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읍동 [古邑洞]
경기도 양주시 양주2동에 속하는 법정동.
명칭 유래
고읍동(古邑洞)이라는 이름은 조선 초기에 양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고읍(古邑)·구읍(舊邑)·고읍내(古邑內)·구읍내(舊邑內)라고도 하였다.
형성 및 변천
고읍동의 옛이름은 고읍리였다. 고려 시대에는 견주(見州)라는 독립적인 행정 구역의 치소가 있었으며, 1397년(태조 6)에는 양주의 부치(府治)가 동촌 대동리[현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 부근]에서 이곳으로 옮겨져, 1506년(중종 1) 유양동으로 이전되기까지 양주의 행정을 총괄하였다. 오늘날 유양동을 근거로 한 양주시의 발전은 고려 시대의 견주, 즉 현 양주시 양주2동 관할 고읍동 일대의 변화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읍리라는 땅 이름은 18세기 후반의 문헌인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서 북고주내면(北古州內面)에 속한 마을 이름으로부터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고려 시대 이 지역은 견주에 속한 지역으로 한강 유역에 근거를 둔 양주와 분리되어 있었다.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곳은 고구려·백제·신라의 주요 분쟁 지역으로 여러 이름이 이용되었다. 먼저 이 지역의 지배국이었던 고구려는 이곳을 매성군(買城郡) 혹은 마홀(馬忽)로 불렀고, 이어 신라는 767년(경덕왕 16)에 내소군(來蘇郡)으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지금의 파주시 적성면 부근에 위치한 중성(重城)과 파평(坡平) 및 한주(漢州)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후 947년(정종 2)에 비로소 견주를 두었고 창화(昌和)라고도 불렀는데, 견주라는 땅 이름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50 열전10 궁예(弓裔) 건령(乾寧) 원년조에서 처음 확인된다. 즉 898년 궁예가 왕건(王建)을 정기대감으로 임명하고 양주와 견주를 정벌케 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견주는 1018년(현종 9)에 양주에 편입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초기에 양주의 치소가 있던 곳이라 하여 북고주내면 혹은 주내면의 중심지 기능을 담당하였다. 고주내라는 명칭은 18세기 중반의 문헌인 『여지도서(輿地圖書)』[1757]에서 처음 확인된다. 조선 왕조가 새로운 도읍을 양주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양주에서 한성부 지역이 이탈되었다. 또한 양주의 치소는 1394년(태조 3) 동촌 대동리로 옮겨졌고, 3년 뒤에는 다시 옛 견주의 치소인 오늘날의 고읍동 일대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태종실록(太宗實錄)』 4년(1395) 6월 6일조에 “한양부를 고쳐서 한성부라 하고, 아전들과 백성들을 견주로 옮기고 양주군이라 고쳤다.”고 한 것으로 보아, 태조 6년 양주의 치소가 이곳으로 옮겨지기 전부터 이미 주요 업무를 이곳에서 관장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읍리라는 이름은 일제 초기의 행정 구역 개편 과정에서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다. 단 기존의 고읍리 및 천천면 고장리에서 각각 일부를 합하여 새롭게 주내면 고읍리로 편재한 것이 특징이다. 2000년 10월 1일 주내면이 양주읍으로 승격되면서 양주읍 고읍리가 되었다가 2003년 10월 19일 양주군이 양주시로 승격하면서 행정동인 양주2동 관할의 고읍동이 되었다.
자연 환경
북쪽에 고장산, 서쪽에 큰테미산이 산악 지형을 이루고 있고, 서남쪽으로 평야 지대이다. 고읍로 11-7 남향으로 지어진 한양수자인 아파트 고층에서 바라보게되는 천보산(天寶山)에서 떠오르는 일출은 때로는 장관(壯觀)인 볼꺼린데 신정원단(新正元旦)에 떠오르는 일출은 기분좋게 신년을 맞아하는 진객(眞客)이란 느낌을 갖게한다.
