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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이 지나 봄이런가 했더니 春雪이 내려 도심에도 雪花가 만발했습니다. 눈 내렸던 정월 대보름을 하루 앞둔 저녁, 문득 바라 본 하늘엔 먹구름을 헤친 滿月이 유유히 떠 있었습니다. 이것이 자연 그대로의 본래 모습인가 합니다. 우리의 본래 모습도 이와 같겠지요?
일주문 앞, 엘리베이터 앞에 불광 법회 재 안내하는 표시판이 새로 설치되었습니다. 한눈에 확 띄니 너무 좋습니다.
현관 안내팀, 주보 배부팀, 사무국 봉사팀, 엘리베이터 봉사팀이 아침부터 분주하게 일요 법회를 위해 애쓰십니다.
보광당 앞 법당 안내팀, 송파 18, 19, 20, 21구법회에서 떡과 생수를 준비하여 법회 오시는 불광 형제들에게 배부하고 계십니다.
정초기도, 정월 조상 합동 천도, 동안거 바라밀기도 회향이 있는 일요법회. 법당을 맑히는 천수경을 독경하고, 현수 거사님께서 타종하시고 혜안 거사님의 법회 시작 말씀에 이어 헌향, 헌다를 올리며 법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보광당에는 일요 법회에 참석하신 불광 형제들이 빈틈없이 자리하고 계시고, 합창 단석에도 음성공양하시는 단원들이 가득하니 이렇게 2월 마지막 주 법회도 여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금주의 법문 : 효림 스님(경원사 주지)
금주의 법어 : 법이 없기에 가히 얻을 수가 있다.
얼마 전에 설이 지났고, 어저께 보름이 지났습니다. 정월대보름은 우리민족에게도 설 못지않게 중요한 명절입니다. 아울러 사찰에서는 동안거 해제날입니다. 원래 부처님 당시에는 동안거가 없었습니다. 하안거만 있었다 그래요. 여름 우기에는 비가 많이 오니까 스님들이 우기 철에 비를 맞고 자꾸 돌아다니면 추리하게 보이기도 하고, 불편한 점이 많으니까 한군데 안착을 해서 있자 해서 안거를 했던 것입니다.
안거(安居)라는 말이 편안할 안(安)자입니다. 편안하게 사찰에서 거주하자. 밖에 돌아 다니면 피곤하고 힘드니까. 그렇게 안거가 시작되었는데, 요즘은 반대로 되어 가지고 사문 출입하지 말고, 절방에 있으면서 공부만 열심히 해라 이러니까 안거가 아주 힘들어요. 저도 젊은 시절에 공부를 해 보면 안거철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석달 견뎌내는 것이 보통 힘든 게 아니예요. 겨울 안거를 어제 해제를 했습니다. 해제라는 말은 묶어 놓은 것을 푼다. 부처님 당시에도 해제라는 말을 썼는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전문가가 아니라서. 안거를 마치는 것을 해제라고 합니다.
오늘이 또 지장재일이라고 하네요. 저는 아주 작은 절에 살고 있으니까 관음재일이 어느 날인지 지장재일이 어느 날인지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 보니까 영단에 진귀한 과일, 나물이랑 잔뜩 잘 차려 놓았네요. 요즘은 옛날 하고 달라서 영단에 잘 차리는데, 오늘 불광법회에서 차리는 영단은 보니까 아주 잘 차렸어요. 보니까 멋이 있어요.
우리가 돌아가신 분들의 영가를 천도한다든가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것, 이것을 굉장히 신중하고 중요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요즘은 살아서도 부모를 봉양을 잘 안합니다. 부모 모시고 받드는 것을 봉양한다 이러잖아요. 잘 안해요. 그것을.
요즘 문화가 뛰어나고 좋은 점이 많기는 하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옛날 못지 않게 아주 열심히 잘하고 있어요. 그런데 자식이 부모를 모시는 것은 옛날 같지 않다. 그래서 자녀를 기르는 사람들이 그거 신경을 좀 써야 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 보면, 나이가 들어 보면, 좀 알아요. 누군가를 받들고 섬긴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이냐.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부모를 받들고 섬기는 것이 더 할 수 없이 아름다운 거다. 우리 삶에 있어서 그런 아름다움을 놓쳐 버리고 소홀하게 생각을 하면 인생에 중요한 알맹이가 빠지는 것과 같다. 그것을 알아야 돼요. 그래서 살아서도 봉양을 잘 해야 되지만 돌아 가셔서도 그걸 빠뜨리지 않고 잘 지내야 된다고 봅니다.
