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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13 -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군의 남진으로 여러차례 전쟁을 벌이다!
오스만 제국은 1683년 2차 빈 포위전에서 패해 후퇴한후 오스트리아와 폴란드 및 독일등 세력이
추격해 헝가리와 세르비아 등 많은 영토를 잃었으나 사부아 공자 외젠이 지휘한 1716년 -
1718년 전쟁을 제외하면 오스만은 균형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이며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베네치아에게 뺏긴 모레아, 러시아(루스 차르국) 에게 뺏긴 아자크를 15년도 안되어 회복하고 오스트리아
에게 뺏긴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일부도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1739년의 벨그라드 조약에서
회복하니 전선은 도나우강 - 카르파티아 산맥 - 드네스트르강 - 남부 우크라이나 선으로 안정화되었습니다.
제국의 전성기 시절에는 흑해 일대와 남동유럽(발칸반도) 전체, 헝가리,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캅카스의 아르메니아,
아라비아 반도 남부 예멘까지 세력이 뻗칠 정도로 거대한 영토였으니, 3개 대륙에 걸친 대제국이라는 묘사로
회자되는데... 동로마 제국 분할 당시를 중심으로 영토가 추가된 형태로 전체 로마제국의 영토보다 좀 더 넓었습니다.
전성기이면서도 기독교 세계와 대립이 절정에 이른 16세기 후반~ 17세기 초중반에는 북쪽 헝가리,
우크라이나에서 직접 대결뿐만 아니라 동쪽 인도네시아의 아체 지방에서 포르투갈과
대립하는 현지 무슬림 소국들에 병력과 무기를 지원해 주고 포르투갈이 점령했던
무스카트를 정복했으며 1650년에 건국된 무스카트 술탄국은 오스만 제국의 속국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남쪽 소말리아 해안에서 역시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는 기독교 왕국 에티오피아에 맞서 무슬림 아달
술탄국을 지원해 에티오피아를 멸망시킬뻔 했을 정도이며, 수니파 이슬람권의 큰형님 노릇을
하기도 했으니 영향력은 스페인 제국 내부의 모리스코 (가톨릭으로 개종한 무슬림) 인들에게도 미쳤습니다.
스페인 제국은 모리스코 공동체에 미치는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을 우려했고, 모리스코인들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졌으니 1567년 모리스코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때 오스만 제국은 무기와 병력을 지원했으며
1522년 로도스 공방전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침략이 수시로 행해졌습니다.
몰타 공방전에서 구호기사단이 승리하기 전까지 이탈리아는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할 것을 우려해야 했으니,
오스만 제국이 시들해진 19세기에도 칼리프국이라는 영향력이 남아 있었는지 청나라의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서 독립을 시도했던 야쿱 벡이 오스만과 수교하며 에미르로 인정받고 군사고문 파견을 요청했습니다.
16세기초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이 온 유럽을 휩쓸때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견제하기 위해
기독교 세계의 적이자 이교도인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고,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는 멸망
직전까지 몰린 이후 청야전술같은 극단적인 방어에 급급할 정도로 오스만 제국에 밀리는 형세였습니다.
또한 북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오스만 제국이 정복하지 못했던 모로코의 사드 왕조는 1545년
술탄이 전쟁 포로로 잡혀가는 등 정세가 혼란스러워지자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며 동맹을 맺었고 오스만 제국은 모로코의 술탄을 교체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뿐만아니라 북아프리카 내륙에 이슬람 토호국들, 몰디브나 인도의 이슬람 제후국들, 소말리아의 무슬림
국가들과 인도네시아 아체의 지원 요청을 받고 원정군을 보내주기도 했는데 대부분 포르투갈
인들과의 갈등 때문이었으니 인도양의 무역 루트를 둘러싼 이슬람- 가톨릭 세력의 갈등으로 보기도 합니다.
