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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93년 7월 26일 토요정례법회 ○
원불교를 만나서 강연
- 나를 찾는 6단의 공심 가득한 주성주 교우님의 진솔한 이야기 함께 나눴습니다.
김제원 교무님 설법
반갑습니다.
휴가철이라 오늘은 오신 분이 좀 적은 것 같다.
오늘 성주교우께서 강연해주셨다.
성주교우가 연마를 많이 해주신 것 같다.
강연을 들으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온 지 2년6개월만에 강연을 했으면 조금 늦은 것 같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강연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신 분은 도안교우님에게 먼저 말씀해주시는 것도 좋다.
성주교우를 보면서 한편으로 제가 칭찬해 주고 싶은 것이 있다.
원불교와 관계없이 상당히 공심있는 사람이다.
원불교를 만나기 전에도 부모님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있고 봉사심 희사심도 있고 정도 많고 솔직하다.
그런데 원불교를 만난 후에도 처음부터 법으로 가까이 하지는 못하고 정이 있어서 사람 좋아하고 이런 것으로 활동을 했다.
그래서 제가 한 마디 했더니 달라진 것 같다. 제가 악역을 안 하고 싶은데..
성주교우가 그랬듯이 강연을 어떻게 하면 피해볼까 하면서 머리써보았다고 하는데 그러지 마십시오.
강연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대중 앞에 본인이 나서서 저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지 보고, 때로는 도움을 얻을 수도 있고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일을 맡아야 주인이 되고, 단상에 서서 강연을 해 봐야 그 사람이 이 교당의 멤버로서 위치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직 임원을 맡은 것도 없고 단상에 서 본 적이 없다, 잘 모른다 하는 것은 주인이 아닌 손님의 위치인 것이다.
물론 본인의 시험이라든가 사정이 있다거나 온 지 얼마 안 되신 분은 예외이다.
다이어트 싸이트나 일맥한의원에 가 봤더니 “Before"와 ”After"가 있었다.
전, 후, 변화..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세포도 변화하고 있다고 한다. 혈액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마음은 원래 생멸이 없다. 그런데 능히 무생무멸이면서 능생능멸한다. 반드시 그런 것이다.
사람이 여기에서 어떻게 달라지는가?
변화하되, 진급하기도 하고 강급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세월이 흐르면서, 생로병사의 변화, 우주자연의 춘하추동의 변화가 있기도 하지만, 성주괴공의 변화가 있기도 하다.
심신작용을 따라 육도로 변화를 하는데 어떤 사람은 선도로 진급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악도로 강급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의 심신작용, 몸과 입과 마음을 어떻게 쓰는가, 어디에 관심이 있고 지혜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습관으로 변화되는가 하는 것에 따라 다른 것이다.
훈련한다는 것은 바로 습관의 변화인 것이다.
먼저 생각이 바뀌어야 하지만 생각이 바뀐다고 심신작용이 다 변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이 바뀌었다가 돌아서는 경우는 매우 많다, 습관과 업력 때문에 과거로 되돌아가고 강급하는 것이다.
자칫 깨달음만 얻으면, 마음 자리만 알면 진급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모르는 사람보다는 훨씬 낫지만, 그러나 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훈련을 통해서 체득해야한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가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광신적, 장엄적, 신비적, 무속적, 기복적 신앙이 많다.
이런 것은 관념적 신앙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그런 신앙이나 관념적 신앙이 아니라 사실적 신앙이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기질의 변화로 나타나야 한다.
내 실질적인 습관이 변화가 되고, 마음에 어떤 성격이 달라져야 한다.
마음의 습관이 무서운 것이다.
게으른 사람을 보면, 몸이 게으른 것이 아니다. 마음이 게으른 것이다.
그 마음이 게으른 습관을 자기가 스스로 정당화한다. 반대로 부지런한 사람은 마음이 부지런한 것이다.
일에 어두운 사람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게으르다. 그러니 일을 못하는 것이다.