요즘 옛날 같지 않아서 국가적으로는 현충일이니 또는 각종 국가 기념일이 있지 않아요? 현충일이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우리가 국가를 위하여 헌신한 분들을 재사 지내는 날이예요. 그것은 아주 열심히 잘 해. 그런데 정작 자기 집에 돌아와서 자기 부모의 재사를 지내는 것은 소홀하게 하는 겁니다.
이러면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리고 애국심이 강한 사람들은 나를 섭섭하다고 얘기할 지 모르지만, 현충일은 가볍게 생각해도, 내가 챙기지 않아도 국가의 국록을 먹는 사람들이 다 챙겨주고 있잖아요. 그런데 자기 집의 자기 부모를 모시는 문제는 내가 아니면 대신해 줄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자식 하나를 잘 키우는 것은 거대한 제국 하나를 건설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입니다. 따라서 내가 나의 부모님을 잘 받드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국가에서 현충일을 챙기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영단에 잘 차려놓은 음식들을 보고 제가 느낀 바가 있어서 준비하지 아니한 얘기를 좀 했습니다.
그러면 준비한 얘기를 하기에 앞서서 서론을 좀 길게 말씀드렸으니까 늘 하던 대로 젊은 가수들의 노래를 한 곡을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내가 김광석이라고 하는 가수를 좋아합니다. 언더가수라고 하기도 하고 그러는데, 텔레비 같은데 이런데 자주 안나오던 가수고 그러면서 음악성이 강한 가수, 그런 가수들을 말하는데, 그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가수가 몇 사람이 있습니다. 김현석 이런 가수도 있고, 김광석 이런 가수도 있는데, 두 가수를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그 중에 특히, 김광석은 우리 불교방송하고도 인연이 많고, 또 법정스님하고도 인연이 있어 가지고 거기서도 활동을 많이 해서 제가 아주 좋아하는 가수예요. 그 가수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런 노래를 준비했다고 그러네요. 한번 같이 들어 보고, 법문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한번 불러 보세요.(노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리고 노래를 들으니까 생각이 나는데 또 준비하지 않은 얘기, 짧게 하나 더 하겠습니다. 저는 일찍 출가를 했는데, 출가해 가지고 여러 훌륭하고 좋은 도반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 중에 한 도반이 저 지리산 화엄사라는 절의 스님입니다. 나이도 동갑이고, 출가한 해도 비슷해요. 이름은 종태라고 하는 스님인데, 화엄사의 덕안스님 상좌입니다. 덕안스님은 광덕 큰 스님하고도 매우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고 그래요. 그런 스님이 계셨습니다.
그 스님의 상좌인데, 노래를 잘 불러요. 토굴에 둘이 같이 사는데, 둘이 살면 밥 때가 되면 누가 밥을 해야 되느냐 이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예요. ‘내가 저번에 했으니까 이번에는 네가 해’ 이러면 ‘그래, 내가 할게’ 이러고 나가놓고는 아무 소식이 없어요. 어디로 갔나하고 찾아 보면 산능성이에 올라가서 노래만 부르고 있어요.
저 지리산 가면 상무주라고 유명한 암자가 있습니다. 그 암자에서 딱 보면 천왕봉과 반야봉 눈앞에 두 개의 봉우리가 딱 보여요. 옛날에 그 암자를 거쳐 간 유명한 고승들이 많습니다. 아주 유명한 그런 암자입니다. 거기서 둘이 사는데, 그래서 내가 늘상 그 도반에게 너는 노래를 잘 부르니까 노래로 도를 닦아라, 끊임없이 노래를 불러서 무심의 경지에 도달하면 그것이 도가 아니겠느냐 이렇게 말했어요. 지금 노래를 부른 저 가수, 자권이라고 내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너는 노래를 열심히 불러서 노래로 도를 통해라, 그런데 생각만큼 노래를 열심히 안 하는 것 같아요. 재능은 좋게 타고 났으니까 더욱 분발하도록 하세요! 다음에 부를 노래는 아주 좋은 노래, 찬불가 '부처님 마음일세'라고 합니다.
