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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여행
눈길위로 달린다는 것에 두려움이 컸다. 강원도는 다른 지역보다 눈이 자주 내린다. 며칠 전에도 눈이 많이 내렸다. 아이들을 서울에 있는 아이들의 고모 집에 내려주고 강릉으로 달렸다. 여동생 집에서 저녁을 먹고 난 뒤라 길 위엔 어둠이 쌓였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어둠은 녹일 수 있었지만 눈길에 대한 걱정은 녹이질 못했다. 혹시라도 눈길에 자동차가 미끄러지면 큰일이라는 걱정이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영동고속도로 강릉방향으로 달리는 차들이 많았다. 저 중에 스키어들이 많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경기도를 벗어나 강원도를 접어드니 차량들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시간이 저녁 8시다. 혹시 눈길을 걱정한 차들이 운행포기를 했을 것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관령이 가까워지니 그 생각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고지가 높았는지 귀가 먹먹하다. 내리막길을 달릴 때는 먹먹한 귀보다 노면의 결빙을 더 걱정했다. 며칠 전 동해 40센티미터, 강릉 23센티미터의 눈이 내렸다는 것을 들은 탓인지 눈길에 대한 걱정은 강릉이 가까워질수록 더 심해졌다
도로엔 물기 하나 없이 제설이 잘 되었지만 눈길의 걱정은 녹질 않았다.
경포에 도착하니 10시가 되었다. 강릉시내의 도로는 거짓말처럼 제설이 잘 되었다. 간혹 눈길이 얼어붙은 곳이 있지만 그 정도면 완벽한 제설작업이다. 내가 사는 의령은 10일 넘도록 제설이 되지 않아 빙판위로 차들이 다녔다. 강원도의 제설작업은 전국에서 알아주지만 직접 경험하지 못한 나로서는 걱정이 당연하다. 이젠 겨울에도 강원도를 안심하고 와도 되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눈길의 두려움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경포 호수 주변 숙박업소가 즐비하다. 호텔과 펜션 그리고 모텔들이 불을 환하게 켜 놓고 있다. 그 중 한 곳을 정해 잠을 청했다. 아이들을 떼놓고 부부만 여행을 온지라 차가운 겨울밤을 차갑게 자진 않을 것에 설렘은 피로에 묻혔다.
경포대
눈을 뜨니 나의 아침 시간인 6시다. 단잠을 자고 있는 아내를 차마 깨우질 못하고 창밖만 바라본다. 어둠도 늦잠을 자는지 깨어나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순두부 가계에 불이 켜졌다. 이제 아내를 깨울 이유가 생겼다.
순두부집에 문을 여니 한 테이블에 손님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일찍 일을 하러 가는 사람 같기도 하고 여행객이기도 했다. 복장이 애매모호 했다. 요즘은 여행객의 복장도 아주 편하게 하고 다녀서 헛갈린다. 잠시 뒤 합류한 여성으로 인해 여행객임을 알았다.
순두부찌개가 나왔다. 순두부찌개엔 조개가 없이 오직 순두부만 있었다. 조개를 골라내거나 깨진 조개껍데기를 씹는 수고 없이 먹기가 수월 했다.
식사를 마치고 경포대로 향했다. 눈 덮인 마을은 연하장의 그림을 본 듯 내 마음을 풍요롭게 만든다. 여명이 내려앉은 경포호수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뚫고 경포대에 도착했다.
한양에서 천리 길, 대관령을 경계 삼아 강릉 중심의 동해안 문화권을 ‘관동지방’이라 부른다. 관동팔경의 하나인 경포대가 겨울소나무와 눈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경포대에 오르니 경포호수가 한 눈에 다 들어온다. 여명과 설경을 모두 품에 안은 경포호수는 버스에서 예쁜 소녀를 본 듯 내 가슴을 뛰게 만든다. 잠시 후 여명은 사내의 수음이 절정에 도달 한 듯 바쁘게 해를 밀어내고 있다. 경포대는 솟구쳐 타오르는 남자의 욕망을 거짓 없이 보며 몇 백 년 동안 삭이고 있었던 것 같다.
경포대의 천정은 연등천정이고 주위에 소나무와 상수리나무와 어우러져 있다. 마루는 우물마루로 3단의 단차를 두어한 신분에 따라 자리 배치를 달리 했던 것 같다.
