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 (사)경남향토사 연구회/ 회장 |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의하면 기록해서는 안 될 기록도 많이 있다. 그중 경상도를 비판한 내용을 보면 ‘경상의 무리들은 머리를 깎고 왜인의 옷을 입고는’, ‘왜적의 앞장이 돼 충청, 전라지방에 침입해’, ‘죽이고 약탈하고 방화하고 강간함이 왜적보다 더 심한 바가 있다’고 했다. 심지어는 ‘노인, 어린이, 부녀자의 목을 베어 왜의 장수에게 진상하기도 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런 내용을 들은 본 경남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급부도 생각해야 된다. 일본의 침략에는 경상도를 거쳐야 하는데, 육지에는 김해성에서 송빈 의병장의 지연작전을 섰기에 의령의 곽재우 장군이 승전해 전라도의 진입로를 막았고 경상우수영 원균이 부산포 앞바다로 나갔다가 적의 수가 너무 많아 후퇴작전을 쓰면서 적선 30여 척을 격파한 사실도 있다. 이에 일본은 수륙으로 전란에 시달렸기 때문에 전라도에서 이순신 장군의 해전성공이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경상도 사람을 폄하했다는 것은 잘 못 쓰여진 역사이며 이 같은 사서는 소각해서야 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사실 그대로 써야 하고 후대에 남겨 산교육의 역사현장을 만들어야 한다.
중국 진수의 ‘삼국지위지동이전’에 의하면 우리나라 남부지방 가야나, 일본지방 사람들은 체격이 왜소(倭小)하다는 뜻으로 왜인이라 적었는데, 이를 인용한 일본은 고대 가야(김해)에 임나일본부로 식민지배 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은 종갓집 행세를 하며, 김해를 안하무인격으로 대하고 있다. 더구나 김해가 가야의 종주국임이 의젓이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는데도 이를 부정하기 위해 일제의 조선총독부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만이 정사로 삼고 가락국기가 적혀 있는 삼국유사는 야사로 부정하며 김해 가야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지금 교과서에도 4국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김춘추(무열왕)의 외교로 만든 삼국통일도 문제가 많다. 솔직히 ‘삼국통일이 아니고 2국통일이다. 통일 못 한 영토가 더 크기 때문이다. 일제의 조선총독부 어용학자들이 조작한 불완전한 통일이다. 단군조선국의 땅 중에 부여ㆍ고구려 땅 대부분을 당나라에 받쳤는데 삼국통일이라니, 이는 최초의 ‘한반도 통일’이 아니라 ‘반반도 통일’이다. 6ㆍ25전쟁 시 압록강까지 밀고 가다가 왜 후퇴했던가. 우리영토는 한반도이니 중공 땅을 침범하면 후환이 클 것이라 하고 후퇴하지 않았던가. 즉 삼국통일은 대동강 입구에서 원산만 이남까지다.
삼국이 통일했다는 지역은 조상의 살았던 전국토의 1/5도 채 되지 않는다. 김춘추가 통일한 것은 영토를 축소시켰고 그 대신 당(중국)나라에 많은 땅을 할애해 준 셈이다. 이 할애해 준 땅이 오늘의 중국 땅이 되고 말았다. 이런 한국사를 조작한 일본은 한 마디 사과도 없다. 이런 줄도 모르고 ‘자매관계’니 ‘우호관계’니 ‘친일외교’니 하면서 질질 끌러 다니고 있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역사를 모르기 때문이다. 임란 후 그들은 조선과의 외교를 요청했으나, 너희가 친교하려면 처녀가죽 말린 것, 총각불알 말린 것, 각각 한 섬을 받치라고 했다.요즘 일본인은 대한민국의 언어를 없신 여긴다. 그리고 관심도 없다. 우리는 일본어를 못 배워 환장하고 있다. 이상의 징비록, 난중일기, 위지동이전, 삼국유사, 가락국기 등을 살펴보아 조상이 모독당한 것을 우리는 교훈으로 삼고 후손에게 치욕을 주는 행위와 언행에 삼가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