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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씨의 시조 4
곡산연씨(谷山延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연씨(延氏)는 본래 중국(中國) 남양(南陽)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 고려(高麗) 때 홍농(弘農) 출신인 연계령(延繼苓)의 7세손 연수창(延壽菖)이 제국대장 공주(齊國大長公主 : 고려 충렬왕비)를 배종(陪從)하고 고려에 들어와 곡산(谷山)에 정착(定着)하게 된 것이 우리나라 연씨(延氏)의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후 11세손 주(柱)가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올라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곡성군(谷城君)에 봉해졌으며, 주(柱)의 아들 사종(嗣宗)은 판한성 부사(判漢城府事)를 거쳐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역임하고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계령(繼苓)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곡산(谷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文獻)에는 연씨(延氏)의 본관(本貫)이 곡산(谷山) 외에도 개성(開城)․광주(廣州)․남양(南陽)․서원(西原 : 청주 별호)․충주(忠州) 등 36본이 전하나 이는 모두 곡산 연씨(谷山延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현재의 연씨(延氏)는 곡산(谷山) 단일본으로 전한다.
수창(壽昌)의 아들 경(鏡)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과 태사(太師)를 역임한 명신(名臣)이었으며, 당대의 문장가(文章家)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숙종(肅宗) 때 문장가(文章家)로 유명하였던 최적(最績)은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1682년(숙종 8)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올라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으나 당쟁(黨爭)이 격화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學問)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근대(近代)에 와서는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덕물포(德物浦)와 삭녕(朔寧)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 의병대장(義兵大將) 기우(基羽)와,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의 중심 인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병호(秉昊) 등이 곡산 연씨(谷山延氏)의 가문(家門)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곡산 연씨(谷山延氏)는 남한(南韓)에 총 6,300가구, 27,058명이 살고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곡산연씨(谷山燕氏)
곡산연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966가구 3,20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이상이다.
개성염씨(開城廉氏)
개성염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97가구 1,21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이상이다.
경주염씨(慶州廉氏)
경주염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68가구 1,20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이상이다.
나주염씨(羅州廉氏)
나주염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12가구 1,04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이상이다.
용담염씨(龍潭廉氏)
용담염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84가구 1,26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이상이다.
창녕염씨(昌寧廉氏)
창녕염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76가구 1,17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이상이다.
파주염씨(坡州廉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파주 염씨(坡州廉氏)는 중국(中國) 교목세가(喬木世家)의 후손(後孫) 염형명(廉邢明)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으며, 그는 후당(後唐)의 국정이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신라(新羅)에 들어와 봉성(峰城)에 자리잡은 뒤 대사도(大司徒)를 지내면서 뿌리를 내렸다.
그후 고려(高麗) 때 와서 후손 한(漢)이 문종(文宗) 때 무신(武臣)으로서 동해(東海)에 침입해 온 해구(海寇)를 격퇴하였고, 북변(北邊)을 침범한 동번족(東蕃族)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병부 상서(兵部尙書) ․상주국(上柱國)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현손(玄孫)으로 전하는 신약(信若)은 명종대(明宗代)에 이름 난 명신(名臣)이었다.
충렬왕(忠烈王) 때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을 지낸 승익(承益)의 손자(孫子) 제신(悌臣)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원(元) 나라에 가서 평장사(平章事)로 있는 고모부 말길(末吉)의 집에서 수학(修學)하며 원(元)나라 태정황제(泰定皇帝)의 총애를 받아 정동성 낭중(征東省郎中)의 벼슬을 받고 돌아와 충숙왕(忠肅王)의 신임을 받았으며, 뒤에 여러 벼슬을 거쳐 1354년(공민왕 3) 좌정승(左政丞)에 올랐다.
그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어 권신 신 돈(辛 旽)과 김흥경(金興慶) 등의 모함을 받았으나, 공민왕(恭愍王)은 끝까지 그를 신임했고, 우왕(禑王)이 즉위하자 영삼사사(領三司事)와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를 지냈으며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제신(悌臣)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처음에는 봉성(峰城)으로 하였다가 곡성(曲城)으로 개관(改貫)하였으나 곡성현(曲城縣)이 서원(瑞原)으로 개칭(改稱)됨에 따라 다시 서원(瑞原)을 본관(本貫)으로 삼았고, 조선 연산군(燕山君) 때 와서 서원(瑞原)이 다시 파주(坡州)로 개칭(改稱)됨에 따라 현재(現在)의 파주(坡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
를 이어왔다.
