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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2년 8월 7일 주일 오후 예배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설교
제20주일
성경낭독 : 시 50:1-8, 22-23; 히 11:1-3, 8-16
본문 : 고전 2:6-12
제목 : “성령님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것”
주일 오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92편 1,3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19편 3 (고정)
설교 후 찬송 – 시 119편 13,14,15
폐회찬송 – 시 102편 9 (고정)
제 20주일
53문 : 성령께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 첫째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그분은 또한 나에게도 주어져서
나로 하여금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하며
나를 위로하고 영원히 나와 함께하십니다.
성령님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것
저는 고등학교 때까지 교회를 열심히 다니지는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신앙은 대학에 들어서야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청년회에 들어가서 교회 생활을 제대로 시작했을 때, 당시 청년들, 특히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CCC를 통하여 불었던 ‘대학생 전도’의 붐이 일어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청년들은 어느 교회건 막론하고 대부분 부산역 앞에, 구포역 앞에 나가서 전도를 했고, 어느 동네를 가더라도 주일 오후 정도에는 기타를 치면서 복음송을 부르고 어깨에 “예수 믿으세요” 같은 띠를 띤 청년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눠주는 모습을 늘상 볼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청년이 되어 교회 선배들로부터 전도방법을 배워서 길거리로 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저를 가르쳤던 청년회 선배는 사람들에게 첫 도입부를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XX대학교 대학생들입니다. 설문조사를 잠깐 하려고 하는데 시간을 잠시 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청년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신앙을 잘 해 보려는 열의로 불타고 있었지만, 저는 그때에도 이런 방식의 전도법에 대해 의구심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 교회 청년들 중에는 대학생이 아닌 사람들이 많았는데 일괄적으로 모두 “저는 XX대학교 대학생입니다”라고 말하게 가르쳤고, 또 저희가 사람들에게 대화하려는 내용 역시 ‘설문조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막 대학생이 되었던 제 마음속에는 “전도를 하기 위해서라면 거짓말을 해도 괜찮은 것인가?”라는 의구심이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당시 대학생들은 오늘날의 신천지들과 비슷했습니다. 신천지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거짓말하는 것을 ‘모략’이라고 하면서 거짓말을 해도 죄책감을 갖지 않죠. 그때의 청년들은 이런 점에서 신천지와 비슷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전도 행위가 ‘거짓말을 한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많았지만 복음 전파의 내용에 있어서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때 대학생들은 주로 4영리로 전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4영리는 여러분들도 잘 알다시피 치명적인 결격 사유들이 있는 전도법입니다. 예를 들면 “교회론이 없다”와 같은 문제도 있지만, 좀 더 본질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20주일을 다루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문제를 말해 보자면, 이 4영리에는 ‘믿음’에 대한 오해가 담겨 있습니다. 말하자면 4영리는 “내가 당신 이야기를 들어보니 믿을만한 것 같소. 한 번 믿어보지요”라고 말하는 것을 ‘진짜 믿음’이라고 혼동하는 것입니다.
4영리는 전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라고 말하면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섣불리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점은 ‘불신자가 생각하는 복음’과 ‘신자가 말씀을 통해 배우게 되는 복음’은 아예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라는 점입니다. 불신자는 세상의 관점에서 복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가 이해하는 복음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간에 오해가 있습니다. 하지만 4영리는 오히려 이것을 부추기면서 그 불신자가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대신 ‘참된 믿음’인 것으로 장려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곧 4영리가 가르치는 복음은 ‘나의 결심’과 ‘믿음’을 혼동하지만, 사실은 ‘믿음’이란 우리 바깥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며, 절대로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잠깐 서서 10분 정도 이야기를 듣고 “그럴듯한데?”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믿음’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믿음은 절대로 ‘그럴 듯한 이야기에 대한 나의 결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 점!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동력이 되는 이 ‘우리 바깥으로부터 오는 믿음’이라는 것을 생각하려 할 때 필수적으로 기억해야 하는 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이 주제를 우리는 이렇게 정리를 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한 신학자의 표현을 잠깐 빌리겠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성령의 사역인 믿음을 선물로받았기 때문이다. 성령을 다루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혜가 필수적이다. 하나님께 붙들리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파악할 수 없다.”
이런 문장은 논리적으로 보자면 ‘순환논법’에 해당합니다. 순환논법이란 “A가 참인 근거는 B인데, B가 참인 근거는 A이다”라는 식의 논법을 말합니다. 방금 제가 읽어드린 문장은 그런 점에서 참으로 순환논법입니다. “성령님을 알려면 성령님께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야 합니다.”
