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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 國 時 代
趙(조)
조나라 조씨는 秦(진)나라와 같은 嬴(영)성이다. 蜚簾(비렴)의 장남 惡來(오래)의 후예가 秦
(진)나라, 차남 季勝(계승)의 후예가 趙(조)나라의 조상이 된 것이다.
조씨는 본래 晉(진)나라의 신하였지만 진 문공 때 공신인 조쇠의 후손이 한씨, 위씨와 함께
周(주)왕실로부터 공인받으면서 晉(진)의 영토를 분할하여 세운 나라다.
趙 王 朝 世 家
전국시대 趙(조) BC. 403∼BC. 228 위치 하남. 하북 성: 嬴(영) 작위 자작
(삼진분립 전. 晉(진나라 신하)
| 代數 | 在位期間 | 位 | 諱 | 關係 | 首都 | 現地在名 |
| 제1대 | BC. 636∼BC. 622 | 成子(성자) | 衰(쇠) | 邯鄲(한단) | 河北省 邯鄲 | |
| 제2대 | BC. 621∼BC. 601 | 宣子(선자) | 盾(돈.순) | 성자의 아들 | 하북성 한단 | |
| 제3대 | BC. 600∼BC. 597 | 莊子(장자) | 朔(삭) | 선자의 아들 | ||
| 제4대 | BC. 583∼BC. 541 | 文子(문자) | 武(무) | 장자의 아들 | ||
| 제5대 | BC. 540∼BC. 518 | 景子(경자) | 成(성) | 문자의 아들 | ||
| 제6대 | BC. 517∼BC. 476 | 簡子(간자) | 鞅(앙) | 경자의 아들 | ||
| 제7대 | BC. 475∼BC. 425 | 襄子(양자) | 毋卹(무휼) | 간자의 아들 | ||
| 제8대 | BC. 424∼BC. 424 | 桓子(환자) | 嘉(가) | 양자의 아들 | ||
| 제9대 | BC. 423∼BC. 409 | 獻子(헌자) | 浣(완) |
삼진분립 후
| 대수 | 재위기간 | 위 | 휘 | 관계 | 수도 | 현재지명 |
| 제1대 | BC. 408∼BC. 400 | 列侯(열후) | 籍(적) | 헌자의 아들 | ||
| 제2대 | BC. 399∼BC. 387 | 武侯(무후) | ? | 열후의 동생 | ||
| 제3대 | BC. 386∼BC. 375 | 敬侯(경후) | 章(장) | 열후의 아들 | ||
| 제4대 | BC. 374∼BC. 350 | 成侯(성후) | 種(종) | 경후의 아들 | ||
| 제5대 | BC. 349∼BC. 326 | 肅侯(숙후) | 語(어) | 성후의 아들 | ||
| 제6대 | BC. 325∼BC. 299 | 武靈王(무령왕) | 雍(옹) | 숙후의 아들 | ||
| 제7대 | BC. 298∼BC. 266 | 惠文王(혜문왕) | 何(하) | 무령왕의 아들 | ||
| 제8대 | BC. 265∼BC. 245 | 孝成王(효성왕) | 丹(단) | 혜문왕의 아들 | ||
| 제9대 | BC. 244∼BC. 236 | 悼襄王(도양왕) | 偃(언) | 효성왕의 아들 | ||
| 제10대 | BC. 235∼BC. 228 | 幽穆王(유목왕) | 遷(천) | 도양왕의 아들 | ||
| 제11대 | BC. 227∼BC. 222 | 代王(대왕) | 嘉(가) | 도양왕의 아들 |
조나라 조씨는 秦(진)나라와 같은 영성이다. 시조는 蜚簾(비렴)이며, 그는 두 아들을 두었
다. 장남의 이름은 惡來(오래)라 지었다. 오래는 은나라 주를 섬기다가 주나라 백성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후손이 秦(진)나라의 선조가 되었다.
오래의 동생 이름이 季勝(계승)이다. 그 후손이 조나라의 선조가 되었다. 계승은 孟增(
맹증)을 낳았다. 맹증은 周 成王(주 성왕왕)의 총애를 입었다. 그가 宅皐狼(택고랑)이다.
