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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2년 8월 7일 주일 오전 예배
시편 설교 : 시편 83편
성경낭독 : 사 1:1, 10-20; 눅 12:32-40
본문 : 시 83:1-18
제목 : “전투하는 교회”
주일 오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138편 1,3,4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 15편 1,2,3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 33편 4,6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19편 3 (고정)
설교 후 찬송 – 시 83편 3,4,5,6
성찬식 찬송 – 시 65편 5,6 (고정)
폐회찬송 – 시 102편 9 (고정)
* 아멘찬송은 해당 시편으로 할 것
전투하는 교회
주 예수 그리스도께 사랑 받는 성도 여러분!
지난 주중에 저는 신학교 교수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같이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중에 화란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수님은 8년 가까이 화란에서 공부하시면서 개혁교회를 깊이 있게 체험을 하신 분입니다. 제가 우리 성도들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을 만날 때 환경이 너무 달라 대화를 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자, 교수님은 귀국해서 교회에 부임을 하여 사역을 해보니까 그제서야 자기가 이제까지 어떤 교회에서 살고 있었는지, 또 그것이 어느샌가 자기에게 체화가 되어서 그런 교회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노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근간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이 기초가 되어 있는 교회에서 오랫동안 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 말로 장황하게 설명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종류의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걸 거기 살면서는 잘 모르다가 전혀 환경이 다른 우리나라에 오니까 그 ‘성경적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연하게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교수님은 자기가 7년 반 기간 동안 화란에 있으면서, 공부한 것도 중요했지만 ‘그 교회의 사람’이 된 것이 가장 중요한 유산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이것을 자주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개혁교회’가 무엇인지 물어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마 성도들도 비슷한 것을 경험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큰 문제가 무어냐? 설명으로 알려줄 수가 없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건 그 속에 살고, 그 속에서 겪고, 그 속에서 느껴야 되는 문제이지, 무얼 한두 가지 설명을 해 준다고 해서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자주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교회에 고신대 신학과에서 탐방 차 예배에 오는 학생들이 많다. 그런데 아무도 제대로 ‘예배를 드리고’ 가는 사람이 없다. 그냥 ‘예배를 보러/관람하러’ 온다. 그러니까 교회의 진의, 교회의 본 모습에 대하여 알려는 진지한 열망 대신에, 그저 ‘여기는 어떻게 하나’라고 ‘정보만’ 얻으려고 오기 때문에, 아무도 교회의 본 모습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예배에 몇 번 와본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화란의 개혁교회들을 제대로 알려면 몇 주 예배에 참석해서는 전혀 거기에 도달할 수가 없고, 최소 몇 년 씩은 거기에서 살아보아야 하고, 그래서 그들의 생각, 그들의 양식, 그들의 문제 해결 방식, 그들의 삶에 대한 여러 면모에서의 태도들이, 어느 순간 나에게도 스며들어서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본 다음에, 그 다음에 그렇지 않은 곳으로 불쑥 나와 볼 때, 그때서야 그 교회가 가진 저력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설교의 서론은 ‘교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이유는 시편 83편이 ‘교회에 대한 시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처럼 이렇게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교회들이 다른 유수의 교회들과 어떤 면에서 다른지도 잘 모르고, 또 심지어 어떤 때에는 다른 교회의 성도들과 교제를 하다 보면 소외감을 느끼거나, 우리가 전혀 다르다는 느낌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기도 하는데, 실은 이런 여러 종류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에서 단지 ‘다르다는 데서 오는 이질감’보다는 ‘하나님의 교회가 바로 서 있다는 데서 오는 강력한 확신’ 같은 것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끼리만 따로 고립되어서 종파주의적/재세례파적인, 곧 ‘자신들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처럼 그런 이질적인 집단이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교회로서의 아름다운 정체성의 소중함은 언제나 보물로서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시편 83편을 통해서 “사방에서 우겨쌈”(고후 4:8)을 당하여도 넘어지지 않고 낙심치 않아도 될 ‘교회’를 배우고, 그로 인하여 평안과 기쁨을 얻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요청
마십시오
시편 83편은 세 번의 “하지 마십시오”로 시작합니다. 1절이 그것입니다.