염씨(廉氏)의 본관(本貫)은 파주(坡州)를 포함하여 광주(廣州)․개성(開城)․순창(淳昌)․담양(潭陽) 등 83본(本)까지「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었으나 모두가 파주 염씨(坡州廉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전한다.
가문의 대표적 인물(人物)을 살펴보면 제신(悌臣)의 아들 3형제가 뛰어났는데, 맏아들 국보(國寶)가 공민왕(恭愍王)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후 서성군(瑞城君)에 봉해졌고, 둘째 흥방(興邦)도 충목왕(忠穆王) 때 서성군(瑞城君)에 봉해진 후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엇으며, 특히 학문(學問)에 뛰어나 여러 번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막내인 정수(廷秀)는 1371년(공민왕 20)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벼슬이 동지밀직(同知密直)․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염씨(廉氏)는 주로 고려조(高麗朝)에서 훌륭한 인물(人物)을 배출시켜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증(憎)과 서산 군수(瑞山郡守)와 단천 부사(端川府使)를 역임한 상항(尙恒), 상호군(上護軍) 종항(從恒)등이 뛰어났고,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공(功)을 세우고 선무이등공신(宣武二等功臣)에 책록된 걸(傑)과 서(瑞)는 명문인 파주 염씨를 빛냈다.
그외 세경(世慶)과 경(慶)․제립(珶立)․홍립(弘立)도 함께 창의(倡義)하여 임진왜란 때 공(功)을 세웠으며, 효자(孝子)로 이름난 상렬(相烈)․호(鎬)․진기(鎭基)․성대(性大)와 한 말(韓末)에 광복군 사친 온동(溫東) 등이 가문(家門)을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파주 염씨(坡州廉氏)는 남한(南韓)에 총 12,099가구, 51,14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파평염씨(坡平廉氏)
파평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92가구 1,37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이상이다.
부계․의흥 예씨(缶溪․義興芮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예씨(芮氏)는 중국(中國)에서 왔다고 하나 정확한 문헌(文獻)이 없어 선계(先系)를 알 수 없다.
의흥 예씨(義興芮氏)의 시조(始祖) 예락전(芮樂全)은 문장(文章)과 덕망이 뛰어난 석학(碩學)으로 고려 인종(仁宗)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냈으며, 부계(缶溪 : 의흥의 옛 지명)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의흥(義興)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에 의하면 예씨(芮氏)의 본관(本貫)은 의흥(義興) 외에도 수원(水原), 남양(南陽), 청풍(淸風) 등 18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세거지(世居地)를 나타낸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의흥(義興) 단본으로 전한다.
조선(朝鮮) 초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승석(承錫)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락전(樂全)의 8세손으로 세종(世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의 아들 충년(忠年)은 1475년(성종 6)에 문과(文科)에 올라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외에도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한 인상(仁祥)과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낸 몽진(夢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흥래(興來) 등이 유명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부계․의흥 예씨(缶溪․義興芮氏)는 남한(南韓)에 총 2,424가구, 9,4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도예씨(淸道芮氏)
청도예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42가구 1,07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이상이다.
강화오씨(江華吳氏)
강화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178가구 6,53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경주오씨(慶州吳氏)
경주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949가구 6,029명이 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성오씨(固城吳氏)
고성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944가구 2,75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와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창오씨(高敞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고창 오씨(高敞吳氏)의 시조(始祖) 오학린(吳學麟)은 고려(高麗) 정종(靖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한림원 학사(翰林院學士)를 지냈으며, 외적(外敵)을 토평한 공으로 고창(高敞)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고창(高敞)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의 아들 질(質)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고, 질의 아들 세문(世文)은 승보시(陞補試)에 장원(壯元)한 후 동각시학(東閣侍學)에 이르렀다. 세문의 형(兄) 세공(世功)과 동생 세재(世才)도 당대의 이름난 학자였는데, 시(詩)와 서예(書藝)에 조예가 깊었던 세재(世才)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이인로(李仁老) 등과 교우관계를 두터이 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하였다.
