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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표적 성리학자
▒▒▒ 아래 내용은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에서 가져오고 참고하였음을 밝힙니다 ▒▒▒
▒ 이색(李穡, 1328~1396)
이색은 이곡의 아들로서 호는 목은(牧隱)이며 14살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한 수재이다. 원나라에서 일을 보던 아버지의 인연으로 20대에 원나라에서 잠시 벼슬을 하기도 했으며, 귀국하여 국정에 참여하여 성균 대사성이 되었고, 정몽주, 김구용 등과 함께 명륜당에서 학문을 강혼하였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큰 벼슬을 주며 예를 다해 출사(出仕)를 종용했으나 망국의 사대부는 해골을 옛산에 묻을 뿐이라고 하며 끝내 거절하다가 피서가던 길에 원인 모르게 갑자기 죽었다. 문하인 권근(權近), 김종직(金宗直), 변계량(卞季良) 등은 모두 다인이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그는 차를 몹시 좋아하여 깊은 산 속 골짜기의 벼랑에서 떨어지는 샘물가에서 부싯돌을 쳐서 차를 달이며 「육우가 차를 좋아한 것도 별 것 아니구나」라고 읊었다. 또 그는 차를 끓여 마시니 편견이 없어지고 마음이 밝고 맑아 생각에 그릇됨이 없다[皎皎思無邪]고했으며, 영아차의 맛은 그 자체가 참되다(靈芽味自眞)고 하였다. 가루차를 점다하여 마시고 차가 뼈 속까지 스며들어 모여 있는 삿된 기운을 모두 없애준다고 하였으니 그의 다생활은 정도(正道)나 참됨을 지키는 것[守眞]임을 짐작할 수 있다.
본관 한산(韓山). 자 영숙(潁叔). 호 목은(牧隱). 시호 문정(文靖). 이제현(李齊賢)의 문하생.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進士)가 되고, 1348년(충목왕 4) 원(元)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했다.
1351년(충정왕 3) 부친상(父親喪)으로 귀국,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개혁 ·국방강화 ·교육진흥 ·불교억제 등 당면정책을 왕에게 건의했다. 1353년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135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서 회시(會試)에 장원,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 등을 지내다가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원나라의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다. 1356년 귀국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 등 인사행정을 주관, 정방(政房)을 폐지하였고, 이듬해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때는 3년상(三年喪)을 제도화했다.
1361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왕의 남행(南幸)을 호종, l등공신이 된 후 좌승선(左承宣)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자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등과 강론,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책봉된 후에는 신병으로 관직을 사퇴했으나 1375년(우왕 l) 우왕의 청으로 다시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했다. 1377년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鐵嶺衛) 사건에는 화평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이성계가 득세하자 장단(長湍) ·함창(咸昌) 등지에 유배되었다.
1391년(공양왕 3)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책봉되었으나 다시 여흥(驪興)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조선 개국 후 인재를 아낀 태조가 1395년 한산백(韓山伯)에 책봉했으나 사양,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죽었다. 문하에 권근(權近) ·김종직(金宗直) ·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 학문과 정치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저서에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 정몽주(鄭夢周, 1337~1392)
호는 포은(圃隱)이며 고려말의 충신이자 유학자로서 24살 때 삼장(三場 : 初試, 覆試, 殿試)에 거듭 장원급제 하였다. 개성에 오부학당(五部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여 부패한 불교의 폐단을 없애고자 하였고, 명나라와의 외교에 힘쓰다가 한때 유배생활도 하였다.
성미가 호방하고 매서웠으며 충효로 일관하였고, 그의 시문(詩文)도 일가(一家)를 이루어 『포은문집(圃隱文集)』이 전해진다. 이성계의 문병을 갔다가 이방원이 부른<하여가(何如歌)>에 대해 <단심가(丹心歌)>로 답하고 돌아오는 길에 개성에 있는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본관 연일(延日).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초명 몽란(夢蘭) ·몽룡(夢龍). 시호 문충(文忠). 영천(永川) 출생.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 ·수찬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 ·예조정랑 겸 성균박사(禮曹正郞兼成均博士)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역임하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 ·예의판서(禮儀判書) ·예문관제학 ·전법판서 ·판도판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 ·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 ·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 길재(吉再, 1353~1419)
호는 야은(冶隱)으로 이색, 정몽주, 권근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우고 성균관 박사가 되어 국자감(國字監)의 학생들과 양가(良家)의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김숙자(金叔滋)에게 성리학을 가르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하여금 학통을 잇게 하였다. 이방원이 높은 벼슬을 주었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끝내 나가지 않았다.
본관 해평(海平). 자 재부(再父). 호 야은(冶隱) ·금오산인(金烏山人). 시호 충절(忠節). 금주지사 (錦州知事) 원진(元璡)의 아들. 구미 출생. 1363년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서 처음 글을 배웠으며, 1370년 박분(朴賁)에게 《논어》 《맹자》를 배우면서 성리학을 접하였다. 관료로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개경에 갔다가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374년 생원시(生員試)에, 1383년(우왕 9)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고, 그해 중랑장 신면(申勉)의 딸과 결혼하였다.
1386년 진사시에 합격, 청주목(淸州牧) 사록(司錄)에 임명되나 부임하지 않았고, 다음해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었다가, 1388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하였다. 1389년(창왕 1)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고려의 쇠망을 짐작하여 늙은 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구실로 사직하였으며, 고향으로 가는 길에 장단에 있던 이색(李穡)을 만나기도 하였다. 1390년 계림부(鷄林府)의 교수가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우왕의 죽음을 듣고 마음으로 3년상을 행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정종 2)에 이방원(李芳遠)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며 거절하였다. 1402년(태종 2)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불교식 장례법을 따르지 않고 성리학적 가례(家禮)를 따랐다. 세종이 즉위한 뒤 길재의 절의를 기리는 뜻에 그 자손을 서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주었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며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으며, 김숙자(金叔滋)를 비롯하여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등이 학맥을 이었다. 청풍서원(淸風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야은집》 《야은속집(冶隱續集)》,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있다.
▒ 정도전鄭道傳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학자. 본관 봉화(奉化). 자 종지(宗之). 호 삼봉(三峰). 1362년(공민왕 11) 진사, 이듬해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내고 부모상으로 사직하였다. 1370년 성균박사가 되고 이어 태상박사(太常博士)를 거쳐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1375년(우왕 1) 성균사예(成均司藝) ·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였고 이 해 권신 이인임(李仁任) ·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親元排明)정책을 반대하다가 회진현(會津縣)에 유배되었다.
1377년 유형을 마치고 고향 영주(榮州)에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종사하며, 특히 주자학적 입장에서 불교배척론을 체계화하였다. 1383년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의 막료가 되었고 이듬해 성절사(聖節使) 정몽주(鄭夢周)의 서장관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385년 성균좨주(成均祭酒), 이듬해 남양부사(南陽府使)로 있다가 1388년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승진하였다.
이성계의 우익으로서 조준(趙浚)과 함께 전제개혁론을 주장, 1389년(창왕 1)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였고 창왕(昌王)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는데 적극 가담하여 봉화현충의군(奉化縣忠義君)에 책록되었다. 1390년(공양왕 2) 경연지사(經延知事)로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대사성(同判都評議使司事兼成均大司成) ·삼사부사(三司副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몰아내고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科田法)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조선 개국의 정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듬해 이성계가 군사권을 장악하여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설치하자 우군총제사(右軍摠制使)가 되고 이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재직 중, 구세력의 역습으로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고 봉화로 유배되었다. 1392년 한때 풀렸으나 정몽주의 탄핵으로 투옥되었고 정몽주가 살해된 뒤 풀려나와 조준 ·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그 공으로 분의좌명개국공신(奮義佐命開國功臣) 1등에 녹훈되고,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예문춘추관사(藝文春秋館事)에 임명되어 사은 겸 정조사(謝恩兼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4년(태조 3) 한양천도 때는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의 기지를 결정하고 궁 ·문의 모든 칭호를 정했다.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찬진하여 법제의 기본을 이룩하게 하고 1395년 정총(鄭摠) 등과 《고려사》 37권을 찬진했으며, 1397년 동북면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가 되어 성을 수축하고 역참(驛站)을 신설했다. 제l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에게 참수되었다.
유학(儒學)의 대가로 개국 후 군사 ·외교 ·행정 ·역사 ·성리학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였고, 척불숭유(斥佛崇儒)를 국시로 삼게 하여 유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 《삼봉집(三峰集)》 《경제육전(經濟六典)》 《경제문감(經濟文鑑)》 《심기리편(心氣理篇)》 《불씨잡변(佛氏雜辨)》 《심문천답(心問天答)》 《진법서(陳法書)》 《금남잡제(錦南雜題)》 등이 있고, 작품에 〈납씨가(納氏歌)〉 〈정동방곡(靖東方曲)〉 〈문덕곡〉 〈신도가(新都歌)〉 등이 있다.