택고랑은 衡父(형보), 형보는 조보를 낳았다. 趙父(조보)는 周 穆王(주 목왕)을 섬겼다.
그는 말을 잘 몰았고 목왕을 태우고 전국을 순시하고 또 목왕을 위기에서 구한 일도 있
어 그러한 공으로 趙(조)에 봉해졌으며 그로써 성을 조씨라 했다. 조보로부터 6대 후손
인 奄父(엄보)는 자가 公仲(공중)이다. 엄보는 叔帶(숙대)를 낳았다. 숙대는 周 幽王(주
유왕)이 황음무도하자 晉(진)나라로 가서 진 文侯(문후)를 섬겼다. 이로써 진나라에서 조
씨 가문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5대를 지나 조숙대에 이른다
춘추시대에 趙夙(조숙)이란 사람이 晉(진)나라를 섬겼다. 조숙은 共盟(공맹)을 낳고 공맹
은 趙衰(조쇠)를 낳고 자를 자여라 했다.
제1대 성자 쇠(BC, ?〜BC, )
진 헌공 21년(기원전 656년), 그는 공자 중이가 여희의 무리 때문에 몸을 피하자 그를
따라 유랑을 마다하지 않았다. 중이를 같이 따른 인물은 狐偃(호언), 狐毛(호모). 賈佗
(가타), 魏犨(위주), 胥臣(서신), 介子推(개자추) 등이었다. 진 헌공 22년(기원전 655년),
공자 중이와 함께 翟(적)나라 땅에 이르러 결혼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조돈을 낳았다
고 한다. 진 혜공 7년(기원전 644년), 晉 惠公(진 혜공)은 자신이 공자 중이만 못하다고
여겨 발제를 보내 공자 중이를 척살하려 했다. 이에 조쇠가 齊(제)나라로 달아나자고 제
안했다. 공자 중이는 그 말에 동의해 제나라로 가니 원체 대범하기로 이름난 제 환공은
그를 반갑게 맞아들였고, 그 딸을 아내로 주었다. 공자 중이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취해
행복하게 살면서 따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조쇠는 호언 등 참모진 및 齊姜(제강)과 짜
고 공자 중이를 취하게 해서 그를 떠나게 하려 했다. 공자 중이 일행은 송나라에 머물
다가 宋 襄公(송 양공)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는 것을 보고 楚(초)나라로 갔다. 가서 초
나라 楚 成王(초 성왕)에게 몸을 의탁했다. 진 혜공 14년(기원전 637년), 가을 조쇠는
공자 중이에게 秦(진)나라에 가자고 하여 거기에 가서 진 목공에게 의지했다. 진 목공
은 공자 중이를 懷嬴(회영)과 혼인시키고, 그 친분을 바탕으로 晉(진)나라의 후작으로
삼아 주겠다고 약속했다. 진 회공 2년(기원전 636년), 진 목공은 공자 중이와 함께 晉
懷公(진 회공)을 몰아냈다. 그리고 공자 중이 진후가 되니 그가 바로 진 문공이다.
진 문공 원년(기원전 635년), 조쇠가 진 문공에게 패자가 되기 위해 周(주)나라 왕실을
보좌하라고 했다. 진 문공 3년(기원전 633년), 진 문공이 삼군을 편성하자 조쇠가 郤穀
(극곡)을 중군 원수로 추대했고, 郤臻(극진)에게 그를 보좌하라 했다. 호모를 상군장, 호
언을 상군좌, 欒枝(남지)는 하군장, 선진은 하군자로 임명했다. 그리고 荀林父(순림보)가
융거를 몰고, 위주는 융우가 되었다. 이듬해 曹(조)나라와 衛(위)나라를 정벌했다.
진 문공 7년(기원전 629년), 진 문공은 신상군, 신하군을 두어 조쇠를 신하군장으로 임
명했다. 진 문공 8년(기원전 628년), 호언이 죽자 그를 대신해 상군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때 진 문공이 소개했다. 진 양공 원년(기원전 627년), 중군 원수 선진이 전사해 先且
居(선저거)가 원수가 되었고, 조쇠는 중군좌가 되었다. 진 양공 6년(기원전 622년), 조쇠
가 죽고 成季(성계)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들 조돈이 후계를 이었다.