아마도 논리적으로만 말하자면 그렇게 말해야 하겠죠. “아니, 성령님을 몰라서 알려고 하는데 성령님께 뭘 받아야만 한다면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이오?” 맞습니다. 그래서 삼위 하나님은 ‘알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어떠한 논리적 구조로 삼위 하나님이 알아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옵니다. 즉 삼위 하나님을 아는 절대적인 키, 단 하나밖에 없는 절대 반지가 바로 ‘믿음’인데, 이 ‘믿음’은 우리 속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탐구하고 열망한다고 해서 쟁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직 믿음은 선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곧 성령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선물로 주어지는 믿음 외에는 어떤 방식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오직 이 믿음을 통하여서만 하나님을 알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에 대한 주제가 오늘 20주일의 내용인데, 오늘 우리가 들을 말씀의 핵심이 무엇이냐?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속의 어떠한 것이 아니라, 전혀 우리 바깥에 계신 분으로서, 우리들에게 하늘의 선물로 믿음을 내려 주시고, 그 믿음을 통해서 삼위 하나님을 믿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역할이요, 작용이요, 능력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듣도록 하겠습니다.
성령님은 무엇을 주시는 분이신가?
고린도전서 2장의 가르침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고린도전서 2장 10절 말씀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그 바로 앞 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우리는 이 9절 말씀이 10절과 대조되어 있다는 것을 즉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눈으로도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말했던 ‘믿음의 특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을 우리들에게 주시되, 그 주시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도, 귀에 들리는 것도, 사람의 마음에 생각되는 것도” 아닙니다. 10절 말씀은 이에 대한 반대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우리말로는 “오직”이라고 번역했지만, 여기 접속사는 “그러나”에 가깝습니다. 즉 9절과는 대비되게, 사람의 눈과 귀와 마음으로 알 수 없는 것을 “오히려”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한글 성경으로도 충분히 짐작하시겠지만, 여기 “우리에게 보이셨다” 할 때의 “보이다”라는 것은 ‘계시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헬라어로 ‘아포칼립토’라고 하는데, 아주 유명한 영화도 있으니 아마 들어보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헬라어로는 ‘드러내다’, ‘감추인 것을 폭로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는 ‘계시하다’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즉 9절과 10절의 연계는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해 두신 것들”을 “사람의 눈으로도, 귀로도, 마음으로도” 알 수 없도록 하시고, 오히려! 대신! 성령님을 통하여 알려주셨다, 혹은 뚜껑을 벗겨 폭로하셨다, 곧 계시하셨다......이것이 9절과 10절의 연계의 의미입니다.
무얼 주시는가?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성령님을 통해 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9절에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이라고 했는데 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란 게 무엇입니까? 우리는 눈으로도, 귀로도, 마음으로도 가질 수 없는 것을 ‘성령을 통하여’ 받는데, 그 받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을 조금 더 올라가서 앞의 말씀들을 보도록 합시다. 바로 답이 나와 있습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7절 말씀을 잘 보시면, 우리가 9절과 10절에서 말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6절 말씀은 아까 우리가 살핀 것과 9절과 10절과의 연계와 비슷한 방식으로 말합니다. 6절은 9절과 비슷하게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9절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 못하였다”와 비슷한 어법입니다.
그리고 7절에서는 이것이 “감취었던” 것이지만, 이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9절), 그래서 “눈으로, 귀로, 마음으로” 알 수 없었던 것, 그것은 무엇입니까? 7절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선물이 있는데, 이것은 “비밀한 지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비밀한 지혜를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의 눈으로도, 귀로도, 마음으로도 얻을 수가 없으니, 그것을 10절에서 “그러나/오히려 하나님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셨다, 곧 계시하셨다......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함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게 됩니다.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밝혀 놓고 보면, 이제 이 앞의 내용, 곧 고린도전서가 시작부에서부터 계속해서 이 고린도 교회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하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1장 18절을 보십시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우리가 조금 전에 살핀 내용들을 이해하면서 이 말씀을 보면 너무 이해가 잘 됩니다.
왜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됩니까?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이 선물은 “사람의 눈으로, 귀로, 마음으로 알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이 “비밀한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무언가로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요!
이어서 1장 21절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약함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는 복음!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은 자기 지혜로 이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합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전도의 미련한 것”,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복음 설교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복음은 세상이 자기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고, 오직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깨우침을 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23절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그렇습니다! 복음의 정수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인데, 세상은 결코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를 “거리끼는 것”으로 여기고, 이방인들은 이를 “미련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29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고 2장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우리가 이 말씀들의 연계를 보면서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것! 10절 말미를 보십시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곧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깊은 것”을 파악하여, 우리들에게 부어주시는 것!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는 것! 우리들에게 계시해 주시는 것! 그것은 세상이 생각하기에 지혜로운 것들과 전혀 다릅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오히려 그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이고, 그것이 세상의 사람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거나 미련한 것인데, 우리들에게 “복음의 능력”이 되는 이유는, 여기에 ‘성령님께서’ 작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눈, 우리들의 귀, 우리들의 마음으로 보면, 이 복음의 비밀은 거리끼는 것이거나 미련한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물로 우리들에게 성령님을 통하여 이 “비밀한 지혜, 비밀한 지식”(2:7)을 알려주심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그 하나님의 깊은 것을 우리도 통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삶에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 속에 오시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것은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비밀한 지식’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배울 수도 없고, 직장 선배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도 없는,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비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바로 우리 속에 이런 지식이, 이런 지혜가 샘솟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의 도! 곧 낮아지고, 죽어지고, 비워지는 일을 통해서 이 세상을 항거하는 참 그리스도인의 비밀의 진리, 곧 복음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수긍이 되고’, ‘이해가 되고’, ‘동의가 되고’, ‘참여가 되는’ 것은 오직 성령님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성령님을 받은 성도, 성령님을 받은 교회라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이 무리들은 어떤 무리들이겠습니까? 비밀한 지식을 전수받은 자들은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우리는 진실로 작은 예수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일까요?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이 우리들의 본성과 몹시도 거슬러지지만, 이것이 가능하게 되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 이 마음들이 수긍되고 이해되게 하시는 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아침과 저녁으로 끊임없이 이 마음을 일으켜 주시는 성령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누구시냐?
