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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선민의 글자(1) - 훈민정음
(신명기 9:9-10)
그 때에 내가 돌판들 곧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서 사십 주야를 산에 거하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네게 주셨나니 그 판의 글은 하나님이 친수(親手)로 기록하신 것이요 너희 총회 날에 여호와께서 산상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니라.
1. 글자의 중요성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의 선구자로 온 세례 요한은 자기를 가리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소리’이고, 예수님은 그 소리의 본체이신 ‘말씀’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입니다. 또한 이 말을 적을 수 있는 글자가 중요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실 때에 돌판에 친히 써 주셨다고 했습니다. 다니엘서 5:5-6에 보면 바벨론의 벨사살 왕이 그 귀인 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였는데 벨사살이 자기의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왔던 금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여 왕이 그의 귀인들과 왕후들과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고 그 금은동철 목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보았습니다. 이에 왕이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의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치더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이 글을 읽지도 못했는데, 다니엘이 읽고 해석을 하지 않았습니까?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바르신, 곧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런가 하면 예수님도 간음 중에 잡혀온 여자를 심판하실 때에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이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구약의 왕이었던 벨사살은 죽었고, 신약의 죄인이었던 그 여인은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이 글자를 쓰시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일어납니다. 마치 왕이 죄수의 판결문에 싸인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는 사형으로, 누구에게는 무죄 석방으로 결정됩니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십계명을 하나님이 친수로 쓰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도 죽느냐 사느냐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고, 글자입니다. 지난 4월 열방을 품는 연합 기도성회 때에 주강사로 오신 김종필 목사님은 “히브리 글자는 심히 오묘한 글자로 세계 제일”이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이 선민에게 많은 복을 주시지만, 그 중에서도 세계 제일의 글자도 주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은 이렇게도 세밀하십니다. 당신의 백성에게 항상 제일 좋은 것을 주시지 않습니까? 이것이 선민이 누리는 복이 아닙니까? 그러나 내가 섣불리 말할 수는 없지만, 히브리 글자가 훌륭하기는 해도 모음이 발달되지 않았고 매우 제한적이어서 모든 소리를 다 적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글자 자체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한자(漢字)가 최고입니다. 한자는 상형문자로부터 나온 것이고, 따라서 한 글자 한 글자가 무엇인가를 상형하고 있으므로 다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자는 너무 어려워서 모든 백성이 배울 수가 없고, 100년 전만 해도 중국의 문맹률이 90%를 넘어 세계 제일의 문맹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최근 중국은 교육열이 높아지면서 문맹률을 9%까지 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성큼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5만 자나 된다고 하는 글자를 어떻게 다 배워서 자유롭게 쓸 수 있겠습니까? 비록 대학교를 나왔다고 해도 중국의 고대 문서들을 읽는 데는 문맹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맹률(文盲率)이란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사람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를 따지는 것입니다. 문맹률이 높다는 것은 문맹자가 많다는 뜻이고, 문맹률이 낮다는 것은 글을 모르는 사람이 적다는 뜻이니 문맹률은 낮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1940년대 일제시대에는 70%를 넘던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이제는 0%에 가깝게 낮아졌고, 그 결과 자랑스럽게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미국은 이민자들이 많아서 문맹률이 3%, 일본ㆍ독일ㆍ영국ㆍ프랑스는 1%, 이탈리아는 5% 정도라고 합니다. 아시아의 방글라데시가 71%, 인도는 41%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프리카 지역은 문맹률이 높습니다. 중앙아프리카와 감비아는 73%, 가나 70%, 말라위 78% 등이고 문맹률이 파악되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자기의 글자도 없는 나라나 종족은 문맹률을 측정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계 제일의 글자를 주셔서 문맹률이 0%라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곧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사랑을 많이 받은 백성이 곧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2. 훈민정음은 세계에서 제일가는 글자입니다.
1) 글자는 크게 표음문자(表音文字)와 표의문자(表意文字)로 나눕니다.
① 표음문자란 음만 나타내는 문자입니다. 영어의 알파벳이나 한글이나 일본 글자도 다 음만 나타냅니다. 히브리 글자도 그렇고, 헬라 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한자(漢字)는 글자 하나하나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글자를 표의문자라 합니다. 옛날에 서당에서 “하늘 천, 따 지, 감을 현, 누루 황”하면서 한 글자, 한 글자를 배우면서 외워서 썼습니다.
