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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되돌아가 주님께 신앙 고백을 하였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5,14-17
그 무렵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14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나병 환자인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15 나아만은 수행원을 모두 거느리고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되돌아가
그 앞에 서서 말하였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이 종이 드리는 선물을 부디 받아 주십시오.”
16 그러나 엘리사는 “내가 모시는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결코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거절하였다.
그래도 나아만이 그것을 받아 달라고 거듭 청하였지만 엘리사는 거절하였다.
17 그러자 나아만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시다면, 나귀 두 마리에 실을 만큼의 흙을 이 종에게 주십시오.
이 종은 이제부터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 2,8-13
사랑하는 그대여, 8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9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10 그러므로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12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13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1-19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he cleansing of ten lepers
말씀의 초대
엘리야 예언자가 일러 준 대로 하여 나병이 치유되자,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주님만을 섬기겠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며,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나병 환자 열 사람 가운데, 외국인 한 사람만이 돌아와 감사를 드린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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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 예언자가 일러 준 대로 하여 나병이 깨끗해진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며 선물을 건네자 엘리사는 거절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며,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치유하시는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하나였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치유해 주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전에 나병은 하늘이 내린 징벌로 여겨졌고, 전염을 우려하여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병이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소외와 고독, 그리고 하느님께 받은 징벌이라는 사회적·종교적 인식까지 더해서 나병 환자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는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십니다. 이 말씀은 그들의 병이 그 자리에서 나았다고 선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틀림없이 치유해 주시려는 의도를 지닌 말씀이지만, 거기에는 나병 환자들의 믿음이 작용해야 하는 여지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하였습니다.그들은 길을 가는 동안에 치유되었는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 사람은 유다인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포하십니다.열 사람이 모두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 치유는 아홉 명에게는 단순히 육체적인 치유에 머물고 말지만, 돌아와 감사를 드린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구원으로 연결됩니다.돌아보면 하느님의 은총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지만, 우리는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마치 치유를 받고도 돌아와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명의 환자들과 비슷합니다. 행복하기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드리기에 행복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우리 생활을 감사로 시작하고 또 마무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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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 자체가 은총이란 말이 있습니다. 숨 쉬는 순간부터 내 삶의 한순간도 거저 얻어진 것은 없습니다. 돌아보면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기적 같은 일들이 많았고, ‘살아 있음’ 그 자체가 감사할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는 이 기적 같은 인생에 감사하는 순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평과 분노로 탄식하는 순간들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족보다는 불만에 더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사람으로 대우받고 싶었던 그들의 치유에 대한 간절한 청원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예수님께서 위대한 예언자이시니 그분의 치유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 모양입니다. 한 사람, 그것도 ‘외국인’으로 표현된 이방인만이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언젠가 다시 병들고 쓰러질 육체적 병의 치유가 아니라, 성실하신 하느님의 영과 함께 살아가는 마음의 회개와 치유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선언은, 당장 나병이 나은 것에 만족하고 돌아간 다른 아홉에게 주어지지 않은 진정한 치유와 자유였습니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도 요르단 강에서 물로 씻기만 했을 뿐, 나병이 나을 것이라 믿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기적에 기뻐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약속된 땅에서 흙을 실어 가져가며 오직 주님께만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바칠 것을 약속하는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진정한 치유는 마음의 회심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오로지 하느님을 향할 때 우리는 구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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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예수님의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태도를 보인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인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만이 구원의 은총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일상 안에서 늘 감사하고 있습니까?
‘감사’에 대한 이러한 내용의 강의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만일 제가 이 본당에 오다가 자동차 사고가 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자동차가 완전히 부서져 폐차를 해야 하는데, 저는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아마도 ‘정말 기적이네요.’, ‘그나마 다행이군요.’ ‘정말 감사할 일이네요.’ 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곳에 올 때까지 다치지도 않았고, 제 자동차도 멀쩡합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 큰 기적일까요? 자동차 사고가 났지만 조금만 다친 것이 더 큰 기적일까요, 아니면 자동차 사고도 나지 않고, 다치지도 않은 것이 더 큰 기적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는 감사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하루 24시간 동안 1초도 쉬지 않고 산소를 공급하는 데에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생 일분일초도 거르지 않고 이 산소를 거저 받아먹으며 숨을 쉽니다. 이 역시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럽 대륙을 정복한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은 “내가 행복했던 날은 엿새도 되지 않는다.”고 한 반면, 극심한 신체장애자로 태어나 장애를 극복하며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던 미국의 헬렌 켈러는 “내 인생에서 행복하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누구에 더 가깝습니까?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할 수도 없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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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는데, 보기에도 끔찍한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소리 높여 청원을 드립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병을 천형(天刑)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나병은 인간이 걸릴 수 있는 질병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병이라는 뜻입니다. 최근에는 의학의 발달과 높아진 생활 수준 탓에 나병 환자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게다가 신체가 직접 상처 부위와 맞닿지 않으면 전염되지 않는다는 임상 결과까지 나와서, 나병이 결코 ‘천형’이 아님이 확인되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몸을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당시에는 몹쓸 병에 걸린 사람이 나으면, 사제에게 가서 확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사제에게 가는 동안 병은 깨끗이 나았지만, 주님께 감사드리러 온 사람은 사마리아인 한 명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자신들의 이권만 챙긴 뒤 어디론가 가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면서 구원을 덤으로 주십니다.
믿음이 깊은 사람이 주님께 감사드릴 줄 알고, 더불어 주님께 구원의 은총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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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생겨난 말들 가운데 아름다운 말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훈훈한 말이 있다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는 말일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누군가에게 감사하는 일이 자주 있는 사람은 세상을 바르게 살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반대로, 감사드릴 일이 없는 사람은 세상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감사드리는 일은 은혜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뜻이 거기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걸어가십니다. 사마리아는 이방 지역이고, 갈릴래아는 믿음으로 충만한 유다인의 땅입니다. 이방 지대와 선민 의식으로 고양된 지역의 경계선상을 걸어가시는 주님이십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기피하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의 청원을 들어 고쳐 주십니다. 그러나 감사드리는 사람은 고작 한 명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제 갈 길을 가 버렸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돌아온 그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십니다.
사실 우리도 주님처럼 경계선상을 걸어갑니다. 경계선상에서 주님께 머리를 둘 것인지, 아니면 세상에 머리를 둘 것인지는 우리가 결정해야 합니다. 주님께 머리를 두는 사람은 감사드릴 줄 아는 사람이며,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 주님께 더 큰 은총을 입게 된다는 진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감사드릴 줄 아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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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참으로 무서운 병으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그러한 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죽은 사람까지 살리시는 예수님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그들은 고쳐 주십사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적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이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아홉 사람은 너무 들뜬 나머지 감사를 잊어버렸을까요? 아무튼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보통 인간의 모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의 사람입니까? 돌아와 감사를 드린 그 한 사람에 속합니까? 아니면, 너무 좋아서 들뜬 나머지 그냥 가 버린 아홉 사람에 속합니까?
치유의 은총을 베풀?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러 온 이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 또 다른 은총을 받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나병이 나은 정도가 아니라 삶 전체가 바뀌는 은총을 받았을 것입니다. 감사는 더 큰 감사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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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한센인 열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했습니다. 혼혈인이라며 비웃고 이방인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돌아와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멸시하던 사마리아인은 감사드리러 왔는데, 정통 유다인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책입니다. 감사를 잊어버리는 것이 한센병보다 나쁘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아홉’은 감사를 잊어버렸습니다.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은혜를 망각하며 산다는 암시입니다.
병이 나은 사람들은 왜 감사를 잊고 가 버렸을까요? 예수님께 갔더라면 또 다른 은총을 받았을 터인데, 왜 그랬을까요? 너무 기뻐서 그랬을 것입니다. 벅찬 감정에 취해 순간적으로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랬더라도 그들은 은혜를 망각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그렇게 됩니다. 청할 때의 ‘다급한 모습’을 감추려 들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은총에는 감사가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더 큰 축복으로 인도됩니다. 감사는 은총을 붙잡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불만이 아홉이고 감사가 하나이더라도, ‘하나’를 기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바뀌게 됩니다. 기쁨이 아홉이고 불평은 하나인데도 불평만을 잡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지요? 언제라도 시각이 삶을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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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이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천형의 시인이라 불리었던 한하운의 시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의 한 부분입니다. 일생을 나환자라는 멍에 속에 살다 간 그의 한이 유리 조각처럼 아프게 박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한과 설움은 오늘날의 현실만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이 병의 출발은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음보다 더한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려집니다.
레위기에서는, 그 병의 증상이 나타난 사람이 있으면 ‘7일간 격리 수용하라.’고 했습니다. 그 후 다시 검진을 받아 병이 진전되지 않았다면 ‘7일간 한 번 더 수용된 뒤’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13,4-5 참조).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기에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아픔을 아셨기에 치유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감사를 드린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토록 애원한 그들이었건만 은혜를 망각한 것입니다. 너무 기뻐 잠시 모든 것을 잊어버렸을 겁니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지금이라도 받은 은혜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감사 없는 청원은 청원이 아니라 강탈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코리는 폴란드의 한 아름다운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독일 나치에 의해 나라가 정복되자 유태인을 숨겨준 죄목 으로 온 가족이 포로수용소에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코리는 언니 벳시와 함께 감금되어 온갖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어려움은 성경 말씀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신체검사를 받는 도중 한 그리스도인 간호원이 코리에게 “가장 갖고 싶은 것을 말씀하세요.”라고 속삭였고, 코리는 그 간호원을 통해 작은 성경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코리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코리는 들키지 않게 갖은 애를 써가며 성경 말씀을 삼키듯이 읽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 가 너무도 소중한 생명의 말씀 이었습니다. 어느날 코리는 테살로니카 전서 5,18절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코리는 그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겼습니다.
그런지 얼마 안 되어 코리는 언니 벳시와 함께 감방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옮겨진 감방으로 오자 코리는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마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도 비참한 곳에 있었지만 이곳은 더욱 비참 했습니다. 게다가 벼룩까지 들끓어서 견딜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계속 마음에 남아 있었지만 코리는 도저히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니 벳시가 눈을 감고 나즈막하게 기도 드렸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벼룩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할 수 없이 코리는 “아멘!”했습니다.
얼마 안가서 코리는 벼룩으로 인하여 감사해야 할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벼룩 때문에 그 감방 주위에는 간수도, 독일 군인도 얼씬 하지 않았고 그들은 자유롭게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덕에 코리와 벳시는 매일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나누게 되었습니다. 온종일 강제 중노동에 시달리고 굶주린 여인들과 함께 모여 서로를 위로하며 아픈 곳을 만져주고 양보하며 기도하는 놀라운 그리스도인의 친교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벼룩 때문에 가능했음을 코리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일까요? 그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믿어야하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고작 선악과 몇 개 따먹은 것인데도 야단 맞을까봐 몸을 숨겨야했습니다. 나에게서 몸을 숨기는 사람과 어떻게 인격적 관계가 이루어지겠습니까? 타인에 대한 자비를 믿지 않으면 타인은 지옥이 됩니다. 당신을 지옥처럼 생각하는 아담과 하와를 계속 에덴동산에 머물게 하실 수는 없으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게 만든 대상은 바로 내 안의 ‘자아’입니다. 그것이 뱀으로 상징됩니다. 뱀은 자신들이 받은 것보다는 결핍에 시선을 돌리게 만듭니다. 그래야 자신이 사람을 이용해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아의 불만 때문에 자아의 종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불순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감소시키기 위해 이웃을 판단하고 미워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표징은 무엇일까요? 불만과는 반대로 ‘감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10명이 주님께 나병을 고쳐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다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외국인만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0명을 다 고쳐주셨다는 말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은혜를 이미 다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감사만 하면 됩니다. 감사가 곧 이미 많은 것을 받았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성당에 나오는 신자들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감사하러 나오는 사람들과 청하러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청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목적은 감사하기 위한 것이어야 입니다. 감사하면 이미 받았다고 믿는 것이기에 사실 하느님께서 청하지 않는 것까지도 다 알아서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려주실 때 아버지께 이렇게 청하십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11,41-42)
예수님은 청할 때 감사기도를 드리십니다. 이미 청한 것을 받았다고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청한 것을 받으면 감사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 청은 거의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며 무언가 청한다면 “무자비한 분이시지만 내 청 좀 들어주세요. 만약 들어주시면 당신이 자비하신 분이라고 인정해줄게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잘 들어두어라. 너희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았 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다.” (마르 11,24)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실 때도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고, 빵과 포도주를 당신 살과 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위해서도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감사가 믿음을 보증하는 것이기에 감사가 없는 청원은 오히려 주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감사했다면 선악과를 따먹었을까요?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감사하지 못하면 하느님 께서 자비롭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어른이 아이에게 귤을 하나 주었습니다. 그 아저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지 못하니 어머니가 당황하며 아이를 야단쳤습니다. “엄마가 그런 거 받으면 주신 분께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어? 어?”
그러자 아이는 이제 깨달았다는 듯이 다시 귤을 아저씨에게 내밀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까주세요!”
감사 없는 청원은 청원이 아니라 강탈 입니다. 이미 받은 것에 대해 먼저 감사해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받은 것도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미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면 주신 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서 또 달라고 하는 것이니 강탈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미합시다. 그러면 나의 부족한 부분은 생각만 해도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날씨가 쌀쌀해져서 바지를 갈아입었습니다. 전에 입던 바지를 빨래 바구니에 넣었습니다. 지갑, 손수건, 안경 닦는 수건을 꺼냈습니다. 늘 가지고 다니던 것입니다. 문득 이동식 메모리 카드가 생각났습니다. 노트북의 자료를 사무실 컴퓨터로 옮기면서 사용했던 메모리 카드입니다. 혹시 하고 빨래 바구니에 넣었던 바지를 살피니 거기에 이동식 메모리 카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머니에는 묵주반지도 있었습니다. 부주의한 저 자신을 돌아보았지만, 세탁기에 넣기 전에 찾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가 건강하게 잘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매일 멀리 있는 아들 사제를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제게 커다란 힘이 됩니다. 성격이 깔끔하시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주시는 자매님이 있습니다. 저의 입맛에 맞도록 세심하게 준비해주시니 감사할 일입니다. 교우분들이 이곳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시고, 도와주시니 감사할 일입니다. 30분만 걸어가면 아담한 호수가 있는 공원이 있습니다. 거위도 있고, 거북이도 있고, 물고기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도 보고, 담소를 나누는 노인도 봅니다. 근처에 공원이 있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우리는 시리아 장군 ‘나아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싸움을 잘하는 유명한 장군이었지만 나병에 걸린 환자였습니다. 엘리사를 만난 나아만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나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우리가 나아만을 기억하는 건 그가 치유되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가 감사드렸고,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종은 이제부터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10명의 나병 환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0명 모두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오늘의 복음을 기억하는 건 치유된 10명 때문이 아닙니다. 치유된 나병 환자 중에 사마리아 사람이 있었고,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의 권능으로 병이 치유된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영혼이 치유되는 겁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몸과 마음이 치유될 수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신앙인은 3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영적인 성장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운전의 3단계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준법운전입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운전입니다. 빨간 불에는 서고,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고, 규정 속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운전만으로도 우리는 교통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주일미사를 잘 지키고, 성경 말씀을 자주 읽고, 교무금 헌금을 기쁜 마음으로 내는 신앙인과 같습니다.
두 번째는 안전운전입니다. 교통법규는 당연히 잘 지키고, 무리한 운전을 하지 않습니다. 장거리 운전을 할 때 중간에 잠시 쉬고, 차량 정비를 자주 하고, 앞차와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운전을 하면 인생도 푸른 신호등처럼 늘 맑고 푸른 날이 될 것입니다. 주일미사는 물론이고 평일미사도 자주 참례하는 분, 본당의 단체에 가입해서 봉사하는 분, 각종 피정과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 소공동체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분입니다. 이런 분들이 있으면 본당도 기쁨과 평화가 넘쳐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양보운전입니다. 급한 사람이 먼저 갈 수 있도록 양보해 주는 운전, 몸이 아픈 이웃을 병원으로 모셔다드리는 운전, 짐을 들고 가는 어르신을 태워 드리는 운전, 고장 난 차를 보면 내려서 도와주는 운전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운전은 단순히 이동수단이 아닙니다. 운전이 곧 선교이고, 운전이 곧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처럼 나의 삶에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이미 하느님 나라에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어디에 속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엘리사의 도움으로 나병에서 치유된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이제 몸만 건강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으로 치유된 사마리아 사람도 이제 몸만 건강해진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러한 삶을 ‘복음의 기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은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과거와 지금을 비교하면 참으로 많이 발전했습니다. 어렸을 때 집의 텔레비전이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었을 때, 새로운 세상이 온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이상입니다. 어렸을 때 모 만화잡지에서 보았던 미래의 세계에 대한 예측들이 실제로 거의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훨씬 더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으며, 동시에 안전한 시대를 살면서 번영을 누립니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은 어떻습니까? 훨씬 더 높은 행복도를 느끼면서 살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더 큰 절망이 우리 곁에 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부유하고 안전한 곳에 살수록 자살할 확률이 높다는 통계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은 희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분명 과거보다 더 좋은 조건, 더 나은 조건 속에 있는데도 말입니다.
희망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을 위해 통제력, 가치에 대한 믿음, 그리고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통제력은 희망을 방해하는 것을 과감하게 끊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가치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희망을 향해 노력할 이유를 찾게 해줍니다. 그리고 공동체는 같은 행동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집단이 있을 때 희망을 더욱더 쉽게 찾게 해줍니다.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대한 신앙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는 통제력,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같은 신앙으로 하나를 이루는 주님 공동체를 통해 우리는 희망을 늘 마음 안에 간직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분명히 희망보다는 절망을 더 깊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통제력 없이 살 때 희망이 있을까요?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고 순간의 만족에만 급급하다면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요? 그 누구도 없이 혼자서 과연 희망에 찬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언제나 주님 안에 머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만 주님을 찾고, 그 문제가 해결되면 주님 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는 나병 환자 10명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병이 나았다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온 사람은 몇 명이었습니까? 단 한 명만이 그것도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 사람만 찾아와 감사를 드리지요. 나머지 아홉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우리 역시 그런 모습을 취할 때가 참 많습니다. 어려울 때는 간절히 기도하면서 자비를 청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자신의 힘으로 해결된 것처럼 생각하는지 주님을 떠나고 맙니다.
다시 돌아와 감사를 드리며 주님과 함께했던 사람이 받은 은총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주님으로부터 자기 병의 치유뿐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은총까지 덤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시간 때만이 아니라, 기쁘고 즐거울 때도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만이 참 희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격차를 줄여주기 위해 서 있는 그 누군가가 있기에 힘든 시간을 이겨내곤 합니다(오프라 윈프리).
감사할 이유 찾기
카네기 철강사(현 US스틸)를 세워서 강철왕이라고도 불리던 카네기가 강연할 때의 일입니다. 그가 강연하고 있는데, 한 여성이 벌떡 일어나 자신을 향해 거친 욕설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고 그 욕설을 다 받아들이는 것이었지요. 강연이 모두 끝난 뒤에, 한 기자가 너무나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험한 말을 듣고도 끝까지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오히려 웃을 수 있으신지요?”
그러자 카네기가 말했습니다.
“사실 나는 그 여자가 내 아내가 아니란 사실이 매우 고마웠다네.”
어떻게든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 감사할 이유를 찾으면 화낼 일도 짜증 낼 일도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감사할 이유보다는 화내고 짜증 내는 이유부터 찾는 것이 아닐까요?
감사할 일을 찾아보세요. 세상이 달라집니다.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오늘 제1 독서(2열왕 5,14-17)는 아람(시리아)의 장수, 나아만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나아만이 나병에 걸려서 고생하다가 볼모로 잡아간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의 도움으로 간신히 예언자 엘리사를 만납니다. 나아만이 엘리사(하느님의 사람)를 찾아갔을 때, 엘리사가 맨발로 뛰어나와 맞이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하인을 시켜 요르단 강물에 일곱 번 몸을 담그라 하자 대단한 권력가인 나아만은 화를 냅니다. 비가 와야만 무릎까지 차는 요르단 강물에 몸을 일곱 번씩 담가야 한다는 사실에 굴욕을 느낀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부하들은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2열왕 5,13)라는 말에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더니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겸손해진 덕분에 완전히 치유된 것입니다. 치유되었음에 감사의 뜻으로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야말로 참으로 세상을 지배하시는 참된 분이심을 알게 되었다면서 엘리사에게 선물을 주겠다고 거듭 간청합니다. 엘리사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인 하느님의 종이지 진정한 치유자는 하느님이시라면서 선물을 거절합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세 가지 이유로 엘리사에게 나귀 두 마리에 실을 만큼의 흙을 청합니다.
첫째, 자기도 역시 이스라엘의 하느님(창조주)께서 흙으로 빚으신 존재이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시리아의 장수인 나아만이 이스라엘 땅에서 살 수 없기 때문에 흙을 가져가 자기 집에 제단을 쌓고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제물을 드리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만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셋째, 흙(humus)처럼 겸손(humilitas)해질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17,11-19)은 치유된 열 명의 나병환자 가운데 오직 한 명만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드리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마지막 단계에서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사이의 어떤 마을을 지나가시는 때였습니다.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거룩하신 스승님”이라고 부르면서 소리 높여 애틋하게 자비를 간청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비참한 병자들을 기적으로 고쳐주시는 분이심을 잘 알고 있던 것입니다. 그들의 간절함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즉시 자기 지역의 사제들에게 가서 통행증을 발급받으라고 하십니다. 당시 나병환자는 마을을 다니려면 “나병환자입니다.”라고 큰 소리를 쳐야했고, 치유된 후에 정상인처럼 거리를 활보하려면 자기 지역의 사제로부터 치유되었음을 증명하는 통행증을 받아야만 했습니다(레위 13,19; 14,1-11). 그들이 사제에게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절하고 애틋하게 치유를 요청했던 열 사람 가운데 유다인들에게 외국인 취급을 당하던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치유를 받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고마워서, 그리고 진정한 치유자이며 동시에 진정한 사제는 예수님이심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겸손하게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린 것입니다. 그렇게 애틋하고 간절하게 치유되기를 간청했던 사람들 가운데 외국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 사람 외에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고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이어서 건강을 회복하고, 소외와 경멸의 대상에서 벗어난 나머지 너무 기뻐서 하느님을 찬양하며(영광을 드리며)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나머지 아홉 명의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잘 알면서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는커녕 예수님께 감사드리러 오지 않았습니다. 비록 병은 치유되었을지라도 구원에 이르지(행복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능력이 어떤지 잘 몰랐던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러 온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2티모 2,8-13)는 바오로가 티모테오에게 주는 세 가지(1-7; 8-13; 14-19) 권고 가운데 두 번째입니다.
바오로는 자기가 전해준 복음(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을 힘(치유와 구원)이 무엇인지 잘 기억해서 다른 이들도 가르칠 자격이 있는 성실한 사람들을 뽑아서 군인처럼, 운동선수처럼 훈련을 시키고, 사적인 일에 얽매이지 않도록 하라고 했습니다(2티모 2,2-5). 이렇게 훈련된 사람은 복음의 힘으로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고 합니다. 선택된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복음을 선포했다는 이유로 바오로 자신이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을 잘 견뎌내듯이, 티오테오에게 복음 선포자로서의 겪는 어려움을 견뎌내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힘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오로는 죄도 없이 감옥에서 고통 겪는 것이며, 이 고통 때문에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이 더욱 널리 퍼져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티모테오도 어려움을 견뎌내면서 자기와 뜻을 같이 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복음을 선포한다면 많은 이들이 구원의 은총을 받을 것이라고 권고합니다. 이렇게 엄청난 구원의 선물을 건네주는데도, 사람들이 그 선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모른다고 하면 결국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모른다고 하실 것임을 경고합니다. 어려움을 견뎌내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복음을 살아간다면 우리도 하느님과 함께 구원의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 독서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몰랐던 이방인들이 서서히 예수님을 알고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으며, 복음 선포자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는 이스라엘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퍼져나가고 있음을, 그리고 온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또한 복음(구원과 치유의 은총)을 받아들인 이들이 즉시 행동으로 옮겨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나아만은 나병이 치유된 뒤에 이스라엘의 흙을 청하면서 이제껏 잘 몰랐던 이스라엘의 하느님만을 잘 섬기겠노라고 굳건한 믿음을 다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이 치유되어 당신 앞에 돌아와 무릎을 꿇은 사마리아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면서 믿음에는 감사와 찬미가 반드시 동반됨을 인정하십니다. 나병에서 치유된 나아만과 사마리아 사람, 그리고 나머지 치유된 아홉 명의 행동은 너무 대조됩니다. 치유를 받기 위해서는 그렇게 간절하고 애틋하게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더니 치유된 뒤에는 감사로 하느님을 찬양하기는커녕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잘 몰랐던 나아만과 사마리아 사람은 하느님께 돌아와 찬미를 드리지만, 하느님을 잘 알던 아홉 명의 유다인들은 치유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하느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졌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비록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자기가 전해준 구원과 치유의 복음을 잘 기억하고, 많은 이들에게 잘 전해주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엄청난 은총을 받았음에도 그분께 찬미 드리기는커녕 그분을 모른다고 한다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에 얼마만큼 감사를 드리고 있는지,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할 때에는 복음, 독서의 환자들 못지않게 간절하고 애틋하지만 청했던 어려움이 나름대로 해소된 뒤에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돌아보라고 합니다. 나병은 아닐지라도 게으름과 핑계 때문에 마음이 무뎌지는 나머지 하느님은 물론 이웃도 몰라보는, 그래서 격리되고 소외되는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도 진정한 치유자이신 그리스도께 돌아서고, 항상 겸손하게 그분께 다가가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늘 따라다니는 핑계와 게으름 때문에 성실하지 못해서 우리가 성실하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면 단호하게 떨쳐버리고 일어나서 나병환자들처럼 예수님의 자비를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치유와 구원에 이른 사람은 “주님은 당신 구원을 민족들의 눈앞에 드러내셨네.”라고 노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므로 하느님께 성실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모른다고 하면, 언젠가는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아만과 사마리아 사람처럼 하느님을 안다면 그분께 찬미와 영광과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너희와 함께 세례를 받았던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너와 함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던 다른 신자들은 어디에 있느냐?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가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처럼(창세 4,9) “모릅니다. 내가 그들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대답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구원의 선취(先取)
이종훈 신부님
고마움은 어떤 은혜를 입었을 때 느끼는 마음이나 정서적인 반응이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에 고마워하며 살아가기를 하느님께서 바라신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8).” 그러니 우리들에게 고마움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또 의지적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일상은 거의 자동적으로 반복되니까 의지적으로 고마워해야하기 때문이다.
일상에 의지지적으로 고마워할 수는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불행과 역경 속에서는 어떻게 하지? 하느님이 바라신다니 고맙다고는 해야 할 텐데. 불의의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자연재해로 다 망가진 집 앞에서도 고맙다고 해야 하나?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살아 있다고 혹은 더 많이 부서지지 않았다고 고마워해야 하나? 그것은 억지스럽고 위선적인 것 같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친구 라자로를 되살리실 때, 돌이 치워진 무덤 앞에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요한 11,41).”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분은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그분은 친구가 깨어났음을 아니면 잠시 후 깨어날 것임을 알고 계셨다. 사람들은 무덤에서 걸어 나온 라자로를 보고 놀라고 감사하며 찬미를 드렸겠지만 예수님은 그런 일도 일어나기도 전에 이미 아버지께 감사드렸다. 예수님의 감사는 받은 은혜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좋은 일에 대한 확신이었다. 우리에게 그것은 믿음이다.
예수님께 용감히 다가와 청했던 나병환자 열 사람에게 주님은 치유가 아니라 치유 후에 해야 할 일을 말씀하셨다(루카 17,14). 그 말씀에 따르기는 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갈팡질팡 했을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그렇다. 하느님께서 반드시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의심이 일고 거기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기를 원하는 바람 때문에 마음은 갈등을 겪고 조바심이 일어 혼란스럽다. 그런데 하느님께 감사드림은 그런 혼란과 갈등을 한 번에 잠재운다. 그것은 구원을 선취(先取)함이다. 지금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그것이 이루어져가고 있고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졌음을 보게 될 것이다.
‘아버지께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 저희 찬미가 아버지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저희에게는 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도움이 되나이다.’ 평일미사에 바치는 감사송 중의 하나이다. 하느님께는 우리의 감사와 찬미가 필요 없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미는 하느님이 하신 구원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키워 우리의 믿음을 더 굳건하게 한다. 예수님께 되돌아 감사하지 않은 아홉은 나병만 나았지만 그 사마리아인은 치유뿐만 아니라 구원을 완성했다. 지금 여기서 드리는 우리의 감사는 다가 올 은혜로운 일들에 대한 확신이다.
예수님, 불행 중의 감사는 행복의 선취이고, 실패하여 드리는 감사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제가 협력했음이며, 역경 중의 감사는 제 믿음이 더욱 굳세게 해줍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불행과 실패 그리고 역경 중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일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 곁에 있고픈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다가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 멀찍이 설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 멀찍이에서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고픈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눈 돌린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귀 막은 사람에게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곁에 두지 않은 사람을 품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없어지길 바라던 사람을 있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기에 사람을 바라봅니다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듣습니다
사람이기에 사람을 품습니다
사람을 바라보고 듣고 품기에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기에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람과 함께 하기에 사람 사는 세상입니다
사람이 사람과 함께 하기에 살 맛 나는 세상입니다.
하느님께 감사
곽승룡 비오 신부님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8)
성경과 전례에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드리는 것이 종종 발견된다. 그런데 ‘찬양하다’는 용어는 희소한 구식이 되었는데, 혹시 독재 국가나 옛 사회주의 국가에서 종종 들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찾아보기가 어렵게 됐다. 또한 그 표현의 의미도 약화되었다. 이유는 사람들이 마음에도 없는 찬양을 크게 하는 것보다 오히려 선한 일을 크게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히브리 말과 다른 셈족 언어에서 ‘찬양하다는 동사’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곧 히브리인에게는 ‘감사하다’는 말도 없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은 칭찬과 축복과 함께 표현’되곤 하였다. 따라서 성경에서 축복을 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 종종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외국인 말고는”(루카17,18)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가족 식구가 아니라 외국인에게 고맙게 생각하는 자들이 많다. 심리적인 설명이 있어야 한다. 가족한테 귀하고 존중받는 것이 당연하고 정당하며 권리까지 느끼는 것이 보통으로 생각하듯이, 우리는 부모, 남편, 부인, 선생님에게 은혜를 잊고 살거나 생각하지 못하거나 혹은 저버리는 경향이 있다. 특히 은총을 충만히 주시는 하느님을 향해서도 배은망덕한 경우가 있다.
이냐시오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양심성찰의 근본 목적이란 각자의 부족함, 결점을 인식하고 그것을 교정하는데 있다고 말했다. 이냐시오가 조언을 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는지에 관해 설명을 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살아가는 생명을 주신 모든 분들 위해 양심을 통해서 하느님께 감사와 기도를 드려야 한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그는 사마리아사람이었다.”(루카17,1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치유를 하셨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만 돌아와서 감사를 드렸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 사람은 한 사람이었다. 신앙인은 즉각 발생하는 모든 것에 그 원인이 무엇일까? 질문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돌리는 자들이어야 한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 성심 것 환자를 대하는 의사에게 우리는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그 표시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선한 의사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느님에게 특히 감사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
오늘 복음에서 열 사람 모두 병이 나았지만, 예수님께서 “네가 구원을 받았다.”라는 선언을 들은 사람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러 온 사마리아인 한 사람뿐이었다는 것도 생각해볼 내용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연인에게 잘 해주고 나면 비싼 이태리 명품 가방을 하나씩 받다가, 더 이상 연인이 가방을 사주지 않으면 헤어지자고 한다거나 모른 척 한다면 그 사람은 연인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가방을 사랑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다른 어떤 것을 얻기 위한 도구처럼 생각한다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하느님보다 하느님의 선물을 사랑하는 것은 심각한 악이다.”라고 까지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선물을 감사하게 여기는 것”과 “하느님보다 하느님의 선물을 더 사랑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한현택 신부 강론)
오늘 치유를 받은 사마리아 사람은 하느님의 선물인 치유를 받은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치유를 주신 주님께 찾아와 감사를 드렸다. 이제 어떤 형태로든 투병생활을 하시는 분들에게 완전한 치유의 비법을 말씀드린다. 먼저 오늘 복음의 사마리아인처럼 감사하십시오. 그렇다면 당신 안에서 완벽한 병치유가 일어나는데, 그 치유의 기적이 감사이다.
이처럼 치유는 감사와 함께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선언하신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미사를 그리스어로 Ευχαριστία다. 이를 직역하면 “감사제”라는 말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그분을 믿는 자체로, 그분과 사랑의 관계 안에 사는 기쁨 자체로 모든 보상을 받는다.
이 세상은 과연 좋은 세상일까, 또는 나쁜 세상일까? 성경에 따르면 세상이란? 하느님과 함께 우리와의 관계를 다시 반영한다. 선한 자에게 선하게, 악한 자에게 악하게 보인다. 곧 구약에서 홍해 바닷물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물이었으나, 이집트 병사들에게는 죽음에 빠트리는 물이었던 것과 같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지금 누구와 함께 계실까? 모든 성인들은 하느님 그분과 함께 계신다. 다만 성인이 그것을 느끼지 못하다면, 하느님께서 무디거나 쌀쌀하게 대하셔서 그럴까?
그러므로 내가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안다는 것은 내가 이웃과 함께 하는 관계도 역시 단순하게 감사 하는 것이다.
병중의 중병, 속병이 문제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나병환자는 외적으로 드러난 병이지만 안팍으로 썩어 문드러진 병이다.
