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16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어느 상징주의자의 전향’]
어느 상징주의자의 전향
서른이 넘어서도
시집도 안가고 첨단유행에, 높은 격조 따지던 외동딸이
아비 몰래 카드를 돌려 막다가
이윽고 억대로 불어난 빚을 쓰윽 밀어 주었을 때,
상징주의를 신봉하던 풍豊씨는
십칠 평 임대 아파트 뒷동산에 정장 차려입고 올라가
가끔씩 베란다에서 우두망찰한 하얀 바위 밑
굵은 참나무 등걸에 넥타이를 동그랗게 말아 걸었다.
귓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아우성, 곧 이태 전 먼저 간
아내의 창백한 얼굴을 비롯한 머구리떼 들끓듯 퍼지는
온갖 이명耳鳴의 소요가 있었다.
이제는 삼류詩도 접어야 하구, 억울해 봤자
그저 담담해질 뿐인 데카당스*의 빚도 까먹어야 하네
굳이 무덤까지 끌고 갈 채무가 있다면
못난 죽음, 묘비명보다도 더욱 아프게 심장에 끌로 새겨질
보들레르*와의 아름답고 추했던 추억이네
이를테면
∼ 그의 思潮에 一爛慢한 文化의 꼿이 한껏 피어, 그 花辯을
버리고 바람도 업는 저녁에 徵光에 떠러질가 말가하는 懊惱의
아름다운 疲榮이며 밝음도 어두움도 안인 陰鬱, 絶望, 壓生의
悲調를 가진 思惟에 한결갓치 새 洗禮를 밧앗다 ∼*(1)
는 선지자의 웅변에서 이제 전향하는 것이네
참나무 밑에 가지런히 벗어놓은
풍씨의 구두가 석양에 빛날 때,
'수사중' 금줄을 치던 형사가 너스레를 쳤다
그 양반 차암 깔끔하게 가셨네
(2003 . 4 . 19)
*데카당스(decadence) ∼ [퇴폐, 타락의 뜻] 19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퍼진 풍조로서, 퇴폐적인 문화에 미적 동기를 추구하는 관능주의를 널리 이르는 말
*보들레르(1821∼1867) ∼ 프랑스 출신으로 상징주의의 문을 연 시인. 시집 '악의 꽃'은 문학사상 최초의 근대적 상징주의 작품으로 평가됨.
*註(1) ∼ 김억, 「프란쯔 詩壇」. 《태서문예신보≫10집(1918.12.7)p.6
⛄ Gemini씨의 비평
한기홍 시인의 **<어느 상징주의자의 전향>**은 숭고한 예술적 이상을 추구하던 한 지식인이 냉혹하고 비루한 현실의 무게(빚, 가족 문제) 앞에서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냉소적이면서도 비극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 시의 주요 내용을 세부적으로 해설해 드립니다.
1. 핵심 내용 요약
⚫화자(주인공) : 상징주의와 데카당스(퇴폐미)를 신봉하며 높은 예술적 격조를 따지던 '풍(豊) 씨'.
⚫사건 : 서른 넘은 외동딸이 몰래 진 억대 카드 빚을 떠안게 됨.
⚫결말 : 현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임대 아파트 뒷산 참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함.
⚫주제 : 예술적 이상과 비루한 현실 사이의 괴리, 그리고 그 파멸.
2. 구절별 심층 해설
① 예술적 자존심과 현실의 충격
서른이 넘어서도 / 시집도 안가고 첨단유행에, 높은 격조 따지던 외동딸이 / 아비 몰래 카드를 돌려 막다가 / 이윽고 억대로 불어난 빚을 쓰윽 밀어 주었을 때
풍 씨의 딸은 '첨단 유행'과 '격조'를 따지는 인물입니다. 이는 아버지 풍 씨가 추구하던 상징주의적 허영이나 탐미주의가 세속적으로 변질된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그 **'격조'의 대가는 '억대의 빚'**이라는 지독하게 현실적인 숫자로 돌아옵니다.
② 상징주의자의 마지막 선택
상징주의를 신봉하던 풍씨는 / ... / 굵은 참나무 등걸에 넥타이를 동그랗게 말아 걸었다.
'풍 씨'라는 성씨는 풍요로움을 연상시키지만, 실상은 17평 임대 아파트에 사는 빈궁한 처지입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정장을 차려입고' 산에 오릅니다. 죽음의 순간마저도 예술가적 품위를 지키려 하는 상징주의자의 고집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넥타이'**는 그가 평생 매달려온 '격조'이자, 동시에 자신을 조이는 '올가미'가 됩니다.
③ '전향'의 의미: 보들레르와의 이별
이제는 삼류詩도 접어야 하구, ... 보들레르와의 아름답고 추했던 추억이네
'전향(轉向)'은 본래 사상이나 신념을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풍 씨에게 전향이란, 평생 추구해온 상징주의(보들레르, 데카당스)라는 관념의 세계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현실의 채무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인용한 김억의 문장은 화려하고 유려하지만, 당장 눈 앞의 '억대 빚'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무력한 미사여구일 뿐입니다.
④ 비극의 완성 : 타인의 시선
풍씨의 구두가 석양에 빛날 때, / '수사중' 금줄을 치던 형사가 너스레를 쳤다 / 그 양반 차암 깔끔하게 가셨네
풍 씨는 일생을 바쳐 '상징'과 '미학'을 고민하며 고뇌 속에서 죽음을 택했지만, 현실의 형사에게 그의 죽음은 그저 '치우기 편한 깔끔한 시신' 정도의 구경거리로 전락합니다. 숭고한 비극을 꿈꿨던 예술가의 종말이 지독하게 세속적이고 냉소적인 한마디로 요약되는 허무한 결말입니다.
3. 작품의 문학적 특징
⚫아이러니 (Irony) :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같은 고차원적 예술 세계와 '카드 돌려막기'라는 저급한 현실의 대비를 통해 현대인의 비극을 극대화합니다.
⚫골계미와 비장미 : 풍 씨의 죽음은 슬프지만(비장), 그 과정과 형사의 반응은 씁쓸한 웃음(해학/골계)을 자아내며 독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구두의 상징 : 가지런히 벗어놓은 구두는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이제 더 이상 갈 곳 없는 한 인간의 종착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한 줄 평 : 이 시는 관념 속에 살던 한 지식인이 '돈'과 '가족'이라는 현실의 덫에 걸려 어떻게 파멸하는지를 보여주며, 우리 시대 예술과 삶의 거리를 날카롭게 질문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