“침묵지 마소서”, “잠잠치 마소서”, “고요치 마소서”
우리말로 보면 다 비슷비슷한 말이지만, 단어들이 가진 의미들에서의 차이들은 있습니다.
1) “침묵지 말라”는 것은 원래 “쉬다”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쉬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쉬고 계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쉬고 계시지 말고 무언가 해 달라는 의미로 읽으면 되겠습니다.
2) “잠잠치 말라”는 단어의 뜻을 보면, “원래 말을 할 수 있게 해야 하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의사소통을 중지할 때 사용되며 ‘혀를 깨물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이 무언가 말을 하셔야 되는데 아무말도 안 하고 계신 것에 대한 언급입니다.
3) 세 번째 단어인 “고요치 마소서”는 단어의 뜻으로는 “전쟁이 없이 평온한 모습”,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즉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평안한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 말은 사실 거꾸로를 보여줍니다. 지금 상황이 그렇게 평안하게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1절을 읽으면 우리는 무언가 다급함을 느끼게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급박한 개입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하지 마십시오”를 잘 보면, 마치 하나님은 지금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느긋이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무언가 큰일이 생겼는데, 낚싯대를 호수에 드리우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강태공처럼, 하나님께서 그러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유
시인의 이런 다급한 요청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다음 절인 2,3,4절에서 그 이유를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대저 주의 원수가 훤화하며 주를 한하는 자가 머리를 들었나이다. 저희가 주의 백성을 치려 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의 숨긴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가서 저희를 끊어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아마도 이 말씀에 의하자면 이스라엘 나라는 지금 적들의 침입을 코앞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 나라들이 일심하여 이스라엘 나라를 치러 들어오기 직전인 것이지요.
2절을 보시면 “원수가 훤화하였다”가 나오고 “머리를 들었다”가 나오는데 “훤화하다”는 것은 ‘소리를 높이다’, ‘시끌벅적하다’라는 뜻입니다. 원수들이 모여서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2절은 대구를 이루고 있는 말씀이죠. “주의 원수”가 “주를 한하는 자”와 대구를 이루고, “훤화하다”가 “머리를 들었다”와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원수가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는 장면이 어떤 모습인지 약간 그려볼 수가 있게 됩니다. “머리를 들었다”라는 것은 주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위세를 과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와 대구를 이루고 있는 “훤화하는 것”도 그런 정황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즉 단순히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마치 전쟁을 끝내고 나서 술판이라도 벌이면서 와글와글하고 있는 것, 그런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3절에서 나오듯이 “저희가 주의 백성을 치려 하여”, 즉 아직 전쟁을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전쟁을 치른 후도 아닌데, 마치 전쟁이 끝난 양 머리를 치켜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양상을 충분히 상상해볼 수가 있겠죠. 이제 뒤에서 보게 될 것인데 이 모인 적들은 엄청난 수의 연합군입니다. 이스라엘 나라 하나를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대단한 수의 군대들입니다.
이런 정황이라면 아직 전쟁을 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들이 “훤화”하는지 쉽게 이해가 됩니다. 아주 쉽게 무너뜨릴 수 있겠다는 것이지요. 전쟁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축제 분위기입니다. 내일 전쟁을 치러 가야 되는데 그 전날 밤에 이미 술파티를 벌이고 있습니다.
시는 약간 이렇게 감성을 섞어가며 읽는 것이 좋은데, 2절과 3절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런 장면을 마치 영화 보듯이 상상해볼 수가 있게 됩니다.
적들의 정체, 그리고 이스라엘의 정체
나라들
그러면 조금 전 말씀드린, 저 대단한 수의 연합군이란 어떤 이들인지를 한 번 살펴봅시다. 적들의 정체는 6절부터 8절까지에 그 명단이 나와 있습니다. 총 10개의 나라들의 명단이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에돔, 이스마엘, 모압, 하갈인, 그발, 암몬, 아말렉, 블레셋, 두로, 앗수르”
실제로 우리가 아는 역사 속에서 이렇게 열 개의 나라가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한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것을 여러 상황들에 대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마도 가장 그럴듯한 것은 ‘실제로 이스라엘이 겪었던 여러 민족들과의 전쟁들을 가상으로 한데 뭉뚱그려서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여기 언급된 나라들은 모두 실제로 이스라엘의 적국들이었습니다. 하나하나를 따져보면 언제든 이스라엘을 침입할 수 있거나 또 실제로 침입을 했던 나라들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적들을 모두 한꺼번에 말함으로써 이런 종류의 전쟁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교회를 보여주려는 것이 이 시편의 목적이라 하겠습니다. 실제 열 나라가 동시에 쳐들어온 역사적 사실은 없더라도 이 열 나라 모두가 ‘연합하여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교회를 궤멸시키려 했다’는 것은 명확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아마도 시인은 시적 자유 속에서 이것을 실제 한 전쟁인 것처럼 묘사했으리라 생각합니다.
