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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영웅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경,
하얼빈 역에서 대기하던 안중근은 이토히로부미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권총 4발을 쏜다.
그리고 이토가 아닐 것을 대비해 주위 일본인에게 3발을 추가로 쐈다.
重根, 素未見伊藤,
안중근은 본래 이토 히로부미를 본 적이 없는데,
惟嘗於報紙所載之小像, 竊識之.
오직 일찍이 신문에 실린 사진으로 은밀히 알게 됐다.
乃披軍隊而入, 擧槍射之,
곧 군대를 헤치고 들어가 총을 들어 쏘니,
三丸中胸腹, 伊藤遂死.
세 발이 배에 맞아 이토 히로부미는 즉사했다.
又射伊藤從者三人, 亦皆仆.
또한 이토 히로부미의 수행원 세 사람을 쏘니, 또한 모두 쓰러졌다.
於是, 重根, 大呼大韓萬歲, 軍隊就而縛之.
이에 안중근은 크게 “대한만세!”라 외치자, 군대가 나와서 그를 포박했다.
重根大笑曰: “我豈逃者哉?” -『韶濩堂集』
중근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어찌 도망 갈 사람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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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나타난 이토 히로부미 암살장면
重根, 奮起曰:
안중근이 의기충만하게 일어나며 말했다.
“老賊來此也, 天假機會也.”
“늙은 도적놈(伊藤博文)이 여기에 오니, 하늘이 빌려준 기회다.”
直走哈爾賓驛, 立露軍之背後,
곧바로 하얼빈역으로 달려가 러시아 군대의 등 뒤에 서서
相距直十步, 擧銃一發, 中李藤胸.
서로의 거리가 다만 십 보일 때에 총을 들고 한 발을 쏘니 이토의 가슴에 맞았다.
各軍, 來集, 奪重根銃, 付憲兵.
각 군대가 부리나케 모여들어 중근의 총을 빼앗았고 헌병에 붙잡혔다.
重根, 倒其銃而予之, 以拉丁語, 三呼大韓獨立萬歲.
중근은 총을 거꾸로 들고 주었고 라틴어로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쳤다.
被縛, 重根, 拍掌大笑曰:
결박 당하자 안중근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我豈逃者哉. 我欲逃, 我不入死地.”
“내가 어찌 도망가겠나. 도망가려 했다면 나는 사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네.”
於是, 全球震動, 人皆吐舌曰:
이때에 온 지구가 진동했고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韓國有人.” -『韓國獨立運動之血史』
“한국에 대단한 사람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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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통사>의 안중근 의사 유언
及其最終公判後, 謂二弟定根ㆍ恭根曰:
최후 공판이 끝난 후에 두 아우 정근과 공근에게 말했다.
“我死後, 埋我骨於哈爾濱公園之傍,
“내가 죽은 후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었다가,
待我國權回復, 返葬故土.
우리나라의 국권이 회복되길 기다려 고국에 묻어주게.
我往天國, 亦當爲我國家恢復盡力,
내가 천국에 가서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하여 진력할 것이니,
汝等爲我告同胞,
너희들은 나를 위해 동포에게 말해다오.
各擔國家之責任, 盡國民之義務,
각자 국가의 책임을 담당하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同心一力, 建功樹業,
같은 마음과 하나의 힘으로 공을 이루고 업을 세워
大韓獨立之聲, 達於天國,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도달한다면,
則餘當蹈舞, 呼萬歲矣.”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외칠 거라고 말일세.”
以庚戌陽曆三月二十六日上午十時, 立刑場, 欣然而言曰:
경술(1910)년 양력 3월 26일 오후 10시에 형장에 서서 흔쾌히 말했다.
“余爲大韓獨立而死,
“나는 대한독립을 위해 죽는 것이고,
爲東洋平和而死, 死何憾焉?”
동양평화를 위해 죽는 것이니, 죽는 것이 어찌 섭섭하겠는가?”
