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열사는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일일불독서 구중생형극)’고 했다. 이 명언에서 한국인은 ”하루라도 김치를 먹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일일불식김치, 구중생형극)”는 말을 생각해냈다. 한국인들은 외국에 가서 사흘만 지나면 김치가 생각난다. 한국인들에게 김치는 음식, 그 이상이다.
인간은 생존에 물과 공기(산소)가 필수적이지만 미생물은 반드시 산소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특히 김치 발효를 좌지우지하는 유산균은 산소가 부족하거나 없더라도 잘 생존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김치 속 당분을 미생물이 이용하기 시작하면 이산화탄소가 나와 김치 포기 속의 공기를 밀어낸다. 이때부터 공기를 싫어하는 유익한 유산균이 번식하여 발효가 일어나며 김치가 익는다. ⓒ 연합뉴스
김치 속 당분을 미생물이 이용하기 시작하면 이산화탄소가 나와 김치 포기 속의 공기를 밀어낸다. 이 때부터 공기를 싫어하는 유익한 유산균이 번식하여 발효가 일어나며 김치가 익는다. 나는 김장김치를 담글 때 김치용기 맨 위에는 소금에 살짝 절인 배추 겉잎을 두세 겹으로 올려 김치와 공기와의 접촉을 최소화한다. 공기를 싫어하는 혐기성(嫌氣性)세균(anaerobes)을 배려한, 맛깔난 김치를 먹기 위한 나 나름의 과학적 조치이다.
anaerobes는 정확히 번역하면 무산소성생물이 가장 어울린다. 산소가 없는 곳에서 잘 자라는 생물은 동식물에는 없고 세균밖에 없으므로 무산소성세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산소가 있는 곳에서도 자랄 수 있는 통성 무산소성생물(facultative anaerobes)도 있어 혐기성세균 또는 생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일부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통성 무산소성생물은 한마디로 양다리를 걸치는 전략을 펼치는 생물(세균)로 보면 된다. 폭넓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으니 생존과 진화의 측면에서 보면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 이는 마치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지역, 즉 바다와 만나는 강 하구 지역에서 잘 자라는 물고기 등 염생 생물이 서식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엄마손 김치 맛, 실은 혐기성 세균의 작품
세균에는 공기(엄밀하게 말하면 산소)가 있어야 생존하는 호기성(好氣性)세균(aerobes 또는 aerobic bacteria)과 공기를 싫어해 공기가 있으면 잘 자라지 못하는 혐기성(嫌氣性)세균이 있다. 맛있는 김치는 혐기성 세균의 조화가 빚어낸 발효과학의 걸작이다.
유산균 등의 작용으로 생긴 젖산과 초산, 알코올 등이 김치 특유의 상큼한 맛과 향을 내게 되면 한국인들은 ‘김치 아로마’에 젖어 밥상에 이것이 빠지면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만약 김치에서 이 같은 유산균 발효가 일어나지 않으면 김치는 단순히 소금에 절인 염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잘 익은 김치만 많이 먹더라도 굳이 비싼 돈을 들여 프로바이오틱스나 유산균제제를 구입해 먹을 필요가 없다.
김치 담그는 솜씨가 없는 가정에서는 배추 따위를 절일 때 소금을 지나치게 많이 뿌리거나 젓갈 등을 과다하게 넣어 김치가 아니라 짠지처럼 만드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아무리 오래 두어도 김치가 되지 못한다. 한번 짠지는 영원한 짠지다. 짠지에는 발효의 능력을 지닌 그 어떤 미생물도 자랄 수 없다. 미생물이 자랄 수 있는 소금 농도는 정해져 있다.
미생물 가운데는 다른 보통 미생물과 달리 염분을 좋아하는 호염(好鹽)균(halophile 또는 halobacteria, halo란 접두어는 소금을 뜻하는 그리스어 halos에서 유래했으며 phile은 좋아하다는 뜻)이 있다. 드물게는 염전, 사해 등에서도 생존하는 극호염균도 있다. 콘택트렌즈 등을 담가두는 식염수 내에서도 활동하는 것들이 있다. 식염수니까 세균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 믿고 오래된 식염수에 콘택트렌즈를 두었다가 사용할 경우 결막염 등이 생길 위험성이 있는 경우는 바로 이런 호염균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10% 소금물이 되면, 대부분의 미생물은 활동이 정지되거나 사멸한다. 젖산균은 15%, 유해균인 산막 효모는 20% 농도의 소금물이어야만 생육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김치가 발효·숙성되는 과정에는 염분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산(acid)도 미생물의 활동 저지에 큰 힘을 발휘한다. 식염 농도는 낮아도 염과 산의 상승효과에 의해 방부력이 강해진다. 산이 많은 경우에는 염이 적어도 다른 균들의 성장을 억제하는 경우가 있다. 김치는 우리가 좋은 맛의 김치를 맛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소금의 성질과 작용을 최대한 이용한 결과이다. 김치가 과학의 산물이라는 것은 여기서도 증명된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마시다 남은 막걸리를 부엌 부뚜막 부근에 두고 며칠 뒤 막걸리에서 시큼한 냄새가 나면 이를 음식 만드는 식초로 사용했다. 이른바 막걸리 식초이다. 미생물이 알코올 발효를 통해 만들어낸 것이 술이며 알코올 발효가 끝난 뒤 이 알코올 성분을 먹이로 해 초산균이 왕성하게 활동해 먹을 수 있는 초산, 즉 식초를 만든다.