머리 나쁜 것을 떠나서 그렇다. 가능하면 생각하지 않으려 하고, 소극적으로 하려 한다.
그러니 그 게으른 마음 때문에 결국 일에 어두운 것이다.
어떤 사람이 복이 많은 사람인가?
도인이처럼 이목구비가 또렷한 것도 복이다. 얼굴이 부자이고 얼굴이 강자이다.
공심있는 사람이 복이 있다.
마음 속 원을 이룬 사람이 복이 있다.
일복이 많은 사람이 복이 있다.
인연이 좋은 사람이 복이 있다.
돈, 재산, 권력이 있는 사람, 명예가 있는 사람..
교수해 보라, 박사 따 보라, 장관해 보라, 사장되어보라, 얼마나 좋겠는가. 막강한 파워가 있을 것이다.
군수만 되어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인사가 200명이요, 1년에 지출할 수 있는 돈이 몇백억이다.
그러니 복이 있는 것이 아닌가.
건강한 사람, 행복한 사람..
지혜가 있는 사람..
타고난 재능이 있는 사람..
공은이처럼 보면 밝고 맑은 기분이 드는 것도 복이다. 보면 답답하고 침울한 기분이 드는 것은 복이 아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부처님을 복과 혜로 나누어 복족족 혜족족이라 하였다. 그런데 복장보다 지장이 더 낫다고 한다.
복은 혜의 근원이요 혜는 복의 근원이다. 중국에 가면 복 자가 많이 써져 있다.
지혜란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인가? 복을 장만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복은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그리고 복은 어떤 효과가 있는가?
복은 지혜를 마련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
즉, 내가 돈이 없다거나 직업이 잘못 골라졌다면 법회에 오고 싶어도 못 온다.
법회시간과 겹치는 서비스 직업을 갖는다면, 지혜를 얻을 수 없는 법회에 못 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복이 있으니 스승을 불러버리기도 한다.
봉평 피닉스파크 처음에 개업할 때 돈이 있으니 양산법사님같은 분을 불러다가 독경도 하고 소중한 법문을 받들고 사업도 잘 되게 하기도 한다.
여러분들이 신앙과 수행을 달리 생각하는데 복이 바로 신앙이요, 혜가 수행이다.
신앙을 “덕”이라고 한다. 수행을 “도”라고 한다.
복 = 신앙, 덕(德), 공(公), 타(他), 이완
혜 - 수행, 도(道), 공(空), 나(我), 긴장
조화가 있어야하고 전체가 원만성이 있어야 한다.
제가 아까 “어떤 사람이 복이 많은 사람이냐?”고 질문한 것은 뭐냐?
많은 사람들이 인연이 있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는데, 인연이 많다고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인연이 너무 많으면 머리가 아프다. 선연이냐 악연이냐? 아니면 불필요한 인연이냐?
재산이 많으면 좋을 것 같지만 때로는 많은 재산 때문에 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얼굴이 이쁘면 좋을 것 같지만 어떤 경우에는 얼굴이 이뻐서 얼굴값 하기도 한다.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돈이 있으니까 안하무인이고 돈 쓰는 재미에 산다.
어떤 사람은 예뻐서 수행을 못하기도 한다. 그래서 과거의 수도인들은 재색명리가 적은 집에 찾아가기도 햇다.
복진타락, 복은 쓰면 타락하는 것이다.
대종사님같은 양반도 방청소를 하셨다.
어느날 시자가 어디 가서 대종사님이 스스로 방 청소를 하셨다.
시자가 그것을 보고, “복혜구족하신 부처님께서 청소를 어떻게 하느냐?”고 하였더니
대종사님께서 “야, 나라고 복 짓지 않고 복 받는다냐”라고 하셨다.
어떤 깨달은 부처님이라도 복을 짓지 않고는 복을 못 받는다. 그것이 인과의 이치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과거 지향적이다.
누구는 키가 크다, 부자다, 누구는 부모가 밀어줘서 8학군에 났다.. 그런 생각을 한다.