제2대 선자(BC, ?〜BC, ?) 조돈 조쇠의 아들이며 조삭의 아버지다.
그는 조쇠와 숙외 사이에서 난 아들이다. 조쇠는 본디 아내가 있었으므로 서자였으나 능
력을 인정 받아 조쇠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 조돈은 양공때 재상을 지내며 많은 치적
을 쌓았다. 진 양공이 죽은 후 일부 대신들이 일곱 살 난 공자 夷皐(이고)를 왕으로 세우
려고 하자 조돈은 이를 반대했다. 하지만 결국 이고가 왕위에 올랐는데 이이가 바로 진
靈公(영공)이다. 영공은 무능하면서도 포악한 왕었다. 조돈은 여러 차례 간언을 했지만
영공은 오히려 조돈을 죽이려고 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조돈은 도성을 떠났다가 얼마
후에 영공이 趙穿(조천)에게 시해되자 돌아와 晉 襄公(진 양공)의 동생 黑臀(흑둔)을 세
웠다. 그가 晉 成公(진 성공)이다. 진 경공 때 조돈이 죽었다. 그의 뒤를 아들 삭이 이었
다.
제3대 장자(BC, ?〜BC, ?) 삭 조돈의 아들이며 조무의 아버지다.
삭이 晉 成公(진 성공)의 손위누이 趙莊姬(조장희)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같은 해에 大夫
屠岸賈(대부 도안고)가 조삭과 趙同(조동). 趙括(조괄). 趙嬰齊(조영제) 등을 죽여 일족을
멸했다. 조삭의 아내는 진 성공의 누나로 당시 임신 중이었다. 진 경공의 궁으로 달아나
숨었다. 도안가는 유복자 조무를 찾아 죽이려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그 후 조무와
함께 程嬰(정영. 삭의 식객)은 도안가를 멸했다.
제4대 문자(BC, ?〜BC, ?) 무 조돈의 손자며 조삭의 아들이다.
15년 후 晉 景公(진 경공)이 병이 나 점을 쳤다. 대업을 이룬 후대가 순조롭지 못해 재
앙이 생긴다는 점괘가 나왔다. 경공이 한궐에게 물었다. 한궐이 모든 사실을 이실직고
하였다. 진 경공은 조씨의 엣 田邑(전읍)을 다시 조무에게 내렸다. 晉 平公(진 평공) 12
년 조무가 정경이 되었다. 진 평공 13년(조무가 죽자 시호를 문자라고 했다.
제5대 경자(BC, ?〜BC, ?) 조무의 아들이며 간자의 아버지다.
조경자가 죽고 조앙이 뒤를 이으니 그가 조간자이다.
제6대 간자 (BC. ?∼BC. 475) 경자의 아들
진 경공 9년. 간자가 정경의 지위에 있었다. 어느날 정나라 출신 관상장가인 姑布子卿
(고포자경)이 조간자를 배견했다. 조간자가 여러 아들을 불러 관상을 보게 했다. 고포
자경이 말했다. “장군이 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조씨가문이 멸망한다는 말이오?
고포자경이 말했다. 제가 길에서 한 어린아이를 보았습니다. 아마 그대의 아들이겠지요
하였다. 조간자가 아들 무휼을 불러다 보였다. “이 아드님이 장군감 임니다“
“이 아이의 어미는 미천한 적나라의 婢女(비녀) 출신이요“ 하자 “하늘이 내려주신 인재
는 비록 태생이 비천하다고 할지라도 나중에는 존귀하게 될것이요“하였다. 이후 무휼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된 간자는 태자 伯魯(백노)를 폐위시키고 무휼을 태자로 삼았다.
진 출공 17년 조간자가 죽자 태자 무휼이 뒤를 이었다.
제7대 양자(BC, ?〜BC, 425) 조간자의 아들이다.