세문(世文)의 증손인 계유(季孺)는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때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삼중대광 도첨의찬성사(三重大匡都僉議贊成事)를 지내고 모양군(牟陽君)에 봉해졌으며, 계유(季孺)의 손자 엄(淹)이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경기도 수군절도사(京畿道水軍節度使)와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으며, 엄(淹)의 손자 원찬(原纘)은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다.
그밖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장(義兵將)으로 활약하였던 운(澐)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도 커다란 공을 세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근대 인물(近代人物)로는 3․1운동(運動)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으로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앞장 선 화영(華英)이 가문(家門)을 빛냈는데, 특히 그는 목사(牧師)로서 신앙부흥운동과 민족정신함양에 노력하였으며 조선민족당(朝鮮民族黨) 당수(黨首)와 한중협회(韓中協會) 회장(會長) 등을 지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창 오씨(高敞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6,380가구, 27,7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주오씨(公州吳氏)
공주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90가구 1,27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군위오씨(軍威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군위 오씨(軍威吳氏)의 시조(始祖) 오숙귀(吳淑貴)는 현좌(賢佐)의 둘째 아들로 고려(高麗)에서 벼슬하면서 군위군(軍威君)에 봉하여졌다. 따라서 그의 후손들이 군위(軍威)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며 동복 오씨(同福吳氏)에서 분적(分籍)한 뒤 본관(本貫)을 군위(軍威)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家門)을 빛낸 인물을 살펴보면 숙귀(淑貴)의 7세손 광계(光桂)가 고려에서 부위(副尉)를 역임했고, 광계(光桂)의 아들 경안(景安)이 천호(千戶)를 지냈다.
조선조(朝鮮朝)에서 성(晟)은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용맹을 떨쳤고, 석효(錫孝)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으며, 도환(道桓)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그 밖에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낸 도태(道泰)와 명기(命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재운(在運) 등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군위 오씨(軍威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5,067가구, 21,71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성오씨
금성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480가구 4,90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김해오씨(金海吳氏)
김해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40가구 1,05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나주오씨(羅州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중엽에 진사(進士)를 지낸 오숙규(吳淑珪)로 전하며,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한 언(偃)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선조(先祖)들의 정착 세거지(定着世居地)인 나주(羅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언(偃)의 5세손인 자치(自治)는 조선(朝鮮)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1467년(세조 13)에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록된 뒤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냈고 나성군(羅城君)에 봉해졌다.
또한 선조(先祖) 때 우의정(右議政)에 오른 겸(謙)은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후 남원부사(南原府使)를 거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이르고 금양군(金陽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예조판서(禮曹判書)․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올라 궤장(几杖)을 하사받았으며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어「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외에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주사고(全州史庫 : 실록을 보관하던 서고)의 실록(實錄)을 병화(兵火)로부터 잘 보존하는데 공(功)이 큰 희길(希吉)과, 학행(學行)이 뛰어났던 효석(孝錫) 등이 가문(家門)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나주 오씨(羅州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6,003가구, 26,24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낙안오씨(樂安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낙안 오씨(樂安吳氏)의 시조(始祖) 오사룡(吳士龍)은 고려(高麗) 때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내고 외적(外敵)을 토벌한 공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고 낙안군(樂安郡)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後孫)들은 낙안(樂安)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8세손 척지(陟之)가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 경연관(經筵官)을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가문의 인물을 살펴보면 척지(陟之)의 아들 백안(伯顔)이 세조(世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등을 역임하였으며, 손자 원로(元老)가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광주목(光州牧)의 교수(敎授)를 지냈다.
이외에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라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된 철검(哲儉),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던 경홍(景弘)․경의(景毅) 형제와 희기(喜麒), 그리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공을 세워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석성군(石城君)에 봉해진 연(連)이 있다.