오스만제국의 행정 구역은 1867년 최상위 행정구역이 에얄레트(Eyalet) 에서 빌라예트 (Vilayet)
로 변하니, 에얄레트는 베일레르베일리크 (Beylerbeylik) 라고 했는데, 1365년 오스만
제국령 남동유럽을 통째로 '루멜리 에얄레트 (Rumeli Eyalet)' 로 묶은 것이 시초로 여겨집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남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는 있었지만 아나톨리아 반도와의 사이에 동로마
제국 영토가 놓여 있어 소통이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루멜리(유럽) 전체를 지방
행정구역으로 묶어 관리하려던 것으로 이후 바예지트 1세가 루멜리로 군사 원정을
떠나면서 아나톨리아 반도도 아나돌루 에얄레트 (Anadolu Eyalet) 라는 이름으로 묶이게 됩니다.
1398년에 아나톨리아 동부 튀르크계 에레트나 공국을 멸하고 룸 에얄레트(Rûm Eyalet) 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15, 16세기까지 메흐메트 2세, 셀림 1세, 쉴레이만 1세 등이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이면서 에얄레트가
계속 설치되니 에얄레트는 데브시르메 제도로 선발된 베일레르베이 (Beylerbey) 라 불리는 총독이 관할했습니다.
1878년 당시의 오스만 제국의 빌라예트 체제 곧 지방 행정 구역은 오늘날 거의 정확하게 이라크
(무술, 바으다트, 바스라 빌라예트), 이집트(므스르 헤디브령), 리비아
(트라블루스가르프 빌라예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보스나 빌라예트) 전신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빈 2차 전투의 실패와 젠타전투의 패배로 오스만 제국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니..... 1768~
1774년의 러시아 - 튀르크 전쟁 부터 상황이 급변했는데, 알렉산드르 수보로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와 도나우강 하구, 캅카스 일대에서 오스만군을 박살내기에 이릅니다.
바다에서는 지브롤터를 돌아온 러시아 제국 해군의 발트함대가 오스만 함대를 격파한 1770년의 체슈메 해전을
계기로 러시아 제국 해군이 오스만 제국의 앞바다인 동지중해를 헤집고 다니는등 이전의 전쟁들과
차원이 다른 처참한 패배를 당했고 결국 굴욕적인 내용의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스만의 제1번국인 크림 칸국에 허구헌날 노예사냥을 당하는 신세(크림 칸국은 모스크바를 점령해 불바다로 만들고
10만명을 납치하기도 했음!) 였던 러시아가 급격하게 성장해 처참한 패배를 안기고 그 제1번국을 집어
삼키고 그동안 오스만의 호수였던 흑해에서 오스만을 위협하기 시작했다는 현실에 오스만 지도부는 충격을 받습니다.
결국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을 계기로 쇠퇴중인 오스만의 현실에 전국가적인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개혁을
통해 제국의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부던하게 노력하는데...그러나 그러한 노력도 무색하게 19세기~ 20세기
초에 걸쳐 오스만 제국은 거의 일방적으로 무너지면서 '유럽의 환자' 로 불리며 조롱당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근대화의 흐름에서 뒤쳐지는 동안, 러시아 제국은 18세기부터 서구화된 군사 제도를 도입
하며 계속 팽창했으니 부동항을 얻는 것을 지상 과제로 내세운 러시아는 발트 해로의 진출을 꾀합니다.
하지만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의치 않자 흑해와 지중해로의 진출을 전격 시도하기에 이르니,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는 러시아의 시도가 자신들과 한판 벌이겠다는 말과도 같았고, 결국
자국의 영토가 짓밟히는 것을 두고 볼수 없었던 오스만 역시 러시아와 전면전을 벌이게 됩니다.
러시아는 국력에서 이미 오스만을 압도하고 있었기에 오스만 제국과 수차례의 러시아-튀르크 전쟁
을 벌였으며, 이 중 대부분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오스만 제국의 많은 영토를
빼앗았으니 이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흑해와 카스피해, 캅카스 방면의 영토를 상당수 잃게 됩니다.
동유럽 주민들도 유럽과 러시아 도움으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하는 바람에 인구와 영토가 크게 약화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게다가 유럽 국가들에게는 항상 어찌 못하고 쩔쩔매는 처지가 되어버린 탓에 유럽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한 시대의 강자는 "유럽의 환자" 라고 까지 불리며 조롱당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연이은 정복으로 인해 비대해진 제국을 지탱하기 위해 쉴레이만 1세는 사법 제도의 정립과 예니체리의 확대
등 여러 관료주의적 개혁을 진행했는데, 이것은 관료제의 비대화를 불러왔으며,
또한 제국의 창건자 오스만을 도와 개국 공신으로 활약했던 가지 세력은 이 시대에 이르러 완전히 몰락합니다.