양자 원년 월나라가 오나라를 포위했다. 조양자의 누나는 대왕의 부인이다. 기원전 458
년 조간자가 죽자 무휼이 아버지의 직위를 받았다. 조양자는 아버지에게 선언했던 대로
가장 먼저 대나라를 공격했다. 조양자는 夏屋山(하옥산)에서 대나라의 왕을 초대했는데
이 자리에서 요리사 犖(락)을 시켜서 구리 국자로 대나라 왕과 일행들을 때려 죽인 뒤
대나라로 보냈고 결국 대나라는 조양자의 손에 떨어진다. 조양자는 점령한 대나라를 (자
신 때문에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난) 형 백노의 아들 周(주)에게 위임하니 그가 代成君(
(대성군)이다. 조양자의 제위기간은 33년에 달한다. 조양자에겐 아들이 다섯이나 있었지
만 조카 주를 후계자로 삼았고. 주가 자신보다 먼저 죽자 주의 아들 완에게 가절을 물
려준다. 이 완이 바로 조나라 헌후로 이후 조나라 군주 자리는 헌후의 후손들이 이어간
다.
⁂ 죽은 대나라 왕의 부인은 조양자의 누이였은데 남편이 죽자 대나라에 있던 조양자
의 누이는 비녀로 자기 목을 찔러 자결했다.
제8대 환자(BC, ?〜BC, ?) 조 양자의 동생
조양자가 죽자 완이 즉위했다. 그가 조 헌우다. 조 헌우는 어린 나이에 즉위해 治所(치
(치소)를 中牟(중모)에 두었다. 조 양자의 동생 조 환자가 조 헌후를 내쫓고 대 땅에서
스스로 자리에 올랐으나 1년 만에 죽었다.
제9대 헌자(BC. ?〜BC, ?)
백성들이 조환자의 즉위는 조양자의 뜻이 아니라 여겼다. 함께 조환자의 아들을 죽인
뒤 다시 조헌우를 맞이해 옹립했다. 조헌우 10년 中山國(중산국)의 武公(무공)이 처음
으로 즉위했다. 조헌우 13년 平邑(평읍)에 성을 쌓았다. 조헌우 15년 조 헌우가 죽자
아들 조 열후 적이 즉위했다.
제1대 열후(BC. ?∼BC. 400) 조 헌자의 아들이며 조 무후의 형, 조 경후의 아버지
열후 원년(BC. 408년), 中山 武公(중산 무공)이 삼진을 위협했는데 그중 약체인 조나라
를 쳤다. 이에 조 열후는 魏(위)나라의 군주 文侯(문후)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위 문후는
장수 樂羊(악양. 연나라의 명장 樂毅, 악의의 조상)을 보내 조나라를 구했고 중산에게
빼앗긴 땅을 회복했다. 열후 2년(기원전 407년), 위 문후는 악양과 태자 위격(훗날 위
무후)을 보내 중산국을 멸망시켰다. 그 땅은 위나라에서 멀었으므로 조나라에 돌아갔다.
조 열후 6년(기원전 403년), 주 위열왕은 韓(한)나라. 魏(위)나라. 趙(조)나라를 후작으로
봉해 晉(진)나라는 3개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 위. 조 3국은 삼진으로 불리
게된다. 조 열후는 아버지 조완을 후작으로 추숭하여 조완을 달리 조 헌후라 한다. 조
열후 9년(기원전 400년) 조 열후가 죽었는데 그 아들 조장이 아직 어려서 열후의 동생
이 뒤를 이었다. 그가 조 무후이다.
제2대 무후(BC. ?∼BC. 387) 조완의 아들이며, 조 열후의 동생. 조 경후의 삼촌.
조 무후 13년(기원전 387년), 조 무후가 죽자 사람들은 조 열후의 태자인 조장에게 뒤
를 잇게하니 그가 바로 조 경후다.
제3대 경후(BC. ?∼BC. 375) 조 열후의 아들이며, 조 무후의 조카. 조 성후의 아버지다.
그는 아버지 조 열후가 죽을 때 어려서 숙부 조 무후가 즉위했고 조 무후가 죽자 그 뒤
를 조 경후가 이었다. 조 경후 원년(기원전 386년), 조 무후의 아들 趙朝(조조)가 모반을
일으켰으나 패배해 魏(위)나라로 달아났다. 이때 위 무후가 그것을 빌미로 출병해 邯鄲
(한단)을 쳤으나 위군이 패해 물러났다. 같은 해 도성을 中牟(중모)에서 한단으로 옮겼다.
