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내내 따가운 햇살이 그리울 정도로 비가 내리더니 처서인 오늘
맑은 하늘 선선한 바람이 가을의 문턱에 와 있음을 실감나게 합니다.
젊었을 때부터 유난히 더위를 타는 탓에 누구보다 먼저 가을을 기다리기도 했지만
농민운동을 하는 남편을 따라 제천 산골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더욱 가을을 기다리게 됨은
땀흘린 댓가로 주렁주렁 달린 열매를 수확하는 기쁨을 몸소 체험하는 농부의 아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제게 기다림의 계절이요 즐거움의 계절이던 가을이었는데 1981년 가을은 고통과 아픔의 시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갑작스런 종철도련님의 죽음소식에 믿기지 않아 망연자실하던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하기만 합니다.
1981년 9월 그때 우리는 3년 여 농사짓던 제천을 떠나 청원군 북일면 내수에 방 한칸을 얻어 이사하고
남편인 종진형은 기독교 농민회 충북지역 총무로 활동하느라 농촌지역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활동하고
전 남편 내조하면서 80년도에 낳은 아들아이를 키우느라 여념이 없던 때였습니다.
제천에서 농사짓던 시절 제 여동생과 시동생이 시국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가면서 형사들이 우리집까지 들락거리고
소문이 하도 무성해 간첩소리까지 들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티며 마을 일원으로 자리잡기까지 마음고생 몸고생 숱하게 겪었지만
그래도 시대의 아픔에 앞장설 줄 아는 여동생과 시동생을 마음속으로 응원하며 무사히 출옥하기만을 기도하던 시간들을 보내고
두 사람 다 특사로 석방되어 요양하고 있음을 감사히 여기며 이젠 자주 만날 수 있으리라 안심하던 차에
너무나 꽃다운 나이에 젊음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난 종철도련님의 죽음은 그야말로 충격이요
가족들에겐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의 아픔이기도 했습니다.
살아 생전 좀 더 잘 해 줄걸...포근히 감싸주고 껴안아 줄걸..엄마 여읜 슬픔을 얼마나 헤아려줬나?
제 자신 형수로서 사랑을 충분히 베풀지 못 했다는 자괴감과 동생을 잃고 애통해하는 남편의 고통이 더해져
그 해 가을은 참으로 아픈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시동생 종철도련님과 함께 한 시간이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소중한 추억을 간직 할 수 있었던 건
79년 1월 겨울에 이어 그해 8월 여름에도 부산대학생이던 종철도련님이 방학을 맞아 제천 우리 집에 와서 지냈기때문입니다.
그 때만해도 종철도련님은 크게 의식화되지 않은 평범한 대학생이었습니다.
당시 마을 중고등학생들을 우리 집에 모아놓고 무료로 영어를 가르치던 저를 도와 수학을 가르치며 봉사하면서
여름엔 아이들과 청풍강가로 물놀이 가고 겨울엔 뒷산에서 토끼몰이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시동생이라
잘 따르는 마을 아이들과 너무 놀러다니면 어른들이 걱정한다고 귀띔을 해 줄 만큼 쾌할하고 유머러스한 청년이었기에
종철도련님에 대해선 별반 걱정이 없었던 것이 솔직한 그 때 제 심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부산에서 학업에 열중하리라 믿었던 종철도련님이 부마항쟁에 참가했다는 소식이 전해져오고
군 입대하기 위해 휴학하고 청주에 와 있던 시동생이 충북대 민주 시위에 앞장 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만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고 며칠 고생하면 풀려나오리라 예상했던것과는 달리 가혹한 처벌을 받고 수감되었을 때 하늘이 노래지며
종철도련님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되면서 마음 한 켠이 싸아해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우리 집에 와 있는 동안 형과 형수가 사는 모습을 보고 어떤 영향을 받은 건 아닌지?
밤마다 형과 토론하고 마을 청년들과 좌담하면서 싹 튼 사회인식이 날로 험악해지고 살벌해지는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원동력의 근간을 이룬것은 아닌지?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스스로 자문하면서 종철도련님에게 미안한 마음 안쓰러운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게 마음 뿐 도련님이 감옥에 가 있을 때 두번 밖에 면회를 못 간 부족한 형수였습니다.
서울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한번,대전형무소로 이감왔을 때 한번 간게 전부였지요.