형제국들
그런데 이 나라들의 면면을 가만히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 수 있습니다.
‘에돔’은 누구입니까? ‘에서’, 곧 야곱의 형의 후손들입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들 중 이삭의 형이죠.
‘모압’과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두 딸들이 아버지와 동침하여 낳은 아이들의 자손들입니다.
‘아말렉’은 에돔과 마찬가지로 에서의 후손입니다(창 36:12).
여기 등장한 민족들의 전체 목록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의 나라들이 단지 이스라엘의 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형제국들’, 곧 공통의 조상을 두고 있는 나라들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 방점을 찍어주는 중요한 사실은 8절에 나옵니다.
“앗수르도 저희와 연합하여 롯 자손의 도움이되었나이다.”
8절 말씀을 읽어보면, 여기 언급한 모든 나라들이 동시에 “롯 자손의 도움이 되었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전체 연합군들이 모두 누구를 돕는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가 하면 “롯 자손의 도움”, 롯 자손이 누구입니까? 모압과 암몬이죠. 네 그러니까, 이 전체 연합군들의 주체가 되는 이들을 8절이 누구로 설정을 하고 있는가 하면 “롯 자손”이라고 설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8절의 말씀 때문에 우리는 사실상 10개나 되는 나라들이고 제각각 다 독립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나라들이지만, 이 전체 나라들이 뭉뚱그려졌을 때 ‘무엇을 의도하기 위하여’ 이 나라들이 설정되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있는 나라들이 사실은 형제국들이다”라는 것이지요.
달리 말하면 이렇게 됩니다. 원래로서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원래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 수 있었던 나라들이, 그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했고, 그들이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면서 이스라엘의 적이 되었고, 이들이 주축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없애버리려는 그런 도구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이러한 적국들, 이러한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연합국들을 하나님이 ‘누구로’ 인식하는가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누구로’ 인식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시편 83편은 이 둘을 의도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말함으로써 잘 비춰주고 있습니다. 아마 이 두 가지 사실들을 생각해 보면 왜 이스라엘의 적국들을 형제국들로 묘사했는지 이 시의 본의를 충분히 읽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 이들을 누구로 보는가?
1)
첫째, 이 적국들을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대저 주의 원수가 훤화하며 주를 한하는 자가 머리를 들었나이다.”
“한하다”는 것은 ‘미워하다’라는 뜻입니다.
자, 이번에 다시 2절을 읽으니까 무엇을 발견하셨습니까? “적국들을 하나님께서 누구라고 말씀하시는가?”라는 질문을 듣고 다시 2절을 보시니까, 아까 앞에서 2절을 읽을 때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셨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2절에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주의 원수”라고, ‘이스라엘의 적국들’을 “주를 미워하는 자”라고 말씀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이 2절의 언급을 우리가 방금 말했던 ‘이스라엘의 형제국들이 주축이 된 연합군’이라는 주제와 연관시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방 나라를 말할 때 이방 나라는 ‘객관적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미워하는’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이라는 식으로 읽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어떤 나라가 쳐들어올 때 그 나라가 굳이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2절을 보면, 시편 83편의 전쟁은 이런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시편 83편의 전쟁은 그저 ‘한 나라와 또 다른 나라들의 전쟁’이 아닙니다. 여기 나오는 전쟁은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시인은 이것을 드러내보여주기 위하여 연합군의 대표를 “롯의 자손들”(8절)로 설정했습니다. 여러 나라가 함께 싸우지만 그 안에 이스라엘의 형제국들이 가득 들어 있게 설정했습니다. 즉 이들은 고의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뛰쳐 나간’ 자들이고, 따라서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입니다.
