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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 Kulak(쿨라크)는 농촌 지역사회의 부농을, GULAG(굴락)은 수용소를 뜻함. 헷갈리지 마세요!
1920년대 말, 지방과 중앙 지도자들은 그들의 정통성을 전국적으로 수립하기 위하여 많은 폭력을 썼고, 이는 특히 농촌 지역에 집중되곤 했죠. 1929년, 농촌 지역당의 요청에 따라 중앙당에서는 콜호스로 농민들을 몰아넣을 강제적인 조치가 허용된다는 걸 성문화했습니다. 그리하여 농촌 지역에서 "계급으로서 쿨라크(부농)의 절멸"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실시되었고 이들 중 상당수가 굴락으로 이동되었죠. 농촌에서 이렇게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노동력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자 지역 지도자들은 주저없이 이들을 노동력 부족으로 고생하는 지역에 배치했습니다. 우랄에서는 북부의 거친 타이가가 그 곳이었죠.
탈쿨라크화는 그런 목적에서 가히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위 당국자들은 그들의 상관에게 제대로 보고도 안 하고 무작정 일을 집행하곤 했습니다. 탈쿨라크화될 농촌 가구들의 리스트들이 만들어졌고, 지역 당원들은 빈농들을 불러 이들이 실제로 부농이 맞냐는 대단히 의식화된 절차만 밟고 '탈쿨라크화' 해버렸죠. 첼랴빈스크 지역 공산당이 우랄 주공산당으로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7개 구에서 700 건의 탈쿨라크화를 위한 회의가 열렸고, 5만명의 농민들과 콜호스 농민들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회의의 결과는 1,700명의 농민들이 탈쿨라크화 되었고 다른 3,848명의 농민들은 탈쿨라크화하는 것이 승인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농민들은 우선 임업 단지로 이송되는 것이 상부에서 승인되기까지 농촌에서 대기해야만 했습니다.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를 필두로 1월 15일, 탈쿨라크화에 대한 정치국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때의 회의 내용은, 대다수의 연구자들에게 닫혀있는 "대통령 문서고"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알 수가 없어서 추정만 해야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랄 제1당서기 카바코프가 이 회의에 대표로 참석하였다는 것은 몇몇 사실에 대해 짐작을 가능하게 해주죠. 중앙도 탈쿨라크화의 대의(...)에는 공감했기에 이런 행정 업무들을 도와주기는 했지요.
오게페우 부의장이었던 겐리흐 야고다는 탈쿨라크화를 위한 상세한 자료들을 가지고 오라고 명령합니다. 이주될 쿨라크들의 수, 이주될 장소, 그리고 필요한 기술적 인적 지원 목록을 말입니다. 우랄에서 이러한 수치들은 점점 증가하여 어느새 목표치는 3만명에 달하게 되었고, 1930년 2월에 최초로 5천명의 쿨라크를 이주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체이카와 소브나르콤은 중앙위의 승인을 받은 12월 정치국 회의의 결과를 공포함으로써 공식적으로 탈쿨라크화의 대대적인 물결을 열어젖힙니다.
3월 동안, 중앙 조직들은 슬슬 이상한 낌새를 눈치챕니다. 지금 지역 관료들이 일을 너무 과하게 한다는 느낌이 들고 있었습니다. 탈쿨라크화의 위협 속에서 모든 마을들이 집단화 되기를 강요 받고 있었습니다. 우랄 주의 지도부도 당연히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사실상 방조합니다. 그래서 강제적이고 수용 불가능한 정도의 집단화 속도에 대한 첫번째 제약은 모스크바에서 실시하게 됩니다. 중앙위와 소브나르콤에서는 탈쿨라크화될 사람들을 제한하고, 특히 지역에서 추방될 가구의 비율은 인구의 3~5%를 넘어선 안 된다고 명시하죠.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쿨라크들만 추방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붉은 군대 병사와 장교의 가족들은 예외여야 했고, 가족 중 누군가가 공장의 숙련공으로 다년 간의 노동경력을 보유하고 있다면 "특별한 주의"와 함께 다루어져야만 했습니다. 2월 4일에 나온 이 명령 이후에 지역 및 중앙 언론에서는 폭력적 수행에 관해 비판하는 기사들이 많이 실렸습니다. 우랄은 이를 충실하게 따랐습니다. 지역 언론에서 중앙 언론이 주도하는 언론 캠페인을 따르게끔 한 것이었죠.
