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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롬 11:33-36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 11:33-36 / 오, 우리의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신지요! 그분의 지혜와 지식과 부는 얼마나 크신지요! 그분의 결정과 방법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34) ㄱ)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분의 의논 상대가 될 수 있겠습니까? (ㄱ. 70인역 사40:13) 35) ㄴ) 또 누가 보상을 받을 만큼 충분히 주께 드렸습니까? (ㄴ. 욥41:11) 36)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분의 능력에 의해서 살고 모든 것은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모든 영광을 영원토록 하나님께 바칩니다. 아멘.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 모두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찬송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33) 바울은 로마서 9장 1절에서부터 11장 32절까지 선민 이스라엘로부터 시작해서 과거에 불순종했던 이방들까지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오묘한 구원의 경륜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나서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에 감격에 차서 탄성을 지릅니다. 바울의 감탄은 그를 가장 슬프게 했던 골육 이스라엘의 실패가 하나님께서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는 경륜에서 나온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구원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며 때가 차면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비밀을 깨달은 데서 나온 것입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34-35) 바울은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에 대해 이사야 40장 13절을 인용하여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그 마음을 헤아리기 힘들 뿐 아니라 어떤 누구의 조언이나 충고가 필요하지 않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우리의 생각과 길보다 높으십니다(사 55:9). 따라서 우리가 감히 그분의 판단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분의 길을 찾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욥기 41장 11절을 인용합니다. 이 문장에도 수사의문문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부요하심은 어느 인간의 도움이나 기부를 의존할 필요가 없는 완벽히 충만하심을 강조하여 나타냅니다.
하나님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36) 마지막으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의 근원이 되시고 동인(動因)이 되실 뿐 아니라, 모든 만물의 최종 목적지가 되시는 분이심을 선포합니다.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었기에 “영광이 하나님께 세세에 있기를” 송축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그분의 주권을 믿는 자들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적용: 당신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하심과 그분의 주권을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지혜가 부족할 때마다 지혜와 지식이 부요하신 하나님께 나아와 지혜를 구하십시오(약 1:5). 하나님의 크신 위엄과 주권을 깨달을 때, 그분을 경외함으로 경배하시기 바랍니다.
D. L. 무디가 하루는 서재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데 5살 먹은 그의 아들이 들어왔습니다. 무디는 그 아들이 자신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무얼 원하니, 얘야?”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꼬마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아요.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서 들어왔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마루에 앉아서 조용히 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그는 아버지와의 교제만을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우리 아버지와의 교제를 사모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호크마 주석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루투 카이 소피아스 카이 그노세오스'(* )를 직역하면 '부요와 지혜와 지식'(the riches and wisdom and knowledge)이라 할 수 있다(공동번역, RSV). 그러나 그 의미에 있어서는 오히려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the riches of the wisdom and knowledge)이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KJV. NIV. NASB). 왜냐하면 '부요함'과는 달리 지식과 지혜는 명확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Lenski). 즉 '지혜'(* , 소피아스)는 영원한 진리에 대한 종합적 통찰이며, '지식'(* , 그노세오스)은 단편적, 감각적 사물에 대한 인식이다. 본절에서 지혜는 하나님의 통치 원리(原理)이고 지식은 그 원리를 뒷받침해주는 구체적인 지적 능력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계획과 구속 경륜이 연관되어 언급되고 있다.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 앞 구절에서 언급한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다시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판단'(* , 크리마타)이란 '정죄'나 '심판'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결정'을 의미한다(Lenski, Hendriksen). 또한 '길'(* , 호도이)은 '하나님의 작정하심이나 행하심, 다스리심'과 연관되는데,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이 인생들에게는 측정이 불가능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주신 것 외에는 알 수도 없지만, 알려고 하면 미궁(迷宮)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Calvin). 혹자의 말대로 하나님의 판단과 길은 깊은 우물과 같아서 아무리 그물을 퍼올려도 다 이해할 수는 없다(泉田昭).
=====11: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 본절부터는 세 가지 질문 형태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본절은 70인역의 사 40:13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인데, 여기서는 앞 구절과 연결시켜 접속사 '가르'(* , '왜냐하면')를 첨가하였다. 또한 앞구절(33절)에서는 부정적인 견해로 되어 있었지만 여기서는 의문형을 취하였다. 하나님은 스스로 뛰어난 모사이시기 때문에 어떤 모사가 필요없고, 오히려 그의 백성들에게 모사가 되어주시는 전지 전능의 존재이시다(욥 36:22, 23). 어떠한 유한자도 무한자를 파악하지 못한다(Finitum non cap ax infiniti est, '유한은 무한을 파악하지 못한다'). 따라서 주께서 보여 주시는 부분만을 우리는 알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어서(Condescensio Dei, '하나님의 낮아지심') 계시하신 사실에 대해서만 알 수 있다.
=====11: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 본 구절은 세번째 질문으로 욥 41:11의 인용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만드시고 그것들에게 모든 가치와 역할과 원리들을 나누어 주셨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 대가로 하나님이 축복을 주신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고 만유의 근원이 되시며 만상의 조성자(造成者)이실 뿐 아니라 우주의 운행자이시기 때문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시므로 받으실 필요가 없다.
=====11:36
바울은 만물의 시작과 과정과 끝,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만물의 근원이시며 집행자이시며 목적이신 하나님에게로 귀속시키고 있다. 이 진리를 깨달은 자는 결국 모든 지혜의 근본을 깨달은 자와 다름없다(잠 1:7).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 세 가지 질문 형태의 찬양에 이어서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시며, 그 생성 발전의 주관자이시며, 그 종국적 목적(目的)이심을 선언적으로 고백한다(고후 5:18;엡 1:23;골 1:16;히 2:10). 이 문장은 초대 교회의 예배 의식문이었는데, 여기에는 삼위 일체론적인 송영이 감추어져 있다(Davidson, Martin).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 '세세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는 '그 영원함까지'라는 의미이며, 16:27에서도 이 같은 송영으로 로마서를 끝마치고 있다. 따라서 이 문구는 본절이 1-11장의 교리 부분의 대단원이 됨을 보여준다.
< 설 교 >
[로이드존스-로마서 11:33-36 강해]
1. 바울의 위대한 송영
이제 우리는 로마서 11장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위대한 송영에 이르렀습니다. 이 송영이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럽고, 놀랍고, 고귀한 말씀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제 이 송영의 내용을 나누어 보면 ❶ 첫 번째 부분은 사도가 이 영광스러운 구원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깊음과 부요함을 특별히 언급하며 찬양하는 부분입니다. ❷ 두 번째 부분은 이 모든 일의 비교할 데가 없는 특성을 강조하며 그리고 ❸ 세 번째 부분은 구원이 전혀 사람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다는 점을 밝힙니다. ❹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원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영광, 바로 그러하신 분이기 때문에 마땅히 경배를 받아야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①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란 말씀은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와 부요함이 깊다는 의미”입니다. ❶ “부요함”이라는 용어는 “은혜”와 “긍휼” 사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❷ 하나님께서는 무한하게 깊은 곳으로부터 무한하게 높은 곳까지 두루 바라보시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 생각 할 수 있는 유일하고 최상의 방법은 바로 “깊음”이라는 단어뿐입니다. ❸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언제나 최상의 언어로 표현을 해야 하는데, 그러나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언어라 할지라도 그분의 영광을 온전히 표현 할 수는 없습니다.
②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부요함입니다. ❶ 부요는 모든 것의 원천입니다. ❷ 은혜란 분수에 넘치는 호의를 말합니다. ❸ 은혜란 형벌, 징계, 영원한 저주와 고통 밖에 받지 못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의미합니다. ❹ 따라서 이 모든 축복들로 이끌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③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세 가지를 나타내는 두 번째 용어는 “지혜”입니다. ❶ 지혜는 어떤 상황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❷ 사람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만일 지혜가 부족하다면 그 지식은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❸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하나님에게 죄인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셔야 한다는 열망을 일으키시고,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는 하나님의 “깊은 지혜”로 말미암습니다. ❹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모든 구원의 계획을 고안하신 것은 하나님의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④ 그 다음에 지식이 나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식의 부요함이여!” ❶ 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십니다. ❷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❸하나님께서 전지 하시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어날 수 있는 일들과 모든 가능성을 예비한 구원 계획을 세우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그 사실에 대하여 감사드려야 합니다. ❹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으로 인해 모든 면에서 완전하여 하나님의 계획은 틀어질 수 없습니다. ❺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자들인 우리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계획이 완전하게 실행되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2. 하나님의 판단과 길
이 송영을 네 개의 주요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하였는데,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의 깊이를 강조하는 첫 번째 단락을 살펴보았고, 이제 본격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두 번째 단락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계획과 구원에 대한 완전한 불가해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말로 이 사실을 제시합니다.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이 말은 하나님의 깊음과 심오함의 범주를 나타내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측량치 못하다.”라는 말은 “헤아릴 수 없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으로서는 전혀 헤아릴 수 없고 측량치 못할 것을 말합니다.
①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의 지혜나 지식으로 토론이나 논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혜와 지식에 한계가 있고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는 무한하기 때문에 도저히 도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되어지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부분적으로나마 알게 되는 것입니다.
② 육의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가 없으나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때가 이르러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③ 신약 성경에서 비추어지는 우리 주님의 설교 모습은 논의나 토론을 통해서 진리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말씀을 강해하셔서 일방적으로 선포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④ 우리는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❶ 세상에서 아무리 더럽고 추하고, 혹은 강퍅하게 살아왔던 사람일 지라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며, 그 복음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❷ 우리는 그들이 언제 어느 때에 그 복음을 받아들일지 모릅니다. ❸ 또한 그들이 영원히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❹ 그렇기 때문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판단과 길이 깊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목적은 당연히 사람에게 의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사람은 이 사실을 아는데 매우 우둔하고 또한 이 사실을 인정함에 있어서는 더욱 우둔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그리고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사실이 자각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① 사도는 성경을 인용할 때에 70인역을 사용하지만 여기서 욥기 41:11의 말씀을 인용할 때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히브리 성경을 직접 번역했습니다. 이것이 원문의 정확한 번역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성경의 영감에 대한 또 하나의 논증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② 이 두 인용문이 사실을 말할 뿐만 아니라 신령한 풍자와 신령한 비웃음도 말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❶ 우리는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❷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❸ 성경은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라고 말합니다. 감히 “내가 주의 마음을 안다.”고 말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❹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우리가 이 말씀을 겸손하게 읽어야 합니다. ❺ 우리는 “부요함의 깊음”, “지혜의 깊음”, “지식의 깊음”에 대하여 살펴보았데,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라는 말씀 속에 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③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 즉 영원불멸하시고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다가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오직 홀로 지혜로우신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습니다. ❶ 또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무지합니다. ❷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❸ 하나님의 길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❹ 인간은 자신의 우주를 질서 있게 한답시고 바쁘게 노력하고 있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❺ 실행되고 있고 마침내 완성될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위대한 계획과 목적을 인간이 모른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모든 것에 대해 무지합니다.
④ “아멘”의 의미는 ❶ 자신이 아무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❷ 우리가 지금 우리가 된 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❸ 우리가 변명을 그치고 핑계를 그치는 것,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정당화하는 일을 그치는 것을 나타냅니다. ❹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반항을 그만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❺ 나는 전무이고 하나님께서는 전부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❻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❼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단지 미천한 죄인일 뿐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❽ 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과 긍휼에 빚지고 있으므로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나의 입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❾ 이제 나는 기꺼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나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생명을 바쳐서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은혜
롬 11:33-36 / 광주새로운교회
1. 소경인 아들
나면서부터 소경인 아들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세상의 아름다움과 사물을 이해시키려고 열심히 설명을 했다. 그러나 아이는 별다른 느낌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명성 있는 안과 의사를 알게 되었다. 다행히도 그 의사에게 수술을 받고 아들은 천신만고 끝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아이는 이제야 어머니의 얼굴과 흰 구름 등 세상을 느끼고 볼 수 있었다. 아들은 눈을 뜬 후 엄마에게 묻는다. ‘왜 제가 이런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있다고 진작 말씀해주지 않았어요?’ 그러자 엄마는 ‘얘야, 수없이 얘기했지만 네가 믿지 않았고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란다.’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 영혼의 눈이 열릴 때에만 진정한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넘쳐나게 된다.
2. 구원의 은혜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마땅히 그 영광과 감사를 받으셔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도덕적 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이들이 있다. 이렇게 율법적 자력 구원의 상태에 머무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스라엘의 무지함을 반복하는 자이다. 우리는 구원자 되신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시며, 은혜의 주권자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바울의 감사와 찬송처럼 매일 그 깊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감사하는 신앙이 울려 나도록 해야 한다. 바울은 본장에서 자신처럼 이스라엘 가운데 구원 얻은 자들도 있다고 말한다(1-10절). 그러나 이스라엘의 실패로 인하여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가게 되었다. 이방인들은 돌 감람나무와 같이 소망이 없었지만 참 감람나무의 뿌리, 곧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었다. 이들이 자긍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먼저 입었던 이스라엘도 교만하므로 버림당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접붙임을 받는 것이 겸손히 주님을 믿는 데만 달려 있기 때문이다(11-24절). 이방인 가운데 구원받을 자들의 수가 찰 때에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할 기회가 이른다(25-30절). 또한 바울은 마지막에 하나님의 지혜를 찬송한다(33-36절).
3. 구원의 역사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역사를 찬양한다. 이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지식의 풍요함으로 말미암았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바울의 고백은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가? 이는 창조주이시며 구원주이시며 심판 주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잘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구원 교리는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이유와 근거를 제시한다.
4. 깊으신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는 은혜는 얼마나 클까? 하나님은 얼마나 풍성하신 분이신가? 우리는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고백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우리는 풍성하신 하나님, 그분의 판단을 잘 헤아리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그 분의 판단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사탄에게 고통 받은 욥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에게는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라는 세 친구가 있었다. 이 중 소발과 욥의 대화 중 소발은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한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욥 11:7-9) 우리는 깊고 크고 넓으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온전히 헤아릴 수 있을까? 다윗은 주의 의와 판단에 대하여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도 보호해 주시고 주의 의는 우람한 산줄기 같고 주의 판단은 바다와 같다고 고백한다.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시 36:6) 또 다윗은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음과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이 많음을 말한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5) 주님이 하신 일은 크고 크시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시 92:5) 우리 주님은 크고도 크신 분이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나’를 구원해 주신 은혜에 크게 감격해야 한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았음을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 우리 하나님은 깊으시고 그분의 은혜는 풍성하다.
5. 주님의 마음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주님의 생각을 잘 알 수 있을까? 바울은 주님의 생각을 잘 아는 이가 없으며 주님의 의논의 상대가 될 만한 이가 없다고 말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롬 11:34) 공동번역은 이렇게 기록한다. “주님의 생각을 잘 안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주님의 의논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우리가 크신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기 위해 힘써야 한다. 지금 ‘나’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다면 감사한 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바울은 고백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성경에도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습니다.”(고전 2:16) 아버지의 마음을 잘 헤아리며 아버지의 마음으로 주의 일을 감당하는 우리가 된다면 감사한 일이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어떠한 각오를 가지고 있는가?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주님의 십자가에도 그리고 그의 영광에도 참여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어떤 힌두교 여인이 뜻밖에 침례교 선교회에 크리스쳔으로서 침례를 요청했다. 선교회는 그 여인에게 믿던 종교를 포기함으로 당해야 할 고난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여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모든 고난을 기꺼이 받겠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나의 주님을 위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님이 나를 위해 받으신 고난과 비교할 만큼 큰 고난은 결단코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를 향한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크나큰 특권이며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증거이다.
6. 여호와의 광대하심
우리 주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우리 주님은 광대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광대하신 주님을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그 분의 광대하심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다. 바울은 하나님께 먼저 드렸으니 하나님이 갚아 주셔야 한다고 말할 사람이 없음을 고백한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5) 주께는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있다. 천지는 다 주의 것이고 주는 만유의 머리가 되신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1-12) 우리는 모든 것이 주의 손에 달렸음을 기억해야 한다. 주께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은 우리는 광대하신 주님의 일하심을 신뢰해야 한다. 바울은 주님께 받은 은혜가 큼을 고백한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누가 여러분을 남달리 뛰어나게 하였습니까? 여러분이 가진 것 중에 하나님에게 받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가진 것이 하나님에게 받은 것이라면 어째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고전 4:7) 우리는 모든 것은 광대하신 주께로부터 왔고 주님께서 일하실 것을 믿고 선포해야 한다.
7. 주님께 영광
우리는 무엇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신다. 만물은 주에게서 나왔고 다시 주께로 돌아간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우리는 주님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다윗은 권능 있는 자들에게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릴 것을 말한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시 29:1-2) 주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순결한 신부로서 주님을 경배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세상 모든 만물은 어디로부터 나왔는가? 바울은 만물이 주로부터 말미암았고 자신들도 그로 말미암았음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6) 만물의 처음이 되시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삶을 살 것을 선포해야 한다.
바울은 주님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원했다.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1) 우리는 교회와 예수님 안에서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만물은 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주님은 만물 이전부터 계신 분이심을 기억해야 하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우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 정사와 권세가 다 주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알고 주님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소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8.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며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가운데 은혜로 구원의 은총을 입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찬송과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찬송을 받으시기 위해 허물 많고 죄 많은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구원은 주께로부터 나왔음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기를 소원해야 한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 4:18) 그 분은 죽지 않으시고 빛 가운데 거하신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 6:16) 오직 주께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려 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를 살리시고 날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고, 그분께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한다.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은혜에 감격하며 주님을 잘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9.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십자가의 피로 죄를 용서받아(요일 4:9),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천국백성의 삶을 살게 됨을 믿고(고후 5:17),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구원섭리에 대한 찬양
이건기 목사 / 롬 11:33-36
바울은 (1-11장)을 통해, 복음에 대해 광범위하게 진술해 왔다. 모든 사람이 죄에 빠져,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된 과정을 설명했으며, 하나님이 그들을 의롭게 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설명했다. 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성화 문제와,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설명했다.
이방인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구원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완성한다. 바울은 여기까지 말한 후에, 바울의 마음이 감사로 가득 차서,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잠시 설명하던 것을 중단하고, 마음이 벅차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1.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대한 찬양(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바울은 말을 멈추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놀라움과 감탄의 탄성을 질렀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설명하던 중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부함과 심오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크신 판단을 헤아릴 수 없고, 그의 길을 발견할 수도 없다고 외쳤다. 우리말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원문은 이 말이 ‘풍성함과 풍성함이여!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여!’이다.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폭과 넓이와 깊이가, 얼마나 풍성한지 놀랐으며, 크게 감탄했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는, 참 넓고, 그 깊이가 심오하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나타나고, 죄인을 참고 기다려준, 은혜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자 찬양하였다. 신앙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 마음을 알지 못하면,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해 주고, 자기의 자녀로 삼아,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룬, 구원의 섭리는 묵상하면 할수록, 더욱 더 풍성해진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짐승을 잡아, 그 가죽으로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었다. 노아 때에 사람들의 죄가 넘쳐나게 되었을 때, 세상을 심판할 수밖에 없지만, 방주로 들어온 죄인을 구원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했을 때, 도피성을 마련해서,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을 구원했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지식이, 잘 나타나 있다. 인간이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하나님은 십자가로 구원했다. 사형 틀인 십자가로,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들었다. 하나님은 먼저 유대인을 불렀다.
그러나 후에, 그들이 넘어지게 되자, 그 기회를 통해서, 이방인을 불렀다. 그리고 하나님은 후에 이방인들을 통하여, 유대인을 다시 불러 줄 것이다. 하나님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고, 성령님을 통해 거룩하게 한다.
그래서 마침내 얼굴과 얼굴을, 서로 맞대고 볼 수 있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켜 줄 것이다.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너무 넓고 깊어서, 아무도 그 넓이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깨달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
이사야는 이에 대해서 (사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고, 그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고 선언했다. 유한한 우리 생각과, 무한한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부함과 심오함을 깨달을 때에,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자세를, 회복할 수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높은, 지혜 앞에 설 때에, 겸손해 질 수 있다.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게 만들어 준다.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알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와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 힘을 준다. 하나님의 높은 생각과 지혜를 알면,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양하게 된다.
