 첫 작품이 바로 ‘마음의 자유천지’였다.
손로원은 전쟁을 겪은 우리 겨레의 고달프고 피로한 심정에 진정한 위로와 격려를 주고 싶었다. 그 때 만든 작품이 바로 ‘마음의 자유천지’다. 이 음반을 발매할 때 백영호는 방태원에게 ‘방운아(方雲兒)’라는 새로운 예명을 붙여줬다.
작곡가 백영호는 여러 작품 중 이 노래가 가수 방운아의 음색과 창법에 가장 적절하게 어울린다는 직관적 판단을 했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윤택한 삶이라 해도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의 자유와 평화보다 결코 못하다는 삶의 철학적 가치관과 메시지가 담긴 이 노래는 1950년대 후반, 전쟁의 시련과 아픔을 겪은 전체 한국민에게 크나큰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로 다가갔다.
드디어 부산에서 첫 히트곡을 발표한 방운아는 지역에서 활동하던 가수 박경원 남백송 신해성 박애경 정향 등과 친교를 맺었다.
1957년, 나이 26세가 되면서 가수 방운아는 미도파레코드 전속으로도 동시에 활동했다. 여기서 다수의 히트곡을 연속으로 발표하게 되는데 그 작품들은 ‘부산행진곡’ ‘인생은 나그네’ ‘재수와 분이의 노래’ ‘두 남매’ ‘한 많은 청춘’ ‘여수야화’ ‘인생은 고해련가’등이다.
이 가운데 영화 ‘나그네 설움’의 한 장면에서 가수 방운아가 직접 출연하여 영화 주제가로 부른 것이 ‘인생은 나그네’이다. 1961년은 방운아의 나이 30세가 되던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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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가창력과 시대정신으로 1950년대 한국가요사를 대표했던 가수 방운아(方雲兒, 본명 방창만: 1931∼2005)는 경북 경산에서 출생, 1950년대 초중반 대구, 부산 등지를 무대로 오리엔트, 빅토리, 미도파레코드 등의 회사에서 주로 활동하며 당시 1950년대 주민들의 피로한 심신을 노래로써 위로하고 격려하였다.2005년에 74세로 별세.
방운아의 대표곡 <마음의 자유천지>(손로원 작사, 백영호 작곡), <인생은 나그네>(반야월 작사, 빅시춘 작곡), <부산행진곡>(야인초 작사, 박시춘 작곡), <일등병 일기>(천봉 작사, 백영호 작곡), <두 남매>(이사라 작사, 박시춘 작곡), <한 많은 청춘>(김정보 작사, 김호길 작곡) 등에 반영된 시대정신은 바로 한국전쟁에 시달리고 모진 상처를 입었던 한국인들에게 따뜻한 위안이었다.
방운아 대표곡 '마음의 자유천지' 노래비
~경북 경산시 남매저수지 둑 ~
첫댓글 마음의 자유천지??
아하...
어릴 적에 제목도 모르고
따라서 부르던 노래인데...??
''내 노래~곡조따라~참새도 운다''
3절까지 있군요
이 방창만가수?
경산출신이군요
남매저수지에 노랫비가 있네요
가까운 곳인데...한번 가봐야겠습니다
오늘도
한수 배우고 갑니다~ㅎ
ㅎ 배울 걸 배우셔야지요.
마당쇠 하루만에
정신이 혼미해지 ㅋㅋㅋ
방운아 1950년, 60년대 시끄러웠지요.
ㅎ 경산 다녀오시어
인증샽 보고서 제출 하시라요.
오늘도
별2님,
마음의 자유천지~~~!!!
@좋아요 동네 형들이 부르던
이 노래가
가사와 곡이 참 좋았던 기억이 나네요
경산에 가면??
꼭 다녀올게요...ㅎ
토요일날
그곳을 지나서 갑니다~^^
@벼 리 1950년대 새신랑 장가가면
메달리고 터지고
노래하던
그 시절 그 노래~...
스쳐 지나가는 절호의 기회가 있으시다.
거 둏지요
굳 아이디어 입니다.
이런 노래도 있었네요 들어봐야겠어요
덕분에 1950년대로 여행을 떠나요
감사합니다
구석 구석
지나간 이야기를
다 알 수야 없지요.
마음의 자유천지
이런 세상을 상징하는 말과 표현이 좋아요.
감사합니다.
전쟁이 끝났지만 많은 것을 잃은 우리국민은 그냥 허탈함 뿐이였는데...
그래도 마음의 자유를 느끼며 빈곤했던 그 시절을 벗어나는데 좋은 역할이 되었으리라고 봅니다.
방운아의 맑고 낭랑한 음색이 돋보입니다.
시절 따라
인연 따라 가락에는 사연이 있네요.
마당쇠 ㅎ 수고 하셨습니다.
백금에 보석놓은 ~
참으로 오랫만에 들어 보는 곡 입니다
그게 마음의 자유천지 입니다
정말 오랫만에
들어보는 것일 겁니다.
좋아요님은
오래된 노래를 어찌 이리 잘 아실까요?
그쪽 방면 일 하시나요?
신기~신기~ㅎ
편안한 시간요~^^
신기 ㅎ
그렇게 불린 해초가 있었는디 ㅎ
그쪽에서 일하고 노는 사람들보다도
더 마니 안다고 사람들이 그러데요만...
저가 즐어본 옛 가요들을
마니 기억하나 봅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