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꽃
김 아가다
자동차 사고로 병원 생활을 한 지 벌써 넉 달째이다. 처음 한 달 동안은 옴짝달싹 못 하고 용변까지 남의 손을 빌리면서 죽을 지경이었다. 이제는 휠체어를 타도된다는 의사의 말이 얼마나 고맙던지. 실형에서 집행유예를 받은 느낌이라고 할까. 휠체어를 타고부터 몸도, 마음도 자유로워졌다.
재활치료가 시작되면서 병원을 옮겨 603호실에 입원했다. 사고 입원은 처음이라 분위기가 낯설고 어색했다. 환자 셋에 간병인 두 명, 나까지 여섯 명이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잤다. 혼자 사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인지 숨소리가 들리는 것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잠자리가 바뀌면서 한동안 불면의 밤을 새웠다. 밤이면 가스를 배출하는 생리현상 때문에도 고역이었다. 강약과 높낮이, 여기저기서 난리 블루스였다. 노인이 되면 괄약근 조절에도 이상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그들의 표정이 좀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이 실실 나왔다.
정형외과 병동은 특히 노인들이 많다. 다른 병원에서 무릎관절을 수술한 환자들이 재활치료를 하려고 입원한다. 나는 친화력이 있는 편이지만 처음에는 낯가림하는 축이다. 일단 마음의 문을 열게 되면 최선을 다하지만 친숙하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정이 들고 좋은 인연 맺어봤자 겨우 보름이다. 환자들은 물리치료와 전기치료를 하고 나면 걷기 연습을 하다가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하기 때문이다.
우울증이 올 것 같았다. 나 자신을 위해 병실에서 할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느닷없이 들었다. 이 자리에 내가 있음은 어떤 역할이 분명히 있으리라. 낯가림이 아니라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친근감을 느끼게 해야 했다. 머릿속에 설핏 조폭과 아줌마의 공통 단어가 떠올랐다. 연세 많은 분께 언니라는 호칭이 좀 거시기해서 형님이라 부르면서 살갑게 굴었다. 밤새 앓고 일어나기 힘들어하면 “둥근 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노래를 불러주면서 어르신들의 아침을 깨웠다.
노인들을 보살피는 간병인이 있지만, 침상마다 다니면서 등을 긁고 쓰다듬어 주었다. 스킨십은 효과 백 퍼센트의 상한가로 치솟으면서 점점 내 편이 생기고 자존감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유튜브를 이용하면 못 할 것이 없는 기막힌 세상이다. 신나는 음악이 나오면 엉덩이 실룩대며 막춤을 추고, 비음을 섞어 간드러진 트로트도 한 가락 불렀다. 한바탕 웃음소리가 새어 나가면 간호실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달려오기도 했다. 몸도 아픈데 우울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서야 될까. K 할머니는, 밥 주고 잠재워 주고 맨날 웃고 살게 되어서 퇴원하기 싫다 하셨다.
노인들이 건강을 찾아 퇴원할 때는 너나없이 눈물을 찍어내며 전화번호를 주고받기도 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의 넋두리를 들어주면서 가족처럼 지냈기 때문이다. 보름을 주기로 교체되는 침상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보호자 없이 내가 처음 들어왔을 때였다. 좀 완쾌된 병실 선배가 밥을 먹고 나면 식판을 들어내 주었다. 선행은 돌고 도는 것이리라. 이제는 내가 그 몫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착하다면서 마음이 천심이라고 했다.
착한 아이 신드롬이 있다. 부모나 주위 사람들의 칭찬이 아이의 심성을 키운다고 한다. 나의 유년은 착한 아이라는 족쇄에 묶여 그렇게 자랐다. 매사에 착하니까, 잘하니까. 그 말에 세뇌되어 나의 존재는 없고 착한 아이만 있었다. 똑 부러지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성격도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양보하고 배려하는 삶만 살아온 나 자신이 싫을 때가 많았다. 나도 사람인데 욕심이 없을까. 때론 불쑥하고 가시가 돋을 때가 있었지만 착한 아이 신드롬에 빠져 자가당착으로 살았는데 오늘 이름 하나 또 얻었다.
P 어르신은 뇌경색으로 입원하셨다. 편마비로 불편한 몸을 간병인에게 의지하지만, 매사에 긍정적인 생각을 하신다.
“이만하길 다행이지, 하느님이 보호하셨지.”
그 말씀에 내가 엄지척을 해주었더니 “아가다는 우리 방에 웃음꽃”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웃음꽃으로 이름 지어졌으니 꽃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르신의 하얀 박꽃 같은 웃음도 하늘하늘 참 곱다.
첫댓글 꽃답게 사시니 몸도 마음도 금방 추스리시는가 봅니다.
더 싱싱한 웃음꽃으로 진화하소서!
고마워요. 미영 샘~
공자님의 정명론 ~답게 살리라 다짐합니다.
병상일기!
아직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딴세상 이야기 같습니다.
주어진 현실에서의 역할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삶이 또 모범입니다.
엔돌핀이 팍팍 도는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정말 행복합니다.
늘 남을 위해 마음과 몸을 내주시는 선생님의 삶이 병상에서도 꽃을 피우셨네요.
지금, 우리 곁에서 늘 '웃음꽃'이 돼주시는 선생님이 바로 은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