(출14장)은 홍해를 가르고, 건너는 장면이다. 뒤에서 쫓아오는 애굽의 병사들과, 앞에는 넘실대는 홍해바다의 물결을 가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간다. 뒤쫓아 가던 애굽의 군사들은, 홍해바다에 다 수장되고 말았다. 그래서 (출15장)은 모세와 미리암의 찬양이 나온다.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이 이루어졌기에, 찬양이 터져 나옴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계15장)을 보면, 하나님을 반역하던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나온다(계15:1). 그 마지막 심판에서 승리한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렀다.
(계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이것이 우리가 한 평생 부를 노래이며, 마지막에 부를 노래다.
2.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대한 몇 가지 질문(34-35).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바울은 계속해서 질문을 한다. 두 개의 질문으로 되어 있다.
34절 질문은 (사40:13)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를 인용한 것이며, 35절 질문은 (욥35:7)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를 인용한 것이다.
2개의 성경을 인용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조언할 수 없다고 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서, 하나님을 빚지게 할 수 없다. 이는 모든 것들을 만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모사(쉼블로스, 상담가 : 쉼 + 블레‘조언’)가 될 수 없다. 어떻게 피조물이 만물의 주인이며, 모두 다 아는 하나님께, 조언할 수 있나?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는 헤아리거나 조언할 수 없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상담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큰 빚을 진 채무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조언자가 되거나, 하나님을 빚쟁이로 만들지 말고, 오히려 그 분의 말씀에, 겸손히 귀를 기울이고,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닫고, 침묵해야 한다. 욥은 극한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섭리를 불평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하나님의 크신 지혜를 깨닫고, 이렇게 대답했다. (욥42: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섭리에 눈을 뜨면, 우리가 무지한 맹인과, 같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진정으로 자신을 보는, 지름길이다. 우리의 지혜와 지식이, 보잘 것 없는 줄 알 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잠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하나님의 계시 없이는, 참된 지혜와 지식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 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큰 빚을 졌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셨고, 아무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지금도 우리가 먹고, 입고 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공급해 준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입을 열어,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마땅하다.
3.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모든 영광은, 하나님이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들고, 주관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인간의 영광을 구하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한다. 모든 일을 하나님으로 출발해서, 하나님으로 맺어야 한다. 하나님이 만물의 시작이며, 끝이 되기 때문이다.
‘처음 만물이 어디서 나왔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에크)라고 말하고, ‘만물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디아)라고 대답하고, ‘만물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에게로’(에이스) 간다고 대답할 수 있다.
여기에서, 3가지 전치사(에크, 디아, 에이스)를 사용해서, 모든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유지하며, 하나님이 만물의 목표가 됨을 강조했다. 하나님은 만물의 알파요, 오메가가 되는 유일한 분이다. 그러면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만물’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이 만든 모든 피조물 전체를 말한다. 만물은 글자 그대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우주전체와, 천상에 존재하는, 모든 영적 존재들을 포함한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에 의해 유지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창조의 목적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가로채면 안 된다. 이 사실을 알 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고, 창조주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다.
(2) 우리의 구원에 대한, 모든 섭리를 의미한다. 바울은 구원에 대한 섭리를 말하는 중이다. 그는 지금 이 모든 구원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고, 하나님을 통해 진행되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선택했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 주었으며, 그들에게 영생을 주셨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이룬 구원을 믿고 받아들이고,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 지어다, 아멘!’ 이제 바울은 최종적인 송영으로, 끝맺고 있다. 영광이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만물의 근원이고, 만물을 유지하고, 또 만물의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은, 이렇게 하지 못하도록 반발한다.
사단과 우리가 교만해져서, 하나님처럼 살기를 원한다. 우리를 하나님 위치에, 놓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교만한 인간은, 하나님께 의존하기를 거부하고, 만물의 주인인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예배와 찬송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올바른 신학이 없이는, 참되게 하나님을 찬송이 있을 수 없기에, 앞에서 지루할 정도로 신학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길 수 없다. 마찬가지로 모든 참된 예배와 찬송은, 참된 신학이 동반될 때에 가능하다. 올바른 신학은 우리를, 하나님께 대한 경배로 인도해 준다.
참된 신학이 없는 예배는, 우상숭배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찬송(예배)이 없는 신학도 올바른 신학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학문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냉정하고, 비판적인 과학의 관찰과 평가로,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와 경외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며, 바울이 말한 것처럼 언제나 우리를 예배로 이끈다. 참된 신학은,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자리가, 피조물인 우리가, 마땅히 서야 할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건하지 못한 신학’과 ‘신학이 없는 경건’, 둘 다 똑같이, 주의해야 한다. 우리 마음에,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있다면, 찬양이 흘러나온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의 주신 놀라운 구원에, 감사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되기를 바란다. 고난과 고통을 넘어서, 찬양의 승리가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우리 맞게 가고 있습니까?
Withus교회 / 롬 11:33-36
며칠 전 연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연어들이 바다에 살다가 자신들이 태어난 강의 상류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오고, 작은 폭포도 점프해서 올라올 정도로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관심을 갖고 자세히 영상을 보니 연어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연어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알아보다 보니, 연어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믿을 수 없는 ‘신비’ 그 자체였습니다.
연어의 본능 속에 매우 깊게 각인된 습성,
사람들은 그것을 ‘자연의 섭리’라고 이해하지만, ‘자연의 섭리’라고 표현하고 끝내는 것은 너무나 부족한 ‘이해’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어는 태어난 고향 산천에서 바다로 나가 태평양을 누비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약 오년간의 생을 마치고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다시 돌아 옵니다.
그런데 그 돌아오는 거리가 수천 킬로에 달합니다. 수만 킬로가 되기도 합니다. 여기서부터 부산까지가 6백 킬로인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거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먼길을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지 아십니까? 바로 냄새를 기억한답니다 .
자신이 태어난 강물의 냄새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또한 어떠한 역경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수천 킬로를 먹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헤엄쳐 옵니다. 바다에서 강으로 들어오면 물살을 거슬러 올라옵니다. 바위나 돌에 몸이 찢기고 상처가 나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연어에 대해 공부하면서, 이런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나보다 더 아이큐도 높고, 의지도 강하구나..!
물론 제가 연어보다는 더 똑똑할 것입니다. 그리고 의지도 강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냄새로 수천킬로를 찾아가지도 못하고, 연어처럼 자신의 생명을 걸고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지도 못합니다.
여러분, 오늘 설교의 시작에서 연어의 일생을 통해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연어들이 기를 쓰고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가만히 보면, “아 나는 내 고향으로 꼭 돌아갈 거야!” “냄새를 맡고 찾아갈 수 있어” “어떤 역경이 있어도 나는 내 새끼들을 고향에서 낳을거야” 연어의 머리 속에 이런 생각과 계획이 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연어들의 행동은 마치 지성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지만, 그것은 연어의 이성이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진 ‘연어의 본성’인 것입니다.
여러분, 연어가 수천 수만 킬로 떨어진 고향을 냄새로 기억하고,
수 없이 많은 역경을 이겨내며 먹지고, 쉬지도 않고,
또한 강에서도 살고 바다에서 살기 위하여, 바다에서는 오줌을 찐하게, 강물에서는 오줌을 묽게 누면서 자신의 몸의 염분을 일정하게 조절하는 그 신비를,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모습이 자연의 신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에 저는 연어를 보면서 은혜를 받고야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연어의 신비스러운 일생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연어 맛있게 먹지만 말고,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라!” “내가 너희를 만든 조물주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 부터 11장은, 하나님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의와 섭리에 대한 바울을 논증을 담고 있는 하나의 긴 단락입니다.
그리고 그 긴 단락은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드리는 고백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바라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신의 자녀들을 구원하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 서로를 바라보면서, 우리 서로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 땅의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들에게, 바라시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는 삶에서 벗어나, 가족과 이웃과 공동체를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인 로마서 11장 33절에서 36절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고백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가 예배에서 모두 일어나서 하나님께 기도처럼 드리는 찬양을 ‘송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 송영을 통해 하나님에게 함께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처럼 로마서 11장 33절에서 36절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송영’입니다.
오늘 본문의 송영을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 비할데 없는 하나님의 엄청난 관대하심과 깊고 깊은 지혜!
우리는 결코 다 이해하지 못하며, 다 헤아려 알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설명할 수있는 이 누구인가?
그분께 하실 일을 아뢸 수 있을 만큼 똑똑한 이 누구인가?
하나님이 조언을 구하시는 이 누구며 그분께 도움이 된 이 누구인가?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시작하고 그분을 통해 일어나며 그분에게서 마친다.
영원토록 영광! 영원토록 찬양!
오, 참으로 그러하시를!”
이렇게 들으니 더욱 하나님을 찬양하는 ‘송영’ 이라는 것이 실감나실 것입니다.
1998년도에 제작된 영화 중에 ‘조 블랙의 사랑’에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영화의 장면 설명 간단히 한 후,
“사람도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하면서, 하루의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이것 저것 결정을 내리기도 하지”
“한번에 여러가지 일을 할 수 있다는 개념을 이해했다면”
“그걸 무한대의 숫자와 영원이란 길이로 곱해보게”
저는 이 대사가, 하나님의 대해서 인간인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해의 한계를, 너무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한 문장에는 중요한 4가지 단어가 등장합니다.
태초, 하나님, 천지, 창조
그런데 이 네 단어 중에 우리가 충분히 알고 있고,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과학자들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고, 필요도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성경 제일 처음에 나오는 네 단어에 대해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누구도, 태초가 도대체 언제부터인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천지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인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조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 주인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믿지 않겠다.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들었다.
나는 하나님 없어도 충분히 선하게 살고 있고, 심지어 잘 살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 거한다는 것은,
우리가 동호회에 가입하고, 취미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사귀고, 인맥을 넓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안에서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영원한 삶과 영원한 죽음의 문제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내가 믿음이 있다는 것은, 우리 존재 안에 하나님이 주신 ‘영’이 있고, 영원을 사는 존재라는 것을 ‘각성’하고 살아간다는 뜻 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때로는 매우 약함을 경험하고, 또 부족하고, 때로는 악하고, 더럽고, 죄인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은,
우리 안에 어두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이 아니라, 죽음에 길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난척해도 우리는 불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술이든, 돈이든, 외모든,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이든, 가족이든, 그 무엇이라도 의지하는 대상이 없어지면, 곧 두려움을 느끼는 약한 사람들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위더스 가족 여러분,
한 주간동안 살아가면서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은 목사로서 굉장히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리고 주일이 오고, 주일 새벽에 설교가 잘 준비되었으면 저는 행복합니다.
한 주간이 삶이 마치 성공적인 것 처럼 생각도 됩니다.
그러나 설교를 준비하는 그 의도가 하나님을 향해 있다고 하더라도,
상당부분 저는 설교 준비가 잘 되면, ‘자기 만족’을 느낍니다.
우리의 본성에 죄성이 있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영광을 얻을 수 있을지에 관해서만 생각합니다.
또 그것에 대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고민하고 염려하며 지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을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충분히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선하고, 내 인생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영광을 얻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는 손흥민 선수가 진짜 멋진 골을 넣었습니다.
모든 선수들이 너무나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손흥민 선수,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기쁨일 것입니다.
이렇게 개인이 열심히 노력해서, 어떤 성과를 내고,
그 과정과 결과에서 기뻐하고 영광을 누리는 것을,
‘자아실현’ 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표현하면 그 모습은 ‘자아실현’이 아니라,
‘자아 도취적인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것은 손흥민 선수 이야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든 사람은, 자아 도취적은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저와 여러분이, 정신없이, 그리고 열심히 살아왔던 우리의 삶에서 잠시 멈춰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야하는 본래의 목적을 떠올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도록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싫다구요? 그렇게 살기 싫다면요? 하는 질문이 들리는 듯합니다.
그럼 이것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모두 음식을 먹도록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플라스틱이나, 고무를 먹으면 안됩니다.
인간이 만든 자동차도, 경유를 넣는 차와, 휘발류를 넣어야 되는 차와, 가스를 충전해야 하는 차로 나뉘어 집니다.
인간이 경유를 넣는 차로 만들었는데, 만일 추억의 만화 ‘아기 자동차 붕붕’ 처럼 자동차가 말을 할 수 있어서 “나는 휘발류를 먹고 싶은데?” 하면 뭐라고 말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우리의 신앙고백서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많이 알려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제 1문은 이것입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답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 것이다.” 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위더스 가족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에서 자주 실패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자아도취적인 본성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두움의 본성이고, 죄된 본성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 목적와 반대로 살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의 참 형상을 잃어버리고 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죽음을 목표로 방향을 정하고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오늘 우리의 본문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 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한 걸음씩 걸어가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의 성공과 행복, 그리고 그럼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이 받을 영광을 꿈꾸고 살아가지만, 사실 우리는 그렇게 창조되지 않았음을 생각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도록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므로 힘을 얻고 살아가도록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시상식에서 가수나, 배우나, 운동선수들이 상을 타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라고 할 때의 그 말이, 그런 뜻 입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을 창조의 목적임을 인지하고 말하는 분도 있고,
그냥 자신의 성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라는 고백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상으로 받음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세상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제 얼굴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사람들입니다.
정말 그러냐구요?
이런 말들 많이 하지 않습니까?
내가 누구를 위해서 살아왔는데? 이런 놈을 데려와?
내가 누구를 위해서 살아왔는데? 저런 계집애를 데려와?^^
우리를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그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지 않습니까?그래서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이렇게 노래도 하고, 말도 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고, 목숨까지 바치는 스토리의 영화나 드라마가 끊임없이, 시대를 초월해서 만들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누구의 영광을 위해서 사시겠습니까?
죽음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로.., “우리, 맞게 가고 있는 것 맞습니까?”
하나님께서 고향을 향해 방향을 정하고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의 모습을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신 것은,
그것 잡아서 맛있게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 안에서도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하고,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느끼길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지혜롭게 보존하고 관리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연어도 자기가 돌아가야 할 본향을 향해 가는데,
우리도 그렇게 방향을 올바로 정하고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애굽에서, 바벨론에서 광야로 나온 사람들입니다.
세상 속에 침투한 하나님 나라인 교회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믿음 하나 가지고 광야로 나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광야생활에 어떠한 역경과 고난이 있어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과 언약궤가 있었듯,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었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있었듯,
우리에게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거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를 통해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내 삶이 하나님 나라라는 본향을 향해 올바로 서 있는지,
자아도취적 내 본성의 요구가 아니라,
우리 내면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맞게 가고 있는지, 도전받으시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지혜
롬 11:33-36
신앙의 원인과 결과는 오직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신앙의 결과는 하나님에게 두되 원인은 사람에게로부터 출발을 시키려고 합니다. 사람이 한게 있으니까 하나님이 그에 따른 보상을 하시거나 심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이 원인이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결과를 끌어내었다는 것은 성경에서는 용납하지 않는 생각입니다. 가령 '십일조를 안할 때는 돈도 잘 안벌리고 집안에 우환이 생기더니 십일조를 잘하니까 일이 잘되고 가정이 평안해졌다'라고 한다면 결국 십일조를 한 인간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서 복이라는 결과를 끌어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에 끌려 다니면서 복을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는 오직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33절에 보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깊으신 하나님의 지혜와 부요하신 지식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판단과 인간이 찾을 수 없는 하나님의 길에 대해서 찬양을 합니다.
앞에서 사도 바울은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에 하나님의 택하심이라는 방법이 동원된 것은 애초부터 인간의 행위에는 구원을 받을만한 가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순종치 않음에 가두어 두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순종하고자 하는 인간을 억지로 순종을 못하도록 막았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는 복음에 순종할 수 없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긍휼로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순종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순종할 수 없는 것이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주신 이유는 모든 인간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둬두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말씀은 인간의 실천의 대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를 통해서도 말씀이 실천되어지고 행하여진 적이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말씀 앞에서는 순종치 못함만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지혜, 지식이라고 말하고 인간이 찾을 수 없는 하나님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 반대편에서 행동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하나님의 행동을 측량할 수도 없고 판단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의 생각 반대편에서 행동하신다는 명확한 증거물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인간도 생명의 길이 십자가에 있음을 눈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눈치를 채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힘을 다해서 십자가에 있는 생명의 길을 부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했던 생명의 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법에 대해서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사 잘 드리고, 제물을 아낌없이 바치며 살면 그것이 곧 생명의 길인 것으로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생명의 길이 있는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착각은 오늘날도 난무하고 있지 않습니까? 생명의 길로서 십자가가 분명히 제시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른 생명의 길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빈몸으로 단지 십자가에만 있으면 되는데 사람들은 빈몸이라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빈손으로 오는 자를 싫어하실 것이라고 제멋대로 상상을 하고서는 잔뜩 뭔가를 들고 나오려고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말하되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한 어리석은 인간의 종교생활인 것입니다.
생명의 길이 우리의 행함과 십자가가 합작된 열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생명의 길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는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이 기쁜 소식에 대해서 반감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깊으신 지혜를 깨닫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고전 1:24절에 보면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과연 누가 원했습니까? 세상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하나님에게 요청하기라도 했습니까? '하나님 우리는 의에 대해서 너무 무능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의되시는 분을 보내셔서 그분으로 인해서 구원을 얻도록 해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해서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언약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살았던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34,35절에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라고 말씀하는 것도 그런 내용입니다. 누가 과연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 알아준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드린 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우리가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것이 되고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것이 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36절에서도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만물이 없고 주께로 돌아가지 않을 만물이 없습니다.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이 자기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세상 만물 안에 있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입니까? 없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새삼스럽게 하나님에게 바치고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바치나 안바치나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마음대로 주셨다가 가져가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 있던 것이 사라진다고 해도 우리는 아무런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이 다시 가져가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모든 원인과 결과는 오직 여호와께 있음을 말씀하고 있음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일에 보탬이 되거나 도움이 된 적이 없습니다. 아예 하나님의 생각이 어떤 것이며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도 몰랐던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에게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서 아무런 할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할게 있다면 단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과 공의로우심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는 삶은 우리를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하신 분이며 긍휼이 풍성하신 분인가를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있어서 삶의 유익이라는 것은 물질적으로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사랑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신다는 것을 알아 가는 것에 삶의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머리 숙이며 진심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살아가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은총이며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원한적도 없고 필요성을 느낀 적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그리스도 앞에 세우시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하신 것만큼 큰복이 없습니다.
여러분, 생명의 길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인정하십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생명의 길 되신다면 우리에게서는 그 어떤 행위도 생명의 길에 있어서 보탬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지혜와 믿음은 누구로부터 나온 것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이 긍휼로 말미암아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종교개혁의 세가지 정신
롬 11:33-36 / 조승철목사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께 대한 세가지 중요한 고백이 나온다. 36절을보면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한다. 즉 창조신앙의 고백이다. 둘째는 만물의 지속 역시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즉 만물의 생존의 근거 역시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만물은 결국 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고백이다. 시작하신 분이 모든 것을 마무리 하실수 있다. 결자해지이다.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구원얻는 자들도 있고 심판과 형벌을 받을 자들도 또한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이 여기 36절의 최종적인 고백이다.
1. 종교개혁은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을 새롭게 고백하고 회복하는 운동이다.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교단이 속해있는 [개혁장로교회]의 기치이다. 교회뿐이 아니다. 종교개혁이라고 해서 그저 뒤집고 바꾸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침해를 당하거나 누군가가 하나님의 위치에 자기를 올려놓고 하나님의 받으실 영광을 가로채고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 닮아닌 종교개혁이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었을때의 현실은 로마 천주교회의 주권이 하나님의 주권을 대신하였고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과 존귀를 교황이 받고 있는 현실이었다. 왜냐하면 교황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본문 36절을 본다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이 바로 로마 천주교회의 교황이 다스리는 것으로 되어버렸다! 교황이 교황으로서 자신의 거룩한 직무와 사역을 행하는 데에는 전혀 오류가 없다는 [교황무오설]이란 교리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바로 이런 현실속에서 지금부터 479년전 종교개혁의 횃불이 높이 들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종교개혁은 [올바른 복음신앙]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을 바르게 회복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들의 현실을 들여다 보면서 첫째는 나 자신을 개혁하며 나아가 종교개혁의 정신은 올바로 실천하여야 하겠다.