조 경후 2년(기원전 385년), 조나라는 영구에서 제나라에게 이겼다. 조 경후 3년(기원전
384년), 조 경후는 위나라를 늠구에서 구원하고 제군을 크게 격파했다. 조 경후 4년(기
원전 383년), 위군이 토대에서 조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같은 해 조 경후는 강평에 성을
쌓아 衛(위)나라를 치려했다. 조 경후 11년(기원전 376년), 조 경후와. 위 무후. 한 애후
는 晉 靜公(진 정공)을 축출해 평민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하여 공식적으로는 晉(진)나라
는 멸망했다. 그리고 조. 위. 한이 진나라 땅을 나뉘 가졌다. 같은 해 조 경후가 중산국
을 쳤다. 조 경후 12년(기원전 375년), 조 경후가 죽고 아들인 조종이 뒤를 이어니 그가
조 성후다.
제4대 성후(BC. ?∼BC. 350) 조 경후의 아들이며 조 숙후의 아버지
조 성후 원년(기원전 374년), 公子 勝(공자 승)이 조 성후와 趙侯(조후) 자리를 다투어
반란이 일어났으나 공자 승이 패했다. 조 성후 3년(기원전 372년), 조 성후는 太戊午(태
무오)를 상국으로 임명했다. 조 성후는 衛(위)나라를 쳐서 73개 읍을 얻었다. 조 성후 8
년(기원전 367년), 조나라는 한나라와 함께 주나라를 둘로 나누었다.(그리하여 동주가 또
다시 동주(주공이 다스리는 동주와. 서주 주나라 본가) 조성후 16년, 한나라 위나라 함
께 진나라 영토를 나누어 가지고 晉(진)나라 군주를 端氏(단씨)에 봉했다. 조 성후 21년
(기원전 354년) 양 혜왕이 조나라를 치자 조나라의 수도 한단이 포위되었다. 조 성후 2
2년(기원전 353년), 위나라군이 한단을 점령하자 조 성후는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니
제나라는 손빈을 보내 계릉 전투에서 위나라군을 이겼다. 조 성후 24년(기원전 351년),
위나라는 한단을 돌려주며 장수에서 회맹했다. 조 성후 25년(기원전 351년), 성후가 죽
고 공자 緤(설)이 태자 어와 군주 자리를 다투다가 설이 실패해 한나라로 달아났다. 태
자 어가 조후의 뒤를 이어니 그가 바로 조 숙후다.
제5대 숙후(BC. ?∼BC. 326) 조 성후의 아들이며 조 무령왕의 아버지
조 숙우 원년(기원전 349년), 숙우는 晉 靜公(진 정공)을 端氏縣(단씨현)에서 屯留縣(둔
류현)으로 옮겼다. 조 숙후 3년(기원전 347년), 조나라의 公子 范(공자 범)이 반란을 일
으키고 도성 한단을 습격했다. 조 숙우는 바로 반란 진압에 나서서 공자 범을 주살했다.
조숙우 4년(기원전 346년), 조 숙후는 주나라의 천자 주 현왕에게 입조했다.
숙우 24년(기원전 326년), 조나라. 한나라. 연합군은 위나라의 양동을 포위했다. 조 숙
우는 이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조웅이 즉위하니 그가 호복기사
를 도입해 조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조 무령왕이다.
제6대 무령왕(BC. 340∼BC. 295) 조 숙후의 아들이며 조 혜문왕의 아버지다.
조 무령왕 3년, 鄗(고)에 성을 건축했다. 조 무령왕 5년, 한나라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
했다. 조 무령왕 9년(기원전 317년), 한나라 및 위나라와 더불어 秦(진)나라를 쳤다. 그
러나 진나라는 오히려 삼국 연합군을 격파하고 8만 명의 수급을 얻었다. 조 무령왕 11
년(기원전 315년) 연나라에서 혼란이 일어나 제나라가 연나라를 속국으로 만들 때 조
무령왕은 공자 職(직)을 한나라에서 조나라로 불렀다. 조 무령왕 15년(기원전 311년),
조 무령왕은 공자 직을 연나라로 보내 왕이 되게 하니 그가 바로 燕 昭王(연 소왕)이다.