메흐메트 2세 시대부터 쉴레이만 치세 초기까지 데브시르메 징집자 세력이 여당, 옛 개국 공신 세력이 야당으로
서로 정치적으로 견제하며 황제에 대한 충성을 경쟁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데브시르메 징집자가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두 세력을 서로 견제시키면서 전제군주로 군림해 온 황제의 입지가 애매해 됩니다.
쉴레이만 1세 치세에 하렘 출신 황후의 정치적 위상이 격상되었는데, 본래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쉴레이만
대제 이전까지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으나, 쉴레이만 1세가 우크라이나 출신 노예였던
휘렘 술탄을 정식으로 황후로 책봉하고 결혼하게 되면서 오스만 제국에 하렘 출신 황후들이 생겨납니다.
쉴레이만 사후 무능한 술탄이 줄줄이 등장했고, 태후들이나 황후가 실질적으로 술탄 자리에 오르면서 절대
군주적 위상은 바닥으로 추락했으며, 술탄들이 무능한데다가 하렘의 후궁들과 향락에 빠져 사니
정치가 제대로 될리가 없었으니.... 1주일에 4번 있었던 국무회의를 쉴레이만 1세 이후의
술탄들은 1번만 참석하거나, 나중에는 참석하지 않고 재상에게 회의를 주재하며 다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다.
황후와 태후들, 거기에 황녀들의 힘이 강해져 이들이 나랏일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으니, 휘렘 술탄이 쉴레이만 1세와 결혼을 하고 황후로 책봉된 1534년부터 투르한 하티제 술탄
권력이 쾨프륄뤼 가문으로 넘어간 1656년까지 기간을 여인들의 왕조 (Kadınlar Saltanatı) 라고 부릅니다.
스페인령 아메리카발 물가 혁명이 오스만 제국에까지 영향을 주기 시작하자 끊임없는 전쟁으로 피폐화된 오스만
제국의 경제는 부담을 버틸 수가 없었으니, 정복지의 지주 계급으로 군비의 절반 가까이 지탱하던
티마를르 시파히들이 감당못해 몰락하자 티마를르 시파히들이 부담하던 군비도 중앙에서 전부 떠안아야 했습니다.
끝없이 지속되는 전쟁으로 재정 출혈은 오스만 제국이 감당할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는데, 다만 대포를 비롯한
화기의 발달로 기병의 중요성이 줄어들고 보병이 대두되자, 오스만 제국 내에서도 티마를르 시파히의
수를 줄이고 봉토를 중앙 정부가 몰수해 거기서 나오는 세금으로 상비군을 갖추는게 낫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티마를르 시파히가 가지고 있던 봉토를 정부 소유로 돌리는 과정에서 예니체리들이 문제를 일으
켰으니..... 이 위기는 쉴레이만 1세의 정책으로 막강한 정치 권력을 손에 쥔 이후
경제권 까지 넘보기 시작하던 예니체리 계급에게는 세력 확장에 있어 오히려 도움이 되었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예니체리들은 줄어든 수입만큼 뱃속을 채우기 위해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던 무력' 으로 토지를
강탈하는등 더러운 짓을 했는데, 오스만 제국의 세수는 대부분 농토에서 나오는 것이었으므로 특권층인
예니체리들이 토지를 집어먹는 만큼 오스만 제국의 재정 위기는 심화하여 통화가 평가 절하될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무라트 3세때인 1585년 오스만 제국은 태후 사피예 술탄과 관료들의 주도로 공용 화폐였던 "악체(Akçe)화"
의 평가절하를 결정했으니, 15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순은 100%이던 것이 15세기 후반에 이르면 은 함유율
80% 로 떨어졌고, 다시 백 년이 지난 1600년에는 34% 로 급락했으며 다시 백년이 지나 1700년이 되면
15%, 또 1800년에는 6%. 더는 버틸수가 없게 된 오스만 제국은 결국 1687년에 쿠루쉬 (Kuruş) 를 도입합니다.