2. 종교개혁은 [영성과 질서]의 조화를 찾는 것이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때 드디어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그 이후로 황제도 교인이요 대신들도 교인이요 평민들도 교인이 되었다. 교회 예배당은 크게 건축되었고 기독교 문화도 활발히 발전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기독교가 국교로 되기 전 끔찍한 박해시대에, 사자밥이 되면서도 손에 손을 잡고 찬송을 부르던 그 영성이 점점 사라져버린 것이다. 즉 교권과 질서가 확립되어 갈수록 영성은 점점 고갈되어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제도화하고,권력화하면 영적인 생명력은 메말라버리고 결국시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교회에서 열심히 모이고 회의도 한다는 데에는 목적이 있다. 말씀으로 무장하고 기도로 영성을 회복하고 더 좋은 새로운 길을 찾아보기 위함이다. 모이기는 하고 회의도 많이 하는데 교회가 제도화되고 권력화 되어서 굳어져 있다면 ,그 교회는 전혀 부흥할 수 없을 것이다.중세로 갈수록 이러한 교권화와 제도화가 심해졌고 이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것이 바로 수도운동이었다. 영성을 강조하고 청빈과 고행으로 복종의 삶을 실천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너무 영성으로 치우치다가보니 신비한 이적기사에 몰두했고,교권화되고 제도적으로 굳어버린 교회를 비판하다 보니까 그만 교회의 직제와 질서까지도 다 부정해 버리는 양상을 낳고 말았다. 그러나 교회에 있어서 질서란 참으로 중요하다. 목사와 교우들 사이의 질서가 있어야 하고 교우들 간에도 직분에 따라서 질서가 있어야 한다.무질서한 교회는 추하다. 아무리 신비한 은헤를 많이 체험했더라도, 교회안에서 질서를 모르고 날뛴다면, 그런 불순종의 사람은 책벌을 받아 마땅하다. 이처럼 참으로 아름다운 교회, 바람직한 교회는 [영성과 질서가 올바르게 조화를 이룬] 교회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3. 종교개혁은 오늘의 현실속에서 [살아있는 성도]로 사는 것이다.
불신자들이 고백하기를 "내가 교회가 하는 일을 보니까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으며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겠더라" 이러한 영적인 영향력을 보이며 범사에 좋은 본을 보이는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 종교개혁을 실천하는 것이다. "장로님이 대통령 하시는 걸 보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 줄 알겠더라 " 이렇게 되어야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대통령을 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최근 이명박장로 이양호장로의 구속은 우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사건이 아닐 수없다.성도는 이름만 성도가 아니다. 이 땅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으로 살아야 진짜 산 성도이다.그리고 다른 모든 면에서도 1등 시민이 되어야 한다. 모든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개인적인 이익이나 감정을 앞세워서는 안된다. 지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을 통하여 폭넓게 모든 일을 처리할 줄 알아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임기 웅변으로 주먹구구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 앞에서 책임지는 자세]로 해야 한다.즉 사람의 평가보다는 하나님의 평가를 더 두려워할 줄 알아야 1등성도요 1등 시민이다. 권력을 휘두르며 지배하며 명예를 누리기보다는 권력을 하나님께 받은 책임으로 알고서 더 많이 봉사하며 보람있는 일을 통하여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1등 시민이다. 여러분은 모두 이러한 살아있는 성도요 또한 1등시민으로 살수 있기를 바란다.
맺음말 : 오늘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시키며,영성과 질서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가며 살아있는 성도로서 고백적인 삶을 실천하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아멘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롬 11장 33~36절 / 이수영목사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바로 앞서는 부분(롬11:25-32)에서 그가 깨닫게 된 신비를 언급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이 우둔하여지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게 된 것이고, 그 때문에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된 것이며, 이방인들이 누리는 긍휼 때문에 이스라엘이 이를 시기하여 그들도 다시 하나님의 긍휼을 얻도록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신비에 관한 그의 생각을 결론짓는 것이기도 하고 로마서의 처음부터 오늘 본문까지의 그의 모든 신학적 사고 끝에 내리는 결론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핵심진리와 우리를 구원하시는 계획을 실현시켜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그 누구보다도 또 그 어디에서보다도 이 로마서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설명이 모두에게 완벽하게 설득력 있고 구원의 진리에 대한 궁금증을 깨끗이 다 해소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사도 바울 자신도 분명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신비의 일부분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의 일부를 들여다본 그는 그 신비의 무한히 깊음과 더 이상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인간의 한계를 동시에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과 지혜 그리고 자신과 모든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확신을 깨닫는 순간 그 신비를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노력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음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대단히 신학적이던 그의 설명을 그치고 찬양과 경배로 돌아선 것입니다. 아니 그의 신학적 논술을 찬양과 경배로 결론지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구원의 신비 앞에서 궁극적으로 만난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 자신의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지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전체로 경배하고 찬양해야 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감탄과 찬양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33절에서 쓰기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밑바닥을 볼 수 없게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의 누가 불순종을 자비 베푸시는 계기로 돌려놓고 그 자비가 모든 믿는 이에게까지 미치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고, 그의 결정은 인간의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가 찾을 수 없고, 그의 방법은 신비스러우며 우리의 파악능력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의 행동의 이유를 우리가 어찌 이해할 수 있으며 그가 일하시는 방법을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사55:8) 하셨고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9)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미리 알 수도 없고 어떤 길을 통해 그 계획이 이루어지게 하실지 짐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생각은 그러나 언제나 옳으며 그가 하시는 일은 항상 선하고 위대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존하신 지혜자이시기에 그의 마음을 알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감히 그에게 고문이나 자문이나 책사나 장자방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한 말이 34절의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마음을 알 자가 없으니 누가 그에게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합니다. 본문 35절의 그 말은 욥41:11의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의 인용입니다. 하나님께서 갚으시도록 무엇이든 먼저 하나님께 드린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있는 것 가운데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드리고 그 당연한 대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빚진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순순한 자의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그에 의해 유지되고 인도되며 그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며 그리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영원히 영광과 찬양이 돌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생각을 표현한 것이 본문 36절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의 구원에 관계된 모든 일들은 처음과 중간과 나중이 다 하나님의 은혜롭고 지혜로운 주권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의 온갖 의심과 망설임을 흩어버리고 우리 모두의 믿음을 확고히 하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전적인 신뢰와 감사와 순종을 드리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선하신 뜻을 가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우리와 함께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는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생각 속에, 하나님의 뜻 속에,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는 일입니다.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 잘 몰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기한 은혜를 감사히 받아들이고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미국의 그랜드 캐년이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국경에 있는 이과수 폭포 같은 웅장한 경관 앞에 서있다면 그 대자연을 즐기면 되는 것입니다. 그 장관을 즐길 생각은 하지 않고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경관이 진짜인가 아니가? 내가 왜 이 경관 앞에 서 있게 되었는가만 묻고 따지는 사람처럼 딱한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그 놀라운 구원의 역사 앞에서 감탄하고 감격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은혜를 찬양하지는 않고 하나님이 왜 날 구원하는가? 왜 다른 사람은 아닌가? 이 구원이 사실인가? 등등 질문만 던지고 있다면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지금까지의 삶은 우리가 알건 모르건 다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과 인도하심 가운데 이루어져온 것입니다. 기쁘고 즐겁고 행복했던 일뿐 아니라 슬프고 괴롭고 불행하다고 여겨진 일들조차도 하나님이 모르게 되어진 일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자신의 지시와 명령을 따라 일어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우리가 얼마간 슬프고 고통스럽고 불행한 일들을 겪었다 할지라도 지금 이렇게 살아남은 것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지나간 슬픔과 고통과 불행은 언젠가 반드시 좋은 일로 결실할 것입니다. 그때 가서야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에 감격하며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십시오. 얼마나 억울하고 슬프고 괴로운 일을 당했습니까? 형들의 미움을 사서 먼 나라로 팔려가 졸지에 사랑하는 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천애의 고아가 되었고 죄 없이 감옥살이까지 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의 일시적인 고난을 이용하셔서 그의 온 가족을 다시 만나게 될 뿐 아니라 그들을 모두 기근에서 살리고 이집트 백성 전체를 구하며 온 가족이 이집트 왕 바로의 다음 가는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직업군인이 되고 싶어서 자원하지 않는 한 군대 가기를 즐거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남자들의 경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어차피 가야하니까 기왕에 갈 바에는 사내답게 씩씩하게 가자 해서 가는 것이지 군대생활이 좋아서 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또 가능하면 군복무를 짧게 하기를 원하지 길게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공군에서 만 4년, 임관하기까지의 훈련기간을 합하면 4년 4개월을 복무했습니다. 그 당시 ROTC를 하면 2년 만에 군복무를 마칠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뭐 공군이 좋아서 4년 4개월씩이나 군복무를 한 것 아닙니다. 국가에 더 충성봉사하려고 긴 기간을 택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손해 보지 않으려고 공군을 지원한 것입니다. 제가 대학 졸업이 가까워오던 때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 복무하다가 때맞춰 제대를 앞둔 대학선배가 공군에 와서 자기 후임이 되라고 하면서 사관학교 교관이 되면 기간은 조금 길어도 대학원도 다닐 수 있고 계속 공부하면서 생도들을 가르치면 그보다 더 좋은 길은 없으며 4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손해가 아니라는 말에 솔깃해서 공군을 지원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저의 생각과 결정을 오늘의 저를 위해서 이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바라던 대로와는 전혀 다르게 저를 훈련시키셨습니다. 제가 입대한 때가 1968년 3월 초인데 바로 그 한 달 반 전인 1월 21일에 북한의 특수군인 124군 부대 소속의 무장공비 일당이 청와대를 까부수겠다고 내려온 소위 1.21사태가 터진 것입니다. 전군이 발칵 뒤집혔고 갑자기 훈련이 극도로 강화되었습니다. 공군은 3군 중에서 훈련이 제일 가볍고 장교들도 다 신사적이라고 들었었는데 정말 지옥훈련을 시키는가 하면 교관들은 하나같이 악질에다 독종들만 모아놓은 것 같았습니다. 훈련이 끝나고 임관을 하고 보니까 또 다 신사처럼 보이기는 했습니다. 훈련은 힘들었지만 원하는 대로 교육장교로 특기를 부여받았고 또 공군사관학교로 배속을 받았습니다. 계획대로 순풍에 돛단 듯 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가지 바라고 4년 4개월의 공군 복무를 지망했던 사관학교 철학교관의 꿈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2년 후에 어떤 선배가 그 자리에 오게 되어 있기 때문에 제가 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4년 4개월을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모르는 절망감이 닥쳐왔습니다. 그런데 그건 또 약과였습니다. 교수부 철학교관 대신 발령받은 보직이 생도전대 군사훈련교관이었습니다. 4년 동안 사관생도들 군사훈련을 맡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찔했습니다. 철학공부 계속하려던 꿈뿐만 아니라 인생이 다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군대는 군대였습니다. 게다가 초비상시국이었습니다. 명을 받들어서 4년 동안 제식훈련부터 시작해서 총검술, 사격훈련, 각개전투, 분대전투, 소대전투, 화생방훈련, 고지탈환훈련 등으로 생도들을 훈련시키느라 연병장과 사격장을 오가는 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전군을 정예화하라는 대통령의 특별 지시에 따라 공군에서도 공수훈련과 유격훈련을 시행하라는 명이 떨어졌습니다. 각 기지마다 자체에서 교관요원을 차출해서 그런 훈련을 전담하는 특수부대에 보내 교육을 받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뽑혔겠습니까? 훈련의 성격상 군사훈련교관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짜 지옥훈련이란 게 거기 있었습니다. 그 훈련 마치고 나니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게 없고 무서운 게 없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사관학교로 돌아오니 기동타격소대 소대장이라는 새 직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실미도 사건이 터졌을 때 진압군의 일원으로 소대원을 이끌고 출동하기까지 했습니다. 대치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상황이 끝나서 교전할 기회는 없었지만 그때도 정말 위기일발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어릴 때 늘 몸도 약하고 심약하기도 했으며 남 앞에 나서서 말도 잘 못하는 성격의 저를 변화시키셔서 오늘날 이렇게 쓰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믿습니다. 몸도 건강하게 해주고 정신력을 강하게 길러준 군대생활을 하게 하신 하나님께 저는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철학교관 안 된 것이 너무나 잘 된 일이라고 여깁니다. 군사훈련교관이 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되레 아찔합니다. 자녀들 군대 보낼 때 어머니들 울지 마세요. 군복무하는 자세에 따라 어디서도 돈 주고도 얻지 못할 귀한 경험과 소중한 삶의 자산을 얻게 하는 데가 군대입니다.
한 가지 경험담만 더 짧게 하는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신학대학 교수로 있을 때인 1997년 2월 대장암 수술을 받고 1년간 학교를 쉬면서 항암치료도 받으며 투병생활을 했습니다. 대장암이라는 판정을 받는 순간 잠시 눈앞이 캄캄해지고 “하나님, 왜?”라는 물음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시기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곧 제 마음에 그것이 저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놀라운 은혜의 기회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암에 걸려 수술을 받을 일로 인해서 얻은 유익은 많이 있지만 가장 감사한 것은 육신의 암을 통해 제 속에 숨어있던 영적 암을 발견케 하시고 그것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것입니다.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입원해 있는 기간만 빼고는 매일 하루를 거의 온전히 기도와 성경일기로 지내던 그 투병기간은 정말 뜨거운 은혜의 시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암 걸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사람이라는 공식이 제게서 나올 정도였습니다. 암수술을 받고 투병해본 일이 오늘 이 교회에서의 제 목회의 무거움을 얼마나 가볍게 덜어주고 있는지 여러분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저는 암 안 걸렸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고 늘 생각합니다. 그래서 진짜 은혜 받고 싶은 사람은 그저 암에 한 번 걸려보는 것이 제일이라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할 정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찬양하듯이 선하시고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를 위한 사랑을 실현하시는 지혜와 그러기 위해 그가 취하시는 길은 우리가 이루 다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세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선하신 계획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경배와 찬양밖에 없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통해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늘 우리의 입에서 찬양이 그치지 않으며 우리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경배로 가득 찰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롬 11장 33~36절 / 이필재목사
수요일 로마서 강해 공부 때 여러 번 제가 강조한 내용이 있습니다. 로마서 구조는 1장에서 11장까지는 교리 부분이고, 12장에서 16장까지는 그리스도인의 윤리 부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내가 왜 예수를 믿어야 되는가? 예수님과 나의 관계성,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이런 모든 문제를 1장에서 11장까지 기록하다가 오늘 11장 마지막 부분에 와서 사도 바울은 감탄시 하나를 씀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 본문의 말씀은 바울 사도의 신학과 신앙의 간증으로 봐야 합니다. “그가 이해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런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많은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똑같은 예배 모범의 절차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의 고백은 하나님에 대해서 다 다른 모습으로 조명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똑같은 일을 경험했는데도 거기에 대한 신앙적 평가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를 보면 얼마나 많은 교파의 분열이 있었는지 우리가 인정합니다. 희랍 정교회가 있고, 로마 가톨릭 교회가 있고, 프로테스탄트 개신교회가 있고,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할 것 없이 수백 갈래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신앙고백의 차이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제가 몸담고 있던 미국 장로교 PCUSA라고 하는 교단은 언더우드를 우리 한국에 파송한 교단입니다. 40년 동안 신학 논쟁을 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동성연애자에게 목사 안수를 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에 동성연애는 죄다. 평신도도 동성연애를 하면 안 되는데 동성연애 한 사람에게 어떻게 목사 안수를 주느냐?” 반대합니다. 한 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저주받은 인생이냐? 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지 않느냐? 그 사람의 영혼은 영원히 저주 받을 자라고 규정해버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이냐?” 어디가 옳습니까? 그래서 40년 동안 계속 논쟁하며 끝이 안 나다가 지금 결정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또 둘로 갈라지는 모습입니다. 지금 막 갈라지면서 “그러면 우리는 이 교회에 안 있겠다.” 나가고, 그대로 있고 이것이 금년에 굉장히 큰 이슈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영혼의 신학과 신앙 고백이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내가 신앙생활 잘 할 수도 있고, 잘못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의 교리적 내용을 끝내면서 아주 흥분적 감격으로 영적 시 한편으로 마감하는 내용입니다. 여기 뭐라고 시를 썼느냐 하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리고 만물을 연결 지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이해할 때 두 가지 표현을 특별히 했습니다. 만물을 보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말했고 우리 인체, 사람의 몸을 보면서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에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경이 쓰여질 때 헬라 문화는 지혜와 지식을 ‘소피아’와 ‘그노시스’라고 사용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도 모든 인간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어떤 힘을 지식에서 얻고자 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학문 과정을 거치는 것이고 그 지식이 지혜롭게 활용되는 힘을 키워오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지식이 많은데 지혜가 없어서 그 사람의 그 많은 지식이 별로 유익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을 쌓지 못했는데도 매우 지혜롭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한 사람이 있습니다. 지혜도 많고 지식도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주 훌륭한 일을 합니다. 더 특별한 사람이 있습니다.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무지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주 특별한 사람이 있습니다. 소피아와 그노시스 상관없이 영적인 능력이 주어진 사람입니다. 바울은 여기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적 능력이 주어진 아주 특별한 택함 받은 백성이다.” 이렇게 규정하는 것입니다. 만물을 바라보니까 “깊도다!”라는 감탄사로 오늘 말씀을 시작하고 있는데 “얼마나 깊으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우주 만물의 운행을 바라보니까 하나님의 소피아와 그노시스의 풍성함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언어로 헤아릴 수 없는 신비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은 영어에서 번역이 되었기 때문에 설교자들은 설교 준비를 할 때 어쩔 수 없이 영어 성경을 봐야 할 때가 많습니다. 바로 이 부분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어떻게 영어 성경이 말했느냐 하면 “unfathomable”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소피아와 그노시스는 해결할 수 없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또 요즘의 성경이 쉬운 말로 번역이 되었는데 거기 보니까 “unsearcha-
ble” “불가사의한” 그러면 그러한 지식을 우리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게 바로 영적 계시이다. 그래서 아주 특별한 사람이다.” 이미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바라보면서 “피조물이 고대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말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만물은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나님의 창조물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다. 그래야 피조물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수 있는 자격이 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에 있어서 우리 현실적으로 금년 여름에도 대단히 기온이 올라가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한국은 동남아보다도 이제 날씨가 더 더워졌습니다. 여름 내내 우리 모두를 불편하게 한 뉴스가 계속됐습니다. “전력이 모자라니까 큰일 났습니다. 전기를 아껴 쓰십시오.” 이 방송이 여름 내내 나왔습니다. 실제로 큰 불편을 겪은 사람들이 많았고 산업에도 큰 지장을 주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만들어 사용하는 전력 발전소가 자꾸만 고장이 난다는 것입니다. “지금 몇 호기 발전소가 고장이 나서 멈추었습니다. 몇 호기도 불안합니다. 제발 전기 좀 아껴 쓰십시오.” 여름 내내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지 않습니까? 사실 이 기술 분야는 우리나라가 인정을 받아서 이미 세계 여러 나라 원자력 발전소 건설 계약을 맺었고 지금 공사 중에 있습니다. “한국 기술이면 넉넉하다. 어느 기술보다도 믿을 만하다.” 그래서 그런 천문학 숫자에 돈을 내고 공사를 맡긴 거 아닙니까? 그런데도 여름 내내 들려온 소식은 불안했습니다. “오늘은 관심 단계입니다. 오늘은 경보 수준입니다. 오후 한시부터 다섯 시까지 전기 끄십시오.” 항상 그러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만드신 발전소를 한번 평가해 보십시오. 태양 발전소를 만들어놓으셨습니다. 수십억 년이 지나도 한 번도 고장 안 났습니다. 관심 단계 한 번도 안 갔습니다.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햇볕 덜 사용하라.” 한 번도 말씀 안하셨습니다. 원자력 발전소 하나 짓는데 수천억 들어갑니다. 크기가 갈보리 교회 같은 이 정도 덩치에 발전소인데 수천억 들여서 건설합니다. 만약 이 원자력 발전소의 크기를 아주 크게 해서 그 부피가 경기도 만하게 만든다면 그 경비는 얼마나 들겠습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수학으로 표현할 수 없는 정도의 돈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돈도 안들이고 말씀으로 저렇게 큰 발전소를 만드시는데 얼마나 크냐? 지구 100만개를 합친 것보다 더 큰 발전소입니다. 발전량은 1500만대의 열을 발전할 수가 있습니다. 전기 값 안 받습니다. 공짜로 주십니다. 얼마나 관리를 잘하시는가? 어떤 행성에도 피해를 주시지 않습니다. 지구와의 거리 조절 정확합니다. 인간에게 걱정 끼치는 거 하나도 없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소피아와 그노시스여!”