▒ 하륜河崙
본관 진주. 자 대림(大臨). 호 호정(浩亭). 시호 문충(文忠). 1365년(공민왕 14) 문과에 급제,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고 고공좌랑(考功佐郞)에 올랐다. 밀직사첨서사(密直司簽書事)를 거쳐, 1388년(우왕 14) 최영(崔瑩)의 요동공격을 반대하다가 양주(楊州)로 귀양갔다. 조선 개국 후 1393년(태조 2) 경기도도관찰사가 되어 한양(漢陽) 천도를 주장, 관철하였고 이듬해 중추원첨서사(中樞院簽書事)에 전보, 중국 명나라 태조가 표전문(表箋文)이 불손하다고 트집잡자, 1396년 한성부윤으로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표전문 작성의 전말을 해명하였다.
1398년 충청도도관찰사로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을 도와 공을 세우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진,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에도 방원을 도왔고, 그해 명나라 태조의 국상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가서 정종의 왕위승습(王位承襲)을 승인받고 귀국, 문하부참찬사에 오르고 다시 의흥삼군부 판사(義興三軍府判事)를 거쳐 우정승으로 진산백(晉山伯)에 진봉되었다.
그해 태종의 즉위로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고,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좌정승(左政丞)에 복관, 승추부판사를 겸하였다. 그해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등극사(登極使)로 가서 조선왕조의 완전인준을 표하는 고명인장(誥命印章)을 받아왔으며, 이첨(李詹)과 함께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수하였다. 1409년 의정부영사가 되어 군정(軍政)을 개정한 데 이어 춘추관영사로 《태조실록(太祖實錄)》 편찬을 지휘하고, 1412년 다시 좌의정을 거쳐, 1416년(태종 16) 70세로 치사(致仕)하였다. 진산부원군에 진봉되어 왕명으로 함길도(咸吉道)에 있는 선왕(先王)의 능침(陵寢)을 순심(巡審)하고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문집에 《호정집》이 있다.
▒ 권근權近
본관 안동. 자 가원(可遠) ·사숙(思叔). 호 양촌(陽村). 시호 문충(文忠). 초명 진(晋). 1367년(공민왕 16) 성균시(成均試)를 거쳐 이듬해 문과에 급제, 춘추관 검열이 되고, 우왕(禑王) 때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 ·예의판서(禮儀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창왕(昌王) 때 좌대언(左代言) ·지신사(知申事)를 거쳐 밀직사첨서사(密直司僉書事)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75년(우왕 1) 박상충(朴尙衷) ·정도전(鄭道傳) ·정몽주(鄭夢周)와 같이 친명정책(親明政策)을 주장하여 원나라 사절의 영접을 반대하였고, 1389년(창왕 1) 윤승순(尹承順)의 부사(副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올 때 가져온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이 화근이 되어 우봉(牛峯)에 유배되었다가 영해(寧海) ·흥해(興海) ·김해(金海) 등지로 이배(移配)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또 다시 청주(淸州)에 옮겨졌다가 풀려났다.
조선이 개국되자 1393년(태조 2) 예문춘추관학사(藝文春秋館學士) ·대사성 ·중추원사(中樞院使) 등을 역임하고, 1396년 표전문제(表箋問題)가 일어나자 자청하여 명나라에 들어가 두 나라의 관계를 호전시켰으나, 정도전 일파의 시기로 불안한 위치에 있게 되었다. 1398년 정도전 일파가 숙청되자,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하부참찬사(文下府參贊事)를 거쳐 대사헌을 지내고, 사병(私兵)의 폐지를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으로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고, 대사성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거쳐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이사(貳師) 등을 역임하였고, 왕명으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찬하였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경학(經學)에도 밝아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을 정하였다. 또한 그의 《입학도설(入學圖說)》은 후일 이황(李滉) ·장현광(張顯光) 등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문학을 존중하였고, 시부사장(詩賦詞章)의 학을 실용면에서 중시하여 이를 장려하였으며, 경학(經學)과 문학(文學)의 양면을 조화시켰다. 문집 《양촌집(陽村集)》 외에 저서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 《동현사략(東賢事略)》이 있고, 작품에 <상대별곡(霜臺別曲)>이 있다.
▒ 김숙자金叔滋
본관 선산. 자 자배(子培). 호 강호산인(江湖山人). 시호 문강(文康). 12세 때부터 길재(吉再)에게 《소학》과 경서를 배웠다. 역학에 밝은 윤상(尹祥)이 황간현감으로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걸어가서 배움을 청하자, 그 열의를 보고 《주역》의 깊은 뜻을 가르쳐주었다. 1414년(태종 14) 사마시를 거쳐, 1419년(세종 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다가 한때 해임되었다.
그 뒤 선산교수(善山敎授) ·개령현감 ·사재감부정(司宰監副正) ·성균관사예(司藝) 등을 역임하였다. 세조 즉위 뒤 1456년 벼슬을 그만두고, 밀양에 돌아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거유(巨儒)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아 아들 종직(宗直)에게 잇도록 하여, 정주학(程朱學)을 발전시켰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친상(親喪) 중에는 여막 곁에 서재를 만들어 조석을 올린 뒤에 가르치기까지 하여 학업을 받는 자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소학》을 앞세우면서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자세는 길재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서, 16세기에 이르러 사림 사이에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선산의 낙봉서원(洛峰書院)에 제향되었다.
▒ 김종직金宗直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 ·문신. 본관 선산(善山). 자 계온(季 ) ·효관(孝 ). 호 점필재( 畢齋). 시호 문충(文忠). 경남 밀양 출생. 1453년(단종1)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정자(正字) ·교리(校理) ·감찰(監察)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를 지냈다. 성종(成宗) 초에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함양군수 ·참교(參校) ·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다. 도승지 ·이조참판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 ·한성부윤 ·공조참판(工曹參判) ·형조판서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에까지 이르렀다.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문하생으로는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김일손(金馹孫) ·유호인(兪好仁) ·남효온(南孝溫) 등이 있다.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의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으므로 훈구파(勳舊派)와의 반목과 대립이 심하였다.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관(史官)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이미 죽은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며, 그의 문집이 모두 소각되고,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등 많은 제자가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그 죄가 풀리고 숙종(肅宗) 때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구미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점필재집(
畢齋集)》, 저서에 《유두유록(流頭遊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고, 편서에 《동문수(東文粹)》 《일선지(一善誌)》 《이준록(彛尊錄)》 등이 있다.
▒ 남효온南孝溫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본관 의령(宜寧). 자 백공(伯恭). 호 추강(秋江) ·행우(杏雨) ·최락당(最樂堂). 시호 문정(文貞). 김종직(金宗直)의 문하로 김굉필(金宏弼) ·정여창(數汝昌) ·김시습(金時習) ·안응세(安應世)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1478년(성종 9) 세조에 의해 물가에 이장된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의 복위를 상소하였으나,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저지로 상달되지 못하자 실의에 빠져 유랑생활로 생애를 마쳤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는 김종직의 문인이었다는 것과 소릉 복위를 상소했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하였다.
만년에 저술한 《육신전(六臣傳)》은 빛을 못 보다가 숙종 때 비로소 간행되었다. 1713년(중종 8) 소릉이 추복(追復)되면서 신원(伸寃)되어 좌승지에 추증되고 1782년(정조 6)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 생육신의 창절사(彰節祠)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추강집(秋江集)》 《추강냉화(秋江冷話)》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귀신론(鬼神論)》 등이 있다.
▒ 김굉필金宏弼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본관 서흥(瑞興). 자 대유(大猷). 호 사옹(蓑翁) ·한훤당(寒喧堂). 시호는 문경(文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특히 《소학》에 심취하여 ‘소학동자’라 지칭되었다. 1480년(성종 11)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주부(主簿) ·감찰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로 극형에 처해졌으나 중종반정 이후에 신원되어 도승지가 추증되고, 1517년에는 정광필(鄭光弼) 등에 의해 우의정이 추증되었다. 학문경향은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로 이어지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계승하였으며,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 중점을 두었다.
문인으로는 조광조 ·이장곤(李長坤) ·김안국(金安國) 등이 있으며, 16세기 기호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정여창(鄭汝昌) ·조광조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으로 문묘에 종사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順天)의 옥천서원(玉川書院), 달성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한훤당집》, 저서에 《경현록(景賢錄)》 《가범(家範)》 등이 있다.