그러나 언론에 대한 조치만이 끝이었습니다. 실질적 규제 조치는 전혀 취해지지 않았습니다. 카바코프는 되려 농업 지역의 5만에서 6만 되는 쿨라크 가구들이 북부 삼림 지대로 이주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스탈린도 이를 그대로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3월 30일에 "성공에 취해 있다"는 말로 유명한, 지역 당국자들이 자발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집단화 캠페인을 강압적이고 폭력적으로 실시하는 것에 비판하는 사설을 실었습니다. 이 사설이 실리고 집단 농장에서 갑자기 탈퇴자가 확 늘어났습니다.
또한 중앙위에서 행정 오류 등으로 추방되지 말아야했던 농민들을 다시 농촌으로 컴백홈 시키는 것도 추진되었습니다만,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으로 농민들을 다시 복귀시킬 수송 상의 난맥으로 상당수는 추진도 안 되고 고자가 되었죠. 그리고 이런 노력과 별개로 새롭게 추방되는 농민들 수는 늘어만 갔습니다. 이러한 탈쿨라크화 정책은 두 가지 핵심 동력으로 움직이고 있었죠. 첫째는 집단화를 비롯한 농업 캠페인에 대한 저항에 대처하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공업 지역에서의 노동 공급을 맞추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사실 이는 반혁명적 저항자들을 스탈린이 권력욕과 편집증적 성격으로 족친 것이 아니라 수요자와 공급자가 상품을 다루는 아주 적확한 방식(...)이었죠. 그리고 이에 대한 적절한 관리를 행할 시스템과 능력의 부재가 바로 굴락의 대규모 확장을 낳았습니다.
사실 중앙에서 이럭저럭 수용소 혹은 과도한 탈쿨라크화 캠페인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표하는 것은 도덕적 동기는 절대 절대 절대 아니었습니다. "유용한" 노동력들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죠. 예를들어 베센하 RSFSR은 우랄의 임업에 추가적인 노동력 공급을 재고해봐야겠다고 언급하기도 했는데, 이는 임업 기업들이 주택과 식량 공급을 적절히 해주지 못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전부 무시됩니다. 처음으로 도착한 5천 명의 쿨라크들이 이주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2만 5천명의 쿨라크들이 우랄 주 밖에서 이주되어 왔습니다. 오블리스폴콤의 행정 담당 부서는 그들 지역 내의 굴락에 제대로 된 노동조건을 제공해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만, 일단 중앙에서는 그 노동력에 제공되어야 할 최소의 조건들을 제시하지 않아 의미가 없었습니다.
1930년 3월, 쿨라크 정책을 맡은 안드레예프는 지역의 꾸준한 요청에 따라 쿨라크들을 추방하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책임은 달라고 한 놈들에게 있으니 귀중한 노동력에게 적절한 생활 및 노동 환경을 제공해줘야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즉, 중앙은 이 문제에 대해서 손을 싹 씻어버렸습니다.
1930년 봄, 우랄의 오블리스폴콤은 임업에 종사하게 된 쿨라크들에게 주어진 생활 및 노동환경이 너무 개판이었다는 것에 혼란에 빠집니다. 4만명의 쿨라크들이 임업 지대에 이주당했는데, 준비된 것은 1만 3천명 정도만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었습니다. 오블리스폴콤에서는 이걸 해결할 계획을 만들라고 3일을 주었습니다. 역시 일을 저지르고 똥은 중앙이 치워야 소련답죠. 주의 보급 담당 부서는 상부인 나르콤스납에 추가적인 식량 및 보급품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보건인민위원회(NarKomZdrav, Narodnyi Komissariat Zdravokhraneniia, 나르콤즈드랍)는 보건 장비 및 의약품을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나르콤핀도 역시 재정을 더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중앙의 역량도 초월하는 일이었습니다. 나르콤스납은 무역인민위원회와 함께 7만 5천 400명 어치의 보급품을 공급합니다만 수요는 25만명 어치였습니다. 의료품들은 사실상 역병이 한 번 돌고 난 뒤에야 지급되었고, 나르콤핀도 요구하는 돈의 극히 일부만 제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제 기능(?)을 한 기관은, 재미있게도 죄수들의 체포와 수송을 담당한 오게페우였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많은 사람들이 추위, 굶주림, 질병으로 죽어갔습니다. 심지어 주택과 식량 뿐만이 아니라 임업을 위한 제대로 된 도구들도 부족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하루 10시간에서 12시간씩 일을 해야했죠. 거의 30%의 노동력이 일을 하는 와중에 병이 걸리거나 몸이 심각하게 쇠약해졌습니다. 그러나 임업 지대의 생산성에 대한 책임을 지는 현장 관리자, '코만단틔'들은 생산량을 채우지 못한 농민들에게 가혹하게 대했습니다. 그리하여 굴락 수감자들이 작업 중 급사하는 일이 잦아지게 됩니다.