그 다음에 바울서신에 우리 인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 인체를 보라. 우리 몸에는 세포가 얼마나 되느냐? 어떤 과학자는 7조나 된다고 하고 어떤 과학자는 7백조도 된다고 합니다. 하여튼 그 정도의 많은 세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세포가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게 우리입니다. 지금 제가 설교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하는 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각기 다른 모양과 기능에 7조개나 백조 개나 넘는 세포가 똑같이 각기 다른 움직임을 움직여주기 때문에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얼굴을 제가 마주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얼굴을 바라본다는 그 목표를 위해서 내 몸에 1억7천만 개의 세포가 협동해서 일을 해야 비로소 보이는 것입니다. 빛을 통과시키는 렌즈의 기능이 필요하고 거리를 맞추는 초점 조리개가 재빠르게 움직여야 되고 보일 수 있는 영상을 그릴 수 있는 망막이 순식간에 그림을 그려야 되고 신호 전달 신경이 중추 신경에 직통 전화를 해서 그래서 비로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7조개 이상의 세포는 각기 다르면서도 통일된 요소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유전자라고 합니다. 왜 세상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똑같은 사람이 없는가? 그 많은 DNA 하나만 달라도 다른 사람의 모양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체 안에 있는 그 많은 DNA를 풀어서 “앞으로 나란히”를 시킨다면 지구에서 태양을 400번 왕복할 수 있는 거리가 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unsearchable” “unfathomable” “불가사의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지식의 풍성함이여!” 이렇게 감탄시를 쓴 것입니다. 유전자가 우리 인체에 통일성을 이루어 유지하는 것과 똑같이 바울 사도는 이 교회를 영적 유전자로 해석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7조개 이상의 세포가 다르듯이 모두 각자 다를 수가 있지만 그러나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는 동일성을 이루는 영적 유전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십시오. “사역은 여러 가지이나, 세포는 달라도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신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을 유익하게 하심이라.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가는 것이라.”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예언함을, 병들 분별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또 다른 사람에게는 방언의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성령이 행하사”라고 했습니다. “다 달라도 하나의 유전자 목표를 향하는 교회이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눈이 손더러 나는 네가 쓸데없다 하거나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지 못하리라. 세포는 달라도 유전자는 같다.” 바울이 그렇게 본 것입니다.
우리가 늘 하는 기도문 가운데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다. 못하는 일이 없고 안 계신 곳이 없다.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살피사” 이런 단어들을 씁니다. 그러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한번 판단을 해서 ‘하나님 혼자서 온 세상에 그 많은 사람이 일하고 밥 먹고 죄짓고 장난하고 놀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일일이 세밀하게 관찰하시느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요즘은 하나님이 뭡니까? 사람들도 다 관찰합니다. 과학이 하나님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CCTV라는 것을 만들어놓으니까 24시간 365일 교회도 CCTV가 얼마나 많은지 누가 몇 시에 문에 들어섰으며 몇 시에 나갔으며 사무실에 누가 왔으며 그 복잡한 시골 골목도 시장 골목도 CCTV 하나만 있으면 비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동차에도 블랙박스라는 것을 달아놓으니까 누가 몇 시에 내 자동차에 왜 접근했는지 다 보지 않습니까? 어두워도 다 나타납니다. 요즘에는 뭐까지 나타났느냐? “다본다”라는 것이 나왔습니다. 인간도 다 봅니다. 선진국들이 하늘에 띄어놓은 위성들은 지구 어떤 곳이라도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도 아리랑호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계를 다 보는 것입니다. 사람도 다 보는데 하나님이 못 보시겠습니까? 유치원 아이들은 숨바꼭질 할 때 자기가 못 보면 다른 사람도 못 보는 줄로 생각합니다. 궁둥이는 하늘로 뻗치고 얼굴만 가립니다.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는 불가사이하고 측량할 수 없으며 헤아릴 수 없이 깊도다.” 하나님을 그렇게 보았습니다.
지금 바울의 감탄의 골자가 무엇인가? 왜 이렇게 말하고 있는가? 그 어마어마하신 하나님이 하신 일이 뭐냐? 나를 관심해주셔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설명을 1장에서 11장까지 계속하고 지금 감탄의 시로 11장을 마감하면서 12장은 무슨 말로 시작하느냐?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큰 구원의 은총이 임하였으므로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 하는 기독교인들의 실천신학을 12장부터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시고 신비로우시고 불가사의한 존재인데 비해서 나는 너무나도 작고 티끌 같은 보이지도 아니한 존재인데 어떻게 그렇게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 나 같은 사람에게 임재하셨는가? 그 자체가 “unsearchable” “unfathomable” 불가사의한, 해결할 수 없는 신비의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가 310장을 늘 부르잖아요?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바로 그 부분 “난 알 수 없도다” 그 부분이 “unsearchable” “unfathomable”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격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나에게 관심해준 어떤 감격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들은 말 가운데, 혹은 내가 받은 어떤 인격 가운데 ‘아! 그 사람이 그때 그렇게 말한 거 정말 감격이다.’ 뭐가 있으십니까? 우리나라 언어문화 가운데는 제일 감격 표현하는 언어가 옛날 임금님에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 말입니다. 최고의 존경 언어입니다. 저만 만나면 내 손을 잡고 “목사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시는 권사님 한분이 계신데 치매 환자이십니다. 보기만 하시면 그러십니다. 또 한분은 장로님이셨는데 대중기도를 하시면서 “하나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 문장을 꼭 쓰십니다. 제가 말씀드립니다. “장로님! 그 용어는 임금님께 쓰는 용어입니다.” “아, 목사님! 거룩할 성(聖), 은혜 은(恩)자인데 쓰면 어떻습니까?” 그래서 그 장로님 별명이 “성은이 망극” 장로였습니다.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서 나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그 사실에 대한 어쩔 줄 모르는 감격 표현 “깊도다. 말할 수 없도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려주기 위해 자기 생명을 던지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강재구 소령이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서 수류탄을 자기가 덮쳐서 자기 혼자 죽고 전우들을 살렸다든가, 달려오는 지하철에 뛰어들어서 그 사람은 살리고 자신은 희생되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사실 그런 것은 십자가 정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는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 “아! 그 구원의 은총이 깊도다.”
목회를 오래하다 보니까 별 예를 다 경험하는데 교회 나오는 청년 남녀가 연예를 했습니다. 나중에 저한테 남자 청년이 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둘이 결혼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 표현을 생명 거는 일을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서라면 내 생명도 버릴 수 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요? “진짜?” “진짜다!” “그러면 해봐!” 오늘은 청년이 권총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미국은 권총은 그냥 마켓에 가서 구입하면 됩니다. 배추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청년이 권총 가지고 온 것을 여자가 보고는 “어휴! 잘났다, 잘났어! 쏴봐!” 청년이 “쏜다!” 그러면서 왼팔을 들고 오른손으로 자기 팔에다 “팡!” 쐈습니다. 그 결혼이 깨졌습니다. 둘 다 그 사건 후에 마음이 변했습니다. 여자는 ‘아니, 뭔 남자가 저렇게 경솔해? 저 사람은 언젠가 사고 낼 사람이다.’ 그렇게 판단이 되었습니다. ‘쉽게 권총 가지고 나오는 저 사람과는 결혼 못하겠다.’ 남자는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아니, 무슨 여자가 그 순간이 되면 말려야지 계속 쏴보라고 하냐? 저런 여자와는 못살겠다.’ 청년이 저한테 와서 말하는 겁니다. “너는 왜 그런 경솔한 짓을 한 거니? 네 팔만 장애인 되었지 않느냐?” “아닙니다. 목사님! 괜찮습니다. 이 팔뚝 맨 끝의 살갗만 살짝 지나가게 쏴서 딱지만 떨어지면 괜찮습니다.” “별 녀석을 다 봤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에서 예수님의 신체적 고통을 여러분 모두 보셨지 않습니까? 우리 사회는 역사적으로 감격적인 러브 스토리가 가끔 있어왔습니다. 호동 왕자를 사랑하기 위해서 낙랑 공주가 자명고를 찢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바보 온달을 사랑하기 위해서 평강 공주가 궁중을 빠져나갔다는 이야기도 있고, 윈저 공은 심프슨 여인을 사랑하기 위해서 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이야기들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래서 바울 신앙 고백은 “나 때문에 그렇게 되신 것이다. 아! 깊도다.” 여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이 모사란 말은 카운슬러, 충고하는 사람으로 “누가 예수님을 충고했느냐? 누가 예수님의 카운슬러를 해서 그런 일을 하라고 했느냐? 인간에게 충고 들어가면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냐?” 35절 “누가 주께 먼저 돼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 말은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 주제로 다뤄온 말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를 먼저 입은 것이지 내가 먼저 선한 일을 해서 그 보상으로 구원받은 것이냐?” 중세기 시절에 그러했지 않습니까? 신앙의 교리적 시행착오가 생겨서 내가 쌓는 의에 의한 하나님의 구원의 보상, 그것이 점점 발전해서 마침내 이 십자가 은혜의 기독교를 금욕 종교와 고행 종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금욕의 절제 생활을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고행을 참으면 그것이 나를 구원하는 의가 된다는, 그래서 수도원 생활이 문화화 되었고 금욕 생활은 구원의 의를 만든다고 사람들이 행복해 했지 않습니까? 마침내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종교개혁이 뒤집어엎었습니다. “이게 무슨 짓이야?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야. 예수님을 충고해서 우리가 은혜 받은 게 있냐? 그냥 주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무슨 의미입니까?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목적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저는 요한계시록 강의를 끝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약속한 계시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본래대로의 회복입니다. 우주 만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됩니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서 세세토록 왕 노릇할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덮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이대로 될 것이다.” 그게 성경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하나님의 풍요
롬 11장 33~36절 / 박종순목사
개인차가 있긴 합니다만 사람의 머리카락은 보통 10만개가 된다고 합니다. 병원에서 머리카락 1개를 심는데 만원정도를 받는다고 합니다. 합하면 머리카락 10만개 값만 10억이 됩니다. 치과에서 최고급 재료로 치아를 만들어 끼는데 개당 30만원정도를 받는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도 병원차가 있긴 합니다만..합하면 28개에 840만원이 됩니다. 안과 병원에서 두 눈을 라식 수술하는데 병원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200만원에서 300만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예일대학의 생화학 교수였던 모로비츠 막사는 인체 안에 있는 생화학 물질의 요소인 단백질 아미노산 효소등, 그 값을 따지면 6백만불이 넘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인체에 필요한 살아 움직이는 요소로 만들려면 6천만조 달러를 주어도 어렵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사람은 값으로 쳐도 은행지점보다 더 값이 비싸고 돈 다발로 치장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6에서 주님은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몸뚱이도 돈으로 따질 수 없는가 하면 사람의 생명은 세상 모든 것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부요하시다 고 했습니다. 왜 바울사도가 하나님의 풍요를 고백했는가를 본문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은 풍요하십니다.
33절을 보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 함이여 그의 판단을 측량치 못하는 것이면 그의 길은 찾지 못 할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부요 하다는 것은 차고 넘치고 넉넉하다는 것이고 측량치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크고 많아서 일일이 셈하고 헤아리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5:7을 보면 아버지를 떠나 방탕했던 둘째아들의 탄식이 나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도 품꾼도 풍성한데 나는 여기서 배고파죽는구나 라는 탄식인 것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나는 오늘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풍성하게 가지고 계십니다. 에배소서1:7을 보면 영광도 풍성하다고 했고 본문에서는 지혜와 지식도 부요 하시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많이 가지고 계신지 본문은 측량할 수도 없고 그 길을 찾을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배소서 3:19에서는 모든 것이 충만하시다"거 했습니다. 주목할 말씀은 본분의 지혜와 지식이 부요 하다는 부분입니다. 흔히 돈이 돈을 번다고 말합니다만 그건 틀린 말입니다. 돈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지식이 승패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같은 아이템이지만 누가 더 뛰어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느냐 에 따라 성패가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은사가운데 고린도전서 12:8을 보면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이 있다고 했습니다. 즉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인 지혜와 지식이야말로 창조적 아이디어를 만들어 주고 판단력, 분별력, 추진력을 제공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내 힘이나 경험이나 노하우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적 태도가 아닙니다. 헤아릴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나를 도와주셔야 성공과 형통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사회학자 앤드류 그릴 리가 657쌍의 부부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부부가 함께 기도하는 사람의 75% 결혼생활이 "매우 행복하다"고 대답했고 배우자와 함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50%정도가 행복하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부부생화도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신앙생활을 영위할 때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2. 먼저 드려야 합니다.
34절을 보면"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라고 했고 31절을 보면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라고 했습니다. 본 절의 뜻은 주님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고 바치라는 것입니다. 대학마다 비서학과라는 게 있습니다. 비서란 기획능력, 보좌능력, 판단능력, 추진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청와대 비서실처럼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도 안되고 그렇다고 전화만 받아도 안됩니다. 대통령 비서가운데 모씨는 대통령의 얼굴표정만 보아도 그 의중을 파악해 낸다고 해 화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만 비서야말로 보좌하는 분의 뜻을 맨 먼저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주님의 종들입니다. 그런데 주인 되시는 분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가 하면 좋은 것은 모조리 착복해 보리고 살면서 주님의 종입니다 라고 한다면 어느 주인이 그 종을 집에 머물게 하겠습니까? 종이 지녀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먼저, 나는 나중"이라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만들 뺏지 가운데 예수 제일(Jesus first)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광도, 찬사도, 물질도 주님께 먼저 드리고 주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나는 그 다음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주인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냐 에 따라 칭찬을 받을 수도 책망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협상이나 바이어와 상담을 할 때 그리고 면접을 할 때 실패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 월간지에 실린 기사입니다.
1) 머리를 만져라
2) 입술을 빨아라
3) 고무줄이나 클립을 가지고 장난을 쳐라
4) 코밑 수염을 만지작거려라
5) 손가락으로 책상등을 탁탁 쳐라
6) 볼펜으로 찰칵찰칵 소리를 내라
7) 손톱을 물어뜯어라
8) 발로 바닥을 굴러라
9) 이를 쑤셔라
10) 반복해서 안경을 고쳐 쓰라
이상들의 행동들은 안정감이 없고 산만한 몸짓 들 이어서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합니다. 상담이 깨지고 바이어가 딴 데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태도도 다를 바 없습니다. 불안정한 태도, 오만한 자세 산만한 시선, 흐트러진 집중력, 조는 것, 하품하는 것 등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른 태도가 못 됩니다.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으라"는 말씀을 주목하십시다. 운동경기에서 금메달을 아무나 타는 것이 아닙니다. 마라톤의 경위 맨 먼저 운동장에 들어온 사람에게 월계관이 돌아갑니다. 좋은 일은 먼저 하는 것이 좋습니다. 유럽에서 성공한 대기업 가운데 로스차일드사 가 있습니다. 미국에 진출할 계획을 세우고 어느 날 사장이 부하직원을 불렀습니다. "우리 회사가 미국에 지점을 낼 계획인데 당신이 떠나기전 준비기간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이 질문에 그 사람은 한참 생각하더니 10일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른 직원들 불러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3일이면 떠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장은 세 번째 사람을 불러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닌 그 직원은 "지금 당장 떠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무릎을 치며 "좋소 오늘부터 당신이 샌프란시스코 로스 차일드 지점장이요 내일 당장 떠나도록 하시오"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이 훗날 샌프란시스코 최고 갑부가 된 줄리어스메이 였습니다. 요단 강가에서 요단 강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리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지금 당장 밟으라 건너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나쁜 일은 거절하고 주저하고 미루고 연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를 위한 일은 지금 당장 해야합니다. 헌금을 예로 들겠습니다. 남과 비교하면 안됩니다. 남이야 하던말던 내가 먼저 하면 됩니다. 남이야 비난을 하든 곱씹던 상관없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대로 하면 됩니다. 봉사도 남이야 하던 말던 내가 하면 됩니다. 남이 뭐라던 개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4:3에서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일 이라"고 했습니다. 남이 뭐라던 나는 개의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4:2에서 바울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월드컵 경기 때 일입니다. 히딩크 감독은 자리에 앉아있지 않은 채 선수들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 선수를 교체합니다. 교체되는 선수는 부산이 심해 더 뛸 수 없는 선수거나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 못해내는 선수입니다. 그런 선수를 그 자리에 그냥 놔두면 팀 전략이 망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 꾀부리는 사람, 믿음으로 하지 않는 사람은 교체명단에 들어가야 합니다. 먼저 드립시다. 그리고 먼저 갚으심을 받읍시다.
3.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36절을 보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이유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했습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창조하셨다는 것이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 섭리자, 그리고 심판자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주인이시고 왕이시고 통치자이시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머리 심는 얘길 했습니다만 남자멀리 수명은 평균3∼5년이고 여자는 6∼7년이라고 합니다. 하루0.3㎜가 자라고 한달 이면 6∼9㎝가 자란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전10시에서 11시 사이 오후4∼6시 사이에 머리가 가장 잘 자란다는 것입니다. 머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런 법칙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앨버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이 남긴 말이 있습니다. "과학자가 목사를 무시하면 그는 무식한 과학자다. 목사가 과학자를 무시하면 그는 무식한 목사다."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왕으로 높이면 그는 위대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을 높이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시편145편 1절에서 시인 다윗은"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라고 읊었습니다. 우리도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왕이신 나의 예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왕이신 나의 성령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하나님께만 영광
롬 11장 33~36절 / 이종윤 목사
오늘은 추수감사주일, 교회설립 12주년, 장로 안수식, 오르간 봉헌식이 있는 날입니다. 또한 이날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갖게 됩니다. 참으로 감사가 넘치는 주일입니다. 그러면 이 감사는 누구를 위해 하는 감사입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of him), 주로 말미암고(through him), 주에게로 돌아감이라(to him)"하면서 영광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I. 하나님께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첫째, 누가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 가장 큰 이단은 인본주의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사람에게서 왔고, 사람으로 말미암으며, 사람에게 돌아감으로 영광은 사람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영광은 모든 것의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만 받으셔야 합니다. 교회 설립 12주년을 맞이하여 수고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어야 합니다.
둘째 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까?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도 내가 만든 것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II. 크리스챤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 두가지를 말해줍니다.
첫째, 하나님과 피조물에 대해 말해줍니다. 만물(All things)이라는 말은 피조물을 말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 우주 전체가 주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또한 만물의 창조 목적은 우리를 위한 것이나 만물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과 복음에 대해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시간표를 성취하는 것, 즉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고 믿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예수님이 모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III.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릴까?
첫째, 우리의 재능과 은사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생각하고, 둘째, 우리가 받은 구원 은총을 생각하며, 셋째, 시험과 유혹에서 건져 주시고 지켜 주심을 생각해 보고, 넷째, 크리스챤으로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감사요, 하나님께 영광 돌릴 일이 아닙니까?
맺는말.
크리스챤의 삶의 원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어떤 형편에 처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좋은 교회, 귀한 열매(추수), 귀한 동역자, 가정을 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는 일꾼으로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감사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코드
롬 11장 33~36절 / 오정호목사
코드(code)는 한사람의 삶 또는 어떤 사건을 풀어내고 이해하는 기본 되는 열쇠를 말합니다(decode/암호를 풀다.decoder/암호해독자, 해독기) 시오노나나미는『로마인 이야기』서두에서 "인재를 배출해내는 인재개발시스템"이 세계최강 로마를 지탱할 수 있었던 코드였다고 말합니다. "바다를 장악한다"는 코드는 엘리자베스 1세를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가 됩니다. 미국이나 유럽에 사는 많은 동포들은 교회가 삶의 중심이었기에 "교회"는 그들의 삶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코드가 됩니다. "순종하는 믿음"은 아브라함의 삶 전체를 해석하는 코드가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의 중심코드는 무엇입니까? 한줌밖에 되지 않는 우리의 인생을 압축하고 압축하면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무엇이 되기를 기대합니까?