나병환자가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멀직이서 소리를 높여 애원한다.(루타17,13) 예수님은 그들의 애원을 들어 모두 고쳐주셨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17,14) 그들은 사제에게 가는동안 몸이 깨끗해졌다. 모두 열명이다. 그런데 한명만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께 찾아와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런데 아홉은 고침을 받고도 하느님을 찬양하지도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를 드리지 않았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7-19)
고침과 구원은 별개의 문제였다. 아홉은 고침을 받았지만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 고침은 외적인 문제이고, 구원은 내외적인 문제이다. 아홉은 고침을 받았으나 이 고침은 감사 이전에 당연한 결과로 여겼다. 우리가 애원해서 얻은 결과라며 더 이상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고쳐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지 않고 고침에서 멈춰섰다. 아홉의 나병은 속에서 그대로 남아 있다. 늘 선택받았다는 사람이 그랬다. 그들은 늘 머리만 믿고 과정을 생각지 않는 부족한 사람들이다.
공동체에 자리차고 있는 힘의 사람이 그랬다. 아홉이 그런 사람이다. 여전히 그들은 교만하며 은혜를 당연히 자기가 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무서운 나병은 그들 아홉의 마음에 있다. 겉은 그럴싸하나 속은 여전히 나병이니 말이다. 그들에게 고침은 외적으로 보이지만 누려야할 결정적으로 구원이 없다.
고침과 구원에 이른 한 사람, 히느님께 찬양드리고 예수님께 엎드려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 언제나 꼭 한 사람있다. 그 사람은 자기 자리도 변변치 않은 공동체 밖의 이방 사람이다. 그런 사람 때문에 예수님은 언제나 힘이 솟으신다.
오늘 질문이 공동체가 건강한가? 공동체가 나병이 걸려있지 않았는가? 애원이 있나? 고침을 받았는가? 진정한 구원을 입고 사는가? 하느님을 찬양하고 예수님께 엎드려 감사드리는가?
감사하는 신앙생활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제1독서와 복음은 다 같이 나병의 치유에 대한 기적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두 경우 다 주인공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치유시켜주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이방인들이다. 하나는 시리아인이고 하나는 사마리아인이다. 이 주인공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깊은 감사의 정을 표하고 있으며, 이는 생기가 넘치는 믿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제1독서: 2열왕 5,14-17: 나아만의 치유와 주님께 대한 신앙고백
‘시리아 왕의 군사령관’(2열왕 5,1) 나아만은 나병에 걸렸는데 히브리인 하녀로부터 이스라엘에 그 병을 고쳐줄 수 있는 엘리사라는 예언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많은 선물을 가지고 엘리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엘리사는 요르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하자, 화를 내면서 그냥 돌아가려 했지만, 부하들의 말을 듣고 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씻고 몸이 깨끗이 나았다(14절). 이 기적은 요르단 강물이 특별히 치유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에 대한 말에 대한 ‘믿음’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믿음은 인간의 능력의 영역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하게 한다. 그래서 믿음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전능과 신비를 드러내시도록 하는 것이다.
치유를 받은 나아만은 야훼께 믿음이 이미 충만해져있다. 즉 자기 나라에 가서도 ‘성역’에서 야훼를 숭배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의 ‘흙’을 얼마쯤 가져가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리고 선물도 감사를 드리는 신앙의 표시일 뿐이다(15절). 그러나 예언자는 선물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하느님 사랑의 ‘무상성’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가 바라는 것은 믿음(신앙)을 통한 그분의 능력과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다. 많은 경우에 인간은 ‘신적인 것’을 자기 마음대로 다루고 또한 자기의 이기적인 욕구에 따라 제멋대로 다루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신앙에 의지하여 하느님의 절대적 권능에 자신을 맡기게 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1요한 3,20) 우리의 지성보다 크신 분임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께 대한 참된 감사는 우리의 삶과 사랑으로써 표현되는 것이다.
복음: 루카 17,11-19: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온 사마리아인
이러한 내용을 오늘의 복음이 전해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같이 이곳에서도 다른 아홉의 유대인들과 달리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인식한 한 사마리아인을 주인공으로 제시하신다. 그리고 이 기적은 ‘사마리아와 갈릴래아’를 지나가실 때(11절) 일어난다. 이것은 이 기적이 예수께서 수난과 영광의 자리로 가시는 데 대하여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 기적은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영광을, 다른 한편으로는 장차 사람들로부터 받게 될 몰이해를 예고해주는 구원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나병치유사화(루가 5,12-18)와 비교해볼 때, 차이점은 그들을 깨끗하게 고쳐주기 전에 ‘사제들에게 보여라’(14절)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사제에게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진 것으로 보아(14절)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복종했다고 하는 믿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어찌 사마리아 사람에게만 믿음이 있다고 하시는가? 그것은 그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같은 태도는 무엇이든지 당연한 것처럼 ‘권리’만을 내세우려 하는 오늘의 이 시대가 소중히 해야 할 인간적 태도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이 선물이다. 이 선물에 대한 감사는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행위’는 예의바르고 양식 있는 행동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무상으로 한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진실 된 ‘믿음의 행위’이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온 것이다(15.18절).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18절) 하신 것은 다른 아홉 사람이 당신을 통해 자비의 기적을 베풀어주신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함을 설명해주시는 말씀이다. 아홉 사람은 그들이 유다인이라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모든 것을 당연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불충분하고 왜곡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느님 앞에는 모든 것이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그분의 자비는 예측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특권은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다 나병에서 ‘치유’되었지만, 사마리아 사람만이 완전한 의미에서 구원을 받았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19절). 이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은 하느님께서는 어떤 차별도 두지 않으시고 모든 이에게 사랑을 베풀고 계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의 행위를 통해서 볼 때, 믿음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가까이 계시고, 우리에게 당신 사랑을 보증해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 명칭 자체가 뜻하는 감사의 행위가 성체성사의 신비에서 최고도로 표현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 감사의 행위는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이 실현되고 그분을 통해 하느님께 바쳐진다. 실제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믿음 뿐 아니라, 믿음의 표현인 감사의 행위도 그분의 사랑의 무상적 선물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보잘것없는 계획을 넘어 우리 안에 이루어주시는 나라이다. 그 나라는 전통적인 가르침과 관습으로 율법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하늘나라와는 먼 것이다.
선행을 많이 하기 때문에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든 것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자신에게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해 하느님께 끊임없이 감사드리는 태도와 겸손한 정신을 지녀야 한다. 오늘의 제2독서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에 근거하고 있는 이러한 확고하고도 무상적인 믿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2티모 2,8.11.13). 우리의 믿음이 감사의 행위로 항상 표현되어야 함을 명심
하자.
아르헨티나 문한림 주교님
-수없이 많은 것들을 하느님께 끓임 없이 청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끓임 없이 그리고 많은 것들을 그분께 감사하고 있습니까?
한 번쯤은 친구에게 받은 큰 도움을 빚진 적 있을 것입니다. 그의 크나큰 도움으로 생의 위기를 벗어났음에도...... 어떤 이유로든 그에게 감사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는 당신을 어떻게 볼까요? 그와의 우정은 유지될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열 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몸서리치는 그들의 고질병을 고쳐달라고 그분께 큰 소리로 외칩니다. “예수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아주 단순 명료하게누군가를 찾아 가라고 일러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음으로써 가는 도중에 이미 치유 받게 됩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이 예수님 앞에 다시 돌아와 큰 소리로 찬양하며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성경 구절은 청원으로 시작하여 감사, 찬양, 경배에 이르는 서로 다른 기도 유형을 통한 단계적인 구원의 과정을 예시해 주고 있습니다.
청원 기도를 할 때는 복음 전반에 걸쳐 나타나 있듯, 예수님께서는 꾸준히 집요하게 청하라고 격려하십니다. 그래서 “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울러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라고 하시며 깊은 믿음을 갖고 청원 기도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청원의 기도를 하지 않거나 청원을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서 스스로 문을 닫고 갇혀버리게 됩니다. 청원하는 사람에게만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향하는 문이 열립니다(유캣 486).” 그러므로 청원은 구원을 향한 중요한 첫걸음입니다.
감사의 기도란, 그분으로부터 오는 구체적인 사람들을 통하여 받은 선물에 대한 기쁨을 하느님께 전하는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럼, 감사의 기도는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올까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그분이 거저 주시는 선물인 사랑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점점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의 눈에 들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 자연스럽게 더 많은 축복을 부릅니다.
찬양 기도란, 선물을 주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 기도로 선물 자체보다 모든 선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초점을 맞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찬양 기도는 경배에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경배 기도란, 하느님과 인간의 진리를 직접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분은 창조주이며 구원자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며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위대함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낼 때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안에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 사랑의 위대함 앞에 온전한 자유의지로 엎드려 항복할 때입니다(유캣 485 참조).” 이 경배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영과 육의 총체적인 구원의 과정을 완성시키십니다.
이제 이 모든 기도 형식들을 어느 곳에서 최고로 극대화할 수 있을까요? 미사 중에 거행되는 성체 즉, 하느님 아드님이 드리는 감사가 곧,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의 이름으로 드리는 청원과 감사와 찬양이며 아버지 하느님을 경배하는 성전입니다.
오늘의 기쁜 소식은 당신이 미사를 드리기에 앞서, 청원과 감사의 목록을 먼저 구체적으로 작성한 다음 찬양과 경배의 미사를 드릴 때 당신의 구원이 그때 그때마다 더욱 현실화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예수님 안에서 그분과 함께, 그분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과 사람들의 마음에 흡족한 사람이 되고 이 세상의 삶에서 더 많은 축복을 누리며 마침내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멘.
경탄하고 감사하는 신앙
한민택 신부님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치유 받은 열 명의 나병 환자 중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우리가 삶에서 어디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인지를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기적이나 치유가 아닌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가져다주는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믿음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관계 안으로 들어감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입니다.
믿음은 또한 내 삶 안에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임입니다.
나의 삶을 찾아오신 주님을 맞이하고, 내 안에 이루신 그분의 위대한 업적을 알아보고 경탄하는 것이며, 그 베푸시는 은총에 감사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먼저 믿음은 주님께서 우리 삶에서 이루신 놀라운 업적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도록 합니다.
나의 삶에 들어오시어 이루어놓으신 그분의 놀라운 업적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은 행복합니다.
믿음의 눈은 일상을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하며, 삶의 새로운 측면에 눈을 뜨도록 합니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신 업적을 보고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며 경탄하는 군중을 만납니다.
복음의 사마리아인 역시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업적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곧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에 하느님을 찬양하고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한다는 것, 그것은 거저 주어졌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자격이나 권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선하심으로 인해 선물로 거저 주어졌음을 알아보고 감사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자세입니다.
복음에서 사마리아인이 감사할 수 있던 것은 그에게 일어난 치유가 오직 주님의 자비로 주어진 선물임을 알아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삶에서 주님이 이루시는 놀라운 업적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고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드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놀랄 수 있는, 감사드릴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인생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때로는 세상이 주는 기쁨이 너무 커서일 것입니다.
신앙의 길로 접어들기 위한 관건은 삶의 무게와 세상의 기쁨이라는 관문을 어떻게 뛰어넘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감히 그분께 다가서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 높여 청했던 사마리아인이 자신의 몸이 깨끗해졌음을 알고 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하느님 앞에 가까이 가기에 부당한 존재라고 여기며 군중 틈에 끼어 그저 먼발치에 머물며 다가서지 못하고 머뭇거리지 않나요?
주님께서 우리를 눈여겨보시며 손짓하십니다. 당신께 가까이 다가오라고 말입니다.
우리도 나병 환자들과 함께 용기를 내어 외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혼 빼고 살아보자?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4~18)”
본방인 9명대 이방인 1명이 이렇게나 생각이 다른 가 싶어 속상합니다.
하느님 무시하는 본방인 하늘에 감사하는 이방인 중 누가 합당한 거죠?
세상 받아 살며 하느님 가족 되려는 자 1명 국가관심 9명이란 거 같죠.
국가가 있어야 종교가 있다고 시위 중 간혹 떠드는 맹추들이 있습니다.
국가보다 먼저 종교가 있었고 그 후 생겨난 국가가 종교를 먹어치워요?
후손들이 있어야 조상이 있다며 조상들을 먹어치우겠다는 거나 같지요?
사람이면 국가보다 근본문제가 인간 주체인 혼인데 혼 빼고 살아보자?
신앙인은 하늘중심이라 너그럽지만 하늘에 합당한 국가통치 지킵니다.
참 아름다운 삶 -믿음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참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세상은 어지러워도 하느님은 한결같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올해는 우리 요셉수도원에도 근래 보기 드문 풍작으로 배들이 크고 잘 생기고 색깔도 좋고 맛있고 수확량도 많으니 이 또한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탓할 바 사람인 우리들이지 하느님은 전혀 탓할바 못됩니다. 참으로 우리를 감사, 감동, 감탄케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요즘 그림처럼 아름다운 가을 날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한량없이 크고 깊은 사랑은 온통 아름다운 자연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랑할 수록 아름다운 인생이 됩니다. 어제 역시 참 아름다운 날, 산책중 써놓은 글이 있습니다.
-“오/사랑스러워라/아름다워라/황홀한 기쁨!
하느님 손수 만드신/살아 있는 그림 성경책/자연!
행복하여라/자연 감상鑑賞시간/자연 관상觀想 시간!
하느님을 뵙는 시간/주님과 함께 걷는/산보散步 시간!”-
반면 일간신문 1면 기사가 사회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한국 사회가 울분으로 가득 차 있다는 어둡고 우울한 기사였습니다. 일반인 43.5%가 만성적 울분을 경험하고 있다 합니다.
-‘조국 대전’에 참여해 거리에서, 온라인에서 울분을 토하는 이가 수십 수백만이고, 직장에서 쫓겨나 분노한 노동자, 손님한테 갑질을 당하고도 울음을 삼켜야 하는 콜센터 직원, 학력과 계급의 대물림에 좌절하는 특성화고 학생들 사방에서 들려 오는 울분의 목소리입니다.
울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울분이 사회의 부당함이나 불공정함을 경험하며 느끼게 되는 감정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때문에 울분에는 분노와 억울함, 실망감과 복수심, 무기력감, 슬픔등 여러 감정이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울분, 이것이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떠나, 자연을 떠나 자초한 불행도 큽니다. 하느님에게서, 자연에게서 멀어질수록 인간성도 망가지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궁극의 믿음, 궁극의 희망, 궁극의 사랑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 버립니다. 하느님과의 연대가 우선입니다. 불신, 절망, 미움이 우리 마음을 차지합니다. 환경 탓만 하면 역시 답이 없습니다. 우선 믿는 나부터 내적혁명의 자세로 살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다. 어떻게 참 나를 회복하여 건강한 영혼, 건강한 육신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참 아름다운 삶-믿음의 삶-’에 대해 나눕니다.
첫째, 겸손하십시오.
겸손한 삶이 아름답습니다. 참 믿음은 겸손함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워 질수록 겸손이요 멀어질수록 교만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열왕기 상권에 나오는 주인공,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겸손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하느님은 인종, 국적에 관계 없이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분이시고 회개한 자, 겸손한 자, 순종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과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를 만나 겸손해진 나아만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일러 준 대로,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여 요르단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급니다. 그대로 믿음의 겸손, 믿음의 순종입니다. 그러자 나병환자 나아만은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습니다. 피부와 더불어 마음도 치유되어 깨끗해 졌음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요르단강이 상징하는 바 우리 일상의 모두입니다. 그러니 그 멀리 요르단강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일상의 강물에 몸을 담그는 마음으로 살 때 심신의 치유와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굳이 성지순례 안해도 됩니다. 세상 그 어디나 하느님 계신 성지이니 오늘 지금 여기 거룩한 일상의 강물에 심신을 담글 때 심신의 치유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 시간 역시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모두 미사 은총의 강물에 심신을 담금으로 치유, 구원받는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깨끗한 속살은 바로 몸의 치유와 더불어 나아만의 마음도 깨끗해 졌음을 상징합니다. 교만했던 마음도 순종의 겸손으로 깨끗해 졌으니 심신의 치유와 구원입니다. 이어지는 나아만과 엘리사가 주고 받는 대화도 참 아름답습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이 종이 드리는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내가 모시는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결코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시다면, 나귀 두 마리에 실을 만큼의 흙을 이 종에게 주십시오. 이 종은 이제부터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둘 다 참 멋진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종으로 고백하는, 흙처럼 겸손히 하느님을 섬기겠다는 나아만, 참 순수한 인간입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시리아 사람 장군 나아만이 아니라 이런 순수한 인간 나아만입니다.
일체의 선물을 거부한 대신 참 좋은 선물, 흙을 나아만에게 선물한 셈이니 참 멋진 예언자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입니다. 겸손과 순수는 함께 갑니다. 참으로 겸손할 때 몸의 치유와 더불어 마음도 치유되어 깨끗한 마음, 순수한 마음이 됩니다.
둘째, 기억하십시오.
기억과 믿음은 함께 갑니다. 믿음의 사람은 기억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늘 잊지 말아야 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영성생활에 망각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보고 기억하라 눈에 보이는 온갖 성물들이요 잊지 말고 늘 기억하라 있는 전례입니다. 평생 매일 끊임없이 예수님을, 하느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매일 미사와 시편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입니다. 하여 예수님 안에서 받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는 우리들입니다.
하여 끊임없이 주님을 기억하기 위해 고백의 기도는 필수입니다. 고백과 기억은 함께 갑니다. 우리가 바치는 시편성무일도, 그대로 주님께 대한 믿음의 고백, 희망의 고백, 사랑의 고백입니다. 절대 고백에 인색하지 마십시오.
특히 사랑의 고백입니다. 하느님은 물로 사랑하는 이들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필요하다 느낄 때마다 하시기 바랍니다. 고백따라 가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고백은 초창기 교회의 신앙고백문으로 우리 역시 바쳐도 좋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성실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기억할수록 우리도 언제나 성실하신 예수님을 닮아 성실한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셋째, 감사하십시오.
믿음의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선물에 저절로 감사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가까워질수록 감사요 하느님께 멀어질수록 원망이요 불평불만입니다. 감사 또한 발견임을 깨닫습니다.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감사할 때 기적입니다. 천형이라 칭하는 나병도 감사할 때 치유되어 천복이 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천형같은 질병도 천복으로 변합니다. 우선 나병환자 열처럼 우리도 끊임없이 주님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비송을 바치는 것입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마치 복음의 나병환자처럼 자비송의 청원기도로 미사를 시작한 우리들, 영적 나병과도 같은 탐욕과 교만도 치유받으리라 믿습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말씀에 치유되어 각자 삶의 자리로 복귀한 나병 환자들입니다.
물론 주님의 일방적인 치유의 기적은 없습니다. 주님 말씀의 은총과 나병환자들의 믿음이 만나 일어난 치유의 기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 안타까운 현실을 접하게 됩니다. 치유 받은 열명 나병 환자중 감사와 찬양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던 사람은 단 하나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바로 이런 자세로 미사를 드릴 때 영육의 전인적 치유입니다. 감사와 찬양으로 표현되는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입니다. 제1독서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겸손한 믿음의 본보기였듯이 오늘 복음의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하는 믿음의 본보기입니다. 둘 다 이방인입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열중 한 사람만이 감사와 찬양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왔으니 1/10입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하는 지요. 제가 볼 때 아홉은 반쪽짜리 육신의 치유일 뿐이고 영육의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받은 자는 사마리아 사람 하나라 생각됩니다. 감사와 찬양에서 샘솟는 기쁨이요 온전한 전인적 영육의 치유입니다. 이런 기쁨이 진정 우리의 힘이 됩니다. 바로 다음 말씀이 사마리아 인에 대한 전인적 영육의 치유의 구원선언처럼 들립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사마리아 사람은 물론 이 거룩한 미사에 믿음으로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감사와 찬양의 믿음있어 영육의 온전한 치유의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상경의 여정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이자 초월적 거점인 하느님의 자리를 상징하는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온 인류의 영적 중심지임을 상징합니다.
사람 눈에 유다인과 이방인들인 시리아인, 사마리아인의 구별이지 하느님 눈엔, 예수님 눈엔, 예루살렘에서 보면 모두가 한 인류 가족에 속한 누구나 똑같은 인간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종파에 관계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겸손과 감사의 믿음으로 당신을 찾는 모든이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바로 다음 시편 화답송 후렴과 이어지는 시편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주님은 당신 구원을 민족들의 눈앞에 드러내셨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겸손과 기억, 감사와 찬양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되어 참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사랑받는 이유'(루카 17장 11~19)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열명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아홉은 어디?
늘 있으면 감사가 없습니다.
물이 끊기면, 전기가 없으면 그때 비로소 마음에 자극이 되는 인간의 버릇없음을 예수님께서 한대 치십니다.
필요할때는 살살거리고 얻고나면 언제그랬냐는듯 고얀 심보를 질책하십니다.
작은것에도 깊이 감사하는 사람, 두손을 모으고 고개 숙이는 사람, 그의 겸손이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무뎌지는 마음 체크하세요 성당 처음 나온 사람이 예기치 않게 복 받습니다.
예수님한테 사랑받고 싶으면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지 아시겠죠?
'사랑받는 이유가 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열 사람이 나병이 치유되었는데 오직 한 사람만 예수님께 와서 감사를 드린다. 이상하지 않는가? 나병이면 충분히 자신이 치유되었는지 알텐데 말이다. 아홉명의 나병환자가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생을 살아가며 의사를 통해, 나와 관계하는 사람들을 통해 나는 치유를 받고 살아가고 있다. 바로 그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은 끊임없이 나를 치유하고 계신다. 그런데 나는 내가 원하는대로 치유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으니 예수님께 다가와 감사와 찬미를 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따뜻한 말 한마디, 사랑, 그리고 때로는 상처와 아픔을 통해 예수님께서 나를 치유하고 계신다. 그렇다! 하느님은 사람을 통해 그리고 모든 창조물을 통해 일을 하신다는 사실! 이 사실을 망각하지 말고 오늘을 살아가자!
그윽한 밤하늘의 구름에 걸친 달은 주님께서 함께 나를 만들어 나가신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루카 17, 17~18)
(“Were not ten made clean? And so where are the nine? Was no one found who would return and give glory to God, except this foreigner?”)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십시오.
오늘은 연중 제28주일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17, 11~19)에서는 우리의 감사 생활에 대해 생각해주도록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지역과 갈릴레아 지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났지요. 그들은 접경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사마리아 출신 나환자와 유대인 출신 나환자가 섞여있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예수님을 보자, 예수님께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루카 17, 13) 이렇게 간청하니까 예수님께서 그들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루카 17, 14) 하는 예수님의 말을 듣고 그들은 사제에게로 가는 동안에 몸이 나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몸이 치유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제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여라" 하는 이 말씀을 따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그들이 그런 단순한 일로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며 가지 않았다면 그들의 나병은 나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한 말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랐기 때문에 치유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치유 받기 위해서는 예수의 말씀을 잘 들어야 된다는 것, 그것이 비록 단순한 실천 같지만 그 단순한 실천을 예수님 말씀이기에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이기에 소중히 생각하고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사제한테 몸을 보여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는 의심을 가지고 가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무도 치유될 수가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이든지 그래야 우리도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제에게 갈 때 열 사람이 갔는데, 도중에 병이 나았는데, 그 중에 한 사람만 예수님께 다시 돌아와서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고맙습니다. 다 예수님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인사를 드렸겠지요. 그 인사를 드린 사람은 바로 사마리아 출신 나병 환자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유대인 아홉은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 인사를 하지도 않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무엇이 그렇게도 급했을까요? 아니면 무엇이 그렇게도 감사드릴 여유조차 없이, 그런 마음조차 없이 그냥 가버렸을까요?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이 멸시 하는 사람이었죠.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의 인사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 인사를 고맙게 받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몸이 나은 유대인 출신 나병환자 아홉은 어디 갔을까요? 어디 갔을까 하고 반문하셨습니다.
나병환자가 치유된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나병의 상태로 있었다면 얼마나 그 인생이 고달프고 괴로운 삶이 지속되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해서 병이 나았다면 적어도 감사인사는 할 수 있었어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께 돌아가서 감사인사를 드리러 갈 때, 그들도 같이 가서 예수님께 감사 인사를 드렸다면, 예수님은 얼마나 흐뭇해하시고 보람이 있으셨겠습니까?
나병이 치유됐으면 이제 사람들 사이에서 얼마든지 이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얻은 것이죠.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한 치유의 선물을 받았으면면서도 감사인사 조차 없이 가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도 우리의 삶안에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되겠습니다. 내가 병이 나고 어려운 일을 겪을 때는 하느님께 절규합니다.
"주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제발 이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필사적으로 기도하고 매달리지만, 막상 병이 치유되거나 어려운 일이 해결되었을 때, 예수님께 과연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을까요? 예수님께 드리는 찬미와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삶을 통해서 감사의 삶을 살고 있을까요?
우리는 평소에 건강하고 모든 일이 원만하게 잘 이뤄질 때도 감사의 생활을 해야 됩니다.
모든 일이 정상적으로 잘 이뤄질 때는 하느님의 은혜가 담뿍 내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가족이 모두 건강하고 사업도 잘되고 뭐든지 순조로이 잘 이뤄진다면 그것이야말로 감사와 찬미의 삶으로 주님께 보답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감사생활입니다.
우리는 나병환자 열 사람 중에 한 사람만 즉 10분의 일에 해당되는 사람만이 주님께 감사드린 것처럼, 우리가 열가지 감사드릴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가지만 감사하는, 그렇게 감사에 인색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는 보다 더 감사하고 감사의 뜻으로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함으로써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서 감사하는 삶을 표하는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병이 들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주님께 기도해서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 나는 주님께 받은 은혜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하는 삶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감사와 찬미의 노래< 루카,17/11-19.>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는 감사와 찬미를 혼동하여 사용하지만 이 말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틀리는 것입니다. 모든 말과 말의 의미는 바로 사용해야 뮨제를 합당하게 풀이 할 수 있습니다. 말에도 수학공식 모양 말의 질서 와 흐름이 있습니다.
감사는 좋아서 하는 것이면 찬미는 좋으나 나쁘나 하는 행위입니다.
감사의 말을 통해서는 자기 자신 안에 머물고 찬미는 완전히 자기자신을 떠나서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고, 감사는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찬미는 공동체적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감사는 때로는 행위에 의무감이 따라오고 찬미는 의무감이 전혀 없습니다. 감사는 기쁨이 근본이 되는 것이 아니지만 찬미는 기쁨이 근본이 됩니다. 감사는 명령이 수반 되지만 찬미는 지극이 자유스러운 행위입니다.
감사는 좋은일이 있으면 감사의 정을 표현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며 찬미는 자기 뜻대로 아니고 하느님의 뜻 안에 이루어집니다.
아침에 새 날은 흐리고 몸도 힘들고 근심 걱정으로 맞이하여도 주님을 찬미 드려야 합니다. 새날 밝고 참신한 아침을 건강한 몸으로 평화로운 마음으로 맞이하면 주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복음에 10사람의 나환자 중 한사람만 감사하려 온 것을 큰소리로 주님 앞에 업드려 찬미하며 감사하였다고 하시며 하느님에게 영광을 드렸다고 하시며 “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 하시며 일어나라고 하시였습니다.
우리는 감사란 말을 흔히 사용하지만 감사와 찬미가 어울러 들이지 않으면 참 감사 참 찬미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삶의 중심에 좋은 일 나쁜 일 이 섞어 나타납니다. 만일 좋은 일만 기대하고 나뿐 일을 져버리면 살아 가는데 더 힘들고 고달프고 어렵습니다.
감사와 찬미의 삶을 잃어버리고 불평불만 원망으로 매사를 받아 드립니다.
저는 감사의 정에 찬미의 정이 자신의 깊은 믿음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으면 죽으나 사나 모두가 찬미 감사의 의정으로 받아들이고 더 좋은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찬미 기도에 시편 117은 온갖 은혜에 감사기도가 나오는데 다니엘서 3/52-57은 하느님 자신ㅇ[ 대한 찬미기도가 올려 집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손을 보고 감사하고 하느님 현존을 보고 찬미 드리는 믿음의 삶은 더우나 추우나 비가오나 날이 청명하거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건강 할 때만 감사 아니라 몸이 병이 나도 감사와 찬미의 삶을 살가야 합니다. 세상 사는데 건강 권력 재력 명예가 소중하고 있으면 누구나 발아지만 없어도 살아있는 것만 또한 지금 것 살아 받은 은혜 감사하고 찬미 드리며 살아 갈 때 축복의 시간 축복의 날이 되겠습니다. 감사와 찬미의 날을 보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여기 살아 있음을 감사하고 찬미 드립니다.
복된 탓
류지인 야고보 신부님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고 거듭 말씀하셨던 태초 세상의 아름다움은 풍족함을 더 채우려는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으로 종말을 맺고 말았습니다. 피조물이 자신을 내신 창조주 하느님의 경계를 넘어서려 한 죄의 상처는 ‘원죄’라는 이름으로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원죄는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하고 물으시며 낱낱이 그 실체가 드러납니다.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시는 그리스도의 구원 계획은 아담이 불순명으로 세상에 불러들인,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해방시켜주시는 데에 있습니다. 원죄가 없었다면 영원한 생명과 복락이 보장되었겠지만 한편으론 인류가 구세주 그리스도를 만날 기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유전되는 치명적인 죄의 상처를 우리는 ‘복된 탓’이라 일컬으며 기억합니다. 나병환자 열 사람은 죄의 결과로 여겨지는 질병을 원망하며 오랜 시간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 서러운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감히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한 채 멀찍이 서서 소리만 높여 자비를 청하는 그들의 모습이 안쓰럽고 그 소리가 절박하게 들리는 이유입니다. 그들의 청원을 예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삶을 죄어오던 죄와 죽음의 고통스런 사슬에서 풀려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은 새로워진 몸으로 돌아와 예수님을 마주합니다. 멀찍이 떨어져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서서 그분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그는 태초의 아름다움을 회복한 이 놀라운 신비를 찬양하며 외쳤을 것입니다. “아, 복된 탓이여!” 돌아오지 않은 다른 아홉은 결코 몰랐을 고백입니다.
깨어있는 시민의 촛불이 동방의 등불이다.
최민석 신부님
자기 자신을 태워 어둠의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는 나라가 있다. 촛불로서 자신의 이기심을 태우고 집단지성으로 활활 타오르는 깨어있는 시민의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내가 이 나라의 백성임이 자랑스럽다. 촛불이 되어 어둠을 밝히는 시민이 있는 한 이 나라의 미래는 밝다.
근 현대 고난의 역사를 거치면서도 청산되지 못한 친일 의식과 불의한 독재 권력의 어두운 잔재가 검찰에 남아있다. 검찰의 칙칙하고 어두웠던 과거 슬픔과 아픔의 역사를 열고 어둠에서 빛을 끌어내는 촛불이 밝았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이 서초 사거리에 십자가 모양으로 나타났다. 아아! 때가 되니 깨어있는 시민들이 검찰 개혁의 촛불을 들고 나섰다.
살아 있는 희망의 물결이 움직이고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움직이고 흐르면서 변화를 이룬다. 한곳에 정지된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해와 달이 그렇고 세상이 그렇다. 내가 사는 대한민국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하여 새로운 역사를 부르고 있다.
이 나라의 변혁의 때가 왔다. 검찰 개혁의 절호의 기회가 왔다. 촛불 시민들의 개혁의지를 이제는 국회가 법과 제도로 담아내야 한다. 모두 한때이다. 변화의 과정 속에 생명이 깃들고, 변화의 과정을 통해 자유와 평화 그리고 인권이 보장되는 나라로 진보할 것이다. 우주의 신비와 삶의 묘미가 촛불로 전개되고 있다.
만일 변함이 없이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곧 숨이 멎은 죽음이다. 한 생애를 통해 좋은 일만 늘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러면 사람이 오만해진다. 또한 어려움만 지속되지도 않는다. 만일 어려움만 계속되는 인생이 있다면 누가 감내하겠는가. 다 도중에 하차하고 말 것이다. 어려운 때일수록 낙천적인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 아닌 새날이다. 겉으로 보면 같은 달력에 박힌 비슷비슷한 날처럼 보이지만 어제는 이미 가버린 과거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 있음이다. 어제나 내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이 자리에 있음이다.
우리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남을 뜻한다. 이 새로운 탄생의 과정이 멎을 때 나태와 노쇠와 질병과 죽음이 찾아온다. 새로운 탄생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먼저 어제까지의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존에 관념에 갇히면 창조력을 잃고 일상적인 생활습관에 타성적으로 떼밀려가게 된다.
삶이란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이다.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은 밖으로 부자가 되는 일에 못지않게 인생의 중요한 몫이다. 인간은 안으로 충만해질 수 있어야 한다. 아무 잡념 없이 기도를 올릴 때 자연히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때는 삶의 고민 같은 것이 끼여들지 않는다. 마음이 넉넉하고 충만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살면 겉으로는 번쩍거리고 잘사는 것 같아도 정신적으로는 초라하고 궁핍하다.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기 때문에 작은 것과 적은 것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살뜰함과 고마움을 잃어버린다. 행복은 아름다움과 살뜰함과 고마움에 있다. 나는 산길을 가다가 무심히 피어 있는 한 송이 제비꽃 앞에서도 얼마든지 나는 행복할 수 있다. 그 꽃을 통해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종종 화장실을 다녀온 후 내장의 평화가 주는 행복에 감사한다. 내게 행복은 이처럼 일상적이고 사소한 데 있는 것이지 크고 많은 데 있지 않다. 나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기억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여기에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을 마음이 충만한 사람으로 이해한다.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때에 자기를 완전히 내어 맡기는 사람이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고 여름을 거쳐 가을이 되었다. 충만한 마음으로 가을을 맞이한 백성들이 검찰개혁이라는 하늘의 명을 받들어 촛불을 들었다. 비로소 검찰개혁의 그 결실을 이룰 때가 되었다. 이제 국회의 법과 제도로 검찰 개혁을 완결해야 한다.
검찰 개혁의 절호의 때가 온것을 안 시민들이 촛불을 들었다. 빛나던 동방의 등불이 켜졌다.이제 검찰 개혁으로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롭고 끝없이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동방의 민주주의 모범이 되리라. 깨어있는 시민의 촛불이 세계인을 깨우는 동방의 등불이 될 것이다.