무신(武臣)으로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 참군(訓鍊參軍)을 지낸 흡(洽)과 역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역임한 시준(時俊),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덕근(德根)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낙안 오씨(樂安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1,774가구, 7,4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원오씨(南原吳氏)
남원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58가구 1,15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동복오씨(同福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동복 오씨(同福吳氏)는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거란을 토평(討平)한 공(功)으로 동복군(同福君)에 봉해진 오 녕(吳 寧)을 시조(始祖)로 하고 동복(同福)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녕(寧)의 손자 대승(大陞)이 원종(元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시중(侍中)에 이르렀으며, 증손 광찰(光札)이 대장군(大將軍)을, 5세손 선(璿)이 판판도낭사(判版圖郎事)를 거쳐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고, 6세손 잠(潛)이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거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귀성군(龜城君)에 봉해져 대대로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조선(朝鮮)에 와서는 세현(世賢)의 아들 억령(億齡)과 백령(百齡) 형제가 유명하였는데, 억령(億齡)은 선조(宣祖) 대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當)에 뽑히고 그후 대사헌(大司憲)을 5회, 형조판서(刑曹判書)를 3회나 역임하였으며, 관직생활 동안 근검․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문장(文章)과 서예(書藝)에 탁월한 재질(才質)이 있었다.
그의 동생 백령(百齡)도 선조(宣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광해군(光海君) 때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복천군(福川君)에 봉해지고 인조(仁祖) 때 도승지(都承旨)․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 ․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이들 형제의 후손들이 모두 현달(顯達)하여 가문(家門)을 번성시켰는데, 억령(億齡)의 세아들 익(翊 : 승지를 역임)․정(靖)․전(전 : 교리와 지평을 역임)이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한가(文翰家)로 이름을 날렸다.
뿐만 아니라 백령(百齡)의 맏아들 준(竣)이 효종(孝宗) 때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지춘추관사(知春秋官事)가 되어「인조실록(仁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그후 대사헌(大司憲)․좌참찬(左參贊)을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고 문장(文章)과 글씨에 능했으며, 둘째 아들 단(端)은 인평대군(麟平大君 : 효종의 동생)의 장인(丈人)으로 장령(掌令)․전주부윤(全州府尹)을 거쳐 황해
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단(端)의 아들 모두가 뛰어나 정일(挺一)은 인조(仁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고 도승지(都承旨)로서 「효종실록(孝宗實錄)」 편찬에 참여한 후 각 도(道) 관찰사(觀察使)․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으며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과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다.
정위(挺緯)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각 도(道) 관찰사(觀察使)와 각 조(曹)의 판서(判書)를 두루 역임하고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 갔으며, 정창(挺昌)은 지평(持平)․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또한 백령(百齡)의 증손들도 매두 뛰어나 정일(挺一)의 아들인 시만(始萬)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교리(校理)와 이조좌랑(吏曹佐郞)․승지(承旨) 등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고, 정원(挺垣)의 아들 시수(始壽)가 현종(顯宗) 대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하여 수찬(修撰)․교리(校理)․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거쳐 남인(南人)의 거두(巨頭)로 우의정(右議政)을 지냈으며, 정규(挺奎)의 아들인 시복(始復)도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대사간(大司諫)과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으며 글씨에 능했다.
이외에도 광운(光運)은 대사헌(大司憲)․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예조참판(禮曹參判) 등을 역임했으며, 대익(大익益)은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덕영(德泳)은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동복 오씨(同福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11,977가구, 50,6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부오씨(東部吳氏)
동부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088가구 3,49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보성오씨(寶城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보성 오씨(寶城吳氏)의 시조 오현필(吳賢弼)은 수권(守權)의 셋째 아들로 고려(高麗)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고종(高宗) 대 형(兄)인 현보(賢輔)․현좌(賢佐)와 함께 거란(契丹)을 토평(討平)한 공으로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졌다. 따라서 그의 후손들은 보성(寶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의 손자 한경(漢卿)은 삼사우사(三司右使)를 거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냈고, 6세손 사충(思忠)이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과 좌상시(左常侍)를 역임하였다.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사충(思忠)은 좌명개국삼등공신(佐命開國三等功臣)이 되었고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를 지냈다.
현필(賢弼)의 7세손 천복(天福)도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하고 보성부원군(寶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천복(天福)의 아들 점(漸)이 조선(朝鮮)에서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여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고려 말(高麗末)에 대장군(大將軍)을 지내고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는데 공을 세운 몽을(蒙乙)은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되었고,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를 역임하였으며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졌다.