이 쿠루쉬화는 120악체 = 40파라 = 1쿠루쉬의 가치를 가졌으며, 이후 1843년 1월 5일, 100쿠루쉬 (=400파라 =
1200악체) 의 가치를 가진 금화인 튀르키예 리라화가 도입될 때까지 법정 최고액 통화였으니 이후 1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은 인플레이션을 맛보았고, 쉴레이만 1세 사후 20년 만에 오스만 제국은 차츰 멸망을 향해 나아갑니다.
수치상 급료가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악체화의 가치가 폭락하다 보니 실질적으로는 예니체리
들의 급료가 줄어든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이로 인해 이들은 떨어진 수입에 반발해
폭동을 자주 일으키게 되었고, 무력을 뒷바탕으로 상공업 분야에 손아귀를 뻗치기도 했습니다.
예니체리들은 오스만 제국을 일종의 폴란드식 귀족 공화국으로 만들어 술탄을 쥐고 흔들며 입맛에
맞게 갈아치우기 시작했는데..... 이는 모든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개혁
시도를 무력으로 중단시켰던 폴란드의 귀족들 처럼 나라를 망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사파비조 페르시아와 전쟁에서 획득했던 영토중 타브리즈등은 페르시아의 반격으로 돌려줬는데, 군세에서는
오스만이 압도적이지만 페르시아는 찰디란 전투의 패배 이후 전면전으로 나서지 않고 게릴라전으로
괴롭히니 보급이 딸리고 서유럽, 러시아와도 전쟁하던 오스만으로서는 페르시아와 전쟁을 계속할수 없었습니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그나마 획득한 영토도 유지를 못 했고 영토를 되찾으려는 페르시아와의 끝없는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었는데...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이 시기의 영향으로 중세 시대의 영광을 이어갈 수 없게 됩니다.
동유럽 영토는 가혹한 세금과 통치를 일삼는 오스만을 증오하여 틈만 나면 반란을 일으켰으니, 헝가리는 수탈과
전쟁으로 수백년 동안 풍요로웠던 옥토가 황무지로 변해버리면서 오스만 제국의 최대 골칫거리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달마티아와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에서 넘어오는 약탈자들과 해적들에 의해 피폐해집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오스만 제국의 재정 악화를 메우기 위한 세금을 가혹할 정도로 높게 매겼기 때문이니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 근본주의로 통치한 것은 아니기에 종교가 원인은 아니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중심
민족인 튀르크인은 애초부터 이슬람과 거리가 먼 세속적인 민족이라 제국내의 타종교에 대해 관대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마르마라해 연안에서 탄생했는데, 이 바다는 공해와 거의 단절되다시피 한 내해로
역내의 문화적 통일성을 촉진한다는 측면에서 강의 기능을 할 만큼 작으면서도
상당한 규모의 교역을 가능케 할 만큼 컸으며 게다가 마르마라 해는 고립된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북동쪽으로는 흑해, 남동쪽으로는 에게해와 동지중해를 면하고 있었는데, 오스만 제국은 탁월한 해상력
을 발휘해서 이 세 내해를 모두 지배했으며, 유럽 최대의 강인 다뉴브 강
하류는 흑해로 흘러 들어가는데, 오스만 제국은 이를 이용해 유럽 북쪽으로 빈까지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당시의 기준으로 오스만 제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그리고 유럽의 경쟁국들을 모두 합한 것 이상으로,
비옥한 토지와 강과 바다를 쉽게 이용할 여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무역도 한몫 했으니, 명당인
코스탄티니예(이스탄불)를 근거지로 오스만 제국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이루어지는
육상과 해상 무역, 그리고 흑해에서 지중해로 이어지는 육상과 해상 무역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후추, 생강, 계피, 정향, 육두구, 메이스(mace, 육두구 껍질을 말린 향료), 커민, 사프란
등등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크게 호사스러운 품목이 아니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이 향신료들은 오직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만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해상 운송은 믿을만한 수단이 아니었고, 지도조차 없었던 때 아프리카 대륙에 믿을만한 물길은 없었으니,
아시아 지역의 향신료를 손에 넣을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
중앙 아시아, 페르시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이 장악한 영토를 가로지르는 방법 뿐이었습니다.