② 우리나라 사람들은 학교에 다니며 공부하는 것을 가리켜 “글을 배운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이렇게 한문 글자를 배우던 것에서 유래하여 그런 말이 생겼을 것입니다. 공부하는 것은 곧 글을 배우는 것입니다. 나아가 말을 배우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한문 글자를 많이 아는 사람이 유식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지금은 영어를 잘해야 유식하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 나라말도 제대로 못하면 어찌 유식하다 하겠습니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면 참으로 무식한 사람입니다. 세상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도 하나님을 모르면 무식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하면서 지혜롭게 살면 그 사람이 제일 유식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③ 표음문자는 그 수효가 적어서 배우기 쉽습니다. 영어는 26자, 한글은 24자밖에 안 됩니다. 일본글자는 50자나 되지요. 그렇지만 그 정도는 아주 쉬운 편입니다. 한자는 무려 3만 자, 5만 자나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많은 것을 전부 외워서 써야 합니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공부하여서 썼습니다. 그러니 머리가 좋고, 환경도 좋아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그런 대로 많은 글자를 사용할 수 있겠지만, 머리가 둔하든지, 환경이나 형편이 어려워서 공부할 시간이 많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저히 공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써서 표현할 수가 없지 않았겠습니까?
2) 우리에게는 세종대왕이 만들어 주신 훈민정음이 있습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오늘날 한글이라고 하는 우리 글자의 원래의 이름입니다.
① 그런데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만드시고 반포하실 때에 그 서문에 한 말씀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의 말소리가 중국의 것과 달라서 문자끼리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자가 많도다. 내가 이것을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쉽게 익히게 하여 매일 사용함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國之語音이 異乎中國하야 與文字로 不相流通할새 故로 愚民이 有所欲言하여도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라. 予 一爲此憫然하야 新制二十八字하노니 欲使人人으로 易習하야 便於日用耳니라.)라고 하였습니다.
②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한자를 그냥 썼습니다. 어렵거나 말거나 당연히 배워야 하고 써야 하는 줄로 알고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많은 백성들이 문맹(文盲)이라는 사실을 알고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래서 훈민정음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왜 우리가 세종대왕을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라고 생각할까요? 세종대왕은 많은 업적이 있지만, 그가 훈민정음을 만들어서 우리 백성에게 주었다는 사실은 단지 우리 민족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도 획기적인 큰 공로인 것입니다.
③ 그런데 이 서문을 보면 세종대왕이 우리 백성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도 진실하게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새로운 글을 만들려고 했을 때에 신하 중에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미 좋은 글자가 있는데, 왜 다른 것을 만들려고 하느냐? 아무리 좋은 것을 만든다고 해도 한자보다 더 좋은 것을 만들 수 있겠느냐? 또 우리가 만일 한자를 버리고 다른 글을 쓴다면 중국의 미움을 받게 되지 않겠느냐? 우리는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공연히 글자를 새로 만들자고 하여 지금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것이냐?”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묵묵히 밀고 나갔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왕을 따랐습니다. 마침내 위대한 글자를 만들게 된 것이었습니다.
④ 우리는 세종대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배우게 됩니다. 일국의 왕도 백성들이 자유롭게 의사가 소통되도록 글자를 만들어주려고 그토록 애를 썼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얼마나 더 애를 써 주시겠습니까? 사람들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시편 127:1에 있는 말씀대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가 아닙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세종대왕이 한 것 같지만, 실은 그의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하셨음을 우리가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만 주신 놀라운 은혜입니다.
⑤ 사람마다 인생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는 것밖에 모릅니다.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좋은 집에서 살고, 더 좋은 차를 굴리고, 더 좋은 보석으로 몸치장을 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부와 영광을 한껏 자랑하면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이렇게 제 잘난 맛에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닙니까? 그러나 비록 소수의 사람일지라도 그들과는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을 찾아갑니다. 명예를 등지고 자기 이름이 나지 않는 곳으로 갑니다. 고난을 당하고 따돌림 받는 길로 걸어갑니다. 이것이 도의와 예절과 정의와 진리를 찾는 사람들의 생활모습입니다. 그들은 돈이나 먹을 것보다 문화(文化)라는 것을 추구합니다.