그 말도 맞다, 그러나 대종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ㅇ 복있는 사람 - 쓸모많은 사람 - 일체유심조
ㅇ 복없는 사람 - 쓸모가 적은 사람
나는 이 법문을 듣고, 참으로 대종사님이다 생각했다.
대종사님은 생활불교를 내주시고, 종교를 위한 종교를 내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오신 분이구나.
과거 것을 한탄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혜만 깨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깨친 지혜를 쓸모 있는 사람이 되도록 단련하고, 모른다면 준비해서 쓸모있는 사람이 되도록 연마하고,
어디에 가서나 쓸모가 많은 사람이 가장 복 있는 사람이다.
많은 재산을 부모님에게 받아도 삼대 못 간다고 한다.
있는 재산도 늘릴 수 있는 자력이 중요한 것이지, 주위에 부모를 통해서 여건상 부족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일본에 마쓰시타전기회사를 창립한 마쓰시타 고노스케라는 분은 정말로 복 없는 사람이다.
부모가 일찍 죽고, 초등학교 다니다 말았고, 어릴 때부터 신문을 팔아 먹고살아야 했고, 건강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에 가장 돈을 많이 벌고, 기업인회 회장을 하였으며 장수하고 있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나오지도 못한 사람 밑에 박사가 수백명이다.
조건만 보면 얼마나 복 없는 사람인가?
쓸모많은 사람은 고정된 사람이 아니라 얼마든지 내가 쓸모가 많게 변해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체유심조다.
부모님탓하고 건강탓하고 환경탓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든지 만들어 갈 수 있는 창조적인 것이다.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주성주가 일년반 동안을 손님같이 하면서, 교무님 눈치를 보면서, 은근히 교무님은 나를 챙겨주지 않는다는 원망심까지 하였다.
Before다.
그러나 그 안에서 헌배도 하고, 총무도 하고, 전서를 두 번 읽겠다고 하고, 가족교화를 하겠다고 하니, 내 스스로도 얼굴이 바뀌는 것이다.
내 직업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것을 바꾸어보겠다고 한다. 이런 것이 마음에 있지 않느냐?
이것이 바로 After의 모습이 아니지 않는가.
어떤 사람은 정말로 환경이 좋다. 부모도 잘 만나고 인물도 좋다.
인물값하면서 복 다 까먹고 주위에 피해만 주고 사은의 은혜를 입었는데 보은은 커녕 사은에 피해만 주고 다닌다.
이런 사람도 많다.
쓸모 많아지려면 게으르면 안 된다.
일 못하는 사람은 합리화를 잘 한다. 전 성격이 그래요. 전 차분한게 좋아요. 편안하고 고요한 게 좋아요.
우리의 성품은 고요할 때만 좋은 것이 아니다. 고요할 때만 재미있으면 그것은 편착한 것이다.
동할 때도 좋아야 한다. 동할 때도 내 마음이고 정할 때도 내 마음이다.
고요할 때만 마음이 편하고 일할 때는 괴롭다?
이 활동시대, 동이 훨씬 더 많은 시대에 동 속에서 만끽하는 행복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직장에서 일하면서, 난 이건 싫고 어서 교당이나 가야겠다 생각한다면 소중한 그 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
얼마든지 주위 환경 여건의 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여건은 바로 쓸모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쓸모많은 사람!
이 말을 들으면, 교무님 저는 제 전공만 잘하면 되지, 박학다식해서 어중간하면 오히려 안 좋지 않습니까? 한다.
물리학 박사라고 해도 자기는 전기 안 쓰고 옷 안 입고 교당 생활 안 하겠는가?
물론 자기 전공분야에서 도움이 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쓸모가 많다는 것은 분야만 있는 쓸모가 아니다.
자기 분야도 충분히 하면서도, 그 외 다른 분야도 관심을 가지고 하는 사람이다.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
나는 운전이 싫다, 컴퓨터 기계가 싫다, 생각하는 사람은 안 된다.