안드레예프를 비롯한 중앙 당국자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역시 지적을 합니다만 지역에서는 "중앙에서는 물건들이나 제대로 보내시죠?"라고 맞받아칩니다. 의약품, 식량, 건설자재, 다른 상품들의 보급 상황은 심각했습니다. 왜냐면 이들 굴락으로 물품을 보낸다는 건 급속히 팽창하고 있는 다른 공업지대로부터 자원을 빼온다는 말이었고, 이는 곧 막대한 자본을 투자한 신규 산업단지의 건설속도 및 생산성을 떨어트리는 일로 계획 미달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죠. 각 인민위원회와 지역 당 모두 그 책임을 지기를 원하지 않았죠. 이미 '인민의 적'으로 규정된 사람들을 위해 이 부담을 떠맡아줄 기관들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동안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습니다. 안드레예프는 정치국에 '즉각적인 조치'를 요하는 불평 리스트를 제출합니다. 몇몇 조치들이 빨리 취해져야 했고, 오게페우의 야고다가 수행을 확인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중앙위와 소브나르콤에서 굴락의 보급 문제를 다시 꺼내들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 뒤 오게페우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정치국에서 요구한 조치들이 거의 취해져있지 않았습니다. 나르콤젬은 굴락에 공급할 농산품 생산에 1천 200만 루블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나르콤핀은 177만 루블 밖에 줄 수 없다고 응수했습니다. 베센하는 적어도 3만명의 이주자들을 위한 건설 자재들이 다른 분야로부터 옮겨 와야한다고 말했으나 아무 조치도 없었습니다. 소련의 모든 산업이 폭주기관차처럼 달리는 동안 굴락을 위한 자원 투입은 어디에서도 중요한 문제로 치지도 않았습니다.
사실상 탈쿨라크화된 농민들 자신이 유일하게 풍족하게 공급되는 "자원"이었습니다. 우랄 임업에 돌아간 기계화 투자비가 매우 짰기 때문에 필요한 노동력의 수는 줄어들 줄 몰랐습니다. 1931년 역시 전산업 분야에서 강제노동의 확대가 이루어졌습니다. 석탄과 철광석 생산, 그리고 철도 건설에서 노동력 부족으로 위기가 터지자, 쿨라크들이 그 자리를 메꾸어야 했습니다. 동부 철강 기업체, 보스토코스탈은 1만 4천 가구들이 필요하다고 요청했습니다. 마그니토스트로이는 혼자서 5천 가구를, 타길스트로이는 3천 가구를 요청했습니다. 첼랴빈스크와 키젤의 석탄 산업에서는 2천 200을 요구하였고 즐라토우스트와 타길의 제철소는 각각 500 가구와 200 가구를 받았습니다. "계급으로서 쿨라크 절멸"이 실시된 지 1년 반 뒤, 167만 9,528명로 이루어진 35만 6544개의 가구가 굴락 시스템으로 흡수되었습니다.
(사진은 우즈벡에서 찍어온 것)
그리고 우랄은 혼자서 거의 3분의 1을 흡수했습니다. 57만 1355명으로 이루어진 12만 3547개 가구가 우랄로 이주되어 왔습니다.
