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정화하는 것들 중에서는 나는 바람(바람 혹은 공기는 생멸의 숨결이다. 그것을 통해서 신은 식물, 동물과 사람을 지탱한다. 그분의 정화하는 힘이 우주 전체에 활동하는 모든 바람의 흐름으로 나타난다. 바람은 공기 중에 있는 냄새와 병균을 날려버린다. 바람은 강력한 정화자이다. 불순물을 막아주는 바람이 없이는 대기는 생명을 지탱하기를 계속하지 못할 것이다. 고대 문화에서 바람은 선과 악 둘 다에 대해 굉장한 영향을 지닌 신성한 힘으로 정의되었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게 사는 사람은 정화자이기도 하다. 또 생명을 주는 미묘한 바이탈 공기를 프라나라고도 한다. 프라나의 통제는 영혼을 몸에 묶고 있는 코드의 통제를 낳는다. 사마디의 호흡이 없는 신 의식을 일어나게 한다.)이다. 전사들 중에서는 나는 라마(비슈누의 화신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완벽한 아들, 완벽한 남편, 완벽한 왕이었다, 고대 인도의 위대하고 고결한 왕, 그가 통치할 때는 죽음도 질병도 그의 왕국에 닿지 않았다고 한다, 위대한 정의의 행위에서 그는 모든 사악한 적을 정복시킨 신성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 무기 가운데서 가장 강한 것은 미혹이라는 자신의 내적 적의 정복자이다. 그도 그랬다. 그의 아내는 시타였다. 영적인 의미에서는 라마는 신을 시타는 인간의 영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이다. 물고기들 중에서는 나는 상어(바다의 데바인 바루나의 운송수단. 카마데바의 휘장에 보인다. 영적인 의미로는 인간의 의식에 내재하고 있는 신의 현존, 헌신자의 갈망의 모든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신성한 포식자이다, 인간의 의식에 내재하는 신의 현존이 사마디 의식에서 활동적이게 된다.)이다. 강들 중에서는 나는 갠지스 강(강가라고도 한다. 인도의 모든 강들 중에서 가장 성스럽다고 여겨진다, 그 강에서 목욕하고 그 강둑에서 명상했던 해방을 얻었던 많은 성자를 통하여 신의 축복을 받는다고 한다, 상징적으로 갠지스는 해방된 요기에게 내재하는 끊임없이 흐르는 직관의 지혜이다. 그것은 또한 오점이 없는 수슘나의 생명의 흐름을 나타낸다. 그것은 아스트랄 척추의 미저골에서 뇌의 천 개의 연꽃으로 흐른다고 한다, 요기의 생명력과 영혼의 자각은 신체의 물질적 족쇄들로부터 풀려나 영의 축복의 해안이라는 이 생명의 강으로 흐른다고 한다.)이다.
32. 나는 모든 창조물들 중에서는 그들의 시작이요, 중간이며 끝(신은 모든 존재들을 창조하고, 유지시키고, 그리고 자신에게로 불러들인다. 그들의 오고 감의 모든 책임을 떠맡고 있다. 신은 모든 대상화된 꿈 이미지를 그분의 의식 안으로 불러들인다. 신은 모든 것 안에 있는 본질적 정수이다. 그분이 없으면 아무런 생명이 없을 것이다. 생명이 없이는 창조는 불가능하다.)이다. 모든 지식들 중에서는 나는 나를 아는 지식(심지어 신은 존재의 덧없는 필멸의 형태로 있는 모든 존재 안에 있는 내재하는 영원한 나이다. 인간의 지식은 아무리 확장된다 하더라도 창조자의 유일한 드러남인 영혼의 지혜 직관적인 지각이 없이는 항상 제한적이다.)이다. 논쟁자들 중에서는 나는 식별의 논리(바다vada, 신의 내재하는 현존이 없이는 인식, 이성, 논쟁에는 아무런 힘이 없을 것이다.)이다.
