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선원 조실 성수스님
성수스님은 1923년 경남 울주에서 태어나
44년 부산 내원사에서 성암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후
48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67년 조계종 총무원 포교부장에 이어 조계사· 범어사· 해인사·
고운사 주지 등을 역임했고, 78년 세계불교지도자 대회(일본주최)
한국 대표, 81년 조계종 총무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이며,
경남 산청 해동선원 조실로 주석하고 있다.
“불교 바로 알면 본래 자기 살리는 길 열려”
죽비를 세 번 치는 데는 도와 진리와 선이 담겨져 있습니다.
처음 내리는 죽비에는 탐심(貪心)을 버리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두 번째는 진심(瞋心)이 무너지라는 뜻이 담겨 있고
이를 듣는 청중도 그 마음을 버릴 수 있도록 진심으로 발원해야 합니다.
세 번째 죽비는 치심(痴心)이 사라지게 하는 소리이며
그 소리를 듣는 이도 지극함으로써 그 마음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탐심과 진심을 만들어내는 것은
곧, 어리석은 치심임을 알아야 합니다.
치심 때문에 사바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49년 동안 설한 말씀은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쉬라는 것입니다.
중생심은 전부 욕심으로 생겨나고,
욕심은 어리석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나니
중생심을 버리고, 놓고, 쉬어야 합니다.
그 세 가지만 다 놓아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극락세계요 열반세계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하지만 어떻게 해야 결실을 맺을까요?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인연토를 만나서 싹을 틔워야 합니다.
씨앗의 눈이 트이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땅을 만나도 필요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지식이 한번 꽝하고 쳐주면 눈이 번쩍 떠집니다.
눈이 밝아지면 천하의 만물은 선이 아닌 게 없고
세상만사가 도 아닌 게 없으니, 발길에 채이는 게 도이고
눈이 보이는 게 다 진리입니다.
그러니 진짜 선지식을 찾아가서 “생로병사 그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무릎이 닳도록 사정하고, 애원해야 합니다.
부처님을 따라한다는 것은
남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령 자고 일어나서 만나는 집안 식구들에게 웃는 얼굴에
넉넉함을 담고 인사를 건네면 나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아침 기분도 좋아지게 마련입니다.
내가 좋고 남이 좋은 행동,
그것이야말로 바로 부처님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한번이라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득이 되고 복이 되는 말을 부처님처럼 흉내내보길 바랍니다.
직접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원효 대사께서는 “살 때 살 줄 알아야 살고, 죽을 때 죽을 줄 알아야
올바르게 죽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살생’의 의미는 2000년 전 중국인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정해놓은 계율인데 우리나라는 승속간에 죽이지 말라고 하지만
‘불살생’의 진정한 의미는 ‘죽지 말라’는 것입니다.
안 늙고 안 죽는 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불살생’입니다.
늙지 않고, 아프지 않고. 죽지 않는 법을 가르쳐 주는 곳이 절입니다.
안 늙고 안 아프고 안 죽는 법을 배우러간다는 것이
분명히 서면 물을 말이 많겠지요.
일주문에 들어갈 때도 왜 일주문이냐?
기둥 두 개로 문을 세워놨기 때문에 일주문입니다.
내 목적, 포부와 기대, 희망 등 중심이 선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인 것입니다.
중심이 흔들리는 사람은 일주문에 들어갈 자격이 없지요.
또 대웅전이 무슨 뜻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마음속의 8만4천 번뇌를 다 항복받은 완전무결한 분이
계신 곳이 대웅전입니다.
그러니 대웅전에 들어갈 때는 8만4천 번뇌를 다 떼어놓고 들어가야지,
그걸 가지고 들어가는 사람은 법당에 천만년 들어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뜻을 알고 가더라도 번뇌가 떨어지지 않았으면
법당 문을 열지 말고 울어야 합니다.
자기가 아는지 모르는지, 되는지 안 되는지를
확실히 검토해서 들어가면 부처님과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영생불멸(永生不滅)하는,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진아(眞我) 세계에서 사는 어른하고 대화가 되면
천하만물(天下萬物)은 무비선(無非禪)이요,
세상만사(世上萬事)는 무비도(無非道)입니다.
천하에 선 아닌 게 없고 세상만사는 도 아닌 게 없는
재미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가서 무너지고, 두 번 가서 눈물을 흘리고,
세 번 가서 물어보는 등 발심을 분명히 하고 끝까지 밀어붙여야 합니다.
도사가 되고 싶으면 도사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도사가 되느냐 묻고 배워야 되고,
어른이 되려면 어른 짓 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묻고 배울 게 참 많죠. 도를 배우러 왔으면
도를 배워서 알고 찾아야 되는데 도를 모르고 도 닦는다고 앉아 있으니
도를 묻고 배우려는 이가 없습니다.
불공 기도하는 것이 불교가 아닙니다.
안 늙고 안 아프고 안 죽는 것 배우는 것이 불교인 것입니다.
불교를 바로 알면 비로소 진정 사는 길,
즉 자기가 자기를 죽이지 않는(不殺)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불자님들은 내가 왜 절에 오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헛것입니다.
부처님이 쉽게 삶의 이치를 얘기해 주는데
어렵게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옛날 중국의 양무제가 절을 수천 개를 짓고
금탑을 여러 군데 쌓고 했는데도
달마대사가 좋은 일을 많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양무제가 “중국 천하에 절을 많이 지었는데
내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하고 달마대사께 물으니까
‘소무공덕(所無功德)’이라 했어요. 터럭만한 공덕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상을 내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진짜 열반상을 구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원효대사 말씀에 ‘올 때는 빈손으로 오고 갈 때도 빈손으로 가니
진짜 가져갈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일생에 잘못한 업을 지고 간다’고 했습니다.
눈만 깜빡해도 의미를 알아 인식하는 것이 화두입니다.
말의 알맹이를 척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불교가 융성하려면 불자들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불법은 깨달음을 얻을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20년, 30년, 60년을 살아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다면 삶을 헛산 것입니다.
보살과 거사들의 도가 철철 넘쳐나는 사자새끼가 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생사고해를 넘고자 하면 천하를 쥐고 흔들 수 있는
그런 기백과 용기와 분심(憤心)이 충만해야 합니다.
나와 내가 만나면 딸이 어머니 만나는 것보다,
아들이 아버지 만나는 것보다, 어느 누구를 만나는 것보다도
그렇게 좋고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나를 외면하고 다른 물질 환경에만 끌리고 팔려서
허덕허덕하다가 진흙탕에 빠지면 어느 누가 건져 주겠습니까?
내 손으로 밥을 먹고 내 발로 걸어 다닐 때 설 땅이
어디 있는지 한번 살펴봐야 됩니다.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 전에 해결하겠다는
단호한 결심을 가지고 불도는 왜 닦아야 하는지,
또 누구를 위해서 닦고 무엇 때문에 불도를 닦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물쭈물 미루다 보면 수만 겁이 지나도
불도와의 거리가 멀어질 뿐입니다.
그래서 발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발심을 하고 나면
‘쇠뿔을 단김에 빼라’는 속담처럼 대분심(大憤心)이 필요합니다.
불도는 익혀서 연습하는 게 아니고
‘이것이냐’ 혹은 ‘저것이냐’를 일도양단하는 것입니다.
1초도 늦추지 말고 용기와 분심을 내어
수미산을 뛰어넘어야 비로소 불도의 맛을 조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강승오 기자
2005. 11. 25
제주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