전례 없던 대규모 강제수용은 이런 면에서 농촌에서 지역 권위에 저항하는 힘 있는 (혹은 있는 것 같은) 농민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지역 당국, 그리고 노동력 부족으로 몸살을 앓던 산업체의 관료들의 합작품이었습니다. 지역에서는 혁신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수십만명의 옛 쿨라크들을 강제노동 시스템으로 끌고 들어왔습니다. 우랄의 지도부가 원했던 현대식 제철소, 그리고 기계공장 콤비나트 등은 목재 연료와 건설 자재 부족으로 위기에 봉착했었고, 스탈린이 1929년 12월 정치국 회의에서 "계급으로서 쿨라크의 절멸"을 이야기 했을 때 우랄의 지도부에서는 쿨라크들을 강제이주시켜 북부의 삼림으로 뿌리는 것을 결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찌되었든 중앙의 명령을 직접적으로 대놓고 어기진 않았습니다. 명령들 자체가 극도로 모호했기 때문에, 지역 지도부들은 부족한 명료함을 최대한 이용하여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로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들은 "거대한 우랄계획"을 이럭저럭 구해내는 데 일조했습니다. 비록 수십 만의 목숨값을 치루어야 했지만 말이죠.
러시아의 철강 야금 전선은 실제 전투들 못지 않게 많은 사상자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만, 결과는 두고 보아야할 일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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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무상주거라니요 땍!!
아무리 공동주택이라도 1 정도의 임대료는 받아야지요 그래야 트로피코공화국의 위엄아니겄습니까?
@장비를정지합니다 이분 모르네 너무 몰라
곰쓸개보다 벼룩의 간이 최고의 음식이라는 사실을
하층민들의 오락은 선술집에서
중산층들의 오락은 레스토랑과 카바레에서
부유층들의 오락은 나이트클럽에서 뒹글게 하고
아무리 공동주택이라도 1정도의 임대료를 챙겨야 하고 아무리 특히 "숙소"라도 임대료는 빼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공동주택 위주로 건물을 짓는것도 빨갱이들이나 할짓이죠 숙소나 오두막을 많이 지으면 좋습니다. 오두막은 임대료를 안받는 최악의 단점이 있고 유지비용도 매우 싸죠
숙소는 임대료를 챙길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경찰관은 최대 10명만 있으면 되요 더 많으면 세금낭비입니다.
@장비를정지합니다 무상주거때문에 국가부도가 올확률은 높지만 은행을 많이 세운다고 국가부도가 오는일은 없습니다.
조국의 심장인 대통령각하의 월급을 많이 주는 애국적 기관이거든요
마지막으로 위대한 수령 스탈린동지의 어록으로 끝맺음 짓겠습니다.
"인민은 낙엽과 같다. 하나씩 밟을 때는 바스락거리지만 한데 긁어모아 불을 붙이면 매우 잘 탄다."
"내가 죽고 나면 사람들은 내 무덤에 쓰레기를 집어던지겠지만, 결국 역사의 바람이 그 쓰레기들을 전부 쓸어낼 것이다."
"나는 독재자가 아닙니다. 당의 결정을 따르는 일꾼일 뿐이죠."
@장비를정지합니다 시간나시면 이거 한번 해보세요
http://cafe.daum.net/Europa/2oQs/10055
친위폭동이라는건데 전국민에게 폭동을 강요해서 나라를 아주 그냥 콩가루로 만드는 재밌는 놀이입니다.
물론 각하에대한 친위대를 많이 늘려야 살아남겠죠 잘못하면 대통령궁이 폭싹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할수도 있습니다.
단점은 인구수가 급락하죠 장점은 재밌죠
인클로저 운동은 지주들이, 탈쿨라크 운동은 관료들이...
어흐흐....농업국가의 공업국가화란....그나저나 또 건수가 하나 늘어나는군요. 적극적인 겨시가 없어도 자신들의 과대해석....으로 인용될 건수가 자꾸 늘어나는건 참 재미지군요.
위대한 총폭탄투쟁정신으로 산업을 발전시키자
불쌍한 농민들 ㅠㅠ
쿨라크가 아닌데도 주변의 모함으로 끌려간 농민들도 엄청날듯요ㅜㅜ 불쌍ㅜ
연재하신글을 읽어보니 스탈린의 단순한교시를 지방당조직이 애매모호함을 이용해서 자기네 기반강화의 주력하는군요.. 이제 조만간 서기장의 숙청이 시작되겠네요. 대숙청이 갖는의미가 이렇게 다양하고 필수불가결한 이유들이 있었다는말씀은 한인물이나 역사적사건을 단편적으로 도식화되서는 안된다고배웁니다 . 좋은글입니다
와 이번화 이 시리즈의 백미인거 같네요. 쏘련의 산업화라는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치 행정적 갈등을 빚으며 실제로 돌아갔는가가 실로 여지없이 고스란히 드러난... 중반부는 감동하면서 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