난 경포대 마루에 올라서서 경포 호수와 일출전의 여명을 보며 발바리처럼 신나게 촐랑거리는 아내를 내려다본다. 아내는 어디서 이런 장관을 볼 수 있을 것인가. 남편 잘 만난 탓이랴.
경포대의 자료를 모아 숙지했지만 다 외우질 못해 백과사전의 지식을 잠깐 옮겨본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호.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1326년(충숙왕 13)에 지추부학사(知秋部學士) 박숙(朴淑)이 현재의 방해정(放海亭) 북쪽에 세웠는데, 1508년(중종 3) 부사(府使) 한급(韓汲)이 현위치로 이건(移建)한 후 현재까지 7차에 걸쳐 중수했다. 평면은 앞면 5칸, 옆면 5칸이며 총 28개의 기둥을 두었고, 바닥은 우물마루로 짜여져 있으며 3단의 단차를 두어 사용자의 신분 및 계급에 따라 자리배치를 달리하던 평면에서의 위계(位階)를 보여준다. 또한 벽체의 구성없이 모두 난간을 가설하여 누대가 갖는 공간적인 개방성을 보여준다. 공포는 기둥머리에서부터 초익공이 나와 주두를 감싸면서 상부의 2제공을 받고 있는 이익공(二翼工)으로 그 상부에 재주두를 놓아 대들보를 받고 있다. 기둥 사이의 창방(昌枋) 위에는 앞면과 뒷면에 2구, 옆면에 1구씩의 복화반(覆花盤)을 놓아 구조적 의장재(意匠材)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가구(架構)는 종보·중종보·대들보로 이루어진 7량가로서 매우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지붕의 형태는 부연이 가설된 겹처마의 팔작지붕으로서 양측면에 충량이 2개씩 나와 합각부의 무게를 대들보와 측면의 평주로 분산시켜 주고 있으며, 서까래가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내부에는 율곡(栗谷) 선생이 10세 때 지었다는 〈경포대부 鏡浦臺賦〉를 판각(板刻)한 것과 숙종(肅宗)의 〈어제시 御製詩〉를 비롯하여 여러 명사들의 기문(記文)과 시판(詩板)이 걸려 있다.
-다음 백과사전 참고-
허난설헌 생가 터
경포대에서 여명을 맞이하고 선교장으로 이동한다. 선교장을 가는 길목에 초당 순두부 거리가 나온다. 미처 순두부에 대해 사전 조사를 하지 못했다. 의외의 수확이기도 하고 아침을 미리 먹은 탓에 아쉽기도 했다. 초당 순두부를 뒤로 하고 가던 길을 달렸다.
경포호수를 가로질러 배로 다리를 만들어 다녔다 해서 이름이 지어진 99칸의 사대부가의 상류 주택인 선교장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이라 관람이 불가능 했다. 밖에서 안내문만 읽고 허난설헌 생가터로 이동했다.
도로는 눈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제설이 되었지만 허균, 허난설헌 생가터 진입로는 제설이 덜 되어 눈이 남아 있었다. 약간의 미끄러움을 감수하고 주차장으로 들어 섰다.
생가 터 주변은 눈으로 하얗게 둘러싸였다. 누군가 눈 속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눈밭을 들어간 흔적이 보였다. 우리도 그 눈밭으로 들어갔다. 발목이 다 잠겨 눈이 신발 속으로 다 들어가 포기를 했다.
생가 터 앞에는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과 공원이 잘 꾸며져 있다. 관람로만 눈이 치워졌고 나머지는 모두 눈밭에 잠겨 있다.
생가 터 안으로는 문이 잠겨 들어가지 못하고 담장 너머로 목을 길게 빼고 보고 말았다. 아직 9시가 되지 않았다. 우리 부부만 그 곳에서 러브스토리를 즐기고 있을 뿐이다. 생가 터 앞에 우물이 있다.
허난설헌 생가가 아닌 생가터 라고 하는 것에 의문이 일었다. 허균의 역모죄로 가문이 멸족하여 다른 가문이 그 사이에 들어왔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생가터 앞으로 5문장비가 나란히 서있다. 5문장이란 난설헌과 그의 아버지 허엽, 오빠인 허성과 허봉 그리고 동생인 허균을 말한다.
5문장비를 지나면 허난설헌 동상이 보인다. 동상 옆엔 시비가 있다. 아들과 딸을 여의고 절절한 심정을 쓴 시비가 나란히 있다.
