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선계仙界 경회루.
경복궁에서 사계절 어느 때 가다라도 항상 아름다운 곳은 어디 일까? 독일의 작가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어느 한 순간에 대해서, “멈추어라 순간이여!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하고 경탄할 만한 곳이 경회루(국보 제224호)이다. 근정전과 사정전 일대가 정치와 직접 관련이 있는 엄격한 정치적 공간인데 반해 경회루 일대는 연회를 베풀며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다.
경회루는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273년간 폐허로 남아 있다가 고종 4년(1867)에 흥선대원군에 의해서 다시 지어졌다. 그러나 연못과 넓은 석조 시단, 아름다운 석조 난간, 그리고 크고 긴 석조 기둥(석주)는 태종 때 최초로 만들어진 그대로의 모습이다.
크고 넓은 연못 가운데 앞면에 8줄, 옆면에 6줄, 도합 48개의 길고 큰 돌 기둥위에 정면 7칸(34.4미터), 측면 5칸(28.5미터)의 크고 웅장한 누각을 세운 것이다.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써 서로 만난다(경회慶會)’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경회루는 임금이 사신을 접대하거나 공신들을 위한 연회장소로 사용되었다. 그 밖에도 과거시험을 베풀고, 활을 쏘는 공간이자 날이 가물 때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창건하고서 경회루 주위에 작은 연못을 조성하였고, 태종 12년(1412)에 왕의 명에 의하여 큰 방지를 파고 경회루를 창건하였다.
연못의 크기는 동서가 128미터, 남북이 113미터인데, 못 안에 방형의 섬을 만들었고 거기에 2층의 누각을 세운 것이다. 이 섬에 들어가는 3개의 석교가 있는데, 모두 하엽동자荷葉童子에 회란석廻欄石을 섬 주위까지 돌렸다.
경복궁 서쪽에 새로 큰 다락집을 지었다. 그 다락집은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에게 명하여 지은 집이다. 그 제도制度가 굉장히 커서 앞이 탁 트이고 시원스럽다. 또한 연못을 파서 사방에 들리었다. 경복궁 서 북편에 본래 조그마한 다락집이 있었는데, 그것은 태조께서 이룩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임금께서 좁다 하여 고쳐 짓게 하셨다.
이는 《태종실록》 태종 12년 4월 2일에 실린 글이며, 《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경회루는 사정전 서쪽에 있고, 그 집은 연못으로 둘리었는데, 연못이 깊고 넓어서 연꽃을 심었으며, 가운데에 섬 둘이 있다.
경회루의 현판은 《태종실록》 태종 12년 6월 9일에 “세자에게 명하여 큰 글씨로 경회루 편액을 쓰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당시 왕세자였던 양녕대군이 쓴 것이 확실하다.
현재는 탁 트인 공간으로 누구나 출입이 가능하지만 그 당시에는 연못 둘레에 담장이 들러져 있어서 출입이 제한되었다. 당시에는 경복궁 동쪽 다리에서 연결되는 함홍문과 서쪽 다리에서 연결되는 천일문, 그리고 남쪽 다리로 연결되는 경회문으로만 출입이 가능했다.
이 3개의 문은 내전인 교태전과 강녕전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출입이 제한된 이곳을 무단으로 들어왔다가 난처한 상황을 겪었던 사람이 궁궐의 교서관으로 근무하던 구종직이라는 사람이었다.
궁중에 있는 교서관에 근무하던 구종직丘從直이 예전부터 경회루가 뛰어난 경치를 지니고 있다는 말을 들어오다가 숙직을 하게 된 어느 날 밤에 관복을 갖추지 않고 평복 차림으로 그만 경화루 다락 아래까지 숨어 들어가서 이리저리 거닐며 그 풍치를 즐겼다.
그때 별안간 세종 임금님의 거동 기척이 들리더니 세조임금이 내시 몇 몇만 거느리고 단촐 한 가마에 올라 후원後苑 쪽으로부터 다가오는 것이었다. 놀란 중에 황공하여 가마가 지나가는 길가에 납작 엎드려서 대죄를 하였다. 임금께서 놀라시며 다그쳐 물었다.
“게 누구냐?”
“교서정자 구종직으로 아룁니다.”
“어찌하여 한밤중에 지밀한 여기까지 들어왔단 말인가?”
“신은 일찍부터 경회루의 옥주요지玉柱瑤池는 하늘 위의 신선 세계라고 뜨자와 오늘 밤 예각藝閣에 숙직하게 된 계제에 한 번 구경하고 싶어서 감히 미관말직의 몸으로 저지른 죄로 아뢰옵니다.”
“그러면 노래를 잘 부르느냐?”
“격양가擊壤歌를 부를 줄 아오나 성률聲律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줄로 아뢰옵니다.”
이에 세조께서 한번 불러 보라 하시니 종직은 목을 빼고 느릿느릿 길게 노래를 부르는데, 명창名唱이라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며 더욱 목을 놓아 높은 소리로 부르라 하시었다. 이윽고 임금께서 기뻐하시며,
“춘추春秋도 그렇게 잘 외우는가?” 하고 재차 물으셨다.
“잘 외는 줄 아룁니다.”
선선한 대답을 들은 임금께서 그 자리에서 《춘추》 제1권을 외우도록 하였다. 종직은 그야말로 청산유수로 춘추를 외웠고, 임금께서 감탄하시며 술까지 내리셨다.
이 이야기는 차천로가 편찬한 《오산설림五山說林》과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으며, 세조는 다음 날 그를 종 9품에서 종 5품의 부교리로 승진을 시켰다고 한다.
경회루는 단종이 그의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옥쇄를 넘겨 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고, 비운의 임금 연산군이 풍류를 즐겼던 공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