수백명의 중간 상인들이 관여하며 엄청난 거리를 이동해야 했고, 오스만 제국이 기독교가 지배하는 유럽으로 향하는
향신료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유럽 상류층은 식량에 소비하는 만큼의 비용을 향신료를 사는데
쏟아부었으니, 아랍의 산유국들이 오일 달러를 벌어들이듯 향신료 교역을 통해 엄청난 규모의 부가 이전되었습니다.
이렇게 오스만 제국은 지구상에서 최적의 전략적인 요충지에 위치해 있고, 유럽에서 가장 긴 강에 접근 가능했으며,
적당한 규모의 3개의 내해와 접해 있고, 당대의 가장 수익성 높은 교역로의 혜택을 톡톡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15세기와 16세기에 패권을 장악하려고 애쓰는 동안, 제국 밖에서
일어난 기술 혁명은 인간과 인간이, 나라와 나라가 서로 교류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지리를 이용하는 방식까지도 바꾸고 있었습니다.
이베리아 국가들은 향신료 무역에서 오스만과 위험들을 피해갈 방법을 찾았으니 원양 항해였는데,
이 과정에서 아프리카 항로와 신대륙의 발견이 일어났고, 접근 가능한 영역이 확장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대서양을 건너 서반구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아메리카 대륙의
금과 은은 스페인이 서유럽 제국들 가운데 막강한 제국으로 부상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구세계에서 천대받았던 땅이 신세계에서 번성하기 시작했으며 신기술은 마르마라해를 지구상에서 풍요롭고 안전한
지형에서 낙후된 지역으로 변모시켰고, 따라서 오스만 제국은 서서히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으니, 나침반과
포문(砲門) 같은 신기술들이 발명되면서 죽음을 무릅써야 가능했던 해상 운송의 성격은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오스만 제국은 오늘날 폴란드-우크라이나 변경 지대 포돌리아나 아제르바이잔 같은 제국의 끝자락이요
국경지대 각축장을 제외하고는 한번 점령한 지방은 백년은 넘게 장기적으로 통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확장의 한계점 끝자락이자 최전방 전선이었던 헝가리만 하더라도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승전하고부터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150년 이상 영유했고,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같은 유럽 내 핵심 지방들은 14-15세기에서 19세기까지, 거진 4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통치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몽골 제국과 더불어 유럽에 공포를 느끼게한 단 둘뿐인 제국인데다가 메흐메트 2세, 쉴레이만 1세 등
명군이 활약한 이야기는 세간에 유명하니 유럽사에서 악의 축이나 마왕 같은 이미지로서, 서로 전투를 벌이던
유럽 국가들이 오스만제국이 상대라면 신성 동맹 등 기독교적 명분아래 한 뜻이 되어 연합군을 편성하기도 했습니다.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악명은 고대 그리스에서 아케메네스 제국에 대한 악명과 비슷했으니, 유럽
국가들뿐만 아니라 같은 이슬람이고 튀르크계 국가이기까지 한 카라만 베이국, 백양 왕조,
사파비 제국, 맘루크 왕조도 다같이 유럽 국가들과 손을 잡고 오스만 제국에게
대항하려 했을 정도로 19세기에 러시아가 부상하기 전까지 유럽 세계 공공의 적은 오스만 제국이었습니다.
수많은 민족들과 나라들이 난립해서 항상 어지러운 중동, 북아프리카, 동유럽에 위치한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오래
존속한 제국이니 무려 6백년 넘게 존속했으며 게다가 초기 수도 부르사와 에디르네는 번영했고 몇몇
술탄이 문약한 성격이거나 모후들이 권력을 휘두르거나, 예니체리 친위대에게 왕권이 농락 당한
예외적인 경우들을 제외하고는, 이슬람 제국 중 독보적으로 오랫동안 안정적인 왕권을 휘두른 나라입니다.
