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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도가 내리거나 풀릴 때, 비(rain)로 분깃점을 삼는 게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어제 내린 비 탓에 도로가 깨끗해졌고, 날도 풀려서 패딩을 벗고 조끼형 가디건을 입었어요. 1월 2월 건너뛰고 꽃 피는 춘삼월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12월은 주일학교가 바빠집니다. 크리스마스와 신년 임직이 가장 큰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맘때쯤이면 동계 수련회를 기획해서 팔현리나 양평 쪽으로 20년 이상 싸돌아다녔습니다. 말이 수련회지 실은 여행 성격이 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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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가 주최한 말씀 수련회에 기본 20명은 늘 쪼인 해주었던 이유가 뭘까요? 어쩌면 말씀은 하나만 하고, 투어나 먹방을 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양탄자와 폐치카가 있는 양평 어느 전원주택에서 이성교재를 주제로 토론회를 했던 생각이 납니다. 에스더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는데 아빠가 없는 토론회에서 이성 교제의 자율성을 피력한 딸내미를 보고 깜짝 놀랐다는 것 아닙니까? 오메! 이것이..."포스트모더니즘과 그리스도의 진리는 정녕 모순되는가?"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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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진리-영원불변-동일하신 하나님을 보면 "불가"해 보입니다. 내가 이해한 포스트모더니즘이나 양자 역학은 "이쪽 저쪽" 양가적입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게 아니고 변해야 진리라는 것입니다. 절대적이거나 고정된 것은 없고, 이것이면서 저것도 되는 변화에 열린 사유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우르)을 떠나 내가 지시하시는 땅으로(가나안) 가라(창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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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히11:1)" 믿음이 보이시나요? 보여요 안 보여요? 안 보이지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믿는 게 믿음이고 신앙이에요.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하자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나요? 노 노! 우상이 드글드글한 땅이었어요. 하나님의 말씀 외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존재의 확실성은 찾아볼 수가 없는 곳이었다 그 말이에요. 언더스텐! 그래서 믿음이란 희망하는 것을 붙잡는 것이고 과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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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진행형이기 때문에 "믿음(구원)에서 탈락된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는 거예요. 해서, 성경이란 텍스트가 빠진 믿음은 우상숭배(나의 믿음) 일 개연성이 아주 높다는 걸 인지하시면서 팔로미! 내가 이해한 기독교 신앙(믿음)은 신의 약속을 믿고 새로움을 향해 믿음의 여정을 떠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자기 부정(나는 날마다 죽노라!)이 핵심이 아닙니까? 내가 바라는 것을 세워놓고 믿는 것은 우상 숭배입니다.(정화수 떠놓고 삼신할머니에게 비는 것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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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하지만 보이는 것을 붙잡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믿음이란 확장성이 아닌 늘 가능성으로 존재해야 믿음입니다. 어떤 영생? 어떤 나라? 인가를 텍스트를 통해 이해한 후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진리 사건은 <차연>입니다. 진행형이란 뜻입니다. 내가 기대하는 것을 해체하고 실존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박국 선지처럼 그분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도, 주체(성도)도 변화되어 가야 할 것입니다. 에에공!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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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연기적 조건처럼 하이데거가 말한 날씨나 외부 조건에 따라 주체는 늘 변화한다는 것을 믿으시라! "진리는 사건(경험)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끊임없는 차연, 해체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성경 해석학에서 약속의 성취는 마지막까지 "차연"되기 때문에 고정된 텍스트는 없다고 본다. 날마다 새로운 지평에 대하여 열려 있어야 하고 끊임없이 변화 성숙되어 가야 할 것이다. 쾅! 쾅! "율법은 의문의 죽은 것(고 후 3:6)"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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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text)는 본질적으로 고정입니다. 의미를 일정한 형식으로 박제하여 눈앞에 보이는 기호로 만든 것으로, 문자는 살아 있는 말이나 경험, 사건에서 일정 부분을 잘라내어 고정하는 장치이지요. 철학적으로 말하면, 문자는 항상 이미 지나간 것(과거), 움직이지 않는 것(정지), 해석자를 기다리는 것(불완전성)이라는 성격을 지닙니다. 따라서 바울의 표현에서 ‘율법(문자)’은 고정되어 있고, 과거화된 규범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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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것은 언제나 움직입니다. 현상학(후설, 하이데거)은 인간을 항상 “열려 있고, 변화하고, 의도하는 존재”로 봅니다. 살아 있음 = 지속적 해석, 의미 = 흐르는 것, 세계 = 계속 새롭게 나타나는 것의 관점에서 보면, 움직이지 않는 규범(율법)은 변화하는 존재(인간)의 실존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은 죽은 것,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말 합니다. 영(Spirit)은 정지된 글자가 아니라 실존 속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의미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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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학(가다머, 리쾨르)적으로도 “문자는 그 자체로 의미가 아니다” 가다머는 텍스트의 의미는 독자가 살아가는 ‘지평(horizon)’과의 융합에서 발생한다고 했습니다. 