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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적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다음에 태어나면 꼭 부잣집 딸로 태어날 거야.
태경이가 환하게 웃으며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는 샴페인 잔을 건넸다. 샴페인이 샹들리에 조명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났다.
“거품이 많은 게 좋아. 그렇게 가져 왔어?”
“하루 이틀도 아닌데 어련히 알아서 했을까.”
“고마워 태경아.”
나는 여전히 소파에 앉은 채로 태경이에게서 잔을 건네받았다. 흔들린 잔에 액체가 출렁이며 황금빛을 발했다. 우리는 말없이 달큼하게 올라오는 복숭아 향을 음미했다.
“그래서 결혼 날짜는 잡았어? 너도 재영누님 호텔에서 하는 건가?”
침묵을 깨고 지완이가 말을 꺼냈다. 나는 손가락 사이에 잔을 끼고 빙글빙글 돌리며 지완이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몰라. 결혼식에 내 의견이 중요한가, 뭐.”
“그래도 당사자인데 신혼여행지 정도는 고르게 해 주지 않을까?”
그거야 모르지. 나는 말을 삼키고 샴페인 잔을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지완이는 쀼루퉁한 내 얼굴을 보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태경이를 바라보았고, 태경이는 그런 나를 보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이구, 우리 래인이. 이제 다 커서 시집도 가네.”
태경이는 일곱 살짜리 어린 숙녀를 대하듯이 나를 어르며 웃음을 흘렸다. 나는 시선을 내리 깔고 나와 태경이, 지완이의 왼쪽 손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채널 세팅된 다이아 반지가 유난히 밝게 반짝이는 것 같았다.
“나만 결혼이 어려운 거였네.”
소라는 죽었다. 그리고, 나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너의 이름 The name
-눈부시게 화려하고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01 The name
Written by. Prunne
copyrightⓒ 프린느 All rights reserved.
행복할 줄 알았다. 지긋지긋한 그 집구석에서만 빠져나오면 행복할 줄 알았다.
괜찮을 줄 알았다. 그렇게 갈망하던 이 자리를 얻으면 다 내 세상일 것 같았다.
“불행하니?”
“아니. 불행하지 않아.”
내가 평생토록 갈구하던 것을 이뤄냈는데 불행할 것 같니? 나는 절대 불행하지 않아.
“그럼 행복하니”
“아니. 행복하지 않아.”
행복해지려 하지 않는다면 절대 불행해질 이유 따윈 없어. 그래서 난 행복하길 원치 않아.
그렇게 태어나기만 한다면
갖고 싶은 거 다 가져야지.
-그건 목이 짧아 보인다, 얘. 하이넥은 피하자.
-그럼 아까 리본 달린 건 괜찮아요?
-그건 등이 너무 파였잖니. 약혼식에 베일 쓸 것도 아닌데 좀 그렇다.
-그럼 이건 어때요? 피팅 할까요?
-이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엄마 보기엔 어때요?
나는 약혼자가 있다. 어린 나이에 무슨 약혼이고 결혼이냐 하겠지만, 부모님이 원하시는 사람이기에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처지이다. 내가 부모님의 자식이며 형제, 자매들의 동생이기 위해서는 군소리 없이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
-너무 파였다. 여배우들이나 입지 이걸 어떻게 입니.
-그럼 저건요? 우아해 보일 것 같은데.
-어떤? 저건 채플웨딩때나 예쁘지 호텔에선 썩 예뻐 보이진 않을 것 같구나.
-마음에 드시는 거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그걸로 할게요.
속물이라 해도 좋다. 세상의 어떤 사람이 눈앞에 놓인 평탄한 길을 두고 험난한 길을 선택하겠는가. 나는 사랑이란 감정 따위에 휘둘릴 정도로 감성적이지도 않을뿐더러, 그러한 여유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이미 오랫동안 만나온 연인이 있는 사람이고,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내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업무의 일환일 뿐 그 어떤 사심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이 절대로 나와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있다.
“드레스는 그냥 내가 정했어. 이번에 라이센스 계약 딴 브랜드.”
“그 브랜드가 저한테 어울릴까요?”
“아니어도 입어야지. 예식에서 중요한 건 입고 들고 신은 거지 사람이 아니야.”
“그럼 들러리는 제 친구들로 해도 괜찮아요?”
“이름 들어보고. 부케 받을 사람은 엄마 친구 딸로 할 거야.”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그 사람이 좋다. 조금씩 스며들어 내 온 마음을 적신 그 남자가 너무 사랑스럽다.
