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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나?(마 1:21-25)
국민일보 [겨자씨 칼럼]에 나오는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로 오늘 말씀을 열어가려고 합니다.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은 ‘삼경’(三驚)이란 별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세 번 놀라다.’는 뜻입니다. 목사님을 처음 보는 사람은 목사님의 키가 너무 작아 놀라고, 목소리가 너무 커서 놀라고, 설교를 들으면 너무 힘이 있고 감동이 있어 놀랐다고 합니다. 한센병 환자들의 공동체인 애양원을 섬기면서 환자의 고름 나는 발을 빨아줄 만큼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극진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식사 때가 되면 항상 밥을 다른 죄수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나는 몸이 작아 하나님이 적게 먹도록 만들었으니 드세요.”라고 하며 밥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추운 겨울밤 죄수들은 모포 하나에 의지해서 잠을 청해야 했습니다. 목사님은 키가 큰 죄수가 모포가 작아서 추워할 때 그 죄수의 냄새나는 발을 자신의 가슴에 품고 잤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을 모신다면 우리의 삶이 낮아지고 그렇게 낮은 곳에서 바라볼 때, 우리가 섬길 일들은 얼마든지 널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구원’이라는 말은 사람마다, 처해진 상황마다 그 의미가 다양합니다.
지난주에 있었던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가운데서 끔찍한 희생을 당한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구원’이란 화마로부터 생명을 건지는 것입니다.
중병을 선고받은 이들에게 구원은 병으로부터 나음을 입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파산한 사람에게 구원은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 받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로부터 고통 받는 사람에게는 관계의 회복이 구원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죄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에서 변질된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귀하게 여겨 사랑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마귀가 사람의 마음을 도둑질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자기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만 사랑하니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내 맘에 맞지 않거나 이익을 잃어버리면 싸우고 미워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마귀에게 마음을 도둑질 당하면 영혼이 피폐해지고 메마릅니다.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감사와 사랑을 빼앗기게 됩니다. 사막처럼 바짝 말라 삶의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마치 여름 가뭄에 갈라진 논밭처럼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 영혼을 관통하여 흐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메마르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힘을 내! 왜 이리 나약한 거니? 마음을 다잡으라니깐’
그러나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는 그 사람인들 왜 벗어나고 싶지 않겠습니까? 온갖 노력을 해보지만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인데 자기 마음대로 안 되어 더욱 괴로운 것입니다.
지난 두 주간에는 가슴 아픈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한류 스타 중 한 명인 샤이니의 고(故) 김종현 군이 마음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죽기 전에 이런 유서를 친한 친구에게 SNS(사회관계망)로 남겼다고 합니다.
“난 속에서부터 고장 났다. 천천히 날 갉아먹던 우울은 결국 날 집어삼켰고 난 그걸 이길 수 없었다. 나는 날 미워했다.”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탄의 덫에 마음 도둑질 당했습니다. 그 마음을 찾아오려 해도 자신의 힘으로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길 ‘나약한 나 자신이 문제’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자기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악한 영의 도둑질에 영혼을 빼앗긴 것인데 스스로를 자책하고 공격하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유서는 ‘나를 살려 달라’는 처절한 구원의 요청입니다.
육체가 병들고 아픈 것도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마음의 병은 더욱 더 우리를 괴롭게 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언제,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어디서 치료해야 하는지를 잘 모를 뿐 아니라 병에 걸려 있는지조차 모르게 우리의 영혼을 장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에 물들어 병들고 아픈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없으십니까?
고독으로부터 구원이 필요한 분이 없으신가요?
두려움과 염려로부터, 우울한 마음으로부터, 불안감으로부터, 상처와 그 흔적인 아픔으로부터 실패로부터, 영혼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 없으신가요?
주님께 마음을 열어, 입을 열어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제 마음 아시지요? 저를 도와주세요. 제 힘으로 안 됩니다. 이제 제 힘만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주님, 저를 도우소서.’
메말라 갈라지고 피폐된 논과 밭에 지하수를 끌어 물을 대는 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근본적인 해갈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하늘로부터 비가 쏟아져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에 풍성한 생명이 흘러 사랑과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풍요로운 삶을 살려고 하면 하늘로부터 마음에 부어지는 은혜의 비가 내려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죄로 물든 우리 영혼에 ‘은혜의 단비’를 부어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영혼이 행복하고 마음이 풍성한 삶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셨나요?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1. 예수님의 구원방법 - 자기를 주셨습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구원의 산 제물로 주셨습니다.
생명을 주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지난 2014년 미국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미국인 36살 엘리자베스 조이스 씨는 딸을 임신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뜻밖의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임신한지 한 달 만에, 과거 투병했던 암이 재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위암 치료를 받으려면 뱃속의 아이를 낙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생사의 기로에서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아이의 생명을 택하며 치료를 중단했습니다. 모든 의료진은 아기도 산모도 위험할 뿐이라고 말렸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투약을 중단하고 급속히 퍼지는 암으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뱃속의 아기를 출산하였습니다. 아기를 출산 한 후, 6주 후에 그녀는 심장까지 전이되어 숨을 거두었습니다.