2)
12절도 한 번 봅시다. 12절은 이 적들이 말하는 대사인데, 그들이 무엇을 원하여 이렇게 이스라엘을 치고 있는지 그 속내를 말한 것입니다.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취하자 하였나이다.”
이 말씀은 이방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땅’입니다!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목장”이란 가나안 땅, 곧 하나님의 약속의 땅입니다. 이스라엘이요 교회지요. 적국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풍요’인데! ‘하나님의 풍요’이지만 ‘하나님이 없는 풍요’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소유를 탐합니다! 하지만 이 소유격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의목장을”
“우리의소유로”
그렇지요? 이들은 하나님의 풍요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복 주신 땅을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대적인 자들이 왜 “주의 원수”, “주를 미워하는 자”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목을 치고, 그 하나님의 기업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대하여는 어떤가?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교회는 무엇 속에 있습니까? 세상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풍요들에서 ‘신앙’만 제거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전리품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교회를 멸절시키고 그 교회가 가진 아름다움을 세속화하여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것이 세상이 원하는 바요, 세상이 교회를 쳐서 멸절시키려 할 때 얻으려는 목표입니다.
3)
결국 우리는 이 적들의 정체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 적들과 교회가 행하고 있는 전쟁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보게 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교회의 전쟁’이 무엇보다 ‘하나님 자신의 전쟁’임을 보게 해 줍니다. 적들은 ‘교회의 원수’로 묘사되지 않고 “주의 원수”로 묘사되었습니다. 이들이 탐내는 것은 “하나님의 목장”을 “자신의 소유”로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를 미워하는 세상은 결국 하나님의 대적들이요, 세상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풍요를 하나님 없이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목표입니다!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무엇으로 보시는가?
그러면 동시에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교회’, 곧 ‘이스라엘’은 무엇으로 보십니까?
그것은 3절에 나옵니다.
“저희가 주의 백성을 치려 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의 숨긴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
시편 83편이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는 것에는, 우리가 조금 전 적들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서 살핀 것과 마찬가지로 함의가 들어 있습니다.
3절에서 시편이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하는 용어는 둘인데, 둘 다 언약적 용어입니다. “주의 백성” 그리고 “주의 숨긴 자”입니다.
“주의 백성”이 언약적 용어임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니까 “주의 숨긴 자”에 좀 더 치중해 보도록 합시다.
여기 “숨겼다”는 것은 신학사전에는 이렇게 풀이되어 있습니다.
“그 가치 때문에 어떤 것을 간직 또는 비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백성”이라는 말과 이 “숨기다 혹은 비축하다”라는 말(단어는 다르다)이 함께 사용되는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실 때 많이 들을 수가 있습니다. 이때 “간직하기 위해 숨기는 것”을 우리말로는 보통 ‘보물’(세굴라)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성경은 종종 ‘백성’과 이 ‘보물’을 함께 사용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말씀은 출애굽기 19장 5절 말씀, 그 유명한 언약 백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출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제가 여러 설교에서 이 말씀의 “소유”를 ‘특별한 소유’, 곧 ‘보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너무나 아끼기 때문에 벽장 안에 넣어두고 가끔씩 꺼내보는 그런 종류의 소중히 여기는 보물! 그것이 여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사용된 말씀, “세계가 다 나의 것이지만, 세계가 다 내 보물은 아니다! 너희만이 열국들 중에서 나의 보물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같은 말씀이 신명기에도 나옵니다.
