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마십니다, 내 안의 하느님을 만납니다
안선재 수사는 “자연을 통해 주님의 현존을 깨닫는다. 차는 창조주의 선물이다. 차를 마시며 주님 안에 있는 나를 실감한다”며 직접 우린 차를 건넸다. [김태성 기자] | |
다선일미(茶禪一味). 차(茶)와 선(禪)이 둘이 아니란 얘기다. 절집의 선승들은 차를 즐긴다. 수행의 연장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차하면 불교가 떠오른다. 그럼 기독교는 어떨까. 차와 기독교 영성, 그 사이에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을까.
그런 물음을 안고 지난달 28일 영국 출신인 안선재(67) 수사를 찾았다. 서강대 근처의 오피스텔에 그의 작업실이 있었다. 어찌 보면 서재 같고, 어찌 보면 선방 같고, 또 어찌 보면 찻집 같았다. 벽에는 법정 스님이 썼다는 ‘茶禪一味’ 붓글씨도 보였다. 안 수사는 『The Korean way of tea』(서울실렉션)라는 영문책도 썼다. 최근에는 초의 선사의 『다신전(茶神傳)』『동다송(東茶頌)』 등의 영문 번역도 끝냈다. 그가 차를 한 잔 건넸다.
-서양의 차 문화는 어떤가.
“영국에는 ‘티 타임(Tea time)’이 있다. 손님이 오면 첫 인사가 ‘차 한 잔 하실래요? (Would you like a cup of tea?)’다. 낯선 사람이 문을 두드리면 예수님이라고 여기는 정서도 있다. 그때도 차를 권한다. 차는 위로의 수단이기도 하다. 누군가 ‘남편이 죽었다’고 하면 옆에 있던 사람이 자동적으로 ‘차 한 잔 하자’고 말한다. 차를 통해 ‘연민(Sympathy)’을 표시하는 거다.”
-뜻밖이다. ‘티 타임’의 의미가 무척 깊다.
“18세기의 영국인은 술을 너무 좋아했다. 사회적 문제도 많았다. 그런데 감리교에서 ‘술 대신 차를 마시자’고 제안했다. 고가품이던 차의 가격이 점점 내려가면서 노동자 계층도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차 문화가 형성됐다. 사람들이 모이면 차를 마셨고,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도 차를 마셨다. ‘티 타임’이 따로 있었다.”
안 수사는 떼제공동체 소속이다. 떼제공동체는 프랑스 떼제에 있는 초교파적 수도공동체다. 그는 “떼제공동체의 여러 유럽 수사들도 홀로 차를 마신다. 물을 끓이고, 차를 따르고, 눈과 코와 혀로 차를 마신다. 그렇게 마음으로 차를 만난다”고 말했다. -‘마음으로 차를 만난다’는 건 무슨 뜻인가.
“차(茶)라는 한자를 들여다 보라. 풀(艸)과 나무(木) 사이에 사람(人)이 있는 거다. ‘자연 속의 인간’을 뜻한다. 그건 ‘주님 안의 인간’이란 말과 일맥상통한다. ”
-기독교 수사가 왜 자연과의 일치를 말하나.
“하느님이 주신 두 권의 책이 있다. 하나는 자연이고, 또 하나는 성경이다. 이 우주를 통해 주님의 생각을 표현했는데, 인간이 그걸 읽지 못했다. 그래서 성경을 따로 주신 거다. 그러니 자연을 깊이 들여다보면 주님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
-차를 마시면서 본 주님의 생각이 있다면.
“차를 우려내면 첫째 잔과 둘째 잔은 너무 맛있다. 셋째, 넷째, 다섯째 잔으로 갈수록 맛이 떨어진다. 그러니 첫째 잔만 붙들고 있어선 안 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즐거운 순간이 있어도 계속 붙잡을 수는 없다. 좋은 시간이 오고, 또 가고, 거기에 감사하고, 나중에 또 좋은 시간이 오고, 또 가는 거다. 예수님도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보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을 하지 않아도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왕보다 아름답다.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이처럼 아름답다’고 했다. 그러니 과거에 대한 집착,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항상 ‘여기 이 순간’에 살라는 거다.”
-사람들은 다도(茶道)하면 엄격한 격식을 떠올린다.
“그렇지 않다. 일본의 차는 너무 미학적이다. 또 한복을 입고 격식을 따져가며 복잡하게 차를 마실 필요도 없다. 그건 ‘쇼’다. 차는 단순함과 소박함이 원칙이다. 그게 생활차(生活茶)다. 생활 기독교와 생활 불교, 생활차가 그렇게 서로 통하는 거다.”
-차와 종교, 종교와 차. 그 핵심은 뭔가.
“핵심은 삶이다. 종교가 아니다. 종교는 시스템이고, 이데올로기고, 형식일 뿐이다. 예수께선 종교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진짜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신 거다.”
-그럼 어떡해야 진짜로 사나.
“‘차도무문(茶道無門·혹은 다도무문)’이란 말이 있다. 인간에 대해, 세상에 대해 나를 여는 거다. 나와 하느님 사이도 그렇게 여는 거다. 그래서 사람과도 하나, 자연과도 하나, 하느님과도 하나된 마음으로 사는 거다. 그게 진짜로 사는 거다.”
백성호 기자
◆안선재 수사=세례명은 앤서니. 영국 출신이며 옥스퍼드대(중세문학 전공)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쳤다. 박사 과정을 위해 프랑스 유학을 갔다가 떼제공동체에 반해 수사가 됐다. 수사는 수도회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는 남자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