▒ 조광조趙光祖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 한양. 자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시호 문정(文正).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安 )의 천거로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전적 ·감찰 ·정언 ·수찬 ·교리 ·전한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것은 국왕 교육,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사림파 등용, 훈구정치(勳舊政治) 개혁을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이었다. 국왕 교육은 군주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왕이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에 힘써 노력하여 정체(政體)를 세우고 교화를 행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앞 시기의 사화(士禍)와 같은 탄압을 피하기 위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것을 역설하였다. 성리학 이념의 전파를 위해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김굉필 ·정여창(鄭汝昌)에 대한 관직 추증을 시행하였으며, 나아가 뒤의 두 사람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여 전국에 반포하게 한 것은 사림파가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1518년에 천거를 통해 과거 급제자를 뽑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듬해에는 천거로 올라온 120명을 대책(對策)으로 시험하여 28인을 선발하였는데 그 급제자는 주로 사림파 인물들이었다.
훈구정치를 극복하려는 정책들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추진되었다.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 때에 좌의정을 지냈다는 이유로 반정(反正) 후에 폐위된 중종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반정공신들의 자의적인 조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도교 신앙의 제사를 집행하는 관서로서 성리학적 의례에 어긋나는 소격서(昭格署)를 미신으로 몰아 혁파한 것도 사상적인 문제인 동시에 훈구파 체제를 허물기 위한 노력이었다. 급기야 1519년에는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부당한 녹훈자(錄勳者)가 있음을 비판하여 결국 105명의 공신 중 2등공신 이하 76명에 이르는 인원의 훈작(勳爵)을 삭제하였다. 이러한 정책 수행은 반정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에 의해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는 공격을 받았으며, 벌레가 ‘조광조가 왕이 될 것(走肖爲王)’이라는 문구를 파먹은 나뭇잎이 임금에게 바쳐지기도 하였다. 결국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의 지지를 업은 훈구파가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킴에 따라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그러나 후일 사림파의 승리에 따라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덕(德)과 예(禮)로 다스리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인 왕도(王道)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으며, “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至治)를 일으킨다”는 진술로 압축한 바와 같이 도학정치의 구현인 지치라고 표현하였다. 동시에 그러한 이념은 사마시에 제출한 답안인 〈춘부(春賦)〉에 나타나듯이 자연질서 속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따뜻하고 강렬한 확신이 기초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학문과 경륜이 완숙되기 전에 정치에 뛰어들어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점은 후대 사림들에게 경계해야 할 점으로 평가되었다. 훈구파의 반격으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개혁은 한때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의 이념과 정책은 후대 선비들의 학문과 정치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조선 후기까지의 모든 사족(士族)은 그가 정몽주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도통(道統)의 정맥(正脈)을 후대에 이어준 인물이라는 점에 정파를 초월하여 합의하고 추앙하였다. 그것은 학문의 전수 관계로 인한 것만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하려 한 노력에 대한 경의였다. 문집에 《정암집》이 있다.
▒ 서화담徐敬德(1489 ~ 1546)
본관 당성(唐城). 자 가구(可久). 호 화담(花潭) ·복재(復齋). 시호 문강(文康). 부위(副尉) 서호번(徐好蕃)의 아들. 화담은 그가 송도의 화담에 거주했으므로 사람들이 존경하여 부른 것이다. 가세가 빈약하여 독학으로 공부를 하였고, 주로 산림에 은거하면서 문인을 양성하였으며,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조식(曺植) ·성운(成運) 등 당대의 처사(處士) 들과 지리산 ·속리산 등을 유람하면서 교유하였으며, 1544년 김안국(金安國)이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천거하였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학문경향은 궁리(窮理)와 격치(格致)를 중시하였으며, 선유의 학설을 널리 흡수하고 자신의 견해는 간략히 개진하였다. 또한 주돈이(周敦 ) ·소옹(邵雍) ·장재(張載) 등 북송(北宋) 성리학자의 학문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단편 논저로는 〈원리설(原理說)〉 〈이기설(理氣說)〉 〈태허설(太虛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 네 편이 있는데, 이들 논저에는 ‘이(理)’보다는 ‘기(氣)’를 중시하는 주기철학의 입장이 정리되어 있다. 〈태허설〉에서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태허 또는 선천(先天)이라 하고 태허에서 생성 발전된 만상(萬象)을 후천(後天)이라 하였으며, 〈귀신사생론〉에서는 인간의 죽음도 우주의 기에 환원된다는 사생일여(死生一如)를 주장하여 기의 불멸성을 강조하고, 불교의 인간 생명이 적멸한다는 논리를 배격하였다. 대표적 문인으로는 허엽(許曄) ·박순(朴淳) ·민순(閔純) ·박지화(朴枝華) ·서기(徐起) ·한백겸(韓百謙) ·이지함(李之函) 등이 있으며, 그의 학문은 남북분당기에 북인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개성을 대표한 송도3절(松都三絶)로 지칭되기도 하며,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는 시조작품으로도 전해질 만큼 유명하다. 노장사상으로 대표되는 도가사상(道家思想)에도 관심을 보여 도가의 행적을 기록한 《해동이적(海東異蹟)》에는 그의 도가적인 성향이 소개되었다. 그의 학풍은 조선 전기의 사상계의 흐름이 주자성리학 일색만이 아니었던 분위기를 보여주며, 그의 문인들 중에서 양명학자나 노장사상에 경도된 인물이 나타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한편, 북한에서는 그의 주기철학을 유물론의 원류로 평가하여 그의 철학을 높이 평가한다.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과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으로는 《화담집(花潭集)》이 있다.
▒ 이언적李彦迪
본관 여주. 호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자 복고(復古). 이름 적. 시호 문원 (文元). 원래 이름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령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다. 경주에서 태어나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에게 글을 배웠으며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사헌부 지평 ·장령 ·밀양부사 등을 거쳐 1530년(중종 25)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는데, 김안로(金安老)의 재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귀향한 후 자옥산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1537년 김안로가 죽자 다시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 부교리 ·응교를 거쳐 이듬해에는 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 무렵 일강십목(一綱十目)으로 된 상소를 올려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그 후 성균관대사성 ·사헌부대사헌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1542년 이조 ·형조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노모 봉양을 이유로 자주 사직을 하거나 외직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안동부사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544년 무렵부터 병이 생겨 거듭되는 관직 임명을 사양하였는데, 인종이 즉위한 다음해(1545)에 의정부 우찬성 ·좌찬성에 임명되었다. 그해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尹元衡) 등이 사림(士林)을 축출하기 위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는데, 이때 의금부판사에 임명되어 사람들을 죄 주는 일에 참여했지만 자신도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을사사화의 여파인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이 다시 축출될 때 그도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
부인은 박숭부(朴崇阜)의 딸로 슬하에 자식이 없어 종제(從弟) 이통(李通)의 아들인 이응인(李應仁)으로 양자를 삼았으며, 서자로는 이전인(李全仁)이 있다. 1566년 이전인은 《진수팔조(進修八條)》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그가 죽기 전에 작성해 놓은 것으로서, 임금의 학문에 필요한 《진덕수업(進德修業)》의 8가지 조목을 열거한 것이다. 그는 조선의 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27세 때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벌어진 ‘무극태극(無極太極)’ 논쟁에 참여하여, 주리적(主理的) 관점에 입각하여 이들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였다.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적 성리설은 그 다음 세대인 이황(李滉)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되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한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김안로 사후 그는 재등용되어 중종의 신임을 받으며 정치일선에 복귀하는데, 이때부터 중종 말년까지 약 20년간 그는 생애 중 가장 활발한 정치활동을 펴 나갔다. 그가 올린 <일강십목소>는 그의 정치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김안로 등 훈신들의 잘못에 휘말린 중종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고 있는 글이다. 왕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一綱] 왕의 마음가짐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바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열 가지 조목[十目]을 열거하였다.
유배기간 동안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구인록》은 유학의 근본개념인 ‘인(仁)’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을 나타낸 것이며, 《봉선잡의(奉先雜儀)》는 제례(祭禮)에 관한 책으로서 주자가례를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의 예설(禮說)을 모아 당시 실정에 맞도록 편집한 것이다.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속대학혹문(續大學惑問)》은 《대학》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견해를 보여주는 책으로 주희의 《대학장구》나 《대학혹문》을 보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특히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학설을 제시하여 이를 개편하려고 한 시도는 그 이후의 도학자(道學者)들에 비해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학문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중용구경연의》는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를 저술하여 정치의 도리를 밝혔지만 제왕학(帝王學)으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어 이를 중용의 구경(九經)으로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졌다. 완성을 보지 못한 책이지만 그는 여기에서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의 마음이며 왕은 천도(天道)를 체득하여 배천(配天) ·경천(敬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명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1573년에는 경주의 옥산서원에 제향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언적의 주요저술 원본은 ‘이언적수필고본일괄’이라고 하여 보물 제586호로 지정되어 독락당과 옥산서원에 보관되어 있으며, 다른 글들은 문집인 《회재집》에 실려 있다.