그 사람의 앞에만 서면 나는 그저 첫사랑에 빠진 소녀에 불과할 뿐이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야릇한 감정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 사람이 나를 보는 그 눈빛, 온전히 나를 향해 말하는 그 목소리, 나를 위해 베푸는 호의. 그것이 모든 이에게 베푸는 호의라도, 나는 남들과 조금 다른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정말로, 이렇게까지 하려고 한 게 아니야….
-래인아, 우리 이따 야자 빼먹고 잠깐 대동제 다녀오자.
-반장이 무슨 핑계로 빠지게. 학원핑계 집안사정핑계 벌써 다른 애들이 다 댔는데.
가끔씩 꿈을 꿀 때마다 네 얼굴이 너무 선명해서 깨어나곤 한다. 잠에서 깨면 다시 오지 않는 잠을 청하려 아무도 없는 거실에 앉아 멍하니 어항을 바라보고만 있다.
-1번 만성 관절염, 2번 납치, 3번 곤충 채집, 싱크 홀에 빠짐, 실종, 뇌파불안정. 가지가지 한다.
-남친 바람현장 덮치러 감, asdf 사생 뛰러 감, 별이 아름다워서 감수성과 함께 폭발. 애들 미친 거 아냐?
-그건 그나마 낫지. 아즈카반에 수감, 엔터프라이즈호에 워프 당함, 아이언맨 오른손 수색, 슈퍼맨 팬티 찾으러감. 이건 쌤이 개그로 받을 수 있는 거야?
-그럼 우린 무난하게 캘리포니아 오렌지 농장 노동비자 발급, 신약개발 임상실험 참가. 이렇게 써 놓고 가자.
-주소라 대박. 반장이 솔선수범해서 땡땡이치는 패기 봐라.
-어어? 그러는 래인이 너는. 반2등이라 야자 따위 개나 줘라 이거야?
고등학교 때 그 사랑스러운 모습 그대로 너는 아직 내 기억 속에 존재한다. 너는 항상 그 자리에 있는데 나는 너를 놓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어.
-래인아, 우리 꼭 같이 여기 붙자.
수면 위로 보글보글 올라오는 산소를 보며 나는 거품 안에 있는 상상을 하곤 한다. 두둥실 떠 날아가는 거품 안에서 나는 대학생이 되어 너와 함께 있다. 너의 바람대로 우리는 같은 대학에 진학했고, 여전히 함께 붙어 다닌다.
그래도 하나쯤은.
그가 말했었다. 그 사람은 내 앞에서는 그저 사랑에 빠진 한 남자에 불과할 뿐이었다고. 나의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여자 친구라는 존재는 내 머릿속에서 매번 사라져버리고 만다.
나를 볼 때면 항상 그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었단다. 내가 아는 그는 융통성도 없을 뿐더러 고지식한 편이었고, 오랜 시간을 만난 그녀를 배신할 정도로 유혹에 약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내 앞에만 서면, 그녀와 함께 공유한 수많은 추억들이 한낱 기억에 불과할 뿐이었다고 했다.
그의 시야에 내가 들어오면, 내 주위의 모든 사물들은 온통 화려한 원색의 빛깔로 변모한다고도 했다. 내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영화배우 같다고 그가 비유했다. 그게 어떤 느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었다. 또 그가 말하길, 내 움직임은 군더더기 없이 우아하고 목소리는 달콤했으며, 미소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워 익어버릴 것 같았었다.
일종의 부적 같은 사람이었다.
그가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홧김에 한 말이기는 했지만, 사실 여러 해 전부터 그는 그녀와는 예전처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저 짐작하던 것이 답이 된 것은 내가 잘 알다시피 오 년 전 여름이었다. 그의 인생은 오 년 전에 맞닥뜨린 일로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되어버렸다. 어느 날 갑자기 나비처럼 그의 곁에 날아들어 간 나로 인해 모든 것이 다.
-안녕하세요. 항상 이 시간에 오시네요.
-그러게요. 자꾸 일이 밀려서.
-일이 늦어지면 그럴 수도 있죠. 다른 고객님들도 그래요.
안면부지나 마찬가지인 사람에게 살갑게 구는 이 사람이 신기할 따름이다. 비록 영업용 멘트와 미소이긴 하지만, 이 친절함에 따뜻하고 간질거린다.
-다른 업무는 필요하지 않으시고요?
-네. 괜찮아요.
-명함은 없으시다니 제 명함 드릴게요.
-이거….
-제 이름은 상욱이예요. 서로 상 빛날 욱. 이상욱. 기억해 줄래요?
매일 얼굴 보다시피 하니 기억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데. 이 명함도 절대 받으면 안 되는 건데. 왜 이성적이지 못한 거니.
