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시집 리뷰
신조어 사전의 탄생
──권혁웅 시집 『소문들』
박성필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곧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다.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1946) 중에서
독자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께 새로운 시집에 대해 말씀을 드려볼까 합니다. 바로 권혁웅의 새 시집 『소문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방금 저는 ‘시집’이라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여러분께서는 이 시집을 일종의 ‘사전’으로 인식해주시기를 정중히 권유합니다. 사전辭典이 무엇입니까. 익히 잘 아시다시피, 사전이란 언어를 모아 일정한 순서로 벌여 싣고 낱낱이 그것을 해설한 책을 일컫습니다. 그러나 권혁웅의 시집은 애당초 사전 편찬을 목적으로 삼지 않았기에 거기에 합당한 체계를 갖추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시집에 실린 시어 하나하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전字典을 뒤적이는 수고까지 감당하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시집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낯선 시어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임시로 권혁웅의 시집 『소문들』을 ‘신조어 사전’이라 칭하고자 합니다.
권혁웅이 이 시집을, 아니 이토록 생경한 사전을 펴낸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가 시집의 앞머리에 “시절이 달랐다면 여기에 실린 시들의 절반은 쓰이지 않았거나 여기에 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시인의 말」)라고 밝힌 바와 같이, 『소문들』은 한국의 정치 현실과 관련이 깊은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정치 현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많은 논객들이 진단하는 바와 같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보수 진영과 진보·개혁 진영 사이의 대립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것 아닙니까. 여기에 서툰 정치 감각이나마 제 견해를 조금 덧붙이자면, 그러한 대립 속에서 일각에서는 ‘공정公正’이란 최근의 화두를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 인식하고 있고, 다른 일각에서는 고인이 된 어느 정치인의 이름을 보통명사로 삼고자 하는 기이한(?) 현상들이 연일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이것이 정의다”라고 정의正義를 대상화하는 것이 이제는 무용한 일처럼 보입니다. 다만, 우리 시인들은 부족한 그대로 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소문들』은 이러한 때에 세상에 나왔습니다.
현실과 공명하는 한편 새로운 시어로 현실을 말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를 위해서는 우선 과거 적잖은 시인들이 수모를 겪었던 것처럼 예상 가능한 고초를 감수하겠다는 용단이 필요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옛 시인들이 말하지 않은 방법을 찾기 위한 방법론적 모색 또한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권혁웅은 이러한 이중의 어려움을 「군입」에서 밝혀두고 있습니다. 제가 대신 읽어보겠습니다.
입안에 사막을 들였다는 것은
조바심이 당신을 바짝 구웠다는 증거,
바깥에서 불어온 바람이
혀끝에서부터 고사목들을 세우기 시작한다
――「군입」 중에서
『소문들』에서 불쑥불쑥 머리를 드러내는 생소한 시어들이 한국의 정치 현실과 관련이 깊다는 점은 앞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권혁웅 역시 서시인 이 시편에서부터 그 기원을 ‘바깥’으로 명확히 지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깥에서 불어온 바람”이라는 것, 다시 말해 시인은 유전적 부모가 공여供與한 수정란을 잠시 품었을 따름이라는 것이지요. 그 바람을 타고 든 무엇이 “입안에 사막을 들인” 양 꺼끌꺼끌함이 불편했다고, 시인은 그것이 “조바심”을 만들어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 시집의 시적 기원을 ‘바깥’이라 단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시인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은 채 그를 시어들의 ‘대리모’라 칭할 수 있을 런지도 모릅니다. 그가 이 시집에서 구사하는 시어들이 실은 광장에서 한두 번쯤은 들었을 법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시집에서 권혁웅의 시적 성취를 그 정도로 과소평가해서는 곤란해보입니다. “혀끝에서부터 고사목을 세우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설사 그것이 고사목이라 하더라도 그가 세운 나무의 위엄은 작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지요.
나무를 세운다는 것, 아니 ‘나무[木]’라는 말 그 자체는 상황에 따라 힘과 위엄이라는 의미 작용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라깡Lacan은 문자의 권위를 나무로 비유한 바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히브리 성경에 암시된 상징적 문맥들 속에서 나무는 황폐한 언덕 위 십자가 그늘에 서 있습니다만 그것은 곧 대문자 Y로 바뀐다고 합니다. 그 문양으로부터 우리가 자신의 운명을 더듬어 보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그때의 문양은 허구이지만, 그 나무의 의미작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제가 구어체인 연설투를 표 나게 사용하는 까닭도 그러한 허구적 양식을 마음껏 즐겨보자는 심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새로운 양식의 글쓰기를 아무도 듣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또 누군가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것이지요.