미사의 영성 15 하느님의 어린 양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구약성경의 시대부터 사람들은 죄를 많이 지으면 죽게 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죄는 죽음을 가져온다.’고 믿었습니다. 이 말은 신약의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라는 말에서도 연상됩니다. 또 그와 연관하여 사람의 외관적인 흉함이나 질병, 그리고 현세적이고도 물질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을 죄로 인한 벌로 이해해 왔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인식 안에서 고대 근동지방의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를 대신 짊어져 달라고 기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원은 심지어 동물은 물론이요, 동료 인간을 인간의 속죄를 위한 속죄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죽은 친․인척 특히 부모님들이 자신의 배우자중 한쪽의 사망 시, 그 사체에 두고 “자식들의 질병이나 불행을 다 안고 가시라.”고 청하는 우리의 풍습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죄로 인해 불행을 겪는다는 사고방식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우리 인간의 구세주란 사실을 선선히 받아들이기 어렵게 합니다. 구세주가 왜 죽어야 합니까? 그것도 죄인처럼? 실제로 우리는 일정한 한 공간을 차지하고 삽니다. 그리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서 느끼면서 이웃과 관계를 맺고 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 우리는 어떤 대상의 내용과 속이 어떻든 간에 외적으로 우리 눈에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대상에 대해 좋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어디가 찢어졌다든가, 대칭을 이루고 있지 않다거나, 기준이 모호하지만 균형을 이루지 않은 것을 보면 어딘지 좋지 않다고 여기게 됩니다. 이렇게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과 유사하거나 자연스럽게 일치하는 것에 대해서는 호감을 보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경계와 거부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비참과 벌의 상징인 죽음에 처해진 십자가상의 예수님과, 권능과 거룩함의 상징인 하느님이 인간의 편향된 사고 안에서는 서로 충돌과 긴장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던가?”(이사 53,1) 왜냐하면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이사 52,14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고난받는 야훼의 종’에 관한 기사는 실제로 인간들의 속죄를 위한 속죄제물로서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한편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져서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가 수난받는 이스라엘의 의인들을 그린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 모습 안에서 그리스도 수난의 신학적인 배경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정녕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가고 내 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이사 53,4-6.8ㄴ)
이미 구약성경의 욥의 기사를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한 사람이 왜 고통을 받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던 이스라엘은 이 고난받는 야훼의 종의 노래 안에서, 하느님께서 죄인들의 죗값을 선하고 죄없는 인간에게 대신 물으심으로써 죄인들의 죄를 씻고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신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도 비참하게 그리고 죽음으로 처해진 이유는 바로 그가 우리 인간의 속죄제물로 바쳐졌기 때문이며,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이사 53,10)
실제로 초대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구약의 고난받는 야훼의 종의 전승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해 왔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의 입을 빌어 속죄 제물이신 예수님에 대해 선포하도록 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ㄴ) 그분은 바로 하느님의 성령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3ㄴ-34) 또한 사도행전 8장 26절에서 40절(특히 32절-33절)에서 필립보가 에디오피아의 내시에게 성경을 풀이해 줄 때, 이 고난받는 야훼의 종을 예수와 연관시켜 설명해 준 후 그의 청에 따라 그에게 세례를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첫째 서간 2장 24절과 25절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돌아왔습니다.”
교회는 성경의 구세사적인 전망 안에서, 탄생에서부터 죽으심에까지 이르는 예수님의 전생애를 인간의 구원을 위한 희생제사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1베드 1,20)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로마 5,6) 주 하느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이집트인들을 치던 마지막 재앙에서, 이스라엘을 죽음의 천사에게서 건지시려는 표식으로, 아스라엘 집의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도록 합니다. 신약성경은 이스라엘을 건지려던 표식과 예수님 죽음의 의미가 일치함을 제시하면서 예수님을 빠스카양에 비유합니다. 유다인들이 파스카 양을 잡던 과월절 준비일의 낮 12시경에 돌아가신 주님. “그날은 파스카 축제 준비일이었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었다.”(요한 19,14) 인류를 죽음의 운명에서 해방시켜 영원한 생명의 길에 접어들도록 해주신 주님. 그분은 바로 인류를 죄악의 굴레에서 해방시키시는 속죄제물, 즉 구원을 위한 파스카의 어린양이십니다.
한편 이렇게 자신의 수난으로 세상을 구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 곧 우리 주님을 믿는 우리 신앙인의 생활 자세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 1,24) 베드로 사도도 시련 속에 빠지는 경우가 있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4,13)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병고와 아픔을 겪을 때마다 그것이 우리의 죄로 인한 벌로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내 이 고통을 부둥켜안고 주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수난에 기꺼이 참여함으로써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미사 때 우리는 성체성사를 들고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하며 외치는 사제의 함성 속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던 주님의 음성과 주님 수난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듣습니다. 성금요일 십자가 경배예절 당시 사제가 외치는 구원의 선포,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그것은 바로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요한 3,15-16)기 위한 주님의 초대이며,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의 식탁에로의 초대이자 은총의 축제입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ㄴ)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멀리서 소리치는 나병환자 열사람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하시며 그들을 병을 모두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는데 더구나 그는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나병은 다른 말로 한센병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1871년 노르웨이의 의사 아우메우에르 한센이 이 병 환자의 조직에서 세균을 발견해 알려졌습니다. 문둥병, 천형병, 나병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는 백신이 있어서 발병이 되더라도 거의 완치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예수님 당시 나병환자의 경우는 율법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은 죄인들로 취급이 되면서 마을로부터 추방되어 사람들에게 다가오지도 못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일제강점기에 전남 소록도에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 수용하기 위한 시설로 자혜의원을 설립했고 치료와 재활보다 격리와 수용에 초점을 맞춰 운영이 되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나병은 살이 썩어가면서 육체적인 고통뿐만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아야 하는 정신적인 고통까지 겪어야 했던 병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보면 나병환자들은 마을 밖에서 예수님을 멀리서 바라보고 소리를 치며 호소를 했다고 전합니다. 나병환자들은 아마도 자신들을 치유해 주실 유일한 분이심을 믿고 정말 안간힘을 다해 미친 듯이 그분께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간청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모습을 그냥 지나치시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바로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고 그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은 그렇게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은 이후 열 명 중에 한명만이 예수님께 다시 돌아와 감사와 찬양을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하는 말 중에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복음의 나병환자들의 경우 예수님께 치유를 받았지만 열 명 중의 아홉은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열 명 중의 유일한 한 사람은 다시 돌아와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서 예수님으로부터 단순히 육체의 치유뿐만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받게 됩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 신앙인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치유보다 구원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곧 치유는 구원으로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 드러나는 한 표징일 뿐이지 그것이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수없이 치유를 받아서 죽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쩌면 그 모습은 죽지 않는 좀비와도 흡사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 신앙인들은 좀비가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참된 구원을 얻기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구원으로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바로 매순간 다가오는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대해 끊임없이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내 이름이 뭇 민족 사이에 크게 떨쳤도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주교의 ‘하깨서 주해’에서(Cap. 14: PG 71,1047-1050)
우리 구세주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옛 성전보다 비할 수없이 더 영광스럽고 더 찬란하며 더 위대한 하느님의 성전이 나타났습니다. 옛 율법의 예배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복음적 예배가 다르고 또 상징과 실재가 다른 것인 만큼 옛 성전과 새 성전은 서로 다르다 하겠습니다.
위에 말한 것에다 또 한 가지를 덧붙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옛적에 성전은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루살렘에만 있었고 그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만 제사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 주 하느님이신 외아드님께서 우리와 같은 분이 되시고” 우리를 비추어 주신 다음, 온 세상엔 성전이 늘어나 우주의 하느님을 희생물과 영적인 향기로 경배하는 무수한 경배자들로 가득 찼습니다. 예언자 말라기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봅니다. “나의 이름은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뭇 민족 사이에 크게 떨쳐, 사람들은 내 이름을 부르며 향기롭게 제물을 살라 바치고 깨끗한 곡식 예물을 바치고 있다. 만군의 주님이 말한다. 내 이름은 뭇 민족 사이에 크게 떨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새 성전의 영광이 더 크게 떨쳤으리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구세주께서 “나는 이곳에 평화를 주리라. 이 성전을 건설하는 데 일하는 영혼은 누구나 평화를 얻으리라.” 하고 말씀하실 때 이 성전을 건설하는 데 관심을 갖고 노력하는 이들에게 선물로 우리 평화이신 그리스도 즉 하늘로부터의 은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다른 데에서 “나는 내 평화를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평화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들을 인도해 주는지를 바오로 사도가 다음의 말씀으로 설명해 줍니다. “사람으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슬기로운 예언자 이사야도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주 우리 하느님이여, 당신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고 우리가 하는 일을 모두 이루어 주십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평화를 차지한 다음에는 영혼을 구원하기가 쉽고 또 마음을 덕행의 추구에로 이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성전을 건설하는 데 노력하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예배를 지도하는 사람이건 거룩한 신비들을 해석하는 사람이건 간에, 하느님의 집에서 직분을 가진 사람으로서 교회를 건설하는 데에 일하는 사람이나 영적인 산 돌이 되고 거룩하고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되도록, 자기 영혼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평화의 상급을 받을 것이며 아무 어려움 없이 영혼의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감사하는 삶이 사랑이다.
-김창선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28주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병 환자의 치유를 통해 모든 민족의 눈앞에 구원의 표징을 드러내십니다. 굳센 믿음이 생명을 구하고, 은총에 감사하는 삶이 구원의 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랑의 삶(1테살 5,16-18)을 살아갈 수 있게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성서학자와 의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세기 전에는 팔레스타인에 현대적인 한센병은 없었다고 합니다. 구약에 기록된 나병(leprosy)이란 용어는 히브리어(ara’at)를 그리스어(lepra)로 번역하는 과정에 등장합니다. 원래 의미는 발진이나 습진 같은 악성 피부병과 집에 생기는 얼룩을 두고 한 말입니다.(가톨릭 사전, concordance)
구약에 나병으로 기록된 사례는 모세의 손에 드러낸 사명의 표징, 시리아인 나아만, 우찌야 왕의 경우를 포함해 극소수(탈출 4,6; 2열왕 5,1; 2역대 26,21; 2열왕 5,27. 7,3)에 불과합니다. 신앙의 조상들은 정결법(레위 13-14장)을 통해 악성 피부병 환자와 경계를 두어 신앙공동체를 거룩하고 안전하게 보호했습니다. 피부병 환자의 증세와 경과를 자세히 살펴보는 일은 사제의 몫입니다. 부정한 환자는 공동체에서 격리됩니다. 그가 깨끗하게 되어 정결례를 치를 때 성전에 속죄 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은 의무입니다.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 시대(기원전 9세기)에 강국이었던 시리아의 나아만 장수는 이스라엘의 예언자가 말한 대로 요르단강물에 일곱 번 몸을 담갔더니 어린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습니다. 수행원을 거느린 그가 엘리사 앞에 겸손한 종이 되어 이스라엘의 하느님만이 유일신이라는 신앙고백을 하고 감사의 선물을 바칩니다.(2열왕 5,15)
엘리사가 선물을 단호히 거절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주님만을 섬기고자 나귀 두 마리에 실을 만큼 성지의 흙을 청하는 그의 신심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았는데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하신 주님 말씀(루카 4,27)이 연상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2티모 2,8)라는 그의 좌우명을 선포합니다. 회개한 이후 그는 주님만을 기억하며 살았고, 복음을 위해 감옥살이하는 고통을 겪다가 순교한 사도입니다. 그는 초기 교회공동체가 시편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느님께서 성자를 통하여 이루신 놀라운 사건, 곧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주제로 한 찬미가의 일부(2티모 2,11-13)를 들려줍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희망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합니다. 장차 우리가 누릴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감사할 일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경계를 지나실 때 일입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찾아와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 17,13) 하고 청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스승님)께서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분”(마태 8,2; 마르 1,42; 루카 5,12)임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이 길을 가는 동안에 깨끗해집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하느님만이 치유하시는 분이고 예수님은 은총의 중개자였습니다. 시리아인 나아만과 사마리아인의 나병 치유는 구원의 은총에 모든 민족이 초대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지중해 문화에서 ‘자비’는 대인관계에서 각자의 소임을 다하도록 동기부여를 시켜주는 은총입니다. 자비하신 예수님께서는 정결법의 경계로 소외된 그들을 치유하시어 믿음을 심화시키고 공동체에 생활권을 회복시켜주십니다.
치유 받은 열 명 중 외국인 사마리아인만이 찬양하며 돌아와 주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다른 아홉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희생제물을 들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간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라고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본받고 있습니까? 엘리사는 감사의 선물도 거절했습니다. 나아만은 주님 외에 어떤 신에게도 제물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감사하지 않는 이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사람을 위한 선물과 우상에게 바치는 제물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증인이 된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일을 원하십니다.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우리는 충만한 사랑의 선물을 받아 누립니다. 인간을 거룩하게 해주는 자연이 선물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이웃의 손길에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의 은총으로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 자녀의 특권을 누립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충만한 사랑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신 성자께서는 ‘생명의 빵’과 ‘계약의 잔’으로 성부께 ‘감사 제사’(CCC 1360)를 드립니다. 교회공동체의 삶의 중심은 미사입니다. 미사를 통해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형제자매와 친교를 이루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고 참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삶이 사랑입니다.
구원받을 마음자세, 찬양과 감사!
박일 신부님-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친다. 병이 남아 있는 한 그는 부정하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레위 13,45-46) 때문에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던 나병환자 열 사람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따라 나병환자들에게 몸이 정결하게 되었음을 사제들에게 가서 보여주도록 지시하십니다(레위 14,1-32 참조). 절망이 얼마나 깊었는지, 사이가 좋지 않은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이 함께 다닐 정도로 연민의 마음이 일으 켜졌나 봅니다. 사마리아 사람도 덩달아 뛰어갑니다. 그들은 사제들에게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해졌고,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즉시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7,14-16 참조). 절망의 구텅이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사람은 누구라도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으며, 하느님께 대한 감사를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표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미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바로 사마리아 사람 이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순박하고 고상한 인품의 사람이 이제 믿음을 얻게 되었으며, 예수님의 말으 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말은 좋은 땅을 만나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땅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 8,15) 라고 예수님께서는 말하셨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좋은 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과연 지고하신 하느님의 현현(顯 現)이시며,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세상에 드러납니 다. 이 모든 사실이 치유된 사마리아 사람이 드린 감사와 경배를 통해서 온 세상에 드러납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에게서 이방인들을 향한 복음 선포의 여정이 예감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의 아들이 아닌 외국인으로서, 하느님께 어떠한 권리도 감히 주장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것을 하느님 은혜의 선물로 여기고, 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감사드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인 자기네들에게 하느님의 선물은 받아 마땅한 것으로 당연히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에게는 자격이나 권리가 있다고 그 렇게 믿고 있었나 봅니다. 구원을 받을 마음자세가 부족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외국인에게는 구원에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즉, 감사, 찬미,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자격 없고, 부족하고, 가련한 존재인지에 대한 자각이 있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외국인에게도, 죄인에게도. 그렇지만 구원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 말,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될 하느님 구원의 역사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 아들이는 것입니다!
‘식언(食言)’에 익숙해진 이의 약속
-원용훈 신부님-
‘한번 꺼낸 말을 다시 입 속에 넣다’는 뜻의 식언(食言)은, 곧 ‘약 속한 것을 지키지 않는 것’을 비유하는 옛말이라 합니다. 시작부터 그랬던 듯합니다. ‘신학교에 들어가게만 해 주신다면…’ 그 바람 너머의 약속은 건들산(신학교 뒷산) 바람에 실어 보냈습니다. ‘제대만 하게 해 주신다면…’ 군대에서의 그 간절함 너머의 약속은 군대에 남겨두고 왔나 봅니다. 위기의 순간마다 그토록 바랐던 기도 들, ‘사제가 되게만 해 주신다면…’ 나만이 알고 있는 그 기도는 어느 덧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되었나 봅니다. 그리고 교우들 앞에서 내뱉 었던 지키지 못한 수많은 약속들… 참 많이 잊고 삽니다. 기억을 못 하는 척, 바쁘다고 잊고, 게을러서 잊고 지냅니다. 그렇게 ‘식언’에 익숙해진 이가 또 무언가를 바랄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자비를 바라는 간절한 이들의 청을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들어주시어 그들의 나병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께로 돌아와 감사 를 드립니다.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기다리신 분의 마음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돌아오기를 바랐던, 언제나 성실하신 당신을 사람들은 쉽게 부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외로움 안에서 비로소 ‘염치없는 나’를 만납니다. 그분의 성실한 기다림 속에서 비 로소 ‘거짓의 내가 그럼에도 살아가는 이유’를 깨닫습니다. 그것은, ‘나 스스로의 믿음으로 나 자신을 구원하길’ 기다려주신 까닭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먼저, 나를 믿는 내가 되어야겠습니다. 또 다른 바람과 청함이 아니라, 이미 베풀어주신 그 많은 은총에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많이 늦었지만, 용기 내어 여전히 기다리시는 주님 께로 돌아갑니다. 식언(食言)에 익숙해진 이가 또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박태범 신부님-
오늘 제1독서에서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자신의 나병이 낫자 가던 길을 멈추고 예언 자 엘리사에게 되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고 감사의 예물을 바치고자 합니다. 나아만 은 이방인이지만 감사할 줄 아는 인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그러나 그중 유대인 아홉은 그냥 가고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되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마리 아 사람은 평소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던 사람이지만 감사할 줄 아는 인간입니다.
사제관 곳곳에 걸어두고 제가 마음에 새기고 사는 중국어 성경구절이 있습니 다. 세 개의 사자성어로 되어 있어서 외우기 쉽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테살로니 카 전서 5장 16절에서 18절의 말씀입니다. “응상환락(應常歡樂 언제나 기뻐하십 시오), 부단기도(不斷祈禱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사사감사(事事感謝 모든 일 에 감사하십시오)”입니다. 이 세 구절은 제가 유배살이 하는 중에 많은 힘이 되 는 보약입니다. 저는 매일 저녁 세 개씩만 감사할 거리를 찾아 적어 봅니다. 그러 면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이 세 개의 구절 중 “사사감사”, 이것 하나만이라도 외 우도록 합시다. 암송하기 쉽습니다. 열 번만 읽으면 머리와 가슴에 새겨질 것입니 다. 다 함께 마음에 새기도록 합시다. 사사감사, 사사감사, 사사감사 …
감사가 감동이 되어 가슴 찡해지면 감기(感氣)도 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행복 호르몬이 분비된다고 합니다.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지수가 올라갑니다. 그리고 사사감사하면 사사축복(事事祝福)입니다. 많이 감사하면 많이 감사할수록 더 크게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감사는 더 큰 축복의 통로입니다. 감사행위의 박동(搏動)은 삶의 약동(躍動, l’élan vital)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사사불평이면 사사앙화(事事殃禍)입니다. 요컨대 감사는 대박으로, 불평은 쪽박으로 접속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치유를 받고 되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사람은 열 명 중에 한 명뿐입니다. 감 사한 마음을 언행으로 표현하기가 그렇게도 힘든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 냐?”하고 물으십니다. 오늘 한 번 곰곰이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나는 아홉에 속합니까? 아니면 하나에 속합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행복 바이러스의 파도는 사사감사의 파동(波動)을 타고 옵니다. 아무쪼록 이번 한 주간 동안 사사감사(事事感謝)하면서 지내는 행복한 한 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시다.
-정흥식 신부님-
오늘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셨는데 나중에 돌아와 큰소리로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 하나뿐이었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당시에 사마리아 사람이란 나라 밖의 사람이요, 이단자였으며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아홉 사람은 하느님의 선택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예수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17장 18절) 하시고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셨다.”(17장 19절)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낯선 사람들과 나라 밖의 사람들이 신앙의 순례를 받고 하느님을 찬양하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스스로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감사를 드릴 줄 모르는 아홉 사람의 나병 환자들은 분명 하느님의 백성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역사를 통해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으면서 마음으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생활로 드러낸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자신의 죄악에 대한 핑계로 ‘크리스천적 정열’을 내세우며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했던 사람들, 도시를 약탈하고 파괴하면서 그리스도께 대한 열성을 불러일으킨다고 소리치며 십자군에 뛰어나간 사람들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어떤 지위가 주는 것에 만족하면서 우리와 피부색이 다르거나 사회적 신분이 낮다고 해서 사람들을 미워하는 ‘직업적인 크리스천’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주님의 은혜를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나병 환자 아홉 사람과도 같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중에 어디에 속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할 때는 전혀 다르게 나타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잘 난 체하고 스스로 만족하며 마치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을 권리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지 모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도 그리스도 시대에 배척을 당한 바를 그 사람들과 똑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깨달을) 날이 올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신앙에 대해 참으로 감사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려고 온갖 방면으로 노력함으로써 감사를 표시해야 할 것입니다.
또 모든 사람에게 신앙이 전파되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만나는 사람에게 친절과 사랑으로 대접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여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에 대한 우리의 최초의 응답,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모든 것에 대한 최초의 응답은 글자 그대로 큰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체성사를 통해 큰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이에 온 정성을 다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이끌어주시길 단단히 결심하도록 합시다.
오늘 성체성사에서 힘을 길러 나아가서 세상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줍시다.
간단한 것?! 손쉬운 것?!
박광선 베드로 신부님
인간은 삶이라는 시간의 연속성 안에서 살아갑니다.
이 시간의 틀은 수많은 삶의 숙제들을 직면하게 하며, 대부분이 각자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세상 안에서 바라는 결과물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 몫의 일들을 준비하고 진행해야 자신이 만족하는 결과물을 얻게 됨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당연한 삶의 계산법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이런 기본적인 삶의 이치를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시키며 살아갑니다.
제1독서의 시리아 군사령관 나아만은 나병을 앓게 됩니다.
우연한 기회에 병이 나을 방법을 알게 되고 이스라엘의 예언자를 찾아갑니다.
황당한 방문에 이스라엘 왕은 화가 났지만 엘리사는 앞에 나아가 야훼 하느님의 능력을 통해 간단한 방법으로 병을 고쳐주고자 합니다.
백약이 무익했던 나아만은 조롱 같은 그 간단함에 화가 났지만 주위의 만류로 결국 순순히 그 방법을 따르고 병을 고치게 됩니다.
또 복음의 나병환자 열 사람은 치유의 목적으로 예수님께 큰소리로 자비를 청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저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여주라는 손쉬운 방법을 일러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저 길을 가는 도중에 낫게 됩니다.
당시의 불치병이 너무나도 간단하고 손쉽게 낫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은 단순히 병을 치유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핵심을 보면 나아만은 엘리사의 간단한 방법에 순종하였기에 나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순종을 통해 하느님을 알고 신앙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의 나병환자 열 사람 중 한 사람은 치유의 감사를 고백하기 위해 되돌아온 믿음의 행위를 통해 병의 치유를 넘어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어찌 보면 대부분 치유라는 결과물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단순한 순종과 진정한 감사의 고백을 통해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원의(願意), 즉 당신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향한 신앙과 당신이 주시는 사랑의 구원이 목적임을 알려주십니다.
또한 이 신앙의 공식은 단순한 진행을 통해 다음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이 하느님의 선물, 계산법은 우리에게 커다란 대전제를 깨닫게 합니다.
신앙의 공식 속에 숨어있는 대전제란 바로 내가 순종하고 감사의 고백을 한 주체, 주어를 확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존재를 고백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을 다음 단계 또는 결과물을 얻는 것을 넘어서, 우리를 당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하고 체험을 통한 근본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끝은 하느님 나라와 구원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보여 지는 각종 복잡한 수학과 화학적인 공식, 물리적인 현상과 건축물들을 보며 그 엄청난 복잡함에 혀를 내두르며 그 방법을 알 엄두도 못 냅니다. 그러나 그 복잡함의 구성은 가장 단순하고도 기본적인 연산법칙, 즉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기본의 약속들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음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이는 엄청난 현상들 또한 간단하고 손쉬운 기본들을 토대로 이루어졌다는 이치입니다.
이러한 이치들을 통해 우리는 진리를 얻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항상 그리스도를 향한 기본적인 믿음을 고백합니다. 우리 또한 각자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신앙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면 됩니다. 결과는 하느님께!
사소함에 대한 행복
신달자 엘리사벳(시인)
얼마 전 한 달 동안 병원 침대에 누워 본 적이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한 달이라고 말할 때 ‘감사합니다.’라고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두 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말에는 참으로 기특한 말이 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입니다. 다리와 머리도 다칠 수 있는 사고였는데, 허리만 다쳤을 뿐 다른 곳은 무사하기 때문에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제가 이렇게 너그러운 인간이 아닌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들판 같아졌습니다.
이기적이고 위선으로 가득 찬 제가 너무 공손해져서 하느님도 웃으셨을 겁니다.
전 늘 비우고 또 비운다고 말했지만, 탐욕에 가득 찼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다시 제 마음을 개혁하라고 한 달 동안 누워있게 하셨는지 모릅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 개혁은 성공하셨습니다. 저는 다시 돌이 된 아기가 되어 기는 것, 앉는 것, 서는 것, 걷는 일을 다시 배우게 되었습니다.
일흔일곱에 다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앉는 일, 서는 일, 걷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런 것쯤은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라고, 그 정도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본 소유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왜 그것이 축복인지는 부끄럽지만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걸으면서 푸른 하늘을 보는 일, 나무에 앉은 새를 보는 일, 걸으면서 참아내려는 울음같이 붉은 노을을 보는 일은 눈물겹도록 그리운 것이었습니다.
모두 주님이 무상으로 주신 선물이니까요.
‘괴테’의 행복의 다섯 가지 원칙은 나를 실망하게 했었습니다.
적어도 괴테라면 철학적이고 더 명상적이어야 한다고 건방을 떨었지요.
첫째, 지난 일에 연연하지 않기.
둘째, 미워하지 않기.
셋째, 사소한 일에 화를 내지 않기.
넷째, 현재를 즐길 것.
다섯째, 내일은 신에게 맡길 것이었습니다.
나도 다 아는 일이라고 건방을 떨었는데 저는 늘 지난 일을 가지고 안절부절못하고, 남을 미워하고 화를 잘 내며, 내일을 완전히 하느님께 맡기지 않고, 이상이나 꿈이라는 이름으로 내일을 내 식으로 조각하곤 했습니다.
그 다섯 가지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이번에 깨달았습니다.
사소한 일을 행하는 자가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소함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역시 그 이름에 답하는 문호라는 것을 몸을 다치고 알았던 것입니다.
어리석음은 끝이 없습니다. 왜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지, 왜 묵주기도를 그치지 않는지 가슴을 치면서 깨달았습니다.
이 겸손이 얼마나 갈까요.
제 나이를 보면 이 정도는 깨달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어설픈 몸이지만 그치지 않고 십자가 앞에서 주님과 대화하는 이 무량의 시간이 황홀할 만큼 행복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나의 통증이여, 주님을 찬미하여라.”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 1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시월에도
어김없이
꽃은 피었다
집니다.
하느님께
돌아갈
우리모두의
여정입니다.
하느님 자체가
자비이십니다.
자비의 빛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끝내 자비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지 못하는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치유는
모든 순간에
하느님과 함께하는
여정입니다.
자비를 올바로
체험한 이는
자연스레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영광은 껍질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깨어나는
삶으로 이끕니다.
영광의 삶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은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신앙의 여정은
이렇듯 치유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께 돌아가
영광을 드리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중심이 되는
감사와 찬미
기쁨과 영광이
중심이 되는 은총과
자비의 주일
되십시오.
"저희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수욱 신부님-
나병(한센병) 환자들이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큰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열 명이 간절하게 소리를 질러댔으니 귀가 따가울 정도였을 것입니다. 저 같으면 우선 급한 김에 나병을 고쳐 달라고 매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들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자비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현대 의학에서 나병은 죽을병이 아닙니다. 세상에 새로 생긴 많은 병으로 사람들이 극심한 고통을 받고 불안해하고 죽어갑니다. 몸으로 드러나는 큰 병도 있지만, 정신적인 병도 많이 생겼고 영적인 병도 많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는 들어보지 못한 우울증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갑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많은 사람이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는 것을 자신들도 모르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 권력을 쥔 이들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이나 못 배웠다는 이들 모두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겉으로는 부유해 보이지만, 조금만 속을 들여다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얼마 전까지 매우 가난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 이제 세계가 인정하는 부자 나라가 됐습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한국 교육열은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한때 자주 부러워했습니다. 고학력 사회입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절망하고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결혼할 꿈도 못 꿉니다. 한국 사회는 병들어 있습니다. 어디를 바라봐도 희망을 찾기 힘듭니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우리 귀에 익숙해졌습니다.
그 나병 환자와 같은 사람들이 오늘 우리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진심으로 외쳐야 할 차례입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자비를 입어야 한다는 것을 올해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함께 온 세상의 신자들이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모두 치유됩니다. 그 자비는 사람을, 죽어가는 사람을 살립니다.
그들은 당장 고쳐 주시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궁금합니다. 예수님께 뭔가 잔뜩 기대했을 텐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부 상처도 보시고 그들이 고되게 살아온 인생 여정도 살펴보셨을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고 무시당해 온 삶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좀 엉뚱하지 않습니까?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기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순순히 떠납니다. 체념하는 것에 익숙해서일까요? 그렇게 떠난 그들은 길에서 자신들이 치유됐음을 알아봤습니다.
우리도 이미 치유되고, 바라는 것이 이뤄졌는데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계속 불만을 품고 살아갑니다. 기쁨도 살아가는 재미도 없고 보람을 느끼지도 못하고 불만에 가득 차서 살아가곤 합니다.
그 열 명 가운데 유일한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은 기뻐하면서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께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온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선언하셨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 ‘하느님의 자비를 간절히 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장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신뢰하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 안에서 생명으로 치유해주시는 하느님의 업적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주님께 엎드려 감사드리러 오는 것입니다. 특히 감사 기도인 주일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바로 이 신앙의 가르침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드러나는 참된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치유돼 참 생명을 되찾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때입니다. 하느님께 감사하고, 함께 고생한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영광을 드러내야 할 때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사람들한테서 빛납니다. 숨만 쉰다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일어나 가거라.” 곧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해 영원히 살아 있도록 우리의 신앙은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얼마나 충실한가
-염철호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 전체를 흐르는 중요한 주제는 “믿음”, 곧 “성실함”입니다. 지난주 복음 생각에서 “믿음”과 “성실함”이 히브리어로는 같은 단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신약이든 구약이든 모두 믿음, 곧 성실함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동일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믿음을 지닌 이들은 유다인이 아니라 이방인들입니다. 먼저 1독서에서는 당시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던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를 찾아옵니다. 자존심이 강했던 나아만은 처음에는 엘리사의 말을 듣지 않지만, 수행원들의 말을 듣고 엘리사가 시킨 대로 하자 나병이 낫습니다. 이에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큰 선물을 주면서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겠다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선물을 받지 않고 나아만을 고향으로 돌려보냅니다.
오늘 1독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이야기에 이어 엘리사의 종 게하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게하지는 나아만이 가지고 돌아가던 선물에 탐을 내고 쫓아가서는 거짓으로 그 선물을 챙겨 돌아옵니다. 게하지가 자신의 말을 거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엘리사는 나아만의 병이 게하지와 그 후손에게 돌아가도록 만듭니다. 이방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충실히 지키는데, 유다인 게하지가 자기 마음대로 하느님의 계획을 거스르다 나병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 이야기의 초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유다인이 아홉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은 치유를 얻은 뒤 즉시 자기 갈 길을 가버립니다. 하지만 열 가운데 유다인들의 원수였던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충실한 그를 보면서 사마리아 사람인 그가 진정 구원을 얻었다고 선언하십니다.
구원은 출신성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실한가, 믿음이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고,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입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충실한 사람, 믿음을 지닌 사람, 하느님의 은총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이들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입니다.
사실, 세상에서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갈 때는 이런 가르침이 별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위해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고통당하거나, 핍박받고, 감옥에 갇히거나 박해받으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많은 이들은 고통, 핍박, 박해 상황이 되면 하느님을 비난하며 떠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지닌 우리에게 사도 바오로는 오늘 2독서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2티모 2,11-12)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충실함,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충실한 분이시기 때문에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시면서도 동시에 당신 약속에 충실하신 분이시기에 당신을 버리는 이들을 기꺼워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이창주 율리오 신부님-
1571년 10월 7일 주일 아침, 연전연승을 거듭하던 오스만 제국군은 가톨릭을 몰아내고 유럽을 장악하기 위해 지중해로 대함대를 몰고 왔습니다. 교황 비오 5세는 열세에 놓인 상황에서 로마의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를 통해 성모님의 중재로 어려운 싸움을 이겨내자고 요청하셨고, 전쟁에 임하는 군인들을 비롯해 신자 모두가 한마음으로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처음부터 적지 않은 배를 잃어 수세에 몰리면서 절망에 놓였던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기적적으로 오스만 함대를 몰아냈습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이 전쟁의 승리를 전해 들은 신자들은 무엇보다 묵주기도의 기적이었다고 믿었고 성모님께 대한 감사 기도와 예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그래서 10월 7일을“묵주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1957년 1월 21일 대구대교구로부터 분리된 부산교구는 신자 38,000명, 성당 27개, 사제 32명의 작은 교구였습니다. 초대 교구장께서는 우리 교구를 묵주기도의 성모님께 봉헌하고 성모님의 전구로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는 교구로 성장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묵주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을‘교구 수호 축일’로 제정하였습니다. 이후 교구민들의 많은 기도와 여러 은인들을 통하여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 교구는 신자 447,563명, 성당 124개, 사제 354명(2015년 말 집계)으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초고령화, 저출산으로 인구 감소가 가속화되고, 경제는 계속 어려워지고, 테러와 핵(核)으로 인한 공포와 갑자기 닥쳐오는 자연재해로 인한 두려움으로 우리는 걱정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동안 성장만을 위해, 그리고 그 배부름으로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상속재산을 마구 탕진한 결과입니다. 우리의 가장 무서운 적(敵)은 삶의 가치를 숫자로 계산하고 많은 일을 인간의 힘으로만 해결하려는 어리석은 지혜와 교만이었습니다. 445년 전이나 60여 년 전 신앙인들은“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 37)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순명으로 자신을 내어놓은 성모님의 신앙을 본받아 많은 위기를 극복해 왔습니다. 묵주기도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인간의 머리로 불가능하다고 포기하려는 우리의 교만함을, 순명이라는 겸손으로 극복하여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따르는 기도입니다. 오늘 교구 축일을 맞이하여, 교구민 모두가 성모님의 겸손함과 항구함을 마음에 새기며 교구 은인들을 위해 감사의 묵주기도를 봉헌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행복해야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박영식 신부님-
경남 산청에 있는 성심원에 한때는 7백 명이 넘는 한센병 환자들이 살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 생지옥과 같은 곳에 일본인 수녀 기시다 데레사를 보내주셨다. 그는 성심원으로 자원해 와서 그들을 돌보기 시작했다(1986년 2월 MBC 인간시대: ‘천사님, 우리들의 천사님’). 일제시대 자기 동포들이 조선 사람들에게 너무나 몹쓸 짓을 자행한 것을 대신 속죄하고 싶어서 성심원으로 왔단다. 또한 자기만 행복하면 된다고 여기며 사는 자가 이기주의자요 결국 행복을 빼앗기고 만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좋은 것인가? 이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보다는 불행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닫고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된다.”(A. 슈바이처)
성심원에서 데레사 수녀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그들을 보살피고 섬겼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한센병 환자가 아니라서 환자들과 동고동락할 수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 결국에는 한센병에 감염되었다. 데레사 수녀는 이 사실을 알고는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예수님이 자기를 너무나 사랑하여 당신의 고난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이런 복을 주셨다고 고마워했다. 예수님은 성심원에서 데레사 수녀의 헌신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다. 그는 과거 일재시대 소록도에 와서 한센병자들을 학대하고 생체실험까지 자행한 왜놈들, 치가 떨리는 그 왜놈들의 땅에서 온 ‘쪽발이 왜년’이라고 자기를 욕하던 한센병자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시작했다. 눈이나 코가 함몰되어 흉측하게 생긴 병자들이 조금씩 예쁘게 보이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는 행복한 반면,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는 불행하다.”