오늘은 제 22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에 대하여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두서너 줄 되는 아주 짧은 내용입니다. 금강경을 보면 전편이 있고, 후편이 있는데, 긴 것은 두세 페이지 나오는데, 14분, 17분이 가장 길고, 나머지는 대부분 짧아요. 짧은 데서 아주 오묘한 맛이 있습니다. 한문으로 하면 무법가득(無法可得)분인데, 내가 번역할 때는 법이 없기에 가히 얻을 수가 있다 이렇게 제목을 달았습니다. 그랬더니, 불광법회에 같이 오기도 하고, 경원사에서 나를 시봉하고 있는 상좌가 보더니 “‘법은 가히 얻을 것이 없다’ 이렇게 제목을 다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이래요. 그래서 내가 깜짝 놀랐어요. 이 사람이 상당히 좋은 안목을 가지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법은 없다’고 하는 것과 ‘법은 가히 얻을 것이 없다’고 하는 것에는 차이가 과연 있느냐. 꼭 차이가 있다고 하기는 어려워요. 그런데 오늘 원문은 아주 짧은 것이니 한번 읽어 보시면 되는 것이니까 읽는 것은 생략하고, 왜 법이 없다고 했을까 법이. 이것을 오늘은 아주 명확하게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무법(無法). 법이 없다. 법률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은 법이 없다고 하면, 법률 그것도 형법을 잘 안지키는 사람을 무법자(無法者)라고 그러지요. 여기서는 그런 법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의 무법은 심오한 뜻이 숨어 있어요. 기대를 하시고 들어 주십시오.
오늘 제가 지은 게송을 하나 가져 왔는데, 이것을 우선 설명해 드려야겠어요. ‘약생종일회(若生終一回)’라, 만약 우리가 산다고 하는 것이 1회,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다. 유명한 철학가, 우리나라에서 명성이 높은 철학가, 그 사람의 명예를 생각해서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만, 아주 명성이 높은 학자, 인문학자가 있어요. 이 사람은 유교를 전문으로 하는 학자입니다. 이 분이 설명을 하는데 들어 보니까 ‘삶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다’ 이것을 계속 강조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것을 듣고 저 사람은 연기법(緣起法)을 모를 뿐 아니라, 불교의 윤회를 모르는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심오한 뜻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간혹 불교를 전문하는 사람들도 윤회는 불교의 법이 아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윤회는 불법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윤회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과연 그런 것인가. 사후전소멸(死後全消滅)이라. 죽고 나면 싹 소멸해서 없어져 버린다. 그러면 공연수지계(空然受持戒)라, 그렇다면, 공연히 계를 받아서 그것을 지키고 불필비도덕(不必備道德)이라, 도덕을 갖추고 그럴 필요가 있느냐 우리가 도덕적으로 산다 아니 우리가 윤리를 지키고 산다. 또는 우리가 착하게 산다 훌륭하게 산다 이런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느냐 한번으로 끝나는 것인데, 죽으면 싹 소멸되고 없어진다면, 거짓말인지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전생은 모르지만 죽고 나면 착한 일하면 천당이라도 간다고 해야 사람들이 거기에 속아 가지고, 착하게 살 것 아니예요? 아주 수많은 사람들이 얘기하고 있잖아요? 믿기만 하면 천당 간다. 불신지옥 그러잖아요. 안 믿으면 지옥간다. 그런데, 그런 것이 필요없지 않느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1회로 끝난다고 하면, 낙마약침환(樂痲藥沈幻)이라. 내가 마약을 한번도 해 본 적은 없으나, 기사나 글을 보면, 마약을 먹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은 다 짐작해 볼 수 있잖아요. 지금 대한민국이 마약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어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어요. 과거에도 마약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지금은 마약 문제가 심각하다는 거예요. 집안 화단 돌 밑에 마약을 숨겨 놓고 가고 그런다는 겁니다.