조 무령왕 16년(기원전 맹요를 왕비로 맞으니 그녀가 바로 혜후다. 조 무령왕 18년(기
원전 308년), 秦 武王(진 무왕)이 구정을 들다 구정에 발을 찧어 죽자, 연나라에 인질로
간 진 무왕의 아우인 영직이 진나라로 가서 왕이 되니 秦 昭襄王(진 소양왕)이다. 조 무
령왕 19년(기원전 307년), 조 무령왕은 호복기사를 도입해 국력을 신장시켰다. 그러나
공자 成(성)이 그것에 복종하는 척했으나 속으로는 불만이 많았다. 조 무령왕 20년(기원
전 306년), 조무령왕은 중산의 도성 영가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흉노를 쳐서 유중에 이
르고 임호왕이 말을 바쳤다. 조 무령왕 21년(기원전 305년), 다시 중산국의 단구, 화양,
치, 호, 석읍, 봉룡, 동원을 치려하니 중산국이 강화를 요청했다. 조 무령왕이 이를 허락
하고 군사를 철수 시켰다. 조 무령왕 26년, 다시 중산국을 쳐서 이로서 탈취한 땅이 북
쪽으로는 연나라, 서쪽으로는 雲中(운중)과 九原(구원)까지 이르렀다. 조 무령왕 27년(기
원전 299년), 맏아들 章(장)을 안양군으로 책봉하고 아들인 조하에게 양위하며 자신은
主父(주보)라 칭하니 그가 바로 조 혜문왕이다. 그 후에도 주보라는 이름으로 정사에 계
속 관여했다. 맏아들 장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고 도망오자 숨겨주었다가 혜문왕의
군대에게 포위당해 끝내 굶어죽는다.
제7대 혜문왕(BC. 310∼BC. 266) 조 무령왕의 아들이며 조 효성왕의 아버지다.
혜문왕의 어머니는 吳廣(오광)의 장녀로 孟姚(맹요)라 한다. 무령왕은 그녀를 몹시 총애
하여 공자 하를 얻었다. 맹요를 총애한 나머지 BC. 300년 맹요가 죽은 뒤 이미 태자였
던 章(장)을 폐적해버리고 공자 하를 태자로 삼을 정도였다. 조 혜문왕 원년(기원전 298
년), 조 무령왕은 스스로 물러났지만, 조 혜문왕이 어리므로 주보로서 섭정했다. 바로 이
때 조 무령왕은 사신을 자칭하며, 秦(진)나라에 가서 진 소양왕에게 사신이라고 핑계를
대면서 진나라를 정찰했다. 조 혜문왕 2년(기원전 297년), 주보가 누번왕에게 군사 지원
을 요청했다. 조 혜문왕 3년(기원전 296년), 주보가 중산국을 멸했다. 조 혜문왕 4년(기
원전 295년), 주보가 이태의 말을 듣지 않고 원래 장자의 신분으로 태자에 봉해졌다가
폐위당한 공자 장을 대나라의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공자 장은 그것을 믿고 전불례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비의를 죽였으나 결국 패하여 주보 무령왕의 사구궁에 달아났다.
이에 공자 성은 이태를 파견해 사구궁을 포위하니 무령왕은 굶어 죽었고, 공자 장과 대
신 전불례는 죽임을 당했다. 그리하여 공자 성이 상국이 되고 이태가 사구가 되어 정권
을 쥐었다. 조 혜문왕 14년(기원전 285년), 연나라의 상국 악의가 조나라, 한나라, 위나
라와 함께 제나라를 쳐서 영구를 빼앗았다. 조 혜문왕 17년(기원전 282년), 진 소양왕이
조나라의 성 2개를 함락시켰다. 조 혜문왕 22년(기원전 277년), 조나라에 전염병이 유행
했다. 조단을 태자로 삼았다. 조 혜문왕 28년(기원전 271년), 이대 안상여가 제나라를 쳐
서 평읍에 이르렀다. 북쪽 구문에 성 쌓는 일을 중지했다. 조 혜문왕 33년(기원전 266년
조 혜문왕이 죽고 태자 단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조 효성왕이다.