신 14:2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
우리말로는 출애굽기에서는 “소유”, 신명기에서는 “기업”이라고 번역했지만 둘 다 같은 단어, ‘세굴라’입니다. 곧 ‘보물’이죠. 신명기 또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을 “지상 만민 중에서 택한”, “자기의 기업, 곧 보물”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시편에서 2절이 이방 나라들을 “주의 원수”, “주의 미워하는 자”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고, 3절이 이스라엘, 하나님의 교회를 “주의 보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봅니다. 2절과 3절은 명백한 대비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읽는 우리는 분명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교회와 세상과의 싸움의 정체를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세상과 싸우며 분투합니다. 하지만 기억합시다. 그것은 사실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수와 싸우시는 전쟁이며, 자신의 보물을 지키기 위한 싸움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목장”을 노립니다. 하지만 교회가 싸울 때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와 더불어 싸우심으로써 교회 안에 보존된 자신의 보물을 지키십니다. 교회가 그분의 기업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승리하시는가? : 사사 시대를 종식시키는 여호와의 전쟁
우리에게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까지 말씀을 묵상하는 일을 통해서 아마도 몇 가지 통찰력을 얻으실 수 있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을 둘러싼 무리들로부터 공격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격은 단순한 ‘국제 정세에서 오는 알력’ 같은 것을 넘어선 것입니다. 곧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국가간의 이해 관계에서 오는 대립’으로 보여도, 사실 그 속, 그 실체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기업인 교회를 훼방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교회가 이 시편의 시대 뿐 아니라 모든 시대에, 이와 같은 공격 속에 살아가고 있어왔다는 것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 21세기의 우리 교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싸움은 무엇인가요?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정부가 교회를 차별적인 법안 제정으로 공격하고 있잖아!”
“아이들 학교에 단군상을 세우는 일은 교회를 향한 직접적인 공격이야!”
“마이클 잭슨이나 마릴린 맨슨이 국내에 들어오는 일을 어떻게든 저지해야 해! 사탄의 공격이니까!”
하지만 여러분, 시편 83편을 배운 사람들이라면 이 전쟁의 성격을 좀 더 명확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이 공격은 사실상 모든 시대의 교회에 적용시키려면 오히려 ‘외면적 공격’이라기보다 ‘내면적 공격’입니다. 우리는 보통 ‘교회가 공격받는다’라고 하면 교회를 향한 적대적 법안을 만들거나, 교회의 예배당 취득을 관공서가 방해하거나 하는 겉으로 보이는 일을 상상하기 쉽지만, 사실 이 말씀을 잘 들여다 보면 이 공격의 핵심은 ‘주의 원수’들이 ‘주의 목장’을 훼방하는 데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교회를 진심으로 훼방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과연 외적인 탄압들이 교회를 진심으로 훼방할까요? 아마 아닐 겁니다. 교회의 첫 몇 세기 동안 사탄을 실제로 이렇게 국가와 권력을 사용하여 많은 핍박자와 순교자를 낸 뒤에 처절히 패배했습니다. 오히려 이런 외적인 핍박은 교회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오히려 교회를 진짜 훼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교회를 세속화’하는 것입니다.
마치 잉크에 물이 들 듯이, 가만히 있는데 서서히 온몸에 세상의 물이 다 스며들어 버리고, 그것이 뇌에도 스며들어 그 생각이 세속적이고, 그것이 팔과 다리에도 스며들이 행동양식도 세상이 하는 것과 구별될 수 없게 하는 것!
우리는 그것이 지금 우리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주의 원수들’의 ‘아주 효과적인 공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미 무너졌습니다. 제가 설교의 서론에서 말씀드렸던 화란의 개혁교회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왜 그 교수님은 한국에 들어왔을 때 ‘이질감’을 느꼈습니까? 왜 한국교회 안에 들어오면 ‘개혁교회와 다름’을 느낍니까? 그것이 단순히 ‘문화 차이’에서 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저도 여러분께 늘 우스개로 말씀드리듯이 노회 같은 곳에 가면 저는 ‘절간에서 살다가 세속에 내려 온’ 느낌을 받습니다. 목사와 장로들이 모였는데, 거기 ‘신앙적 정서’가 없습니다. ‘말씀을 따라 판단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세상의 커다란 격식 있는 회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이죠. 분명히 거기에는 경건회도 있고, 말씀도 있고, 기도도 있는데, 거기에서 ‘이질감’을 느낍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우리가 이미 지나치게 세속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승리
결론을 봅시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붙들고 살아가야 할지, 또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틀리지 않았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응대하시는지를 봅시다. 오늘 시편 83편에서 이를 살피는 몇 가지 방법들이 있겠지만, 제가 오늘 선택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멸절시키시리라 말씀하시는 이들이 누구인지를 살핌을 통해서입니다. 앞에서 공격하고 있는 열 나라들이 나왔는데 9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멸절시키기를 기원하는 말씀에서 일곱 개의 대상이 다시 나옵니다. 9절부터 11절까지를 읽으면서 이 멸망당할 일곱 대적이 누구인지 찾아보십시오.