자경(子慶)은 단종(端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지내고 이어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이등공신(敵愾二等功臣)으로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졌으며, 고원 군수(高原郡守)를 지낸 대남(大南)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강도(江都)에서 거란군(契丹軍)에 항거하다 순절하여 후에 순절비(殉節碑)와 충신문(忠臣門)이 세워졌다.
이외에도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천을(天乙)과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연찰(延札),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이른 집(執), 그리고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오른 성(誠) 등이 배출되어 가문(家門)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보성 오씨(寶城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12,341가구, 52,54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울산오씨(蔚山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시조(始祖)는 오연지(吳延祉)로, 고려(高麗) 때 군기감(軍器監)을 지내고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동남 변경(東南邊境)에 출몰한 왜구(倭寇)를 토평(討平)하여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울산(蔚山)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의 손자 수천(受天)이 고려(高麗)에서 정의대부(正義大夫)로 좌부대언(左副代言)을 지냈으며, 증손 식(湜)이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형조 참의(刑曹參議)․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를 거쳐 경주 부윤(慶州府尹) 겸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5세손 흠로(欽老)는 세종(世宗) 때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제용 판관(濟用判官) 및 황주 판관(黃州判官)을 지냈다.
또한 이 괄(李 适)의 난 때 왕(王)을 호종(扈從)한 공(功)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록(策錄)된 도남(道男)과 장사랑(將仕郞) 적남(迪男), 그리고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경사(經史)에 깊은 조예가 있어 덕망(德望)이 높았던 탁(琢) 등이 유명하였다.
이외에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낸 환(瓛),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른 필제(必濟),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오른 찬웅(贊雄), 그리고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를 역임한 병규(炳奎) 등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울산 오씨(蔚山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660가구, 2,69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장흥오씨(長興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장흥 오씨(長興吳氏)의 시조(始祖)인 오천우(吳天佑)는 현필(賢弼 : 보성 오씨의 시조)의 6세손인 사충(思忠)의 둘째 아들로 조선조(朝鮮朝)에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했다.
그후 후손들이 장흥(長興)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보성 오씨(寶城吳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장흥(長興)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조선(朝鮮)에서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한 섭의(燮宜)와 목사(牧使)를 지낸 신언(愼言), 그리고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신행(愼行)이 있다.
이외에도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용맹을 떨친 계은(繼殷),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한 린(麟)과 언신(彦信) 등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장흥 오씨(長興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876가구, 3,89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주오씨(全州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전주 오씨(全州吳氏)의 시조(始祖) 오준민(吳俊玟)은 현필(賢弼 : 보성 오씨 시조)의 10세손으로 고려(高麗)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고 나라에 공을 세워 완산(完山 : 전주의 옛 지명) 백(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전주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준민의 손자 현복(玄福)이 고려(高麗)에서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지냈으며, 증손 순일(筍逸)이 평리사사(評理司事)․상서령(尙書令)을, 5세손 흠순(欽淳)이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고 순무사(巡撫使)를 지냈다.
또한 흠순의 손자 긍은(肯殷)이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지내고 능성백(綾城伯)에 봉해졌으며, 긍은의 아들 무광(武礦)이 상장군(上將軍)을, 무광의 아들 희현(希鉉)이 고려(高麗) 말에 대사간(大司諫)을 지냈고 조선조(朝鮮朝)에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좌찬성(左贊成)과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는 등 대를 이어 가문을 중흥시켰다.
조선(朝鮮)에 들어와서는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홍균(弘鈞),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오른 홍엽(弘燁),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이른 윤수(胤秀)와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낸 홍철(弘鐵) 그리고 효자(孝子)로서 이름난 태은(泰殷) 등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주오씨(全州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402가구, 1,99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주오씨(濟州吳氏)
제주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56가구 1,13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평해오씨(平海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평해(平海)는 경상북도(慶尙北道) 울진군(蔚珍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근을어현(斤乙於縣)인데 고려(高麗) 초에 평해(平海)로 고쳤고, 현종조(顯宗朝)에 예주(禮州 : 영해)에 속하였다가 충렬왕(忠烈王) 때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조선(朝鮮) 때 평해군(平海郡)으로 삼았으며 1913년 울진군에 병합하여 지금은 울진군에 속한 평해면(平海面)으로 남아있다.
