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날에
이월 첫째 일요일은 입춘에 이어진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어린 시절 정월 대보름에는 동네 형들과 솔가지를 잘라 달집을 지어 태웠던 시절이 어슴푸레하다. 대나무 끝에는 겨우내 날린 연을 매달았다. 어른들은 농악대 지신밟기로 우물터를 비롯해 집집을 순례하며 마을의 안녕과 가족들의 무병을 기원했다. 이런 토속적인 지역 공동체 풍습은 내가 보낸 유년기 문화의 자양분이다.
보름날은 여느 아침과 달리 수수가 든 잡곡밥을 먹고 삶은 땅콩으로 부름을 깨물었다. 그 땅콩은 설날에 가덕도 작은 형님댁을 방문해 작년 농사지은 수확물을 받아왔더랬다. 대보름날은 아주까리 묵나물 이파리로 쌈을 싸 먹었기도 해 그것을 대신한 김으로 밥을 몇 술 싸 먹었다. 보름날 아침에는 귀밝이술을 한 모금 먹었던 기억을 되살려 돌복숭 담금주를 꺼내 한 잔 비웠다.
아침 식후 근교 산행을 겸한 산책 걸음을 나섰다. 동정동으로 나가 북면 온천장으로 가는 12번 버스를 타서 외감마을 입구에서 내렸다. 동구를 지나 달천계곡 들머리에서 남해고속도로 창원터널 곁으로 올라갔다. 봄날이면 산나물을 마련하느라 찾았던 양미재 산기슭이다. 숲길 들머리 단감농원은 가지치기가 진행 중이었다. 낙엽활엽수에는 봄이 오는 낌새를 눈치챌 수 없었다.
오리나무 가지 끝에 연녹색 망울이 달리면 봄이 오는 징후가 되는데 그런 기미는 보이질 않았다.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오리나무는 특이한 모양의 꽃망울이 주렁주렁 달렸다. 소나무나 버드나무처럼 꽃이 피면 바람이 스쳐 불어 수분 되기에 굳이 향기롭거나 아름답지 않아도 되었다. 가랑잎이 삭아 부엽토가 쌓인 길은 카펫을 깔아 놓은 듯 등산화 바닥에 폭신한 느낌을 받았다.
고갯마루 못 미친 인적이 전혀 없는 너럭바위에 앉아 한동안 명상에 잠겨 시간을 보냈다. 쉼터에서 일어나 양미재를 넘어 구고사에 들렀다. 규모가 크지 않은 절인데 대보름날 법회가 있는지 신도들이 타고 온 차량이 그득했다. 법당 뜰에서 두 손을 모은 뒤 샘물을 한 바가지 받아 마시고 범종각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을 바라봤다. 바람이 불지 않아 물고기는 가만히 멈춰 있었다.
절집을 나와 비탈길로 내려간 산정마을에 이르니 합성동 터미널에서 들어온 버스가 출발을 앞두고 있었으나 타질 않았다. 그리 춥지 않은 점심나절이라 산정 저수지를 지나 무기마을까지 걸어볼 생각이었다. 포장된 시골길을 따라 걸어 돈담마을에 이르니 마을 회관에는 주민들이 모여 놀았다. 골목길을 지날 때 볕이 바른 담벼락 밑에는 엷은 하늘색의 봄까치꽃이 점점이 피어났다.
상주 주씨들이 집성촌을 이룬 무기마을을 지났다. 무기는 논어에 나온 '무우기수(舞雩沂水)'를 줄인 말의 지명이다. 공자가 살던 노나라 도성 남쪽에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공자의 한 제자가 봄이 오면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라 했다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영조 집권 초기에 이인좌 난을 평정한 주재성의 고가 무기 연당이 유명하다.
주씨 고가는 몇 차례 들린 바 있어 그냥 지나쳐 5호선 국도까지 나가 돼지국밥집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식후에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으로 가다가 들판에서 풍물패 소리가 들려 그곳으로 가봤다. 커다란 달집을 지어 놓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 돼지고기 수육을 삶아내고 부추전을 부쳐 술상을 차려 손님들을 접대해 나도 그 틈새 상을 받았다.
주민자치회와 이장협의회가 주관하고 칠원읍 기관과 단체에서 후원하는 대보름 행사였다. 오색 어깨띠에 고깔모자를 쓴 풍물패가 달집 주변을 맴돌며 울리던 풍악이 멈추자 무대에는 사회자가 올라 노래꾼을 등장시켰다. 여성 봉사회에서 끓여낸 떡국까지 받아먹고 행사장을 벗어나니 군수의 인사말 차례였다. 귀갓길이 멀어 달집 태우는 장면을 보지 못하고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23.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