▒ 이퇴계(이황 李滉)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본관 진보(眞寶). 초명 서홍(瑞鴻). 자 경호(景浩). 초자 계호(季浩). 호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시호 문순(文純). 경북 예안(禮安) 출생. 12세 때 숙부 이우(李 )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1523년(중종18)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1528년 진사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부정자(副正子) ·박사(博士) ·호조좌랑(戶曹佐郞) 등을 거쳐 1539년 수찬(修撰) ·정언(正言) 등을 거쳐 형조좌랑으로서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겸직하였다. 1542년 검상(檢詳)으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사인(舍人)으로 문학(文學) ·교감(校勘) 등을 겸직, 장령(掌令)을 거쳐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이기(李 )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이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고 응교(應敎) 등의 벼슬을 거쳐 1552년 대사성에 재임, 1554년 형조 ·병조의 참의에 이어 1556년 부제학, 2년 후 공조참판이 되었다. 15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1568년(선조1)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 주자(朱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理) ·기(氣) 이원(二元)으로써 설명,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形而下的) 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具象化)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면서도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는데, 즉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乘]는 것은 7정(情)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기대승(奇大升)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四七分理氣與否論)의 발단이 되었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에서보다는 이념적인 면에서 추구하며, 인간의 순수이성(純粹理性)은 절대선(絶對善)이며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덕(德)으로 보았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정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고,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스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설,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퇴계전서(退溪全書):修正天命圖說 ·聖學十圖 ·自省錄 ·朱書記疑 ·心經釋疑 ·宋季之明理學通錄 ·古鏡重磨方 ·朱子書節要 ·理學通錄 ·啓蒙傳疑 ·經書釋義 ·喪禮問答 ·戊辰封事 ·退溪書節要 ·四七續編》이 있고 작품으로는 시조에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글씨에 《퇴계필적(退溪筆迹)》이 있다.
▒ 이율곡(李珥)
조선 중기의 학자 ·정치가.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 ·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릉 출생.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 ·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 ·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 ·이조 ·형조 ·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 ·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 ·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를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정치사상】 이이가 관직생활을 시작한 명종말~선조 초는 명종대에 정치를 좌우한 척신이 제거되고 새로운 정치세력이 부상한 정치적 변동기였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尹元衡) 등 그간 정사를 전횡한 권신이 차례로 쫓겨나고, 을사사화 때 죄를 입은 사람들이 신원되는 등 정세가 일변함에 따라 사림이 정계에 복귀하기 시작하였고, 곧이어 선조가 즉위하자 사림의 정계 진출은 더욱 본격화되어 그동안 훈척정치하에서 이루어진 폐정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방안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중앙의 고위관직을 상당부분 차지한 구신(舊臣)과 삼사(三司)를 중심으로 포진한 사림이 대치한 정국의 구도 속에서 구체제 인물에 대한 처리 방식을 놓고 사림간의 견해차이가 드러났는데, 강온의 입장차이에 따라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이 갈렸다. 이이는 처음에는 훈척으로부터 사림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사림의 정치집단인 붕당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주장하였으나, 이 때에 사림이 분열하자 붕당의 지나친 분파활동이 수반하는 폐단을 경계하며 사림의 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분열된 사림의 결합을 위한 그의 노력은 치열해져가는 정쟁(政爭)의 격화 속에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 자신마저 동인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그의 붕당관은 그가 가진 시국관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 가장 시급한 문제는 훈척정치 아래에서 파생된 많은 사회적 모순과 폐정을 개혁하여 민생고를 해결하는 일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위해서는 이제 막 정권담당층으로 자리굳힌 사림의 총력을 결집시킬 필요성에서 그 분열과 소모적인 논쟁을 경계한 것이다.
자기가 살던 16세기의 조선 사회를, 건국 뒤 정비된 각종 제도가 무너져가는 ‘중쇠기(中衰期)’라고 진단하고서, 시급한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 일대 경장(更張)이 요구되는 시대라고 판단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변통(變通)을 통한 일대 경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동호문답》 《만언봉사》 등의 저술을 통하여 안민(安民)을 위한 국정 개혁안을 선조에게 제시하였는데, 이것이 ‘경장론(更張論)’이다.
《만언봉사》에 의하면 ‘정치에 있어서는 때를 아는 것이 소중하고 일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것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때에 알맞게 한다(時宜)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을 하고 법을 마련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시대가 바뀌면 법제도 맞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 맞게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이러한 변통을 통해 경장이 이루어져야 안민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가 당시 조선 사회를 중쇠기로 파악한 구체적 증후로서 지배층의 기강 해이와 백성의 경제적 파탄을 들었는데, 그 원인은 각종 제도의 폐단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서는 마땅히 잘못된 제도를 경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경장의 구체적인 방법은 국가의 통치체제 정비를 통해 기강을 확립하고, 공안(貢案)과 군정(軍政)등 부세(賦稅)제도의 개혁을 통해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서원향약(西原鄕約) ·해주향약(海州鄕約)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 등을 만들어 향약과 사창법을 실시함으로써 향촌에서의 농민생활 안정과 사족중심의 향촌질서 유지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 그는 이러한 방법으로 안민을 이루어 중세사회의 동요를 막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경장론은 동 ·서인의 분쟁 격화와 선조의 소극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당대에는 거의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은 시의를 쫓아 실공(實功)과 실효를 강조한 현실적 면모를 보이는데, 진리란 현실 문제와 직결된 것이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 점에서 일관되게 주장한 이기론, 즉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한 율곡성리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철학사상】 16세기 전반기에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연구 결과로 이기론 ·사단칠정론 ·인심도심설 등 이기심성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표출되어 이를 둘러싼 논쟁과 학문적 심화과정을 통해 조선 성리학이 정착되었다. 이황과 기대승(奇大升)간의 사칠논쟁, 이를 둘러싼 성혼과 이이와의 우율논변(牛栗論辨)이 벌어지고, 서경덕과 이황이 각기 기(氣)와 이(理)를 둘러싸고 학설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이는 이들의 주장을 아우르며 독특한 성리설을 전개하였다.
이황은 이기론에 있어서는 기뿐만 아니라 이도 발한다는 이기호발설을 견지하여 ‘이발이기수지 기발이이승지(理發而氣隨之氣發而理乘之)’를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견해는 사단칠정론에도 그대로 이어져 순선(純善)인 사단(四端)은 이발(理發)의 결과이고 유선악(有善惡)인 칠정(七情)은 기발(氣發)의 결과이므로, 결국 사단과 칠정을 별개로 취급하여 ‘사단대칠정’ 논리를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이는 이발을 인정하지 않고 ‘발하는 것은 기이며 발하는 까닭이 이’라고 하여 ‘기발이이승지’의 한 길(一途)만을 주장하면서 사단칠정이 모두 이것 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단지 칠정은 정(情)의 전부이며, 사단은 칠정중에서 선한 것만을 가려내 말한 것이라고 하여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칠정포사단’의 논리를 전개하여 기대승의 사단칠정론에 찬동하였다. 이이의 경우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는 구별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사물에 있어 이는 기의 주재(主宰)역할을 하고 기는 이의 재료가 된다는 점에서 양자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고, 하나이며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이들의 관계를 ‘이기지묘(理氣之妙)’라고 표현하였다.
이들이 이런 사상을 갖게된 현실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황의 경우 이이보다 35년 연상으로 훈척정치하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를 살면서 타락한 정치윤리와 도덕을 바로잡기 위해서 기보다는 이, 칠정보다는 사단, 인심보다는 도심에 역점을 두어 선(善)을 지향하는 이 위주의 이기이원론적 사고방식을 취한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이이의 경우, 정권 담당층이 훈척에서 사림으로 교체되는 등 개선된 정치 여건속에서 시급한 민생문제 해결을 위해 현실에 적극 참여하고 개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의리와 실사(實事)가 결합되고 이와 기가 통합된 일 원론적 사고방식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이의 이기론은 다양한 현상(氣)속에 보편적 원리(理)가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이가 현실 속에서는 구체적 기에 의해 규정되고 따라서 보편적 이는 구체적인 변화상을 떠나서는 추구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가 주장한 경장론의 변통논리와 일맥 상통한다. 이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변화하고 제한적인 기(氣局) 속에는 항상 보편적 이(理通)가 존재한다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제시하였다. 이를 서경덕의 주기론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 이이는 그가 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기불리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서경덕이 궁극적 존재를 기, 즉 태허지기(太虛之氣)로 인식한 데 대해서는 비판을 가하여 궁극적 존재는 태허지기가 아니라 바로 이, 즉 태극지리(太極之理)라고 주장하여 이의 중요성을 동시에 부각시켰다.