해방 후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육열은 놀라웠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려고 해도 수업료를 내야만 했습니다. 중고등학교도 입학시험을 보아야 했고 합격이 되면 비싼 입학금과 수업료를 선납해야 비로소 입학이 가능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공부를 할 수 없었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온 나라가 가난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일념 하에 집을 팔고 논을 팔고 소를 팔아가면서 자식들을 대학교에 보내고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가난하면 자녀가 어리다고 해도 돈을 벌어오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어느 것이 더 큰 것입니까? 돈입니까, 공부입니까? 우리 부모 세대의 사람들은 자녀들을 위해 돈보다 공부를 택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렇게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⑥ 예수님이 40일 금식하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귀의 첫 번 시험이 무엇이었습니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떡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자녀들을 공부시키기는 해도 그 목적이 돈에 있고 세상 명예와 권세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마귀의 유혹이요, 속임수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얼마 전 고국의 이어령 교수가 한국 교회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읽었는데, 그는 한국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는 일보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이는 일에 더 열심이라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습니다. 선교사라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구제 사업에 더 바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택해야 합니다. 빵이 아니라 글을 택하는 것입니다. 문화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의식주의 문제는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3) 우리의 글이 얼마나 뛰어난 글인가는 다른 나라의 글자와 비교해 볼 때에 너무도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 비교를 좀 해 보겠습니다.
① 『중국인이 컴퓨터 자판을 치는 모습을 봅시다. 3만 개가 넘는다는 한자를 어떻게 좁은 자판에서 칠까요? 한자를 자판에 나열하는 게 불가능해 중국어 발음을 먼저 영어로 묘사해 알파벳으로 입력한 다음에 단어마다 입력키를 눌러야 화면에서 한자로 바뀝니다. 불편한 건 더 있습니다. 같은 음을 가진 글자가 20개 정도는 보통입니다. 그 중에서 맞는 한자를 선택해야 합니다. 타이핑을 많이 하는 전문직 중국인들은 한자의 획과 부수를 나열한 또 다른 자판을 이용합니다. 자판을 최대 다섯 번 눌러 글자 하나가 구성되므로 오필자형(五筆字型)이라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그래도 속도가 빠르지만 익히기 어려워 일반인은 못합니다.』
② 『일본인은 어떨까요? 컴퓨터 자판을 보면 역시 알파벳입니다. 일본인들은 ‘世’를 영어식 발음인 ‘se’로 컴퓨터에 입력하는 방법을 씁니다. 각 단어가 영어 발음 표기에 맞게 입력돼야 화면에서 가나로 바뀝니다. 게다가 문장마다 한자가 있어 쉼 없이 한자 변환을 해줘야 하므로 속도가 더딥니다. 나아가 ‘추’로 발음되는 한자만 해도 ‘中’을 비롯해 20개 이상이니 골라줘야 합니다. 일본어는 102개의 가나를 자판에 올려 가나로 입력하는 방법도 있지만 익숙해지기 어려워 이용도가 낮습니다. 이러니 인터넷 친화도가 한국보다 낮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③ 말레이시아처럼 언어가 여러 가지인 국가들은 컴퓨터 입력방식 개발부터 골칫덩어리입니다. 물론 앞으로 과학이 더 발달하여 좋은 방법이 나오겠지만, 아무리 발달된다고 해도 우리 한글처럼 간단하게 처리되는 글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④ 24개의 자음·모음만으로 자판 내에서 모든 문자 입력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한글은 하나님의 특별한 복(福)이요 과학입니다.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낼 때 한글로 5초면 되는 문장을 중국, 일본문자는 35초 걸린다는 비교가 있습니다. 한글의 입력 속도가 일곱 배 정도 빠르다는 얘기입니다. 정보통신(IT)시대에 큰 경쟁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인의 부지런하고 급한 성격과 승부근성에, 한글이 ‘디지털 문자’로서 세계 정상의 경쟁력이 있는 덕에 우리가 인터넷 강국이 됐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⑤ 26개인 알파벳은 한글과 같은 소리문자이고 조합도 쉽지만 ‘a’라도 위치에 따라 발음이 다르고 나라별로 발음이 다른 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글은 하나의 글자가 하나의 소리만 갖습니다. 어휘 조합능력도 가장 다양합니다. 소리 표현만도 8800여 개여서 중국어의 400여 개, 일본어의 300여 개와 비교가 안 됩니다. 세계적 언어학자들은 한글이 가장 배우기 쉽고 과학적이어서 세계 문자 중 으뜸이라고 말합니다. ‘알파벳의 꿈’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거의 0%인 세계 최저의 문맹률(文盲率)이 가능하게 된 것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었습니다. 한글의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반영한 음성공학적 문자여서 세계의 언어를 다 표현해냅니다. 모음도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어서 외우기 쉽습니다. 맥도널드를 중국은 ‘마이딩로우’, 일본은 ‘마쿠도나르도’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합니다.』
⑥ 영어와 한글을 가지고 기계화, 문서화를 시험해보았더니, 한글이 영어보다 7배가 빠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현재는 영어가 세계 공용어지만, 앞으로 한글의 인터넷문화가 선도하는 기계화 문자세계에서는 한글이 공용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는 것입니다.
