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금일롱(書衾一籠)
書 : 책 서
衾 : 이불 금
一 : 한 일
籠 : 농 롱
40여 년간 높은 벼슬에 있었던 사람의 재산이
책과 이불과 농 하나 뿐이라는 말로,
청빈한 선비정신을 가리킨다.
문헌: 고금청담(古今淸談)
고려 34대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寶文閣) 학사를 지낸 안성(安省.1344~1421)은
호는 설천(雪泉)이고, 본관은 경기도 광주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한쪽 눈이 작아서
작을 少자와 눈 목目자. 즉 소목(少目)으로 불렸다.
어느 날 왕이 그의 이름을 보고
소少자와 목目자를 합쳐
성(省)이라고 작명하여 하사했다.
그는 조선이 건국되자 태종(太宗) 때까지 봉직하며
참찬(參贊)과 평안감사(平安監司)를 지냈다.
그는 고려에서 조선까지 40년 동안
높은 벼슬을 했으나 재산이라곤
책과 이불과 장롱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그 농마저 부서지자
부인 송씨가 푸념을 했다.
“이제 수리할 종이도 없으니 무엇으로 고칠꼬?”
“허허! 무슨 새삼스런 걱정이오?
처음엔 그 농조차 없지 않았소?”
“남들은 10년만 벼슬해도 먹고 살 걱정을
안 한다는데 40년 벼슬에 이 꼴이라면
누가 곧이듣겠습니까?”
그는 그간 벼슬을 했으나 종이 한 장도
자기 것이 아니면 손대지 아니했다.
그야말로 책과 이불과 농 하나가 전 재산이었던 것이다.
조선 개국 후, 태조 2년에 안성은 청백리에 뽑혀
송경유후(宋京留後)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대로 고려에 벼슬한 가문으로서
내가 어찌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어 송경에 가서
조상의 영혼을 대하랴!’ 하고 궁전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며 통곡하였다.
태조는 이런 신하를 죽이면 후세에
충성하는 선비가 없어진다고 생각하여
죽이려는 좌우를 제지하고 그를 급히
붙들어 내보내살렸다고 한다.
안성은 눈은 작았지만 티 없이 맑고 깨끗해
누구도 그에게 견줄 수 없는 백설이었다.
그래서 청백리로 길이길이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의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옮긴 글-
출처: 바람에 띄운 그리움 원문보기 글쓴이: 학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