한 마디로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고, 마음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분
십자가의 도가 더 이상 멸망할 자들에게서처럼 거리끼는 것이나 미련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이 되도록 만들어 주시는 분”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비밀한 지식을 전수해 주시는 분이신 성령님”입니다.
성령의 사역 : 참여, 우리가 그분속에 그분이 우리 속에
고전 3장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우리에게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지혜’를 주시는 성령님께 대하여,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지를 “우리가 집이 된다”는 개념을 통해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성령님의 사역을 떠올리실 때, 아주 좋은 그림 중 하나는 우리 인격 전체를 ‘커다란 집’으로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커다란 집에는 일반적으로는 주인이 ‘나’ 혹은 ‘자아’인데, 성령님께서 오시는 경우, 이 집의 주인이 변합니다. 이것을 말씀을 통해 살펴봅시다.
바로 다음 장인 고린도전서 3장을 보겠습니다. 아주 유명한 “성령의 전”이라는 말씀이 16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이 말씀은 놀랍게도, 성경이 본래 말씀하고 있는 것의 정반대로 이해되는 아주 대표적인 말씀들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께서 내 속에 계신다고 하니까 마치 성령님이 나의 소유물 중 하나인 것처럼 흔히 착각을 합니다. 쉽게 이야기해 보자면 성령님께서 내 속에 계신다고 하니까 성령님을 나의 느낌, 나의 감정과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흔히 하는 이야기가 기도한 후에 어떤 마음이 불쑥 들 때 그것을 무작정 ‘성령께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거나, 심지어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고 압박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 말씀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잠깐만이라도 생각해 보시면 쉽게 이 말씀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아주 쉽게 이런 방식으로 말해 봅시다.
“여러분은 내가 집이고 거기 거하시는 분이 성령님이라고 한다면, 내가 성령님을 장악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인가, 성령님이 나를 장악하신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정상인가?”
다르게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성령님의 전이라면, 그건 집 주인이 성령님이라는 뜻인가, 집인 내가 성령님의 주인이라는 뜻인가?”
이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여러분! 이 말씀의 문맥이 무엇입니까? 3장 16절 말씀의 “너희가 하나님의 전이다”라는 말씀은 어떤 맥락에서 나왔나요? 이 말씀은 칭찬일까요? “너희가 성령님의 전이라니 놀랍구나!” 이런 말씀일까요?
이 장의 첫 부분을 보십시오. 바울 사도께서는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1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왜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합니까?
고린도 교회가 아주 유명한 교회였기 때문이죠. 그것이 1장과 2장에 나옵니다. 고린도 교회는 ‘다투고 분쟁하는’ 교회였습니다. 1장에 보시면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나는 게바파다, 심지어 나는 그리스도파다”라고 하면서 나뉘어 싸웠고(1:12), 또 고린도전서 전체에서 나타나듯 고린도 교회 안에는 은사의 문제, 음행의 문제, 우상 제물의 문제, 성도간의 소송의 문제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사도께서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내가 너희를 대하는 것을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할 수 밖에 없다”고 하신 것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3장 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육신에 속한 자!”라고 불리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배경 하에서 다시 16절을 읽어 보십시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왜 사도께서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했는지 선명해지지 않습니까?
이것은 “너희는 멋진 하나님의 성전이야”라는 의미가 절대로 아닙니다. 이 말씀은 ‘책망’이지요! 이것은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인데 왜 그 따위로 살고 있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참된 의미는
“너희가 집이고, 성령님이 주인이신데, 왜 너희는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냐?
성령의 집이면, 성령의 집 답게 살아야 한다!”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집이 된다는 것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의 비밀한 지혜를 알려주시는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거하신다고 할 때, 성령의 전인 우리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순종’입니다.
성령님께서 비춰주시는 저 믿음의 행로를 따라 가기 위하여, 자기의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눈은, 우리의 귀는,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세상을 좇고,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 “거리끼는 것”이나 “미련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하나님의 비밀한 지혜를 비춰주시므로, 우리는 이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처럼 책망 받지 아니하고 그분께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가 집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신 성령님께 순종을 드리는 것’입니다.
정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