결국 이이는 서경덕의 기 위주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의 중요성을 들어 비판하고, 이황의 이 위주의 이기이원론 이기호발설에 대해서는 기의 중요성과 이기불리를 들어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 이기지묘를 주장하였으니, 이이는 서경덕과 이황 등 당대 성리학자의 상이한 주장을 균형있게 아우르며 그의 독특한 성리설을 전개시켜 나갔다고 하겠다.
▒ 유성룡柳成龍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 풍산(豊山). 자 이현(而見). 호 서애(西厓). 시호 문충(文忠). 경북 의성 출생. 이황(李滉)의 문인.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검열과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이어 경연검토관 등을 지내고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교리 ·응교(應敎) 등을 거쳐, 1575년 직제학, 다음해 부제학을 지내고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이어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1584년 예조판서로 경연춘추관동지사(經筵春秋館同知事)를 겸직하였고, 1588년 양관(兩館) 대제학이 되었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좌의정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建儲)문제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 ·경상 ·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 이 해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군대양성을 역설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은 하지 않고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선조에게 대국을 요청하자 그는 우산에 구멍을 뚫어 훈수함으로써 이여송을 무릎 꿇게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바둑의 애호가였다. 1995년 9월 특별대국에서 이창호(李昌鎬)와 맞대결한 유시훈(柳時熏)은 그의 14세손이라고 한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서애집》 《징비록(懲毖錄)》 등이, 편서에 《황화집(皇華集)》 《정충록(精忠錄)》 등이 있다.
▒ 이항李恒
본관 성주(星州). 자 항지(恒之). 호 일재(一齋). 시호 문경(文敬). 아버지는 주부(主簿) 이자영(李自英)이며, 어머니는 전주 최씨이다. 젊어서 무예를 익혔으며, 특히 궁마(弓馬)에 뛰어났다. 28세 때 백부 이자견(李自堅)의 가르침을 받고 도봉산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박영(朴英)이 무과 출신으로 성리학을 연구하여 당대의 명유가 된 것을 존숭하여 그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당대의 학자들인 기대승(奇大升) ·김인후(金麟厚) ·노수신(盧守愼) ·조식(曺植) 등과 교유하면서 조야의 명망을 얻었다.
1566년(명종 21) 남언경(南彦經) ·임훈(林薰) 등과 함께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의영고령(義盈庫令) ·임천군수를 지냈으며, 선조 초에 경력(經歷) ·부정(副正) ·장령(掌令) 등을 제수받았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학문 경향은 반궁성의(反躬誠意)를 입덕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주경궁리(主敬窮理)를 수도(修道)의 방법으로 삼았다.
사서(四書) 중에는 《대학》을 중시했으며, 이기론(理氣論)에 대해서는 이와 기가 항상 일물(一物)이 된다는 것, 즉 태극과 음양이 일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명종조유일(明宗朝遺逸)>조에 행적이 소개되어 있는데, 송인수(宋麟壽)는 “실천하는 공부는 장횡거(張橫渠)보다 못할 게 없다”고 평가하였다. 철종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태인(泰仁)의 남고서원(南皐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는 《일재집》이 있다.
▒ 김인후金麟厚
본관 울산. 자 후지(厚之). 호 하서(河西) ·담재(澹齋). 시호 문정(文正).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李滉)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중종 3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정자(正字)에 등용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뒤에 설서(說書)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현령(玉果縣令)으로 나갔다. 1545년(인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뒤에는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고, 누차 교리(校理)에 임명되나 취임하지 않았다.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 이항(李恒)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에 반론하여, 이기(理氣)는 혼합(混合)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남원의 노봉서원(露峯書院), 옥과(玉果)의 영귀서원(詠歸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하서전집》, 저서에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 기대승(奇大升)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본관 행주(幸州). 자 명언(明彦). 호 고봉(高峰) ·존재(存齋). 시호 문헌(文憲). 전남 나주(羅州) 출생. 1549년(명종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사관(史官)이 되었다. 1563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주서(注書)를 거쳐 사정(司正)으로 있을 때, 신진사류(新進士類)의 영수(領袖)로 지목되어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삭직(削職)되었다가, 1567년(명종22)에 복직되어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이 해 선조가 즉위하자 집의(執義)가 되고, 이어 전한(典翰)이 되어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追贈)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우부승지로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하다가, 1570년(선조3) 대사성(大司成) 때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당했다. 후에 대사성에 복직되었는데 이듬해 부제학이 되어 사퇴하고, 1572년 다시 대사간을 지내다가 병으로 그만두고 귀향하는 도중 고부(古阜)에서 객사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출하여 문학에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독학으로 고금에 통달하여 31세 때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발췌하여 《주자문록(朱子文錄)》(3권)을 편찬할 만큼 주자학에 정진하였다. 32세에 이황(李滉)의 제자가 되었으며, 이항(李恒) ·김인후(金麟厚) 등 호남의 석유(碩儒)들을 찾아가 토론하는 동안 선학(先學)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새로운 학설을 제시한 바가 많았다. 특히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이황과 12년 동안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8년 동안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논란을 편 편지는 유명한데, 이것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의 변론 후 이황은 그의 학식을 존중하여 대등한 입장에서 대하였는데, 이 논변의 왕복서한은 《양 선생 사칠이기왕복설(兩先生四七理氣往復說)》 2권에 남아 있다.
또 서예에도 능했으며 사후 1590년(선조23)에는 생전에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주문(奏文)을 쓴 공으로 광국공신 3등(光國功臣三等)에 추록(追錄)되었고 덕원군(德原君)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주요저서에는 《고봉집(高峰集)》 《주자문록(朱子文錄)》 《논사록(論思錄)》 등이 있다.
▒ 성혼(成渾)
본관 창녕(昌寧). 자 호원(浩源). 호 우계(牛溪) ·묵암(默庵). 시호 문간(文簡). 좌의정이 추증된 성수침(成守琛)의 아들. 어머니는 파평(坡平) 윤씨. 서울 순화방(順和坊)에서 태어났으며, 1539년 파산(坡山) 우계로 이사하면서 경기도 파주에서 자랐다.
17세에 신여량(申汝樑)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그해 진사 ·생원 양시에 합격하였으나 문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백인걸(白人傑)에게 《상서(尙書)》를 배웠으며, 당시 같은 고을에 살던 이이(李珥)와 도의지교를 맺었다. 선조 초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 ·현감 등을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파산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동서분당기에는 이이 ·정철(鄭澈) 등 서인과 정치노선을 함께 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이조참판에 등용되었으며, 이때 북인 최영경(崔永慶)의 옥사 문제로 정인홍(鄭仁弘) 등 북인의 강렬한 비난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 중에는 세자의 부름으로 우참찬이 되었으며, 1594년 좌참찬으로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주화론을 주장하였다.
학문 경향은 이이와 1572년부터 6년간에 걸쳐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한 왕복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서신에서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비판하였다. 이이는 그의 학문을 평가하여 “의리상 분명한 것은 내가 훌륭하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외손인 윤선거(尹宣擧)는 그가 학문에 있어서 하나하나 실천하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학문은 이이와 함께 서인의 학문적 원류를 형성하였으며, 문인으로는 조헌(趙憲) ·황신(黃愼) ·이귀(李貴) ·정엽(鄭曄) 등이 있다. 그의 학문은 이황과 이이의 학문을 절충했다는 평가가 있으며, 외손인 윤선거, 윤증(尹拯)에게 계승되면서 소론학파의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1602년 전일에 기축옥사에 관련된 연유로 삭직되었으나, 1523년 인조반정 이후 복관되었다. 좌의정에 추증, 15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 파산서원(坡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 《우계집》과 저서에 《주문지결(朱門旨訣)》 《위학지방(爲學之方)》 등이 있다.
▒ 송익필宋翼弼
본관 여산(礪山). 자 운장(雲長). 호 구봉(龜峰) ·현승(玄繩). 시호 문경(文敬). 서출(庶出)이라 벼슬은 못하였으나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과 학문을 논하여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에 통하였다. 문장에도 뛰어나 이산해(李山海) ·최경창(崔慶昌) ·백광홍(白光弘) ·최립(崔 ) ·이순인(李純仁) ·윤탁연(尹卓然) ·하응림(河應臨) 등과 함께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시와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고양(高陽)에서 후진양성에 힘써 문하에서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정엽(鄭曄) ·서성(徐 ) ·정홍명(鄭弘溟) ·김반(金槃)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는데, 그 중 김장생은 예학의 대가가 되었다. 지평(持平)이 추증되었으며, 문집에 《구봉집》이 있다.