데레사 수녀는 한센병에 감염되어 더욱더 큰 행복을 체험하고 이 행복을 병자들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
“행복은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할 때에만 얻을 수 있다.”(S. 클루티)
내가 행복해야 불행과 비운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법이다. 이는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려고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는 순간 행복의 극치로 들어가서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신 신비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는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느라고 가난과 고통과 슬픔을 받을 때 참된 행복을 누리고 이웃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해져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데레사 수녀처럼 불행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의무가 있다고 자각하는 이들이다.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 때문에 행복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불행한 사람의 침묵이 없었던들 행복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A. 체호프)
하느님은 서로 헐뜯고 때리고 상처를 입히던 한센병자들이 데레사 수녀와 그와 함께 일한 수녀들과 자원봉사들의 사랑으로 성심원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어나갈 힘을 주셨다. 손가락이 썩어 없어져 팔목에 묵주를 감고 있는 환자들이 텅 빈 성당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하느님은 신체적인 병 치유보다 더 중요한 마음의 병을 고쳐 당신과 이웃에게 늘 고마워하고, 서로 사랑하고, 참혹한 문둥이의 인생을 아름다운 인생으로 노래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 한센병자들은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이다.”
라는 말을 하며 서로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고, 서로 위로하기 시작했다. 문둥이들이 함께 모여 사는 것을 복이라고 여기며 생지옥을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만들어갔다.
남을 행복하게 해주려면 자기보다 남의 기쁨과 행복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나쁜 성질을 좋은 성격으로 바꾸고, 덕을 닦고 훌륭한 인격을 갖추려고 애쓰는 것이다. 성품에 결함이 없는 이가 행복하다. 성실, 온화, 헌신이 인간의 행복을 조성한다. 집착과 강박의 고통을 빨리 버릴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
“자기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부드러운 사람은 행복한 반면, 자기에게 후하고 남에게 가혹한 사람은 불행하다.”
이처럼 훌륭한 성품을 갈고 닦는 것이 산청 성심원에서 한센병 환우들을 기쁘게 하려고 살신성인한 데레사 수녀님을 본받는 것이다. 그를 기억하면 비운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찾아 나설 힘을 받는다. 이와 반대로,성질이 더럽거나 어둡거나 우울한 사람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어두워지고 불쾌해진다.
“지혜가 깊은 사람은 자기에게 무슨 이익이 있다고 여겨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행위 자체가 행복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B. 파스칼)
-서공석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난 이야기였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은 나병환자가 사람들 가까이에 오는 것을 금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나병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예수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예수님은 가서 사제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병이 치유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사제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제들에게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 중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은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인류는 나병을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불행들 앞에서 인류역사는 늘 하느님 혹은 하늘이 준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천형(天刑), 곧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일컬어졌습니다. 한국의 한하운(韓何雲) 시인의 시에 이 천형이라는 말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는 1920년에 태어나 중국과 일본에서 공부하고 함경남도 공무원으로 재직했습니다. 그가 나병에 감염된 사실을 안후에 남긴 시가 있습니다.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罰)이올시다./ 아무 법문(法文)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내세워놓고/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이 시는 천형, 곧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들 말하는 그 병의 비극성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셨다, 혹은 나병을 깨끗하게 하셨다는 이야기는 복음서들 안에 많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예수님이 어떤 초능력을 가진 분이었는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은 질병을 비롯한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병이나 나병을 낫게 하였다는 복음서 이야기들은 하느님이 죄에 대한 벌로서 사람들에게 병을 주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벌을 주거나 저주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선포하셨습니다. 벌주고 저주하는 일은 우리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느님은 고치고 살리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이었고, 그렇게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오늘의 복음을 읽고 예수님에게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은 배은망덕하였고, 돌아온 한 사람만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았다고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정도의 교훈은 이솝의 우화들 안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지 않고,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오늘 복음은 치유된 사람들 중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고 말합니다.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성당 전례에서 신자들이 성가를 부르는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리는 행위는 그리스도 신앙인이 성당 안에서 하느님을 흠숭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오늘의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베풂을 받은 열 사람이지만,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그분을 찬양하고 그것을 배우려 나선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느님이 얼마나 은혜로운 분인지를 알아듣고, 하느님에게 와서 감사드리는 신앙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우리가 살아 있습니다. 우리의 삶, 우리의 가족,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 모두가 하느님이 베푸신 것들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에는 감사할 일이 대단히 많습니다. 우리의 의식주(衣食住)를 비롯하여 우리와 가까운 분들, 모두가 하느님이 베푸신 결과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고통스런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의 나병환자들과 같이 사람들로부터 버려지고 참담한 심경으로 하늘을 원망하며 살아야 하는 순간들도 있습니다.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돈이 없어서, 계획했던 일이 실패해서, 좌절과 실망을 안고 실의에 차서 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생존이 없으면, 그런 고통과 좌절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주어지지 않은 것만 확대해서 보기 쉽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고도, 우리를 미워하며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들만 확대해서 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은혜로움을 외면하고, 멀리 있는 냉혹함만 보고, 불행하게 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쁩니다. 더 많이 갖고, 더 건강하고, 더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바쁩니다. 대책도 세우고 계획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된 열 명의 나환자 중 아홉 명은 자기들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알자, 바삐 가야 하였습니다. 각자 원하던 바를 차지하고, 그것을 누리기 위해 바삐 가야만 했습니다. 이제 나병이라는 불행을 벗어났으니, 그들에게는 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자기가 먼저 해야 할 일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베푸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큰소리로 찬양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예수님을 배우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 안에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던 신앙인의 모습이 소박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며 절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실행하는 예수님을 만나 그 절망에서 벗어나 사회에 복귀하였습니다. 하느님은 병과 소외와 절망을 주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와 반대로 예수님은 사람을 고치고 살리는 하느님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에게 와 엎드려서 그 하느님의 일을 배우는 사람은 적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알아보고, 그것을 배우는 사람이 올바른 신앙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인간을 소외시지만,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섬기고, 내어주고, 쏟아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오늘도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구원으로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새벽 묵상 글을 쓴 지가 벌써 16년째입니다. 긴 시간을 썼다는 말과 함께 대단하다고 하시는 분들도 참 많습니다. 솔직히 저 역시 스스로를 대단하다면서 자화자찬 했을 때가 한 10년째 쓰고 있을 때 하고 있었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강산도 변하는 시간 동안 매일 새벽 묵상 글을 썼다는 생각에 스스로 으쓱했던 것이지요. 많이 교만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자매님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새벽 묵상 글을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서 많은 것을 깨우치게 되었다면서 혹시 면담을 할 수 있냐는 내용이었지요. 이 자매님과 약속 시간을 잡았고, 그 시간에 제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시간이 지나 약속한 날짜가 다가왔고, 이 자매님을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본 이 자매님께서 크게 실망한 표정이 역력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신부님, 제가 생각했던 모습과 많이 다르시네요. 너무 젊으세요. 이렇게 젊은 신부님께 제 이야기를 하기가 좀 뭐하네요.”
아마 묵상 글을 10년이나 썼으니 연세 지긋한 신부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40대 초반의 젊은 신부가 눈앞에 있으니 당황하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젊은 신부가 뭘 알아서 나를 상담할 수 있겠어? 괜히 왔네.’라는 표정을 짓고 계셨던 것입니다.
결국 상담하지 않고 그냥 평범한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만남을 마쳤습니다.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좋지 않으면서 화도 났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부족한 것이 너무 많은 제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경험도 부족하고 아는 것도 별로 없는 것이 맞는 것이었는데, 고작 묵상 글 10년 쓴 것으로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 뒤에 저는 계속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코칭, 교수법, 리더십 프로그램 등을 수강하면서 저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6년의 시간을 지낸 지금, 앞서 만났던 그 자매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분을 만나지 않았으면 어쩌면 정말 아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교만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요?
생각해보니 감사할 일들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문제는 부정적인 생각과 불평불만으로 감사함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어렵고 힘든 순간을 참아내고 노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묵상해 봅니다. 당시에 나병이라는 병은 치유될 수 없는 끔찍한 병이었습니다. 가족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을 정도로 철저히 사람들에게서 분리되었다는 것만 생각해도 얼마나 비참한 상황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병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치유된 열 사람 중에서 단 한 명만이 돌아와서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는 것이었지요. 그렇게 큰 은총을 얻었으면서도 감사의 표시를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생각해보니 우리 역시 그러했던 적이 많았음을 깨닫습니다. 불평불만이 온 마음을 가득 채웠을 때, 받은 것이 많아도 감사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고통과 시련 가운데에도 언제나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감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받은 많은 것들을 바라보기보다, 내가 손해 본 조금의 것들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얼마나 주님께 감사하면서 살고 있었을까요?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지금의 나에서 한 단계 더 주님 곁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곁에서 더 큰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감사했던 사람이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선물까지 얻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오늘의 명언: 하늘에 바쳐진 감사의 생각은 완전한 기도다(G.E.레싱).
오늘 내가 맡은 배역(김창완, ‘안녕, 나의 모든 하루’ 중에서)
엉뚱한 상상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엉뚱하게 저한테 장난 좀 쳐보기로 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들께서 아이들 기 살려주느라고 우리 장군이니, 왕자님이니, 공주님이니, 하고 부르잖아요. 저도 저를 주인공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아이고, 주인공님 일어나셨네.”라고 말하고는 욕실에 들어가 칫솔에 치약을 짜서 묻히면서 “우리 주인공님 이 닦으신다.”라고 하고, 거울을 보면서 “주인공님 눈곱 떼셔야겠네.”라고 하면서 눈을 비비고, “주인공님 외출하시네.”라고 해봤지요. 이러니까 괜히 어깨가 으쓱하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이렇게 생각해보자고요. 주머니 사정이 영 시원찮으면, 내가 맡은 주인공은 주머니가 두둑하지 못한 배역이구나, 역할이 그러니 좀 가벼운 게 자연스럽다, 오히려 캐릭터에는 잘 맞는구나, 하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또 걱정거리가 많으면, 이 역할이 고뇌가 많은 설정이구나, 고민들이 어색하지 않구나, 하고 여기면 어떨까요.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높아야 감사할 일도 많아지지 않을까요? 나에게 주인공 역할을 주신 하느님께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주인공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영화의 흥행이 달라집니다. 인생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역을 맡은 여러분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금은 누구나 지니고 있는 것이 ‘핸드폰’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핸드폰을 가졌던 것은 지금부터 21년 전입니다. 국산은 없었고, 모토롤라 제품을 샀습니다. ‘삐삐’를 가지고 다니다가, 동창들이 핸드폰을 마련하자고 해서 큰마음 먹고 장만했습니다. 그리고 핸드폰 끝 번호는 축일로 정했습니다. 저의 핸드폰 끝 번호는0929입니다. 핸드폰은 컸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기억나는 핸드폰 선전이 있습니다. ‘걸리니까 걸리버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애니콜입니다. 자장면 시키신 분, 소중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잠시 꺼 주셔도 좋습니다.’ 21년 시간이 흐르면서 핸드폰의 기능은 무척 다양해졌습니다. 단순히 전화를 걸고 받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카메라 기능, 교통카드 기능, 음악을 듣는 기능, 내비게이션 기능, 신용카드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연결된 핸드폰은 각종 정보를 검색할 수 있고, 유용한 애플리케이션은 생활에 편리함을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핸드폰의 가능성은 더욱 커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에 있던 본당에서 설립 2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작은 공소였던 성당은 20년이 지나면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초대 신부님은 성당과 사제관을 마련하였습니다. 저는 식당과 주차장, 손님들이 지낼 수 있는 숙소를 마련하였습니다. 후임 신부님은 넓은 마당을 마련하였습니다. 다음 신부님들은 신앙의 꽃을 피우는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고 있습니다. 교우들의 땀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고, 모든 것이 하느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과학과 기술만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명과 사회만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성, 우리의 감성, 우리의 신앙도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공자님은 그러한 삶을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은 그러한 삶을 ‘팔정도(八正道)’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이라는 아름다운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들 마음의 밭에 뿌려진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세상의 것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마치 자갈밭에 뿌려진 씨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듣고서 살고자 하지만 유혹 앞에 흔들리는 사람은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듣고서 삶이 변하고, 이웃에게도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좋은 밭에 뿌려진 씨와 같아서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신앙인은 3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영적인 성장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운전의 3단계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준법운전입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운전입니다. 빨간 불에는 서고,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고,규정 속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운전만으로도 우리는 교통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주일미사를 잘 지키고, 성경 말씀을 자주 읽고, 교무금 헌금을 기쁜 마음으로 내는 신앙인과 같습니다.
두 번째는 안전운전입니다. 교통법규는 당연히 잘 지키고, 무리한 운전을 하지 않습니다. 장거리 운전을 할 경우에는 중간에 잠시 쉬고, 차량 정비를 자주하고, 앞차와의 거리를 유지하는 하는 것입니다. 이런 운전을 하면 인생도 푸른 신호등처럼 늘 맑고 푸른 날이 될 것입니다. 주일미사는 물론이고 평일미사도 자주 참례하는 분, 본당의 단체에 가입을 해서 봉사하는 분, 각종 피정과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 소공동체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분입니다. 이런 분들이 있으면 본당도 기쁨과 평화가 넘쳐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양보운전입니다. 급한 사람이 먼저 갈 수 있도록 양보해 주는 운전, 몸이 아픈 이웃을 병원으로 모셔다 드리는 운전, 짐을 들고 가는 어르신을 태워 드리는 운전, 고장 난 차를 보면 내려서 도와주는 운전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운전은 단순히 이동수단이 아닙니다. 운전이 곧 선교이고, 운전이 곧 사랑입니다.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처럼 나의 삶에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이미 하느님 나라에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어디에 속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엘리사의 도움으로 나병에서 치유된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이제 몸만 건강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으로 치유된 사마리아 사람도 이제 몸만 건강해 진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러한 삶을 ‘복음의 기쁨’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은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 -만남의 은총-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주일 강론은 ‘만남’에 대한 묵상입니다. 만남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온통 만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만남의 은총, 만남의 선물, 만남의 기쁨, 만남의 행복 등 끝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늘 새로운 만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반복되는 만남도 마음이 새로워져 눈이 열리면 모두가 새로운 만남, 만남의 선물이 됩니다.
어제의 만남도 새로웠습니다. 원주교구 말씀봉사자들 스물 여섯 분과 지도신부, 지도수녀 각각 한 분, 도합 스물 여덟 분이 하루 순례중 여기 요셉수도원에 들렸고 한 시간 동안 강의를 했습니다. 수녀님을 제외한 모든 분들이 생전 처음 수도원을 방문한다 했습니다. 주로 순례여정인생중 ‘만남의 놀라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여기서 여러분과의 만남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놀라운 선물입니다. 놀라운 축복입니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대에 살면서 처음 만나지 않습니까? 만남 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런 만남도 아예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이어 주로 오늘 강론 주제인 주님과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들 역시 모두가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들의 기록입니다. 우리 또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고자 이 거룩한 주일미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때 위로와 치유, 기쁨과 평화, 정화와 성화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늘 주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을까요?
첫째, 주님을 찾을 때 만납니다.
다른 무엇보도 우선 찾아야 할 분은 주님입니다. 주님을 찾는 열정은 영성생활의 시발점이자 원동력입니다. 주님을 찾는 열정의 불이 꺼지면 영성생활은 끝입니다. 수도생활 역시 하느님을 찾는 삶이라 정의합니다. 하루 이틀 찾고 끝나는 하느님이 아니라 매일, 죽는 날까지 새롭게 찾아야 하는 하느님입니다. 우리의 모든 병고의 시련과 상처의 아픔 등 모두가 하느님을 찾으라는 신호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 열명, 제1독서의 시리아 사람 나아만, 모두 나병이 없었다면 주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겸손한 믿음도 지니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나병을 통해 주님을 만났으니 나병은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이슬람의 신비가이자 시인인 루미의 말입니다.
'상처는 빛이 들어오는 길이다.'
상처뿐만이 아니라 병도 빛이, 하느님의 빛이 들어오는 길입니다.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우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을 만난 열명 나병환자들은 소리 높여 말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바로 우리가 미사가 시작되면서 바치는 자비송이 아닙니까? 새삼 미사의 구조가 얼마나 은혜로운지 깨닫습니다. 나병환자처럼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자비송을 바치며 미사를 시작해야 자비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이런 자비송에 바탕을 둔 동방수도자들이 늘 숨쉬듯 끊임없이 바쳐온 기도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이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복음의 요약과도 같은 기도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기도를 바칠 때 자비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둘째, 주님을 만날 때 치유의 구원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주님을 만나 치유의 구원을 받기 위해 이 거룩한 미사전례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열명 나병환자들은 주님을 찾았고 주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즉각적 응답입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 졌다 합니다. 일방적 치유의 기적은 없습니다. 나병환자의 주님을 찾는 간절한 믿음과 주님의 말씀의 은총이 만날 때 비로소 치유의 기적, 치유의 구원입니다.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의 나아만의 치유과정도 은혜롭습니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나병 환자인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매사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평범한 사물이나 사건도 우리를 치유하는 하느님의 도구 역할을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역시 나아만의 순종의 믿음과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를 통한 주님의 은총이 만남으로 발생한 치유의 기적입니다. 우리가 치유를 받지 못함은 겸손한 순종의 믿음이 없어 주님의 은총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 열명의 나병환자를 치유하셨고, 엘리사를 통해 나아만을 치유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만나는 모든 하느님의 사람들, 바로 하느님의 치유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셋째, 주님을 고백하는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성경은 사실언어보다는 거의가 고백언어입니다. 주님께 사랑을, 믿음을, 희망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고백하면서 주님과의 관계는 깊어지고 주님 ?한 믿음도 사랑도 희망도 더욱 더 견실해 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는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해 당부하며 믿음을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아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주님께 대한 고백입니다. 감옥은 물론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이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옥중에 있으면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무한한 내적자유를 누리는 대자유인 바오로 사도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주님께 드리는 찬양과 감사의 고백입니다. 찬양과 감사의 고백보다 영육의 건강에 좋은 것은 없습니다. 영혼의 병의 예방과 치유에 찬양과 감사보다 더좋은 예방제, 치유제도 없습니다. 특히 주목되는 두 장면에 대한 집중적 탐구입니다. 하나는 예수님과 치유받은 열명의 나병환자의 관계요,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와 치유받은 나아만의 관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놀라운 사실은 치유받은 한 사람만이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라는 평범한 묘사가 신선한 충격입니다. 나머지는 신앙 좋다는 유다인이 분명한데 찬양과 감사의 사람은 단 하나 사마리아인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경탄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어 예수님은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내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오지 않았단 말이냐?”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 바로 분도회의 모토이자 수도원 정문 바위판에 새겨져 있는 글귀입니다. 아, 정말 치유받은 아홉명의 결정적인 실수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의 찬양을 드리며 감사해야 온전한 치유의 구원인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여러분은 아홉과 하나중 어느 편에 속하는 지요. 아홉명은 바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배은망덕한 사람들이라 질타하지 마십시오. 나름대로 갈길이 바쁘고 할 일이 많다보니 순간 하느님을 잊은 것입니다. 이래서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라는 시편 말씀을 상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갈길이 바쁘고 할 일이 많아도 잠시 멈추어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영적습관을 지니기기 바랍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께서 미사가 끝나고 파견하실 때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의 고백의 믿음으로 영육의 온전한 치유와 구원을 받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하나였습니다. 육신의 치유에 찬양과 감사의 믿음이 고백이 따라야 영육의 전인적 치유와 구원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여 끊임없이 찬양과 감사의 공동시편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다음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와 나아만의 헤어지기 전의 장면도 참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이 엘리사와 나아만입니다.
-나아만;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이 종이 드리는 선물을 부디 받아 주십시오.”
참 겸손한 고백의 사람 엘리사입니다. 진정성 가득 담긴 선물입니다만, 엘리사의 반응이 우리를 참으로 부끄럽게 합니다.
엘리사; “내가 모시는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결코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거듭 나아만은 간청합니다만 끝내 거절하는 엘리사의 청렴결백함이 지도자의 귀감입니다. 이어지는 나아만의 소망은 얼마나 소박하고 진실한지, 이 또한 감동입니다.
나아만; “그러시다면, 나귀 두 마리에 실을 만큼의 흙을 이 종에게 주십시오. 이 종은 이제부터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제물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흙은 선물로 받아가겠다는 나아만의 진정성에 분명 엘리사도 감동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멋있는 사람이 복음의 치유받은 사마리아 한 사람이요, 독서의 치유받은 시리아 사람 나아만입니다. 모두가 이스라엘인이 아닌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겐 화두입니다.-
육신의 나병도 무섭지만 영혼의 나병 역시 무섭습니다. 무지, 나태, 탐욕, 교만, 무의욕, 무기력, 무감각 등이 영혼의 나병입니다. 이런 영혼의 나병으로 인해 일상의 늪에서,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영적 나병환자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을 찾아야 만나고, 주님을 만나야 이런 영적 나병도 치유받고 살아납니다. 온전한 영육의 치유와 구원에 하느님 찬양과 감사의 고백은 필수입니다. 바로 연중 제28주일에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을 만나 찬양과 감사로 당신께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 모두의 영육의 상처와 질병을 말끔히 치유해 주십니다.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시편34,11).
아멘.
♣ 예수님 안에서 찾아가는 하느님의 자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늘 복음은 신앙의 시험을 받고 있는 사마리아인들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심을 보여주고 그분께 영광을 드린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 혹은 사마리아인을 가리지 않고 나병환자 열 사람 모두를 고쳐 주셨습니다(17,14). 그런데 치유된 후 한 사람은 예수님께 돌아가고 나머지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여기에 행복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습니다.
나병 환자는 ‘살아있는 송장’으로 취급되고 율법에 따라 공동체로부터 소외당함으로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는 구체적인 말씀 대신에 율법에서 정한 대로 성전에 머무는 사제에게 보내십니다(17,14). 그렇게 하신 것은 신앙의 시험에 순종함으로써 치유를 받고, 희생제물과 사제의 선언을 통하여 공동체에 합류하고 하느님과의 단절을 회복하도록 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치유 받은 열 사람 가운데 사마리아인 한 명만이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립니다(17,17,15-16). 그 사람만 '예수님에 의해'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느님과의 친교가 이루어졌음을 이해한 것이지요.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다스림, 곧 인간을 치유하고 해방시키며 살리시는 하느님이 현존함을 알아보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아마 다른 나병환자 아홉도 성전에 가서, 지긋지긋한 병에서 해방시켜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영광을 드렸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그 정도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17,17)라는 비난 섞인 질문을 받았을까요?
사마리아인과 달리 그들은 예수님과의 만남과 하느님과의 만남을 별개의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치유가 주어지고 친교가 가능해졌으나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무시한 것이고, 예수님을 통해 전해지는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지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선물을 거저 받으면서도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고, 예수님과의 일치와 하느님과의 친교에 이르지 못했으며 하느님 나라의 제자공동체에도 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라’(17,14)고 하신 것은 성전 건물로 가라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삶으로, 하느님의 평화와 친교 안으로, 구속에서 해방으로 떠나라는 것임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이신 하느님, 예수님께서는 사소한 일상사에도 함께하시고, 우리가 찾기도 전에 찾아주시고 가까이 다가오시며, 원하기도 전에 함께해주십니다. 비참하고 고통스런 삶의 한복판에서도 늘 함께하시며 일으켜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감사는 그렇게 일상사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보는데서 시작되지요!
사실 행복은 가까이 있지만 세례를 받았기에 수도자나 성직자이기에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자비와 손길을 발견해가는 길이라 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돌아와 감사드린 사마리아인처럼 그분의 말씀과 행적 안에 녹아있는 하느님의 자비를 배우고 살아내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어떤 고난 중에도 우리를 위해 수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감사드릴 때 참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것을 소유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손길에 감사함으로써 행복한 우리였으면 합니다.
굳이 받지 않아도 될 고통 피해가는 법
-전삼용 요셉 신부님-
‘더 임파서블’이란 영화는 사상자 30만 명을 기록한 인류 최대의 쓰나미 속에서 살아남은 한 가족의 실화를 그린 영화입니다. 이 가족은 휴가차 태국에 머물게 됩니다. 사춘기의 아이는 뭐가 불만인지 모르지만 부모에게 짜증만 냅니다. 그냥 보통 가족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쓰나미 속에서 서로 죽은 줄 알고 서로를 찾아다니다가 결국 온 가족이 다시 만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다치기도 했고 물에 대한 트라우마도 생겼지만 이젠 이전과는 다른 가족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가족이 된 것입니다.
재난영화를 보고나면 항상 현실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던 모습이 얼마나 감사한 삶이었는가를 느끼게 됩니다. 차를 몰고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짜증아 날라치면 하정우 주연의 ‘터널’을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렇게라도 천천히 움직일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인간은 왜 이렇게 지금의 것들을 빼앗겨보아야만 지금 누리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 것이었는가를 느끼게 되는 것일까요?
전에 이스라엘에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좀처럼 그 느낌이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가 훨씬 비옥하고 살기 좋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저 노력하면 간신히 먹고 살 수 있는 광야와 다를 바 없는 땅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감사했습니다. 그들이 먹을 것, 마실 것 없이 사십 년 동안 광야를 떠돌던 때를 생각한다면 가나안 땅은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들 입장에서 본다면 주님은 엄청난 옥토를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집을 약속하셨습니다. 큰 집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각자 집을 짓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 누가 지붕도 없는 길거리에 살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런 약속이 그리 크게 기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감사했습니다. 간신히 광야에서 천막을 얼기설기 지어서 이슬만 피하며 산 것이 사십 년이었습니다. 튼튼한 집을 짓고 그 안에서 맹수의 공격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잘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 얼마나 기쁜 약속이었는지 모릅니다.
또 마지막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약속하신 것은 이제 그들의 손으로 농사를 지어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들이라면 그 농사를 지어 먹고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는 크게 감사할 일이 아니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만나만 먹고 살았던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농사지어 거둔 곡식으로 배를 채울 수 있다는 것은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이 소출을 낼 때 그 소출을 바로 먹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먼저 주님께 감사의 제물로 바치고 먹도록 명하셨습니다. 이 모든 은혜가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잊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도 바로 그런 의미로 남겨놓으라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감사의 제물을 바치지 않는 것이 선악과를 따먹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으로 들어가서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너희 수확의 맏물인 곡식 단을 사제에게 가져와야 한다. ... 너희가 이렇게 너희 하느님에게 예물을 가져오기 전에는 빵도 볶은 곡식도 풋이삭도 먹지 못한다. 이는 너희가 사는 곳 어디에서나 대대로 지켜야 하는 영원한 규칙이다.”(레위 23,9.14)
그리고 첫 소출을 주님께 봉헌하는 감사제를 “영원한 규칙”으로 세우심으로써 그들이 누리는 모든 것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감사의 크기와 관계의 깊이는 비례합니다.’ 감사하는 것만큼 사랑하는 것이고 친밀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당신께 감사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감사하기에 이미 당신 아드님을 십자가의 제물로 우리에게 바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들의 감사가 오래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해 두 해가 지나면서 점차 자신들이 누리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다른 민족들이 더 자신들보다 큰 부를 누리는 것을 보고는 하느님을 원망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소출을 바치는 것이 적어지고 그렇게 성전은 가난해졌습니다. 성전의 사제와 레위지파 사람들도 이젠 스스로의 배를 채우기 위해 농사를 지으러 나가 성전의 감사의 제사가 사라지고 변질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주님께서는 바빌론을 보내시어 감사가 사라져버린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어버렸습니다. 그들을 다시 이전의 나그네 생활로 되돌리시어 지금까지 그들이 누리던 모든 것들이 얼마나 감사해야 할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고통 속에서 이전의 생활을 그리워하였고 돌아와서는 다시 충실하게 제물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이내 사라지고 또 주님은 그들을 이방인들 손에 맡기셨습니다. 이렇게 역사는 반복되었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참조: 유기성 목사 유투브 설교 ‘감사는 구원받을 자가 누릴 복입니다’ 중]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십니다. 나병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보다 훨씬 더 큰 병에 걸렸었습니다. 바로 지옥에 갈 영혼의 나병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은총으로 이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새 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세례 받을 때의 그 감동은 잊을 수가 없고 생명까지도 바치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교무금도 너무 많이 내는 것 같고 헌금을 봉헌하면서도 아까운 마음이 듭니다.
예수님은 이때 어떠한 마음이 들까요? 당신은 생명을 주시고 계신데 당신이 주신 돈의 아주 일부를 바치면서도 아까워하는 사람들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실까요? 다시 이전의 고통의 상태로 돌려보내어 지금의 이 구원받은 삶이 참으로 감사해야 할 삶임을 깨우쳐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다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 고통이 감사를 다시 되찾게 하기 위한 것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90%나 되는 것입니다. 왜 자신들을 그런 병에 걸리게 했었느냐고 원망까지 합니다. 또는 이젠 그동안 아파서 못 누렸던 것을 더 누리기 위한 생각만 갖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잃어버렸던 감사를 찾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고통을 굳이 받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고통이 없더라도 당연히 바쳐야 하는 감사를 바쳐드리는 것입니다. 자기 전에 하루를 돌아보며 감사 일기를 쓰는 것도 좋고 끝기도를 바치면서 속으로라도 감사한 일들을 돌아보며 찬미를 드려도 됩니다. 물론 더 완전하게 만들고 싶은 이들에게는 고통을 주시며 단련을 계속 하시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매일 어떤 상황이든지 감사할 줄 아는 이에게는 굳이 고통을 더 주실 필요를 느끼지 못하십니다. 주님도 우리가 고통 받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가르치시기 위한 수단이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큰 고통을 피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구원받은 첫 날 느꼈던 그 감사를 매일 똑같이 느끼려는 노력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를 느끼기 위해 조금씩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도 좋습니다. 단식이나 양팔기도 등을 하면서 그런 고통에서 구원해 주신 주님을 더욱 찬미할 수 있습니다. 불만족으로 잃어버린 에덴동산의 행복을 다시 회복시키는 방법은 감사를 되찾는 길 뿐입니다. 오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으십니까? 그러면 내일도 감사한 일만 일어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감사는 신앙의 척도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지난 한 주간 동안 행복하게 잘 지내셨나요?
남쪽 지방에서는 태풍 때문에 피해가 많은 모양인데 형제 자매님은 태풍으로 피해를 본 것은 없으시죠?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들을 사랑하면서 많은 행복을 누리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형제 자매님,
오늘 전례 말씀들은 감사에 초점이 맞춰져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오만했던 시리아 장수 나아만은 엘리사의 지시대로 했을 때 자신의 나병이 깨끗이 나은 것을 알고 바로 엘리사를 찾아가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열 사람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보다 치유된 열 사람이 취한 서로 다른 행동에 이야기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나병은 사람을 참으로 비참하게 만드는 병입니다.
눈썹이 빠지고, 손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오뚝하던 코뼈가 내려앉고 나균이 그 뼈마저 갈아먹어 나중에는 콧구멍만 남고, 맑고 투명하던 눈동자도 썩어 들어가 마침내 시력마저도 잃고 맙니다.
그렇게 서서히 죽어가면서도 사람들에게 위로나 동정은커녕 공동체로부터 추방되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나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병환자는 천벌을 받아 하늘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은 자들이라고 생각하여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나병환자들이 예수라는 사람이 어떤 병이든 다 고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문으로만 들었던 예수님이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가까이 가지를 못하고 멀찍이 서서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스승님으로 부르는 것을 보아서 그들은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기대로 예수님의 동정심에 호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나병이 낫고 난 다음에 할 행동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른 곳에는 전혀 기대를 걸 수가 없었기에 그 말씀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몸은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단 한 명만 예수님께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꿈에도 그리던 가족들에게 돌아가는 것만 생각했나 봅니다.
왜 이렇게 전혀 다른 행동이 나왔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감사를 드린 한 사람은 낫게 된 과정 곧, 원인을 생각했고 다른 아홉 사람은 결과만 생각한 차이라고 봅니다.