로마서 11장 36절 말씀에 사도바울의 삶이 다 압축되어 있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36절). 우리가 주님에게서 왔고,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써 살고, 우리가 돌아갈 고향은 궁극적으로 주님의 품입니다. 우리의 삶가운데 주님을 빼고는 우리의 삶이 서있을 수도 없고 해석될 수도 없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모든 우리 인생은 주님께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마음속에 뼈져리게 느꼈던 사도바울은 그의 삶의 코드로서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산헤드린 공회의 공회원이었고, 당대 최고의 석학 가말리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고,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으로서 그를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영광(glory to God)"이라는 이 압축된 단어로 그의 삶 전체가 해석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은 사도바울을 해석하는 인생코드였습니다.
사도바울의 삶이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코드도 동일하게 "하나님께 영광"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단어에 우리의 삶이 집중되기 위해서는 훈련과 교육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인생코드로 삼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도록 힘써야 합니까? (롬12:1-2)
첫째, "하나님께 영광"을 인생코드로 삼는 사람은 자신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야 합니다(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1절).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몸이 죄덩어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나면 우리의 몸이 죄덩어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앞에 거룩한 산제사로 드릴수 있는 도구로 쓰임 받게 됩니다. 비록 우리 몸을 줄이고 줄이면 한줌밖에 되지 않지만 우리가 살아숨쉬는 동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는" 은혜와 특권을 부여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섬김과 행동 모든 것이 통합되어서 하나님의 제단에 올려질수 있다는 사실을 주님은 우리에게 깨우쳐주셨습니다.
거룩한 산제사는 예배의 다른 표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나의 생명적 교감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사로잡아서 주의 은혜로 나를 이끄시는 아름다운 시간이며, 주님의 제단에 나의 모든 것(생각, 마음, 삶)을 내어놓고 주의 은혜를 간구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 그 성도는 예배에 대한 재발견이 반드시 뒤따를 것입니다. 예배하는 삶을 삽시다. 우리에게 기회가 있을때 주앞에 참된 예배자로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드립시다.
둘째, "하나님께 영광"을 인생코드로 삼는 사람은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절). 내 뜻에서 떠나서 이제는 주의 뜻에 점점 초점이 맞추어 지는 것을 변화라고 말합니다. 예수믿는 자의 기쁨중의 하나가 변화의 기쁨입니다. 안목이 달라지고, 삶의 내용이 달라지고, 열정이 달라집니다.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이 달라집니다. 변화를 받아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 주님을 높이는 사람들이 다 됩시다.
"하나님께 영광"으로 인생코드가 결정된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축복을 누리게 됩니까?
① 삶을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코드가 정해진 사람은 무익한데 허탄한데 시간을 보내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를 만나고 나서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는 코드에 집중하다보니 그는 낭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삶의 에너지를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는데 집중하다보면, 나도 살고 이웃도 살고 가정도 교회도 건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②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주님을 섬길 수 있게 됩니다. 의무감이 아니라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 축복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십니다. 이것이 인생 코드가 정해진 사람의 삶의 특징입니다. 빈익빈부익부(貧益貧富益富)는 경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생활에도 적용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더 사랑하게 되지만, 희미하게 믿는 자는 더 희미하게 믿게 됩니다. 주님은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아서 있는 자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영적인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끌려 다니며 예수를 믿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짐을 지우려고 우리를 부르신게 아닙니다. 주님은 친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마11:28). 그런데 어떤 분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짐을 더 지고 삽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모든 짐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자유를 만끽하는 믿음의 사람이 다 됩시다. 천국은 우리가 나중에 죽어서 들어가게 될 장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오늘 내가 앞당겨 살아야 될 삶의 내용입니다. 천국을 앞당겨 삽시다.
③ 서로 연결(networking)될 수 있습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코드를 붙잡은 사람은 끼리끼리 만나는 축복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혼자서 FBI처럼 예수를 믿지 말고 주님앞에 손에 손을 잡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정체를 밝히며 삽시다. 내 인생 코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원하고, 나와 나의 가정은 주님앞에 보석처럼 쓰임받기를 원하며, 예수님을 닮기를 원한다고 정체를 밝히면 이미 정체를 밝힌 사람들과 굳게 손을 잡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달려나가게 됩니다. 상호 연합은 예수 믿는 자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새로남 가족 여러분!
사도바울처럼 우리 인생의 코드는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인생코드로 결정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립시다. 변화된 삶을 누립시다. 주님께 삶을 집중하여, 예수믿는 은혜와 감격을 누리고,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코드를 붙잡은 사람들과 함께 연합하는 축복을 누리며 삽시다.
인생코드
돈으로 풀려지는 인생이 있네 예수로 풀려지는 인생이 있네
백범선생의 인생코드는 조국의 해방 외솔선생의 인생코드는 한글 사랑
빌게이츠의 인생코드는 인터넷 성도의 인생코드는 하나님께 영광
성도의 삶의 유산은 예수사랑
"하나님께 영광"을 빼고도 버젓하게 남는 인생이라면 과연 그대의 인생코드는 무엇인가
예수로 풀려지는 인생 축복된 인생
예수없이 풀려지는 인생 덧없는 인생
예수가 인생코드 될 때 죄악된 삶은 영광의 삶으로 거듭나네
깊고깊은 비밀
롬 11장 33~36절 / 김태영목사
오늘 본문은 실제적인 삶의 부분을 다루기 전, 이론적인 부분의 전체적인 결론부분으로서 바울이 그동안 다루었던 것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깊고 깊은 비밀을 깨달아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 앞에 감탄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가운데 있는 깊고 깊은 비밀을 정리함으로 이론적인 단계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실천적인 단계로 나아가는 발판을 세우려고 합니다.
1) 구원의 비밀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잘남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하였기에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는 기회를 풍성히 얻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방인들이 누리는 구원의 복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시기케 함으로 유대인의 구원에 기여할 것입니다. 바울은 접붙임의 비유를 통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스스로 높이지 말라고 당부를 합니다. 원가지도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잘려 나갔다면 신실하지 못한 접붙인 가지가 그 뿌리에서 잘려나갈 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구원의 은혜 앞에 높은 마음이 아니라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들도 돌이킬 날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은 인간이 다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았음의 근거로 다른 사람을 폄하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구원의 비밀을 아는 자답게 긍휼의 마음을 품고 구원의 나팔을 울려 부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 이루심의 비밀
34절은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의 부요함을 감히 따를 수 있는 그 어떤 존재도 없으므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셉이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될 것을 몰랐습니다. 그가 꾼 꿈과 현실은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요셉은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하나님의 이끄심에 절대 순종하였습니다. 고전1: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구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용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양식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필요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인도를 구하지만 하나님은 지난 역사를 통해 이미 응답해 주셨습니다. 한계가 있는 우리의 지혜와 지식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루심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그 비밀을 아는 자답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절대 순종하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 영광의 비밀
35절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먼저 호의를 베풀어서 하나님께서 그 보답으로 그에게 선대하시고 있냐고 묻습니다. 아무도 하나님께 무엇을 먼저 드린 적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갚으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먼저 주심입니다. 먼저 주었다는 것은 모든 것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하나님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고, 우주의 목적이 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 우주의 영광은 바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주인에게서 위탁을 받은 청지기일 뿐입니다. 선한청지기는 주인의 마음을 알고 주인이 원하는 대로 맡은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통로일 뿐입니다. 그 모든 영광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며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질 때, 우리가 통로로 쓰임 받았다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축복입니다. 영광의 비밀을 아는 자답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선한청지기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가 되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문제를 풀기 위한 공식정리를 마쳤습니다. 하나님의 깊고 깊은 비밀을 우리의 이성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구원의 비밀, 이루심의 비밀, 그리고, 영광의 비밀을 통해 우리가 어떤 존재이며,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절대 은혜, 절대 믿음, 절대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로 세워지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성경대로 바로 알고 살아라
롬 11장 36절 / 윤봉원목사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1. 성경대로 확실히 알도록 힘써라
“그러므로” 하는 이 말씀은 이 11:36에 대한 말씀을 전제로 하고 한 것입니다. 로마서 11:36에 계시해 주신 말씀대로니 하는 말입니다. 계시해 주셨다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르는 것을 보여 주셨다 하는 말입니다. 계시라 말은 한문 글자로 열 계(啓)자 보일 시(示)자, 그게 우리에게 깜깜한 어두운 것을 열어 보이셨다 하는 그런 뜻으로서 계시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만물이라 말은 영계의 영물이나 물질계의 모든 물질 물건이나 또 영계나 이 우주나 그 안에 있는 것 모든 것을 가리켜서 만물이라 이렇게 표시한 것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모든 것이 없는 가운데에서 생겼는데 그것이 어디서 나왔느냐? 다 주님에게서 나왔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했는데 어떻게 나왔느냐? 하나님의 속성과 지능으로 창조해서 창조돼 나왔습니다. 모든 존재가 다 하나님에게서 나왔는데 그가 떨어져 나와서, 그에게서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와서 이렇게 분산돼 우리가 된 것이 아니고, 모든 만물 된 것이 아니고 그분의 속성대로 전지전능의 능력으로 창조하셔서 창조돼 나왔습니다.
2. 전적 주권 의지 예정 성취
2.1. 천국과 지옥은 실물교재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모든 존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겼는데 주님이 창조해서 창조돼 나왔습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님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옥 가는 사람은 제 맘대로 움직였습니까? 주님으로 말미암아 움직였습니까? 지옥 가는 것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움직였습니다. 제가 아무리 의로운 성자 생활한다 할지라도 그것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움직인 것입니다. 요것을 단단히 기억해야 합니다.
“주로 말미암아” 죄지은 것이 다 주로 말미암았다면 주님이 그래 놓고서 ‘왜 네가 죄를 지었노?’이래서 형벌 주는 것은 뭐이냐? 그것이 종말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피조물은 어떤 존재라,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그 존재의 관계를 어떻게 가지는 것이 행복이요 어떻게 가지는 것이 망하는 것이라 하는 그것을 피조물들에 가르치고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된 그 결과로서 사망 받는 그것은 그 하나하나를 실물로 ‘봐라, 요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요래 빼딱해 잘못됐고 조래 빼딱해 잘못됐고’ 빼딱해 잘못된 것이 만일 억억만이면 그 억억만 하나도 실물이 있고 그 실물을 다 만들어서 그 모든 피조물에 ‘봐라, 요거는 요래 삐뚤어졌으니까 요런 결과가 맺어졌고 조거는 불행을 맺어졌고’ 그렇게 하는 그런 그 실물로 영원히 피조물들에 가르치려고 실물교재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잘못됨으로 말미암아 화를 받는 그 화에 대한 실물교재를 다 적재해 놓은 것이 있는데 실물교재를 적재해 놓은 곳이 어딥니까? 지옥에는 하나님과 이렇게 삐뚤어진 결과로 불행을 가졌고 저렇게 삐뚤어진 것은 저런 결과로 불행을 가져서 하나님과 삐뚤어지면 요래진다 하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다 가르쳐 놓는 그 실물교재가 지옥입니다.
또 하늘나라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된 것도 여러 억억억 말할 수 없는데 그것도 바로 관계된 그것을 바로 실물로 쌓아 놓은 곳이 어디냐 하면은 하늘나라입니다.
2.2. 마지막은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이래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고,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님으로 말미암아서 움직입니다. 성자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움직이고 악인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움직이기 때문에 성자가 악인을 보고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악인 보고서 미안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처럼 해 주셨는데 저 사람은 나와 같은 사람인데 저랬으니까’ ‘하나님이여 저 사람도 나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나와 같이 될 사람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 그것이 정상이라 그 말이오.
그러니까 에덴동산 만드신 이도 하나님의 예정이요, 아담 하와 만든 이도 예정이요, 하와가 타락하게 예정한 것도 하나님의 예정이요, 타락된 것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타락시켰습니다.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우리가 확정 지울 것은 어떻게 살았든지 마지막은 주님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래 움직이고 움직인 대로 마지막에 주님 앞에서 결론을 받고 심판을 받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것을 알면 자기 생각대로 자기 욕심대로 떠들어 쌓는 것이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하게 보일 것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 앞에 꼬박꼬박 그분 뜻대로 순종해서, 그분 바라보는 것은 후회가 없고, 그분 의지하는 것은 후회가 없고, 그분에게 맡겨 놓은 것은 후회가 없고, 그분에게 순종한 것은 후회가 없고, 주로 말미암아 관계 맺은 것만 그게 후회가 없지 그 다른 것은 다 죽고 망할 것입니다. 요걸 확고히 아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3. 산제사로 드려라.
“그러므로” 12장 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를 권한다” 이렇게 십자가 걸음 걸으라고 하는 것이 너희를 미워서 십자가 걸음 걸으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으로 십자가의 걸음을 걸으라고 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네가 살아 있으나 네가 살아 있는 것으로 살지 말고 이제 제물 되는 것은 제물을 잡아서 제단에 올려놓으면, 제물이 잡아놓기 전에는 논두렁에도 다니고, 밭에도 다니고, 들에도 다니고, 집에도 다니고, 뛰어 돌아다녔지만 일단 딱 잡아서 제물 돼 놓으면은 제물 되고 난 다음에 제단 위에 올려놓으면은 그 짐승이 제 주관대로 움직이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욕심이나 뭐 우는 것이나 웃는 것이나 그런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기가 주관적으로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살아 있으면서는 제 맘대로 살 수 있고 제 맘대로 움직일 수 있는데 죽은 자와 같이 순전히 하나님이 자기를 주관하고 자기가 자기를 주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그것이 산 제물입니다. 그 산 제물로 드려놔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지 산 제물로 드리지 않고는 적은 것도 알 수 없고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기쁘시게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악령 악성 그놈이 주관해서, 자기중심으로 사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산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것은 무한한 자비의 권고이다. 사람이 자기와 자기 몸을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니 이것은 무자비한 말같이 오해하기 쉬워서 자비하신 말씀이라고 밝히셨습니다. 사람의 가치와 능력 권위와 영광은 산 제물 되는 데에 있습니다. 산 제물이 되면 이는 악령도 세상도 사망도 절대 해하지 못한다. 이는 완전한 피난처요 곧 홍수 때 노아의 방주 안에 있는 거와 같습니다.
산 제물은 첫째가 자기와 자기 몸에 대하여 자기도 세상의 그 무엇도 자기를 저희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앞에 바쳐 놓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만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쓰는 것입니다. 이 삶은 바울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고 고백한 삶이 자기의 삶이 됩니다.
하나님의 제물로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와 자기 몸을 쓰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죄를 범하라 할 때에 자기의 소유와 몸과 생명을 손해 볼지라도 죄를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죄를 멸하려고 소유와 몸과 생명을 쓰는 것입니다.
세상이 불의를 범하라 할 때에 소유와 몸과 생명을 손해 볼지라도 불의를 용납지 않는 것입니다. 또 의를 건설하기 위해서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들여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거 동행을 못 하게 세상이 할 때에 소유와 몸과 생명을 그것들에게 손해를 볼지라도 하나님을 배반치 않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과 동거 동행을 위하여 소유와 몸과 생명 다 쓰는 것이 산 제물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영생이요 참 세상과 피조물을 사랑하여 구원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세상과 불신자가 이 지극히 위대한 일을 몰라서 핍박하고 반대하나 부활 후 심판 앞에서는 다 머리 숙여 존경하게 됩니다. 이 생활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받아 이것들에게 주(主) 노릇을 할 수 있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확정을 지읍시다. 이제부터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 의지 예정대로 반드시 성취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부터 우리들의 삶의 행위를 따라서 반드시 심판대 앞에서 서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그리고 그 때와 지금 이 땅에서도 하나님 앞에 자기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삶보다 더 복 있고, 가치 있고, 영광스런 삶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립시다.
구원의 5대 교리
롬 11장 36절 / 김광선목사(델리임마누엘교회)
올해가 종교개혁가 칼빈이 탄생한지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불란서에서 태어났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그의 탄생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열리고 있습니다.
서울에서도 칼빈의 생일인 그제 7월 10일 한국 장로교 26개 교단이 오후 5시에 장충체육관에 모여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 연합과 일치를 위한 장로교의 날' 행사를 열었습니다.
교회 사학자 필립 샵은 말하기를 “루터가 단순한 바위산을 다이너마이트로 폭발시킨 사람이라면 칼빈은 루터가 깬 바위에 글자를 새긴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칼빈은 체계적이고 학문적이고 지속적인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했다면 칼빈은 완성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500년 동안 세계 역사에 그 어떤 누구도 칼빈만큼 인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없었을 것입니다.
현대 사상과 세계의 구조 즉 자유민주주의의 체계와 오늘의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은 칼빈의 영향 때문에 생겨난 제도들입니다.
국가 사회복지제도 역시 칼빈에 의해 시작이 되었습니다.
서구 역사의 정신적 기조 역시 칼빈에게서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칼빈을 모르면 민주주의를 바로 안다고 할 수가 없고 칼빈을 모르면 서구 문화의 기틀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칼빈은 제네바시의 요청으로 시의회와 교회를 관장하여 제네바 시를 개혁했습니다.
정부를 대의민주주의 모형으로 만들어 근대 민주주의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웨버 그의 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밝힌 것처럼 칼빈이 상공업을 장려하고 산업자금의 증식, 농지를 빌려주고 지대를 받는 일, 사업자금에 대한 이자 취득, 사유재산제도를 모두 합법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등 자본주의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한 복지제도를 주창하고 예배시간마다 구제헌금을 하고 고아와 노약자를 국가가 돌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복지국가를 시작했습니다.
그가 제네바에서 이루었던 종교개혁은 단순히 ‘중세 천주교회’라는 종교에 국한된 개혁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사회개혁, 국가개혁, 세계개혁으로 이어졌습니다.
칼빈이 세운 제네바 대학은 당시 유럽의 인재들이 몰려 왔습니다.
개교 첫해 161명의 학생들이 모집되었고 10년 후에는 1,6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여기서 배출된 인물들이 졸업하고 각각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이루었습니다.
영국의 퓨리턴, 스코틀랜드의 요한 낙스를 중심으로 한 장로교회, 불란서의 휴그노파, 네덜란드의 개혁교회, 미국 건국의 기초를 이룬 신앙의 조상인 퓨리턴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칼빈이 전한 복음이 들어간 지역마다 사회변혁이 일어났습니다.
영적, 도덕적적 사회, 그리고 국가 공의와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게 되었습니다.
실로 지난 500년 동안 칼빈만큼 세계의 변혁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칼빈의 종교개혁 500년이 가까워 옵니다만 칼빈의 종교개혁의 진원지인 스위스는 아직도 세계 최고의 나라입니다.
GNP가 5억 8000만 불입니다.
세계의 많은 돈이 스위스 은행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세계 국제기구들이 대부분 그곳에 본부를 두고 있습니다.
많은 국제회의가 열립니다.
깨끗하고 건강한 사회입니다.
술집이나 유흥가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아직도 시 인구의 50%가 개신교 장로교 신자들입니다.
칼빈의 개혁운동이 500년이 가까워 옵니다만 아직까지 개혁의 열매가 지속되고 있을 만큼 칼빈의 가르침은 참된 것이었습니다.
시대와 사회를 변혁시킨 이 힘은 신앙에서부터 왔습니다.
특별히 그가 가르쳤던 ‘구원의 5대 교리’는 개신교 신학과 신앙의 핵심이었습니다.
결국 바른 신학과 신앙이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국가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신앙과 신학이 얼마나 개인의 삶을 병들게 만들고 사회를 황폐하게 만드는지 또한 ‘중세 암흑시대 천년’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중세 천주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창조정신을 짓밟았습니다.
여기에 대한 반동으로 중세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의 가치와 존재를 깨닫기 위해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 운동이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성공케 하는 한 사회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똑같은 지역, 똑같은 문화, 똑같은 사람들이었지만 신앙과 신학이 이처럼 사람과 사회와 역사를 천국과 지옥만큼이나 다르게 만듭니다.
성지순례를 할 때 대게 코스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로 넘어 오게 됩니다.