아들딸 여의고서
허초희
지난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올해도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비치네
소지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무덤에 냉수를 부어 놓으니
아무렴 알고말고 너희 넋이야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 놀테지
아무리 아해를 가졌다 한들
이또한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부질없이 황대사 읇조리면서
애끓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혹독한 시집살이로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고 급기야 자식마저 여읜 불운의 여인. 현세에 와서도 자신이 태어난 이곳을 생가라 불리어지지 못하고 생가 터라고 불리어 져야하는 사연의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난설헌과 극명하게 비교되는 사임당을 찾아 나선다.
오죽헌
허난설헌 생가 주차장에 순두부집 슬레이트 처마에 고드름이 마림바 악기처럼 길게 늘어져 있다. 요즘 보기 드문 현상을 보고 간다. 경포 해수욕장을 가기 전 강문 진또배기 마을이 보인다. 진또배기는 ‘박혀있는 긴 막대’라는 뜻이다. 일명 솟대의 다른 말이다. 진또배기는 물, 불, 바람의 삼재를 막아주기를 포속 신에게 기원하며 풍어와 풍년을 빈다. 진또배기 마을엔 솟대다리가 있다. 솟대다리를 건너면 경포 해수욕장이다.
경포호를 가운데 두고 동쪽은 경포 해수욕장, 서쪽은 오죽헌, 남쪽은 허난설헌 생가, 마지막으로 북쪽은 경포대가 있다. 거리는 4킬로미터 이내이다.
경포대에서 시계반대 방향으로 돈다고 하면 경포대에서 오죽헌까지 3.2킬로미터고, 그 중간에 순두부거리와 선교장을 볼 수 있다. 오죽헌에서 허난설헌 생가까지는 3.9킬로미터고, 허난설헌 생가에서 경포 해수욕장까지는 1.6킬로미터이다. 마지막으로 경포 해수욕장에서 경포대까지는 1.9킬로미터다. 경포대 가기 직전엔 에디슨과학박물관이 있다.
경포호수의 둘레는 4.3킬로미터인데 산책을 하면 바닷바람과 강바람을 함께 맞을 수 있어 좋다.
9시가 조금 넘었다. 오죽헌에 문이 열리고 매표소엔 우리보다 한 발 앞선 사람들이표를 구매하고 있었다. 우리도 표를 구입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지붕위에도 눈이 쌓이고 경내 모든 곳이 눈에 덮여있다. 사람들이 관람하는 길만 눈이 치워져 있다. 하얀눈과 건물이 알맞게 어우러져 구경보단 감상이란 표현이 더 어울렸다.
오죽헌은 모자가 나란히 화폐인물의 주인공인 태어난 곳이다. 신사임당은 오만원권, 이율곡은 오천원권의 화폐인물이 되었다.
오죽헌 초입에 신사임당의 초충도가 보인다. 초충도의 정원은 눈에 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구) 오천원권 화폐의 그림이 된 집을 사진에 담을 수 있도록 마당에 발자국 표시와 사진기 표시를 해 두었다. 그곳에서 발을 얹고 사진기표시 방향으로 사진을 찍으면 화폐에 담긴 그림을 사진에 담을 수 있다.
이제 오죽헌으로 들어간다. 먼저 이 율곡 영정을 모신 문성각으로 들어간다. 원래는 어제각이 있던 곳이었는데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어제각을 사랑채 북쪽으로 옮기고 문성사를 지었다 한다.
문성사 입구엔 에는 율곡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오죽헌 몽룡실에는 신사임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몽룡실은 신사임당이 용꿈을 꾸고 율곡을 낳은 방이다. 이 작은 방이 신사임당을 기리는 공간이다. 율곡의 사당 율곡의 기념관은 있지만 사임당이 공간은 몽룡실 뿐이었다. 오죽헌은 율곡의 공간이었다.
신사임당은 난설헌과 달리 친정살이를 했다.
신사임당의 시를 적어본다
유대관령 망친정
(강을을 떠나 서울로 가던 중 두고 온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시)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내리네
사친(어머니를 그리워 하며)
천리라 먼 고향 만 겹 봉우리
자나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락 모이락
고깃배들 바다 위로 오고 가리니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 할꼬
경내엔 율곡 기념관과 향토민속관 그리고 시립 박물관이 있다. 향토 민속관에는 오천원권과 오만원권의 대형 지폐가 인물부분에 구멍을 내어 관광객들의 얼굴을 넣고 기념사진 촬영을 돕고 있다. 하지만 박물관 안에서는 사진 촬영을 금지 시켰다.