▒ 김장생金長生
본관 광산. 자 희원(希元). 호 사계(沙溪). 시호 문원(文元). 선조 때 서인(西人)의 중진인 계휘(繼輝)의 아들. 효종 때의 예학사상가인 집(集)의 아버지. 이이(李珥)와 송익필(宋翼弼)의 문인.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정진하다가, 1578년(선조 11)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고, 임진왜란 중에는 정산(定山)현감으로 있으면서 피란온 사대부들을 구휼하였다. 1596년 호조정랑이 되어 남하하는 명(明)나라 원군의 군량조달을 담당하였다.
난 이후인 선조 말과 광해군대에는 주로 지방관을 역임하여 단양 ·남양(南陽) ·양근(楊根) ·안성 ·익산 ·철원 등을 맡아 다스렸다. 철원부사로 재직한 1613년(광해군 5)에는 서얼들이 일으킨 역모사건(계축화옥)에 연루되어 처벌의 위기를 맞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후 인목대비 폐모논의(廢母論議)가 일어나고 북인이 득세하는 속에서 더 이상의 관직을 포기, 연산으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은거하면서 예학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반정의 양 주역인 김류(金 )와 이귀(李貴)에 의해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추천, 장령(掌令) ·사업(司業) 등이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이후에도 조정에서 계속 사람을 보내어 동지중추부사 ·행호군 등 여러 관직을 제수했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노령임에도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의 직함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 앞장섰다.
인조가 자신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정식 국왕으로 추존하려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그것이 불가함을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당시 그에 찬동한 이귀 ·최명길(崔鳴吉) 등과는 물론 인조와도 심한 의견 차이를 드러냈다. 사친의 추존을 통해 왕권을 확고히 하려는 인조의 의도는 이해하면서도, 1630년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임명되는 등 인조와 조정은 그의 출사를 간곡히 요청했으나, 원종의 추숭논의 이후로는 향리에 머물면서 제자와의 강학에만 열중하면서 노년을 마쳤다.
그의 제자는 아들이자 학문의 정통을 이은 김집(金集)과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해서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강석기(姜碩期) ·장유(張維) ·이후원(李厚源) ·신민일(申敏一) 등 후일 서인과 노론계의 대표적 인물들은 거의 망라되어 있다. 저서로는 《가례집람(家禮輯覽)》 《상례비요(喪禮備要)》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경서변의(經書辨疑)》 등이 있고, 죽은 뒤에 《사계유고(沙溪有故)》가 간행되었다.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등에 제향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 송시열宋時烈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노론(老論)의 영수(領袖). 본관 은진(恩津).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 ·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 문정(文正). 아명 성뢰(聖賚). 1633년(인조 11)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孝宗)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 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掌令)에 등용,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는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1651년(효종 2) 그가 찬술한 《장릉지문(長陵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청의 압력을 받아 사직하고 또 낙향, 충주목사(忠州牧師) ·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1658년(효종 9) 찬선에 등용,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 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기년설(朞年說: 만 1년)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 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60년(현종 1) 우찬성에 올랐을 때, 앞서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규탄을 받고 낙향하였고, 1668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이듬해 덕원(德源)으로 유배, 그 뒤 여러 곳으로 유배장소가 옮겨졌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胃)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 윤증(尹拯)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과 그를 영수로 한 노장파의 노론(老論)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그 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주자학(朱子學)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李滉)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禮論)에도 밝았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政敵)을 많이 가졌으나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묘(文廟) ·효종묘(孝宗廟)를 비롯하여 청주의 화양서원(華陽書院), 여주의 대로사(大老祠), 수원의 매곡서원(梅谷書院)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송자대전(宋子大全)》 《우암집(尤庵集)》 《송서습유(宋書拾遺)》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정서분류(程書分類)》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심경석의(心經釋義)》 《사계선생행장(沙溪先生行狀)》 등이 있다.
▒ 한원진韓元震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청주(淸州). 자 덕소(德昭). 호 남당(南塘). 시호 문순(文純). 송시열(宋時烈)의 학맥을 이은 서인 산림(山林) 권상하(權尙夏)의 제자로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17년(숙종 43)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영릉참봉으로 관직에 나갔다가 경종 때에 노론(老論)이 축출될 때 사직하였다. 1725년(영조 1) 경연관으로 출사하였으나 영조에게 소론을 배척하다가 삭직되었다. 그 후로 장령 ·집의에 임명되었지만 응하지 않았으며,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같은 문인인 이간(李柬) 등과 호락논쟁(湖洛論爭)을 일으켜, 호서지역 학자들의 학설인 호론(湖論)을 이끌었다. 그 주장의 핵심은 인(人)이 오상(五常)을 모두 갖추었음에 비해 초목 금수와 같은 물(物)에는 그것이 치우치게 존재하여, 인성과 물성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입장에 서 있는 이러한 주장은 사람과 금수의 근본적 차이를 강조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문집으로 《남당집》이 있으며, 송시열과 스승 권상하의 사업을 이어받아 50년 만에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攷)》(1741)를 완성하였다. 그 밖에 《역학답문(易學答問)》 《의례경전통해보(儀禮經傳通解補)》 등 주역 관계의 저술들과 《장자변해(莊子辨解)》 등의 편저들이 있다.
▒ 이간李柬
본관 예안(禮安). 자 공거(公擧). 호 외암(巍巖) ·추월헌(秋月軒). 시호 문정(文正). 송시열(宋時烈)의 학맥을 이은 서인 산림(山林) 권상하(權尙夏)의 뛰어난 제자로서,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10년(숙종 36)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장릉(莊陵)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716년 산림직(山林職)인 세자시강원 자의(諮議)에 임명되어 조정에서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았다.
1717년 이후 종부시정(宗簿寺正) ·회덕현감 등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같은 문인인 한원진(韓元震) 등과 호락논쟁(湖洛論爭)을 일으켜, 서울 주변 학자들의 학설인 낙론(洛論)을 이끌었다. 그 주장은 여러 측면을 지니고 있으나 대표적인 내용은 인(人)은 물론. 초목 ·금수와 같은 물(物)에도 모두 오상(五常)이 갖추어져 있어 인 ·물의 근본적인 차이가 없으며, 어떤 덕(德)이 외면적으로 편중되게 나타나는 것은 기질(氣質)의 차이[正偏通塞]에 기인할 뿐 본연이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것은 홍대용(洪大容) 등 북학파에게 이어져 전통적 화이론(華夷論)의 극복에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1777년(정조 1)에 이조참판, 성균관 좨주, 순조 때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온양의 외암서원에 제향되었고, 문집으로 《외암유고》가 있다.
중국의 대표적 성리학자
▒ 주렴계(周濂溪 : 1017∼1073)
호는 렴계(周濂溪)는, 이름을 돈이(敦燎)라 하고, 자를 무숙(茂叔)이라 하며, 북송(北宋)의 대유학자(大儒學者)요, 송학(宋學)의 비조(鼻祖)로 그의 학설 가운데 「태극도설(太極圖說)」은 주자(朱子)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제창한 정명도(程明道)와 정이천(程伊川) 형제의 스승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태극도설(太極圖說)》,《통서(通書)》 등이 전한다
자 무숙(茂叔). 호 염계(濂溪). 도주(道州:湖南省 道營縣) 출생. 지방관으로서 각지에서 공적을 세운 후 만년에는 루산산[廬山] 기슭의 염계서당(濂溪書堂)에 은퇴하였기 때문에 문인들이 염계선생이라 불렀다. 북송의 사마광(司馬光) ·왕안석(王安石)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그는 도가사상(道家思想)의 영향을 받고 새로운 유교이론을 창시하였다. 즉, 우주의 근원인 태극(太極:無極)으로부터 만물이 생성하는 과정을 도해(圖解)하여 ‘태극도(太極圖)’를 그리고 태극→음양(陰陽)의 이기(二氣)→오행(五行:金 ·木 ·水 ·火 ·土의 五元素)→남녀→만물의 순서로 세계가 구성되었다고 논하고, 인간만이 가장 우수한 존재이기 때문에, 중정(中正) 인의(仁義)의 도를 지키고 마음을 성실하게 하여 성인(聖人)이 되어야 한다는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고, 우주생성의 원리와 인간의 도덕원리는 본래 하나라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저서에는 《태극도설(太極圖說)》 《통서(通書)》가 있으며, 수필 《애련설(愛蓮說)》에는 그의 고아한 인품이 표현되었다. 남송의 주자(朱子)는 염계가 정호(程顥) ·정이(程 ) 형제를 가르쳤기 때문에 도학(道學:宋代의 新儒敎)의 개조라고 칭하였다.
