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이름을 담은 대중가요가 아무리 부지기수라 해도 만약 대표적인 노래 하나만 대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단연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꼽을 것이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정도가 그 곡과 패권을 겨룰 수 있을까.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하지만 지역노래 범주에서만 왕자 행세하는 노래가 아니다. 그 수준을 훌쩍 넘어 전국민이 애청·애창하는 ‘대중가요의 왕중왕’이다.
부산역에서 택시를 타 기사에게 “부산사람으로서 부산을 대표하는 노래로 뭐가 떠오릅니까?”하고 물었더니 기사는 ‘물을 걸 물어야지’하는 한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입을 뗀다. “그야 당연히 ‘돌아와요 부산항에’죠. 우리나라에서 이 노래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4천만의 대중가요 아닙니까?”
‘전국민의 가요’만이 아니라 역사는 이 노래에 ‘세기의 가요’라는 특전도 하사했다. 뉴 밀레니엄을 앞두고 지난 100년을 정리하는 여러 설문조사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등을 제치고 수차례 20세기 최고의 대중가요로 꼽힌 바 있다.
지난해 가을 KBS 라디오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요’ 설문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압도적 1위를 차지했을 때, 작가 이승규씨는 ‘충분히 예측된 결과’라며 “이 곡은 가요 팬들에게 생필품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문화 생필품이라면 그것은 ‘상식’이란 말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스스로 대중의 상식이 되면서 우리에게 별도의 상식을 보너스로 전해주었다. 우리는 그 곡을 통해 부산과 부산항이란 이름만을 안 게 아니라, 동백섬도 알았고 오륙도라는 바위섬이 날에 따라 다섯개 또는 여섯개 섬으로 보여 붙여졌다는 사실도 주워들었다. 더 나아가 이 곡에 대한 호응이 1974년 남북공동성명에 의해 조성된 남북화해 무드로 1976년에 러시를 이룬 조총련 재일동포 모국방문 시점과도 맞물렸다는 음악 외의 시대적 의미마저 상식화한 사람들도 있었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가고파 목이 메어 부르던 이 거리는/ 그리워서 헤매이던 긴긴날의 꿈이었지/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도/ 부딪쳐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았었지/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황선우 작사·작곡으로 발표되자마자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던 때부터 어느덧 30년 가까운 세월의 이끼가 끼었어도 그 위세는 불변 불후 불멸이다. 1970년대 우리 음악 감성을 지배한 폴 모리아 악단이 한국 팬들의 환대에 대한 보은으로 이 곡을 골라 연주한(Please Return To Pusan Port!) 사실이 웅변하듯 귀에 감기는 멜로디, 동백섬·부산항·오륙도와 같은 지명으로 리얼함과 정감을 동시에 포획하는 노랫말이 그것을 가져온 제1의 원천이지만 당시 수준으로는 혁신적인 트로트였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조용필은 밴드의 기타리스트로서 트로트를 한다는 게 자랑스럽지는 않았지만 그 산물이 ‘웰 메이드’였음은 인정한다. 먼저 록 리듬을 취했다는 사실, 트로트이면서 그 자신이 연주한 전주의 약식(略式) 기타리프, 애절함을 더하는 김동성의 바이올린 연주 등 꽤 신경을 써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들보다 더 광채를 발한 것은 이전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특이한 조용필의 음색이다. ‘꽃피는…’에서부터 마지막 ‘내 형제여…’까지 시종일관 강한 흡인력을 발하는 바이브레이션, 그림을 그리는 듯한 음의 전개는 곡 이상으로 가수에게 찬란한 영광을 가져다 주었다. 대마초 파동으로 가수에게는 위기인 활동 정지처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 ‘창밖의 여자’로 컴백했을 때 마치 공백이 없었던 듯 인기가 폭발한 것도 주술과도 같은 그 음색을 팬들이 못내 잊지 못해서였다.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흘러간 가요로 매몰되는 유행가의 숙명을 거부하고 서바이벌 게임에서 가뿐히 승리, 지금도 음악소비자의 귀와 끈끈한 유대를 맺고 있다. 단지 낡게 들리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나이테 많은 거목처럼,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명작의 친화력과 위풍을 불려간다.