마약이 어찌 보면 나쁜 게 없는 것 아니예요? 마약이라는 것이 환각에 빠져서 즐기다 몇일 살다가 그냥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죽으면 어차피 없어질 것인데, 열심히 인생을 살려고 고달프게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예요? 아니, 인생이 단 1회로 끝난다면. 그래서 자락망생애(自落亡生涯)이라. 스스로 삶을 자기 생애를 망치는데 떨어지고, 그런다고 하더라도 힐청수기죄(詰靑誰其罪)라, 그 허물을 누가 꾸짖을 수 있겠느냐. 착하고 어질게 살 이유가 없는데. 가령 예를 들어서 누군가 창조주가 있어서 나를 창조했다고 하면, 인간을 모두 평등하지 않고, 천차만별로 어떤 놈은 도둑질을 잘 하게 만들고, 또 어떤 사람은 멀쩡한 사람에게 폭력 행사를 밥먹듯하고 하느냐. 이런 것을 이해를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한번 기회를 만들어 별도로 설명하기로 하고, 오늘은 현생(現生)에 살면서 다겁생(多劫生)이 없다고 한다면 누가 그런 것에 대해서 꾸짖고 할 수 있겠느냐. 연존재불멸(然存在不滅)이라. 그러나 우리의 존재,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주 미물, 파리, 모기도 1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모든 존재는 다 불멸이에요. 없어지지를 않아요.
오늘 무법(無法)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인데, 없어지지를 않아요. 성철스님, 청담스님 이런 큰 스님의 법문하시는 것을 들어 보면, 경상도 사람들도 잘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사투리를 많이 쓰세요. 그런 가운데 성철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요지를 들어 보면, 우리의 생명만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아니라, 물질도 불생불멸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물리학적 측면에서 보면, 물질도 불생불멸이에요.
지금 빅뱅에 의해서 우주가 갑자기 뻥하다가 생겨났다고 하는데, 도를 깨닫는 것은 ‘팍’해 가지고 스파크가 일어나서 깨닫는다고 얘기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우주는 무시무종(無始無終)입니다. 불교 논리로 하면, 공간과 시간이 분리되어 공간이 따로 있고,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간을 의식하는데는 우리의 시간적 개념이 있어야 가능해요. 시간이 있어야 공간을 의식할 수 있는 겁니다. 시간을 의식하는 것도 공간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공간이 없으면 시간을 의식하지 못해요. 그래서 공간과 시간은 분리될 수 없다. 항상 같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만 그런 것이 아니라 물질도 불생불멸이다. 연존재(然存在)는 불멸(不滅)이라. 그래서 생불종일회(生不終一回), 모든 존재는 1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만유인력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저 우주 공간에서 지구가 태양을 빙빙도는 것은 물리학자들의 말을 빌려서 알아 보면, 물체가 회전을 하면 추진력이 생겨서 밖으로 튕겨져 나가려고 하는 힘이 생긴다고 합니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데도 초당 수십키로를 달리는데, 그러면 그 추진력에 의해서 지구가 태양권 밖으로 튕겨져 나가야 하는데, 안 튕겨 나가는 것은 태양이 당기는 힘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합니다. 이처럼 모든 물질은 서로 당기는 힘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업(業)이라는 것이 그래요. 내가 지어 놓은 업이 어떤 것이냐. 내가 큰 업을 지어 놓고, 작은 업도 지어 놓으면 작은 업은 큰 업이 당겨서 묻혀서 쑥 따라 들어 가 버립니다. 내가 만약 천하무도한 아주 큰 나쁜 짓을 하게 되면, 그 나쁜 짓을 한 업의 힘이 워낙 강해서 내가 그동안에 지어 놓은 소소하고 어진 업들이 거기로 다 빨려 들어가 버립니다. 텔레비에 자주 나와서 아주 유명한 축구 선수도 어느 날 갑자기 나쁜 일을 하게 되면, 나쁜 업 속으로 싹 빨려 들어가 버립니다. 이처럼 업의 흡인력이 강하고 빠릅니다.