遂換着韓服, 從容就刑, 年三十有二. -『韓國痛史』
마침내 한복으로 환복하고서 조용히 형을 받았으니, 나이가 32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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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전 안중근의사가 지은 친필 장부가
장부가
丈夫處世兮 其志大矣 장부가 셰상에 쳐ᄒᆞᆷ이여 그 ᄯᅳᆺ이 크도다 (장부가 세상에 있음이여, 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 英雄造時 ᄯᆡ가 령웅을 지음이여 령웅이 ᄯᆡᄅᆞᆯ 지으리로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雄視天下兮 何日成業 텬하ᄅᆞᆯ 웅시ᄒᆞᆷ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일울고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꼬.)
東風漸寒兮 壯士義烈 동풍이 졈드 차미여 쟝사에 의긔가 ᄯᅳ겁도다 (동풍이 점점 참이여,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憤慨一去兮 必成目的 분ᄀᆡ히 한 번 가미여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 (분개히 한 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鼠竊○○兮 豈肯比命 쥐 도젹 ○○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 (쥐 도적 ○○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꼬.)
豈度至此兮 事勢固然 엇지 이에 이ᄅᆞᆯ 쥴을 시아려스리요 사셰가 고여하도다 (어찌 이에 이를 줄을 헤아렸으리오, 사세가 본디 그러하도다.)
同胞同胞兮 速成大業 동포 동포여 속히 ᄃᆡ업을 이룰지어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 大韓獨立 만셰 만셰여 ᄃᆡ한 독립이로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독립이로다.)
萬歲萬歲兮 大韓同胞 만셰 만셰여 ᄃᆡ한 동포로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동포로다.)....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우(森泰二郞),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남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우(田中淸次郞)한테서 총격하였다.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 코레아 우라! (Корея! Ура!) ”
라고 크게 외쳤다. 이 외침은 대한 만세라는 뜻.
처음 발사된 4발 가운데 3발이 이토에게 적중했다.
곧 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절명한다.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은 일제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거사 이듬해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여순)감옥에서 결국 순국한다.
이때 안의사의 나이 32살. 그리고 약 5개월 후(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고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안중근은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유족들은 그대로 남겨졌다.
서슬퍼런 일제 식민지시대, 그 가족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제 1909년 10월 26일, 거사 이후 우리가 잘 모르는 안중근의 가족들 삶 속으로 들어가보자.
안중근은 의거 직전 동료를 통해 유족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연해주에 거처를 마련했고 급히 그곳으로 가라는 내용이었다.
기차를 타고 연해주로 가는 길 유족들은 중국 어느 정거장에 닿았다.
맞은편엔 기차 한대가 있었는데 이상하게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토 히로부미의 시신이 실린 기차였고
그때까지도 가족들은 안중근의 의거를 모르고 있었다.
야반도주하듯 머나먼 연해주 땅에 도착한 가족들은 늘 불안감 속에 생활했다.
그러다 1911년 여름, 7살의 맏아들 안분도는 누군가가 준 과자를 먹고 죽었다.
가족들은 일제가 저지른 짓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그렇게 7~8년을 떠돌다 가족들은 중국 상해로 이주한다.
상해에 출범한 임시정부가 가족들을 부른 것이었다. 상해에서의 삶은 나쁘지 않았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사람들은 안중근의 유족을 아끼고 보호했다.
이때 안준생은 가톨릭스쿨에 입학해 영어를 공부했다.
안의사의 의거 이후 가족들이 처음으로 맞이한 평안한 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임시정부가 사라졌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직후(1932년 4월 29일)
일본은 배후에 있는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를 찾아내기 위해 상해를 샅샅이 뒤졌다.
안중근의 유족은 그렇게 상해에 버려졌다.
일제는 사라진 임시정부 대신 안중근의 유족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유족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 지옥같은 하루하루를 살았다.
특히 안준생은 서른살이 될때까지도 제대로된 밥벌이를 할 수 없었다.
일본 경찰은 안준생이 직장을 얻으면 나중에 들이닥쳐 언제나 훼방을 놓았다.
유족들은 그렇게 상하이에서 끝도없는 터널같은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안준생의 앞에 일본 고위층으로 보이는 이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안준생에게 아버지의 이름이 안중근이냐고 물었다.
안준생이 머뭇거리며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들 중 하나가 자기를 미나미 총독이라 소개했다.
그는 안준생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안준생은 떨리는 목소리로 무슨말이냐 되물었다.
미나미 총독은 안준생에게 곧 서울 박문사라는 절에서 위령제가 열리는데
그 행사에 참여해 이토히로부미의 아들인 이토히로쿠니에게 사과하라고 제안했다.