국경이라는 것이 철조망 쳐 놓고 검문소 하나 달랑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집트 국경을 넘어 이스라엘로 들어서는 순간 ‘천국과 지옥’을 연상케 할 만큼 차이가 납니다.
이집트 땅을 황무하고, 집들이 난민촌을 연상케 하고 지저분한데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서는 순간 녹색잔디와 나무들이 덮이기 시작하고, 집들은 대리석으로 반듯 반듯하게 지어져 있습니다.
동네가 거리가 깨끗합니다.
불과 몇 백 미터를 사이에 두고 같은 땅인데,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 내는 걸까요?
신앙과 신학입니다.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인생관 우주관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멕시코 넘어 오는 국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저분하고 무질서하고 가난한 멕시코에서 국경만 넘으면 바로 미국 샌디에고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10대 도시 안에 들어가는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같은 땅인데 왜 이렇게 다릅니까?
종교가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미국의 건국 조상이 바로 칼빈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르던 청교도 퓨리턴들입니다.
바른 신앙, 바른 신학이 인간의 삶과 역사를 이렇게 다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일 칼빈이 지금 이 시대에 우리나라 땅을 방문한다면 마치 중세 천주교를 보면서 개혁의 열망을 불태웠듯이 그런 심정으로 한국교회를 보게 될 것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교회 역사상 사도행전에 버금가는 교회 부흥을 이루었다고 자타가 공인하고 있지만 칼빈의 종교개혁 당시처럼 우리가 믿는 ‘신앙과 신학’ 때문에 교회가 개혁이 되고, 사회는 영적, 도덕적인 분위기이고, 국가의 정의와 공의가 물흐릇이 흐르고, 민주주의가 바로 시행이 되고, 복지국가를 이루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오늘날처럼 우리에게 불안을 주는 시대는 없었습니다.
적어도 저의 살아온 인생 경험으로 보아서 오늘날처럼 불안과 위기의식을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세계경제나 북한의 문제 같은 외부적인 문제를 접어 두고라도 국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권과 제도의 문제, 이념의 문제, 빈부의 격차로 갈갈이 찢어진 우리나라의 사정을 볼 때 이는 분명 사회를 변혁시키기에 충분한 교인수와 자원을 가진 한국교회가 얼마나 잘못돼 있으면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그 일차적 책임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결과를 보아서 분명 현재 우리의 ‘신앙과 신학’이 잘못돼 있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중세 천주교회처럼 생명이 없는 박제된 종교로 전락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개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망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조그만 더 가다간 완전히 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혁’이 안 되면 망합니다.
죽습니다.
일반 기업에서도 ‘마누라 빼고 다 바꿔라’고 개혁을 촉구하는 것은 살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서구 교회를 망하게 만든 ‘자유주의신앙’ ‘저급한 신비주의신앙’ ‘인본주의신앙’ ‘종교다원주의’ ‘포스트모더니즘’....서구 교회를 말아 먹은 이런 신앙과 신학을 새것인양, 명품인양 붙들고 있으니 이런 지경에 이르지 않을 재간이 없습니다.
바꿔야 삽니다.
교호와 성도들 망하게 만든 그런 신앙과 신학을 바꾸어야 삽니다.
‘개혁’이라는 것은 잘못된 것을 뜯어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개혁’이라는 것은 ‘원래로 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시대 시대마다 개혁이 요구되는 시대가 도래했을 때 개혁의 방법은 동일했습니다.
‘원래로 돌아가자!’ 즉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원래대로 돌아가면, 성경으로 돌아가면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부패하고 무능하고 잘못된 종교의 어둠에 갇혀 있었던 16세기 유럽을 개혁한 칼빈과 그의 후예들이 가지고 있었던 개혁의 신앙과 동력의 원천인 ‘구원의 5대 교리’는 칼빈 자신의 개인적인 사상이나, 자기주장이 아니라 성경 속에 있는 구원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즉 성경입니다.
이 다섯 가지 구원의 교리를 이해함으로 우리의 신앙과 삶에 개혁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1. 전적 무능력(Total Inability)/ 전적부패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있는 존재인가?
인간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인가?
아니면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가?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의 본질을 ‘죄에 오염이 되어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하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절망적인 죽음의 상태에 처하여 있다’는 성경의 진술을 믿습니다.
로마서 3장 10-12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전적 무능력, 전적부패를 믿을 때 ‘구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 하나님의 경고대로 죽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겉보기에는 여전히 살아 있었지만 실상은 그 영이 죽어 버렸고, 영이 죽은 결과 육체적인 죽음도 시작이 되었습니다.
결국 죽음이란 ‘영과 육체의 분리’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 가셨다. 돌아갔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그런 의미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후손까지도 영이 죽고 그 결과 육체의 죽음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죄와 허물로 죽은 너희”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겉보기에는 다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범죄한 아담처럼 영이 죽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 마치 강단의 꽃꽂이처럼 겉보기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지만 실상은 죽은 꽃입니다.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시체는 의식의 활동도 감정의 활동도 의지의 활동도 죽어 있는 것처럼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 어떤 의식이나 행동을 반응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어떤 반응도 할 수가 없습니다.
시체가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밖에서부터 생명이 오는 것입니다.
구원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10절에,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고 했습니다.
오직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택한 사람들에게만 구원이 임합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에,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 스스로가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지 못하도록 하셨나?
그것은 구원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은혜를 드러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필요 없고 하나님의 은혜나 사랑도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아담과 그 후손을 타락케 하여 ‘전적 무능력’ ‘전적 부패’ 상태로 가두신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32절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는 뜻은 ‘죄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 즉 ‘죄짓게 만들었다’ ‘자신의 지은 죄 때문에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도록 만드셨다’ 그런 뜻입니다.
왜 이렇게 만드셨습니까?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주시려고 죄인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이 사실을 확인합니다.
집 나간다는 아들 어느 아버지가 붙잡지 않겠습니까?
집 나가면 고생이고,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데 어느 부모가 집 나가는 자식 말리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가 집 나가도록 했습니다.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어떻게 될 것인지 모르고 내 보냈겠습니까?
아버지이기 때문에 너무도 잘 압니다.
하지만 내 보냈습니다.
아버지의 예상대로 탕자는 허랑방탕하여 아버지의 재산을 다 허비하고, 거지가 되고, 흉년이 들어 돼지우리에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도 못 먹게 되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께로 갔습니다.
그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맞아 주었습니다.
기뻐하여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제 진짜 아들이 되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가 어떤 것인지 비로서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알았습니다.
죄가 탕자를 참 아들되게 했습니다.
우리를 ‘불순종’ 가운데 ‘죄’ 가운데 가두어 두신 이유는 은혜를 베푸시려고,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주시려고, 깨닫게 하시려고 그랬습니다.
첫째 아담이 타락하여 죄 가운데, 멸망 가운데 있어야 창세전에 계획하신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 오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범죄와 타락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 섭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범죄도 하나님의 예정 섭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7장 20절에,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했습니다.
왜 나를 죄악 가운데 가두어 두십니까?
구원하시려고 그리하셨습니다.
구원하시는 십자가 구속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그랬습니다.
‘전적 무능력’ ‘전적 부패’한 상태인 죄인이 이 은혜를 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오직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외하게 됩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만이 십자가의 은혜로 살리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하시려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전적 무능력한 상태로 두셨습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전적으로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개인과 교회와 사회에 개혁이 일어 나게 되는 것입니다.
2.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하나님의 경륜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인간과 천사들 중에 어떤 이는 영생으로 어떤 이는 영원한 죽음으로 경륜되었다”(Ch III,sec III)고 했습니다.
이 선택 교리의 이해와 정립에 따라 우리의 신관, 인생관, 역사관, 우주관, 구원관 등이 좌우됩니다.
무조건적 선택이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인간의 어떤 조건과 관계없이 자신의 주권적인 기쁘신 뜻에 따라 특정한 개인들을 선택하셨다는 하나님의 주권사역입니다.
에베소서 1장 4-6절에,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집을 만드는 사람이 설계도를 먼저 만듭니다.
이층으로 지을 것인지 삼층으로 지을 것인지 잔디를 어떻게 깔 것인지 정원수는 무슨 나무를 쓰고 어디다 심을 것인지 미리 다 구상을 하는 것입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먼저 작품을 구상합니다.
그리고 화폭에 구상한 작품을 그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구원받을 사람과 버릴 사람을 미리 예정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9장 13절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했습니다.
이삭의 아들들로 쌍둥이입니다.
에서가 형이고 야곱이 동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장자인 에서를 미워하시고 차자인 야곱을 사랑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이 된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기 이전에 결정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입니다.
야곱은 창세 전에 선택이 되었기 때문에 의인으로 산 것이고, 에서는 버림을 받은 결과 악인으로 산 것입니다.
창세 전에 선택된 사람은 선택이 되어졌기 때문에 믿게 되는 것이고 버림을 받도록 예정이 되어 있는 사람은 예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믿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창세 전에 선택이 되어졌기 때문에 지금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
선택이나 버림을 당하는 것 모두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와 있는 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이 없느냐”(롬9:21)고했습니다.
한 덩이의 진흙으로 귀히 쓸 그릇이든 천히 쓸 그릇이든 맘대로 만들 수 있는 권한이 토기장이게 있음을 드러내듯이 하나님께서 똑같은 인간들 중에 어떤 자들은 선택하시고 어떤 자들은 버리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절대 주권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니다.
몇 년 전 길거리에서 똥개를 하나 주어다 길렀습니다.
큰 아이가 학교 앞에서 버려진 새끼를 가져 온 것입니다.
우리집 개가 되었습니다.
‘레시’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개집을 샀습니다.
주사를 맟췄습니다.
새끼 한식으로 먹였습니다.
목욕을 시켰습니다.
개 세계에서 내가 잘못한 게 있습니까?
길거리 개들이 우리 집에 떼거지로 몰려와 왜 불공평하게 우리들은 택하시 않고 저
‘레시’만 택해 주었냐고 데모를 할 수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기로 선택하고 어떤 사람을 버리시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특권을 받은 성도들은 아무렇게나 살지 않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사람 앞에 어떻게 행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영적, 도덕적 사회,
공의와 정의가 넘치는 사회, 성공해도 그 성공을 자기의 공로로 돌리지 않고 성공할 수 있도록 지혜와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성공의 열매를 하나님의 나라와 사회를 위해 썼기 때문에 일등국가,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은 부릅니다.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그리고 믿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전적으로 무능력합니다.
전적으로 부패하여 죄 가운데 있었습니다.
살리시기 위해 죄로 죽게 만들었습니다.
살리시기 위해 죄로 죽게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었습니다.
그 진리를 깨달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고 높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믿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선택받아 예수 믿게 되었다는 진리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높이게 됩니다.
이 은혜를 깨달을 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됩니다.
나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 삶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 사는 성도들에게는 한 없이 복된 삶이며 개혁을 이루는 삶입니다.
인간의 전적 무능력, 무조건적인 선택의 진리는 구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믿음이 흔들릴 수 없습니다.
이 신앙으로 삶의 개혁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이유
롬 11장 36절 / 김형준목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이 복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세상에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되기에 복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목적을 알 때 오늘이 의미 있음을 알고, 어려움이나 위기 앞에서도 목적을 이룰 힘을 얻습니다. 환경을 분석함과 동시에 자신을 조절하기에 목적을 향해 현재 어떻게 노력해야 하고 성장해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삶의 목적을 이룰 때에는 기쁨과 평안과 행복이 찾아옵니다. 이는 단순한 성취감 이상의 놀라운 축복이자 이웃에게까지 나누어지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많은 사람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조차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존재 이유를 알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삶의 유형을 세가지로 나누어 보면,
1. 목적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장 앞에 주어지는 문제들을 환경과 문화의 영향 속에서 순간순간 해결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남들이 하는 대로 중학교 갈 때 중학교 가고 대학 갈 때 대학 가고, 남들 하는 때 즈음해서 결혼도 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부지런히 살았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뭔가 이룬 것 같고 뭔가 소유한 것 같지만, 스스로 자기 삶을 돌아볼 때 의문이 생기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문득 허무함을 느끼게 됩니다. 목적의식 없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 안정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주어진 삶에는 충실히 살았을지 몰라도 목적의식은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수동적인 인생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의 뚜렷한 목적을 두고 살아오셨습니까 아니면 일이 생길 때 마다 허겁지겁 쫓기며 지금 여기에 이르게 되셨습니까?
목적이 없을 때는 여러 다른 것들이 우리 삶을 이끌어갑니다. 그 중 하나가 ‘죄의식’입니다. 타락 후에 인간의 마음에는 죄의식이 생겼습니다. 죄의식은 수치심을 동반하는데, 죄의식에 이끌려 살게 되면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일생을 방어하면서 소비합니다. 죄의식 외에도 상처로 인한 쓴 뿌리, 원한, 분노 등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여러 요인이 있습니다. 사건의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성격과 인격의 일부가 되어 나를 주장합니다.
한 청년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습니다. 청년은 무척 행복 했지만 때때로 불안해졌습니다. 자매를 만나면 왠지 마음이 추워지고 어려워져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런 형제와 대화를 해보았는데, 알고 보니 형제에게 유년의 상처가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부부싸움을 하시는 부모님을 피해 동생과 떨면서 밖에 나와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폭력을 가하는데, 자신은 어머니를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상처가 되고, 죄책감이 되어 청년의 일부로 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장성한 후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던 무의식 속의 기억이 여인을 대하는데 불안감과 공포감을 주었던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한 인생을 끌고 다닌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슴속의 분노를 따라 삽니다. 분노를 다 쏟아내고 난 다음에는, 자신의 행동을 책망하지만 곧 반복하며 삶을 그렇게 소비하고 낭비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두려움의 지배를 받습니다. 두려움은 어떤 충격적인 경험이나 심각한 좌절 혹은 엄격한 가정환경으로 인해서 생기는 감정입니다.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안전한 방향으로 가고자 모험을 피하고 현재 상태에 머물려고 합니다. 따라서 좋은 기회들을 놓치기 쉽습니다.
물질도 삶의 목적이 없을 때 우리를 지배하는 것 중에 주요한 요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소유가 많을수록 행복하고, 존재 가치도 올라가리라 믿습니다. 소유의 정도를 존재 가치와 동일시합니다. 그러나 바른 목적이 없는 소유는 많으면 많을수록 더 요구하게 되고 현실에 대한 싫증과 함께 불만 속에 살아가도록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으로부터 받는 인정과 사랑이 목적 없는 삶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사람 내면에 감추어진 큰 욕구 중의 하나가 ‘인정 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다른 어떤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주면 마음이 풀립니다. 대체로 가정마다 장남들은 거리낄 것이 없기 때문에 점잖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세상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차남이나 막내는 다릅니다. 장남이 이미 소유한 부모의 사랑이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큰아들은 매를 들어도 잘 항복하지 않지만, 작은 녀석은 매를 들기도 전에 잘못하지도 않은 것을 고백합니다. 재빨리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서 남에게 인정받는 삶을 추구하게 되고, 결국 마스크(가면)를 쓰기 십상입니다. 진짜 자기 모습대로 살지 못하게 됩니다. 삶이 공허합니다. 중년기가 되면, 우울증에 빠지는 주요한 이유중의 하나 입니다. 착하게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아는 왔는데 남은 것이 없습니다. 효율적인 삶을 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묘한 고집이 있어서 타협하거나 자기 인생을 변화시키는데 인색합니다.
2. 첫째 유형과는 달리 목적은 있으나, 목적을 세운 근거가 부모님이나 권위 있는 사람들에게 받았던 교훈 혹은 이 시대와 사회가 준 가치인 사람들입니다. 또한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이 기초가 된 목적에 따라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가난하게 자란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기가 쉽습니다. 이런
목표를 가진 사람은 이룰 가능성도 큽니다. 목표를 이룬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문제는 목표를 이루고 난 후에 진정한 행복이나 기쁨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기쁨이 새로운 비극의 시작이 됩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갈증 속에서 늘 쫓기듯 삽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했을 때, 그들은 모든 정보를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지구상에 왜 태어났는지, 존재의 이유와 살아가야 할 이유 그리고 목적, 더불어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진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삶의 목표와 기반이 진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조금의 허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단이 찾아와 거짓 정보를 흘립니다.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보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거짓된 정보는 인간 내면에 있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자극하면서 어떤 목표를 만들게 됩니다. 이제 진리의 말씀 경청하기를 그만두고, 사단의 새로운 정보 앞에 귀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돈이나 명예, 건강이 있으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살아보니 어느 정도 행복도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 반복되면 무엇을 목표로 세워야 하는지 모른 채 언젠가는 허무함을 느끼는 데에 이르게 됩니다.
시편 39편 6절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 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헛된 일에 분요’ 하는 것입니다. 의미도 알고 목적도 있어서,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징도 보입니다. 그러나 결과에 관해서 볼 때는 생명력을 찾을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요한 일서 2장 15절부터 17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말씀합니다.
사단이 주는 거짓정보는 우리 자신을 기쁘고 즐겁게 할 만한 것이기에 솔깃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속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 드리고 응답 받았다고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목표와 계획을 정해두고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돕기 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정해둔 목표를 이루게 해주셔야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능력과 도움을 달라고 기도해서 이뤄지면, 하나님의 응답이라 하고 기뻐하며 뜻을 이루었다 합니다. 동기를 살펴보십시오. 육신의 정욕이 있고, 안목의 정욕(보기에 좋은 것)이 있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선악과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오지 않은 삶의 목적은 잠시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허망함뿐입니다.
3.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셨음을 믿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만들어 이 땅에 보내셨을 때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창조주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발견합니다.
만나는 일이나 인간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신다고 믿습니다. 주변에 일어나는 작은 일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믿음으로 할 것이냐 현실적으로 할 것이냐 고집과 경험, 지혜로 할 것이냐 생각하고 분별해서 아버지 앞에 순종합니다.