반대로, 매일 같이 술이나 먹고, 꼴 사나운 행동만 하던 놈이 어느 날, 착한 일 한번 해 가지고 사람들로부터 아주 훌륭하구나라는 평가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훌륭한 일을 한번 쫙하면 그 동안에 가지고 있던 그 나쁜 업이 착한 업 속으로 쫙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법문 들어 보기 힘든 귀한 법문이니 박수 한번 치세요.(박수)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서 좋은 일 한번 하면 그동안의 나쁜 짓 했던 것들이 좋은 일 속에 확 빨려 들어가 버립니다. 시시하게 잡다한 좋은 일을 몇 번 했던 것들이 나쁜 짓 한번 하면 그 쪽으로 확 빨려 가고 맙니다.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금생오작행(今生吾作行), 금생에 내가 행한 행위가 후생오업귀(後生吾業歸), 다음 생에 큰 업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돌아가서 시지선지인(是知善知人), 이렇게 아는 것이 제대로 아는 것이다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노래 한 곡 더 듣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이번 곡은 ‘부처님 마음일세’입니다.
원문을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수보리백불언(須菩提白佛言)하되, 세존(世尊)이시여 불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위무소득야(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爲無所得耶)하되, 불언(佛言)하시되, 여시 여시(如是如是)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아어아뇩다라삼먁삼보리(我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 내지무유소법가득(乃至無有少法可得)이니,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수보리 부처님께 말씀 사뢰되,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음은 얻은 바가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다 그러하다 수보리야, 내가 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내지 작은 것도 얻은 것이 있지 않으니, 그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니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해서는 예전에도 몇 번 얘기한 적이 있고, 불광법회는 특히, 옛날 큰 스님께서부터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하반야바라밀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따까리가 앉을 정도가 되었을 것으로 압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이렇게 번역을 합니다. 무상(無上). 위가 없다. 이것보다 더 위대한 깨달음은 없다. 법이 있다고 하면, 그 법이 있는 것에 걸리게 됩니다. 그래서 무언가 있다고 하면, 있는 것에 반대되는 없다고 또 존재하게 됩니다. 구체적인 설명을 뒤에 하기로 하고, ‘얻음은 얻은 바가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얻은 바가 없는 것입니까? 수보리가 이렇게 물었어요. 쉽게 말해서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했는데 그것이 진짜 얻은 것입니까?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그러하고 그러하도다. 너희들이 나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말들을 하지만, 나는 실제 얻었다는 생각이 없어. 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얻었다는 상이 생깁니다. 수보리야 그러하고, 그러하다. 내가 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하여 작은 조금이라도 얻은 것이 있지 않으니, 그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니라.
여기에서의 논법이 아주 쉬운 논법이지만, 이해하려면 어렵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법문을 귀담아 많이 들어 보신 분들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불교를 대표하는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이것이. 무슨 법을 깨달았느냐? 경전에 보면, 연기를 깨달았다고 해요. 연기. 緣起法을 들어 보셨지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진다. 남자가 있으니까 여자도 있다. 여자가 없어지면 남자가 없어진다. 네, 이겁니다.
우리가 법회를 시작할 때 반야심경을 봉독하지 않습니까? 대승경전에 보면 연기법을 설명할 때, 空이라고 합니다. 공. 공은 緣起를 얘기하는 겁니다. 금강경에서 무아상,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무아라고 얘기했다가 나중에는 무아상이라고 얘기하셨는데,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라는 새로운 사상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공이 무엇입니까? 나중에 선종에 와서는 그냥 공, 공 하니까 싱겁거든요. 맛이. 그래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 시적 표현으로 보다 알아듣기 좋은 방법으로 설명을 하려고 하다 보니, 그래서 선적 표현으로 만들어진 것이 ‘무심’입니다.