백산 이백철 선생님이 13살 때 총부를 찾아왔다. 그래서 대종사님 사가에서 밥짓는 일을 도와주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쫓겨났다. 그 분이 뭐라고 했느냐?
“나는 똥은 풀 수 있지만, 밥짓는 일은 못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남자면 밥을 하면 안되요? 요즘 미용실도 남자미용사가 더 잘 한다고 한다.
진짜 고급식당에도 남자요리사가 있다. 상관이 없다.
내가 얼마든지 깨어있는 마음으로 부지런한 마음으로 적극적인 마음으로 어디에 가서나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당에서는 교당에 도움이 되고, 직장에서는 직장에 최대한 도움이 되면 누가 나를 쫓아내겠는가.
짤릴까봐 걱정해야 하겠는가. ‘나 짤라봐라! 그러면 니가 손해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살 수가 없는가?
원불교를 다니면서 제대로 공부한다면 그 마음이 들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회사가 어려우면 짤릴 수도 있지만.. 어지간하면 짤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설사 회사가 어려워 짤리더라도 사장이 다른데 소개시켜준다.
내가 찾아야 하는 직장이 아니라, 누가 나를 소개해 주고 추천해 주는 쓸모 많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준비를 해야 한다. 부지런해야 한다.
쓸모 많은 사람이 되려면 책을 많이 보아야 한다.
책을 많이 본다는 것은 스승을 찾을 줄 알고, 강자 지자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신문도 볼 줄 알고, 강자를 모시고 받들 줄 알아야 한다.
쓸모없는 사람은 교무를 가까이 하지 않고, 교수를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이다.
직장 상사는 멀리하고 아랫사람만 가까이 하면서, 술 마시며 뒷담화하고 안주 삼는다.
이러면 쓸모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쓸모없다는 것은 내 스스로 복이 감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첫 교무가 원남교당이었다.
그 때 김인진이라는 원광보건대 출신 간호사가 서울대 병원 간호사였다.
이 친구가 마음이 나니, 청량리정신병원, 그 이후 한양대병원.. 이렇게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그래서 간호사가 8명이었다.
그 때 내가 ‘아, 교화는 이렇게 되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주위 동네 사람들도 있지만 결국 인연따라 되는 것이다.
우리 성주도 어떻게 데리고 오리라고 생각한다.
지금 교당에 한의사가 많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 몇 사람이 오면서 그 인연 따라 온 것이다.
부모님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자랑이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좋았다.
내 부모에게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과 누구에게 감사할 수 있겠는가.
가장 감사해야 할 기초는 바로 부모님이다.
나를 낳아주신 분도 부모님, 길러주시고 가르쳐 주신 분도 부모님이다. 땅을 사준 친구가 최고가 아니다.
오늘 성주교우가 솔직하고 진실 되게 강연해 주어서 마음이 흐뭇하다.
적당히 감추고 오픈하지 않으면, 대중의 마음도 열리지 않고 은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불사(佛事), 부처님 사업을 불사라 한다.
내가 오늘 소개해주고 싶은 불사가 있다.
바로 제 시간에 법당에 와서 항상 앉아있는 자체가 큰 불사이다.
자기에게도 불사요, 교당에서도 불사다.
과학적으로도 남다른 면을 가지고 있는 이가 도학적으로도 열심히 하는 걸 보고 자극을 받았다.
돈 낸 것만 불사가 아니다.
성주가 1년 반 전에 두 달에 한번씩 나오고, 늦게 왔었다.
안암교당은 성주교우 같은 사람이 1000명이 와도 교화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만 부지런 떤다면 누구나 제 시간에 올 수 있다. 나같이 다 늦게 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교무님 법회를 시작 못하겠구나. 최소한 이런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공심,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부분과 사심에 잡혀있으면 그게 안되고 자꾸 합리화가 들어온다.
전체를 보는 시야가 바로 사가 없는 마음이다. 그것이 빈 마음이요, 전체를 보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주인이 된다.
