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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동 정원은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 부용리에 있는 고산 윤선도의 별서정원이다.
부용동이란 이름한 것은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산에 아지랑이가 어른거리고, 무수한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벌여 있는 모습이 마치 반쯤 핀 연꽃과 같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윤선도가 이 섬에 들어온 것은 1637년(인조 15) 2월, 그의 나이 51세였다.
처음 보길도를 둘러본 윤선도가 '물외物外의 선경仙境'이라고 찬탄하였듯이 이곳은 천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윤선도는 백이처럼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기자처럼 은둔하여 거문고를 타며, 관녕처럼 목탑에 앉아 절조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뜻이라 하면서, 섬의 최고봉인 격자봉에서 흘러내리는 계류 주변을 경영하여 정원을 열었다.
윤선도는 성균관 유생으로 이이첨 일당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경원에 유배당했다. 1628년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 왕자의 사부가 되어 봉림대군을 가르쳤고, 공조. 형조. 호조정랑 등을 거쳐 사복시검정. 한성부서윤을 역힘했다. 그 뒤 강석기의 모함으로 성산현감으로 좌천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그 자리마저 삭직되었다. 또 병자호란 때에 왕을 따라가지 않아 화의가 성립된 뒤 영덕에 다시 유배되었다.
세연정(洗然停)과 세연지(洗然池)
연못 동쪽의 서대西臺. 무희가 춤을 추고 악사가 풍악을 울리던 자리였다.
한국의 정원
선비가 거닐던 세계
- 허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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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5대 정원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경주 안압지(雁鴨池)창덕궁 비원(秘苑), 서울 성락원(城樂園), 전남 담양 소쇄원(瀟灑園)과함께 보길도(甫吉島)부용동(芙蓉洞.사적368호)을 꼽을 것이다. 그 중에서 부용동은 궁원(宮苑)이 아니면서도2만8000평에 이르는 장대한 스케일로 한번 가본 사람은 절로감탄을 자아낸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황급히 강화도 로 피신했다.이때 해남에 낙향해 있던 고산(孤山)윤선도(尹善道.1587~1671) 는 왕을 돕기 위해 수 백명 을 이끌고 강화도로 향했으나 도중에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세상볼 면목이 없다며 뱃머리를 제주도로 돌렸다. 남쪽으로 내려가던 도중에 윤선도는 섬 하나에 들렸는데 그 풍광에 반하여 여기에 은신처를 잡게 되었으니 그 곳이보길도다. 격자봉 (格紫峯.425m)에 올라 지세를 살핀 윤선도는 마치연꽃이 피어나는 듯한 이곳을 부용동이라 이름 짓고 산 아래에 살림집낙서재(樂書齋)짓고 건너편에 독서처 로 동천석실(洞天石室)을 지었다.
그리고 동네 아래쪽에 계곡물을 판석(굴뚝다리)으로 막아 연못(洗然池)을 만들고 그 연못 물 을 끌어들여 네모난 인공연못(回水澤)을 만든 다음 그 사이에 섬을 축조하고 세연정(洗然亭)을 지었다. 못 가운데에는 일곱 개 의 육중한 자연석을 호쾌하게 포치하여 장대한공간감을 연출하고 동서 양쪽의 큼직한 너럭바위를 대(臺)로 삼아 자신이 지은 어부사시사(漁父四時司)에 맞추어 악공은 피리불고 무희는 춤추게 하였다고 한다. 이후 윤선도는 13년간 부용동을 가꾸어 당시엔 건물이 모두25채였다고 한다.혹자는 부용동을 보면서 윤선도의 호사 취미를 빈정거리기도 한다.그럴 때면 나는 해남 윤씨의 막대한 재력과 윤선도의 안목이 이런 조선의 명원(名苑)을 남겨준 것인데 과연 우리 시대엔 어느 집안어느 누가 300년 뒤 국가사적이 될 수 있는 정원을 남긴 것이 있느냐고 되묻는다. 보길도 부용동은 동백꽃 만발하는 3월이 제격 이라고하지만 지금쯤이면 인공 섬의 배롱나무가 마지막 꽃대를 피우는 모습도가히 환상적일 것이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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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의 부용동 정원
약 일곱시간의 자동차와 뱃길을 거쳐 완도 남쪽의 보길도를 찾았다.
원래 계획은 땅끝을 관광하고 윤선도고적을 탐방키로 했는데, 땅끝이 구름으로 뒤덮여 있어 곧장 보길도로 건넜다.
여기서도 시간에 쫓겨 윤선도의 유적을 모두 탐방하지 못하고 '세연정' 하나만 탐방하고 보길도를 떠났다.