『소문들』에서 권혁웅은 다양한 형태의 연작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생동물 보호구역」, 「드라마」, 「멜랑콜리아」, 「기록보관소」, 그리고 「소문들」 등의 시편들이 연작시의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이 연작시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창작되었습니다만, 이들은 공히 해체의 글쓰기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표제시인 「소문들」 연작은 이 시집의 대표적인 작법을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공중, 악플, 기독, 덕후, 파파라치, 아줌마(?), 용역, 모두 익숙한 말이지요?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어렵잖게 접할 수 있는 이 단어들이 「소문들」에 이르러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얼굴을 드러냅니다. 「소문들―유파流波」의 경우를 예시하자면, 공중恐衆, 악플惡筆, 기독氣毒, 덕후德侯, 파파라치婆跛羅致, 아중마雅?魔, 용역龍처럼 말입니다. 금방 알아차리셨겠습니다만, 일종의 ‘철자 바꾸기’를 통해 낯섦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시집 『소문들』을 읽는 데서 발생하는 향락은 주로 현실 세계와 신조어 사이의 낙차에서 발생합니다. 이 낙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시론시詩論詩를 찾아 읽어야 할 것입니다. 혹자는 이런 부류의 시집은 언어유희에 불과하며 그런 시집에 시론시가 있겠냐고, 시집을 읽는 내내 가졌던 불편함을 의구심으로 표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이 시집에는 시론시는 없습니다. 그를 대신하여 ‘전술’이 있을 뿐이지요. 역시 제가 시 한 편을 대독하겠습니다.
적과 싸울 때에는 다음과 같은 전술이 있다
변방과 수도를 잇는 봉화대를 순서대로 기습하여 적의 연락 체계를 끊는 것은 새침塞侵이고, 세작을 통해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적의 사기를 끊는 것은 몽니蒙泥다 둘을 활용하면 적의 수족을 떼거나 아군이 원하는 대로 적을 부릴 수 있다.
유군을 이용해 적을 유인한 뒤에 사방에서 공격하여 섬멸하는 법을 엄살掩殺이라 하고, 적의 심장부로 곧장 들어가 지휘부를 붕괴시킨 후에 바깥을 흩뜨리는 법을 유난遊亂이라 한다 둘 다 적을 휘저음으로써 떨게 하는 방법이다
――「소문들―전술戰術」 중에서
‘시론’이 아닌 ‘전술’이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시를 통해 적과 싸우기 전·싸울 때·전쟁이 끝난 후에 사용할 수 있는 전술을 표제시에서부터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통해 여러분은 시인이 얼마나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 환멸의 비애를 느꼈을지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비애에 그치지 않고 능청스러운 기표들을 통해 현실을 패러디하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적과 싸울 때에 사용할 수 있는 전술을 말하며, 그는 ‘새침’과 ‘몽니’, ‘엄살’과 ‘유난’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새침과 몽니라고 하면 우리는 자연스레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떼는 태도”나 “음흉하고 심술궂게 욕심 부리는 성질”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권혁웅은 ‘새침’을 ‘塞侵’으로 표기함으로써 “변방을 습격한다”라는 의미를, ‘몽니’를 ‘蒙泥’로 표기함으로써 “진흙을 덮어씌운다”라는 의미로 변주하고 있습니다. 역시 익숙한 어휘에 다른 한자의 독음을 붙이는 것이고, 다시 말하자면 ‘철자 바꾸기’를 통해 ‘낯설게 하기’의 시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시집 『소문들』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조강석은 “이번 시집의 대종은 생활 세계와 기호계를 동기화하여 양자의 연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사태를 제시해 보이는 쪽에 있을 것이다”(「생활 세계와 기호계의 시적 동기화」)라고 평했습니다. 이러한 해설에 지금까지 제가 길게 말씀드린 바를 요약하여 덧붙이자면, 이 시집이 정치 담론에 던지는 파문은 결코 작지 않아 보입니다. 관점을 좁혀 이 시집이 오늘날 정치의 허위성을 고발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그 파괴력은 상당해 보이기 때문이지요. 한편, 이와 더불어 『소문들』이 거두고 있는 또 다른 효과를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미래파’의 실천적 대안으로서 권혁웅 시가 갖는 입지입니다. 미래파의 명명자命名者이며, 비평의 최전선에서 그들을 호위했던 권혁웅이 이 시집에 이르러 시인으로서 미래파 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천하고 있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듭니다. 물론 ‘미래파’시와 권혁웅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는 자세한 논구가 필요하겠지요.
이와 같은 성취에도 불구하고 『소문들』이 지닌 한계 역시 분명해 보입니다. 그 한계들은 이 시집이 기존의 시집들과 사뭇 다른 지점에서 출발하고 있는 데에서 발생한 태생적인 것인데, 이 시집에서 그 한계들은 극복되지 못한 채 그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데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 한계들이란 최근 사회적인 우려가 고조되고 있는 언어 파괴 현상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소문들』을 ‘신조어 사전’이라 칭하고자 했던 바와 같이, 이 시집은 웹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언어 파괴를 새로운 시작법으로 부분적으로 활용했습니다만 그것이 문학 장場내에서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는 가늠하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좀 더 긴급하게 인식해야 할 문제는 언어 파괴가 아니라 현실일 것입니다. 권혁웅은 한국 정치사를 요약적으로 밝힌 시편에서 “2008~ / 뒤를 돌아보며 나는 천천히 핸들을 풀었다”(「우로보로스를 생각함」)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저 핸들이 움직이는 자동차는 지금 이 순간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까? 또,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겠습니까?
박성필 / 1977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시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공저 『도시 공간의 이미지와 상상력』이 있고 평론 「음표와 울음, 이미지의 존재 방식」, 「닫혀 있지 않은, 그러나 채 열리지도 않은―정병근론」 등이 있다. 현재 서울시립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