제8대 효성왕(BC. ?∼BC. 245) 조 혜문왕의 아들
조 효성왕 원년(기원전 265년), 秦(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했다. 그리하여 3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조나라 왕이 막 즉위했을 때 태후가 정권을 장악했다. 효성왕 2년(기원전
264년), 태후가 죽고 그리고 전단이 조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기원전 262년, 한나라의 상당군수 馮亭(풍정)이 조나라에 上黨(상당)을 바쳤는데 그 이
유는 진나라의 공격으로 상당군과 한나라의 연락이 두절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조 효
성왕은 좋다고 받아들였으나 平陽君 趙豹(평양군 조표)만 반대했고 平原君 趙勝(평원군
조승)과 趙禹(조우)는 찬성해 풍정의 투항을 받아들여 상당군을 차지해 그곳에 백전노장
廉頗(염파)를 보내 지키게 했다. 염파는 장평에 주둔했다. 진나라에서는 왕홀을 보내 장
평을 공격했으나 그는 염파의 적수가 되지못했다. 이에 진의 상국인 范雎(범저)가 헛소
문을 퍼뜨렸는데 염파는 두렵지 않고 오직 趙奢(조사)의 아들인 趙括(조괄)만 두려워 한
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조 효성왕은 염파가 계속 수비만 하는 것을 답답하게 여겼기 때
문에 그 말을 믿고서는 염파의 자리를 조괄에게 맡기려 했다. 이에 인상여와 조괄의 어
머니가 말렸다. 그러나 조 효성왕은 끝내 교체를 강행하여 7월에 조괄이 백기에게 싸워
패해 죽고 조나라의 45만 병사는 모두 생매장 당했다. 그러나 범저는 백기가 자신의 상
국 자리를 대신 차지할 것이 두려워 백기를 회군시켜 조나라는 멸망을 피할 수 있었다.
조 효성왕은 조표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을 후회했다. 조 효성왕 7년(기원전 259년), 진나
라는 다시 왕흘을 보내 한단을 쳤으나 염파의 저항이 완강해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조 효성왕 15년(기원전 251년), 평원군이 죽었다. 이를 조문하러 온 연나라 사신을 푸대
접하여 연왕의 분노를 샀다. 연왕 흐가 조나를 쳤으나 조군에게 율복을 잃고 경진이 포
로로 잡혔다. 조 효성왕 16년(기원전 250년), 조나라가 연나라의 수도 계를 포위했다.
조 효성왕 20년(기원전 246년), 진 시황이 즉위했고 진양을 빼앗겼다. 조 효성왕 21년(
기원전 245년), 조 효성왕이 죽고 그 아들 조언이 즉위하니 그가 조 도양왕이다. 이때
염파가 위의 번양을 쳐서 차지했을 때 조왕이 樂乘(악승)을 보내 염파를 대신하게 하자
염파는 불복하고 악승을 공격했다. 악승은 싸움에서 져서 도망치고 염파는 위나라로 망
명했다.
제9대 도양왕(BC. ?∼BC. 236) 조 효성왕의 아들이며 유목왕의 아버지다
조 도양왕 2년(기원전 234년), 李牧(이목)을 장수로 삼아 燕(연)나라의 武遂(무수). 方城
(방성)을 점령했다. 조 도양왕은 춘평군을 총애했고, 秦(진)나라에서 춘평군을 억류했다
가 풀어주자, 다른 인물을 보냈다. 또 요가로 하여금 한, 위와 동맹하러 보냈다가 요가
가 정중히 대접받자 조나라에서 의심했는데, 거모가 요가를 위해 조 도양왕에게 이야기
했다. 조 도양왕 3년(기원전 242년), 龐煖(방난)이 연나라를 공뎍하여 장수 劇辛(극신)을
사로 잡았다. 한편 연나라에서 태자 단을 진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呂不韋(여불위)가 장
당을 연나라의 상국으로 삼아서, 연나라와 합세하여 조나라를 공격해 하간 땅을 넓히자,
진나라에서는 태자 단을 귀국시켰으며, 조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해 상곡의 36개 현을
점령하고, 그 중에서 10분의 1을 진나라에 줬다. 조 도양왕 9년(기원전 236년), 진나라
가 조나라와 연합하면서 조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하여 이(이)와 陽城(양성)을 빼앗았다.