차라리 처음부터 엮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그 대상이 너라도, 오히려 너이기에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내가 네게 환상을 품었던 것처럼 너도 오해하고 있는 내 일면이 있을 것이라, 절대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누군가는 서로에게 말하지 않는 이런 것들에 상대가 호기심을 느끼고, 그것이 남녀관계에 있어 매력을 느끼게 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네가 생각하는 나는 보수적이고 헌신적인 여성상이기에 이러한 내 속의 것들을 털어놓을 수가 없어 괴로울 뿐이다. 네게 거짓말을 하는 이 입이 가증스럽고, 순진한 척 하는 내가 역겹다.
그래도, 너는 나를 끊임없이 연민하고 동정해 줘야만 한다. 그것이 너와 나의 관계를 존속하는 것이며, 현 연인과의 관계도 여전히 유지할 수 있는 길일 테니. 남들이 아무리 욕을 하고 돌을 던져도 내가 너는 다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손가락질은 너를 탐한 내가 받을 것이니 너는 그저 지금처럼 곁에 있어만 주면 된다. 너와 네 연인을 위해, 너는 그저 나를 불쌍해서 거절하지 못 한 우유부단한 남자로 남아야만 한다.
“넌 나한테 궁극적으로 원하는 게 뭐야?”
“그런 거 없어요. 알잖아요.”
“이건 너도 나도 힘들다.”
“…그만 하고 싶어요?”
이 만남도 언젠가는 끝이 날 것임을 인지한다. 아마도 네 감정이 동정에서 사랑으로 변하는 때에, 우리는 끝이 날 것이다. 처음부터 끝이 비극이어야만 하는 이 만남을 제시한 것은 너였다. 그러니 끝이 와도 우리, 서로를 위해 질척거리지 않는 이별을 해야만 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부터 묻고 싶었어요. 전 상욱씨에게 어떤 사람이에요?
-처음부터 서희 만나는 거 알고 있었잖아요. 래인씨.
-알아요. 그냥 물어본 거니 신경 쓰지 말아요.
내가 네게 물었다. 나를 사랑 하냐고.
너는 말했다. 너의 얼굴을, 몸을, 돈을 사랑한다고.
그런 너를 사랑한다 말했다. 속도 없는 바보.
“부탁이야 상욱씨. 이제 정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싶어.”
“래인아.”
“나 동우씨랑 결혼해요. 그러니까….”
내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네게 말했다.
오빠라면, 정말 나의 친오빠 같은 사람이라면 나를 잊어달라고.
“잔인한 사람. 네가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해.”
네 붉은 눈시울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네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도 좋다며, 그저 너라는 사람을 좋아하기만 하면 된다 말하며 다가왔다. 아무리 도덕적인 삶을 살아온 남자라 할지라도 그런 속삭임에는 흔들리기 마련이고, 나는 그 것을 알고 이용했다. 직업, 종교, 학벌에 관계없이 남자란 한 꺼풀 벗겨 보면 내면은 다 같은 족속이라, 머릿속에 든 생각은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다.
너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주위 사람들의 부추김에 의해 충동적으로 내게 연락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호락호락하지 넘어가지 않을 거란 나의 결심과는 달리 네게 나는 참 헤픈 여자였다. 네게는 한없이 쉽고, 순종적이었으며, 어리석은 여자였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너는 나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너는 연인과의 지루한 관계에 찾아든 나를 보며 그저 심심풀이 정도로만 생각했더랬다. 그러나 감정이란 것은 어려워서, 내가 그랬듯이 어디서부터 생겨나고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자각하지 못한 채 휩쓸리고 만다. 어쩌면 이것은 나의 바람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그러했듯 너 역시 자각하지도 못한 채 나에게 파묻혀 있었다고 생각한다.
단 1%의 확률이라도 있다면
뭐든 다 견딜 수 있을 텐데.
이별을 얘기할 때 네가 그랬다.
나는 항상 네게 정도를 넘어서 많은 것을 원하고 어리광 부리려했기에 질린다고 말했었던가. 돌이킬 수 없는 지금에서야 네게 무언가를 원하고 어리광 부리던 철없던 시절의 나를 어리석게도 깨닫는다.
네가 내게 번호를 남기고 간 날, 오만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던 것을 너는 알까.
죄책감 없이 네게 연락을 취한 것을 알게 되면 우리의 관계는 좀 달라지려나.
내 이름은 래인이예요.
올 래 이끌 인, 이래인. 기억해 줄래요?
*BGM 한예슬 - Mem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