「평해오씨세보(平海吳氏世譜)」에 의하면 평해 오씨(平海吳氏)는 고려(高麗)에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추증(追贈)되었던 오극중(吳克中)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고 전한다. 그후 후손들은 선조(先祖)들의 세거지(世居地)인 평해(平海)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훌륭한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극중(克中)의 아들 종인(宗仁)은 고려(高麗)에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문하성사(門下省事)를 지냈으며, 손자 경(璥)은 조선조(朝鮮朝)에서 상호군(上護軍)․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였고, 5세손 시의(時義)는 단종(端宗) 때 자선대부(資善大夫)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내 가문의 번영을 누렸다.
이외에도 문서(文瑞)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고, 문경(門慶)이 부호군(副護軍)을 득령(得齡)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역임하고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오른 언록(彦祿)과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른 이화(以華), 그리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낸 희팔(希八)과 더불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평해 오씨(平海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302가구, 1,2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함양오씨(咸陽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함양 오씨(咸陽吳氏)의 시조(始祖) 오광휘(吳光輝)는 고려(高麗) 때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좌복야(左僕射)를 지냈고 명종조(明宗朝)에 흥위위 상장군(興威衛上將軍)으로 명주(溟州)에 출몰한 외적(外敵)을 격퇴시킨 공(功)으로 추충정란광국일등공신(推忠靖亂匡國一等功臣)에 책록(策錄) 되었으며, 이어 삼중대광(三重大匡)․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오르고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보성 오씨(寶城吳氏)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本貫)을 함양(咸陽)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의 아들 홍예(洪芮)가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올라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졌으며, 손자 유(裕)가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증손 세룡(世龍)이 조선(朝鮮) 대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다. 또한 세룡(世龍)의 아들 중원(仲元)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손자 엄(儼)이 대사헌(大司憲)과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역임하여 대를 이어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이외에도 에종(睿宗) 때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과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낸 치인(致仁)의 아들 응(凝)과,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 참여한 세기(世紀)의 아들 건(健),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義兵)으로 활약하여 전공(戰功)을 세운 사운(思雲)의 아들 빈(玭)과 전한(典翰) 건(健)의 아들 장(長) 등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양 오씨(咸陽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5,354가구, 22,15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함평오씨(咸平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함평 오씨(咸平吳氏)의 시조(始祖) 오 잠(吳 岑)은 현보(賢輔)의 넷째 아들로 고려(高麗) 원종(元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에 올라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으며, 삼중대광․검교․태자 태사(三重大匡․檢校․太子太師)를 역임하였고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함풍군(咸豊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함평(咸平)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人物)로 잠(岑)의 아들 진후(進厚)가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으며, 손자 사총(思摠)은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로 좌복야(左僕射)를 역임하였고 사총의 아들 공요(公孝)는 군기감 직장(軍器監直長)을 역임하여 훌륭한 가문(家門)을 빛냈다.
이외에도 주부(主簿)를 지낸 손계(孫啓)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서(瑞), 그리고 효행(孝行)이 뛰어났던 영(齡) 등이 유명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평 오씨(咸平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747가구, 3,28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명오씨(海暝吳氏)
해명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10가구 1,18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해주오씨(海州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해주 오씨(海州吳氏)의 시조(始祖)로 오인유(吳仁裕)는 본래 중국(中國) 송(宋)나라 때 이름 높았던 대학사(大學士)로, 984년(성종 3) 고려(高麗)에 들어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역임하였고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에 정착하여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해주(海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고려조(高麗朝)의 인물(人物)로는 1107년(예종 2)에 윤 관(尹 瓘)과 함께 여진족(女眞族)을 토벌하여 용맹을 떨쳤던 명장(名將) 연총(延寵)이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쳐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올랐으며, 찬성사(贊成事)에 이른 한경(漢卿), 그리고 광정(光庭)이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여 가문(家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조선(朝鮮)에 와서도 가문을 빛낸 많은 인물들이 있었는데 인유의 14세손이며 선공감역(繕工監役) 희문(希文)의 아들인 윤겸(允謙)은 선조(宣祖) 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관찰사(觀察使)와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내고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노서(老西)의 영수(領袖)가 되어 대사헌(大司憲)․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뒤 우의정(右議政)과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그의 조카 달제(達濟)는 병자첨화삼학사(丙子斥和三學士)의 한사람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淸)과의 화의(和議)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심양(瀋陽)으로 이송되어 윤 집(尹 集)․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살해되었으며, 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문장이 뛰어났던 윤겸(尹謙)의 손자(孫子) 도일(道一)은 숙종(肅宗) 때 도승지(都承旨)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오르고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으며, 현손 명항(命恒)
은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한 후 분무일등공신(奮武一等功臣)에 올라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졌고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또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숙종(肅宗) 때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낸 두인(斗寅)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들이 나왔는데, 그의 아들 태주(太周)가 현종(顯宗)의 부마(駙馬)로서 해창위(海昌尉)에 봉해졌고 문명(文名)이 높았던 손자 원(瑗)은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으며, 특히 영조에게 학문(學問)과 덕(德)을 닦는 요령을 진언하였고 옳다고 믿는 일은 직언(直言)을 잘 하기로 유명하였다. 원(瑗)의 아들 재순(載純)도 학문으로 당대에 뛰어났고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역임하여 부자(父子) 대제학(大提學)으로 이름이 났다.