나이 많은 남도 여행객은 오천원과 오만원의 인물을 두고 실랑이를 벌인다. 이유는 남자보다 여자의 화폐 단위가 더 높다는 것이다.
제법 넓은 경내를 두루 살피다 보면 다리가 아프다.
주문진
정동진 해안단구와 굴산사지당간지주를 보고 싶었지만 차는 주문진으로 향했다. 주문진은 계획에 없었던 곳이다. 그런데 차는 주문진으로 가고 있었다.
4차선으로 잘 닦여진 7번 국도를 타고 북으로 올라간다. 주문진항으로 들어가는 길은 제설이 되지 않았는지 눈이 얼어붙어 얼음길이 되어 있었다. 내차는 경차였다. 낮은 차체바닥에 볼록 튀어나온 얼음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가슴을 찔렀다. 빙판 위를 지나는 차는 의도한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끔 갔다. 다행이 기온이 상승하여 군데군데 녹은 곳이 고랑을 이루고 차는 레일을 타듯 갔다. 멈출 수도 없었다. 길은 외길이고 뒤에는 십만대군이 밀려오 듯 우리 차 뒤에는 차량들이 줄지어 섰기 때문이다. 무조건 전진할 수밖에 없다. 주문진 항 가까이 가니 굴착기 2대가 노면에 얼어붙은 얼음덩이를 제거하고 있었다. 주변상인들의 항의로 길에 얼음을 치우는 듯 했다. 토요일이라 관광객들의 편리를 생각한 것일까! 미끄러운 길로 인해 관광객이 줄 것을 우려한 것일까! 아무튼 나올 때는 얼음길을 달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배들이 정박한 항으로 걸었다. 배위에서 사람들이 거물에 걸질 고기를 분리하여 항구 바닥에 던져 모으고 있었다. 그 곳엔 그 고기만 있었다. 물어보니 이면수라는 물고기다. 이름은 들었지만 직접 보기는 처음이다.
어민좌판 수산시장으로 구경을 갔다. 가게마다 골판지에 이면수라고 적어 놓고 이면수를 팔고 있었다. 그런데 한집에서는 이면수가 아닌 임연수라고 적어놓고 있었다. 임현수가 주인의 이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임현수가 이면수의 본 이름이란다. 쥐노래미과에 딸린 바닷물고기 이름이다. 이면수는 찬물에 사는 어종으로 우리나라 동해와 일본 북동부에 분포한다. 관북지방(마천령북쪽, 즉 함경 북도 지방)에 사는 임연수(林延壽)라는 사람이 이 물고기를 잘 낚았다는 데서 지금과 같은 이름이 비롯했다. 갑자기 이면수를 맛보고 싶었다. 20마리 만원에 거래 되었다. 40마리를 샀다. 주인이 “박스야”하고 부르니 어디선가 쏜살같이 달려와 포장을 하고 테이프로 감았다. 테이프로 손잡이까지 만들어 주었다.
주차장에서 수산시장을 가려면 건어물 가게들을 지나쳐야 한다. 건어물 가게 주인들의 호객행위에 짜증이 났었는데, 또 그곳을 나가야 한다. 사람이 무안할 정도의 호객 행위엔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런데 한 곳의 주인은 그저 웃기만 했다. 장사 할 마음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장사 초자인지 편안한 얼굴로 서있다. 난 그 남자에게 끌렸다. 그 남자는 그것이 컨셉인지는 몰라도 물건을 설명하면서 어딘가 모르게 수줍어함이 보여 더 믿음이 갔다. 오징어와 황태 그리고 쥐포를 6만원치 사고 나왔다. 누가 더 똑똑한지는 세월이 말 해 줄 것이다.
차에 물건을 싣고 집으로 달렸다. 무려 6시간을 달렸다. 중간에 휴게소를 몇 번 들렀지만 시간은 상당히 걸린 것 같다.
강릉여행은 답사의 의미로 다녀왔다. 그래서 주마간산으로 여행을 한 것이다. 다음엔 누구와 같이 가던지 그땐 알찬 여행이 될 것이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너무 많다. 정리를 하면서 놓친 부분도 많았음을 알았다.
진또배기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다. 솟대다리는 꼭 건너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