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갑신정변, 그러나 삼일천하
1884년 음력 10월 17일 저녁, 낙성식이 열리던 우정국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불을 피해 뛰어나갔던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갑신정변의 시작이었다.
아수라장이 된 연회장에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 급히 빠져나왔다. 이들은 서재필 휘하 사관생도들을 경우궁(지금의 서울 계동 현대사옥 뒷자리)으로 이동시키고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 일본군의 출동을 확인한 뒤 대궐로 향했다. 고종을 만난 이들은 우정국에서 변란이 일어났음을 알리고 형세가 위급하니 피할 것을 요청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급히 경우궁으로 몸을 피했다. 곧 일본군이 경우궁 외곽을 에워쌌다. 그 뒤 이들은 왕명으로 윤태준, 조영하, 민태호, 이조연 등 수구파들을 불러들여 살해했다.
그렇게 수구파 수뇌들을 제거한 개화파는 날이 밝자 대내외에 새 정부의 발족을 알렸다. 고종의 사촌형 이재원을 영의정에 앉히고, 홍영식은 좌의정에, 박영효는 전후영사, 서재필은 병조참판, 김옥균은 호조참판을 맡는 등 국가 중추기관을 장악한 뒤 혁신적인 새 정책을 발표했다. 청나라에 잡혀간 대원군을 가까운 시일 안에 모셔오고 조공을 폐지하는 등 청나라로부터 자주권을 확립하고 독립국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려 했으며, 문벌을 폐지하고 지조법을 개혁하는 등 개혁 의지를 천명했다. 새로운 제도의 도입보다 기존의 제도에 개혁적 인물을 배치하려는 한계가 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당시 상황을 고려한 현실적인 방안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 정책들은 3일 만에 폐기되고 만다. 예상외로 청군이 신속하게 개입하면서 사태가 급변했다. 당시 청군을 이끌던 원세개(위안스카이)는 일본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전쟁 준비가 미처 되어 있지 않았던 일본은 한발 물러섰다. 수구파와 합세한 청군이 고종의 일행이 환궁한 창덕궁에 진입하자, 일본군의 동원과 자금의 차관을 약속했던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그간의 약속을 저버리고 철수하려 했다. 개화파가 지휘하는 군대가 청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근대국가를 꿈꿨던 이들의 정변은 실패로 끝났다. 온건파인 홍영식 등은 왕에게 투항하고, 김옥균과 박영효 등은 재기를 꾀하기 위해 일본군을 따라 인천으로 향했다. 원세개와의 친분 등을 믿고 고종을 따랐던 홍영식 일행은 청군에게 잡히자 그 자리에서 참혹하게 죽었고, 다케조에를 따랐던 김옥균 등은 마침 인천항에 입항해 있던 일본 배에 올라타 조선을 탈출할 수 있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해 청년 엘리트로 정계에 진출
1882년에는 서광범과 함께 직접 일본 시찰을 떠나 당시 일본 재야 정객들과 면담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 제물포조약에 따라 일본에 파견되는 수신사의 고문 자격으로 다시 일본에 가서 신문물을 접했다. 그러나 귀국해보니 임오군란 뒤 정권을 잡은 수구파와 이들 뒤에 있는 청나라의 압력에 개화파가 점점 내몰리고 있었다. 또한, 청나라에서 추천한 재정 고문 묄렌도르프는 사사건건 김옥균과 대립했다.
특히 파탄 상태에 이른 국가 재정을 해결하기 위해 방안이 논의될 때 묄렌도르프는 당오전의 주조를 주장했던 반면 김옥균은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킨다며 이에 반대하고 일본에서 외채를 빌려 오겠다고 했다. 고종으로부터 위임장까지 받아 일본에 갔지만 묄렌도르프와 수구파의 음모로 차관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고 개화파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그 무렵 일본은 자주성이 강한 개화파와 손을 잡는 것보다 그 비용으로 군비를 확장해 청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했던 듯하다. 외채 도입 실패를 추궁하는 수구파의 압력에 신변의 위협까지 느낀 개화파들이 선택한 길은 급진적인 개혁이었다.
마침 프랑스와 전쟁 중이던 청이 병력을 빼가 조선에 주둔하던 청군의 병력은 반으로 줄어 있었고,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의 저항이 일어나 수구파 정권을 흔들어댔다. 개화파 내부에서 동원할 수 있는 인원도 적지 않았다. 문제는 아직 1,500명이나 남아 있는 청군이었다. 청군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일본군의 협조가 필요했다. 개화파를 부추겨 청과 연결된 수구파 정권을 약화시키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던 일본은 적극 협조를 약속했다.
김옥균은 거사 5일 전 고종과 독대하며 “국가의 명운이 위급할 때 모든 조처를 경의 지모(智謀)에 맡기겠다”는 밀지까지 받았다. 고종의 동의를 얻었다고 판단한 김옥균의 행보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농민들과 상인들의 힘을 조직할 줄 몰랐고 단지 왕권에 의지해 위로부터 개혁을 시도했으며, 일본의 침략적 본질을 보지 못한 채 일본군의 힘에 의존했다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 이들의 실패는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개입을 강화해주는 계기로 작용했고, 이는 이들에게 친일 매국노라는 오명을 씌웠다.
고단한 망명생활 끝에 암살되었으나 일제에 이용당해
선창 밑에 숨은 지 3일 만에 나가사키에 도착한 김옥균 일행은 일본에서 고단한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조선 정부는 끊임없이 그들을 죽이려고 했고,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일본도 그를 홀대해 오카사와라 섬에 강제 연금을 시키기도 했다.
1886년 고종에게 올린 편지에서 김옥균은, 청국과 일본은 모두 신용할 수 없는 나라로 조선은 결코 이들에게 의지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밖으로는 구미와 교제에 힘쓰면서 안으로 내정을 개혁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점을 강조했지만, 이미 조선 정부에게 그는 외국 군대를 이끌고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대역죄인일 뿐이었다.
1894년 김옥균은 마지막 승부수로 당시 청나라를 이끌고 있던 이홍장과의 담판을 위해 청으로 건너갔다가 조선에서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되었다. 조선에 넘겨진 김옥균의 시체는 양화진에서 능지처참 되었으나, 이듬해 반역죄가 사면되고 1910년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일제는 김옥균의 죽음을 교묘히 이용했다. 생전의 대우와 달리 김옥균의 죽음에 애도하고, 그가 조선의 개화와 독립을 위해 애쓰다 희생됐다고 칭송했다. 또한, 암살의 배후에 청이 개입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청에 대한 침략전쟁을 유도하기도 했다.
특히 말년에 김옥균이 심취했던 삼화주의(三和主義)를 왜곡해 일본의 대륙침략에 철저히 이용했다. 삼화주의란 한·중·일 삼국의 공존과 화맹을 통해 서양 침략에 대응하고 아시아를 부흥시키자는 주장을 말한다. 일제는 대동아공영권을 통한 아시아 지배의 명분을 삼화주의에서 찾고, 김옥균을 동양평화의 희생물로 우상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