그 한사람은 어떻게 내가 나았나를 생각하면서 그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 돌아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그가 예수께 드린 감사는 바로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아와 감사를 드린 그 사람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감사로부터 시작되고 구원의 결실을 맺게 합니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들이 나았다는 결과만을 생각했기에 그 결과를 가족들에게 빨리 알리는 것이 급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신통한 의사에 불과했습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도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는 하느님께 감사드릴 일을 많이 체험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쁜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찾아봐도 하느님께 감사드릴 일이 잘 없죠?
그래서 얘기를 하나 들려드릴 게요.
동업을 하는 두 친구가 장사를 위해서 함께 여행을 했는데 한 사람은 신자이고 한 사람은 무신론자였습니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신자가 “하느님은 좋은 분이시네. 그러니 항상 감사를 드려야 하네.”하고 말하자 친구는“이 여행이 끝나고 보자.”하고 대답했습니다.
물건을 다 팔고 나귀에 돈을 싣고 돌아오다가 한 마을에서 잠자리를 구했으나 빈방이 없어서 동네에서 좀 떨어진 큰 느티나무 아래에서 잠을 자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신자는 “이런 잠자리라도 주시니 하느님은 얼마나 좋으신 분인가?” 하고 말했지만 친구는 “따뜻한 방 하나 못 얻어주는 하느님이 좋기도 하겠네!” 하고 코웃음을 쳤습니다.
새벽에 깨워줄 닭 한 마리를 옆에 두고, 신자는 촛불을 켜놓고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서 촛불이 꺼지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피곤한 것을 아시고 일찍 자라고 불까지 꺼주시니 얼마나 좋으신 분인가?” 하고 잠을 청했습니다.
그 친구는 “바람이 껐지 하느님이 껐나?” 하면서 비웃었습니다.
잠결에 닭의 비명을 듣고 깨어보니 살쾡이가 닭을 물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래도 자네 하느님이 좋은 분인가?”하고 친구가 비아냥거렸고 신자는 “그래도 나귀가 있잖아.” 하면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둘은 겁이 나서 돈만 들고 나무 위로 올라가서 잤습니다.
조금 있으니 사자가 나귀를 물어갔습니다.
“자네 하느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이군!”하면서 친구는 더욱 비웃었고 신자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으러 어제 지나왔던 마을로 갔습니다.
그런데 마을이 텅 비어있었습니다.
간밤에 마적들이 마을을 몽땅 틀고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렸던 것입니다.
신자는 “여보게 만일 우리가 이 동네에서 잤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불이 계속 켜져 있었다면, 닭이나 당나귀가 울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겠나?”
“우리가 나무 위에서 자게 하신 하느님은 얼마나 좋으신 분인가?”하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물론 그 친구도 하느님을 믿게 되었답니다.
형제 자매님,
어쩌면 우리는 믿지 않는 친구와 같은 시선으로 우리 삶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하느님께 감사드릴 일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만 바꾸면 많이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감사할 일을 계속 찾을 수 있다면 참으로 성숙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를 느낄 때 우리의 신앙은 자라고,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 더 풍성한 은총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베르나르도 성인은 “감사는 또 다른 은총을 부르는 도구다.”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삶은 성숙한 신앙인의 표지이고, 감사는 병든 우리 영혼을 고쳐줄 영약입니다.
형제 자매님,
새롭게 맞이하는 한 주간 동안 우리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5장 18절에서 신자들에게 당부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갑시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서울 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오늘 복음은 루가 17,11-19에만 나오는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친 치유이적 사화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나병환자 열 사람이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예수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제관들에게 당신들의 몸을 보이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병의 치유 여부는 제관들이 확인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제관들에게 보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는 유다인 혹은 사마리아인을 가리지 않고 열 사람 모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다인 아홉 명은 그대로 떠나가고 오직 사마리아 한 사람만 되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홉은 어디 있습니까?” 하시면서 사마리아인에게 “일어나 가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2. 우리의 이해
나병이 나은 열 사람 중 유다인 아홉 명은 떠나가고 오직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이 예수께 돌아와서 감사드렸다는 오늘 복음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성서는 이를 실제로 있었던 사건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도 크게 실망하여 사마리아인에게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홉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팔레스타인 중부 사마리아 지방에 살던 혼혈족으로서 오직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짐산에서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입니다. 유다인들은 이런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유다인들로부터 멸시와 죄인 취급을 받았던 사마리아인을 참된 신앙인의 귀감으로 말씀합니다. 예수는 예수 일행을 맞아들이지 않고 냉대하는 사마리아인들에게 관용을 베풀기도 하고(루가 9,51-56),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루가 10,29-37)를 통하여 참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 주기도 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예수로부터 은총을 받고 살지만 사마리아인처럼 진실로 감사의 생활을 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감사할 일이건 아니건 무조건 감사하는 생활이 바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감사생활이요, 신앙의 세계에서만 가질 수 있는 감사생활이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로께서도 1데살 5,18에서 “모든 일에 감사하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일’에는 좋은 일·나쁜 일, 기쁜 일·슬픈 일이 다 포함된다 하겠습니다. 나병을 치유 받은 많은 이들 가운데서 오직 이방인인 나아만과 사마리아인만이 감사했다는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매우 의미심장한 가르침입니다. 나는 과연 유다인 아홉 명에 속합니까? 아니면 사마리아인 한 사람에 속합니까?
"간단하다네. 그저 '주님, 감사합니다' 하면 되는 거지."
-이의철 신부님-
어떤 사람이 죽어 하늘나라에 막 도착하여 베드로 사도의 안내를 받았습니다. 그 곳에는 천사들이 세 부서로 나누어진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부서는 접수처로서 지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보내온 하느님께 대한 청원을 분류하는 곳이었습니다. 두 번째 부서는 포장 및 발송처로서 사람들에게 보내 줄 은총과 축복이 포장되어 청원 당사자들에게 발송되는 곳이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보기에 이 두 부서의 천사들은 방대한 업무로 무척이나 분주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부서와는 다르게 사무실 가장 구석의 세 번째 부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청원한 축복을 하느님께로부터 받고 나서 확인서를 보내는 확인처였는데 사람들이 축복에 대한 감사를 하지 않아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한 명의 천사가 앉아 할 일 없이 졸고 있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독서와 복음을 통해 당신의 무한하신 자비와 지극한 사랑의 선물에 대한 진실한 믿음의 행위가 무엇인지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복음에서 나병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이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들 열 사람은 똑같이 주님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귀중한 선물에 대한 그들의 마음은 너무나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어찌 보면 사마리아 사람이 보여 준 태도는 성숙한 믿음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주님께 대한 온전한 희망을 바탕으로 생겨나고(13절),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성장하며(14절), 감사의 행위를 통하여(15절) 삶 안에 그리고 예수님 안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우리 모든 신앙인들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 환자들처럼 늘 치유의 선물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감사하지 못하는 아홉 명의 유대인의 모습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처럼 완전한 의미에서의 구원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지는 그 어느 것 하나에도 감사 드리는 태도와 겸손한 자세를 지녀야 하겠습니다.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은 나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귀중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박재우 신부님-
군인 시절 대민지원으로 시골에 모내기를 도와주러 나갔습니다. 아침 일찍 나가보면 할아버지는 뒷짐을 진채 논두렁을 어슬렁거렸는데 처음에는 할아버지가 논의 모가 잘 자라는지 확인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할아버지는 작대기로 논도랑 물길을 조정해 모든 논으로 골고루 물이 흘러들어 가게 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논두렁을 살피는 농사꾼 할아버지의 물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가를 보여주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해 동안 수고한 오곡백과가 결실을 맺는 가을입니다.만약 논을 사랑하는 농부의 마음과 수고가 없었다면 이 아름다운 가을의 향연이 이루어졌을까요?
모든 일에는 과정이 있는 법입니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 결과를 위해 노력하고 힘을 내는 과정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결과가 더 중요한 세상이 되어 버린 듯 싶습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가르침 속에 ‘과정’이라는 단계는 ‘결과’에 대한 소중함만 강요당한 채 무시당할 때가 많으며, 어른들도 결과에만 맹목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갈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나병 환자라는 이유로 사람들과 함께할 수 없었던 그들은 어떻게든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들을 본 예수님은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말씀하시고, 나병 환자들은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 몸이 깨끗해집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이상한 점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수많은 기적처럼 당장 그들을 치유하지 않으시고,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 몸을 깨끗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과정의 소중함’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지 않은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자신이 치유된 순간에 주님이 옆에 없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찾아가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오직 자신의 치유가 예수님으로 시작되었고, 그 과정도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던 사마리아인 나병 환자만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과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축복에도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런 감사의 모습이 우리 신앙 안에 믿음이 되어 나를 살리는 주님의 기적이 되는 것입니다.
삶의 과정 속에 항상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심을 기억 하시길 바랍니다. 오직 그 결과만은 주님만이 아시기에 항상사랑하고 희생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연중 제28주일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김태훈 수사님
시작기도
주님, 제 눈을 열어주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고통받는 이들을 감싸고 자비를 베푸시는 따뜻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 치유를 간청한 나병환자 열 사람은 시편에서 자주 읊어지는 탄원의 기도처럼 자비를 베풀어 주십사고 청했고 예수님은 바로 이 탄원에 응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문 시작에 나온 루카 복음사가의 언급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루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은 루카의 신학적 구도 안에서 예수님 운명이 결정되는 여행, 곧 인간 구원이 결정적으로 이뤄지고 당신 사명이 그 절정을 맞는 고통과 영광을 향한 여행(루카 9,31.51.53)을 일컫습니다. 바로 이 여행 중에 오늘의 치유 사건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치유 사건을 예수님 자비의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자비가 온전히 드러나는 때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이며 오늘 사건은 그것의 선취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러 온 그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해야 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부정한 사람들이어서 격리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그들을 만난 곳은 마을 바깥이었습니다.(12절)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제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아마 그들은 1독서의 나아만처럼 바로 그 자리에서 특별한 행위를 통해 고쳐주실 것을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아만도 이들도 자신의 기대보다도 하느님 사람의 말씀에 순명하는 모험을 감행합니다. 비록 손에 잡히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실망하지 않고 떠납니다. 그러고 나서 이내 그들은 몸이 깨끗해진 자신을 보고서 기쁨에 넘칩니다. 오직 말씀으로, 그분의 능력 있는 말씀의 힘으로 그들은 치유의 은사를 받습니다. 물론 치유에 대한 그들의 믿음도 한몫을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제들에게 가서 보이라는 예수님의 요구는 나병으로부터 깨끗해져서 다시 사회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절차라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예수님의 명령은 애초에 그들이 이미 나았다고 여기시는 그분의 믿음을 보게 합니다. 우리는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라는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라고 나중에 하신 말씀은 치유에 대한 확신과 보지 않고도 믿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그들이 믿기 전에 먼저 예수님 당신 스스로 믿음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이제 치유받은 사람들 중 한 사람만이 큰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발 앞에 엎드리는 자세는 하느님께 드리는 경배 행위인데, 그가 예수님께 보이는 태도는 그의 체험이 하느님을 만난 체험임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언급처럼 이방인 곧, 하느님 백성에 속하지 않고 하느님을 알지도 못하는 그 사람이 이제 하느님을 만난 것입니다. 1독서의 나아만도 치유의 은사를 넘어 참된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하느님의 사람인 엘리사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두 사람 모두 곤경 중에 있는 자신에게만 갇혀 있던 시선이 하느님께로 열렸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느님께 돌아왔습니다. 육체적 치유의 여정이 내면까지 회개하는 과정으로 뛰어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회심한 사람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나병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고통에서 열 사람 모두 해방되었지만 오직 이 한 사람만이 구원받은 사람으로 파견받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이 특별한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비록 치유를 위한 믿음은 가졌지만 그들의 믿음은 구원 자체 곧 하느님을 보고 체험하는 데에 이르지 못한 이기적인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묵상(Meditatio)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으면서 너희를 참아주어야 한다는 말이냐?”(루카 9,41) 하며 믿음의 부족을 탄식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 또다시 만납니다. 오직 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찾아 돌아온 것에 대해 예수님은 가슴 깊이 고통을 느끼고 계십니다. 우리가 청하는 숱한 은혜 곧, 물질적 필요, 건강, 영적 은혜, 이 모든 것보다 그것을 주신 분을 알아뵙고 그분과 더 깊은 친교를 누리기를 그분은 원하십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천국은 하느님과 함께 사는 곳이고 그 천국은 지금 여기서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그분이 없다면 그곳은 천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Oratio)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2티모 2,8)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대학교 재학 중에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 외무고시, 행정고시에 모두 합격했으며, 서울 법대를 수석 졸업한 뒤에 변호사, 방송인, 투자전문가, 정치인, 명강사 등으로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전 국회의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사실 저는 외모 콤플렉스가 정말 심했습니다. 미팅을 나가면 머리는 크고, 키는 작고, 얼굴은 볼품없다고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무시 안 당하려고 공부했습니다. ‘고시에 합격하면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실제로 고시에 합격하니 생각보다 훨씬 더 환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교를 졸업 한 뒤에 부모님께 큰 절을 올렸습니다. 똑똑한 머리를 물려줘서가 아니라, 변변찮은 외모 덕에 그저 고시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에 감사하다는 의미로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등학교 때의 같은 반 친구가 생각납니다. 정말로 연예인과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요. 그래서 이 친구 근처에는 여자 친구가 줄을 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많았던 인기는 다 사라지고, 상당히 어렵게 살고 있다는 소문만 듣습니다.
외적인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앞선 이야기에 등장하는 정치인처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비난 덕분에 성공한 사람도 있지요. 즉, 오히려 비난도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항상 외적인 화려함만이 중요한 것처럼 착각 속에 빠집니다. 그러나 자그마한 것, 그리고 감사할 이유가 없을 곳 같은 곳에서도 감사할 이유를 찾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성공이 발견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는 나병환자 10명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병이 나았다고 감사의 인사를 드린 사람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요? 10명 모두 당연히 감사를 드려야 할 것 같지만, 단 1명만이 그것도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 사람만이 찾아와 감사를 드리지요.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자기 병의 치유뿐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은총까지 덤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병의 치유만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더 큰 구원의 은총까지 덤으로 얻겠습니까?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매순간 감사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장 안 좋은 상황에서도 감사할 이유를 찾는 노력들이 나를 행복의 길로 이끌어 줍니다.
매일 감사한 일을 5가지씩 찾아 기록해 보세요. 감사하면 감사할수록 감사한 일이 저절로 생기는 게 참 신기합니다.
감사할 이유 찾기
카네기 철강사(현 US스틸)를 세워서 강철왕이라고도 불리던 카네기가 강연할 때의 일입니다. 그가 강연을 하고 있는데, 한 여성이 벌떡 일어나 자신을 향해 거친 욕설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고 그 욕설을 다 받아들이는 것이었지요. 강연이 모두 끝난 뒤에, 한 기자가 너무나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험한 말을 듣고도 끝까지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오히려 웃을 수 있으신지요?”
그러자 카네기가 말했습니다.
“사실 나는 그 여자가 내 아내가 아니란 사실이 매우 고맙고 감사했다네.”
어떻게든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 감사할 이유를 찾으면 화낼 일도 짜증낼 일도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감사할 이유보다는 화내고 짜증내는 이유부터 찾는 것이 아닐까요?
감사할 일을 찾아보세요. 세상이 달라집니다.
희망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루카17,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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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성격을 여러 가지로 묘사할 수 있지만, 그 중에 흔히 쓰는 하나의 방법은 그 사람이 ‘밝은 사람인가 아니면 어두운 사람인가? 혹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인가 아니면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인가?’ 하는 구별법일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분명한 것은 둘 중 하나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똑 같은 사물을 보고도, 똑 같은 상황에 처해 있어도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갈린다.
분명한 것은 밝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 행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긍정적인 사람에게 전제되는 것은 희망이다.
희망이 없는데 긍정적일 될 수 없음은 당연한 이치이다.
밝고 긍정적인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더불어 자신 역시 희망적이 된다.
오늘 열 사람의 나환자들이 예수님께 치유를 받는다.
하지만 돌아와서 감사의 정을 표현한 이는 이방인이었던 사마리아인 한 사람뿐이었다.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을까?
하늘의 저주를 받았다는 온갖 괄시와 천대 속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의 날들을 보내어야만 했을 삶이었을까?
하지만 극단적인 아픔 속에서도 반응은 둘로 갈렸다.
야훼 신앙이라는 종교적 배경하에 살아왔던 이스라엘 사람 아홉은 치유를 받았음에도 감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방인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천한 사람으로 여겨졌던 사마리아 사람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러 이미 지나친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다.
우리의 신앙적 삶을 뒤돌아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감사하고 있는가?
그리스도교를 희망의 종교라 일컫는다.
이는 어떤 처지에서도 변할 수 없는 절대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희망적인 사람이 긍정적일 수밖에 없음은 긍정적인 사람이 희망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과 상통한다.
매사에 긍정적이었으면 한다. 밝았으면 한다. 적극적이었으면 한다.
감사하는 마음은 이러한 마음의 밭이 준비되었을 때 저절로 열리는 하나의 열매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데 행복한 마음이 생길 리가 없다.
신앙의 시작과 끝은 감사라는 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마음을 지녀야 한다.
긍정, 감사, 희망, 이 단어는 하나의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같은 내용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희망은 옳은 것에 대한 희망이어야 한다.
그 식별은 기도를 통해서 가능하다.
하늘을 보고 감사하고 땅을 보고 감사하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95세 되신 전직 대통령께서 위중하다는 소식에 전 국민과 그리고 전 세계가 안타까워하면서 그의 쾌유를 비는 모습에 정말이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병실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켜들고 릴레이 기도를 했습니다. 눈물어린 감사의 편지가 줄을 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현존해계신 여러 ‘전직 대통령’들과 너무 비교가 되어 조금은 서글프기도 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오랜 숙원이었던 흑백갈등을 해소한 넬슨 만델라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세기 위대한 영혼으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있었다면, 이 시대에는 남아프리카의 넬슨 만델라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은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위대하고 고결한 영혼의 숨결이 좀 더 지속되기를...
넬슨 만델라, 한 인간이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지, 한 인간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사람입니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였는지는 리처드 스텐절이라는 한 기자의 증언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타임지의 편집장으로 재직하던 그는 넬슨 만델라에 매료된 나머지 3년간 넬슨 만델라와 동고동락하면서 그의 자서전 집필에 참여합니다. 3년간의 기간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지요.
“만델라를 만나면서 제 자신이 좀 더 커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를 떠나오자 제 삶에서 태양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는 정녕 태양 같은 존재, 큰 산 같은 존재였습니다. 얼마나 관대하고 넉넉한 인품의 소유자였는지 모릅니다.
그가 남긴 어록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역사에 길이 남을 내용들이었습니다. 출옥 후 대통령에 당선된 그가 백인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들끓는 흑인들을 향해 던진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용서하되 잊지 말자(Forgive without Forgetting).”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가 첫 번째로 시도한 작업이 있습니다. 복수와 응징이 아니었습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진실을 고백하라. 그러면 용서하겠다.” 이것이 만델라가 풀어낸 ‘사랑과 정의의 방정식’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고 참회하는 백인들에게 대사면을 선포한 것입니다.
유엔은 넬슨 만델라의 생일인 7월 18일을 ‘만델라의 날’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만델라가 67년 동안 사회에 공헌한 점을 기려 국제사회가 이날 하루만큼은 67분 동안 개인 시간을 할애해 지역사회나 불우 이웃, 장애인을 돕는 등의 봉사활동을 하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바다처럼 관대하고 산처럼 든든한 넬슨 만델라, 항상 여유 있는 미소를 잃지 않은 만델라였지만 젊은 시절 그의 생애는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백인 정부는 될성부른 떡잎이었던 젊은 만델라를 어떻게 알아보고 그를 일찌감치 투옥시킵니다. 그리고 28년 동안이나 가둬놓았습니다. 군대생활 2년, 혹은 3년 얼마나 길었습니까? 10년 징역 살고 밖으로 나오면 거의 폐인처럼 됩니다.
무엇보다도 아무런 죄도 없이 똑똑한 인재라는 이유로, 흑인이라는 이유로 투옥되었습니다. 투옥기간 동안 가족들도 모진 박해를 받으며 뿔뿔이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 와중에 사랑하는 아버지를 비롯해 여러 식구들이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드디어 그 역사적인 날, 1990년 2월 11일 넬슨 만델라는 자유의 몸이 됩니다. 1962년 평화시위를 주도한 죄목으로 수감되었다가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해오던 중 28년 만에 출옥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일제히 넬슨 만델라의 얼굴에 쏠렸습니다. 그리고 많이들 궁금해 했습니다. 장장 28년 동안이나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났으니 분노와 화로 암에라도 걸리지 않았을까? 혹시라도 폐인처럼 되지 않았을까? 휠체어나 구급차를 타고 출감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 모든 걱정들은 기우였습니다. 그는 아주 밝고 건강한 얼굴로 당당히 교도소 문을 걸어 나왔습니다.
취재기자들이 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5년만 수감생활해도 폐인이 되어서 나오는데 28년 동안이나 그 안에 사셨는데, 어찌 이렇게 건강하십니까?”
환한 머금은 넬슨 만델라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교도소에서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늘을 보고 감사하고,
땅을 보고 감사하고,
물을 마시며 감사하고,
음식을 먹으며 감사하고,
강제노동을 할 때도 감사하고,
늘 감사했기 때문에
건강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제게 있어 교도소는 저주의 장소가 아니라
성장을 위한 소중한 장소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감사입니다. 치유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가운데 한명만 예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하러 달려왔습니다. 우리 인간들 대체로 그런 것 같습니다. 절박할 때는 한없이 졸라대지만 문제가 해소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배은망덕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들의 모습 앞에 많이 서글프고 쓸쓸하셨을 예수님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하느님 앞에 선 한 인간 존재가 취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감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원래 아무 것도 아닌 존재, 티끌이요 먼지 같은 존재들이었던 우리들이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크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셔서 이 땅위에 두 발로 서 있게 하셨습니다. 그분의 지속적인 은총이 아니라면 단 한순간도 스스로 설 수 없는 나약한 우리 인간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분 앞에 취해야 할 태도는 지속적인 감사와 찬미,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
그 오랜 고통 속에서도 늘 감사꺼리를 찾았던 넬슨 만델라였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열심히 감사꺼리를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행복으로의 초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가 어렸을 때 저나 저희 집은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전기도 안 들어왔고, 유치원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그저 개구리잡고 물놀이하며 지냈습니다. 불편한 것도 없었고 있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어떤 아이는 이미 유치원을 나와 글을 쓸 줄 알았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동네는 우리 동네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보는 TV 프로그램을 보아야 행복할 것 같았고, 전깃불이 있으면 더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몇몇의 아이들은 우유를 먹는데 우리는 돈이 없어서 그것을 먹지도 못하는 상황이 오자 삶은 더 비관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함께 개구리 잡던 친구들이 공부에서는 경쟁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중 2때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컬러 TV를 처음 보았을 때의 놀라움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부모님도 좋아하셨습니다. 전기밥솥과 세탁기가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전기밥솥에서 저절로 밥이 되는 것을 온 가족이 둘러보며 환희에 찼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은 아주아주 조금밖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 개인용 컴퓨터라는 것이 처음 나올 때였는데, 그것으로 게임을 하는 얼마 안 되는 부러운 친구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를 수원으로 가니 이 시골에 살던 아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개구리 잡던 소년이 그들을 따라가기는 불가능했습니다. 겨울 잠바가 없어 어머니 잠바만 입고 다녔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과외를 받아 벌써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이미 수학과 영어를 다 배우고 들어온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공부도 나름대로 노력해보았지만 3시간을 통학해야 하는 저로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에 학력고사 보기 두 달 동안은 신경안정제를 먹으면서 버텨야 했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니 더 대단한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쟁쟁한 부모님들을 둔 아이들이 친구가 되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점심 값도 내기 힘든 처지였습니다.
그러면서 가만히 생각해보았습니다. 가만히 보니 앞으로 나아갈수록 내가 살아야 할 세상은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회사에 취직하게 되겠고, 결혼도 하게 될 것입니다. 자녀도 낳아 다른 아이들처럼 키워야하고 ... 결국 이 세상 속에서 ‘만족’이라는 단어를 나의 것으로 삼고 살기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조금 더 넓은 세상에서 조금 더 많이 가지게 되면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저의 경험으로 본다면, 아니 모두가 그럴 것이겠지만, 실제로는 더 편하고 더 발전하고 더 가질 수 있는 세상으로 갈수록 덜 행복해지게 됩니다.
저도 귀가 한 쪽이 잘 들리지 않게 되기 전까지는 귀가 잘 들리는 것에 대한 감사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쪽 귀가 잘 들리지 않고 이명까지 나게 되자 두 귀가 다 그렇지 않은 것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한쪽 귀라도 잘 들리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법정 스님이 ‘무소유’를 쓰게 된 계기가 작은 화분 하나 선물 받아서 그 마음의 평화가 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걱정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못 가져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가져서 불행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지선씨가 화재로 인해 자신의 모든 아름다운 모습을 잃고도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싫다는 이유는 지금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행복을 알기에, 가지게 되면서 더 가지고 싶어지는 부족을 경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마존의 눈물에 나온 부족들은 사냥을 해도 그날 먹을 것만을 잡습니다. 저장하기도 그렇게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삶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살인이나 도둑질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의 물질문명에 물들게 된다면 이제 행복은 깨어지고 범죄가 들끓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에 먹혀버린 불쌍한 부족들도 볼 수 있었습니다. 행복하게 살던 그들이 도시의 빈민촌을 형성하고 집에서 화려한 삶만 나오는 TV를 보지만 실제 삶은 길에서 구걸을 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감사’하러 온 사마리아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감사가 곧 믿음을 통해서만 올 수 있는 것이고, 구원은 감사를 통해서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무엇을 믿어야 감사가 흘러나오는 것일까요?
우리는 아빌라의 데레사의 고백에서 그 해답을 있을 것입니다.
Nada te turbe 아무 것에도 흔들리지 말라
nada te espante 무엇에든 걱정하지 말라
todo se pasa 모든 것은 헛되이 지나가나
Dios no se muda 하느님은 결코 변치 않으시나니
La paciencia 인내함으로
todo lo alcanza 모든 것에 이르라
Quien a Dios tiene 하느님을 지닌 자
nada le falta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Solo Dios basta” 오직 하느님으로 만족하리로다
그렇습니다. 그 믿음이란 바로 “Solo Dios basta”, 즉 하느님만으로 충분할 수 있음을 아는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 돌아오지 않은 9명은 세상으로 나간 이들입니다. 세상에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음에도 말입니다. 감사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하느님을 받아들인 것이고, 나머지는 세상을 받아들였습니다.
지금부터는 왜 같은 것을 얻어도 어떤 사람은 감사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감사하게 되는지 그 원리를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조 때 유한준이라는 문인이 석농 김광국 수장품에 붙였다고 하는데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써서 유명해진 글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온 세상이 변하는 것을 느껴보셨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살맛이 납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는 세상도 어두워지고 살 수 없는 곳이 되고 맙니다. 정말 희한한 일인데, 사람은 무엇을, 혹은 누군가를 받아들이면 그 사람의 영향 때문에, 아니 어쩌면 그 사람이 만들어놓은 세상에서 살게 됩니다. 돈을 받아들인 사람은 세상을 돈으로 보고, 쾌락을 받아들인 사람은 쾌락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인 사람은
또 다른 세상에 살게 됩니다.
우리 첫 조상은 뱀을 바라보았습니다. 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뱀이 만든 세상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뱀은 자아를 상징하고 그 자아는 불만족입니다. 불만족스럽게 만들어 세상을 향해 손을 뻗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불만족은 갈수록 커지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뜻만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에 사셨습니다. 만족하셨기에 세상 어떤 것도, 심지어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게 내어주셨습니다. 봉헌하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 하느님의 세계에 속한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1요한 3,6)
두 세계의 차이점은 여기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한 여인이 일어나 메시아를 잉태하고 낳으신 어머니가 행복하다고 소리 지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의 뜻을 따랐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즉 외적으로 당신을 낳으셨다고 보는 것은 뱀의 세계이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행복한 것은 내적인 하느님의 세계인 것입니다. 행복을 찾되 내적인 세계, 즉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얻게 되는 양심의 자유와 행복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결국 감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뱀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와가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만으로 충분했다면 선악과에 손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담도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당당하게 거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가져야 행복하다고 믿었기에 죄가 들어온 것입니다.
‘하느님만으로 충분함을 믿읍시다.’ 그러면 그 믿음에서 감사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았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 박사의 환자 중에 루시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아주 똑똑한 여성이었는데 갑자가 하반신 마비가 왔습니다. 신경학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형부에 대한 사랑이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언니가 병으로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언니의 시신 곁에 서 있는 형부를 보며 속으로 ‘이제 형부는 자유인이야. 나와 결혼할 수도 있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다리가 감전되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습니다. 이때부터 마비가 시작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시는 자신의 마비와 형부에 대한 사랑의 관계를 몰랐습니다. 프로이트 박사가 루시의 숨겨진 마음 즉, 형부에 대한 사랑과 언니에 대한 죄책감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의식 아래 숨어 있던 감정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루시는 극적으로 치료되었습니다. 프로이트 박사는 이런 환자들을 보면서 인간의 마음에는 자신도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마음의 지하실을 비의식이라 불렀습니다. 모든 병과 마음의 문제들이 여기서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출처: 이무석, 친밀함, 13]
프로이트는 비의식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고 하는데, 저는 비의식에 있는 ‘양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심이란 것이 있어서 하느님 뜻에 맞으면 기쁨을, 그것에 맞지 않으면 고통을 줍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하느님께 벌을 받기 전에 이미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숨고, 가리고, 서로를 탓하였습니다. 이는 그 내면의 양심이 이미 그들을 죄인으로 판결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행복은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가지거나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양심의 법에 어긋나게 살거나, 그렇지 않거나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하느님 뜻에 맞게 살거나 자신의 뜻대로 살거나에 달렸습니다. 당신을 낳으신 어머니가 행복하겠다고 말하는 여인에게, 참 행복의 원천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즉 당신을 낳으셨더라도 그것이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면 절대 성모님도 행복하실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였다는 뜻은 하느님 뜻에 따라, 양심에 어긋나지 않아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셔서 하느님 뜻을 따라 행복하여 마니피캇을 노래하셨던 성모님을 본받아, 세상 것에 가난하고 하느님만으로 충분한 그분 뜻에서만 행복을 찾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습
-김기현 요한 신부님-
예전에 이은결 씨가 하는 마술쇼를 본적이 있습니다. 재미있게 잘 보았는데요. 인상 깊었던 장명이 있었습니다. 뭐였냐면 그가 아프리카에 가서 아이들에게 마술을 보여주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었습니다. 보통 우리에게 마술을 보여주면 그 안에 숨겨진 속임수를 찾으려고 안간힘을 쓰죠. ‘너가 왼손 봐 내가 오른 손 볼게..’ 하면서 ‘마술이 아니라 눈속임이다..’ 하는 것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프리카 아이들은 전혀 달랐습니다. 대단한 마술을 보여준 것도 아니고, 초등학교 때 우리들이 많이 써 먹었던 것들 있잖아요. 예를 들어 엄지손가락 두 개를 붙였다 뗐다.. 하면서 엄지손가락이 떨어졌다.. 하는 거랑, 한손을 움켜쥐고 그 안에 다른 손 손가락이 있는 거처럼 보여줬다가 다른 손을 빼면서 손가락이 그대로 있네.. 하는 그런 단순한 것만 보여줘도, 아프리카 아이들의 눈은 뭔가 대단한 걸 봤다는 듯이 놀라며 신기 해 합니다. 그 눈빛이 너무나도 순수하고 맑았던 거 같은데요. 우리와는 다른 그 눈빛에서 느껴지는 것은 정말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인 거 같습니다.
선교를 나간 신부님들도 그런 눈빛을 보며 발전된 나라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어떤 행복을 느끼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태석 신부님도 수단 톤즈 사람들에게 더 내어주고 싶었던 이유 중에 하나도 그들의 눈에는 감사함이 있어서 그러지 않았을까.. 합니다. 예를 들어 이태석 신부님이 고심해서 만든 나병환자들의 신발과 그것을 받았을 때의 그들의 감사함을 담은 눈빛, 학교를 짓고 음악을 가르쳐 주고 함께 미사를 봉헌할 때 그들이 전에는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을 체험하는 데서 오는 기쁨과 감사함을 담은 눈빛과 모습.. 그러한 것들이 이태석 신부님에게 더 나누어주고 베풀고 싶은 원동력이 되어주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가는 거 같습니다. 지난 번에 사제 평생 교육 때 어떤 분의 강의를 듣는데 공무원들의 자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이런 거가 아닐까.. 추측을 하시더라고요. 복지에 관련된 공무원들이 일하면서 업무에 부담을 많이 느끼는데 업무의 부담보다 더 힘든 것은 사람들에게서 ‘감사하다..’ 는 인사조차 받지 못할 때 일의 보람도 없고 기쁨도 없고 의기소침함으로 일의 무게에 더 짓눌리게 된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라에서 주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왜 더 주지 않느냐.. 이 번에 이게 뭐냐..’ 하면서 불평의 소리를 할 때가 더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서 오는 스트레스와 업무의 부담이 그들을 피로하게 만드는 거겠죠.
저도 보좌 1년차 때 그런 느낌을 청년들에게서 받았던 거 같습니다. 2년차 때는 청년들이 알아서 술값이나 밥값을 걷어서 돈을 거의 안 썼었는데요. 1년차 때는 모이면 제가 내는 경우가 많았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아쉬웠던 것 중에 하나는 처음에 제가 계산을 하면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를 하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리니까 잘 먹었다는 사람도 감사하다는 사람도 없어지기 시작한 거 같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으로 술값이나 밥값을 내려면 그래도 나름 큰 결심을 해야 하는 건데 그걸 알아주지 않으니 조금 서운했던 거 같습니다. 감사하다.. 는 말 한 마디면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아이가 감사한 마음과 그 마음을 어버이날이나 다른 날에 기억해 주고 표현해 줄 때 ‘아이들에게 한 없이 퍼줘도 아깝지 않다..’ 하는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그 동안의 희생이 희생처럼 여겨지지 않는 그런 기쁨과 보람이 있을 텐데요.