현황
고읍동은 양주시 양주2동의 북쪽에 위치한다. 2010년 12월 31일 기준으로 1통부터 8통까지 8개 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3,216가구에 9,484명[남자 4,712명, 여자 4,77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고읍동에 있었던 자연 마을로는 낡은골[날근골]·중동·아랫말·웃말[상동(上洞)]·지게울[지계동(芝戒洞)] 등이 있다. 낡은골에는 고려 시대 견주 및 조선 초기 양주의 치소가 있었다. 현재 고읍동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으며, 옛 관아터 부근으로 제2평화로가 만들어져 거의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동쪽은 양주시 회천2동의 덕계동, 서쪽은 양주2동의 삼숭동, 남쪽은 양주2동의 광사동·만송동, 북쪽은 회천3동의 고암동 및 회천4동의 옥정동과 접한다.
참고문헌
『양주군지』(양주문화원, 1992)
『양주 땅 이름의 역사』(양주군·양주문화원, 2001)
양주시청(http://www.yangju.go.kr/)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도락산 [道樂山]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방성리와 덕계동, 은현면 도하리·용암리, 광적면 석우리·가납리 등지에 걸쳐 있는 산.
명칭 유래
도락산(道樂山)은 두락산(頭落山), 돌압산(突壓山), 돌압산(突押山), 돌앞산, 노락산으로도 불리었다. 이처럼 여러 이름으로 불린 배경에는 몇 가지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 모든 산들이 서울 남산을 향해 가는데 불곡산이 가로막고 길을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화가 나서 덕계리 동쪽 방향으로 돌아앉아서 이로부터 돌악산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돌악산이라는 이름은 도락산 정상에 있는 바위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즉, 돌이 많은 악산이란 뜻으로 돌악산으로 부르다가 도락산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돌압산, 도락산, 두락산, 노락산과 같은 이름이 나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다른 전설도 있다. 고려 건국 후 지관(地官)을 시켜 송도(松都) 근처 500리 이내의 산천을 돌아보게 했는데 도락산만 송도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예를 드리는 모양이라고 해서 고려 시대에는 충신산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이 한양에서 건국되고 다시 한양 근처 500리 이내의 모든 산을 답사하도록 하였는데 오로지 도락산만 한양을 배반하고 있다 해서 조정에서 산의 머리[山頭]를 치게 했고 그로 인해 산의 머리가 떨어져 두락산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전설이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다. 고려 건국을 지지하고 조선의 건국을 반대한 세력들이 바로 이 도락산 주변 지역에 많이 살았음을 반영하는 이야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부터 약 200여 년 전에 두락산이라는 이름이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두락산과 음이 비슷한 도락산으로 개명하여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도락산이란 이름은 18세기 중반의 기록에서부터 등장하며, 『해동지도(海東地圖)』[1760]에는 돌압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1767~1776], 『동국여도(東國輿圖)』[1801~1822]에도 돌압산(突壓山)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 『대동지지(大東地志)』[1864]에는 돌압산(突押山)으로 한 글자만 다르게 적혀 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부터 다시 도락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1924년에 간행된 『신편조선지지(新編朝鮮地誌)』부터 도락산으로 나와 있다. 이런 전통에 따라 현재 국토지리정보원[구 국립지리원]이 발행하는 5만분의 1 지형도에도 도락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자연 환경
북쪽 양주시 은현면 지역으로부터 시계 방향으로 회정동·덕계동·산북동, 백석읍, 광적면이 에워싸고 있어 실제로 은현면과 백석읍은 물론 양주시의 진산(鎭山)이라 할 수 있다. 소요산과 감악산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양주시 일대의 분지에서 하나의 낙맥(落脈)을 이뤄 서울 북쪽의 명당을 만들어 낸 곳이 양주시 백석읍과 은현면이다. 이 지역은 북으로 신천과 한탄강을 두르고 있으며 연천군의 산악 지대와 서울특별시를 잇는 중간 거점이기도 하다.
