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의 전시마케팅 567 _ 거짓말 마케팅
- 글은 서울문화투데이 10월 22일자 칼럼과 거의 같거나 비슷합니다.
거짓말을 잘하면 출세한다. 상대가 재산적 피해를 입었거나 정신적 상처를 받았다면 그것은 사기에 해당한다. 사기(詐欺)라는 것은 남을 속여 재산적 피해를 주는 일이다. 거짓말도 이와 유사하긴 하지만 직접적인 개인 피해가 없으면 경찰 출동 안한다는 것에 주목하다.
정치하는 나랏님(?)들은 거짓말에 천재적 기지를 발휘한다. 개인피해 거의 없다. 집단이나 조직이나 사회구성원을 대상으로 거짓말 한다. ‘당신에게 무엇을..’이 아니라 ‘여러부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이라고 말한다. 완전 지랄이다. 그런데, 상대를 칭찬하는 거짓말을 잘하면 출세한다. 이거 정말이다. 칭찬하는 거짓말은 있어도 없다.
누군가 누군가에게 거짓을 말할 때, 상대가 그 거짓말을 믿으면 상대에게 있어 그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분명한 사실이다. 시간이 경과하여 그 거짓말이 거짓말로 밝혀졌을 때, 그 거짓말은 더 이상 거짓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거짓말이 없다. 타인에게 모멸감이나 경제적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거짓말을 잘 하면 성공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미디에서는 교묘한 거짓을 저질러도 죄를 묻지 않는다. 소위 말하는 [micro blog]와 [SNS]의 문제점들이다. 페이스북에 올려진 인물사진을 그대로 믿는 이 아무도 없다. 어쩌다 초대받은 고급 레스토랑의 음식을 올리면서 매일 다니는 척 한다. 가끔씩 방문하는 와인 바에서 즐거운 한때의 모습을 저장한다. 완전 치고 빠지기 작전이다.
몇 해 전의 [도토리 일촌 맺기]와 [I Love School]이 대박친 일이 있다. 지금의 온라인은 변화만 있을 뿐 익명의 관계는 더욱 넓어지는 것 같다. micro blog와 SNS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신의 좋은 부분만 공개하고, 자신에게 유익한 부분만 취득한다. 이러한 관계에는 거짓은 없다. 모두가 거짓이기 때문이다. 사실과 거짓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편리와 이익/불편과 손해>에서 비롯된다.
그러다 보니 예술의 정체가 없어져 가고 있다. 실물에 대한 직접적 관여와 침해와 판단이 필요한 부분인데 모니터로 대다수의 것들이 해소되고 만다. 예술작품까지 모니터로 소비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면서 예술의 범위는 넓어지고 종류 또한 다양해져 간다. 현재는 종이소설이 현재 불경기이기는 하지만 좋은 예술은 소장의 것과 만짐의 것이 있기 때문에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모니터를 통한 소비는 <가지기에> 부족하거나 <쪽팔린> 것들이 잘 팔린다. 그것이 예술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예술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거짓말을 믿는 이들에게는 거짓말이 없기 때문이다.
평평한 종이위에 석고 데생을 하면서 입체감을 살리라고 말한다. 빛의 흐름이 있어야 하고 원근이 있어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던 어느날 평평한 종이위에서 입체감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때부터는 거짓말이 아니라 그림 중독증에 걸린다. 심각한 ‘입체 중독증’이다. 그래서 미술대학에는 입체중독증 환자 투성이다.
가상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상(假想)의 예술이나 진상(眞想)의 예술이나 예술은 같다. 그것을 어떻게 소유하고 어떻게 소비시킬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접근이 필요한 시대다. 어쩌면 진실조차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