그러한 모습을 하느님께서도 보기를 바라시는 거 같습니다. 테살로니카 1서 5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대로 우리가 받은 선물에 대해서 감사하기를 바라십니다. 또 그 모습을 보시고 흐뭇 해 하시리라 생각하는데요.
때로 우리는 받은 게 뭔지도 모를 때가 있는 거 같습니다. 어제 놀러 오신 자매님 중에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잘 사는 동네에 사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훈계할 일이 있어서 이런 말을 했다. ‘너네 부모님이 열심히 벌어서 학비 내 주는데 열심히 해야지...’ 하는데, 그 중에는 자기 부모님이 그 동안 돈을 내 준 사실 조자 모르는 아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 돈을 직접 계좌이체인가... 지로인가.. 하는 걸로 보내다보니 아이는 부모가 돈을 내주고 있는 것 조차 모르고, 알지 못하니 감사도 못하고 있었다는데요.
우리도 그와 같은 모습이 될 수 있는 거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 의지적으로 들여다보고 되돌아보지 않으면, 금새 감사보다는 불평을 늘어놓거나, 은혜를 모르는 교만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가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감사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그것을 베풀어 주신 분께 감사한 마음을 표현해 봅시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 홍승모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시는 주님 자비를 체험합니다. 나병환자를 치유한다는 것은 그 병이 보여주듯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병환자 치유는 불가능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삶에서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넘기에는 매우 어려운 여러 장애에 부딪히곤 합니다. 같은 처지에 있던 10명의 나병환자들은 이런 고통스럽고 불가능해 보이는 장애를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넘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구원을 위해 주님께 매달리면서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직접 부르는 구절은 여기에 처음 등장합니다. 루카복음에는 이후로 두 번 더 예수님 이름이 직접 언급되는데, 예리코에서 소경이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8)라고 하는 호소와 십자가상 우도(右盜)의 기도에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2)라는 청원에서 나옵니다.
사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호소하는 경우는 아주 친밀한 관계를 뜻합니다. 주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분께 희망을 거는 것입니다. 주님께 절대적 신뢰를 갖고 있다는 행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가 최고 의회에서 증언할 때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주님의 이름 자체가 삶의 활력을 가져다주는 힘이며 믿음의 대상인 것입니다.
특히 나병과 같은 악성 피부병은 공동체에 끼칠 수 있는 전염성이나 발병 원인 때문에, 그 병에 걸렸다고 판단된 사람은 격리시켜 일반 주거지역에서 떨어져 살도록 했습니다(민수 5,2). 그래서 나병환자들은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소리 높여 외쳤던 것입니다(루카 17,12).
나병이 지니는 이런 성격 때문에, 주님의 치유는 육신적 치유뿐 아니라 공동체에서 소외시키는 죄의 표지를 허무는 행위입니다. 나아가 정결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을 구별하는 모든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행위입니다. 여기서 구원이란 치유 불가능한 병이 나았다는 사실 뿐 아니라 어떤 부류의 사람이라도 믿음이 있다면, 주님을 통해 그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목이 마를 때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한 잔의 물이지만, 더 근본적 문제는 물이 샘솟는 원천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10명의 나병환자가 치유 받았지만 결국 1명만이 주님께 돌아와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는 비유가 뜻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10명이라는 숫자가 상징하는 의미는 바로 신앙인 전체를 말합니다. 구원이 이미 우리 삶 안에 가까이 와 있지만, 아직도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차동엽 신부가 최근 출간한 「믿음 희망 사랑」이라는 책에 보면,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믿음에 대해 내리신 정의, 곧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느님을(Deum) 믿고, 하느님에게(Deo) 믿고, 하느님께로(in Deum) 믿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믿음 대상이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곧 하느님 존재를 믿고, 하느님 성품과 구원경륜을 믿는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 다음 하느님에게 믿는다는 말은 전적으로 하느님 초대와 인도하심을 전제로 한 표현이다. 즉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가지시고 우리를 믿음으로 초대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께로 향해 믿는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하느님께로 믿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올인(all in)한다는 뜻이다. 곧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탁하고 희망한다는 고백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나병환자의 외침은 주님을 믿고 희망한다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이 외침으로 나병환자는 고통으로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비로소 열게 되고,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고 자신을 경멸하던 고통이 함께 계시는 주님 자비의 손길로 변화되는 순간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2티모 2,9)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혹시 피하고 싶은 이웃들로 인해 자신의 마음을 닫고 그 안에 갇혀있다면, 주님 자비의 말씀이 결실을 맺도록 그 이웃들을 향해 한결같은 자비를 갖도록 기도드립시다.
겸손한 사람만이 감사한다.
-손용환 신부님-
고마운 조연
세상에는 화려한 주연도 있지만 고마운 조연도 있습니다. 그리고 고마운 조연들이 있어 세상은 훈훈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에는 영광의 순간도 있지만 어두운 구석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구석이 있어 삶을 성찰케 합니다.
나아만이라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 환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잡혀온 이스라엘 소녀가 사마리아에 있는 예언자를 소개해줍니다.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에게로 갑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심부름꾼을 시켜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합니다. 나아만은 그가 일러준 대로 몸을 씻었고,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에게로 되돌아가 주님께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2열왕 5,15)
만일 그가 나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잘나가기만 했다면 하느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 환자 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그들이 나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찾았겠습니까? 그들도 나병이라는 삶의 어두운 구석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인해 깨끗이 나을 수 있었습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을 주제로 성화를 그린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 19세기 프랑스 화가인 제임스 티솟(James Tissot, 1836∼1902)의 그림만 이름이 남았을 뿐이고, 나머지는 작자 미상입니다.
제임스 티솟은 1836년에 프랑스 낭트에서 태어나 스물세 살에 화가로서 첫 번째 전시회를 했고, 서른네 살에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런던으로 갔고, 마흔 살에 런던에서 캐서린 뉴턴과 동거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6년 만에 숨졌고, 모든 것을 잃은 뒤에야 그는 심령주의에 빠져 예수님의 생애와 구약성경을 주제로 700여 점의 성화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예순 살에 런던에서 예수님의 생애 350점을 전시했고, 노년에는 예수님의 고향인 예루살렘을 순례했으며, 예순여섯 살에 프랑스 두(Doubs)지방의 비용수도원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만일 그가 전쟁을 겪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지 않았다면 성화를 그렸겠습니까? 전쟁과 사별이라는 어두운 구석이 그를 신앙으로 되돌리게 했습니다.
그가 그린 ‘나병 환자 열 사람’의 그림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어떤 마을에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멀찍이에서 어떤 이는 팔을 들고, 어떤 이는 손을 모아 애원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뒤돌아서서 한 손을 들어 이르셨습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 그들은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예수님께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림에는 나병 환자 열 사람 중에서 무릎 꿇어 하느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한 사람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7-18)
감사는 무릎을 꿇는 사람만이 할 수 있고, 겸손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감사하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며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새로운 은혜를 더 풍성히 가져오게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은 아닙니까?
위대하지는 않지만 고마운 조연들이 있어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성찰하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한 세상입니다. 받은 은혜는 많지 않지만 감사하는 사람이 있어 풍요로운 세상입니다.
감옥의 소외와 하느님의 말씀의 연대
-박동호 신부님-
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나, 그리고 어느 분야에서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흔히 ‘소외계층’이라 부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경제 분야의 소외계층은 이제 언급하는 것도 부질없습니다. 대다수의 사람이 자신의 경제생활을 주도적으로 꾸려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경제시스템이 촘촘한 그물망의 씨줄과 날줄처럼 상호의존의 구조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그물망에 대다수가 갇혀 있을 수밖에 없고, 소수의 특정인이 그들의 이익에 따라 그물을 던졌다 거두어들였다 하는 형국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정치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발적이며 능동적인 ‘참여’입니다. 특히 자신과 사회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책이나 제도와 법을 만들 때 참여할 수 없다면, 그 사회는 전제주의 사회거나 독재사회에 불과합니다.
정보사회에서 정보의 생산과 유통을 다루는 대중매체가 미치는 영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대중매체는 사람들의 참여를 촉진할 수도, 방해할 수도, 그리고 왜곡할 수도 있습니다.
문화는 “인간의 전인적 완성과 온 인류 사회와 공동체의 행복을 지향”(사목헌장 59항)해야 하지만, 현대 사회의 문화는 매매할 수 있는 수많은 상품 가운데 하나쯤으로 간주되고, 그것을 구매할 능력이 없는 수많은 사람은 전인적 완성과 행복은커녕 생존 그 자체를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누군들 소외계층으로 전락하여, 가난하고 힘없이 그리고 초라하게 살고 싶겠습니까? 또 누군들 그 같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드러내놓고 나서겠습니까? 모두가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과 행복을 추구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여전히 ‘소외’의 현상은 남아 있고, 오히려 그 정도와 범위는 심각해지고 있을까요?
오늘 하느님의 말씀에서 그 원인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연대’의 결핍이 바로 그 원인입니다. 1독서에서 시리아의 고관 나아만은 한센 환자였지만, 유다인으로서 하느님의 사람인 엘리사와 연대합니다. 복음에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열 명의 한센 환자와 연대합니다.
열명의 한센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가는 장면을 그려봅니다.
그들 사이 인종에 의한 구별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의 동행은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는 한하운의 시 구절 그대로입니다. 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머물지 않았고, 유다 종교의 테두리에 갇혀 있지도 않았고,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곳곳의 가난하고 힘없고 초라한 이들을 당신 벗으로 삼아 연대하셨습니다. “선택된 이들”이라 할 수있는 교회(하느님 백성)는 그분이 하시던 일을 계속(사목헌장, 3항)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안소근 수녀님-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희 눈을 열어 주시어 하느님의 선물들을 알아볼 수 있게 하소서.
독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루카 17,11) 우리는 루카복음에서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은 곧 “세상을 떠나실 일”입니다.(9,31) 예루살렘은 그 죽음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질 장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가신다는 것은 이미 수난 예고가 시작됨을 의미합니다. 사실 수난 예고는 벌써 두 번 되풀이되었고, 이제 한 번 남았을 뿐입니다.
수난을 향해 가는 이 길목에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 옵니다. 가까이 올 수 없었던 그들은 멀리서 큰 소리로 자비를 청합니다. 소리를 높이는 것만이 그들이 예수님께 가닿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바로 그들을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격리되어 살던 나병 환자가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인다는 것은, 병이 다 나았음을 확인받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도록 마을로 들어가기 위한 절차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아직 자신들의 몸이 깨끗해지지 않은 상태라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바로 사제에게 간 것을 보면, 그들은 병이 곧 나으리라는 분명한 믿음은 가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 열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똑같은 치유를 받습니다. 여기까지는 열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병이 나은 사람들 가운데 아홉은 돌아오지 않았고,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왜 사마리아 사람이 돌아왔을까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의 말이 생각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요한복음에서는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는 설명까지 덧붙입니다.(4,9) 같은 나병 환자라도, 사마리아인에게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귀 기울여 주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이 더 특별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당연히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의 조건이, 그에게 무상으로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의 자비를 알아볼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다른 아홉 사람도 나병에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치유를 베풀어 주신 것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계기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그 기적 안에서 하느님의 선물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치유는 몸이 낫는 데 그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치유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과 사랑을 알아보는 사람, 그래서 그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사람, 그 사람은 ‘구원’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성찰
오늘 복음에서 구원은 하느님의 선물을 알아보는 데, 그리고 그 선물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데 있습니다. 매일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선물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주어지는 것들에 너무 습관이 되어버리지 않는 깨어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든 사람으로부터이든, 처음 어떤 호의나 사랑을 받았을 때는 감동하고 고마워하지만 어느새 익숙해지고 나면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적인 일에서 예를 찾아봅니다. 직장에서 일이 힘들다고 생각되면, 첫 출근하던 날을 떠올려 보십시오. 저는 아직 취직한 지 1년이 되지 않아, 지금도 그날의 기쁨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올 2월 1일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출근’이라는 것을 해본 것입니다. 일을 할 기회와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 얼마나 좋았던지요. 그날, 이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리라, 지금 내가 고맙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무디어지지 않도록 늘 나를 일깨우리라고 다짐했습니다.
하느님의 선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루카복음을 계속 따라간다면,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그분은 구원의 선물로 당신 목숨을 내어 주실 것입니다. 열 사람의 나병 환자에게 모두 치유를 베푸셨듯이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그 선물을 주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천사들도 보기를 갈망하는”(1베드 1,12)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선물에 감사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에 감사하는 사람은 구원을 체험할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듯 누구에게나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만, 오늘 나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선물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아볼 수 있을 때 그날 나는 구원의 열매를 맛볼 것입니다.
기도
주님을 찬송하여라, 선하신 분이시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누가 주님의 위업을 말할 수 있으며 그 모든 찬양을 전할 수 있으리오?(시편 106,1, 2)
은총 선물
-김희준 신부님-
돼지 한 마리가 울타리 주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빨갛게 잘 익은 홍시 하나가 돼지 눈앞에 떨어졌습니다.
돼지는 얼마간 킁킁거리다 조심스럽게 입 안에 넣어 봤습니다.
그러자 꿀맛같이 단맛이 입 안에 퍼졌습니다. 돼지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그 천상의 맛을 다시 먹고 싶어 주둥이로 감이 떨어진 주위를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감이 나올 리 없었지만 돼지는 멈출 수도 없었습니다.
흙 속에 묻혀 있던 깨진 병 조각들이 돼지의 주둥이를 찔러 피가 나고 기진맥진해진 돼지는 마침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에도 돼지는 달디 단 홍시의 맛을 잊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 숨진 돼지 등 위로 빨간 감 하나가 뚝 떨어졌습니다.
감이 나무 위에서 떨어진 줄도 모르고 미련하게 땅만 파헤친 돼지의 모습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미련함을 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허락되었을진대, 정작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하기보다는 생존 경쟁 속에서 상처입고 피를 흘려도 땅의 일에만 집착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은총을 입은 아홉 명의 나환자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분명한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바라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복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해 주어진 선물임을 인정하고 겸손되이 감사드리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느끼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의 복음은 치유 받은 열 사람의 나병환자에 대한 얘깁니다.
그런데 그 중에 이방인 한 사람만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아홉 사람이 하나같이 감사하지 않았을까요?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을까요?
아니면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인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얘기이니 루카복음 사가의 창작품이 아닐까요?
이런 의문이 생길 정도로 유대 나환자들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지만 아무튼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효과적인 도움과 효과적인 사랑 방법이 있습니다.
만나자고 할 때 시간이 남아돌아도 만나주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쩌다 한 번 만나주면 매우 고마워합니다.
그러나 만나자고 할 때마다 바쁘지만 만나줍니다.
그러면 자기가 원하면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하나도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남을 도와줄 때도 어쩌다 한 번, 그것도 아주 곤경에 처했을 때 도와주면 매우 고마워합니다.
그러나 도움을 청할 때마다, 또는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미리 알아서 도와주면 하나도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감사, 고마움은 상대방이 으레 하는 것이고 으레 하는 것이기에 당연한 것이 되면 고마움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도움을 이렇게 으레 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감사하게 하려면 주던 도움을 딱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도움이 끊어질 때야 도움이 기계에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사랑에서,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나 사람의 선의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홉 나환자들처럼 누구에게, 특히 하느님이나 부모에게 감사할 줄 모름은 두 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는 그들의 사랑이 너무 아낌이 없고 조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매일 해를 뜨게 하시기 때문에 감사할 줄 모르고, 어머니가 매일 밥을 해주시기에 그것도 기계처럼 아무 군소리 없이 해주기에 감사할 줄 모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 인간이 너무 못됐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알아주지 않는 그 못됨 때문입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알아주지 않는 것이 가장 못된 것입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알아주지 않는 것은 사랑을 하느님이나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얘기했듯이 기계가 사랑 없이 자동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또는 하느님이나 고귀한 인간이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나 종이 의무로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도우심을 사랑, 은총으로 여기지 않음은 하느님을 기계나 노예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며 감사하며 살 것인가, 기계나 노예의 도움을 받으며 무정하고 무감하게 살 것인가, 우리는 이것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네 눈물이 곧 내 눈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모습가운데 가장 제 마음에 와 닿는 모습은 아무래도 자비하신 모습입니다. 복음서 곳곳은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연민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고통 속에 신음하는 백성들 머리 위로 당신 자비의 팔을 펼치셨습니다.
매일 미사 시작 예식 때 마다 우리는 하느님 자비를 청합니다. ‘하느님 자비’라는 말, 생각만 해도 큰 위로가 됩니다. 자비(慈悲)란 너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네 고통을 내 고통으로 삼겠다는 말입니다. 네 눈물이 곧 내 눈물이란 뜻입니다. 네가 잠 못 이루며 힘들어 할 때 나도 네 옆에서 깨어있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바로 그러하십니다. 하느님을 단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자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멀리서가 아니라 내 가까이서, 내 위에서가 아니라 바로 내 곁에서, 나와 그분이 따로가 아니라 하나가 되어, 한 마음이 되어 아픔과 고통을 함께 겪는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 등장하는 나병환자들은 하느님께서 자비의 하느님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의 아픔이 당신의 아픔, 우리의 상처가 당신의 상처, 우리의 울부짖음이 당신의 울부짖음이었던 예수님께서 그들의 외침을 절대로 외면하실 수 없었습니다.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들이 겪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과 슬픔을 보십니다. 마음 가득히 차오르는 연민의 정에 어찌할 바를 모르십니다. 당신도 모르게 그들에게 자비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토마스 머튼은 자비를 ‘서로가 서로의 일부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 사이의 상호 의존성에 대한 명철한 의식’으로 정의를 내렸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매 순간 살아있고, 매 순간 숨 쉬고 있는 우리입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 역시 또 다른 존재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자비의 실천으로 또 다른 하느님의 얼굴을 그들에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비야말로 가장 ‘하느님스러운’ 것입니다. 자비는 가장 충만한 신적 속성입니다. 자비가 자랄 때 우리 내면에서 신성(神性)도 자라납니다. 자비를 왜곡하거나 죽이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왜곡하거나 죽이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는 축구를 잘 하는 편입니다. 보좌 신부로 부임했더니 그 본당에 어른들 축구팀이 있었습니다. 저도 함께 할 수 있었고 골을 넣는 스트라이커의 역할을 톡톡히 해 내었습니다. 하는 경기마다 거의 승리를 하였고 거기엔 저의 공도 컸습니다.
한 경기에 한, 두 골은 넣을 수 있었는데 어는 순간엔가 골을 넣으면 유명한 축구 선수들처럼 성호를 그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경기에 몰입하다 한 골을 넣으면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성호를 긋는 것을 잊어버리곤 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잘 해서 골을 넣었다.’라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성호를 그었다 말았다 하는 모습이 싫어서 다시 아예 긋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스트라이커로서의 책임의식이 더해갔고 경기마다 골을 넣어 이기려는 마음에 무리하게 되고 거칠어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유학 나오기 전 서울 우승 팀과 경기를 할 때 야심의 슛을 날려 한국에서의 마지막 골을 넣었지만 무릎 인대가 늘어나서 한 6개월가량은 볼을 찰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양반다리도 제대로 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정말 기쁘고 행복한 순간에 하느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결국 감사하지 못하면 교만에 휩싸여 자신이 망하고 만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로부터 치유를 받은 것은 열 명이지만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이방인 한 사람이었고 오직 그 사람만이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말씀은 치유 받은 나머지 아홉은 치유를 받았지만 믿음도 없었고 그래서 구원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적을 체험했다고 자신이 믿음이 있어서 그랬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좋은 체험을 하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때에야 믿음도 증명되고 구원도 완성되는 것입니다.
로마에서 제가 학교에 가려면 바티칸을 지나쳐야하는데 그 곳에는 많은 거지들이 항상 앉아서 구걸을 합니다. 모든 이들을 다 도와줄 수 없어서 저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우선 조금 돈을 주어보고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돈을 더 주도록 해야겠다.’
실제로 구걸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각자 달랐는데 어떤 사람은 단돈 백 원에도 감사하고 기도해 주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장난 하냐는 듯이 쳐다보고 쫓아오며 돈을 더 내어놓으라고 달라붙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작은 돈을 받고도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더 많이 주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지만 돈을 받고 찡그리는 사람에게는 이미 주었던 작은 것마저 다시 빼앗아서 감사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돈도 나의 돈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왕 주는 것이면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가 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더 주고 싶은 마음일 것이고 그래서 결국 가장 귀한 구원의 은총은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았던 그 이방인만이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집이 망하여 거지가 되어도 감사할 수 있을까요? 가족이 갑자기 죽어도 감사할 수 있을까요? 남편이 바람을 펴도 감사할 수 있을까요? 바오로사도는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그것이 좋든 나쁘든, 항상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귀가 잘 들리는 것에 대해 감사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쪽 귀가 잘 안 들리고부터는 다른 한 쪽이 잘 들리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귀가 두 쪽인 것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두 개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니 하나를 가져가신다 한 들 우리가 무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모르는 하느님의 깊은 뜻이 있겠고 우리는 그저 감사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중국 변방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노인이 아끼는 한 말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말이 오랑캐가 사는 나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노인을 위로하려 했지만 노인은 “혹시 아오? 이 일이 복(福)이 될는지?” 정말로 세월이 조금 흘러 그 말은 오랑캐 나라에서 짝을 찾아 준마 할 필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그 노인을 축하해주자 노인은 역시 같은 표정으로 “혹시 아오? 이 일이 화(禍)가 될는지?” 그 노인의 아들은 말 타기를 좋아했는데 역시나 말을 타다 떨어져 절름발이가 되었고 다시는 제대로 걷고 뛸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노인을 위로하였으나 노인은 태연하게 “혹시 아오? 이 일이 복(福)이 될는지?” 1년이 지나 북방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그 마을 젊은이들은 군인으로 징집되어 싸우다 모두 전사하였지만 그 노인의 아들만 불구라는 이유로 그 마을의 유일한 총각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새옹지마(塞翁之馬), 즉 ‘변방 할아버지의 말’이라는 사자성어 이야기입니다.
귀가 안 좋아져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한 분은 자신에게 닥치는 고통이 너무 커서 신앙을 잃었다가 이번엔 수술을 하면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수술을 잘 받고 나서는 다시 신앙을 찾아 돌아갔습니다. 퇴원하기 직전에 기분을 물어보았더니 매우 만족한다고 하였고 역시 한 일에 있어서도 완전히 나쁘거나 완전히 좋은 일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지금 좋은 일 같이 보일지라도 나쁜 일의 시작이 될 수도 있고 지금 나쁜 일이지만 결국 좋은 결말을 위한 시작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선진국들은 돈을 많이 가지게 되면서 신앙을 잃고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좋은 일 같이 보였지만 결국 구원을 잃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치유를 받은 아홉 사람은 그것이 좋은 일 같이 보였으나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결과를 나았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누구를 사랑하게 되고 결혼하게 되어 성당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달콤한 사랑으로 신앙을 버리게 된 것입니다. 신앙을 버리면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도 그들과 멀어지기 때문에 결국 그들의 결혼 생활도 안 좋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훌륭한 신부님이나 수도자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좋은 때건 고통스러운 때건 하느님께 감사해야합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라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나쁜 것을 주실 수가 있으시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받는 모든 것들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고통처럼 보일지라도 다 뜻이 있어서 그런 것까지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잊지 말고 감사해야 할 유일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우리가 받은 가장 큰 것이 무엇일까요? 생명? 그냥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의 무수한 고통으로 우리에게 다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희생으로 영원한 행복을 다시 얻게 되었으니 그것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오늘 사마리아 사람은 육체의 병이 고쳐진 것으로 그리스도를 찾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물며 영혼의 병을 고쳐주신 하느님께 얼마나 큰 감사를 드려야겠습니까?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는 우리를 위해서 자상하게 그리스도께서 감사하는 방법도 남겨놓고 가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미사입니다. 미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며 기억하고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구원의 도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사에 나오지도 않고 나왔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미사를 드리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 귀한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준 것조차 얄미워 빼앗고 싶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미사는 감사입니다. 예수님도 오천 명 앞에서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미사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미사에 나왔더라도 감사와 찬미가 없었다면 미사를 한 것이 아닙니다. 감사의 미사는 은총을 불어나게 하는 가장 귀한 열쇠입니다. 될 수 있으면 매일미사에 참례하며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생활을 하도록 결심합시다.
감사합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작년에 한 달에 한 번 정도 정기적으로 어떤 청년 단체에게 밥이나 술을 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쉬워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뭐냐면 ‘감사하다.’ 는 말 한 마디입니다. 처음에는 신부가 와서 관심도 가져주고 밥도 사주니까,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밥을 사는 것이 당연해 지니까, 잘 먹었다는 사람도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으로 한 턱 내려면 나름 큰 결정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걸 몰라주니까 약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하다.’는 한 마디면 돈이 아깝다는 생각도 무리했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사목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사소한 말 한 마디 때문에 기쁨과 보람을 느끼곤 합니다. 예를 들면 미사가 끝나고 가시는 길에 ‘강론 잘 들었습니다.’ 하는 감사의 말이나, 병자 방문을 나갔을 때 ‘바쁘신데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는 말을 들으면, 고생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그 한 마디 때문에 기쁨을 느끼고 보람을 느끼곤 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러한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학예회에 갔을 때 아이들이 부모님들께 감사의 편지를 드리거나 읽어주면 어떻습니까? 또 어버이날이라고 꽃을 달아주며 감사하다는 자식을 보면 어떻습니까? 기쁘고 행복하고 보람을 느끼시죠.
하느님도 그런 마음이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하는 우리를 보고 기쁨과 행복을 느끼시고, 감사하는 우리에게 하나라도 더 베풀어 주고 싶으실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하는 것이 중요한데요.
우리는 흔히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문제만 사라지면 감사할 수 있을 텐데.. 이 고비만 넘기면 감사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열 명의 나병환자에게서 보는 것처럼, 감사는 상황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병환자 열 사람 중 아홉 사람은 자신의 문제가 극복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감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저도 부끄럽지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주일 아침에 신부님과 사무장님, 그리고 관리장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머리카락 얘기가 나왔는데, 저는 머리를 자르고 다듬고 손질해야 하는 것이 무척 번거롭고 귀찮아서, 주임 신부님께 ‘저는 대머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대머리가 되면 다 밀어버리고 다니면 되니까 더 편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대머리이신 분들의 고충을 모른다며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대머리 되면 어떤 줄 알어~ 머리에 상처 나지.. 햇볕 뜨거우면 화상 입지.. 얼마나 힘든데.. 있는 놈이 더 한다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대머리이신 분들을 유심히 보니까, 실제로 머리에 상처도 많이 있으시고 햇볕이 뜨거운 날은 머리가 벌개지며 약간의 화상도 입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나니까, 머리숱이 많은 것에 감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이 가진 것을 잘 들여다보지 않으면, ‘있는 놈이 더해~’ 라는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돌아보고 들여다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1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감사를 드렸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되돌아보았기에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을 돌아보지 않고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놓치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일기를 쓰며 하루를 되돌아보고, 주일에 미사를 봉헌하면서 일주일을 되돌아보고, 생일이나 축일에 일 년 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나의 삶을 되돌아보고 잘 들여다봐야,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감사드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보잘 것 없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말씀대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곧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싶다.’는 말을 하곤하는데, 거창한 데서 그 일을 시작할 필요가 없습니다. 감사하는 것에서부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불우한 결손가정 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아이는 항상 밝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면 주변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요? ‘하느님이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길래 저학생은 저리도 밝을까..’ 하며 감탄하겠지요. 그렇게 감사는 작은 일이지만 동시에 결코 작지 않은 일, 곧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감사는 믿는 일이기도 합니다. 복음 마지막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은 당신께 감사를 드린 그 나병환에게 ‘네 감사가 너를 구원하였다.’ 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십니다. 이는 ‘감사’가 곧 ‘믿음’이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기 때문에 미리 감사할 수 있다는 거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미국의 어느 지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마을에 몇 달 동안 비가오지 않아 마을 주민들이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주민들은 기도도 열심히 하였지만 좀처럼 비는 오지 않고 가뭄이 더 심해 져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의 신부님이 마을 주민들에게 광고를 해서 "마지막으로 온 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를 하자..."며, 어른에서 아이까지 모든 주민들을 교회로 모이게 했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이 모두 모여 간절히 기도했는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드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우산이 없었기 때문에 빗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교회 문턱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때 한 어린 소녀가 우산을 쫙 펴들고 빗속을 지나 집으로 갔습니다. 그 모습을 본 많은 사람들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습니다. 어린 소녀는 하느님께 기도하면, 그 기도를 이루어주신다는 순수한 믿음이 있었기에, 당연히 우산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다면 지금 이 순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겠죠. 어려움과 시련, 그리고 문제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이루어주시고 채워주시고 극복하게 해 주시리 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감사하고 또 감사해 봅시다. 그것이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고, 주님을 믿는 일입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주임 신부님께 들은 이야기)
교수 신부님께서 ‘하느님의 모상’ 에 관한 리포트를 내주었다.
다른 학생들은 열심히 이 책 저 책을 짜깁기 하는데, 한 친구만 팽팽히 놀았다고 한다.
나중에 그 친구가 제출한 리포트를 보니, ‘하느님의 모상’ 이라는 제목 아래 자기 사진이 떡 하니 붙어 있었다고 한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탓’은 나에게”
-배광하 신부님-
에덴 동산에서
제 탓 아닌 남의 탓
여자인 하와가 만들어졌을 때, 남자인 아담은 잠에서 깨어나 환호성을 외칩니다. 이제껏 짝이 없었던 아담에게 자신의 동반자가 생긴 것이 기뻤을 것입니다.
그 뒤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게 됩니다. 하와는 그 열매가 하느님과 같아진다는 유혹을 받고 열매를 딴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혼자 눈이 밝아져 하느님처럼 되고 싶지 않아 사랑하는 남자인 아담에게 줍니다.
아담도 그 열매를 먹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금기의 열매를 먹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리고 숨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분명 아담에게 왜, 열매를 먹었느냐고 추궁하십니다.
그쯤 되면 사내대장부가 풀숲에서 나와 자신이 따먹었다고,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고백했어야 합니다. 여자인 하와의 탄생을 그토록 기뻐하였던 아담이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대답은,“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 12) 였습니다. 달리 번역하면 “저 여자가 주어서 먹었습니다”가 될 것 같습니다.
인류 최초의 고자질(?)은 분명 남자가 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묵상해 보면, 결국 인간의 원죄란 늘 감사의 삶을 살지 못하고 모든 탓을 남에게 전가시키는 것에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매일 미사 안에서 자신의 탓을 뉘우치며 ‘제 탓이요’를 고백합니다. 말로는 가슴을 치며 자신의 탓을 고백하면서도 실생활에서는 늘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늘 불평불만의 삶이며, 남을 원망하거나 하느님께 항변하며 불만을 늘어놓습니다. 나를 위하시는 사랑의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못할 때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원망의 삶을 스스로 만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오늘 사도 성 바오로께서는 이렇게 강조하시며 끝까지 인내와 성실의 믿음 생활을 하라고 격려합니다.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2티모 2, 11~12).
너무합니다
우리는 늘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받게 된 첫 번째 유혹은 에덴 동산에서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에덴 동산의 모든 과일나무 열매를 다 먹어도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산 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악마가 노린 것은 그 한 그루 나무였습니다. 우리는 자주 모든 것을 다 받았는데 하나를 받지 않은 것에 대하여 섭섭해하며 너무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생을 자녀들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신 부모님들, 자식의 미래를 위하여 당신의 생애를 송두리째 희생하셨는데, 자식들은 부모의 마지막 남은 재산까지도 자신들의 욕망을 위하여 내어 놓으라 합니다.
부모님들께서 조상에 물려받은 이것만은 안 된다 하시면, 그 마지막 하나를 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 부모를 원망하고 해를 끼치는 일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신 감사의 사랑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악마의 유혹도 인간의 이 같은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을 이용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에 반하여 악은 거꾸로 된 질문을 여자에게 던집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창세 3, 1).
이때 여자의 마음속에는 이미 악의 유혹이 들어갔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도 동산 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를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한 섭섭함, 하느님께서 너무하신다는 배은망덕의 마음이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소유한 이들에게서 감사의 마음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더 가지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이내 서운함과 섭섭함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작은 것을 잃어도 분노를 표출합니다. 내가 남에 대하여, 가족에 대하여 너무 한다는 마음이 들 때, 악은 이미 우리에게 들어온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들이 작은 것을 얻었을 때 기뻐하며 감사를 드리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 중 치유를 받고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은 그야말로 유다인들에게는 천대와 멸시를 받던 인생 밑바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렸고 그것이 그를 구원으로 이끈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 19)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기
- 정원순 신부님-
조그마한 상점을 운영하는 마리아 자매님은 10여 전에 외환위기 때 삶의 절망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잘 되던 상점이 경제 사정의 어려움으로 인해 대단히 어렵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 자매님은 삶에 대한 회의가 들어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성당에 나가는 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고 합니다. 우울함과 절망감으로 서너 달을 힘들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먹고 입고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한 것은 누구의 덕인가 하고 생각하니 주님의 은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고 합니다. 감사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하고 살펴보니 옆에 묵묵히 함께 있는 남편 요셉이 있어 감사하고, 두 딸이 성장해 있어 감사하며, 주일에 가족이 함께 성당에 나가 미사를 드리는 것에 감사하고,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 온 모든 것에 감사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루카 17,11-19)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길을 가시다가 어떤 마을 입구에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병이 회복된 열 사람 가운데 사마리아인만이 가던 길을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나머지 아홉 사람은 그냥 길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오지 않았단 말이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사람을 교만해지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게 해 주고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전서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1코린 15,10).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은 매일의 삶에서 오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선물에도 기쁨을 느끼게 해 줍니다. 감사히 받기만 하면 거부할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1티모 4,4).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 불만스러운 마음이 줄어들고 대신에 만족감이 찾아옵니다. 세상은 아마도 감사하는 사람의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감사의 마음은 사랑이 넘치도록 만들어 주고 인간관계의 갈등을 해결해 주며 서로의 협력을 증가시켜 줍니다.