호염성세균을 현미경으로 찍은 모습. 김치의 발효를 담당하는 주역인 유산균은 호염균의 일종이다. ⓒ Wikimedia Photo
김치에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처음에는 적당한 온도와 당분, 염분을 토대로 유산균(젖산균)이 자라 김치를 만들었지만 더 오랜 시간이 지나면 김치에서 초산균이 활동을 개시한다. 그렇게 해 일정 시간이 지나면 김치는 시어 꼬부라지게 된다. 신 김치를 잘 먹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너무 신맛이 강하면 거부감이 생긴다.
김치가 시어지는 단계를 넘으면 텁텁하고 불쾌감마저 생기는 군내가 난다. 미생물이 좁은 공간에서 너무 많이 자라면 이런 현상이 생긴다. 인간도 좁은 지역에 갑자기 너무 많은 사람이 모여 살면 제때 하수·분뇨·쓰레기 처리가 어려워 도시가 시궁창으로 변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미생물은 인간에게 늘 좋은 것만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생육 환경이 나쁠 때는 고약한 냄새를 내는 인돌 등 나쁜 성분도 만들어 배출한다. 냄새가 심하게 나는 이런 김치는 버려야 한다.
저온숙성 과학의 결정체, ‘묵은지’ 김치
몇 달, 때로는 몇 년이 지나도 맛과 향의 거부감이 없는 김치를 먹기 위해서는 미생물들이 매우 서서히 자라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김치를 담근 직후부터 저온을 일정하게 오랫동안 유지하면 1~2년이 지나도 일반김치에서 맛보기 힘든 특유의 맛깔 난 김치를 만나게 된다. 우리는 이를 ‘묵은지’라고 한다. ‘묵은지’는 저온숙성 과학이 한국인에게 준 선물이다.
김치에는 공기, 염도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너무 추운 곳에 있거나 너무 뜨거운 곳에 있으면 행동이 굼뜨듯이 대부분의 미생물은 매우 높은 온도와 매우 낮은 온도에서는 죽거나 활동을 정지한다. 미생물도 잘 자라는 온도가 있다. 인간이든, 미생물이든 잘 자라고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하려면 효소가 잘 작동해야 한다.
김치 과학에서는 온도가 매우 중요하다. 미생물은 온도가 높을수록 혈기왕성하게 증식한다. 김치를 담근 후 섭씨 25도가 넘는 온도에 3~4일 두면 금방 푹 익는다. 이를 그대로 둘 경우 얼마 지나지 않아 미생물이 너무 과다하게 증식해 김치는 미생물이 내는 나쁜 물질로 인해 흔히들 군내라고 하는 특유의 나쁜 냄새가 난다. 따라서 맛있는 김치를 오래도록 먹으려면 어느 정도 김치가 익은 뒤 섭씨 4~5도 정도로 낮은, 일정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더는 미생물이 증식하지 못하거나 매우 더디게 증식하도록 하는 것이다.
40~50년 전 가정에서 냉장고를 찾아보기 어렵던 시절에는 늦가을 김장 후 김칫독을 땅에 묻었다. 이는 적정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시행착오 끝에 우리 선조들의 터득했던 경험의 지혜였던 것이다. 요즘에는 과학기술로 만든 김치냉장고가 이를 대신하고 있지만 말이다. 우리가 사시사철 맛있는 김치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일 년 내내 김치 재료를 공급하는 과학농업의 덕도 있지만 김치냉장고의 역할 또한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김치 발효에 작용하는 미생물의 종류만큼이나 우리가 만들어 먹는 김치의 종류도 다양하다. 하지만 김치에 작용하는 과학의 원리는 어떤 원리가 더 많이 작용하느냐만 차이가 있을 뿐 어떤 김치에서나 똑같다. 삼투압과 젖산발효, 초산발효 등의 어울림이 빚어낸 김치발효(fermentation)는 미생물이 인간에게 선사한 축복이다. 김치가 이를 우리들에게 증명해주고 있다. 풍부한 섬유질과 유산균, 아미노산을 비롯한 각종 유기산, 무기질, 비타민의 보물창고인 김치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꿀릴 것이 없는 건강식품이다.
첫댓글 김치에는 105가지의 유산균이 들어있다던데요...
암튼 내년엔 혐기성 김치 담가서 감칠맛 나게 먹어봤음 좋겠구먼~~
우리 조상님들께서 김치의 발효과학을 어찌 아셨는지 참 신기합니다. ^^
김치는 선조들의 발효과학의 꽃인데, 즐겨 먹는 사람과
접근도 안하는 이들이 양극화 되어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