보길도의 부용동정원은 우리나라 삼대 별서정원중(세속의 벼슬이나 당파싸움에 야합(野合)하지 않고 자연에 귀의하여 전원이나 산속 깊숙한 곳에 따로 집을 지어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려고 만들어 놓은 정원) 의 하나이다.
그것은 담양에 있는 '양산보'의 '소쇄원' 과 강진에 있는 '다산 초당'. 그리고 이곳에 있는 '부용동정원' 이다.
윤선도가 이 섬에 들어온 것은 1637년(인조15) 2월, 그의 나이 51세 때이다.
윤선도는 1616년(광해군 8) 성균관유생으로서 이이첨(李爾瞻)·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 당시 집권세력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병진소 (丙辰疏)〉를 올려, 이로 인하여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견회요 (遣懷謠)〉5수와〈우후요(雨後謠)〉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년 뒤 경상남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항복하고 적과 화의를 맺었다고 하자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제주로 향한다. 가는 도중 잠시 보길도에 들러 이곳 부용동을 접하게 된다.
보길도 해안 전체가 거의 바위로 진입이 어려우나 이곳은 섬 중앙의 격자산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계곡이 생기고 분지가 있으며, 계곡앞에는 장사도(長蛇島)가 길게 입구를 막아주는 형태이다.
그리고 섬안은 입구를 제외하고 사방이 경사가 심하여 마치 연꽃처럼 오목하여 부용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러한 보길도 천혜의 아름다움에 빠진 윤선도는 백이처럼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기자처럼 은둔하여 거문고를 타며, 관녕처럼 목탑에 앉아 절조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뜻이라 하면서, 섬의 최고봉인 격자봉에서 흘러내리는 계류 주변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풀어 정원을 열었다.
마을 앞에 정자를 지어 손님을 맞이하는 세연정, 윤선도가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글을 읽는 낙서재, 주인의 개인 용도로 활용하는 곡수당, 그리고 차를 마시며 마을을 한 눈에 내려다보는 동천 석실 등 다양한 구조의 정원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그는 12년간 이곳에서 생활을 한다. 또 이곳에서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가'가 태어난다.
다른 곳을 모두 제쳐두고 세연정을 찾았다. 세연정은 보길초등학교 옆에 있었다.
동대와 서대를 지나면 양쪽으로 연못이 있으며, 가운데에 웅장한 건물이 나온다.
왼쪽 연못은 세연지이고 오른쪽은 회수담, 그리고 건물이 바로 세연정이다.
세연정(洗然亭)
'세연' 이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 지는 곳' 이란 뜻으로, '고산연보(孤山年譜)'에선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 때 지은 정자라고 한다.
정자의 중앙에 세연정, 동쪽에 호광루(呼光樓), 서쪽에 동하각(同何閣), 남쪽에는 낙기란(樂飢欄)이란 현판을 걸었으며, 또 서쪽에는 칠암헌(七岩軒)이라는 편액을 따로 걸었다.
혹약암(惑躍岩)
세연지 계담(溪潭)에 있는 칠암(七岩)중의 하나이다.
이 바위는 '易經'의 건(乾)에서 나오는 '혹약재연(惑躍在淵)'이란 효사(爻辭)에서 따온 말로서 '뛸 듯 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뜻이다. 즉 혹약암은 마치 힘차게 뛰어갈 것 같은 큰 황소의 모습을 닮은 바위를 말한다.(아래)
판석보(板石洑)
우리나라 정원 조원 유적중 유일한 석조보(石造洑)로 일명 '굴뚝다리'(아래)라 부른다.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만들었으며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보(洑)의 구조는 양쪽에 판석을 견고하게 세우고 그 위에 판석으로 뚜껑돌을 덮었다.
이 판석보의 위는 세연지요, 아래는 세연지 하단이다. 바로 입구의 왼쪽.
<거북이는 오류지적을 항상 기다립니다.>
<아래 글은 이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다른 블로그에서 담아온 것임>
해남 땅끝에서 배를 타고 곧장 남쪽으로 한 시간 가량 가면 노화도를 거쳐 보길도에 닿는다. 땅끝 사자봉 전망대를 아득히 뒤돌아보며 시작되는 남해 뱃길은 초록빛 젤리처럼 졸깃하고 투명한 바닷물과 점점이 푸른 봉우리를 내민 백일도, 흑일도, 어룡도 등 여러 섬들로 인해 말 그대로 환상적이다. 때로는 바다 위로 밀려다니는 안개가 멀고 가까운 섬 아랫도리를 휘감아, 약속된 장소를 찾아 알지 못할 항해를 하는 듯한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출처] 완도여행 1 - 윤선도의 유적 보길도의 부용동정원|작성자 거북이
그 뱃길의 끝 보길도는 상록수가 우거지고 물이 맑아 자연 경관만으로도 아름다운 곳이지만, 부용동 정원이라 불리는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유적이 있어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온 것은 그의 나이 51세 되던 인조 15년(1637)인데, 그가 이 섬을 찾아온 내력은 이렇다.