그렇게 되면 그 주인 된 마음은 신심이요, 공심이다. 공부와 사업도 알아서 되게 만든다.
거꾸로, 사심이 많아서 손님인 마음은 신심 없는 마음, 공심 없는 마음, 이기적인 마음이다.
그것은 공부가 안 되게 만든다. 사업도 많이 걸리적 거리게 한다.
불사라는 것은 돈이 없다고 못하는 것도 아니며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장 큰 불사다.
제 시간에 앉아있는, 그 오롯하게 참여하는 마음 하나가 서로에게 은혜 되고 듬직한 불사다.
아까 강연에서도 나왔듯이 헌배가 묘하다.
혼자 헌배하면 어렵다. 혼자 10배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10명이 100배하여도 혼자 10배 하는 것보다 더 쉽다.
참 희안하죠. 지하문화원에서 30명이 헌배한다면, 1000배를 하여도 집에서 혼자 100배 하는 것보다 쉽다.
내가 있어주는 것. 내가 합력하는 마음 하나만 있어도 그것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는가.
과학과 도학을 같이 생각하라.
있는 것과 보이지 않는 기운,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세계, 보이지 않는 진리의 세계까지 함께 생각하자.
원불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즉 재미를 보려면, 법회 나오는 것보다 즉 교법을 공부하지 않으면 결국 떨어진다.
성주가 1년 반 동안, 법회시간에나 교리에는 별로 흥미를 못 느끼고, 왔다 안 왔다 하다가. 7~8개월 후 느낀 것이 무엇인가?
‘아, 법회를 보니 재미있구나.’ 그러다 보니 공부방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고,
공부방 가서 영육쌍전을 들어보니 직장에서 짜증내는 것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하는 것을 안다.
그래서 교당은 수행하는 곳이면서 먼저 배우는 곳이다.
그런데 배움을 싫어하고 ‘엠티가 좋다’ 라고만 한다면 목적에서는 역부분이다.
그러다보니 사경에 공들이고, 졸기는커녕 재미가 있고, 알아서 적게 되고, 이해가 안됐던 장시간이 알아서 즐거워진다.
저는 여기 처음 온 사람들 보면 참 갑갑하다. 내용은 다 떠나버리고, 시간이 왜 이리 긴지 그것만 생각한다.
모르니깐 그러긴 하지만 나는 참 안타깝다.
왜 그러냐. 얼마나 자기 생각만 하는 것인가.
거꾸로 생각해 보자, 네 시간 앉아있는 사람은 다 미친 사람들이겠는가.
이 사람은 우리들과 무엇이 차이일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반드시 필시 곡절, 사유가 있다. 왜 이걸 만들었고, 왜 이걸 하는지 반드시 그 안에는 본의가 들어있는 것이다.
아까 참 표현 잘했죠,
교당에 한두 번 빠지고 보니, 교당 가는 것이 눈치 보이고, 뻘쭘 하고, 민망하고, 멀어지게 되며
한번 혼나고 나니 화끈거리고, 당황스럽고 이런 표현들을 보니 3일이 아니라 3주 스트레스 받은 것 같다.
성주교우가 만약에 거기서 “참 저렇게 모진 교무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서 원망심을 가지게 되어
끊어 버렸다 하면 교당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나도 실패한 것이고. 부덕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가 은혜가 되었다면, 나는 덕을 베푼 것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저 사람 마음이다.
저 사람이 이 경계를 극복하니깐 감동이 밀려오고 도리어 죄송한 마음이 들고,
칭찬을 바라던 마음이 오히려 칭찬을 주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 전에 초보자일 때는 교무님은 왜 이렇게 칭찬에 인색한가. 칭찬해 주면 너무나 좋다.
이런 생각을 하였다가 조금 더 들어가니 바뀌게 되었다.
얼마든지 칭찬 속에 독이 있다. ‘교무님, 칭찬만 해 주세요’ ‘혼내만 주세요’ 하는 것도 병이다.