예니체리의 엘리트 군사 조직으로서의 정체성이 붕괴하고 군벌화가 촉진됨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은 약화
되는데..... 예니체리들의 전투력 쇠퇴로 생긴 공백은 흑해 북쪽에 세워진 크림 칸국의 군사력이 대신하게 됩니다.
이 관계는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에서 오스만 황제와 크림 칸의 유대 관계가 끊어지기 전까지 계속되었으니,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 18세기말 오스만 황통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자 이를 계승할 후보로 크림 칸이 대두되기도
하였는데 군주는 하즈 1세 기라이(1441~1456)부터 48대 샤힌 기라이(1782~1783) 까지 320년간 이어졌습니다.
러시아가 허약했을 때 크림 칸국이 수세기 동안 동유럽을 습격해 수백만명에 달하는 정교회 신도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버리면서 화를 자초한 것도 있었으니 크림 칸국 정복은 타타르의
멍에의 마지막을 잘라내는 것이었으니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과 충돌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크림칸국은 1430년에 킵차크 칸국의 후손 하즈 게라이가 세운 국가로 오스만의 번국이었으며 러시아제국에 망하기
전까지 오스만의 비호를 받던 나라니 1771년에 러시아-튀르크 전쟁후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보낸
러시아 제국군이 정복할 때까지 하지 게라이의 가문이 통치했으니 우크라이나 남부와 크림반도 인근을 지배했습니다.
크림 칸국과 오스만 제국의 관계를 깨뜨린건 러시아 제국이니, 겨울에도 얼지않는 항구 즉 부동항을
찾아 헤매던 러시아는 처음에는 발트해에 관심을 보여 대북방전쟁으로 스웨덴을 무너
뜨리고 발트해 연안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잉그리아 등을 얻었으나 추운 북쪽의
기후상 결빙일수가 있어 한계가 있던 발트해 보다 흑해로 눈을 돌려 크림 칸국을 정복하기로 합니다.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보다 약했으나 표트르 대제의 서유럽화 정책에 의해 유럽 국가로 변모하며 국력을
키워 나갔으며, 크림 칸국이 수세기 동안 동유럽을 습격해 수백만명에 달하는 정교회 신도
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버리면서 화를 자초한 것도 있었으니 크림 칸국 정복은
타타르의 멍에의 마지막을 잘라내는 것이었으니 오스만 제국과의 충돌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의 도발로 인해 오스만 제국이 맞서게 되니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시작이었는데 하지만
1768년에서 1774년까지 계속된 7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니 패배하니
1774년 러시아와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을 체결하여 카파를 할양하고 크림 칸국의 독립을 인정합니다.
1783년 4월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는 크림 칸국을 무력으로 정복하니 오스만 제국은 조약 위반이라며 항의했지만,
러시아는 총칼로 답변해 1787년부터 1792년까지 8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벌어지나 오스만 제국이 패배했고,
1792년 이아시 조약을 체결해 러시아의 크림 칸국 병합을 인정하고 추가로 예디산 지역을 러시아에 할양합니다.
크림 칸국의 48대이자 마지막 칸으로 서유럽식 군제 개혁을 시행하는등 나름대로 개혁에 힘썼던 샤힌 게라이의 최후
도 비극적이었으니, 1783년 크림 칸국이 무너지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끌려가 1787년까지 감금당했다가
고향인 에디르네로 귀향했지만 러시아군을 끌여들였다는 죄목으로 오스만에 의해 체포되어 로도스에서 처형당합니다.
크림 칸국이 무너진 이후 크림 타타르인들은 러시아 제국 정부와 중간관리자로 파견한 카잔의 볼가 타타르
관리들 사이에서 이중고를 겪으며 19세기에 들어 시베리아나 캅카스, 중앙아시아등
러시아 제국의 변방이나 오스만 제국령인 도브루자로 강제추방 당하는 등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크림 타타르인들이 떠난 자리는 러시아인이 대신해 크림 반도를 차지했으며 러시아 혁명후 등장한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기에 위험 민족으로 낙인찍혀 민족 전체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고 이 과정에서 1/4 정도가
굶어 죽거나 동사하는 큰 참화를 겪어야 했으며 살아남은 이들 중 절반도 열악한 조건 하에 강제 노역으로 사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