고통과 어려움을 만나도 자신의 목표와는 상관 없이, 신뢰하기에 그것조차 하나님 사랑의 손길로 느낍니다. 힘들지만 인생의 어려움을 통해 믿음의 분량과 소망의 척도,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맡겨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소유에 연연해 하지 않는 것도 자기가 청지기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생명도, 지혜도, 자녀도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주신 선물이라 여깁니다. 언젠가 있을 결산의 날을 준비하며 주어진 시간과 물질, 사람을 자신의 뜻과 정욕 따라 함부로 쓰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 영광을 찬미하는 자리를 귀하게 여깁니다. 이사야 43:7절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만들었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찬미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또한 이 사실을 인식하고 예배자로 서기를 원하십니다. 예배하는 자리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자리이며, 내가 피조물 임을 확인하는 자리인 동시에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회복하시는 자리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배를 통해서 낙심이 물러가고, 내 주장이 물러나고 주님 뜻을 위해 살아가는 변화가 있습니다. 나의 의지나 마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유형의 사람들처럼 자기 소유나 목적을 이루는데 소원이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기 원하는 소원이 생깁니다. 예수님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따라가고 목적을 행하기를 원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내가 주의 뜻에 순종해서 내 영광을 드렸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지켜 나갑니다. 어떤 일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기준은 딱 한가지 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인가, 아니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에게 얼마나 유익이 될 것인지에 따라 판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세상사람들은 국회위원에서부터 교회 직분까지, 사람들이 준 자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작은 자리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라 믿고 정성껏 열심을 다합니다. 하나님 영광을 위하기 때문입니다. 사업하는 분들 있으시다면, 거짓되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신 자리를 내 욕심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우리는 지금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고, 내가 세운 목적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세운 목표를 분석해 보십시오. 열등감에서, 상처에서, 부모가 가르쳐준 것에서, 시대가 중요하다고 일러주는 것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분석해 보십시오. 자기 욕망을 채우고,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목표들은 이루어져도 기쁨이 없고, 있어도 잠시 잠깐입니다. 목적 없는 삶을 중단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조하셨기에 창조하신 목적을 그분께 여쭤볼 수 있습니다. ‘왜 나를 이 땅에 나게 하셨습니까? 왜 나를 이런 상황 속에 두셨습니까? 여기서 내가 행하기 원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상황 따라 마음대로 살기에는 남아있는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남아있는 시간이라도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새벽시간을 내십시오. 새벽에 하나님이 왜 나로 하여금 이 땅에 살게 하는지 묻는 물음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40일간의 시간을 투자해서라도 남은 세월을 위해 기도 드려야 합니다. 이때까지는 환경에 의해 일 따라 문제 따라 살아온 인생, 남들 보기엔 괜찮다고 할지 모를 인생이지만 속은 텅 비어 행복이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이제는 새롭게 살고자 결단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선택한 대로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롬 11장 36-39절 / 김준범목사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에 대해 진술하는 로마서 9-11장을 마무리하는 한편의 찬송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서신서에서 복음에 대해 진술하다가 잠시 멈추어 이렇게 찬송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엡 3:20-21; 딤전 1:17). 사도 바울은 서신서의 중간에서 찬송을 하기도 하고, 서신서의 시작이나 끝에 이런 찬송을 하기도 합니다(갈 1:4-5, 엡 1:3-14, 계 1:6, 롬 16:27, 딤전 6:15-16, 딤후 4:18). 특별히 이런 성격의 찬송을 “송영(頌榮, doxology)”이라고 부릅니다. “송영”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기리며 찬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송영에는 공통으로 사용되는 단어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그에게)”라는 말과, “영원히(세세에, 영원무궁히)”라는 말과, “영광”이라는 말입니다. 송영은 영어로 “독솔로지(Doxology)”인데, 이 말은 라틴어 “독솔로기아(doxologia)”에서 왔고, “독솔로기아”는 헬라어로 “영광”을 의미하는 “독사(δ?ξα)”와 “말씀”을 의미하는 “로고스(λ?γος)”의 합성어로, 문자적으로는 “영광의 말씀” 정도가 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33절)
로마서의 이 송영은 감탄문과 의문문과 평서문(서술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이 송영은 2개의 감탄문으로 시작됩니다. 첫 번째 감탄문은 “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은 참으로 깊도다!”(33a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두시고, 역사 가운데에서 그 둘을 차례대로 불러 구원하셔서 마침내 택하신 자들 모두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감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감탄문은 “그의 판단은 측량하지 못할 것이며(헤아릴 수 없으며, unsearchable) 그의 길은 찾지 못하리로다(불가해하도다, unfathomable)!”(33b절)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판단과 결정, 하나님의 모든 작정과 계획, 하나님이 일을 행하시는 방식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습니다(사 55:9).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관하여 증거하다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감탄문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과 공의와 지혜와 권능과 거룩과 영원하심과 무한하심 등 끝없이 열거할 수 있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곧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통해서 잘 나타납니다. 우선,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과 기묘함을 볼 때에, 그리고 지으신 만물을 보존하시고 세밀하게 돌보시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감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서 가장 잘 나타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떻게 온 세상의 역사를 움직이셨는지를 볼 때에 감탄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큰 틀 속에서 이루고 계심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과 솜씨와 신실하심에 감탄하며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수많은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주신 것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로 하여금 우리 대신 죽임을 당하게 하신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참으로 놀라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해 증거하다가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34-35절)
이 송영은 3개의 의문문으로 이어집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34-35절). 이 세 질문은 33절의 찬송에 대한 화답의 성격으로, 33절이 독창이었다면 34-35절은 중창입니다. 중창자들은 두 개의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세 개의 의문문으로 화답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송영을 위해서 이사야 40:13과 욥기 41:11을 인용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34절에서 두 개의 질문을 던졌는데, 이는 이사야 40:13의 인용입니다.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측량)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습니까?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고 할 수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고전 2:16)?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다 아는 자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지 않은 부분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당연히 알 수 없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신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주의 모사가 될 수 있겠느냐? 누가 감히 하나님께 조언하고 충고할 수 있겠느냐?” 하고 반문함으로써 감탄문에 화답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의문문은 35절로, 이는 욥기 41:11의 인용입니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욥 41:11)고 하셨습니다(시 24:1; 고전 10:26 참조).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고전 4:7)? 우리 중에서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이것을 하나님께 먼저 드릴 테니 나중에 제게 갚으십시오.” 하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완전한 주인되심 혹은 주권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송영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36절)
이 송영의 마지막은 웅장한 합창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진술하는 평서문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36절).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왔습니다. 창조와 구원이 다 주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만물은 주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붙드시고 돌보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지 않으시면 어떤 것도 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물이 주께 돌아갈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며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는 말로 이 송영을 마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겸손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의 중심에 우리 자신을 두는 일에 익숙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나”를 위하여 있고 “나”로 말미암아야 하고 “나”에게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높이고자 합니다. 그러나 모든 영광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야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서 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하고 복된 일은 먼저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는 일이고,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는 자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하고 복된 일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입니다.
이 송영을 하나님께 올려드립시다. 우리를 위하여 크고 기이한 일들을 행하신 하나님께 이 독창과 중창과 합창의 송영으로 찬송하며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거룩한 산 제사
민홍기목사 / 롬 11장 36절-12장 2절
지금까지 이 땅 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변화 받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내 곁을 떠나갔다’고 허탈해 있는 순간 하나님께서 내 곁에 함께 하심을 체험했고, ‘못 고칠 질병이라 여겨 눈물로 베개를 적실 때’ 주님께서 깨끗케 해 주심을 체험했고 ‘처절한 실패로 다시 일어날 수 없어 쓰러져 있을 때’ 주님께서 손 내밀어 일으켜 주셨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마다 각자가 체험한 은혜는 만난 사람만큼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체험하고 난 후 한결같이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주님 이제는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들의 이 같은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해 주시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로마서 전반부인 1장부터 11장까지를 교리(敎理)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전반부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받은 수많은 은혜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12장 이후부터는 “그 크고 놀라운 은혜를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설명해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반부가 신앙의 원리라며 후반부는 신앙의 실천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원리와 신앙의 실천은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신앙의 원리가 뿌리라면 신앙의 실천 즉 크리스천의 생활면은 신앙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호소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저희를 권하노니”
바울은 로마서 전반부를 통해서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크고, 놀랍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사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한 우리에게, 사도 바울은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 살아야 할 마땅한 삶은 이런 삶이라고 이처럼 간절히 호소하고, 또한 강력히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렇게 간절하고 강력하게 우리에게 권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바울 자신이 죄인의 괴수였지만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바울이 우리들에게 간절히 권하는 말씀에 귀 기울이시고, 영혼을 기울이시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 즉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은 우리에게 바울은 무어라고 권고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새로운 한 해를 은혜받은 자로서 합당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말씀을 듣자마자 놀라는 분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로마시대에 기독교를 박해한 이유 중의 하나가 기독교는 사람을 잡아 희생 제물로 드리고, 그 피를 나누어 먹는다는 유언비어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몸으로 산제사를 드렸고, 또 성찬 예식을 하면서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몸과 살과 피를 산제사를 통해서 주셨지만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실로 간단한 것입니다.
“나를 예배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산제사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아시려면 바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저희를 권하노니”라고 하신 말씀의 “그러므로”의 뒤이어지는 말씀은 결론에 해당한 것이고, 그렇게 결론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러므로”의 앞 절을 보시면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세세토록 있으리로다.”
바로 11장 36절의 말씀입니다.
만물의 기원(Origin), 진행(Course), 그리고 그 결과(End)가 하나님께 있다는 바울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시작이요(창조자), 진행자, 곧 통치와 섭리자요, 또 심판자이십니다.
실로 하나님의 절대 하신 주권의 최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또 그분께서 나를 구원하셨음을 믿고, 다시 그분에게 돌아갈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자기 몸을 거룩한 산제사 즉 산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출애굽기 8장 1절과 9장 1절 말씀을 보면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유대인들을 모세를 통해서 극적으로 구출해 주시고 나서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도 구원받았으므로 인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1장 14절 말씀을 보면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우리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셔서 구원해 주신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 그리고 ‘그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신다.’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라.”
그러므로 예배드리는 것은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본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잘 드리지 않고, 예배를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나는 신앙이 좋다.”고 착각하고 계신 분들을 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 하나님의 사랑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면 감사할수록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은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입니까?”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의해 양심을 살리는 것이며, 마음에 하나님의 진리를 공급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의해 더러운 상상을 정결케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을 여는 것이고, 하나님의 목적에 의지를 바치는 것이다.”라고 윌리엄 템플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는 예배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고 견고하게 해 주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목적에 우리의 의지를 바쳐서 그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데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의 표현이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바치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마땅히 드려야할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드리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까?”
그 대답을 주님은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그런데 본문에서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와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예배”는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먼저 “몸으로 드리는 산제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소마’라는 단어에 대해 이해해야 합니다. 이 단어는 육체라는 단어와 구별해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소마’는 인간의 육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자체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고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삶을 가리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소마’ 즉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예배”란 바로 우리들의 모든 삶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곧 삶이라는 말씀을 이처럼 명확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예배드리는 자들의 중심의 문제라면, “몸으로써 예배드리는 자”들의 주제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뤄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지금까지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만을 강조하고, 삶으로 예배하는 것을 소홀히 했다면 이 말씀을 깊이 새겨 우리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고 결단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로마서를 주석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우리는 예배드리러 학교에 가야하고, 예배드리러 일터에 가야하고, 예배드리러 공장에 가야 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일주일동안 믿음을 지키려고 기도하면서 몸부림치며 살던 사람은 주일이나 수요일에 드리는 예배가 감격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과 예배가 연결될 때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신령한 예배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성도 여러분, 몸으로 산 예배를 드립시다.
그러나 몸으로 산 예배를 드리려면 반드시 힘쓰고 애써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이 세상’은 악한 정신에 지배받고 있는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따라가지 말라는 말씀은 눈에 좋은 대로, 내 육체가 이끄는 대로, 내 생각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리석어서 악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악에 빠지고, 어떤 사람들은 악을 인정하지만 안타깝게도 악한 모습을 닮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탄이 간교하고 세상에 끌려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이 세상을 따라가지 않을 수 있습니까?
바울은 그것을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세 가지 방법을 소개합니다.
첫째, 늘 다시 생각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무심코 달려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해야 합니다. 방향은 올바른 것인지? 방법은 옳은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가장 합당한 방법을 소개합니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매번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성경을 우리에게 책장에 꽂아 두라고 주신 책이 아닙니다. 추우니 불을 피워서 추위를 이기라고 주신 책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읽으라고 주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며,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셋째, 성령께서 마음껏 일하실 수 있도록 방을 만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고집, 내 욕망을 가득 차 있는 내 마음속에서 성령은 침묵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을 온전히 비워서 성령께서 자유롭게 마음껏 일하실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정결한 마음을 소유하고, 정직한 영을 회복키 위하여 늘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멀리 하지 않으실 것이고, 결코 우리에게서 주님의 성령을 거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이 세상을 따라가지 않으려면 결론적으로 우리 영혼이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계속해서 향상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악한 세상을 이기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말은 아라비아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원래부터 뛰어난 말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하메드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말을 길러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하여 온 세계를 다 뒤져 백 마리의 우수한 암말을 사 왔습니다. 그리고 이 말들을 산봉우리의 목장에서 길렀습니다. 그러나 말들에게는 고통이었습니다. 그 바로 밑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지만 말들이 보고 물 냄새만 맡을 수 있을 뿐 물을 마실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하메드는 말들로 하여금 갈증으로 고통을 받아 거칠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열어 주고 물가로 가게 했습니다. 그러면 말들은 미친 듯이 물가로 달려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들이 미친 듯이 물가로 뛰어나간 직후에 모하메드는 힘껏 나팔을 불었습니다. 이것은 말들에게 돌아오라는 신호였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말들은 돌아오라는 나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 나갔으나, 다만 네 마리만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모하메드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네 마리의 말들을 종자로 해서 만들어진 말들이 아라비아의 말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분들을 주님께서 쓰시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질풍같이 달려가던 길에서도 주님의 음성을 듣고 멈춰 서서 다음 지시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지금도 하나님은 이 세상의 악을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글로벌 찬양의 교회는 새로운 붐을 일으켜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아니하고, 이 세상을 따라가지 아니하기 위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으로 진실하게 그리고 거룩한 삶을 통하여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열심히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읍시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영혼이 잘되는 삶”이 됩시다.
우리의 영혼이 잘되면, 하나님께서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잘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 됨은 물론이고 영과 육과 삶이 강건해지는 축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출애굽 할 때 자기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것과 같이 우리의 삶을 안전하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가면 안전하게 인도함만 받으실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축복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낮의 구름 기둥으로 광야의 뜨거움을 피할 수 있게 해 주셨지 않습니까?
밤의 불기둥으로 광야의 추위를 이길 수 있게 해 주셨지 않습니까?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가는 삶이 바로 예배드리는 삶입니다.
세상에 빠지지 않고, 세상에 흡수되지 않고, 자신의 거룩함을 지키며,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와 영광을 드리는 것이 기독교인의 생명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믿고, 부활을 믿고,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자들로서 살아가는 삶의 예배가 크리스천의 열매요, 영광입니다.
만물의 존재 목적
롬 11장 36절 / 박경호목사
오늘 우리는 자연 나아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믿는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만물은 하나님에 의해서 지어졌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모든 만물은 창세기 1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있으라 라는 말씀을 하실 때에 모든 것들은 존재하게 되었고 말씀하신 대로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모든 말씀을 창조하셨다고 할 때에 아무렇게나 있으라 라고 하여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들을 지으실 때에 질서와 법칙에 따라 지으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셨다는 의미가 아무 의미없이 모양이나 형태나 특징이나 존재의 방식이나 하는 질서와 법칙이 없이 지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피나보치 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10세기에 살았던 사람인데 그는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학자였습니다. 그가 자연을 바라보고 연구하면서 발견하게 된 것이 있는데 모든 자연 만물들은 그 생김새나 모양이나 특징들이 아무렇게 무질서 하게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식물의 경우에서 발견되는 것은 잎의 모양이나 그 생김새나 또는 갯수까지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발견한 것을 정리한 연구 결과에 대하여 피나보치 수열이라는 이름 붙게 됩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무한함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모든 피조 세계를 바라 볼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볼 때에 때론 경외감을 느끼기도 하고, 장엄함과 웅장함에 놀라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외감과 웅장함과 장엄함 앞에 숙연해 하며, 그러한 것을 이룬 자연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나 자연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님을 성경은 말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바람의 작용이나 물줄기의 영향으로 기묘하고 신기한 자연의 모습이 드러난다 해서 자연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연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우리를 놀라게 할 만한 장엄하고 아름다우며 경외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 아름다우신 분이어야만 하며, 얼마나 더 경외스러울 만하며, 얼마나 더 장엄하시고 웅장하시고 광대하신 분인가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우리가 자연 만물을 볼 때에 그 아름다움이 지속되고, 그 위엄이 지속되고, 그 경외감이 지속되고, 화려함과 뛰어남과 탁월함이 지속되는 것이 그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힘이나 자생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여전히 아름다움과 여전히 웅장함과 장엄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드신 자연은 유지하는 보존하는 방식으로 법칙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그 법칙에 따라 생명을 유지하며, 보존하며, 번성해 갑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로마서 11장 36절을 보면 이 말씀을 보면 첫째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온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나오고 라는 단어는 기원을 의미합니다. 즉 만물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말해줍니다. 만물의 기원과 발생 원인은 저절로가 아닙니다. 자연이 오랜 시간 동안 생물을 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모든 생물과 자연 만물은 그 기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저절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자연 법칙을 내시고 각 생물들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법칙을 내셨습니다. 그래서 각기의 생물들은 그 법칙 아래서 생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법칙이 하나님 없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법칙으로 만드셨다고 해서 자연이 자신을 보존하며, 존재할 능력과 힘을 자발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자생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계절이 변화는 자연의 법칙이지만 그 자연의 법칙이 제대로 작동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세상이 유지되도록 보존하는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로 말미암고 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자연 법칙이 스스로 작동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연 법칙의 지배 아래 계신다면 그래서 자연 법칙을 어떻게 하지 못하시는 분이라면 어떻게 바람으로 홍해를 가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바람으로 메뚜기 떼를 몰고 오며, 쓸려가게 하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삼년 반동안 비를 내리지 않게 하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분이 원하심으로 곧 조각 구름 같은 구름이 떠오르며 곧 큰 비가 내려 가뭄을 해소하실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람을 꾸짖어 잠잠하게 하시는 주님은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모든 피조물은 자연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지만 그 자연 법칙을 운영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자연 법칙을 운영하실 뿐만 아니라 때론 그것을 초월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다섯째로 모든 것이 주께로 돌아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로 돌아간다는 말은 죽고 썩는 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주님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존재의 목적이 있습니다. 세밀하시고 치밀하고 정밀하게 세상을 만드신 분은 허투루 세상을 지으신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각각의 모든 피조물은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솜씨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과 지혜와 장엄함과 위엄과 광대함과 아름다움과 화려함과 섬세함 이 모든 것들이 그분이 만드신 만물 가운데 보이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연은 우리가 하나님을 배우는 장소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소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장소인 것입니다. 자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지으신 목적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자비이며, 하나님의 섬김이며, 하나님의 희생과 헌신과 충성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우리의 형제에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이 신자이며,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맛보며, 하나님을 느끼며,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을 나타내며, 하나님을 보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영적 흐름을 이해하라
롬 11장 36절 / 박용덕목사(남가주교회)
만사는 흐름이 있고 흐름을 아는 자는 성공적 인생을 살게 됩니다. 성공적 인생을 사는 다섯 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그 다섯 가지는 “1)꿈을 가지라 2)목표를 세우라 3)내일로 미루지 말라 4)흐름을 알라 5)성공자의 이미지를 그리라”는 것입니다. 모두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흐름을 알라라는 말은 정말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금맥 전문가는 어디에 금이 있는지를 알고, 수맥전문가는 지하에 물이 어디로 흐르는지를 알고, 경제 전문가는 경베의 흐름을 읽을 줄 압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영적 흐름을 이해하고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흐름을 알 때 우리는 역리가 아니라 순리를 따라 살게 되고 순리를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역천자는 망하고 순천자는 흥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흐름을 거슬리는 인생은 결국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할 영적 흐름은 무엇입니까?
1. 모든 것의 시작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 흐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만물의 근본을 아는 것입니다.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만물의 근원설을 보면,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했고, 헤라클레토스는 불이라고 했으며, 장자는 도라고 했습니다. 그 외에도 어떤 사람은 성(性)이라 주장 하는 이도 있고, 씨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고, 원자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나름대로 많이들 생각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아무리 지혜로와도 그것이 한계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물은 어디서 나오고, 불은 어디서 나왔으면, 도나 성이나 씨나 원자는 또한 어디서 나왔습니까? 세상적 지식으로는 그 이상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로마서11:36절에 보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물도, 불도, 도도, 성도 씨도, 원자도 모두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가르치기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께서 지어 주셨고,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음 받았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결국 모든 근원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을 안다면 그런 사람은 범사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일이야 말로 영적 흐름을 알고 순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또한 영적 흐름을 아는 자는 언제든 감사가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존재도, 가정도, 자녀도, 물질도 다 주님 주신 것임을 알기에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너무나도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다윗은 왕이 된 후 궁궐을 짓고 또한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너는 피를 많이 흘린 군인이니 네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짓도록 허락한다”고 하시므로 그는 단지 성전 지을 재료를 준비해 놓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공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전 지을 재료를 가지고 올 사람은 가지고 오라고 공포를 했는데, 백성들이 의외로 넘치도록 물건들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생각하다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29:14):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음을 아는 자는 감사가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받아도 감사, 드려도 감사해야 합니다. 주셔도 감사, 주신 것을 가져가셔도 감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욥은 동방의 부자였지만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욥은 불평하기 보다는 어떻게 합니까? 욥기1:20-22절까지 보니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라고 고백합니다. 놀라운 일 같지만 사실 이 모습이 성도의 취할 당연한 모습이어야 합니다.