얼마든지 그것은 내 마음이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교무님은 나를 잘 모를 거야 하는 것이다.
교무님은 누구만 예뻐하고 나는 안 예뻐해, 교무님이 누구에게 관심 있겠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마음공부하고 있는 것이 있다. 너무 많이 관심을 가져서 내가 병이 난다.
그래서 그것을 공부하고 있다.
혹시 안 나오나, 혹시 꼴았는가, 너무나 신경을 많이 써서 병이 난다.
조석으로 여러분들을 위해 심고를 올린다.
여러분이 저기 구석에 앉았다 가면 모를 것 같은가. 다 안다.
컨닝 하는 사람이 앉아 있다면 모를 것 같지 않은가. 다 안다.
아까 교전 사경을 하다보니깐
‘아, 칭찬 듣는 것이 좀 약한 사람에게 많이 해주고, 강한 사람에게 혼내는 것인가.’
그러면 여러분들은 거기에 속지 마세요.
칭찬 들으면 내가 약한 사람이어서 그런가 보다, 혼내면 내가 강한 사람이어서 그런가 보다 하여서는 안된다.
그건 얼마든지 내 마음이다. 바뀔 수 있다.
아까 표현 중에 토요일 오후가 되면 자연스럽게 교당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여기까지 오기가 참으로 힘들었죠.
원간회라고 원광대학교 간호모임이 있다.
원간회 활동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다 교당에 왔는데 세상에 우리 교당같이 환영해 주는 교당이 있으면 나와 보라 하라.
얼마나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가.
회장단, 단장․ 중앙이 새로운 사람 오면 그 사람을 위해서 심고 올리고, 회의하고, 자기 시간을 바쳐서 공들이고 있다.
그런데 와서도 별로 열심히 하지 않으면 인연이 약하든지, 업이 무겁든지, 지혜가 없든지 하는 것이다.
내가 지난 화요일 날 이런 얘기를 했다.
신파사견(信破邪見)
해파무명(解破無明)
행득복혜(行得福慧)
위의 두 말은 다른 법문에서 설하신 것이고
뒤의 말은 내가 만들어 본 것이다.
어떤 종교는 신앙을 강조한 종교가 있다.
어떤 종교는 수행을 강조한 종교가 있다.
그러나 원불교는 여기에 더 나아가 고급종교다. 믿어야 하고 수행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실천까지 하여야 한다.
그래서 정각(正覺). 정해(正解)다. 해는 해오(解悟)의 준말이다.
믿음이 있고, 깨달음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맹신에 빠지게 된다.
반대로 깨달음이 있는데 앎이 있는데 믿음이 없으면 사견에 떨어진다. 그래서 신파사견이다.
믿음이 있으면 사견에서 먼저 벗어나게 해 준다. 수많은 자기 생각들이 사견이다.
믿음이란 것은 수많은 생각을 하나로 모이게 한다.
그러다보면 수많은 자기 생각들을 넘어서서 성자의 마음을 믿게 된다.
믿음이 없으면 자기 생각에 자기가 속아나게 되는 것이다. 그 믿음이 앎으로, 풀어져야 한다.
무명이 벗겨져야 한다. 그 믿음은 앎으로부터 와야 한다. 그래야 무명, 즉 맹신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면 알기만 하면 되는가. 그 앎을 실행으로 나투어냈을 때 비로소 복과 혜가 생산되는 것이다.
실행을 하면 그 속에서 복이 만들어지고, 지혜도 더 닦아진다.
그래서 혜는 더 밝아지고, 신이 더 단단해진다.
아따~ 내가 생각해도 오늘 법문을 잘한 것 같은데.
여러분들은 그렇게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항상 잘하니까 (^^)
그리고 ‘보이지 않는 기도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기도의 원리(原理)
(1) 동기상응(同氣相應)
이것은 같은 기운은 응해준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면 얻을 수 있다죠.
내가 강력하게 원하면 기운을 당겨와 기운이 응해준다.