근대 인물(近代人物)로는 조선말(朝鮮末) 개화(開化)의 선각자(先覺者)로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의 소장 정치인들에게 개화사상(開化思想)을 고취시켰으며 유대치(劉大致)․박규수(朴珪壽)와 함께 교우(交友)하며 개국(開國)을 주장하였고 금석학(金石學)과 서예(書藝)에 일가(一家)를 이룬 경석(慶錫)과, 3․1운동(運動)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이었던 그의 아들 세창(世昌)이 독립운동가로 크게 활약하여 가문(家門)을 더욱 빛낸 자랑스런 인물(人物)들이다.
이외에도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하여 무장항일운동을 벌이다 붙잡혀 옥사(獄死)한 동진(東辰)과, 한국 의학(醫學)의 개척자요 사회사업에 진력하여 많은 공을 세운 긍선(兢善), 그리고 「폐허(廢墟)」의 동인으로, 문단에 나와 초창기 시단(詩壇)의 선구자였던 공초 상순(相淳) 등이 명문(名門) 해주 오씨(海州吳氏)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해주 오씨(海州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90,842가구, 377,0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혜조오씨(惠朝吳氏)
혜조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808가구 6,01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화순오씨(和順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화순 오씨(和順吳氏)는 현필(賢弼 : 보성 오씨 시조)의 셋째 아들 오 원(吳 元)을 시조(始祖)로 하여 화순(和順)에 세거(世居)하면서 보성 오씨(寶城吳氏)에서 분적(分籍), 본관(本貫)을 화순(和順)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원(元)의 7세손 순공(順公)이 고려(高麗)에서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를 거쳐 동정(同正)을 지냈고, 조선(朝鮮)에서는 상린(尙麟)이 영조(英祖) 때 정시문과(庭試文科)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사충(思忠)이 1404년(태종 4) 삼맹훈신(三盟勳臣)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망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화순 오씨(和順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664가구, 2,88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흥양오씨(興陽吳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흥양 오씨(興陽吳氏)의 시조(始祖)는 현필(賢弼 : 보성 오씨 시조)의 아들인 오광휘(吳光輝)이다. 광휘의 아들 완(完)은 고려 충목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내면서 공이 있어 흥양군(興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보성 오씨(寶城吳氏)에서 분적(分籍)하여 흥양(興陽)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인물을 보면 영로(寧老)가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헌(大司憲)․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로 평원군(平原君)에 봉해졌으며 후에 두원군(荳原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영로(寧老)의 둘째 아들 백창(伯昌)은 추장문과(秋場文科)에 급제하고 경기도 도사(京畿道都事)를 거쳐 세조(世祖) 때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이어 도총관(都摠管)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내고 대사헌(大司憲)에 올랐으며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흥원군(興原君)에 봉해졌다.
이외 순손(順孫)이 좌찬성(左贊成)에 오르고, 식(植)과 중헌(重憲)이 부호군(副護軍)을, 계립(繼立)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여 흥양 오씨(興陽吳氏)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흥양 오씨(興陽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416가구, 1,73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각성씨의 시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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