가까이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면 할수록 감사할 일들이 더 많이 생깁니다. 그런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저축해 두면 어려울 때 든든한 도움이 됩니다. 마치 만일을 대비하여 보험을 드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지금이라는 시간에 감사하면,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과 같이 지금을 소중히 여기며 살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느끼거나 다른 사람 앞에 망설여지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감사의 마음은 사람과 관계를 계산적으로 사귀지 않고, 풍요로운 마음으로 여유로움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며(1테살 5,16-18) 살아가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 배재승 신부님-
우리가 하는 많은 말 중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보다 더 따뜻하고 부드럽고 편안한 표현은 없을 것입니다. 그 말에는 풍요로움과 기쁨이 담겨있어서,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의 마음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삶, 그것을 입술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치유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람만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께 돌아와 발 앞에 엎드려 자신에게 베풀어진 치유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 하시면서 그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진정으로 감사할 줄 알았던 그는 비로소 예수님께 구원을 얻습니다. 살아가면서 참으로 감사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소중한 생명과 하루하루의 시간들, 그리고 가족, 친지, 친구들, 능력과 재능 등등….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그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거저 베풀어주신 선물입니다. 이 모든 선물을 거저 받았으면서도 감사하기보다는 불평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열아홉 살에 뇌막염을 앓아 앞을 못 보는 중증 장애인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 배영희 시인은 이야기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아무것도 아는 것 없고, 건강조차 없는 작은 몸이지만, 나는 행복합니다. 세상에서 지을 수 있는 죄악, 피해 갈 수 있도록 이 몸 묶어주시고, 외롭지 않도록 당신 느낌 주시니,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세 가지 남은 것은 천상을 위해서만 쓰여질 것입니다. 그래서 소담스레 웃을 수 있는 여유는 그런 사랑에 쓰여진 때문입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분명히 이 시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감사보다는 불평을 더 많이 합니다. 적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했던 이 시인 앞에서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보다는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사는 우리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이번 한 주간을 보내면서, 진정 내가 감사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깊이 생각해 봅시다. 빛나는 태양, 소리 없이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나무들, 꽃들, 새들, 그리고 친구들, 부모님, 그리고 바람처럼 언제나 우리를 감싸고 계시는 하느님의 따뜻한 손길….
진정으로 감사해야 할 것을 발견하는 그 순간 우리의 삶은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하여 더욱 행복해 질 것입니다.
있지만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
- 전덕중 신부님-
하늘을 보고 있으면 하늘이 보입니다. 구름을 보고 있으면 구름이 보입니다.
산을 보고 있으면, 나무를 보고 있으면, 꽃을 보고 있으면, 그것이 보입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내가 바라보기에 보이는 것입니다.
하늘이 우리의 머리 위에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지 않으면, 하늘 위를 떠다니는 구름이 항상 거기에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지 않으면, 산이 늘 우리 곁에 있어도 그것을 바라보지 않으면, 나무가, 꽃이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우리 주위에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지 않으면 그것은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요, 있지만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 곁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보고 있지 않기에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하느님을 본다고 이야기하면서도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을 보고 있기에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시더니 나와는 같이 계시지 않는구나!!'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주신 그 은총의 선물은 뒤로하고 다른 사람의 능력을 바라봅니다.
혹여 나에게 이루어진 그 모든 것을 보고는 나의 능력인양 나 자신만을 바라봅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의 선물을 바라보고 있지 않으면,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오늘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저 바라봄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을 그저 감사함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하느님께 돌아와 당신의 발 앞에 엎드려 당신께서 모든 것을 이루셨으니 감사하다고 이야기하는 것 뿐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요,
그 바라봄을 통해 나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을 깨닫는 것이요, 다시 돌아와 감사와 흠숭을 드리는 일입니다.
하늘은 언제나 거기에 있습니다. 구름도, 산도, 나무도, 꽃도 언제나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 볼 때에야 비로소 하늘이 되고 구름이 되고, 나무와 꽃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볼 때에야 비로소, 그리고 그 존재에 대해 감사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와 함께 계신 그 순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나의 눈으로, 나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바라 볼 시간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감사하자”
-홍금표 신부님-
고마움을 느끼는 감사라는 말은 초월적 존재를 인정하는 모든 종교에서 나타나는 가장 보편적인 현상중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초월적 존재가 인간에게 부여하는 은총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어원적으로 보아도 은총(charis)과 감사(eucharistia)는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거저 베푸는 선물인 은총과 감사가 동전의 양면과 같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다름 아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왔고 인간의 삶 자체가 하느님의 섭리와 주관 아래 있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여러가지 덕목이 필요하겠습니다만 이 감사의 덕만큼 더 기본적이고 중요한 덕목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감사의 생활이 잘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변덕스러움이 은총의 풍요로움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욕심과 변덕의 본능을 넘어섬, 그리고 이미 받은 것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이 감사의 생활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신 이야기로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 나병 환자 열 사람을 만나 그들을 치유해주는데 그중 아홉은 그대로 돌아가 버리고 이방인 한 사람만이 치유자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치유 그 자체보다는 치유 받은 이들의 대조적인 처신이 핵심이고, 또 거기에 더해지는 예수님의 말씀,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라는 말씀 때문에 감사를 드리는 한명에게서는 교훈을, 다른 아홉에게는 뭔가 모르는 아쉬움을 느끼는 것이 오늘 복음을 읽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이 이야기를 보면 이 복음은 이러한 표면적인 교훈을 넘어서는 무엇이 있습니다. 사실 치유받은 아홉이 감사를 드리지 않은 것을 배은망덕으로 몰아세울 수도 있고 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면서 아쉬움을 느낄만한 충분한 이유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 당시 나병이 가지고 있었던 환경과 치유과정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나병은 문둥병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피부병을 나병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나병은 전염성이 강하고 불결했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접촉이 엄격히 금지되어 가족과 인간 공동체로부터 격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사제에게 인정을 받은 후에야 가능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이 그들을 먼저 사제에게 가도록 요구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든 이들은 사제에게 가는 동안 병이 낫게 되는데 한명은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리고 아홉은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사실 돌아온 한명이나 돌아간 아홉의 마음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고 그 기쁨의 크기도 거의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명과 달리 다른 아홉에게는 이미 받은 것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고, 또 감사를 드리는 일보다는 해야 할 중요한 또 다른 일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사제의 확인을 통해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는 일,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상봉, 자신들 앞에 펼쳐질 핑크빛 미래를 준비하는 일들이 그것일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은 어려울 때는 주님을 찾지만 정작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일에 얽매여 주님을 잊고 사는 바쁜 오늘의 우리 모습이기에 우리는 여기서도 많은 교훈과 함께 삶의 지침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감사를 드리지 않은 이 아홉의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실 기적적인 치유보다 더 감사해야할 일은 치유받을 필요가 없는 상태입니다. 즉, 치유가 「정말 감사해야할 일」이라면 치유 받지 않아도 되는 건강한 몸만도 「정말 정말 감사해야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물론 저의 입장이겠습니다만 「정말 정말 감사해야할 너무나 많은 일(은총)」들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사실은 정말 감사해야할 일을 하지 않은 아홉에게는 진한 아쉬움을 가지면서도 자신은 정작 감사의 생활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불평과 불만 속에서 또 다른 감사의 조건과 상황을 찾는 어리석음을 범한다는 사실입니다.
겨울에 봄을 찾고 봄이 오면 여름을, 여름이 오면 가을을 찾는 마음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현재의 아름다움을 누리기보다는 가지지 못한 계절의 장점에 집착하는 병적인 인간의 욕심이 이러한 변덕스러움의 원인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봅니다.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재혁 신부님 -
예수님 가까이에 가지도 못하고, 멀찍이 서서 나병환자 열 사람이 크게 소리칩니다. 자신들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실 분은 바로 예수님뿐임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자신들 앞을 지나가는 예수님께 있는 힘껏 자비를 청합니다. 그들의 안타까움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들의 애원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그들 모두의 병을 깨끗이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단 한 사람의 이방인만이 돌아와 예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비록 9명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러 오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도 치유해주셨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이런 분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끊임없이 용서와 치유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런 우리 중의 아홉은 감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치유해주시는 분이시고, 용서해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이만큼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우리는 이 하느님의 자비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들처럼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우리도 끊임없이 고백해야 합니다. 이런 우리들의 고백을 통해 하느님은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주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리지 못했으면 이제부터라도 감사를 드리는 삶을 살아갑시다. 제 1 독서의 나아만과 복음의 이방인 나병환자처럼 주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립시다. 이처럼 주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리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삶이 주님께로 완전히 돌아섬을 의미합니다. 치유되고 나서 다시금 똑같은 죄를 반복하는 우리들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의 길로 들어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너희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이로다.??(복음 환호송)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에 속한 나 자신.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철저한 분업과 사유재산이 보장되는 현대사회의 종합경제 안에서 상품의 교환과 유통을 원활히 하는데 꼭 필요한 것은 단연 ‘돈’이라고 부르는 화폐이다. 돈은 유통경제와 시장경제의 매개적 수단이며, 돈은 그 자체로도 증대(增大)된다. 누구나 상품을 구입한 대가로 그 가격만큼 정확히 돈을 지불해야 한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가더라도 ‘의술(醫術)을 구매한 대가’를 돈으로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현대인의 삶의 거의 대부분은 돈과 함께 전개된다. 현대인은 돈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는 명백한 이론이나 정확한 계산으로 되지 않는 일들도 많다. 여기에 속하는 것 중의 하나가 공짜, 또는 선물이다. 선물은 이론이나 계산의 선을 무너뜨린다. 합리적인 이론이나 계산에는 ‘감사’라는 단어가 그리 걸맞지 않지만, 선물에는 참으로 어울리는 말이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은 인간관계에서, 나아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꼭 필요한 요소이다. 그러기에 감사는 하나의 덕(德)이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와 전혀 다른 믿음을 가지거나, 하느님을 우리와 다르게 배운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덕을 발견한다. 그들의 덕이 우리들의 것보다 크게 발견되거나 느껴진다면 우리는 참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라는 백인대장의 말을 듣고 감탄하신 예수께서 따라오는 군중들에게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본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읽은 적이 있다.(루가 7,2-10)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이 가진 큰 믿음에 대한 예수의 감탄은 복음의 단지 몇 군데서 발견될 뿐이지만,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가나안 여자의 믿음(마태 15,21-28)이나 시로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마르 7,24-30)이 그랬고, 루가복음사가 고유의 편집에 속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10,25-37)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치유된 나병환자 열사람 중에서 감사를 드리기 위해 예수께 돌아온 단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17,11-19)이 그렇다. 오늘 복음은 단연 그 진수(眞髓)를 이룬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고향 나자렛에서 배척을 받자,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가 당시대 이방인이었던 시돈지방 사렙다 마을의 어느 과부만을 구제한 일(1열왕 17,7-16)과, 엘리사가 수많은 나병환자들 중에서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을 깨끗하게 고쳐 주었다(2열왕 5,1-14)는 이야기를 통하여 메시아이신 예수님 자신의 구원활동이 이방인들을 향할 수도 있음을 암시하셨다. 물론 예수님은 이 이야기로 말미암아 고향 사람들의 화를 불러 일으켜 벼랑 끝에서 객사할 뻔한 위기를 모면하셨다.(루가 4,16-30) 아무튼 예수님의 이방인에 대한 연민의 정과 그들 믿음에 대한 감탄은 자신의 지상적 사명과 아버지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담은 것으로서, 복음선포 가운데 아주 중요한 테마 중의 하나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노골적으로 배척했고, 초대교회 또한 유대인들을 향한 선교에 다분히 어려움을 안고 있었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위에 열거한 대목들은 이방인 선교에 대한 복음서 저자들의 의도가 내포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보다 위에 하느님과 예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가 서 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어느 누가 되었든 간에 하느님 앞에 자신의 참된 믿음을 발원(發願)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분명 감사할 줄 아는 자이다. 감사할 줄 하는 자가 참된 믿음을 가지기 마련이다. 자신의 처지가 좋건 나쁘건 언제나 감사할 줄 하는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19절) 오늘 복음이 보여주는 그 진수를 보자.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환자 열 사람이 마을 안에 살지 못하고 어귀에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바였다. 레위기 13장은 사람에게 생긴 문둥병이 그 자체뿐 아니라 환자까지 부정한 것으로 선언하고 진지에서 격리시켜 살도록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부정을 선언하는 보건소 소장은 바로 사제들이다. 사제들은 이들의 병이 전염될 위험 때문이 아니라 경신적 의미에서 ‘부정 탄다’는 이유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동료와 가족으로부터의 격리요, 사회로부터의 추방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삶이란 죽음에 부쳐진 실존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한 가닥의 희망이 있었으니, 바로 기적을 베푼다는 예수와의 만남이었다. 그들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예수께 나아가 멀찍이 서서나마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것을 절규한다. 이 절규에는 표현되지 않은 ‘감사’가 들어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잠재적일 뿐이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14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선 율법의 규정을 따른 것이었지만, 그 말씀 안에 이미 기적의 힘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열 사람의 믿음이 약하거나 없었다면, 자기들이 나을 때까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거기서 사생결단을 낼 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몸은 깨끗해진다.
오늘 복음의 초점은 열 명의 나병환자가 치유 받는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하러 돌아온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이 가진 천진난만하면서도 감동을 자아내는 믿음에 있다. 나머지 아홉 명은 그길로 계속 달려가 사제들에게 자신의 몸을 보임으로써 ‘부정에서 정함’을 인정받고, 제단에 희생제물을 올린 다음, 그동안의 격리와 추방으로부터 당한 불이익을 만회하는 데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명만은 정신이 있었다.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사람밖에 없단 말이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17-19절)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대하면서, 분명히 열 사람이 다 처음에 믿음을 가졌었는데, 막판에 와서 왜 한 명만이 믿음을 가졌다는 말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예수님은 과연 무엇을 바라고 계신 것인가? 여기서 우리가 시도해야 할 것은 9명의 믿음과 1명 사마리아 사람이 가진 믿음의 구별이다. 이는 곧 감사의 구별이기도 하다. 9명의 믿음은 필요와 욕구(欲求)의 질서에서 기인된 것이며, 사마리아인의 믿음은 원의(願意)의 질서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전자는 육체의 치유만으로 기뻐하는 반쪽의 믿음이요, 후자는 ‘무상’으로 주어진 치유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의 믿음이다. 즉, 후자의 경우가 제대로 된 감사인 셈이다. 9명의 믿음은 필요의 성취에 머물러 버린 그 다음 단계가 없는 믿음이며, 예수께로 돌아온 자의 믿음은 하느님을 자기 삶의 진정한 파트너로 존중하고 인정하는 살아 있는 믿음이요 감사인 것이다.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집중시킬 때 얻어지는 창조적인 에너지이다. 우리는 이 믿음을 통하여 사물과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예수님은 대부분 기적을 행하실 때 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셨다. 앉은뱅이를 향하여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할 때에 그가 일어났고, 장님에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할 때에 그는 다시 보게 되었다. 돌아온 한명의 사마리아 사람에게 해 주신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본질적인 치유의 힘이 너 자신 안에 있다”고 하시는 말씀과도 같다.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분명 이런 힘이 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힘이 하느님의 현존임을 망각하고 순전히 자기 것으로 여기는 데 있다. 즉 무상으로 와 계시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스스로임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목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은 우리가 실제로 서 있고, 살아 있고, 참 삶을 살고 있는 이곳뿐이다. 우리에게 맡겨진 작은 세상과 거룩한 관계를 맺고, 매일 일어나는 평범한 기적의 외적인 모습에 맴돌지 않고, 그 기적의 내적인 원동력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길 때 거기에 하느님은 자신의 신적 현존의 거처를 마련하시는 것이다.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결국 예수님께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나병도, 불치의 병도 아니요,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도, 천재지변도 아니다. 문제는 늘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 바로 나 자신이다.
어제는 우리 성당에서 성가대 성 음악 발표회가 있었습니다. 내년이면 본당이 생긴 지 30년이 되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발표회를 해본 적이 없었던 성가대가 어제 드디어 역사적인 첫걸음을 디딘 것이지요. 아마 처음이라 그럴까요?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성가대가 실전 감각을 익힌다고 요 며칠 계속 성전에서 연습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전과 같은 층에 제가 잠을 자는 사제관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성가대 단원들의 직장 관계로 저녁 늦게야 모여서 연습을 하는데, 일찍 자는 저로써는 그 소리가 보통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는 10월 13일을 엄청나게 기다렸지요. 이 시간만 지나면 밤마다 저의 잠을 설치게 하는 노래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드디어 성가대의 제1회 성 음악 발표회가 열렸습니다. 성가대는 그동안 연습량이 많았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너무 잘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 자신이 얼마나 복 많은 사람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어요. 우선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제일 앞에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또한 역사적인 제1회 성 음악 발표회가 있을 때의 본당 신부라는 타이틀 역시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많은 교우들이 함께 해주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 성당의 단합된 힘을 볼 수 있었다는 것 역시 크게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이밖에도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단지 이제 잠자는 시간에 음악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만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으니 얼마나 한심합니까? 즉, 저는 매 순간 저에게 주어지고 있는 축복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고 결과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나병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멀찍이 서서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라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 곁에 갈 수가 없었던 그들은 어떻게든 예수님께 매달렸던 것이지요.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 말을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이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 몸이 깨끗해집니다.
여기서 저는 의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지금 당장 치유되었음을 깨닫게 하지 않고,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서야 몸을 깨끗하게 하셨을까요? 바로 과정의 중요성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과정보다는 결과에 연연하지요. 이는 예수님을 다시 찾지 않은 아홉 명의 유대인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치유된 그 순간에 예수님이 없었다는 이유로 찾아가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 과정 전체에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과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축복에도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감사의 행위가 믿음의 기본이 되어 나를 살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합니다.
지금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었을까요? 결과만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제는 과정 안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쳐야 하지 않을까요?
결과보다는 과정 안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찾도록 합시다.
지구에게도 이웃이 있는가('좋은생각' 중에서)
호주와 하와이 중간쯤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공화국, 나우루. 1789년 이곳에 발을 디딘 서구인들이 주민들의 선한 천성과 아름다운 경관에 반해 '유쾌한 섬'이라고 불렀을 만큼 평화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1900년 농업에 필요한 인광석이 발견되면서 섬의 운명은 변해 갔다. 1차 대전, 국제연맹 신탁통치, 2차 대전, 주민 추방, 국제연합 신탁통치로 이어지는 수난을 당하면서 세계시장으로 떠밀려 갔다.
1968년, 섬사람들은 독립을 맞았다. 그들은 섬을 보호할 것이냐, 남아 있는 40년 매장량의 인광석을 채굴할 것이냐의 기로에서 채굴을 통해 '부유한 섬'이 되기로 결정했다. 세금은 없어졌고 20분이면 섬을 일주할 수 있는 도로에서 저마다 자가용을 굴렸다. 식량, 연료, 물은 대부분 수입했다.
나우루는 이제 열대의 낙원을 팔아 버린 대가로 성인의 90%가 비만인 뚱뚱보의 나라, 인구의 40%가 당뇨병을 앓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인광석은 거의 고갈되었고 주민들은 호주 난민 요청자의 일시 수용과 입어료로 먹고사는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이것은 비단 나우루만의 일이 아니다. 지금 지구 곳곳에서는 당장 눈앞의 이익을 위해 자원을 팔고 개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이뤄지고 있다. 지구의 미래를 경험한 나우루는 우리에게 묻는다. "나우루에게는 원조를 구하거나 사람들이 이주할 수 있는 주변국이 있다. 그러나 지구에게도 이웃이 있는가?" 이제 우리의 선택만이 남았다.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송영진 모세 신부님-
11월 14일의 복음 말씀은, 루카복음 17장 11절-19절,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시다.'입니다.
어떤 마을에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자비를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라고 하셨고,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의 병이 낫고 몸이 깨끗해집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되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라고 물으시면서 그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에는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병자를 고쳐 주기 위한 예수님의 말씀도 없고, 동작도 없습니다.
또 치유 기적은 예수님 앞이 아니라 예수님을 떠나서 가는 동안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지도 않고 사제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만 하시는데, 원래 사제들에게 몸을 보이는 것은 그런 종류의 병이 나은 다음에 확인 받는 절차입니다.
이런 내용들은, 예수님은 어떤 조건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병자를 고쳐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 주려고 하시면 언제 어디서든,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이 치유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라는 말씀은 그 아홉 사람이 돌아와서 감사를 드리지 않은 것이 서운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정말 중요한 것을 얻지 못하는 그들이 안타깝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생색을 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참으로 구원을 받기를 바라실 뿐입니다.
몸의 치유도 중요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아홉 사람의 치유가 취소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신 일을 취소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병이 나은 것을 기뻐하면서 예수님의 지시대로 사제에게 갔을 것이고, 가족에게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치유는 거기까지입니다.
몸이 병이 나은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긴 하지만 그들의 인생이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회개하고, 구원을 얻기 위한 노력 등을 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아마도 병을 잘 고치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이었을 텐데, 그것도 믿음이긴 하지만, 진짜 필요한 믿음은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몸의 치유로 만족하지 말고 진정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 구세주이신 예수님에게로 되돌아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은 처음에는 다른 아홉 명과 다르지 않았지만 병이 치유된 다음에는 완전히 다르게 됩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라는 말은, 그가 병의 치유를 하느님의 은총으로 믿었고, 예수님을 하느님과 같으신 분, 또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믿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몸의 치유로 만족하지 않고 진정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 구세주이신 예수님에게로 되돌아왔음을 암시합니다.
열 사람 모두 구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도 아홉 명은 그냥 가버림으로써 받을 수 있는 구원을 못 받게 되었고, 돌아온 한 사람만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던 죄수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아라면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모독합니다.
그가 한 말은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다른 죄수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라고 청합니다(루카 23,42).
똑같은 처지에 있었지만 그들의 영혼 상태는 너무 다릅니다.
첫 번째 죄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지만, 두 번째 죄수는 바라던 대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루카 23,43).
글자 그대로 '청해서 받은 것'입니다(루카 11,10).
은혜를 받고서도 감사할 줄 모르고 믿음도 없었던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요한복음 5장의 '벳자타 못 가의 병자'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예수님을 밀고합니다(요한 5,15).
그의 몸의 병은 나았지만 그의 영혼은 병든 채로 있었습니다.
영혼의 병은 구세주의 은혜에 응답하는 생활을 하면서, 자기 스스로 회개하고, 믿고, 구원을 받으려고 노력해야 치유되는 병입니다.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갔느냐?”
<불평불만, 이제 그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미혼남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한 가지를 관심 있게 본적이 있습니다. 질문 내용이 ‘내 남자(혹은 여자) 친구, 이럴 때 제일 싫다.’였는데, 그중에 눈에 띄는 상위권 대답이 이랬습니다. ‘대중식당에서 큰 소리로 종업원들에게 야단치고 유세부리는 남자(여자)친구.’
저 역시 대중식당에서 제일 꼴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상전도 그런 상전이 없습니다. 종업원들을 마치 몸종 다루듯 다룹니다. 안 그래도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느라 피곤한 사람들을 제대로 괴롭힙니다. 다른 데서 못 푼 스트레스를 풀기라도 하려는 듯 수시로 불러대고, 이것 왜 짜냐? 저것은 왜 식었냐, 갖은 불평불만들을 털어놓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젠가부터 다짐을 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시키지 않고 직접 가져온다. 주면 주는 대로 먹는다. 절대로 음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않는다.
참으로 하지 말아야할 것이 ‘불평불만’이란 것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그게 쉽지 않습니다. 불평불만이란 것, 한 번, 두 번 하다보면 그게 슬슬 습관이 되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자기도 모르게 입만 열었다 하면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불평불만, 그것은 우리 인류의 역사와 같이 시작되었습니다. 구약시대 때도 이 불평불만은 대단했습니다. 출애굽 시절을 한번 돌이켜보십시오. 민족의 지도자 모세의 인도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염원이었던 이집트 노예생활을 청산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향해 기쁨의 행렬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사랑과 자비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섰을 때 홍해를 둘로 가르셔서 그 한 가운데를 지나가게 하십니다.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게 되었을 때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백번 천 번도 더 감사하고 찬양해도 부족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몇몇 ‘개념 없는’ 사람들 처신하는 것 좀 보십시오. 즉시 불평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합니다.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빼내왔느냐?” “왜 가도 가도 끝이 없냐?” “이집트에서는 날이면 날마다 고기에, 술에 산해진미였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이 지긋지긋한 만나를 먹어야 되나?”
이런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에 하느님께서도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시고 전혀 그러실 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크게 진노하십니다.보십시오. 하느님께서 정말 싫어하시는 것, 바로 불평불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큰 치유의 은총을 입은 나병환자들의 모습도 한번 보십시오. 자신들에게 새 삶을 부여하신 예수님, 생명을 도로 찾아준 예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 사람은 열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었습니까?
하느님께서 가장 즐겨 받으실 봉헌은 바로 감사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생토록 베푸신 하느님 자비에 대한 우리 인간 측의 응답은 너무나도 당연히 ‘감사’여야 하지 않을까요?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참 수도자라면, 입을 열었을 때, 즉시 튀어나와야 하는 말이 감사의 말이어야 합니다. 찬미의 노래여야 합니다. 축복의 인사여야 합니다.
가장 많은 불평불만은 대체로 인간관계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말입니다. 저 사람은 대체 왜 저러나? 저 사람은 왜 인생 저렇게 사나? 저 사람은 왜 나와 이토록 철저하게도 다른가? 내가 과연 언제까지 저 사람을 참아줘야 하나?
그러나 한번만 생각을 뒤집어보십시오. 한번 크게 뒤로 물러서서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은 선물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보물보다 값진 선물입니다. 한 사람이 내게 온다는 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입니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입니다(정현종, 방문객 참조).
이웃에 대한 불평불만은 이제 그만 접읍시다.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의 노래로 우리 삶을 가득 채웁시다.
몇 년 전 자동차를 새로 구입했을 때의 일입니다. 제 마음에 쏙 드는 차였고 그래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애지중지했고 매일 차를 깨끗이 닦으면서 저의 애정을 차에게 표시했지요. 그런데 차를 구입한 지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때, 청주에 내려갈 일이 있었지요. 전날 눈이 많이 오기는 했지만 그렇게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차는 일반 승용차가 아닌 4륜구동 SUV 차였거든요.
하지만 저의 예상과는 달리 눈길에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눈길에 차가 미끄러지면서 제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결국 어떤 집의 담벼락에 제 차가 쳐 박히고 말았습니다. 잠시 뒤, 차 밖으로 나왔는데 차의 상태가 영 아니었습니다. 엔진 부분까지 완전히 박살 나 있었지요. 차 뽑은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착잡했습니다. 새 차가 이렇게 완전히 박살 난 것뿐만 아니라, 또한 제 차에 의해서 파손된 이 집의 담벼락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내게 이런 일이 생길까 라는 원망도 하게 되었습니다.
차가 담벼락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차만 바라보고 있는 제게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이고, 차 박살난 것 보니까 운전사가 크게 다쳤겠어요. 운전사는 벌써 병원 갔어요?”
그 순간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길까 하면서 원망하고 있었지만, 누구나 인정할만한 큰 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멀쩡하다는 사실에 먼저 감사해야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감사하기보다는 원망하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다 은총입니다. 괴롭고 힘든 고통과 시련의 순간 역시 잘 생각해보면 감사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쁜 일이 있을 때에는 끊임없이 남의 탓 그리고 주님 탓을 외치면서도, 좋은 일이 있을 때에는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못했고, 주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선물 역시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치며 은총을 청하는 나병환자들에게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고, 당시 나병은 치유 후 율법적 절차를 거쳐야 하는 법적 치유 인정이 필요했기에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순간 병이 나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표시한 사람은 딱 한 사람,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감사를 표시한 이 사람만이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말씀,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을 듣게 되지요.
어쩌면 사제에게 먼저 자신의 몸을 보이고 치유되었음을 인정받는 것이 더 우선일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은 주님께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좋든 나쁘든 어떤 새로운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감사의 표시입니다. 감사의 표시를 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도 덤으로 받습니다.
감사는 가장 세련된 형식의 예의다(J.마르탱).
감사
-정희완 신부님-
“사라지는 것만이 사라지는 것들을 생각한다/… // 세상은 늘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지만/ 끝내 그 어디에도 다다를 순 없었다/ 가는 곳까지만 길이었을 뿐”
(유하, ‘7월의 강’).
11월입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그래서 조금은 황량한 11월의 풍경은 언제나 지난 시간을 다시 되돌아보게 합니다. 11월은 우리들의 죽음에 대한 희미한 예감, 세월이 지나간 흔적에 대한 슬픈 기억들,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쓸쓸한 애상을 불러일으키는 달입니다. 11월의 느낌은 참 애잔한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우리의 생은 언제나 우리를 위한 많은 이들의 사랑과 정성 속에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지난 생은 어머니의 희생과 기도 속에서, 나를 사랑해 준 많은 이들의 정성 속에서 일구어져 왔음을 고백합니다.
지난 내 사제의 삶 역시 결국 신자들의 헌신과 기도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것도 같습니다. 참 이기적인 세상에서, 참 이기적 본성을 지닌 우리 인간이 제 힘으로 제 노력으로 사는 것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돌아보면 우리의 삶은 하느님과 부모와 이웃들의 도움 속에 언제나 서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이 지상의 땅에서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감사의 노래뿐입니다. 11월은 지나온 삶의 시간들에 대해 감사하는, 또 그 삶의 순간마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유시찬 신부님과 함께하는 수요묵상
열 사람이 깨끗해졌는데 이방인 한 사람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있는 대목에 초점을 맞춰 묵상을 해도 좋겠지만, 전체적 흐름으로는 관상을 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과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만나는 장면에 초점을 맞춰 주변의 분위기를 좀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동네 분위기를 살펴본다고 할까요, 나병 환자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태도 그리고 나병 환자들 자신들의 몸짓과 표정을 좀 살펴봤으면 합니다.
이어서 예수님과 나병 환자들이 만나는 장면을 좀 세밀하게 봤으면 합니다. 성경에는 그저 말마디만 주고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멀찌감치 떨어져 서로 그렇게 말만 주고받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가까이 불러 뭔가 다른 대화들이 오고가고 있는지 등을 봤으면 합니다. 자주 하는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이때도 선입견에 사로잡힌 기도를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동네사람들은 일방적으로 배타성 내지 적개감만 드러내고 있다든지 예수님은 오로지 사랑 가득한 시선으로만 그들을 바라보며 대하신다든지 하는 식의 기도 말입니다. 내용의 맞고 그름을 떠나 기도에 신선한 감동이 빠져버리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병이 나은 나병 환자들 각자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십시오. 똑같은 사건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단순히 모두 병이 나았다고 천편일률적으로만 정리하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각자의 처한 상황과 걸어온 역사가 다르고 그런 배경 속에서 일어난 병 나음의 체험들이 각자에게 다른 울림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중 한 명 특수한 예로 사마리아인의 반응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중심으로 살펴보되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도록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병환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며칠 전 모임에서 오래간만에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을 보자 가라앉아있던 기억이 다시 올라왔습니다.
다 해소된 줄 알았는데 기억과 더불어 조금 남아있던 부정적인 감정도 같이 올라왔습니다.
그분은 어찌 보면 저로 인해 인생이 바뀐 분입니다.
그대로 살았으면 어쩌면 폐인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분이 제 입장에서 볼 때는 배은망덕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저를 반대한다면 저도 이해하지만 정의와 명분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분명 감정을 가지고 저를 비판하고 음해하였습니다.
이럴 경우 저는 대체로 그것을 큰 문제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가 부족하여 그리 하기도 했겠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의 죄와 허물과 악을 통해서도 뭔가를 말씀하시는 분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길 때에 사울의 친족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고 이에 대해 다윗 진영의 아비새가 가서 죽이겠다고 하니 다윗은 그를 만류하며 하느님께서 시켜서 그리하는 것이니 그대로 두라 한 것을 떠올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가라앉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나한테 감사해야 할 너인데 오히려 내 등에 칼을 꽂았지!’하는 생각이 살짝 지난 간 것입니다.
즉시 그런 저를 질책하고 아무 감정 없는 것처럼 그를 대했지만 크게 반성이 되었습니다.
그런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감사를 받으려고 했던 저의 교만과 자기중심성에 대한 반성입니다.
내가 은총과 복을 베푼 것처럼 내가 감사를 받으려고 하다니!
이런 면에서 오늘의 주님은 참으로 올바르십니다.
아니 주님은 참으로 겸손하시고 가난하시며 주님의 올바르심은 바로 이 겸손한 가난에서 나온 것입니다.
외국인 나환자만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자 아홉 유대인 나환자가 돌아오지 않은 것에 대해 한탄을 하시지만 당신께 감사드리지 않음을 한탄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영광 드리지 않음을 한탄하십니다.
당신이 감사를 받지 않고 아버지께서 영광 받게 하심,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완전한 겸손이시고 가난이십니다.
분명 당신이 연민의 정을 품으시고, 당신이 치유해주셨지만 그 연민의 정과 치유의 은총이 당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임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인정하십니다.
온갖 선은 하느님의 사랑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받아 지니면 하느님의 선도 우리가 나누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도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대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도록 기도하는 하루가 됩시다.
반성과 감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실 우리도 한때 어리석고 순종할 줄 몰랐고 그릇된 길에 빠졌으며, 갖가지 욕망과 쾌락의 노예가 되었고, 악과 질투 속에 살았으며, 고약하게 굴고 서로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티토서.3,3-5)
남자들은 군대 얘기를 많이 합니다.
군대에서 고생 많이 했다는 얘기.
군대에서 있었던 무용담.
군대에서 있었던 특별한 일들.