해운대 소재의 그랜드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동백섬은 독립된 섬이 아니라 오래 세월 축적된 모래로 육지와 연계되어 있다. 비록 과거에 섬이 주었던 낭만성은 축소되었을지 몰라도 겨울에도 건강한 푸름을 뽐내는 일대의 동백나무 숲 경관은 여전히 빼어나며, 정상에 위치한 최치원 선생의 기념비는 무게감을 더한다. 그곳으로 오르는 호젓한 오솔길에는 속보 운동객의 땀, 하얀 입김으로 분산되는 젊은 연인들의 따스한 대화가 흐른다.
동백섬과 연결된 웨스틴조선호텔의 한 관계자는 공사를 통해 올 여름에는 멋진 공원으로 업그레이드될 것이라고 한다. “동백공원을 찾는 사람들이 꾸준히 물어보는 것 중 하나가 이곳이 바로 ‘돌아와요 부산항에’에 나오는 동백섬이 맞느냐는 거예요. 물론 부산사람들은 아니겠죠. 그럴 때마다 대중가요의 힘을 실감하지만 조금은 놀랍습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각인된 동백섬·오륙도·부산항과 더불어 부산인들이 부산을 말할 때 동격화하는 상징어가 또 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에도 나오는 다름 아닌 갈매기다. 그러나 이 경우는 조용필의 노래가 아니라 문성재의 ‘부산갈매기’가 그 상징을 결정했다. 이 노래 이후 외지로 나간 부산사람들은 모두 ‘부산 갈매기’로 비유되었다.
‘지금은 그 어디서 내 생각 잊었는가/ 꽃처럼 어여뻐 그 이름도 고왔던 순이 순이가/ 파도치는 부둣가엔 지나간 일들이 가슴에 남았는데/ 부산 갈매기 부산 갈매기/ 너는 정녕 나를 잊었나….’
부산을 연고지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농구팀 KTF가 금정체육관에서 승리할 때마다 서포터들은 목 놓아 ‘부산 갈매기’를 열창한다. 1983년 최동원의 눈부신 역투, 유두열의 역전 3점 홈런으로 롯데 자이언츠가 삼성 라이온스를 제압하며 코리안 시리즈를 제패했을 때 응원단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렀던 점을 감안하면 어느새 ‘승리의 부산 찬가’도 슬쩍 내용물을 바꾼 셈이다.
하긴 그리 따지면 1953년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 부산에서 다시 서울로의 환도가 남긴 블루스 ‘이별의 부산정거장’(호동아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은 이미 부산가(歌)의 대권을 내놓은 지 오래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 우네…’와 같은 가사는 전쟁의 상흔이 배어 확실히 지금의 메갈로폴리스 부산과는 맞지 않는다.
역시 박시춘이 1958년에 쓴 ‘동서양 넘나드는/ 무역선의 고향은/ 아세아 현관이 다 부산항구다/ 정다운 마도로스/ 남포동의 밤거리에는…’ 하는 노래 ‘부산행진곡’(반야월 작사, 방운아 노래)도 이제는 거의 기억되지 않는다. 그래도 ‘노래 그곳’에 관한 한 그 어떤 곳이 감히 부산을 넘볼 수 있으랴. 단 한 곡 ‘돌아와요 부산항에’ 앞에서 종로·명동·영동 등 그 모든 서울의 음악명소들도 고개를 숙여야 한다. 거기에 ‘부산 갈매기’마저 끼어들면 게임은 끝이다. 아무리 정겨운 거리, 아스라한 네온, 럭셔리 윈도에 의해 이식된 정서가 깊더라도 우리 대중가요의 절대 객체인 ‘항구’를 이길 수는 없다. 항구의 갈매기, 그 가산(歌産)은 줄지 않는다. 〈글 임진모(음악평론가|www.izm.co.kr)〉
첫댓글 잘보고감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