33. 알파벳 중에서는 나는 철자 A(크샤라는 소멸하는 것이고, 악샤라는 소멸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 때 배우는 알파벳은 죽을 때까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나온다. 글자는 모음과 자음으로 나뉘어 있다. 어떤 자음도 모음의 도움이 없이는 발음될 수 없다. 글자 a는 알파벳에서 첫 번째이다. 이들 가운데 ‘아’는 aum의 첫 번째 글자이다. 옴이라는 우주적 소리는 모든 소리의 어머니이다. 옴은 자연의 창조적, 보존적, 파괴적 진동의 집단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의 단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원, 존재의 무한한 근원, 자연의 양상을 내보내는 힘이기 때문이다. 힌두 경전에서는 신성한 단어 옴을 챤팅하는 것을 강조한다. 신이 창조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선언하는 이 성스러운 진동의 소리를 깊은 명상 중에 듣는 것을 강조한다.)이다. 합성어들 중에서는 연결사 드반드바(산스크리트는 물리적 수준에서 상반되는 것을 나타내는 연결어가 많다. 쾌락과 고통, 이익과 손실, 승리와 패배. 이원성은 변화하는 세상의 본질이다. 만약 우리가 자유 속에서 살고자 한다면, 분리를 낳고 삶이 하나라는 것을 가로막는 이원성이라는 안개를 추방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이다. 나는 끝이 없는 시간(신은 또한 무한한 시간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영원한 현재를 의미한다. 우리는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모든 자각을 불러들인 깊은 명상의 상태에서 이를 느낀다. 시간의 변화를 지각하는 것은 마음이다. 영원불변의 시간 속에서 환영이라는 춤을 춘다. 이 장의 수트라 30은 인간의 시간에 대한 이해에 대해, 자연에 의하여 부과된, 자연의 현상에 불과한 ‘측정하는 것의 하나’ 중 하나로 언급했다. 이 수트라는 신의 영원한 지속하는 의식, 유일한 시간을 언급한다. 신은 늘 변하는 모든 창조의 환영과 같은 꿈의 영원한 그릇으로 여긴다.)이다. 나는 행위의 결과들을 배분하는 자(운명이 권위적인 신에 의해 완전히 정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결과가 우리의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결과는 신의 축복’이라는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이다. 삶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대해서 신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신은 우리에게 과거의 우리 죄를 처벌했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바사나의 흔적을 태우도록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신은 인간에게 운명에 반응할 힘을 주었다. 모든 인간은 신으로부터 자유 의지를 선물 받았고 그것을 사용하여 그 자신과 세상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 자유의지라는 바로 이 힘이 인간에게 내재하는 신의 모습의 표현이다.)이다. 나의 얼굴은 어디에나 있다.
34. 나는 모두를 잡아채는 죽음(이 장에서 신은 계속해서 우리를 집으로 오게 하고 있다. 신은 생명과 사랑이지만, 또한 죽음이다. 아무리 훌륭한 스승일지라도 죽음을 우리의 의식에 각인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각인된다면 모든 시간을 수행에 사용할 것이다. 삶과 죽음은 우주 현현의 번갈아 일어나는 과정이다. 하나는 다른 것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 파괴와 창조는 함께 한다. 신은 인간이 죽음 너머로 가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 그러기 전에는 우주의 현상인 삶과 죽음의 지배를 받을 것이다.)이다. 나는 또한 태어날 모든 것의 근원이다. 나는 영광, 번영, 아름다운 말, 기억, 한결같음과 용서이다.
35. 나는 베다 찬가들 중에서는 아름다운 브리하트 사마(수트라 22에서는 신은 베다들 가운데 사마 베다라 한다. 사마베다의 모든 송가들 중에서 브리하트는 가장 어렵고 복잡하다. 이 운율로 노래할 송가가 브라하트 사마이다. 브리하트 사마는 사마 베다 가운데 최고이다. 운율 그리고 분절법의 특별한 공식인 신성한 베다 송가는 강한 진동의 힘 때문에 노래 부른다.)이다. 시의 운율들 중에서는 나는 가야트리(태양의 신에게 드리는 송가. 그 뜻은 ‘우리는 신성한 태양의 더할 나위 없는 빛을 명상합니다. 당신이시여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주소서.’이다.)이다. 월들 중에서는 나는 1월(겨울, 11월과 12월에 걸쳐있는 말가시르샤 달은 일 년 중 가장 상서롭고 건강한 기간으로 여긴다. 이 시원한 겨울의 달은 앞선 여름의 열기와 몬순의 습기 속에 퍼져 있던 많은 세균과 박테리아를 파괴하거나 활동을 정지시킨다.)이다. 계절들 중에서는 나는 꽃피는 계절인 봄(쿠수마카라, 꽃이 만발한 봄에 자연히 바삐 그녀의 재탄생을 준비하여 방대한 자손을 돌볼 때 신은 그의 배우자인 자연을 비길 데 없는 장신구인 색의 꽃으로 장식한다. 꽃이 만발한 이라는 것은 영혼의 성취 시간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수련 기간 동안의 요기는 여러 해 동안의 격렬한 명상의 시기에 태어나기 전의 본능과 정신적 동요와 투쟁한다. 헌신적 끈기의 결과로 그는 마침내 지혜의 찬란한 꽃을 맞이한다. 그의 척추의 미묘한 중심의 미세한 부분에서 영적인 꽃이 만발하고, 두뇌가 열려 많은 깨달음의 향기로 그를 채운다. 이 꽃이 만발한 정원에서, 요기의 명상의 노력은 탄생 전과 후의 카르마의 모든 흔적, 자아와 자아의 환영의 힘에 맞서고 적절한 시기에 그것을 제거한다. 그는 척추의 중심부를 통해 열린 신성의 길을 따라 뇌의 가장 높은 부위에 있는 우주적 의식의 정상까지 올라 거기서 영혼의 해방에 이른다. 이것은 상서로운 달인 말가시르샤의 인용 즉 말가 ‘신성한 길’, 시르샤는 말 그대로 ‘머리 또는 가장 높은 부분’ 즉 뇌의 우주적 의식의 최고의 중심, 해방을 향한 문, 요기의 노력의 ‘최고의 정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이다.