▒ 소옹(邵雍 : 1011∼1077)
중국 송대(宋代)의 학자. 시인. 자 요부(堯夫), 호 안락선생, 시호 강절(康節). 하남(河南)에서 살았으며 주렴계(周濂溪)와 동시대의 사람이다. 이지재(李之才)로부터 도서(圖書)·천문(天文)·역수(易數)를 배워 인종(仁宗)의 가우 연간(嘉祐年間 : 1056∼63)에는 장작감주부(將作監主簿)로 추대받았으나, 사양하고 일생을 낙양(洛陽)에 숨어 살았다.
사마 광(司馬光)등의 구법당(舊法黨)과 친교하면서 시정(市井)의 학자로서 평생을 마쳤다. 남송(南宋)의 주자(朱子)는 주렴계,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과 함께 소강절을 도학(道學)의 중심인물로 간주하였다. 강절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유교의 역철학(易哲學)을 발전시켜 뛰어난 수리철학(數理哲學)을 만들었다. 이 철학은 독일의 라이프니츠의 2치논리(二値論理)에 힌트를 주었다고 한다. 그는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62편을 저작하여 천지간 모든 현상의 전개를 수리로써 설명하였다.
▒ 장횡거張橫渠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학자. 자 자후(子厚). 이름 재(載). 장안(長安) 출생. 38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한 뒤 기주(祁州)의 사법참군(司法參軍)에서 시작하여, 12∼13년 간 관직에 있었으나 불우하였다. 그러나 학자로서는 《경학이굴(經學理窟)》 《정몽(正蒙)》 《서명(西銘)》 등의 저서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정몽》에서는 송나라 최초로 ‘기일원(氣一元)’의 철학사상을 전개하여, 우주의 만유(萬有)는 기(氣)의 집산에 따라 생멸 ·변화하는 것이며 이 기의 본체는 태허(太虛)로서, 태허가 곧 기라고 설파하였다. 젊어서 범중엄(范仲淹)을 만나 《중용(中庸)》을 읽도록 권유받았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불교와 노장(老莊)에서 깊은 뜻을 찾고자 하였다. 그 뒤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과 함께 《역경(易經)》을 논하면서 그 학문의 깊이에 감복하여, 모든 이학(異學)을 버리고 《역경》 《중용》에 따라 송나라 유학(儒學)의 기초를 세웠다. 사상적인 배불론자(排佛論者)로도 알려져 있다.
▒ 정명도程顥정호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 자 백순(伯淳). 호 명도(明道). 시호 순(純).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출생. 존칭으로 명도선생이라 불리고, 동생 정이(程 :伊川)와 함께 이정자(二程子)로 알려졌다. 아버지 정향(程珦)이 남안(南安:江西省 大庾縣)의 판관이었을 때 주돈이(周敦 :濂溪)를 한번 보고 아들 형제를 그의 제자로 입문시켰다고 한다. 26세 때 진사가 되고, 산시성[陝西省] 후셴현[ 縣]의 주부(主簿)로 출발하여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그가 택주(澤州:山西省) 진청현[晉城縣]의 수령으로 있을 때는 ‘視民如傷’이라는 네 글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큰 치적을 올렸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부모처럼 따랐다. 신종(神宗)의 부름을 받아 저작좌랑(著作佐郞)이 되었으나, 왕안석(王安石)과 뜻이 맞지 않았으므로 자청하여 지방관이 되었다. 철종(哲宗)이 즉위하고 사마광(司馬光)이 재상이 되자, 조정에 등용될 뻔하였으나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병사하였다.
그의 학문적 태도는 만물일체관(萬物一體觀)에 입각하여 혼일적(渾一的)으로 천지의 생의(生意)를 체험하는 데 있었다. 그는 제자(諸子) ·노장(老莊) ·불교도 공부하였으나, 결국 유학으로 복귀하여 자신의 학설을 확립하였다. 그는 다양한 자연현상을 질서지우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이(理)’라 부르고, 사람은 모름지기 이를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순응하여야 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성즉이설(性則理說)’을 주창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동생 정이를 거쳐 주자(朱子)에게 큰 영향을 주어 송나라 새 유학의 기초가 되었고, 정주학(程朱學)의 중핵을 이루었다. 저서에 《정성서(定性書)》 《식인편(識仁篇)》, 시에 《추일우성(秋日偶成)》 등이 있다. 그의 전기는 주자의 《이락연원록(伊落淵源錄)》에서, 유저(遺著)는 서필달(徐必達)의 《이정전서(二程全書)》에서 볼 수 있다.
▒ 정이천程燎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 자 정숙(正叔). 호 이천(伊川). 시호 정공(正公).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출생. 이천백(伊川伯)에 봉하여졌으므로 이천 선생이라 존칭된다. 형 정호(程顥:程明道)와 함께 주돈이(周敦 :周濂溪)에게 배웠고, 형과 아울러 ‘이정자(二程子)’라 불리며 정주학(程朱學)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철종(哲宗) 초에 사마광(司馬光) ·여공저(呂公著) 등의 추천으로 국자감 교수가 되었고, 이어서 비서성 교서랑(校書郞) ·숭정전설서(崇政殿說書)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왕안석(王安石) ·소식(蘇軾) 등과 뜻이 맞지 않았고, 당화(黨禍)를 입어 쓰촨성[四川省] 푸저우[ 州]로 귀양간 일도 있다.
학자로서의 그는 《역경(易經)》에 대한 연구가 특히 깊었고,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철학을 수립하여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사상은 “지미(至微:隱)한 것은 이(理:本體)요 지저(至著:顯)한 것은 상(象:氣 ·用)이라 하여 일단 양자를 구별하고, 체(體)와 용(用)은 근원이 같으며 현(顯)과 미(微)에 사이가 없다”고 상관관계를 설명한 점에 특색이 있다. 그의 철학은 주자(朱子)에게 계승되어,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에 나타나 있다.
학문의 방법도 형은 오직 정좌(靜座)를 주장하였으나, 그는 ‘경(敬)’을 중히 여겨 ‘거경궁리(居敬窮理)’에 힘썼다. 이와 같은 일도 주자에 의하여 집대성되었고, 송대(宋代)의 신유학인 정주학의 주축이 되었다. 저서에 《역전(易傳)》 4권이 있으며, 그의 학설은 형의 학설과 함께 서필달(徐必達)의 《이정전서(二程全書)》에 수록되었다. 또 그의 전기는 주자가 지은 《이락연원록(伊落淵源錄)》에 실려 있다.
▒ 주희朱子
중국 송대(宋代)의 유학자. 자 원회(元晦) ·중회(仲晦). 호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산인(雲谷山人) ·창주병수(滄洲病
) ·둔옹(遯翁). 이름 희(熹). 푸젠성[福建省] 우계(尤溪) 출생. 선조는 대대로 휘주무원(徽州
源:安徽省)의 호족으로 아버지 위재(韋齋)는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宰相) 진회(秦檜)와의 의견충돌로 퇴직하고 우계에 우거(寓居)하였다. 주자는 이 곳에서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 유명(遺命)에 따라 호적계(胡籍溪) ·유백수(劉白水) ·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여 그의 정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의 강우(講友)로는 장남헌(張南軒) ·여동래(呂東萊)가 있으며, 또 논적(論敵)으로는 육상산(陸象山)이 있어 이들과 상호 절차탁마(切 琢磨)하면서 주자의 학문은 비약적으로 발전 심화하여 중국사상사상 공전(空前)의 사변철학(思辨哲學)과 실천윤리(實踐倫理)의 체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의 학문을 저서를 통해서 관찰해 보면 46세까지를 전기, 이후 60세까지를 중기, 61세 이후를 후기로 하는 3기(三期)로 대별할 수 있다. 주자연보(朱子年譜)에 의해 전기 저서를 순차적으로 열거하면 《논어요의(論語要義)》 《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 《곤학공문편(困學恐聞編)》 《정씨유서(程氏遺書)》 《논맹정의(論孟精義)》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 《서명해의(西銘解義)》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 《통서해(通書解)》 《정씨외서(程氏外書)》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고금가제례(古今家祭禮)》로 이어져 《근사록(近思錄)》의 편차(編次)로 끝맺었다. 이 전기는 북송의 선유(先儒)인 주염계(周濂溪) ·장횡거(張橫渠)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의 저서교정과 주례에 전념하고, ‘논어 ·맹자’ 등은 차기(次期)의 예비사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주자의 학문적 기초가 확립된 시기로서 그것이 《근사록》에 집약된 것으로 보인다. 그후에 논적이었던 육상산 형제와의 아호사(鵝湖寺) 강론에서 존덕성(尊德性)에 대해 도학(道學)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중기에는 《논맹집주혹문(論孟集註或問)》 《시집전(詩集傳)》 《주역본의(周易本義)》 《역학계몽(易學啓蒙)》 《효경간오(孝經刊誤)》 《소학서(小學書)》 《대학장구(大學章句)》 《중용장구(中庸章句)》 등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서(四書)의 신주(新註)’가 완성된 점이다. 60세 때는 《중용장구》에 서문을 붙여 상고(上古)에서 후대까지 도학을 전한 성현(聖賢)의 계통을 밝혀 도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후기에는 오경(五經)에 손을 대어 《석존예의(釋尊禮儀)》 《맹자요로(孟子要路)》 《예서(禮書:儀禮經傳通解)》 《한문고이(韓文考異)》 《서전(書傳)》 《초사집주후어변증(楚辭集註後語辨證)》 등이 있다. 더욱이 71세로 생애를 마치던 해 3월, 《대학》의 ‘성의장(誠意章)’을 개정(改訂)한 점으로 미루어 그의 《사서집주(四書集注)》에 대한 지정(至情)이 어느 정도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주자의 정치에 대한 의견은 〈임오응조봉사(壬午應詔封事)〉나 〈무신봉사(戊申封事)〉에 나타나 있으며 또 절동(浙東)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대기근(大飢饉)을 구제하였다는 실적도 있으나 만년에는 권신의 미움을 사 그의 학문이 위학(僞學)이라 하여 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해금(解禁)이 있기 전에 죽었다. 그후 그의 학문이 인정되어 시호가 내리고 다시 태사(太師) ·휘국공(徽國公)이 추증(追贈)되었다. 그의 유언을 수록한 것으로는 주자의 막내아들 주재(朱在)가 편찬한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100권, 속집 11권, 별집 10권)이 있고, 문인과의 평생문답을 수록한 여정덕(黎靖德) 편찬의 《주자어류(朱子語類)》 140권이 있다.