무심(無心). 우리가 무아상. 아상이 싹 소멸해서 없어진 경지가 바로 무심의 경지이예요. 한문으로 삼매라는 것이 산스크리트어로는 삼맛타입니다. 삼매가 바로 무심입니다. 무심. 나중에 마조 도일 선사가 ‘무심이 도’다. 이렇게 얘기했는데, 무심이 도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더워도 더운 것을 모르는 것이 무심인가? 또 이런 망상을 피운다 말입니다. 그래서 발전한 개념이 ‘평상심이 도’다라는 시적 표현이 등장하게 됩니다. 平常心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평상시에 그냥 특별한 마음 내지 말고, 너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순수한 마음을 지켜라. 그런데, 이것이 또 오묘하고 어려워요. 이것이. 우리가 특별한 마음을 내기가 어려운 것 같지만, 실제로는 특별한 마음을 안내기가 어려운 것이에요. 그래서 선종에서 후대에 오면, 더 절묘한 표현에 이르러서 ‘토끼의 뿔’이라고 해요. 토끼 뿔이 없잖아요? 또 그 다음에 ‘거북이의 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거북이는 털이 없잖아. 공이라는 말이야. 무라는 말입니다. 무. 無는 연기를 설명하는 말이다. 그렇게 이해를 하시면 되겠습니다.
결국에 보면, 연기를 설명하는 말이 공이고 무인데, 부처님께서 제행무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제행무상. 왜 제행무상인가? 이것도 연기되는 것은 모두 무상이다. 無常하다. 그러면 무상하다는 그 법칙은 무상하지 않을까요? 무상하다는 그 법칙은 영원히 존재할 것 아닌가? 실제 무상한 법칙이 딱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도 법에 걸립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제가 설명하는 재주가 부족해서 혹 여러분들 가운데 궤변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는데, 무상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도 법칙이 되는 겁니다. 그 생각 조차도 버리는 경지가 무상을 정말로 제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이와 같은 논법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하면, 자기의 이념이나 철학, 사상을 절대화하는 것, 보편적인 언어로 얘기하면 교조주의, 저 사람은 이념주의자다, 공산주의 이념에 빠져 가지고 저 사람은 자기의 목숨은 내놓을지언정, 자기의 이념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기는 어디로 가버리고, 이념만 남아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교조주의에 빠진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를 한다는 사람들이 여기에 다 빠져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기독교를 비판하는 얘기를 살짝 한 적이 있습니다만, 창조를 믿는냐? 내가 창조를 믿을테니 네가 믿는 창조를 내가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보아라. 아니 부활했다가도 합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인데, 죽음이라는 말, 우리가 죽음이라고 하는 명제는 우리가 다시 살아나지 않아야 죽은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면, 그것은 유사 죽음이지 진짜 죽음이 아닙니다.
죽었다고 하는 순간, 완전한 죽음이라고 인정할려고 하면, 살아나지 않아야 됩니다. 그것이 하나의 명제예요. 그런데 살아났다? 그것은 죽은 게 아니지요. 죽었다는 말이 성립이 안되는 것입니다. 네가 부활했다고 주장하려면 그 부활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해라. 합리적 설명을! 살아날 수 없는 것이 살아났다고 하면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해서 이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불교의 ‘법이 없다’는 말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임을 양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동정녀가 애기를 낳았다? 동정이라고 하는 것은 성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러한 동정이 애기를 낳았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되는 것입니다.
윤회의 법칙에 의하면, 환생을 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서 돌아왔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요. 불생불멸이니까 윤회를 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재림한다 이 말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창조를 믿느냐? 동정녀에서 탄생한 것을 믿느냐? 부활을 믿느냐? 재림을 믿느냐? 어느 하나도 합리적이지 않고 왜 그렇게 불합리한 것이 많으냐? 그것을 믿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마무리하면서 결론삼아 드리는 말씀인데, 교조주의, 절대적인 것으로 말뚝을 꽉 박아서, 믿는 것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 바로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네가 주장하는 하나의 법은 어떤 것이든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는 것으로 성립하는 것이지, 이 세상에 수컷은 싹 없어지고, 암컷만 전부 있다. 암컷은 싹 사라지고 수컷만 존재한다. 이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음양론에 의해도, 푹 솟은 것은 양이고, 푹 꺼진 것은 음이다라고 할 것 같으면, 푹 솟은 것이 없어야 푹 꺼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가 푹 솟은 것이 있는데, 꺼진 것은 없다고 하면, 그 말의 모순성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있는 것이다. 스스로.
우리가 자연이라고 할 때, 자연은 동양에서 불교 이전에 있었던 개념입니다. 기원전 몇천년 전에부터 우리가 동양사람들이 사용해 오던 말입니다. 현대 언어가 아닙니다.