사실 제안이 아닌 협박이었다.
만약 거절한다면 안준생은 죽게될 게 뻔했다. 그리고 그렇게만 해준다면
지나온 일을 잊고 앞으로 새로운 삶을 보장한다는 말이 이어졌다.
안준생은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버지를 부정하고 변졀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제안을 거절하고 이렇게 죽는 것이 과연 의미있는 일일까 생각했다.
사실 안준생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히토히로부미를 사살할 때 안준생은 고작 3살이었다.
대신 낯선 이국땅에서 어머니, 할머니 누나와 함께 집 없이 떠돌아다닌 기억,
임시정부가 떠나버린 상해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끼니를 때웠던 기억,
일본 경찰의 감시 하에서 변변한 일자리 없이 비참한 나날을 보낸 기억들이 순간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냥 잠깐 어느 한순간이라도 편하게 산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안준생은 생각했다.
"아버지는 영웅이었지만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나는 영웅처럼 살 수 없고 그렇게 살 필요도 없다"
1939년 10월 16일, 박문사(博文寺)
얼마 전부터 떠돌던 믿기지 않는 소문을 확인하려는 사람들로 박문사 마당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내선일체'를 부르짖는
미나미 총독의 연설이 끝나고 이토 히로쿠니가 무대에 올랐다.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이라는 소개와 함께 미나미 총독은
안준생을 불러 안중근의 아들이라며 소개했다.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그때 미나미 총독이 두 사람을 무대 가운데로 이끌었고
안준생 앞에 선 이토 히로쿠니가 한 손을 내밀었다.
안준생이 허리를 숙이며 두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아 악수를 했고
환호와 탄식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다음 날, 일본 신문들은 '테러리스트 안중근의 자식이
아비 대신 용서를 구했다'는 내용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날 이후 안준생은 미나미 총독의 양아들이 되었고
이토 히로쿠니와 함께 일본 곳곳을 돌며 '눈물의 화해'를 재현했다.
조선사람들 대부분은 안준생에 대해
'호부견자(虎父犬子, 호랑이 아비에 개 자식)'라 칭하며 침을 뱉었다.
이 소식을 들은 김구는 해방이 되면 반드시 죽여 응징해야할 대상으로 안준생을 꼽았다.
그리고 백범일지에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청에 부탁했으나 그들이 실행치 않았다”고 적어놓았다.
막대한 상금을 받고 안준생은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어머니 김아려는 돌아온 안준생을 껴안으며 "고생했다"고 위로했다.
또한,
측은한 눈길로 아들을 보며 30년 지옥 같은 고생길을 걷어낸 ‘변절’을 어루만져주었다.
안준생은 2살 많은 정옥녀와 결혼해 1남 2녀를 두었다.
그리고 어머니 김아려의 조언에 따라 약국을 차렸다.
그렇게 안준생은 많은 돈을 벌고 풍족하게 살며 인생에서 더없이 풍요로운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상해까지 들어온 중국 공산당을 피해 홍콩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아내 정옥녀와 자식들을 미국으로 보낸 뒤
1951년 한국전쟁 와중의 국내로 혼자 귀국했다.
귀국한 안준생은 부산에서 폐결핵을 앓다
1951년 귀국한 그해 쓸쓸하게 사망한다.
"왜 나는 안준생으로 살 수 없었나요?
왜 나는 내 삶을 선택할 기회도 없이 이런 운명에 던져져야 했나요.
아버지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죽음을 택한 것이지만,
나는 왜 내 선택이 아닌 아버지의 선택 때문에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아버지는 나라의 영웅이었지만, 가족에겐 재앙이었죠.
나는 나라의 재앙이었겠지만 내 가족에겐 영웅입니다."
첫댓글 성웅이라는 칭호는 제게
이순신
안중근 두분 계십니다.
두분다 모두가 포기할 때
다시 일어서시고
깨워주신 분입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이순신
안중근(토마스)
32년의 생을
목숨으로 영원이라 쓴
안 중 근 !!!
영웅은 국가와 민중을 위하여 신명을 바쳐 정도正道를 가는 사람
성웅은 殺身成仁하며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버리는 사람
【見利思義 見危授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