한 마디로 요약하면 군대에서 이러저러한 경험을 많이 했는데 자기는 그것을 겪어낸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재미삼아 또는 적당히 옛날 일을 자랑삼는 것은 삶의 양념이 되겠지만 지나치게 옛날 일을 자랑삼는 것은 허풍일 뿐 아니라 현재의 초라함을 가리려는 가여운 과거 안주(安住)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성실히 그리고 제대로 산 성숙한 사람이라면 지난날의 자기 잘못을 늘 성찰하고 개선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과거를 어떻게 성찰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오늘 바오로 사도처럼 한 때 우리가 얼마나 세속적으로 살았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도 한때 어리석고 순종할 줄 몰랐고 그릇된 길에 빠졌으며, 갖가지 욕망과 쾌락의 노예가 되었고, 악과 질투 속에 살았으며, 고약하게 굴고 서로 미워하였습니다.”
과거에 대한 올바른 성찰은 내가 전에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성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얼마나 그릇되고 헛된 것들에 빠져 살았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아는 사람이 현재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고 앞으로도 어리석지 않은 삶을 살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얼마나 잘 못 살았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악과 질투 속에 살았으며, 고약하게 굴고 서로 미워하였습니다.”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과거를 돌아보며 신앙인인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내가 이렇게 어리석고 잘못을 하였는데도 하느님께서 나를 일깨우시고 인도하셨고 구원하셨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난날의 나의 모든 허물과 죄는 성령을 통하여 깨끗이 씻어주시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게 하셨다고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네 눈물이 곧 내 눈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모습가운데 가장 제 마음에 와 닿는 모습은 아무래도 자비하신 모습입니다. 복음서 곳곳은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연민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고통 속에 신음하는 백성들 머리 위로 당신 자비의 팔을 펼치셨습니다.
매일 미사 시작 예식 때 마다 우리는 하느님 자비를 청합니다. ‘하느님 자비’라는 말, 생각만 해도 큰 위로가 됩니다. 자비(慈悲)란 너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네 고통을 내 고통으로 삼겠다는 말입니다. 네 눈물이 곧 내 눈물이란 뜻입니다. 네가 잠 못 이루며 힘들어 할 때 나도 네 옆에서 깨어있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바로 그러하십니다. 하느님을 단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자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멀리서가 아니라 내 가까이서, 내 위에서가 아니라 바로 내 곁에서, 나와 그분이 따로가 아니라 하나가 되어, 한 마음이 되어 아픔과 고통을 함께 겪는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 등장하는 나병환자들은 하느님께서 자비의 하느님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의 아픔이 당신의 아픔, 우리의 상처가 당신의 상처, 우리의 울부짖음이 당신의 울부짖음이었던 예수님께서 그들의 외침을 절대로 외면하실 수 없었습니다.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들이 겪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과 슬픔을 보십니다. 마음 가득히 차오르는 연민의 정에 어찌할 바를 모르십니다. 당신도 모르게 그들에게 자비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토마스 머튼은 자비를 ‘서로가 서로의 일부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 사이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명철한 의식’으로 정의를 내렸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매 순간 살아있고, 매 순간 숨 쉬고 있는 우리입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 역시 또 다른 존재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자비의 실천으로 또 다른 하느님의 얼굴을 그들에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비야말로 가장 ‘하느님스러운’ 것입니다. 자비는 가장 충만한 신적 속성입니다. 자비가 자랄 때 우리 내면에서 신성(神性)도 자라납니다. 자비를 왜곡하거나 죽이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왜곡하거나 죽이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보물 창고
- 김수만 신부님-
하루 일과를 마치고 끝기도를 바칠 때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았나?’ 하고 되돌아봅니다. 어떤 일은 ‘참 잘했구나.’ 하고 미소를 짓고, 어떤 일은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늘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하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생각보다는 제 생각이 더 커질 때가 많습니다. 필요할 때만 하느님을 찾는 것은 아닌지 반성합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 천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천사의 안내로 하늘 창고를 구경했습니다. 그러고는 한 창고를 보게 되었는데, 안이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물었습니다. “왜 창고가 비어 있는 거죠?” 천사가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곳은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줄 보화가 가득했던 창고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느라 보화가 가득한 창고가 텅 비워지게 된 것입니다.”
천사와 그 사람은 또 다른 하늘 창고를 구경했습니다. 그 창고는 아까 본 창고와는 반대로 안에 보화가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이곳은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줄 보화가 있는 창고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너무 적어 아직도 이렇게 보화가 쌓여 있습니다.” 그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루를 살아가면서 감사할 일이 많음에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감사드리러 돌아온 이는 오직 한 사람, 천대받던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왜 이방인 한 사람만 찾아왔을까요? 축복의 선물을 받았으면 마땅히 감사드리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요? 그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버릴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빛을 잃어갑니다.
우리 삶, 그리고 우리 삶의 자리, 오늘 하루, 온통 감사할 것투성이입니다. 어느 것 하나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얼마나 감사드리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감사는 고사하고 내 뜻,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느님께 불평·불만만 늘어놓은 것은 아닌지요. 제1독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들어라. 그리고 깨달아라.” 지금 이 순간 하느님께 두 손 모아 감사기도를 해보십시오.
감사하며 살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은 나병 환자 열 사람의 치유사화입니다.
하나는 치유된 뒤 감사를 드리러 예수님께 왔고 아홉은 오지 않았습니다.
감사드리러 오지 않은 아홉에 대해서 저는 너무 나무라고 싶지 않습니다.
나무라는 마음 대신 애처로운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그 아홉도 감사의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긴 생애동안 병의 고통을 당한 사람으로서 감사의 마음이 없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감사드리러 오지 않았을 뿐일 것입니다.
마음이 있어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니 애처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이 있기는 해도 이 아홉의 경우는 표하지 않을 정도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면 표현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들은 그 정도는 아니기에 감사를 표하러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난 주 한우리 징검다리들과 강원도로 Workshop을 갔습니다.
그간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여행하는 그런 성격도 띠었기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경치 좋은 길로 갔습니다.
그런데 가면서 저를 비롯한 남자들은 한 번 감탄을 하고 마는데 자매님들은 아름다운 경치가 나올 때마다 매번 감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자들은 감탄이 열 번 중 한 번만 넘치는데 자매님들은 감탄이 매번 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매번 감탄하시냐?”고 농 삼아 말씀드렸지만 누가 더 행복한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열 번을 봐도 열 번을 다 감탄하는 사람과 열 번을 봤지만 한 번만 감탄을 하는 사람. 열 번에 한 번만 감탄이 넘치는 사람보다는 매 번 감탄이 넘치는 사람이 더 충만하게 사는 사람이니 그가 당연히 더 행복한 사람이겠지요.
感자가 들어가는 모든 말은 기울여 나오는 것이 아니라
넘쳐서 나오는 것입니다.
感動,
感興,
感歎,
感情, 그리고
感謝.
이런 것들은 절대로 기울여 나오는 것들이 아닙니다.
기울여 나오면 비어지기 때문에 그 뒤 공허감이 남지만 넘쳐서 나오면 자신도 채우고 남도 채우는 것이 됩니다.
나도 만족, 너도 만족이고 나도 충만, 너도 충만입니다.
그런데 感謝는 感자가 들어가는 그 많은 말들 중에서도 특별합니다.
감사는 은총, 은혜에 대한 감사이기에 감사가 넘쳐 나오는 순간 은총으로 충만해집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 마리아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음은 하느님 손해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그 큰 은총으로도 다 차지 않는 자기 손해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감사를 드립시다.
횟수로는 매 번, 양으로는 넘치게 감사를 드립시다.
감사(Eucaristia)와 구원
-전삼용 요셉 신부님-
송명희라는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소뇌를 다쳐 뇌성마비 장애를 얻었습니다. 몸의 성장발육이 느리고 연약하여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했습니다.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신 분들이 그렇듯이 얼굴과 몸이 비틀어져 거울을 보기도 싫었습니다. 몸이 그래서 초등학교도 가지 못해서 아는 것도 없었습니다.
수차례 반복되는 이사와 찢어지게 가난한 자신을 보면서 그녀는 늘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 때 하느님은 ‘말하는 대로 써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왼손에 토막연필을 쥐고 받아 적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느님이~”
그녀는 너무 어처구니 없는 말씀에 울며 소리쳤습니다.
“아니요! 못 쓰겠어요! 공평해 보이지가 않아요! 내겐 아무 것도 없어요!”
하느님은 ‘시키는 대로 공평하신 하느님이라 써라!’ 하셨고, 그녀와의 반복되는 공방전 속에 결국 하느님이 승리하셨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공평하신 하느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느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이렇게 ‘나’라는 시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가사로 한국 복음성가 작사대상을 수상하고 그녀의 책도 기독교 저서 최우수 서적으로 선정되었으며 지금은 장애인 학교 건립을 추진 중이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십니다. 그 열 명 중에 유일한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병을 치유해 주신 것이 곧 그 사람들의 구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돌아와 감사와 찬미를 드렸을 때에야 비로소 그 사람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예부터 나병은 죄의 상징이었고 나병을 치유해주시는 것은 세례로 상징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다는 보증이 아니라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릴 때 비로소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송명희 씨는 비록 개신교 신자지만 우리에게도 큰 감동과 교훈을 줍니다. 그녀를 바뀌게 한 것은 믿음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것이 그녀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를 변화시킨 것은 ‘하느님의 공평함’을 어렵게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찬미 하면서부터 였습니다.
가끔 미사시간에 신자들의 얼굴을 보면 억지로 나와 있는 듯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분들을 의외로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미사는 파견한다는 뜻이 있고 동시에 ‘감사(Eucaristia)’의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감사의 찬양을 드리지 않으면 미사가 아니고 다른 이들이게 주님을 전하려는 사랑이 없다면 미사는 그 사람에겐 헛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미사는 오늘의 치유 받고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는 모습과 같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미하기 위해 제대 앞에 모이는 이는 비로소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사하기가 얼마나 인색하고 어렵습니까?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았다고 느낄 불행한 순간에도 감사가 나온다면 그 사람이 바로 성인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태양의 찬가를 지어 자연과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한 시는 그 분이 눈이 멀어 보이지 않을 때였다고 합니다. 눈이 멀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 분을 찬미하였기에 성인이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이런 문구를 보았습니다.
“‘우리’라는 선물을 주신 그대, 사랑합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 배우는 것은 말이 아닙니다. 바로 관계입니다. 말을 못 해도 엄마가 함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의 찬미도 바로 이래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구원해주시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 하나만으로 능히 찬미가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라는 선물을 주신 하느님과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우리 모습을 봅니다. 그분이, 그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도록 합시다.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회색 빛 나날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돌아보니 제 "신앙생활"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집을 향해 걸어가는 여행길이었습니다.
산행을 하다보면 평탄하고 호젓한 오솔길을 걸을 때가 있는가 하면 가파른 오르막이나 아슬아슬한 절벽 사이를 기어갈 때도 있지요.
지난 제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때로 희망과 설렘으로만 가득 찼던 맑은 날이 있었는가 하면, 답답함과 좌절과 쓰라림뿐이었던 회색빛깔의 나날들도 많았습니다.아버지와 이웃들 앞에 떳떳하고 의기양양하게 살아가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쥐구멍으로 들어가고만 싶었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절실하고 감미로운 하느님 체험으로 가슴 뛰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과연 하느님이 계시기는 하는가? 이게 도대체 뭔가?"하며 막막해하던 시절도 많았습니다.
제 신앙여정 안에서 참으로 피하고 싶었던 불행했던 순간들을 떠올려봅니다. 물론 그 순간은 현실적으로 너무도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이었습니다. 제 삶 전체가 뒤흔들렸던 위기의 순간들이었지요. 어떤 체험들은 너무도 고통스러웠기에 떠올리기조차 싫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조금씩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좌절의 순간이야말로 은총의 순간이었습니다. 좌절의 순간이야말로 제 삶 안에 큰 쉼표를 찍게된 보물과도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불행했다고 여겨지던 그 순간이 비록 육체적으로 괴로웠지만 제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바라다 볼 수 있었던 제 인생의 가장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병고의 십자가를 지고 가던 순간이야말로 진한 하느님의 은총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희망과 구원의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한평생 나병으로 시달리던 사람들을 말끔히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언제나 인간의 병고를 모른척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고통 앞에 함께 아파하며 함께 고통 당하시며 함께 눈물 흘리시는 연민의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고통 당할 때, 거듭되는 실패 속에 헤맬 때도 우리가 결코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한가지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우리를 외면한다할지라도 예수님 그분만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나간다 할지라도 그분만은 끝까지 우리를 떠나가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결코 고통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통 안에 계심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노화마저 거부하지 않습니다. 봄이 오면 고목의 등걸에서 연녹색 푸른 싹이 돋아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죽음마저도 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마저 물리치셨음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달려갈 것인가?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나병 환자들은 예루살렘의 사제들에게 치유 사실을 인정받아야만 정상적인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사제들에게 자신의 깨끗한 몸을 보여 줄 날만을 고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으로 살 수 없었던 나병 환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을 억눌렀던 온갖 굴레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는 것이었으며 복음(기쁜 소식) 자체였습니다.
나병 환자들이 더 이상 예수님 앞에 머무를 이유는 사라졌습니다. 모든 멍에를 벗어던지고 온전한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사제에게로 달려갑니다.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다.
나병 환자들은 자신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사제에게 달려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달려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곧 나병의 치유라는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께 돌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사제들에게 치유 사실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었는지, 그들은 자신이 온전히 나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사제들에게 달려만 갔습니다. 단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똑같이 나병을 앓았고 치유의 은사를 받았지만,한 사람은 예수님께로, 다른 아홉 사람은 사제에게로 향했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서로의 길이 갈립니다. 한 사람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굴레를 벗겨 준 해방자에게로 달려감으로써 가장 가까이에서 참 해방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당장의 현실적 이익을 향해 달려감으로써 해방자에게 멀어집니다.
한 순간의 일입니다. 한 순간의 선택입니다. 어디로 달려갈 것인가? 지금까지 온 몸으로 겪어야 했던 굴레를 벗어버렸다는 해방의 기쁨에 그대로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이 해방의 기쁨을 온 몸으로 체험했기에 더 완전한 해방, 총체적인 해방을 향하여 나아갈 것인가?
머리로서는 명확하게 대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으로 결단을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더욱 충만한 내일을 향해 얻기 위해서 버려야 하는 당장의 편안함과 이익이 너무나도 아쉽기 때문입니다.
"너는 과연 어디로 달려갈 것이냐?"
"너는 과연 지금 어디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느냐?"
오늘 주님께서 던지는 화두입니다.
로또를 좋아하는 어떤 형제님이 계셨지요.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매주 토요일 저녁에 복권을 손에 쥐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인생은 한방이야.”를 읊조리면서 당첨번호를 확인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복권을 사서 당첨번호를 확인하는 것을 이 형제님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복권을 사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것 역시 일반 사람들의 취미 활동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지요. 또 만약에 당첨이 되면 그야말로 ‘인생역전’을 이룰 수가 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들이 울상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글쎄 시험을 빵점 맞아서 선생님으로부터 혼났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은 아들의 시험지를 받아들었지요. 그리고 그는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험문제는 이러했습니다.
“자신의 꿈을 적어보시오.”
이에 대한 아들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인생은 한방이다.”
나의 잘못된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와 나는 전혀 연관이 없는 것 같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분명히 나의 행동은 나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할 지가 분명해 집니다.
먼저 하느님께 받은 모든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 역시도 사랑의 향기를 세상에 풍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이들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가 있으며, 다시금 사랑의 향기를 세상에 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감사하지 못합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려하고 그래서 늘 사랑이 부족하다고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10명의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다시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드린 사람은 단 한 사람. 그것도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 한 명 뿐이었습니다. 9명의 유대인은 자신의 치유가 마치 받을 빚을 받은 것처럼 당연하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치유받은 이방인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임에 감사하며 주님 앞에 엎드렸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육체의 치유만이 아닌, 영혼의 구원까지 얻게 됩니다.
10명의 나병환자 중에서 누가 다른 이의 모범이 될까요? 바로 단 한 명의 치유받은 이방인이 우리의 모범이 되고, 우리 역시 이러한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살 때 영혼의 구원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다른 이들에게 이러한 모범을 보이며 살고 있을까요?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도록 합시다.
E.T.라도 감사해요.
- 임영인 신부님-
한센병을 겪은 것처럼 코가 없고, 한쪽 눈과 눈썹도 없고, 입술이 뒤틀린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E.T.할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채규철 선생님입니다. ‘E.T.할아버지’라는 말은 ‘이미 타버린 할아버지’라는 뜻이랍니다.
그는 대학을 마치고 덴마크에 유학 가 선진 농업기술을 배워 돌아온 뒤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던 가슴 뜨거운 청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언덕에서 차가 굴러 폭발하면서 전신 3도 화상을 당해 얼굴이 도깨비처럼 변했습니다. 한창 나이인 서른한 살 때였습니다. 2년 뒤에는 아내마저 쇠약해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삶은 절망의 연속이었습니다. 식당이나 다방에서 거지 취급을 당하고 버스 승차를 거부당하기도 했습니다. 주님이 원망스러워서 자살하려고 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나를 살리신 주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 주님 뜻에 순종하며 살자.’
그 후 채규철 선생님의 삶은 변했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피고름이 나던 머리에서 새 머리카락이 돋아나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일그러진 얼굴을 머리카락이 조금이라도 가려 줄 수 있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귀가 없어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한쪽 눈을 잃었지만 남은 한쪽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했고, 입술이 없어졌어도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전할 수 있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는 청십자 운동을 하고, 간질 환자들을 위해 활동 했으며, 86년에는 아이들을 위해 두밀리 자연학교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강연을 했는데 그때마다 감사의 전도사가 되어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마음씨 좋은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돈이 많았지만, 정이 많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노력을 했지요. 그런 그가 어느날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목수를 불러 집을 좀 지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우리 부부가 3개월쯤 여행을 떠날 것입니다. 최상의 건축재료와 초일류 목수를 총동원해 멋진 집을 지어주세요. 건축비를 조금도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말하고 주인이 여행을 떠나니, 목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요. 그리고 그는 싸구려 건축자재와 형편없는 인부를 동원해서 날림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건물을 다 지었어요 구멍이 나고 금이 간 곳이 생겼지요. 이런 부분은 페인트칠로 감쪽같이 속였습니다. 드디어 부탁을 했던 부자가 돌아왔고, 목수는 부자에게 열쇠를 주며 이렇게 뻔뻔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집을 지었어요."
그러자 부자가 목수에게 그 열쇠를 다시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집은 내가 당신 가족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바로 그 순간 목수는 땅을 치며 후회를 했지요. 그는 자기에게 돌아올 집인지도 모르고, 단순히 순간의 이익을 위해서 엉터리로 건물을 지었으니 말입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지요. 즉, 당장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기교를 부리는 사람들은 결국 낭패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당장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서 은혜도 모르고 엉뚱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시다가 10명의 나병환자를 만나십니다. 그들 중에 아홉은 유대인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나병이란 불치의 병으로 뭇사람과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소외를 당했겠지요. 따라서 그들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서 예수님께 외치지요.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의 불행을 가련히 여기시어 나병을 낫게 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들은 모두 깨끗해졌던 것이지요. 그런데 치유받은 아홉 명의 유대인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지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한 사람만이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만이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왜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은혜도 모르는 짓을 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율법에는 나환자를 접촉하면 부정해진다는 계명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나환자였던 자신들과 접촉한 예수님은 이미 부정해진 것이지요.그런데 부정해진 예수님을 만나면 그들 자신이 또 다시 부정해 질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병이 나기 전의 유대인들의 완고한 마음으로 다시 되돌아간 것이지요.
이 모습이 혹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이끄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지만, 우리 자신의 편리와 이해타산으로 인해 다시금 멀어지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의 은혜를 받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온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아홉 명의 유대인처럼 단순히 병의 치료만 될 뿐,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하겠지요. 앞서 그 가난한 목수처럼 나에게 돌아올 것도 그냥 차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끊임없이 치유를 받아야 할 죄인들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과 이웃에게 죄인임을 고백하고, 굳은 믿음으로 주님의 자비를 간청해야만 합니다. 나아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생각과 말과 행위의 십일조
-이인옥-
오늘 한 말 중에 고맙다는 표현은 얼마나 되나? 한 달 동안 한 일 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일은 얼마나 될까? 올 한 해 사람들에게 받은 호의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나? 이제까지 알고 지내던 사람들 중 은인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일생 일어난 일들 중에 감사드릴 사건은 무엇인가?
하루 종일 한 말 중에 십분의 일만 감사의 표현을 하고 살았다면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한 달 내내 한 일 중에 십분의 일만 감사의 마음으로 했어도 지금보다 훨씬 즐겁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일 년 동안 만났던 분들의 고마움을 십분의 일만 되새겨 잊지 않았어도 지금보다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들 중에 은인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면 그만큼 마음이 겸손하다는 증거다. 정말로 은인이 많아서라기보다 그만큼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살아오는 동안 감사드릴 일이 너무도 많아 손꼽을 수 없다면 그만큼 마음이 깨끗하다는 말이다. 정말로 감사할 일이 많아서라기보다 그만큼 욕심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우리는 생각의, 말의, 행동의, 시간의 십분의 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지 못하고 있다.
치유된 나병환자 열 명 중에 감사한 사람은 겨우 십분의 일, 단 한 명이다. 그런데 육신의 치유에 감사할 줄 알았던 그 한 명에게는 영혼의 구원까지 덤으로 주어졌다. 작은 감사가 더 큰 감사를 불러온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행복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동안 행복해진다고. 감사할 일이 많아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써 더 많이 감사할 일이 생긴다고. 그러니 행복하고 싶다면, 구원받고 싶다면 ‘적어도’ 우리 일생의 십분의 일만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야 하지 않을까? 나머지 아홉은 그만두고라도.
참된 치유
-서현승 신부님-
미국의 한 언론사가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당첨 이후의 삶을 조사해봤더니, 당첨된 사람들은 당첨금을 받은 이후에 거의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마약에 빠지고 도박에 빠져서 가정이 파탄 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더랍니다. 그런데 복권에 당첨되었던 사람들 중에는 반대로 아주 행복하고 건실하게 사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네요. 그들에게는 비슷한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복권 당첨금의 상당 부분을 사회단체에 기부하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직접 도와주는 삶을 사는 이들이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치유받은 열 사람의 나병환자 중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리고 구원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은 똑같이 치유를 받고나서도 왜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소식을 듣지 못했을까요? 결국, 육체적인 나병의 치유가 그들 삶의 목표였기 때문이죠.
복권에 당첨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상시 간절히 바랐던 것이 돈 자체였고 갑자기 행운의 돈이 생기자 그 돈을 가지고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병환자 아홉 사람도 육체의 치유를 통해 그들 삶을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었던 나병환자만 병을 치유해준 하느님을 찬양하며,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주신 분께 감사드리고자 찾아와서 예수님과 인격적 만남을 갖게 됩니다. 그는 믿음을 통해 이제는 몸만이 아니라 나병환자로서 살았던 삶까지 치유를 받습니다. 참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감사의 정을 드리는 정도가, 영혼이 건강한 정도입니다”
-홍성만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어떤 마을에 들르십니다.
마침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멀찍이 서서, 소리 높여 외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이르십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집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그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으로 구원된 사람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 한 사람뿐입니다.
다른 아홉은 몸은 깨끗해졌지만 구원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영혼의 나병이 치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감사할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영혼의 나환자들입니다. 그들은 부족한 작은 것에 집착한 나머지 불평과 불만이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그런 나머지 주어진 큰 은혜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혹시 나도 부족한 작은 것 때문에, 크신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감사의 정을 드리는 정도가, 영혼이 건강한 정도입니다.
감사의 정을 잊지 않는 매일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평범한 일상에서의 감사
-이강건 신부님-
오늘 복음은 열 사람으로 표현되는 세상 사람들 중에서 감사할 줄 아는 한 사람을 등장시켜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열 사람으로 표현되는 세상 사람들 중에서 감사를 드린 사람은 한 사람이었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즉 감사를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우리가 일상을 얼마나 무감각하게 보내는지를 또한 알려준다.
마태오복음 5장 43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고 전해준다. 즉 세상사람들에게 똑같은 배려와 똑같은 사랑을 하시는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며 그러나 이에 감사하는 사람은 극소수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리도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일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은 나병이라는 큰 병을 앓고 있다. 그들이 치유되었다면 몸의 변화를 매우 크게 체험했을 것이다. 문드러지던 몸이 낫는다는 것은 매우 큰 변화이다. 그뿐 아니라 나병환자들의 비참한 삶에서 정상인의 삶으로의 변화 또한 매우 큰 변화이다.
나병환자들은 숨어서 생활해야 했고, 정상인의 삶의 터로 내려와 거리를 다닐 때에는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외쳐야 했다.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외쳤던 그들의 신세는 주님을 만나면서 더 이상 부정한 사람이 아니게 된다. 이런 매우 큰 변화를 체험했으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다면 얼마나 그들의 삶이 무감각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묵상할 수 있는 내용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 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오늘 복음에서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을 부각시키듯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도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을 부각시키신다.
오늘 복음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의 뜻을 읽을 수 있다. 이방인을 부각시킴으로 신앙인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계시는 것이다. 이웃을 이웃으로 받아들였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고 감사할 줄 알았던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서 신앙을 가졌다
는 신앙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주시는 것이다. 감사의 생활에서도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이 더 뛰어났고, 이웃을 받아들이는 이웃 사랑에서도 그들이 더 모범적이었다. 이런 내용을 알려주면서 신앙인인 우리들에게 더 분발할 것을 촉구하시는 것이다.
이제 신앙적 감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아주 큰 변화에도 감사할 줄 모르는 세상에서 우리 그리 스도인들은 평범한 일상 안에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열 명의 문둥병자
-김웅태 신부님-
오늘 복음[루가 17:11-19]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줄 알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교훈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레아 사이를 지나시다가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되었다. 이 열 명의 나병환자들 중에는 이상하게도 사마리아 사람이 하나 끼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천시해서 그들을 상종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만나서 이야기하지 않고 피하는 것이 마치 그들에게 공노가 되는 것처럼 멀리하는 처지였는데 열 명의 나병환자 중에 사마리아인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공통적인 불행에 처하게 되면, 서로가 "사람이다" 인간이라는 사실만을 중요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문둥병이라는 비극 속에서 서로가 고통받는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었을 뿐, 유대인이라든가, 사마리아인이라는 구별을 잊어버리고 함께 같은 처지를 마음 아파하면서,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서로도 하느님 앞에 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의식하고 있을 때, 타인을 멸시하거나 할 수 없고 서로를 용서하고 함께 손을 잡고 살 수 있으며, 진정한 기도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사람이 어떤 은혜를 누구에게 받은 다음에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즉, 복음서 가운데 이 장면에서처럼 인간의 배은을 신랄하게 묘사한 곳이 없다고 할 정도이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알고 못견디게 부르짖었다.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사제들에게 자기 몸을 보이러 가는 도중에 낫게 해 주셨다. 그런데 자신들이 평생의 절망이요, 살아있지만 죽은 목숨과 같은 그 무서운 문둥병에서 해방시켜주신 은혜를 모두 받았으나, 은혜 받은 것을 알았을 때, 예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유대인들이 아니고, 죄인이라고 멸시 받아왔던 사마리아인이었다고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 은혜 받은 적이 없는가? 받았다면 얼마나 진정 감사하는 마음이 얼마만큼 있는가? 누구는 그럴 것이다. 내가 하느님 덕본 것이 무엇이 있기에 그분에게 그토록 감사할 것이 있는가? 나는 내 노력으로, 내 힘으로 여유있게 살아가는데, 그분의 도움도, 그분께 감사할 것도 없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그러한 자신이 자신 만만한 존재인가? 자신의 살아있는 목숨부터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처지에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감사가 먼저입니다.
-장재봉 신부님-
하느님의 자비가 풍요로우심은 생각할수록 놀랍기만 합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 하느님께서는 약자를 ‘편애’하신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다”(탈출 22,22)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니까요. 오늘 치유를 받은 열 사람의 나병환자 가운데 아홉 명은 아마도 사제에게로 갔을 것입니다.
그것은 틀린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일러주셨으니까요. 열에 아홉은 다수결 원칙에 따르면 우위입니다. 열 가운데 아홉이 원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곧 옳은 것이고 정의라고 믿는 것이 세상의 잣대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열에 하나에 불과하지만 먼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잣대가 세상의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외롭고 때로는 고독합니다. 하지만 소수일지라도 그것이 변치 않으시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는 일이라면 강합니다. 절대 꺾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믿음의 힘입니다. 오늘 홀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셨는지요? 그리고 무엇을 감사하셨는지요? 그분께 엎드려 감사할 것이 지금, 이렇게 온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우리들이 허공만 쳐다보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곤란하지요.
수험생을 위한 기도
-임종심-
우리 성당 근처에 입시학원으로 유명한 종로학원이 있어서인지 주일날 청년미사에 수험생들이 많이 온다. 본당 신부님과 종로학원에서 가르치는 두 분 신자 선생님의 도움으로 4년째 수험생을 보살피고 있다. 고해성사도 보고, 냉담하는 수험생들이 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배려하며, 봄에는 삼겹살 파티도 한다.
매년 수능 전날 미사에서 수험생들에게 일일이 안수해 주고 십자가나 기적의 패를 목에 걸어준다. 미사 후에는 구역에서 정성껏 준비한 저녁식사를 수험생들과 함께 나누며 1년 내내 수능이라는 굴레에서 마음 졸이고 힘들어한 그들을 격려한다. 시험이 끝나면 모두 뿔뿔이 떠나겠지만 결코 이 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내일 수능을 치를 수험생들의 마음이 무척 초조하고 불안할 것이다. 지금 수험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쪼록 침착하게 시험 잘 치르고 그동안 노력한 모든 수고가 좋은 결실을 맺기를 바라며 수험생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
‘지혜라는 큰 복을 주신 주님! 모든 수험생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수능을 준비하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장차 미래의 큰 일꾼이 될 수험생들이 수능이라는 뚜렷한 목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조금 더 시야를 넓혀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여여(如如)한 마음으로 큰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하여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볕돋?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감사하는 삶
-강영구 신부님-
그들 중 한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께 돌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루가 17,15-18)
사랑하는 예수님,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까지 나음을 받고 새 삶을 시작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뿐입니다.
그는 감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나머지 아홉은 육신의 상처는 치유 받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병들어있습니다.
감사는 행복과 기쁨을 만들어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하면 행복합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에 감사하고, 잠을 깨우는 새소리에 감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까이 있음에 감사하고, 곱게 물든 나무 잎과 아름다운 국화 때문에 감사하고, 계절의 변화에 감사하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 우리 삶은 행복하고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불평과 불만은 불행과 고통을 만들어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괴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고 불평하고, 밝아오는 새날을 어떻게 살까 염려하고 걱정하며 투덜대고, 가까이 있는 가족과 이웃을 귀찮아하고, 떨어져 수북이 쌓이는 낙엽 때문에 투덜대고, 국화가 너무 아름답다고 불평하고,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고 투덜대면 사는 것이 괴롭고 불행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데살5,16-18)
인생은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두 번의 기회는 없습니다. 유일회적인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늘 행복합니다.
예수님, 우리를 행복의 나라로 초대해주신 당신께 감사드립니다.(一明)
감사에 더디고 파티에 익숙한 우리들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예수께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치신 오늘 복음의 기적사화는 루가복음만의 고유한 사료이다. 루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9,51-19,28)를 엮어가면서, 예수께서 상경 길에 있다는 사실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9,51.53; 13,22.33; 17,11; 18,31; 19,11.28) 뿐만 아니라 베레아 지방을 통해 가시면서 오늘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지방을 언급한 이유는 나병환자 열사람 중에 이방인으로 취급받던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이 상당히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지나간 복음들에서 드러났다. 애당초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예루살렘 상경계획을 잡았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를 제자들이 꼽게 여겨 하늘의 불을 내려 태워버리자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초연히 우회로를 택하셨다.(9,52-56)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10,29-37)에서도 예수님의 호의적 속내가 드러난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 열 사람의 치유사화에서도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이 돋보인다.
구약성서에서는 사제들이 나병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악성 피부병들을 부정함으로 규정하고 그 환자들을 격리시켜 살게 하였다. 그들이 완치되었을 경우, 자신의 피부를 사제에게 보여 정함으로 인정받아야 했다.(레위 13장) 사제가 정함을 선포하면 병이 나은 자는 사제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의 장막에서 복잡한 ‘정화예식’을 치러야 했다.(레위 14,2-14) 하루도 아니고 8일씩 걸리는 이 예식이 얼마나 복잡하고, 사실 골치 아픈 것인지는 레위기의 이 대목을 꼭 읽어보아야 한다. 이 대목을 읽고나면 나병환자 10명 중에서 유대인이었던 9명의 배은망덕한 행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악성 피부병자들이 마을 중심과 격리된 어귀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마을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쉽게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치유의 자비를 청했다. 사실 예수께는 어떤 병이든 치유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병자들이 사제들로부터 치유를 인정받고 공식적인 정화예식을 치름으로써 가족들과 함께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사제에게 가는 도중에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10명중에서 9명은 유대인이었다. 그들이 나병환자로 격리되어 지내는 동안 살아서는 결코 그들 가족과 동족에게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낫게 된다면 율법이 규정하는 ‘정화예식’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그 예식을 치러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수백 번을 뇌까렸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치유된 것을 확인하는 순간, 더 힘차게 사제들에게 달려갔을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바로 이방인으로 간주되는 사마리아 사람은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예수께로 돌아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제대로 치유를 받은 사람이 된 것이다.
과연 깨끗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법(法)이 사람을 깨끗하다고 선포한다 해서 깨끗하게 되는 것인가? 깨끗하고 흠 없이 산다는 것은 사람의 인정을 받기보다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삶이다. 정화예식은 천천히 치러도 늦지 않다. 그러나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발걸음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분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자신의 길을 가야 하시는 것이다. 오늘 9명의 유대인들 속에서 찬양과 감사에는 더디고, 축하파티에는 잽싸고 익숙한 우리들 자신을 본다. 감사와 찬양에는 정한 날 없이 미루고, 파티와 회식과 약속에는 열 손가락이 모자라는 우리들이 아닌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두 배의 기쁨으로 삶을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