우리 아들 영섭이가 갓난 아이인데다 충북 내수에 살았으니 면회가기가 쉽지 않았을 뿐더러 경제적 여유도 전혀 없어
형수 노릇을 제대로 못 한게 지금까지 못 내 제 가슴에 빚진 마음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친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아버님은 공무원이셔서 마음놓고 뒷바라지 할 수 없었으니 감옥에서도 종철도련님 서럽지나 않았는지 한참 세월이 지난 후 종진형이 감옥에 들어가 면회 오가며 그 수발을 하면서 새삼 종철도련님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더군요..
종철도련님의 갑작스런 죽음 소식을 접하고 황망한 마음을 추스리며 서울로 향해 우리가 섬기던 형제교회
김동완 목사님 집례로 장례를 치루면서 아버님과 동지들간에 적지않은 마찰이 있었던 기억도 제 가슴을 아프게합니다.
종철도련님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고 내내 기리기위해 화장보다는 매장을 해 기념비를 세우고 싶어하는 동지들의 마음을
모를 리 없지만 자식을 잃은 아버님의 간곡한 만류에 화장을 하고 산야에 뿌리면서 피눈물을 흘리던 동지들의 모습을
어찌 잊을 수 잊겠습니까?
너무나 완고하신 아버님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자식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사실 그 고통앞에서
모두가 숙연해져 한 발 물러나 아버님의 뜻을 따를 수 밖에 없었던거지요.
그 삼엄했던 독재시절 공무원 신분이셨던 아버님이 한 아들은 농민운동을 하는 요주의인물인데다 막내아들까지 시위주동자로
실형을 살았으니 얼마나 가시방석 세월을 사셨는지 잘 알기에 종철도련님 죽음을 크게 이슈화하기 보다는 조용히 가슴에
묻고 싶어하시는 그 마음을 모두가 헤아림으로 종철도련님은 모두의 통곡속에 한 줌 재로 변해 산야에 뿌려졌지요.
종철 도련님같은 시대의 희생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아 독재정권이 끝나고 5.18희생자 국가유공자 추서를 받기위해
고군분투하신 아버님과 지인들의 수고로 국가유공자 추서를 받을 수 있었기에 아들을 둘이나 먼저 앞세워 민주화 제단에 바친
아버님께 큰 위안이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내게 종철도련님은 해맑게 웃는 연약한 청년 모습 그대로 떠오르는데 모두의 가슴에는 외모와 달리
강인한 정신력과 투쟁력의 상징으로 새겨져있으니 종철도련님이야말로 외유내강의 본이 아닌가 싶습니다.
벌써 종철도련님이 떠난 지 3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동생을 그리도 사랑했던 종진형도 하늘나라로 떠나고 아버님도 4년 전
갑작스럽게 하늘나라로 떠나셔서 남은 가족들의 슬픔이 배가됐지만 먼저 가신 분들을 기리며 의연하게 살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종철도련님의 30주기 추모식을 앞두고 가족을 대표해 수고하시는 모든분들께 송구스런 마음과 함께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광주 5.18묘역으로 이장하기까지 10년 가까이 가족들을 대신해 추모행사를 거행해주시고
새롭게 30주년 추모제를 준비해주시는 동지분들이 있기에 종철도련님은 결코 외롭지 않으리라 생각되며
30주년을 맞아 다시한번 모두의 가슴속에 부활하여 우리로 하여금 정의를 위해 진리를 위해 살라고 조용히 외치는 듯 합니다.
파아란 하늘아래 종철도련님의 얼굴을 떠 올리며 그리움으로 쓰는 이 글이 하늘나라에 닿아 못난 형수의 마음을 전해주리라
소망하며 다시한번 30주기 추모제를 준비하느라 애쓰신 분들,종철도련님을 잊지않고 추모제에 참석해주신 모든 분들께
고개숙여 감사드리며 종철 도련님께 못 다 한 사랑 고통당하는 이웃들에게 펼치며 정의롭게 살아가는 것이 남은 자의 몫임을 잊지않고 열심히 살겠노라고 다짐해 봅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2011년 8월 처서날 종철 도련님 30주기를 맞아........작은 형수가
첫댓글 시동생 종철도련님 30주기 추모제를 위해 가족대표로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글을 써 내려가면서 가슴 한켠에 묻어 두었던 아픔에 가슴이 시려왔습니다.장례치르면서 아버님과 청년들을 중재하느라 애쓰신 김동완 목사님생각도 간절히 났지요..2007년도 봄에 떠나신 아버님,그 해 가을에 떠나신 김동완목사님 두분 다 너무나 갑작스레 떠나셔서 그리움이 더 큰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