▒ 육상산陸象山
중국 남송(南宋)의 유학자. 호 존재(存齋) ·상산(象山). 시호 문안(文安). 이름 구연(九淵). 저장성[浙江省] 출생.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관직에 올랐으나 곧 물러나 귀계(貴溪:江西省廣信府)의 상산에 강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당시 유일한 석학이었던 주자(朱子)와 대립하여 중국 전체를 양분(兩分)하는 학문적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사상적 계보로는 모두 정호(程顥:明道) ·정이(程 :伊川)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다만 주자가 정이천의 학통에 의한 도문학(道問學:問學第一)을 보다존중한 데 반하여, 상산은 정명도의 존덕성(尊德性:德性第一)을 존중하였기 때문에, 주자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성즉이설(性卽理說)을 제창하였고, 상산은 치지(致知)를 주로 한 심즉이설(心卽理說)을 제창하였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객관적 유심론(客觀的唯心論)과 주관적 유심론(主觀的唯心論)으로 불린다. 주 ·육(朱陸)의 교유는 1175년 여조겸(呂祖謙)의 권고로 아호사(鵝湖寺:江西省 鉛山縣)에서 처음 이루어져 평소의 강학(講學) 요점에 대한 논변(論辨)을 벌였으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헤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의 학문을 존중하여 도의적 교유는 변하지 않았다. 상산의 학문은 그의 제자 양자호(楊慈湖) 등에 의하여 장시[江西] ·저장[浙江] 각지에서 계승 ·성행하였다. 한때 주자학에 의하여 압도되기도 하였으나, 명대(明代)의 왕양명(王陽明)에 이르러 다시 계승 ·발전하였다. 주요저서에 어록(語錄) ·서간(書簡) ·문집(文集)을 수록한 《상산선생 전집》(36권)이 있다.
▒ 왕양명王陽明
중국 명(明)나라 중기의 유학자. 호 양명. 이름 수인(守仁). 자 백안(伯安). 시호 문성(文成). 저장성[浙江省] 여요(餘姚) 출생. 관직에 나간 부친을 따라 베이징[北京]에서 자랐고, 28세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학문적으로는 당시의 관학이었던 주자학(朱子學)을 배웠으나 만족하지 않았고, 선(禪)이나 노장(老莊)의 설에 심취한 때도 있었으나 도우(道友)인 담감천(湛甘泉)을 만난 무렵부터 성현(聖賢)의 학을 지향하게 되었다. 35세에 병부주사(兵部主事)로 있을 때 환관 유근(劉瑾)의 노여움을 사 귀주용장(貴州龍場)의 역승(驛丞)으로 좌천된 것이 학문적 전기가 되었다.
원래가 병약한 몸으로 기후불순한 만지에서 고통스러운 생활을 보내던 어느날 밤 석관(石棺) 속에서 깨친 것이 심즉리(心卽理), 지행합일(知行合一), 만물일체(萬物一體)였다. 이 용장에서의 득도(得道)는 37세 때의 일로서, 그 후 중앙으로 소환되어 순조로운 재출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주로 장시[江西] ·안후이[安徽] ·저장[浙江] 각성의 지방관으로 있었는데, 비적의 토벌과 영왕(寧王) 신호(宸濠)의 난 평정에서 활약하였다. 격무 중에도 항시 강학(講學)을 멈추지 않았으며, 각처에 학교를 설치하여 후진 교육에 진력하였다. 49세에 처음으로 치량지(致良知: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선천적인 판단력이나 논리적인 감수성 등을 실현하는 일)의 설을 제창하고 강학에 전념하였기 때문에 그 일문은 더욱 융성해졌다. 왕심재(王心齋) ·전서산(錢緖山) ·왕용계(王龍溪)가 입문하였고, 《전습록(傳習錄)》이 계속 간행되어 《양명문록(陽明文錄)》의 간행을 보게 되었으며, 양명서원이 건립되었다. 양명학파로서 명대(明代)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기초가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
56세 때 광둥 ·광시의 묘족(苗族)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는 병든 몸으로 출전하여 진압한 후 돌아오는 길에 과로와 고열로 죽었다.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출발 전야에 양명학의 진수를 논한 것으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4구결(四句訣)이 있는데, “無善無惡是心之體(무선무악시심지체), 有善有惡是意之動(유선유악시의지동), 知善知惡是良知(지선지악시량지), 爲善去惡是格物(위선거악시격물):마음의 본체는 본래 선과 악이 없는 것이지만, 선과 악이 나타나는 것은 뜻[意]의 작용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 나타난 선과 악을 구별하여 아는 것이 양지(良知)이며 선을 행하고 악을 버려 마음의 본체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격물(格物: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마음을 바로잡음)이다”가 그것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하여 왕문우파(王門右派)인 전서산의 견해를 4유설(四有說)이라 하는데, 의(意)에 선악이 있기 때문에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실천 수행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왕문 좌파인 왕용계의 견해를 4무설(四無說)이라 하며, 마음의 본체가 무선무악이면 의(意)도 무선무악이며, 의에 선악이 있으면 마음의 본체에도 선악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고, 이는 스승인 양명의 한때의 언사일 뿐, 철두철미한 이론은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양설(兩說)에 대하여 양명은 양자 모두가 상호보완(相互補完)하여야 한다는 양가상자(兩可相資)의 설로 답하고 있으나, 우파는 스승의 설(說)을 계승(繼承) ·조술(祖述)하는 데 역점을 두었으며, 좌파는 발전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이들 제자와의 토론을 모은 《전습록(傳習錄)》(3권)이 있으며, 여기에다 시문 ·주소(奏疏:상주문) ·연보(年譜) 등을 더한 《왕문성공전서(王文成公全書)》(38권)가 전서산에 의하여 편집되었다.
▒ 담감천湛甘泉
중국 명(明)나라 때의 유학자. 호 감천. 이름 약수(若水). 자 원명(元明). 광둥성[廣東省] 정청[增城] 출생. 진백사(陳白沙)에게 배워 정좌침잠(靜座沈潛)의 수련을 쌓아 사관(仕官)의 소망을 세웠으나 어머니의 명으로 남경국자감(南京國子監)에 들어가 40세 때 진사에 급제, 서길사(庶吉士)에 뽑혀서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가 되었다. 이부(吏部)에 있던 왕양명(王陽明)에 공명하여 그와 함께 유학을 연구한 것은 그 무렵이다. 1522년에는 시독(侍讀)이 되었고, 남경국자감좨주(南京國子監祭酒) ·예부시랑(禮部侍郞), 이어 남경이부(南京吏部) ·예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그 동안에 성학(聖學:儒學)을 일으킬 뜻을 상주문 등에 썼고, 70세를 넘어 사직하였다.
그는 진헌장(陳獻章)의 영향을 받아 치양지설(致良知說)을 내세우는 왕양명과 논란(論難)하여 양보하는 일이 없었고, 당시의 학자는 왕 ·담의 2파로 나누어졌다고 한다. 또 이르는 데마다 반드시 서원을 세워 진헌장을 모셨고, 문하생은 널리 여러 곳에 있었다. 저술은 대단히 많아 《심성도설(心性圖說)》 《격물통(格物通)》 《준도록(遵道錄)》, 문집에 《감천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