원망생활을 하면 그 원망의 기운이 ‘그래라, 그래라’ 라고 같이 도와준다.
반대로 감사생활을 하고 간절히 원하는 게 있으면 반드시 그 기운이 응해진다. 참 묘하죠.
옛날에 우리 심장병 어린이 돕기 싸이클 팀이 있었다.
이 팀들이 출발 전에 100일 기도를 하게 된다.
차가 달리는 길에서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한번도 큰 사고가 없었다. 자전거가 굴러버려도 크게 다친 적이 없다.
싸이클 팀 동기들이 참으로 희한하다고 한다. 다른 사람 같으면 죽어도 몇 번을 죽었고,
사고가 나도 병신이 됐을텐데, 묘하게 기도의 힘인가 몰라도 보전이 되더라.
그래서 한번도 사고 없이 10년을 했다.
다른 사람은 100명 갔다. 한번만 해보면 90퍼센트 이상은 사고가 났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냐면, 조심하려는 유념도 있지만 이것이 바로 기도의 위력이다.
그러면 그 원리가 어디서 나오는가.
(2) 나무- 땅 / 사람- 허공
나무는 어디에서 영양을 흡수하는가. 뿌리에서. 뿌리를 땅에서 박아서 영양을 흡수한다.
사람은 어디가 뿌리인가?
나무는 땅에 뿌리를 박고, 사람은 허공에 뿌리를 박아있다.
즉 허공이 우리의 영양공급처이다.
그래서 허공을 이전등기내서 내 것 삼아라, 그 허공은 마음과 사촌이다.
우리의 마음은 허공, 천지와 하나인 원리이다. 그래서 그 기도를 하면 반드시 허공 같은 위력이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를 통해서도 효심이 있는 사람에게 잉어가 물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하고, 예전에 일편단심 정몽주의 혈죽, 그래서 나온 것이 아닌가.
우리 원불교에서도 법인절이 곧 다가오지만, 법인기도라든가 이런 것들이 다 기도의 위력에서 나온다.
6.25 전쟁 났을 때 우리 정산종사님 반야심경 하시면서 기도하신 것들 다 무서운 위력이다.
종교가에서의 기도는 어떤 종교가이든지간에 기도하지 않는 종교는 하나도 없다.
종교를 떠나서 이미 과거의 할머니들이 청수 떠놓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종교가에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첫째 서원이 없고, 둘째 보이지 않는 진리를 신앙 하지 않는다, 셋째 믿음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 된다.
어떤 사람은 복이 많아 집안이 모두 원불교인데
어떤 사람은 자기만 원불교 다닌다.
그런데 몇 년 지났더니 원불교 집안인데 자기는 안다니고,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기 가족 다 교화 시켰다.
어떤 것이 더 복 있는 것인가
복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변화하는 것이다.
내가 설사 우리 주변에 복이 적어서, 고생하는 사람이 있다 하여도 변한다.
내가 어떻게 창조적으로 만들어가고 공들여가는 것에 따라 다르다.
내가 원불교 집안에 났지만 복을 짓지 않으면 자기도 떨어져 버린다.
오늘 성주교우님 강연 듣고 여러분들 다른 좋은 생각도 많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강연을 중심으로 해서 강평을 통해서 생각을 같이 나눠보았다.
감사합니다.
박원진 예비교무님 감상담
반갑습니다.
안암교당 청년회 활동을 하다가 원기90년 출가서원을 세우고 여기서 간사생활을 하다가
영산선학대를 마치고 원불교 대학원대학교 1학년에 재학중입니다.
제가 청년회 활동을 할 때 교무님께 최고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교무님께서 사용하시던 염주였는데, 교무님의 삼대력을 얻은 것처럼 굉장히 감동이었다.
이런 것은 아무나 주는 것이 아닐 것이다 라고 생각을 했는데,
어느 날 보니.. 다른 분도 가지고 계시더라. 인정할 수 없는 아픔이 있었다.