현대에서 우리가 쓰고 있는 말 가운데 가장 오래된 말이면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말이 자연입니다. 자연. 우주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무시무종으로 자연(自然)한 것입니다. 제가 설명드리고자 하는 것의 요지는 ‘법이 없다’는 것이고, ‘법이 없다’고 하는 것은 연기, 공을 얘기하는 것이다는 뜻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마무리 짓겠습니다.
끝으로 하나 더 말씀드리면, 우리 종단이 기운을 되찾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만, 더욱 청정하고 깨끗한 종단이 되기 위해서는 광덕스님이 단순히 불광법회를 창립한 분이고,불광사를 창건한 분이다고만 규정하지 말고, 우리 시대의 청정승의 상징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이런 뜻에서 광덕스님에 대한 노래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노래: 광덕 스님) (청명거사님 녹취)
오늘도 법문 중간중간 가수(자권거사님)이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부처님 마음일세' '광덕 스님' 노래를 불러주셨습니다.
♬ 찬탄곡 : 무소유의 노래( 덕신스님 작사, 김회경 작곡) 마하보디 합창단 ♬
갈 곳이 어디메뇨 머물 곳은 어디런가 대가사와 바루 한 벌 바랑에 넣었으니
번뇌의 봇짐인가 수행의 도구인가 수행자의 구도 행각은 걸림이 없어라
가질 것도 없었으니 버릴 것도 없다네 무소유에 집착하면 소유가 아니런가
머물지 말지니 번뇌에 머물지 말며 떠나지 말지니 보리심 떠나지 마라
바랑 메고 길나서는 나그네의 당당함에 무소유의 소식을 찾을 수 있었네
삼독의 고삐는 풀어서 놓아주고 해탈의 속박마저 벗으려고 하는구나
가진 것이 없어도 그 마음은 풍요롭고 머물지 아니해도 발걸음 가벼워라
머물지 말지니 번뇌에 머물지 말며 떠나지 말지니 보리심 떠나지 마라
정초 기도, 정월 조상 천도 회향 축원 : 혜담 스님
발원문 낭독 : 부회장 문수월 보살님 (불광법회.불광사 정상화 기도 발원)
현안 보고 : 현진 법회장님
밝은 모습의 새내기 법우님들 환영식에 활짝 웃음 지으시는 법회장님의 모습. 이것이 행복한 불광인의 모습입니다.
혜담 스님, 연화부 거사님들의 집전으로 동안거바라밀 기도 회향, 정월 조상 합동 천도재 회향 지장재일 법회 시식이 있었습니다.
정월 대보름 즈음이라 그런지 찰밥을 가져오신 구법회도 많고, 시식하여 비빔밥 나눔으로 모두가 행복한 법등모임을 갖습니다.
대웅전에서 있었던 금강경 독송 모습입니다.
불광 법회 청정팀들이 나타나시면 보광당은 너무도 청결하고 질서 정연한 더할 나위 없이 찬란히 빛나는 법당이 됩니다.
지장 재일, 합동 천도재 회향을 위한 위폐를 붙이시느라고 거사님들께서 너무 많이 수고를 하고 계십니다.
조상합동 천도재 회향 및 지장재일 법회에 여법하게 영단이 차려지기까지 보문부 보살님들의 정성어린 손길들이 있었습니다.
조계사(화요일, 금요일), 동명사, 봉은사에서 변함없이 1인 시위를 이어가는 불광 형제들.
주중에 춘설이 내려 쌀쌀해진 날씨에도 불광법회 바로 알리기 위한 불광사 토요 시위에 많은 불광 형제분들이 동참하셨습니다.
우 리 는 횃 불 이 다. 스 스 로 타 오 르 며 역 사 를 밝 힌 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
첫댓글 절대진리라 할 법이 없다는 효림스님의 금강경 법문은 참으로 귀한 법문입니다
법회일지 작성하신 마음님, 법문 풀어 적으신 청명님, 그리고 법회 곳곳 사진 찍으신 원각화님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_()()()_
불광 일지 편집하시느라 애쓰신
*마음님, 미디어팀, 녹취팀* 보현보살
행원으로 청명거사님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