현황
도락산의 높이는 439.8m이며, 산세가 대단히 크다. 불곡산과 함께 양주시와 수도권 등산객들에게 꽤나 알려져 있다. 도락산의 북쪽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채석 작업이 이루어져 산세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으나 여전히 웅장하고 수목이 울창하며 빼어나다. 도락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불곡산이 건너다보이며 현재 정상에 송전탑이 있다. 도락산의 서북쪽인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 새낭골과 흔덕골, 백석읍 방성5리에서 산 정상으로 오를 수 있다. 양주시 회천2동에서는 저수지 옆으로 관음사(觀音寺)를 끼고 올라간다. 포장도로를 따라가다가 중간에 도락산으로 오르거나 여기서 조금 더 가서 지장사(地藏寺)를 기점으로 산을 오르면 단거리로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 주로 도락산 북편에 대장암(大藏岩)·선경암(仙敬岩)·사모암(紗帽岩)·깃대봉[旗臺峰] 등과 같은 아름다운 봉우리가 있다.
오래 전부터 덕계동 주민들의 식수원인 옥천(玉泉) 약수터로 가는 도락산 입구를 오르는 길 옆에 메타세콰이아를 조림(稠林)한 숲이 있어서 새싹이 움트는 봄의 신록(新綠)이나 짙푸른 한여름 숲과 낙엽지는 가을 앙상한 벌거숭이인 나목(裸木)의 겨울 등 사계절 모두를 음미(吟味)하게하는 볼꺼리이다...
참고문헌
『양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양주군, 1998)
『양주 땅이름의 역사』(양주군·양주문화원, 2001)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옥정동(玉井洞)
경기도 양주시 회천4동에 속하는 법정동.
명칭 유래
옥정동(玉井洞)이라는 땅 이름은 통합 이전의 마을 이름인 옥동리(玉洞里)의 ‘옥’자와 냉정리(冷井里)의 ‘정’자를 합쳐 만든 것이다. 옥동리는 옥같이 아름다운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냉정리는 맑고 찬 우물물이 나온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형성 및 변천
옥정동의 옛 이름은 옥정리이다. 옥정리라는 땅 이름은 1914년에 처음 등장한다. 이곳은 대한 제국 시기까지만 해도 대부분이 회암면의 옥동리·냉정리·우산리·마한리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1914년 일제의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회암면의 옥동리·냉정리·우산리·마한리 전부와 천천면 고장리, 고주내면 삼가대리 일부를 합쳐 옥정리라고 하였다. 1985년 10월 1일 회천면이 회천읍으로 승격되어 양주군 회천읍 옥정리가 되었다가, 2003년 10월 19일 양주군이 양주시로 승격되면서 양주시 회천4동 관할의 옥정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자연 환경
거의 대부분이 평야 지대이고, 약간의 구릉지가 있다. 청담천이 양주시 회천3동의 고암동과 경계를 이루며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다.
현황
옥정동은 양주시 회천4동의 남쪽에 위치한다. 2010년 12월 31일 기준으로 총 1,272가구에 2,916명[남자 1,438명, 여자 1,47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옥정1통부터 옥정5통까지 5개 통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 마을로는 널다리골[너더리골, 판교(板橋)]·독박골·마라니[마한동(馬汗洞), 말한리(末汗里)]·신촌말[신촌(新村)]·아랫마을·양짓말·오리골[옥동(玉洞)]·우산동(牛山洞)·웃말·응달말·점말·중간말·참수물[냉동(冷洞)] 등이 있었다. 옥정동은 양주시의 배꼽에 해당하는 독바위를 중심으로 아늑한 농촌 마을의 풍경을 유지해 왔으나, 2010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옥정지구 택지 개발로 모든 마을이 사라졌고 앞으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다만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9호 양주 옥정리 선돌과, 윤근수 사당만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남아 있다. 동쪽은 양주시 회천4동의 율정동, 서쪽은 회천3동의 고암동, 남쪽은 양주2동의 삼숭동, 북쪽은 회암동과 접한다.
참고문헌
『양주군지』(양주문화원, 1992)
『양주 땅 이름의 역사』(양주군·양주문화원, 2001)
양주시청(http://www.yangju.go.kr/)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1-07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