4) 한글을 외국에 수출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자기네 글자가 없는 종족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한글로 문자를 만들어 주는 운동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① 네팔도 자기네 문자가 없습니다. 가장 쉬운 글자는 한글입니다. 외국인에게 5분만 설명하면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쓰게 할 수 있습니다. 한글은 기계적 친화력도 가장 좋아 정보통신 시대의 준비된 문자입니다. 세계화의 잠재력이 적지 않습니다.
② 인도네시아 술리웨시 주 부퉁 섬 바우바우 시는 문자가 없어 사라질 위기에 놓인 찌아찌아어를 표기하기 위해 한글을 도입했습니다. 물론 한글을 수출해서 돈이 벌리는 것은 아니지만, 한글 수출은 선박이나 자동차나 전자기기 수출 못지않게 중요한 그리고 자랑스러운 수출 품목이라고 여겨집니다.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과 사명을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은 우리를 문화민족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① 세상에는 힘의 종류가 많습니다. 육체의 힘, 무기의 힘, 돈의 힘, 권력의 힘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가장 큰 힘은 문화의 힘입니다. 로마가 그리스를 무력으로 점령하였지만, 오히려 로마는 그리스에게 문화적으로 점령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로마가 유대나라를 점령하였지만, 유대인들은 라틴어를 쓰지 않고 그리스어를 썼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기이한 일입니다. 여기에 문화의 힘이 있고 그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② 예나 이제나 이 세상에서는 돈의 힘, 무기의 힘 등을 앞세웁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문화의 힘이 큰 민족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무기나 돈은 마귀에게 이용되어 파괴와 멸망으로 인도하지만, 문화는 하나님께 쓰임 받아 새로운 건설로 나아갑니다. 철학이나 종교도 문화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문화가 하나님께 쓰임 받느냐, 마귀에게 쓰임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이 우리를 문화민족으로 만들어주셨으니, 이제 그 사명을 깨닫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문화를 꽃피워야 하겠습니다. 기독교 문화, 성경 문화를 새롭게 세워나가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계에서 제일가는 글자를 주셨습니다.
① 하나님이 친수로 십계명을 써 주셨습니다. 글자를 영어로 letter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3:6-7에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으로 인하여 그의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이라고 할 때의 ‘의문(儀文)’이 영어로 letter입니다. 구약은 letter요, 신약은 ‘영(靈)’ spirit입니다. 글자는 letter요, 그 정신(의미)은 spirit입니다.
② 그리스도가 구약에서는 글자(letter)로 나타나셨고, 신약에서는 영(spirit)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글자 뒤에는 말씀이 있고 성령이 계십니다. 글자가 있어야 말씀이 전달됩니다.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세계에서 제일가는 글자와 말을 우리 민족에게 주신 것입니다.
③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이 보배를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정말 귀중한 것은 알아보지 못하여 천대하고, 하찮은 것을 오히려 귀하게 알고 사랑합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백성에게 주신 것은 가장 좋은 글자요, 그 글자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성경을 더욱 사랑함으로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3) 하나님이 왜 이런 엄청난 복을 주셨을까요? 세계에서 제일가는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심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글자가 쉬워서 성경을 열심히 읽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 배워야 합니다. 우리 백성들이 정말로 복이 많은 백성입니다. 교회에 이렇게 열심히 나와서 설교를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우리는 엄청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공부합니다. 그것도 세상 헛된 공부가 아니라 천국 공부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한국인들은 모두가 굉장히 유식한 사람들입니다.
① 우리의 사명은 세계복음화가 아닙니까? 온 세계에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쉽고 좋은 글자를 주셨고, 복된 말씀을 주셨습니다.
②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손가락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피로 기록된 책입니다. 이제 주님의 십자가 은혜에 더욱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성경의 글자 한 자, 한 자를 잘 살펴보면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깊은 뜻이 살아나고 깨달아집니다. 이렇게 성경을 읽을 때에 드디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히 나타나고 그 큰 은혜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③ 우리 민족은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기도하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말씀을 더욱 사랑하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세계에 선교하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세계에서 제일가는 글자를 주시고 이렇게 복을 주셨습니다.
4) 큰 것을 받으면 작은 것들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 곧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어서 큰 것을 구할 줄 모르고 작은 것만 달라고 기도하고, 그 작은 것을 위해 목숨을 걸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결국에는 모든 것이 허무한 것으로 끝나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큰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값진 것을 알고 그것을 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어주시면 무엇을 내려주실까요? 금은보화입니까? 아닙니다.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신 28:12)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때를 따라 내려주시는 비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2010년 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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