“주는 미디안인에게 행하신 것 같이, 기손 시내에서 시스라와 야빈에게 행하신 것같이 저희에게도 행하소서. 그들은 엔돌에서 패망하여 땅에 거름이 되었나이다. 저희 귀인으로 오렙과 스엡 같게 하시며 저희 모든 방백으로 세바와 살문나와 같게 하소서”
일곱 대적은 누구입니까? “미디안인, 시스라, 야빈, 오렙, 스엡, 세바, 살문나”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미디안인”은 사사 기드온에게 패배한 대표적인 민족입니다.
“시스라”와 “야빈”은 사사기 4장에 나오죠. 여인 사사 드보라와 그의 용사 바락에게 대항하여 싸우던 가나안인들입니다. 야빈은 가나안의 왕이었고 시스라는 철병거 구백 승을 이끈 군대장관이었습니다.
“오렙”과 “스엡”은 사사기 7장에서 기드온의 삼백 용사에게 죽임을 당한 미디안인 두 방백들입니다.
“세바”와 “살문나”는 바로 그 다음 장인 사사기 8장에서 역시 기드온에게 쫓김을 당해 죽임을 당한 두 용사들입니다.
자, 이 일곱 대적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시편의 기록 시기가 이로부터 꽤나 후이기 때문에 그간에도 수많은 적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혔음에도 여기 나오는 대적들은 전부 ‘사사시대의 대적’, 그 중에서도 특히 드보라의 시대와 기드온의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패퇴를 당한 이스라엘의 대적들만 모아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사사 시대로부터 한참 후의 시대인 이 시편의 시대에 왜 굳이 ‘하나님의 대응’을 사사시대로부터 취했을까요?
이유를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시편 83편이 ‘대적으로부터의 승리’를 충분히 상상 가능한 다윗이 적들을 패퇴시키는 장면 같은 곳에서 가져오지 않고 굳이 사사 시대로부터 가져온 것은 ‘사사 시대’가 가지고 있는 영적 특성 때문입니다.
‘사사 시대’가 언제입니까? 사사 시대야말로, 우리가 방금 이야기했던, ‘교회가 세속에게 거의 삼켜져버린’ 시대입니다. 사사 시대야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의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사 시대의 승리’를 통해 말씀하려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상황이 제아무리 열악하다 할지라도!
교회가 제아무리 세속에 삼켜져서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 사람들이 제각기 하나님 대신 자기가 왕이 된”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용사들을 세우셔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 가장 많은 대적과 연관되어 등장하는 기드온의 시대는 암울했습니다.
하나님은 구석에 숨어서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던, 용사로서의 기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드온의 300 용사는 ‘잘 싸울 것 같은’ 사람들은 모조리 다 집으로 돌려보내고 ‘개처럼 물을 핥은’, 말하자면 ‘개같은’ 사람들만 모아놓은 집단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여 여기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모조리 물리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싸움 중에 있습니다.
심지어 그 싸움은 이기기 어려워보이는, 교회 안의 구성원들이 세속에 풀 절어 있는 그런 승산 없는 싸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승산 없는 싸움 중에서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승리하였던 예들을 들면서, “그때의 대적을 내가 쳐서 죽였으니, 지금의 너희도 염려할 필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로 우리가 세상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능이 없어서일까요? 교회가 너무 무력해서일까요? 아니오, 대답은 둘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승리하실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믿지 못했거나, 내가 기대하는 승리가 오히려 세속적이어서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볼 수 있는 눈이 없거나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대를 동시에 내려다보십니다.
그리고 버드뷰로, 그 모든 것을 위에서 내려다보시고는, 교회가 가야할 길을 알려 주십니다.
교회는 이 하나님을 믿고 세속과 싸우며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궁극적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 교회가 여기에서 조금 물러나, 세상과 타협할 길을 모색하게 된다면, 우리 교회 역시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되는 복음주의 교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어질 것입니다. 설교의 서두에서 말씀드렸던, 교수님이 경험했던 개혁교회를 한국 땅에서는 맛볼 수 있는 곳이 점점 더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승리를 바라보고 똑바로 걸어갑시다.
비록 세속이 우리를 흔들지라도 말씀만을 의지하며 곧게 나아갑시다.
주께서 승리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