단 하나뿐인 생명을 주어 또 다른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켰습니다.
이 어머니보다 더 위대한 어머니가 어디 있습니까? 엘리자베스의 희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생명으로 생명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예수님의 생명을 주어 우리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주셔서 나의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나에게 영생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주심으로 또 다른 우리들의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2. 예수님의 구원방법 - 사랑을 주셨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살 찢기고 피 흘려 죽으신 것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상징이자 머리 속의 이론이나 교리가 아닌 실제적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우리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 사랑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의인이기에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인 것을 알고도 사랑하신 것입니다. 사랑스럽기 때문이 아닙니다. 죄와 허물로 찢어지고 더럽혀진 그 모습 그대로 품고 사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 분께서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사랑하고 가르치고, 먹이고 함께 했던 제자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십자가 처형의 고통 중에 계신 예수님을 피해 도망갔거나, 숨어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눅 2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런 후에 “다 이루었다.”(요 19:30)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까?
가르친 제자들은 배반하고 다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습니다. 십자가에 비참하게 못 박혀 죽어가고 있습니다. 로마병정들을 조롱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침을 뱉으며 멸시하는데 무엇을 다 이루셨습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이루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셨다고 외치신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제자들, 백성들, 병정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신 십자가!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랑은 구원의 시작이자 마지막입니다.
눅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사랑, 영혼을 구원하는 사랑은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을 넘어서 사랑할 수 없는 이를 사랑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은 모두 주님을 모시고 참된 성탄의 기쁨을 누리시길 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한 주간만이라도 조건 없이, 차별 없이, 사랑하고 용서해 보시기 바랍니다. 품고 이해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이들이 손을 내밀기 바라지 말고, 먼저 손을 내밀어 보시기 바랍니다.
곁에 있는 이들이 마음을 열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마음을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의 구원방법 - 우리 마음에 오셨습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은 오늘 날, 성령님 안에서 우리 마음에 임재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마음에 오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오신 것을 알고 그 분을 영의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우리들은 구원의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이것을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주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함께 계십니다. 단지 우리들이 죄, 염려와 두려움, 세상 사랑에 빠져 우리 마음에 임하신 주님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 마음에 임하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영의 눈이 활짝 뜨이는 성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파파 파노 이야기’로 오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러시아의 한 작은 마을에 파파 파노라는 착하고 성실한 구두 수선공 노인이 살았습니다. 파파 파노는 성탄 전날 밤에 꿈속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성탄절에 파파 파노를 방문하겠노라고 하셨습니다.
파파 파노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성탄절에 특별히 쓰는 커피 주전자를 난로 위에 올려놓고 청소도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성탄절이 되었습니다. 기다리는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거리의 청소부만 보였습니다. 추위에 고생하는 청소부를 불러 예수님께 대접할 따뜻한 커피를 주었습니다.
점심때가 다 되어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한 누더기 옷을 입은 여인이 홑이불에 어린 아이를 싸 들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파파 파노는 그 여인과 아이가 측은하여 그 가게 안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아기의 작은 발을 보니 빨갛고 시퍼렇게 얼어 있었습니다. 파파 파노는 혹시 예수님이 성경에서처럼 ‘아기 예수’로 오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정성껏 준비해 놓은 귀중한 신발을 그 아기에게 신겨 주었는데 아이에게 신겨보니 딱 맞았습니다.
어느 덧 저녁이 되었습니다. 노인은 저녁 준비를 위해 스프와 빵을 데웠습니다.
그 때 한 떼의 거지들이 지나갔습니다.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는 거지들을 보니 가련한 마음이 들어 그들에게 스프와 빵을 대접하였습니다.
어느 새 밤이 깊었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던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결국 꿈이었단 말이지”라고 실의에 빠진 파파 파노는 불현 듯 방에 혼자 있는 것이 아님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습니다. 정신이 말짱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오늘 자기 앞을 지나간 모든 사람들의 물결을 보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는 늙은 청소부, 젊은 여인과 아기 그리고 음식을 준 거지들을 다시 보았습니다. 그들은 지나가면서 “파파 파노! 나를 보지 못했소?” 하고 속삭였습니다.
파파 파노는 당황하여 “당신이 누구요”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때 다른 목소리가 대답하였습니다. 꿈속에서 듣던 예수님의 목소리였습니다.
“내가 배고플 때 너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어. 내가 벗었을 때 나에게 옷을 주었고 추울 때 따뜻하게 해주었지. 나는 오늘 당신이 환영하고 도와주었던 모든 사람들로 당신에게 왔었지.”라고 말했습니다.
이 성탄절 전야의 주일,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저와 여러분을 찾아 오셨습니까?
생명을 주심으로 또 다른 생명을 살리려 오셨습니다.
사랑으로 우리 영혼을 풍성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 마음에 오신 예수님은 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서 손을 내미십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사람들이 외롭고, 병들고, 가난하고, 슬픈, 상처받은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을 따뜻하게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마음에 임하신 주님과 깊이 교제하시는 행복한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