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침체와 패배주의가 만연해했던 시절......
거사가 예정된 아침
25세의 조선 청년은 담담한 얼굴로 아침 식사를 끝내고
김구 선생님에게 말했다.
"선생님! 이 시계는 6원을 주고 산 것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제 시계와 바꾸시지요.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 밖에 쓸 수가 없으니까요.
두 사람은 시계를 바꿔 찼다.
그리곤 이 조선 청년은 담담한 목소리로 "선생님 안녕히 계십시오"
백범은 목멘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1932년 4월 29일, 이 조선 청년은
일본의 전승기념 행사에서 폭탄을 터뜨려
세상에 독립의지를 관철했다.
이 사건을 두고 장제스 총통은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 한 일을 한 명의 조선 청년이 했다"고 감탄했다.
이 의거(義擧)는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 조선 청년의 이름은...
.
매헌 윤봉길 의사
폭탄 투척 직후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으며 결국 25세의 나이로 이국땅에서 순국 하셨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1946년 김구 선생의 요청으로
일본에 있던 발열, 이강훈 선생 등의 주선으로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되어 1946년 7월 7일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습니다.
그 후 그를 기리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를 받았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의거 직전 교환한 시계는 윤의사의 순국 후 유족에게 전달 됐다
김구 선생도 죽는 날까지 윤봉길 의사와 맞바꾼 회중시계를 곁에 간직했다
..
윤봉길 의사는 충남 예산 시에서 출생하였으며
1929년 월진회 조직을 통해 농민의 단결과 민족정신의 배양, 애국 사상을 고취하는 등
농촌운동에 헌신한 인물인데요, 청년 시절부터 농민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윤봉길 의사는 농촌계몽활동, 농촌부흥운동, 야학활동, 독서회 운동 등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일제의 압박 때문에 농촌운동이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1930년 3월 6일 중국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윤봉길 열사의 1932년 4월 29일 결정적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