‘36. 나는 속이는 것 중에서는 주사위 놀이(지성이라고 번역하는 사람이 있다. 지성을 사용한다고 해석한다. 크리슈나는 도박을 장려하지 않는다. 그는 좋고 나쁜 모든 것에서 같다. 그는 행위 뒤에 있는 원리이다. 행위는 게임이다. 게임을 진정한 정신에서 너무 멀리 데려가서는 안 된다.)이다. 화려한 것들 중에서는 나는 화려함(다음에 나오는 것을 포함하여 이 모든 것들은 그분의 현현이다. 자신의 화려함은 자신의 자기 노력으로 취해진 것이 아니다. 신의 은총이다.)이다. 나는 승리이다. 나는 강한 자들의 힘이다. 나는 인내(성공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것은 신성한 자질이다. 인내 바로 그 자체에 신이 있다.)이다. 나는 선한 자들의 선함(삿트바 구나, 이것은 나에 가깝다. 신의 우주적 환영의 영화를 통과할 때, 타마스와 라자스와 삿트바라는 세 가지 구나로 드리워진 그늘을 통과하게 된다. 사악하거나 어두운 개념으로부터 자신을 온전히 분리시키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무애착, 옳은 행동, 요가의 수행으로 우주적 환영에게 맞서 형세를 역전시키고 우위를 차지하는 법을 배우는 사람도 있다. 신은 선량하고 순결함인 삿트바가 자신을 정복한 자 안에서 드러난다. 이윽고 간혹 모습을 드러내는 신의 숨바꼭질에 그는 황홀하게 놀란다. 요기가 잠깐일지라도 그의 의식 속에서 신의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면, 그의 몸과 마음은 찬란히 빛나는 에너지로 전율하고 그의 몸이 털이 쭈뼛하게 선다. 내면의 신성한 광휘는 그의 몸 전체, 마음 그리고 영혼을 위없는 희열로 채우고, 하물며 거친 몸조차도 신성한 영적 광채로 미묘하게 빛나며 고요한 눈은 보이지 않는 축복의 눈물로 반짝인다. 그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영혼의 흠모로 우주적 사랑의 영혼을 숭배하고 자신의 영혼이 영적 축복이 된다. 궁극적 사마디 상태에서 요기의 의식은 자신의 나의 자각을 놓치지 않고 편재하는 신의 의식으로 확장된다.)이다.
37. 브리슈니들 중에서는 나는 크리슈나(바수데바의 아들, 크리슈나는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무한한 실재이다. 모든 기쁨, 모든 안전, 모든 아름다움과 모든 지혜의 근원이 신이다. 그것은 우리 의식의 가장 근원에 있다. 그러나 역사적 측면에서는 지상에 태어난 화신이다.)이다. 판다바들 중에서는 나는 아르주나(그는 황홀에 녹았음에 틀림이 없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크리슈나에게 주었다. 그의 눈은 오직 크리슈나만을 보았다. 그는 크리슈나 외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의식은 신에 대한 사랑으로 채워져 있었다.)이다. 현자들 중에서는 나는 비야사(신과의 무아의 교감에 고정된 성인. 무니 중 가장 중요한 분으로 여겨진다. 그는 사마디 상태 즉 움직임이 없는 상태에 있다.)이다. 시인들 중에서는 나는 우샤나스(카차의 구루. 죽은 이를 살려내는 힘을 지닌 고대의 시인이자 현자.)이다.