조선 인조 14년(1636)년 12월, 병자 호란이 일어났다. 청나라 태종이 직접 전쟁에 나섰고, 청의 군사는 급속히 서울로 진격해 왔다. 사태가 급해지자 왕은 세자빈과 원손, 봉림 대군과 인평 대군을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자신은 남한산성으로 피했으나 결국 이듬해 1월 30일 한강 동쪽의 삼전도에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해남 집에 있던 윤선도는 난리 났다는 소식을 듣고 왕을 돕기 위해 집안 사람들과 노복 수백 명을 배에 태우고 강화도로 향했는데, 도중에 강화도가 함락되었고 뒤이어 왕이 청나라에 항복의 예를 바쳤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서인이 권세를 잡고 있던 시절에 남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미 유배와 좌천, 파직을 당하는 등 사람들 속에서 피로했던 윤선도는 이 치욕적인 소식을 듣자 다시는 세상 꼴을 보지 않으리라 하고 제주도를 향해 떠났다. 남쪽으로 내려가던 윤선도 일행은 상록수가 우거진 아름다운 섬 하나를 보았고, 섬에 올라 산수를 둘러보고 반한 윤선도는 제주도까지 갈 것 없이 그 섬에 터를 잡아 버렸다.
그 섬이 바로 보길도이다. 윤선도는 섬의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부용동이라 이름지었고 섬의 주봉인 격자봉(425m) 밑에 낙서재를 지어 거처를 마련했다. 그후 윤선도는 두 차례 더 귀양을 가고 벼슬살이를 하러 서울로 가거나 해남의 금쇄동 등 다른 은거지에서 지내기도 했으나, 결국 85세로 낙서재에서 삶을 마치기까지 보길도를 드나들며 섬 이곳 저곳에 세연정, 무민당, 곡수당, 정성암 등 모두 25채의 건물과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고 하여 자신의 낙원, 부용동 정원을 가꾸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부용동 정원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거처하는 살림집인 낙서재 주변과 그 맞은편 산 중턱의 휴식 공간인 동천석실 주변 그리고 부용동 입구에 있는 놀이의 공간이라 할 세연정 주변이다. 윤선도는 섬 전체를 구석구석 살펴서 가장 알맞은 곳을 골라 살림집과 정자를 놓고 연못을 파고 정원수를 심는 등 섬 전체를 조경의 범위로 삼았다.
그 스케일과 상상력의 크기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지만, 이 정원을 조성하기 위해 동원되었을 노동력이나 당시 섬 주민들에게 그가 어떤 존재였을까를 생각해 보면 찬탄과 질투의 감정이 함께 인다. 물론 윤선도의 고조부이며 해남윤씨의 중시조인 어초은 윤효정 이래 축적되어 온 해남윤씨 집안의 재력이 이 정원을 꾸미는데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윤선도의 후손 가운데 누군가가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유사>에는 고산의 보길도 생활이 잘 나타나 있다.
"고산은 낙서재에서 아침이면 닭울음 소리에 일어나 몸을 단정히 한 후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후 네 바퀴 달린 수레를 타고 악동들을 거느리고 석실이나 세연정에 나가 자연과 벗하며 놀았다. 술과 안주를 충분히 싣고 고산은 그 뒤를 따르는 것이 관례였다. 세연정에 이르면 연못에 조그만 배를 띄워 아름다운 미화들을 줄지어 앉혀 놓고 자신이 지은 <어부사시사>비치는 것을 감상했다. 때로는 정자 위로 악동들을 불러 올려 풍악을 올리게 했다."
이처럼 윤선도는 당쟁으로 시끄러운 세상과 멀리 떨어진 자신의 낙원에서 안빈낙도라는 유교적 규범에서도 벗어나 마음껏 풍류를 누리는 가운데 <어부사시사>등 국문학사상 빛나는 작품들을 남겼다. <어부사시사>는 출범에서 귀선까지 어부의 생활을 춘하추동 사계절마다 10수씩, 모두 40수로 노래한 작품이다. 당시의 시가라면 한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여 창의성이 적고 내용도 도덕성을 강조한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윤선도는 여기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어부의 소박한 생활을 우리말로 훌륭하게 그려 내고 있다.
부용동 정원은 윤선도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서자와 그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었으나 점차 퇴락했다. 3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군데군데 건물자리였음을 알리는 주춧돌과 연못들, 정원의 자취가 흩어져 있을 뿐 당시의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최근에 세연정과 동천석실이 복원되었고 곧 낙서재도 복원될 것이라 한다.
부용동 정원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완도여행 1 - 윤선도의 유적 보길도의 부용동정원|작성자 거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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