만일 제가 차고 있는 염주를 여러분에게 준다면 여러분은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줄려먼 새 걸 주지 왜 땀냄새 나는 걸 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만약 대종사님이 차고 계시던 염주를 준다고 생각을 하면 서로 받으려고 하겠죠?
같은 염주인데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것을 한 번 생각해 봤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법력, 삼대력의 차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삼대력은 어떻게 얻어지죠?
삼대력이라는 것은 법문을 많이 들었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단지 법회에 빠지지 않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실천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천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훈련법에 잘 밝혀주셨는데, 지금같이 인지가 밝은 시기에는 상시훈련법이 주가 되는 것 같다.
상시응용주의사항 중에서도 골격이 있다고 들었다. 6가지 조항 중 그 중에 골격은 2조 1조 6조 이다.
2조- 미리준비
1조-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한다는 것은 미리 준비한대로 일을 당했을 때 실천한다는 것이다.
6조- 하자는 조목과 말자는 조목을 대조하라.
하루하루 훈련에 적용을 했습니다.
미리 다음날 일정을 계획을 하고, 그 계획을 잡고, 시간대별로 일을 잡고, 어떤 마음으로 할 것인지
미리 계획을 하고, 그 당일에는 스스로 실천할 수 있도록 유념을 하는 것이다.
너무 일하는 데 번잡하다면, 아침-점심-저녁대별로 하든지, 자기에게 맞는 방법을 통해서, 계획한 일을 마음대로 할 수도 있도록 일을 실천하도록 한다.
그리고 진행 후에는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실행했는가를 대조하는 공부를 계속 반복해야 한다.
그러면 3,4,5조는 어디로 가는가? 경전연마, 의두연마, 염불좌선이다.
아침에 좌선 꼭 해야하고 저녁에 꼭 염불해야 한다고 시간의 틀을 둘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은 출가인이 아니면 힘들다. 일반인, 직장인으로써는 쉽지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장시간의 시간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짬짬이 10분, 20분 정도라 할지라도, 일과중에서 빠지지 않고 하겠다.
경전을 10분을 보더라도 안 보는 것보다는 도움이 될 것이다.
수학기간 내내 일과 점검을 해야 한다.
그 빛을 발할 때가 언제인가.
이번 학기 4월달부터 교당에서 실습을 했습니다.
정기훈련 수학기간에는 일정이 정해져 있는데 교당에 가니 계획했던 일도 바뀌게 되고, 바쁘게 움직이고, 수기응변해야 하는 사항이 많았다.
내가 정해진 계획대로 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그 정해진 계획이 틀어지더라도 그 일 그 일에 마음 챙겨서 전념해서 하겠다는 그런 고정된 관념도 벗어버리고 하다보면,
내가 일에서.. 고요할 때만 느끼는 그런 감정이 동할 때도 느껴지게 된다.
알음알이도 잘 되고 일심도 잘 되게 된다.
이것은 저의 공부방법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상시응용주의사항을 내가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들도 교리적인 이해 등이 되어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것에 바탕해서 연구해 가면서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것..
정기훈련과의 관계와 상시훈련과의 관계를 잘 연계하셔서 8월 14일 오덕으로 고고씽 하셔야 한다.
대종사님 당대에는 정기훈련을 동하 3개월씩 1년에 6개월 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아무리 동시대라고 해도 1년에 여름 겨울 합하면 1주일도 안 되는데 그것이 너무 짧을 것이다.
항상 내 마음속에 정기훈련에 대한 갈증을 가지시기 바란다.
정기훈련에 갔다오면 만족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왠지 가기 싫은 느낌을 가지기도 한다.
속는 셈 치고 갔다온 경험을 가르쳐주시는 말씀 믿으시고, 정기훈련 갔다오시기 바란다.
4일이라는 시간이 절대 아깝지 않은 시간이 될 것이고 그 시간을 바탕으로 상시훈련 잘 하셔서
천여래 만보살의 주인공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