지금 불경기 때문에 힘듭니까? 질병 때문에 고통스럽습니까? 그럴지라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십일조 아니 십이조를 하며 온갖 헌신을 다 한다 할지라도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에 자랑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은 알아주지 알아도 하나님은 기억하시며, 감사할 줄 아는 자에게 더 풍성히 채워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2. 모든 문제의 해답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 흐름을 아는 자는 문제가 발생하면 원점(시작점)으로 돌아갑니다. 예를 들어 Free Way에서 방향을 착각해서 잘 못 타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원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잘 못 되었음을 알면서도 계속 달린다면 그것이야 말로 어리석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대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찾아오는 문제들은 영적인 문제일 경우 많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우리의 문제가 영적 문제임을 알면 우리는 속히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경에 보면 탕자가 나옵니다. 오늘날도 탕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왜냐하면 탕자란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떠나도 탕자이기 때문입니다. 사업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자는 아무리 부유해도 탕자입니다. EH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사는 자도 탕자입니다. 고통 중에서 신음만 하고 있는 자도 탕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탕자 역시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멋지게 살아 본다고 했지만 돈을 다 잃어 버렸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돼지 치는 일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나마 불경기였던지 월급을 주지 않아 돼지 먹는 쥐엄열매로 허기를 달랬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자기 처지를 한탄합니다. “내 모습이 이게 뭔가? 어쩌다 이 꼴이 되었는가? 무슨 돌파구는 없을까?” 그러다가 생각한 것이 바로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계신데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그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자.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15:18-20)
그 때 그의 아버지는 아직 거리도 먼데 그래도 자기 아들을 알아보고 버선발로 뛰어 나와 안아 주며 옷도 새 옷으로 갈아 입히고, 신발로 새신으로 갈아 신기고, 금반지를 해 주고 돌아온 아들을 위해 살찐 송아지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 사랑하시고 다시 회복시켜 쓰신다. 돌아오기만 하면 제2의 기회를 주시지만, 돌아오지 않으면 그대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가룟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둘 다 두님을 배반하고 부인하였지만 가룟유다는 목매달아 죽고, 베드로는 통곡하며 회개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속히 돌아와야 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적 흐름을 아는 자는 오직 하나님으로 답을 삼습니다. 세상 사람들 문제 생기면 문제 속에서 문제 해결해 보려 하지만 더 미궁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에게서 답을 찾습니다. 다윗을 보십시다. 시편 18:1-3절에 보니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라며 오직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답으로, 구원으로 삼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겸손히 엎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지혜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문제가 은혜로 바뀌는 역사를 반드시 체험하게 됩니다.
3. 우리가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영적 흐름을 아는 자는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가 많아 하나님께 못 나간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죄로 치자면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갈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을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아시기에 인생들의 죄와 허물을 대신하여 자기의 독생자 예수를 대속주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예수의 보혈을 믿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의 감격이 있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제살로니가 전서 4장 1절에 보면 그 교회를 향한 바울의 격려를 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아주 중요한 세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1)믿음의 역사 2)사랑의 수고 3)소망의 인내였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인근 지역에 있는 많은 교회들로부터도 칭찬을 받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니 바울이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하고 있다. 우리가 가르쳐 준대로 여러분들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많이 힘쓰라”
오늘 우리도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한다. 지금까지도 잘 하셨지만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힘써여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이 임시직으로 회사에 들어갔는데 일년후쯤 되어서 그 회사 회장님께 특채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회장님이 불러서 들어갔더니 그 회사의 매니저로 세워 주시면서 월급을 몇 배로 올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인가 물어 보았더니 그가 성실히 일하는 것을 그 동안 쭉 보아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며 살아오고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인정 하실 만큼 힘써 보았으면 합니다.
흔히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 낸다’는 말을 합니다. 기득권자가 후에 들어온 사람이 잘 되면 속상해서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바보이지 그 사람이 무엇을 잘 못 했습니까? 우리 인생은 어디 가든 굴러 들어가는 돌입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박힌 돌을 빼 내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d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굴러 들어온 돌입니다. 우리가 이민의 삶을 살고 있지만 미국 사람들에게 우리는 굴러 들어온 돌들입니다. 그렇다고 매일 주변인생을 살면 되겠습니까? 박힌 돌들보다 더 열심히 해서 주인공인생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영적 흐름을 아는 자는 낙심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명자적인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시편 43편에 보면 유명한 고라의 시가 나옵니다. 아무리 현재의 상태가 어려운 상태라 할지라도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니 세상 사람들과 같이 낙심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43:5절에 보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어떤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 돈 떼먹었다고 해도 하나님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떼먹지 않고 떼먹힌 것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아시고 더 많은 것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인생의 Blessing Key는 영적 흐름을 아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영적 흐름은 모든 만물이 다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역리로 살지 말고 순리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원망이 아니라 감사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혼자 고민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영적 흐름을 따라 순천자의 삶을 살면 여러분의 인생에 전화위복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바른 인생관과 미래관과 사명감을 가지고 영혼 살리는 일에 힘쓰는 중에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기뻐하십시오
롬 11장 36절 / 김형익목사(샬롬교회)
오늘 이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본문 중 하나입니다. 바울 사도는 구원의 교리를 1:16부터 여기까지 설명하고 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위대하신 하나님의 부요하심과 지혜와 지식이 드러난 구원의 교리를 적어내려가면서 그는 드디어 그 놀라운 계시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것입니다.
바울 사도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의 계시로 깨닫게 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계획과 방법에 대한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깨달아야, 알아야 찬송할 수 있습니다.
33절부터 36절까지를 송영이라고 합니다. ‘송영’이란 말은 영어로 doxology입니다. 헬라어의 영광을 의미하는 doxa와 말씀을 의미하는 logos가 합쳐친 합성어로 영광에 관한 말씀 혹은 영광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광에 대한 노래란 의미로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요,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33절).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 그리고 부요함이 깊다고 탄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라고 쓰여있는데, 또한 “깊도다, 하나님의 부요와 지혜와 지식이여”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부요함은 본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무궁하심과 관련이 있기에 이렇게 읽혀지는 것도 매우 합당한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각각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방법의 지혜와 전지하신 지식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으심 그리고 부활과 승천 등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어떤 존재가 계획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지혜의 무한 광대하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지식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대비하시고 모든 것에 완벽하게 준비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34절과 35절에서 세 가지 부정적 답변을 유도하는 질문들을 던집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아무도 주의 마음을 다 알 자는 없고, 아무도 하나님께 어떤 충고도 드릴 수 없으며, 아무도 주께 먼저 무언가를 드려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갚아주시는 식으로 만들 자는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입니다. 거지입니다. 하나님께 아무런 보탬도, 유익도 드릴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가졌고 이루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존재들이요, 하나님께 유익이 될만한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 이유를 바울 사도는 이어서 찬송의 형태로 답변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36절).
하나님이 만물의 근원이십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운영하는 분입니다.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
하나님이 만물의 궁극적, 최상의 목적이십니다. “만물이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무에서 시작되었고, 모든 만물의 존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영광이 세세토록 그에게 있으리로다 아멘.”
이 마지막 말씀의 마지막 부분을 중심으로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천지창조의 최상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시작합니다. 그 대목에서 하나님께서 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천지를 창조하셨는가를 명확한 진술로 밝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우리에게 충분히 알 수 있도록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당 물어야만 하는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하며, 결정적인 질문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금 더 세부적으로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 부분을 발견합니다. 목적 중에서도 우리는 최상의(chief 또는 highest) 목적이 있고 궁극적(ultimate) 목적이 있다는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최상의 목적은 보다 낮은 하위의(inferior) 목적에 대해서 그보다 높은 목적이란 뜻이고, 궁극적 목적이란 보다 종속적인(subordinate) 목적의 목적이란 뜻입니다.
가령, 약을 사려고 약국에 가는 것이 종속적인 목적이라면, 건강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약을 사러 가는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상의 목적이라고 하면 그것은 다른 궁극적 목적들을 비교할 때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것, 다른 목적보다도 더 나은 목적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가령 여행을 하는 한 가지 목적은 사업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친구를 만나는 것이라고 할 때 그 당사자에게는 둘 다 여행의 궁극적 목적일지라도 어느 한 가지가 더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고 판단할 때 그것이 최상의 목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최상의 목적은 언제나 궁극적 목적이다. 그러나 궁극적 목적이 최상의 목적이 아닐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최상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데 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천지창조의 최상의(그 어느 목적과도 비교할 때 가장 가치있고 중요한), 궁극적(그 모든 목적을 종속적 목적으로 둘 만큼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오늘 이 본문이 그렇게 말씀합니다.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이보다 더 상위의 목적도, 궁극적 목적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2. ‘영광’의 의미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최상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한 단어에 대해서 보다 성경적인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광’이란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영광을 의미하는 단어는 ‘무겁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파생했습니다. 이 단어는 ‘무거움, 위대함, 풍부함’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히브리적 사고로는 영광은 어떤 것의 무거움을 뜻하고 가벼움은 쓸모없음, 가치없음, 경멸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다니엘 5장에 나오는 벨사살 왕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벨사살이 주연을 베풀고 있을 때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서 알 수 없는 글씨를 썼는데, 다니엘이 이를 풀어보니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아람어인데, 데겔이라는 단어가 뜻한 것이 ‘저울에 달아보니 가볍다’라는 뜻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영광이란 히브리어 단어는 보다 확장된 의미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내적이며 고유한 성질, 성격에 적용이 되는데 이때 의미는 ‘탁월함, 존귀함, 또는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됩니다. 즉, 크기나 아름다움에 있어서 혹은 이 두가지 모두가 결합된 것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가지는 탁월함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주로 인격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것을 내적인 영광이라고 할 수 있읍니다.
이런 내적인 영광은 밖으로 발산되고 드러나고 전달되는 성향을 가지고 되는데 이런 과정을 통하여 그 지식을 얻게 된다면 그 지식이나 느낌도 역시 영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영광이란 것은 본성상 밖으로 드러나고 알려지고 전달되고 하는 성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내적 영광(하나님께서 본유적으로 가지고 계시는)과 충만의 외적 발현, 외적 표현을 가리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내적 영광과 외적 영광을 구별해서 살펴보도록 합니다.
3. 하나님의 내적 영광과 외적 영광(잠 8:30~31)
A. 내적 영광?삼위 하나님 안에서의 영광: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 무한한 덕과 거룩, 무한한 기쁨과 행복
하나님의 내적 영광이란 삼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내적 영광은 그 자체로 아무런 부족함이나 결함이나 한계나 그 어떤 부정적인 것도 가지지 않는 무한하고 완벽하며 충만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에 대해서 묘사할 때마다 최상급의 단어 형태들을 나열합니다. 가령,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엡 2:7),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엡 3:8),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엡 3:18)과 같은 표현들입니다. 그렇게 하고서도 그는 제대로 했다고 느끼지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것들을 토마스 칼라일은 ‘무한 광대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저 역시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이 없음을 압니다. 그럼에도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의 내적 영광은 그 자체로 아무런 부족함이나 결함이나 한계나 그 어떤 부정적인 것도 가지지 않는 무한하고 완벽하며 충만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내적 영광은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 무한한 덕과 거룩, 그리고 무한한 기쁨과 행복으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이 하나님의 주요한 속성들입니다.
어떻게 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삼위로 계신다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잠언 8:30~31는 창조 때에(이것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어떻게 존재하셨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너무나 중요한 본문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을 향하여 날마다 기뻐하셨다고 하며,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곁에 계셔서 창조주로서 항상 성부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성부와 성자의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서로를 알고, 사랑하고, 기뻐하는 관계입니다. 이 관계 속에서 성령 하나님은 영원토록 나오시는 분이시라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여기까지가 성경의 설명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식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아시는 지식입니다. 성부께서 성자를아시고 성자께서 성부를 아시는 무한하고 완벽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외의 그 어떤 것에 대한 지식으로도 즐거우실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아심으로써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동시에 하나님 자신을 무한히 영원토록 즐거워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무런 부족함도, 한계도 없으셨고 완전한 행복과 충만한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그 무엇도 행복을 위해서 필요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완전한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피조물에게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자비로우심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지위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을 알고, 사랑하고 그분의 행복에 들어오도록 말입니다.
우리에게 오늘 감사가 있다면 이것보다 더 큰 감사는 없습니다. 우리의 감사의 거리가 많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우리는 이 부분을 정말 감사할 수 있는 자리로 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처럼 이 송영을 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외적 영광으로 인도합니다.
B. 외적 영광?내적 영광을 피조물에게 전달하는 것: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포함한다.(*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내적 영광이 이성적으로 창조된 존재에게 나타나고, 하나님의 무한한 충만하심이 피조물에게 전달되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외적 영광은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만이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i. 알려지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아시는 지식을 인간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무한히 가치있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행복이 최고의 행복임을 알고 계시고 그 행복을 인간에게 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정도는 무한하게 차이가 있다고 해도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시는 지식과 동일한 성격을 가진 것입니다. 마치 태양이 발산한 빛이 어떤 한 구석을 비출 때에는 그 빛이 부분적일지라도 태양 자체의 빛과 영광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피조물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의해 하나님의 탁월하심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계시에 의하여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알려지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무한하고 영원한 완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과 비교할 수 있는 가치있는 인격이나 사물은 영원 속에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표현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지신 선하심 때문이요, 은혜의 부요하심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의미를 우리는 이런 견지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합 2:14에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알게 하시기를 원하시면 그렇게 역사의 마지막에 그 일을 이루어내시고야 마시는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분을 아십니까?
ii. 사랑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지식은 필경 우리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도록 인도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피조물의 사랑을 받기를 기뻐하십니다. 억지로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알수록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진가를 인정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단순히 노래로부터 오는 어떤 느낌들이어서는 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알면 알수록 더 사랑하게 되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어쩌면 사람은 정반대입니다. 가면을 벗은 사람의 모습을 우리는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그를 사랑하기 힘들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완벽하시고 충만하신 측량할 수 없고 영원하며 무한하신 아름다움의 풍성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을 하나님은 최고의 덕, 최고의 거룩이라고 여기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즉, 이것이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인 것입니다.
막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이와 함께 네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거룩은 규칙들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은 관계인 것입니다.
여러분을 한 번 돌아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그것을 아십니까?
iii. 기쁨의 대상이 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거기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데로 우리를 인도해갑니다. 성경은 이것이 참 행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행복의 조건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아는 합당한 지식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는 마땅한 자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자비로우신 은혜의 부요하심 때문에 우리에게 그것을 주십니다.
우리가 죄인인고로 더더욱 가질 수 없게 된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복되신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사셨으며,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이 일이 일어나야 했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행복을 확산하시려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자비로우신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알려지시고, 사랑을 받으시고, 기뻐함을 받으셔서 결국 피조물인 인간을 행복하게 함과 동시에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4.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는 행복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기뻐하는 행복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과 우리는 연합됩니다. 인생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연합은 무엇보다도 부부의 관계입니다. 부부가 서로 알고 사랑하고 기뻐하면 할수록 그 연합은 깊어집니다. 행복이 완전해질 때 연합도 완전해집니다. 성부와 성자가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은 성부와 성자의 관심이 완전히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 그분의 소원이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자신의 뜻이었으며, 아버지의 소원이 자신의 소원이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렇게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요 17:21~24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마치 성부와 성자 사이의 연합이 완전한 것이듯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연합도 점점 더 완전해져 가게 됩니다. 우리의 행복이 영원토록 증가함에 따라서 연합도 점점 더 순수해지고 완전해질 것입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우리 피조물의 행복은 무한히 진전될 것이고 하나님께 무한히 가까워지며 연합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 속에서 결코 우리가 하나님과 완전히 연합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오지 않을 것이지만, 우리는 영원토록 그 연합의 행복 속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하나님과의 연합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당신은 그분을 알고, 알기에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그분을 기뻐하는 행복을 누리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의 인생의 최고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소원이 여러분의 인생에 생명을 내어놓을만큼 최고로 소중한 소원입니까?
하나님의 목적이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인 것, 맞습니까?
또는 여러분은 이런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고 살기를 바라십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의 전제는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나의 소원이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꿈이 내 인생의 꿈이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목적이 나의 목적이 되게 하십시오.
이것이 가장 행복한 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모든 죄인들이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들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말씀을 통해 그분을 알아가십시오.
그 지식을 통하여 그 분을 더욱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가시기를 추구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그분을 가장 즐거워하는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서 우리는 인생의 가장 깊은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기를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자신을 사랑할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고, 우리에게 자신을 즐거워하는 기쁨을 허락하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께 영광을
롬 11장 36절 / 김홍도목사
로마서 11:36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의 중요성>
여러분, 하나님의 뜻에 꼭 맞는 사람이 되는 비결 중에 가장 중요한 비결은 범사에 내가 영광을 취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불초한 제가 목회하는 중에 가장 신경을 많이 쓰고 조심하는 것은 교만하여 나를 나타내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거나,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내가 취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말씀 중의 하나가 고린도후서 3:5에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 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무슨 기쁜 일이 생기거나, 행복을 느끼거나 칭찬을 듣거나, 명성이 올라갈 때 범사에 스스로 잘나서 그렇거니 하는 생각을 일체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본분입니다.
장로교 교리 문답의 제일 첫째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무엇이냐?"고 하는 물음인데, 그 대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은, 시집가고 장가가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자식 낳고 키우는 데 있지도 않으며, 돈을 벌어서 즐거워 (enjoy)하는 데 있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존재론(Ontology)적으로 말할 때, 모든 만물과 사물은 다 그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마이크나, 시계나 종도 다 그 사물 자체에 존재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체가 아닌 다른 편에 목적이 있습니다. 시계가 저 혼자 빙글빙글 돌아가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계 아닌 사람에게 시간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과 같이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은 우리 스스로 시집가고 장가가서, 자식낳고 돈 버는 데 있지 않고 우리 인간을 지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카메라의 촛점(Focus)을 잘 맞춰야 사진이 선명하게 나오는 것 같이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지 못하며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아무리 쾌락을 누려봐도 참 만족이 없고 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은 다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고린도전서 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42:8에는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13:15-16에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이 같이 말씀하시느니라, 그가 흑암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흑암한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흑암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7:18에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거짓이 있을 수가 없고, 불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2.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는 자의 심판>
하나님께 쓰임받는 그릇이 되고, 남의 영적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특별히 조심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챌 때에는, 하나님에 버림을 받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말라기 2:1-2에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하노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말했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셨던 복이라도 저주를 내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적으로 받으려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 4장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바벨론 나라가 내 능력과 내 권세로 건설하여 내 능과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고 말을 하자마자 그 말이 아직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저주가 내려 금방 정신이 나가고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칠년을 지내다가, 마침내 제 정신으로 돌아와 회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때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자기가 영광을 취할 때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게 됩니다.
사도행전 12:23에는 헤롯 왕에 대해서 백성들이 신의 소리와 같고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할 때, 스스로 신처럼 행세하다가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그 자리에서 창자가 썩어들어 가면서 즉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와 축복을 많이 받을수록 명성이 올라갈수록 더욱 조심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칭찬을 들을 때 즉시 "이것은 내것이 아니라,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누누히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다"고 말씀하곤 했습니다. 언제나 자신만 쟈랑하고 자기만 높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6-29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언제나 약하고 무능하고 못나고, 멸시받을 존재인데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려고, 택해 주시고 은혜 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잘난체 하고, 자신만을 자랑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가증한 존재가 되고, 축복을 받았다가도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됩니다. 무슨 일이든지 즉시즉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도록 정신을 차리고 조심해야만 합니다.
<3.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
① 우리의 용어 중에 "할렐루야"와 "아멘"할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십니다.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이고, 아멘은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어지기 바랍니다" 하는 뜻인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아멘"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고린도후서 1:20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아멘", "할렐루야"를 많이 할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심으로 우리가 "아멘", "할렐루야"를 많이 해야 되겠습니다. 축복받고 부홍되는 교회는 다 "할렐루야", "아멘"을 많이 하는 교회입니다.
② 찬송할 때 영광 받으십니다.
시편 22:3이 찬송은 입술의 열매라 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찬송할 때, 우리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③ 예배드릴 때 영광 받으십니다.
요한복음 4:22에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며,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제일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④ 감사할 때 영광 받으십니다.
시편 50:23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우리가 무슨 일에든지 즉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행위가 되므로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은 심각한 죄입니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로 늘 우리 마음과 입에서 떠나지 말아야 정상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위로, 물질로 감사행위로 잘 할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 위해서라도 축복해 주십니다.
⑤ 견고한 믿음이 있을 때 영광 받으십니다.
로마서 4:20에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습니다(히 11:6).
⑥ 열매를 맺을 때 영광 받으십니다.
요한복음 15:8에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전도의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이 먼저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이런 생활에 힘쓸 때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도 영광받게 해 주시고, 축복을 계속하여 내려 주십니다.- 아멘 -<1979년 7월 8일 주일대예배 설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