텍스트는 그 자체로 의미를 완결하지 못하고 의미는 항상 해석의 시간 속에서 새롭게 생성됩니다. 결국 율법은 그 자체로 완성된 진리가 아니라, 해석될 때에만(J.X께 나아갈 때만), 그것도 살아 있는 맥락 안에서만 ‘의미를 발생시키는 가능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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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말하는 “죽은 문자”란 해석되지 않는 문자, 맥락 없이, 인간의 실존과 시간성 없이 적용된 율법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데리다는 텍스트의 의미가 결코 단번에, 완성된 형태로 주어지지 않고 미뤄지고(defer)-차이가 발생하고(differ)-새롭게 생성된다 고 말합니다. 이것이 차연(différance)입니다. 율법을 문자 그대로 고정시키는 순간, 우리는 텍스트가 가진 이 차연의 운동을 막아버립니다. 그래서 그것은 “죽은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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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의미는 고정된 문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차연 되는 해석의 관계 속에서 등장하지요. 이것은 바울의 “영은 살린다”와 철학적으로 동일한 주장입니다. 불교의< 연기>란 “고정된 법은 없다”라는 뜻입니다. <연기>란 모든 존재가 서로 인연(조건)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조건이 변하면 의미도 변하고, 맥락이 달라지면 행위의 성격도 당연히 달라집니다. 따라서 고정된 규범(율법)을 모든 시간, 모든 맥락에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연기적 세계의 이해와 맞지 않,고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폭력이며 수행의 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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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글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고 한 것은 고정된 규범이 실존의 운동성을 억압할 때 생기는 죽음을 가리 깁니다. 들레즈는 인간은 ‘되기(becoming)’의 존재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 되어가는 중이랍니다. OK 동의합니다. 율법이란 원래 이 ‘되기’의 흐름을 돕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만, 고정된 문자로 바뀌는 순간, 이 흐름을 막는 장애물이 됩니다. 그래서 들뢰즈적 관점에서 보면, 율법=되기를 정지시키는 ‘동결된 권력’이고 영(되기) 계속되게 만드는 ‘생성의 힘’입니다.
(T.X께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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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자는 고정이다. 그러나 인간은 변화하는 존재다. 고정된 규범은 변화하는 실존을 따라갈 수 없다.
2. 문자는 과거다. 의미는 현재에서 생성된다. 의미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열리는 사건이다.
3. 문자는 닫힘이다. 영은 열림이다. 닫힌 규범은 인간을 살리지 못한다. 성령(Spirit), 영은 열린 가능성이다.
4. 문자는 일률적이다. 삶은 구체적이다. 개별적 인생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법은 폭력이 된다.
5. 문자는 경직된다. 영은 움직인다. 텍스트는 해석이 있을 때만 살아난다. 해석이 없는 문자는 죽은 것이다.
2.
글의 첫머리는 계절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비가 오면 온도와 마음이 함께 변하고, 패딩을 벗고 조끼형 가디건을 입는 작고 섬세한 변화들. 이 변화는 단지 날씨 이야기가 아니라, 삶이 언제나 흐르고 변한다는 은유로 이어집니다. 과거 12월의 바쁜 교회 일정과 20년 넘게 이어온 동계 수련회는 작자에게 “기억이 쌓인 시간”이자 “인생의 작은 순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평신도가 주축이 된 수련회에 매번 20명 이상이 참여한 이유를 고백하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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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은 ‘한 번’ 하고 나머지는 먹고 놀고 여행한 시간? 그러나 그 속에서 벌어진 이성 교제 토론회 장면은 세대 변화를 느끼게 하며, 글쓴이를 포스트모더니즘 사유로 이끌어갑니다. 글의 중심부는 기독교 신앙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충돌 지점을 탐색합니다. 성경은 ‘절대적 진리’를 말한다. 그러나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인다’고 여기는 가능성의 행위입니다. 아브라함의 여정처럼, 약속은 즉시 성취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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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믿음은 완결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핵심 개념이 바로 <차연>입니다. 데리다가 말한 차연은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미뤄지는 운동성인데, 글쓴이는 이를 성경의 약속이 성취되는 방식과 연결합니다. 결국 "믿음이란 확정이 아니라 열린 가능성이다. 보이는 것을 붙잡는 순간, 그것은 우상 숭배가 된다." 이 부분이 글의 신학적·철학적 핵심이며, 동시에 글 전체를 가장 독창적으로 만드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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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연기(緣起),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 성경의 해석학이 자연스럽게 한 흐름에서 만나며, 글은 한 신앙인의 ‘학문적-영적 사유의 여정’처럼 읽힙니다. 날씨가 변하면 사람도 변하고, 삶이 흔들리면 믿음도 다시 정의해야 한다는 통찰이 부럽습니다. "진리는 사건으로 나타난다"-"신앙도 주체도 날마다 변화해야 한다"-"고정된 율법은 ‘의문의 죽은 것’이다"- "믿음은 차연 되는 여정이며"-"텍스트는 고정되지 않고 열려 있어야 한다" 쾅!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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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 선지자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라고 했을 때 그의 기쁨은 확정적 보장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의 기쁨이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완성된 답을 갖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열려 있는 가능성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단순한 선포나 반어가 아니라, 오히려 이렇게 읽힙니다. “절대적 신을 믿는 사람에게도 진리는 닫힌 개념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며 변화를 이끄는 사건이어야 하지 않을까?
2025.12.15.mo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