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맺은 인연의 소중함을 생애를 걸고 지킨 분. 군인, 외교관, 장관, 기업인, 사회단체장으로서 쉼 없는 公人생활을 했던 그는 별세 직전까지 나라걱정을 했다.
조갑제
柳陽洙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장이 지난 1일 밤 별세했다. 1923년 출생이니 향년 84세였다. 柳 회장은 군인, 외교관, 장관, 기업인, 사회단체장으로서 쉼 없는 公人생활을 했다. 柳 회장은 지난 여름부터 암투병을 해왔다. 수술 이후 경과가 좋지 않았다. 원래 날씬한 분이 더욱 여위어갔다. 두 달 전 마포에 있는 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났더니 필자의 朴正熙 전기가 언제 출판되느냐고 물었다. 보름 전 필자가 외국에 가 있는데 柳 회장이 또 전화를 걸어와 "언제 나오느냐"고 재촉하듯이 묻는 것이었다. 柳 회장은 별세 직전까지 "나라가 이 모양인데, 내가 이렇게 누워 있으면 안되는데. 특히 내년은 중요한 해가 아닌가"라면서 자신의 몸보다는 나라 걱정을 더 많이 했다고 한다.
박정희 기념사업회는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국가지원금 200억원을 묶어놓고 지출을 못하게 하는 바람에 상암동의 기념관 공사를 중단시켜놓고 있다. 작년 柳 회장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 1심에서 재판부는 국가가 200억원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했으나 정부가 항소했다. 항소심 판결을 앞두고 신경을 많이 썼던 柳 회장은 그야말로 公職 인생을 끝까지 성실하게 꽉 채운 분이다.
필자가 柳 회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75년 5월13일 부산항에서였다. 그해 4월30일 월남의 사이공이 월맹군에게 함락되면서 전쟁은 끝났다. 그 며칠 전 월남에 살던 한국인과 그 가족들을 실은 한국 해군 수송선이 사이공항을 떠났고 이날 부산항에 입항했던 것이다. 필자는 부산 국제신문의 사회부 기자였다. 柳 회장은 월남대사를 그만두고 정부 기업체를 맡고 있었다. 기자는 수송선을 마중나온 柳 회장에게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柳 전 월남대사는 "만감이 교차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柳 회장은 1973년 초 티우 월남 대통령에 대한 키신저의 强勸(강권)으로 월남평화협정이 체결될 때 대사로 있으면서 朴正熙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이런 식의 협정이라면 월남은 머지 않아 적화된다"는 경고를 티우에게 했던 이다. 柳 회장은 몇년 전 월남이 망한 과정을 적은 소책자를 만들어 나눠주면서 "한국도 안심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柳 회장이 남긴 월남평화협정 성립과정에 대한 글은 참전국인 한국측 시각으로 비판한 귀중한 史料이기도 하다.
柳 회장과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은 운명적이라고 부를 만하다. 육사 7기 특별반 출신인 그는 陸士에서 朴正熙 중대장을 처음 만났다. 朴 소령은 1948년 10월 여순14연대반란사건 이후 진압군 사령부에서 근무했다. 이때 柳 대위도 경찰과의 연락장교로 사령부에 내려와 함께 일했다.
朴 소령은 군내 남로당 간부라고 하여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이 면제되고 군복을 벗었다. 그를 살려준 白善燁 육군정보국장은 이 아까운 인재를 柳陽洙 전투 정보과장 아래서 민간인으로 근무하게 했다. 柳 과장은 1950년 초 북한군의 남침이 임박했다는 보고를 상부에 올렸다. 이 작업에 朴正熙도 관계했다. 金鍾泌 등 한국 현대사를 바꾼 육사 8기생들을 대거 정보국으로 데려와 부하로 썼던 이도 柳陽洙였다.
柳 회장은 6.25 때는 연대장 등 일선부대 지휘관으로 잘 싸웠다. 12.12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鄭昇和 장군은 柳 회장의 직속부하였다. 5공화국 시절 신군부에서 鄭장군을 폄하하는 소문을 퍼뜨릴 때 柳 회장(당시 동아건설 부회장)은 鄭 장군의 용감성을 적극적으로 설명하곤 했었다.
柳 장군은 1960년 4.19 의거 이후 등장한 張勉 정부 시절 사단장으로 근무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부패상을 몸소 겪었다. 그는 5.16 주체는 아니었으나 군사혁명의 지도자가 朴正熙 소장이란 것을 확인한 다음에는 지지에 앞장섰다.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외무위원장으로서 對美외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어를 잘 하는 그는 1950년대 말에 駐美대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한 적도 있다. 민정이양 후 柳 장군은 군으로 돌아가지 않고 외교관으로 전직했다. 駐필리핀 대사, 駐오스트리아 대사, 駐월남대사, 駐사우디아라비아 대사를 지냈다.
그가 오스트리아 대사일 때 故李承晩 대통령의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고향인 비엔나에 와서 외롭게 살고 있었다. 柳 대사는 朴 대통령에게 건의해 프란체스카 여사가 귀국하여 이화장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왔다. 柳 대사는 한국 건설업의 진흥에 큰 공을 세운 분이다. 한국 건설업체들은 한국군을 따라 월남에 가서 해외공사를 하면서 체질을 강화했다. 그 경험을 살려 1973년 제1차 석유파동 이후 중동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월남대사로서 해외건설의 가능성을 확인했던 柳 대사는 1970년대 후반엔 駐사우디 대사로 근무하면서 한국의 건설회사들이 中東에서 활동하는 것을 외교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는 기업주들이 私益을 추구하느라고 國益을 희생시키는 일을 막느라 애를 먹은 이야기를 생전에 많이 했다. 朴 대통령 서거 이후 崔圭夏 정부 시절 그는 동자부, 교통부 장관으로 짧게 일했다. 신군부 집권 이후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동아건설 부회장으로 영입되어 그 유명한 리비아 大水路 공사를 현지에서 지휘했다.
그 뒤에도 有元건설 회장을 지냈고 申鉉碻 전 총리를 이어 朴正熙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柳 회장은 기념관 건립공사가 중단된 이후엔 朴대통령 관련 강연회와 출판, 그리고 회보 발간에 정열을 쏟았다. 몸가짐이 항상 단정하고 일처리도 분명한 柳 회장은 아무리 사소한 회의를 주재해도 꼭 발언원고나 메모를 정리하여 놓고 그것을 참고로 하여 말을 하는 분이었다.
柳 회장은 80세를 넘어서도 애국운동에 열심이었다. 2003년 3월1일의 反核反金 국민대회에도 참여했고, 작년 여름 결성된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호남인 모임'에도 이름을 걸었다. 성공회 신도인 그는 성공회 출신 일부 인사들의 좌파적 행각을 개탄해마지 않았다. 柳 회장을 만날 때마다 나는 "역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분들의 정신력은 굉장하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의 부족함을 되돌아보곤 했었다. 柳陽洙 회장은 朴 대통령과 맺은 인연과 의리를 생애를 걸고 지키신 분이다. 柳 회장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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