같은 해에 조 도양왕이 창씨에게 반해 왕후로 삼으려 하자 이목이 창후가 한 집안을 어
지럽혔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는데, 조 도양왕은 이 간언을 물리치고 창씨를 후궁으로
맞이했다. 창씨의 계략으로 아들 조가를 태자에서 폐하고 창씨의 아들인 조천을 태자로
삼았으며 왕후를 내쫓고 창씨를 왕후로 삼았다. 얼마 후에 조 도양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이어 태자 조천이 이어 왕이 되었다.
제10대 유목왕(BC. 245∼BC. 228) 도양왕의 서자이며, 대왕가의 이복 아우.
조 도양왕과 이미 한 집안을 망하게 한 적이 있는 倡姬(창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때
이목이 반대했기 때문에 창희와 그 아들 조 유목왕은 싫어하게 되었다. 조 유목왕 2년
(기원전 234년), 秦(진)나라의 장수 환의가 조나라의 平陽(평양)과 武城(무성)을 침략하자
조의 장수 扈輒(호첩)이 구원을 나섰으나 패해 죽었다. 진군은 조군 10만 명을 죽였다.
조 유목왕 7년(기원전 229년), 진나라가 대군을 거느리고 조나라를 쳤다. 이번에는 왕전
이 정형구를 쳤다. 이에 이목과 사마상이 맞섰다. 이에 진나라에서는 조 유목왕의 총신
인 곽개를 매수해 이목과 사마상이 모반을 한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하니 조 유목왕은
곽개의 말만 듣고 이목과 사마상 대신 趙蔥(조총)과 顔聚(안취)를 세웠다 그리고는 이목
을 제거했다. 조 유목왕 8년(기원전 228년), 왕전이 조나라를 사나운 기세로 몰아치니
조군은 패배해 조총은 죽고 안취는 달아났다. 그리고 조나라의 수도인 邯鄲(한단)을 쳐
서 함락시키니 조 유목왕은 투항에 포로가 되었다. 그리하여 조나라는 멸망했다. 조 유
목왕은 온기가 없는 냉방에 감금시켰다. 조 유목왕은 냉방에서 병을 얻고 고통스럽게
17세에 죽었다. 조나라가 멸망하기 직전 국정을 농단해 오던 왕의 어머니 창후와 그 일
족들은 조의 대부들에게 살해되었다.
제11대 대왕(BC. ?∼BC. 222) 조 도양왕의 아들
조 도양왕의 아들로 본래는 태자였다가 창후가 조 도양왕의 총애를 받자 조가의 어머니
와 조가를 헐뜯었다. 창후가 사람을 시켜 조가에게 죄를 뒤집어 쓰도록 만들고 유혹하면
서 조가는 함정에 빠졌다. 결국 조가는 태자에서 폐위되고 창후의 아들인 조천이 태자가
되었다. 조 유목왕 8년(기원전 228년), 秦(진)나라의 공격으로 조나라의 수도 한단이 함
락되면서 조나라가 멸망하자 집안 사람 수백 명을 이끌고 代(대) 지역으로 달아나 왕위
에 올랐으며 조나라의 대부들이 조금씩 그에게 돌아오자 연나라의 군사와 합세해 상곡
에 주둔하게 했다. 대왕 가 2년(기원전 226년), 진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해 도읍인 薊(계)
를 함락시키고 燕王 喜(연왕 희)와 太子 丹(태자 단)을 추격하자 연왕 희에게 편지를 보
내서 태자 단을 죽여 진나라에 바치게 했다.
대왕 가 8년(기원전 222년), 진나라의 장수 王賁(왕분)에게 공격을 받아 조나라(대나라)
가 멸망했다.
수도 변천
簡子(간자) 鞅(앙) 晉陽(진양) 山西省 太原市(산서성 태원시)
桓子(환자) 嘉(가) 中牟(중모) 河南省 鶴壁 中牟(하남시 학벽 중모)
敬侯(경후) 章(장) 邯鄲(한단) 河北省 邯鄲(하북성 한단)
사료 출처
司馬遷(사마천)의 史記世家(사기세가)와 曾先之(증선지)의 十八史略(십팔사략) 그리고 左丘
明(좌구명)의 春秋左傳과 馮夢龍(풍몽룡)의 東周列國志(풍몽룡의 동주열국지)또한 司馬光
(사마광)의 資治通鑑(자치통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