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 소요(逍遙)
이월 초순에 든 절기 입춘을 맞았다. 어릴 적 시골집 문간이나 기둥에는 입춘 축이 붙었는데 아파트 생활에서는 사라진 풍습이다. 입춘은 예전 농경시대에는 본격적인 농사를 앞둔 때이기도 했다. 봄이 시작되는 기점이긴 해도 아직 추위가 남았는지라 입춘에 장독 깨진다거나 오줌독 깨진다는 속담을 들었다. 염도가 높으면 결빙이 어려울 텐데 그만큼 날씨가 춥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침나절 집에서 책을 펼쳐 보고 글을 몇 줄 남겼다. 이른 점심을 해결하고 햇살이 번질 무렵 산책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아파트단지 맞은편 상가 안경점에 들러 안경테와 유리알을 세척하고 원이대로로 나갔다. 동정동으로 가는 버스를 타서 북면 온천장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 천주암을 지난 굴현고개에서 내렸다. 입춘 절기에 맞추어 봄이 오는 낌새를 찾아 나선 걸음이었다.
굴현고개는 낙남정맥이 천주산에서 흘러내려 구룡산으로 건너가는 산기슭이다. 차도보다 위에 자리한 천주암에서는 비구의 낭랑한 독경 소리가 들려왔는데 법회의 실황인지 녹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도심과 인접한 근교 산기슭은 개발 제한 구역에 묶여 집들은 들어서지 못하고 텃밭의 농막만이 드문드문 보였다. 몇 그루 매실나무는 가지마다 맺힌 꽃눈이 꽃망울로 부풀어갔다.
길섶에는 예전에 보이질 않던 약수터 간판이 보여 발을 멈추고 문구를 살폈더니 허깨비 샘이라 했다. 허깨비 샘은 북면이나 칠원 산정마을 사람들이 옛적 창원도호부 동헌이 있는 북동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굴현고개를 넘나드는 길섶의 샘터가 사람들 눈길에 잘 띄질 않아 허깨비 샘이라 불렸단다. 위치가 알쏭달쏭해서 우리 지역 방언으로 ‘허째비’나 ‘허지비’로도 불린 샘터였다.
정갈하게 해둔 샘터 뚜껑을 열어보니 옥로 같은 샘물이 솟아났다. 샘터에 걸린 바가지로 샘물을 떠 마셨더니 천연수 물맛이 좋았다. 샘터를 지나 구룡사로 향해 내려서니 ‘과거 보러 가는 길’이라는 이정표가 나왔다. 조선시대 남도의 창원 유생이 한양 천 리 길로 과거를 보러 가는 시발점이었다. 굴현고개를 넘어 북면에서 본포나루에서 강을 건너 창녕과 현풍으로 올랐지 싶다.
과거 길 이정표에서 구룡사로 드니 법회에 참석한 신도들이 가득했다. 구룡사는 통도사 말사로 조계종 창원 포교당을 겸했다. 구룡사는 부처님 오신 날도 본사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원로 스님들이 신심 두터운 불자들과 교류를 갖는 모습을 봤다. 입춘 법회에 참석한 신도들 대부분은 중년을 넘긴 여성들이었다. 법회와 점심 공양을 마치고 뭔가의 절차를 밟느라 차례를 기다렸다.
사찰 경내 설법전과 종각 사이에는 한 그루 산수유나무가 있었는데 그새 중창 불사로 사라지고 없었다. 법당에서 후원으로 오르는 데크를 설치하면서 어디로 옮겼는지 베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남향의 볕 바른 자리라 어느 곳보다 일찍 꽃망울을 터뜨리는 산수유꽃이었는데 볼 수 없어 아쉬웠다. 대신에 근년에 어디선가 옮겨다 심은 목련은 가지마다 꽃눈은 솜털이 부풀어갔다.
구룡사에서 북동으로 내려가니 고속도로 못미처 백영월 불망비가 나왔다. 조선 후기 생몰 연대가 분명한 고아 영월은 관기가 되어 은퇴 후 고향 창원의 북동을 찾아와 평생 모은 재산을 어려운 이들에게 베풀고 세상을 따나 지역민이 그의 선행을 기려 빗돌에 새겨 놓았다. 영월 묘소는 비석으로부터 3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는데 후일 들러보기로 하고 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났다
KTX복선 선로가 생기면서 예전 경전선 철길은 폐선되어 산책로로 바뀌었다. 창원 향교 뒤에서 신풍터널로 가니 행복 의창 터널 천정은 보수 공사로 통행을 막아 고갯길을 넘어 용강에서 용암을 거쳐 용전으로 갔다. 남산리에서 교직 은퇴 후 블루베리 농사를 짓는 예전 근무지 선배를 뵙고 세상 사는 얘기를 나누다 덕천마을로 나갔다. 송정에서 오는 42번 버스를 타고 시내로 왔다. 23.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