‘38. 나는 형벌을 할당하는 홀(笏)(회초리는 신의 원인과 결과의 법칙, 카르마, 궁극의 훈육자이다. 신은 입법자이지만 또한 법이며 법을 집행하는 자이다. 그것은 때리는 막대기가 아니라 법이다. 신은 분노와 마음으로 벌하는 것이 아니라 교정과 교육으로 한다. 그릇된 사람이 인간이 만든 법의 형벌을 피할 수는 있지만 카르마의 정의는 막을 수 없다. 성경도 또한 “너의 회초리와 너의 지팡이, 그것들이 내게 위안을 준다”에서 카르마의 법칙을 ‘회초리’로 언급하고 있다. 욥은 정의로운 이들이 고통을 받고 사악한 이들이 큰 물질적 성공과 기쁨을 누린다고 애통해하며 ‘그들의 집은 두려움으로부터 안전하고, 신의 회초리는 그들에게 미치지 않습니다.’ 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나 자주 사악한 이들이 촛불이 꺼지고 얼마나 자주 그들에게 파멸이 다가오는지! 신은 그의 분노 속에서 슬픔을 배분합니다.’라고 다 알고 있다는 듯 결론짓는다. 카르마의 법칙은 정의를 실천한다. 사악한 이들이 잠시 지난 과거의 좋은 카르마의 보상을 즐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사악함은 분명히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이다. 정복하고자 하는 자들의 정치력(모든 것을 정복하는 신의 힘은 바른 행위와 고귀한 동기 그리고 목표에서 드러난다. 이것은 신선한 과학이며 예술이다. 그것을 통해 신의 카르마의 법칙은 용맹한 이들에게 승리를 선사한다.)이다. 비밀스러운 것들 중에서는 나는 침묵(신은 창조되지 않는 침묵이다. 신은 우주 내에 존재하는 자연의 모든 힘과 물질에 숨어 있는 잠재된 침묵이다. 자연의 존재는 오직 마야가 내보이는 거친 모습이다. 숨어 있는 미스터리는 보기 어렵다. 우주의 꿈 같은 현상계에 내재하는 신의 고요한 현존은 최고의 비밀이다. 한계를 지닌 인간의 마음으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다.)이다. 나를 아는 현자들 중에서는 나는 지식(오직 신성한 깨달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신과 진리를 알고 그가 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신은 그 아는 사람의 지각, 의식이다. 구도자의 몸 의식과 생각이 고요해지면 그는 그 고요함 안에서 자신에게 내재하는 신의 상상할 수 없는 환희를 발견한다. 그는 진정으로 아는 사람, 영원불멸의 지혜가 함께하는 이가 된다.)이다.
39. 나는 모든 존재의 씨앗이다. 오, 아르주나! 이 세상에는 내가 아니고는 움직이는 것이든 움직이지 않는 것이든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나는 모든 창조물의 씨앗이다. 나는 모든 것의 나이다. 나가 없으면 모든 것은 순야 즉 텅 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 즉 나는 모든 것들의 본질이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신이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의 주위에 있으며, 모든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씨앗은 또한 잠재적 상태이다. 좋은 환경이 있으면 그것은 나타나고 성장할 것이다. 우리의 매일의 삶에서 우리가 잠을 잘 때 우리는 잠재적 상태에 있다. 깨어나면 활동을 한다. 희란야가르바 즉 잠재적 상태가 온 우주의 씨앗이다. 이렇게 말을 함으로써 신은 자신을 온 우주의 전체 원인과 동일시한다. 자연은 그분의 몸이다.).
40. 나의 신성한 현현들에는 한계가 없고, 그것들을 셀 수도 없다. 오, 적들을 정복하는 자여! 내가 그대에게 설명한 것은 나의 셀 수 없는 형태들 중의 일부분(실제로 누구도 모든 것의 나인 신성한 영광의 정확한 범위를 알거나 묘사할 수는 결코 없다. 물질적 우주의 창조, 보존, 그리고 소멸 속에서 그리고 그들의 꿈속 배우의 경험 안에서 상연되는 꿈의 드라마는 셀 수 없이 많다. 모든 것이 신의 힘의 현현이다. 끊임없이 변하는 무한함. 어떻게 그 무한함이 온전히 정의 내려질 수 있겠는가?)일 뿐이다.
41.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이 아무리 힘이 있고, 아름답거나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나의 능력과 영광의 한 조각으로부터 나왔음을 알라.
42. 하지만 그대가 이 방대하게 많은 것들을 알 필요가 있는가? 오, 아르주나! 오직 내가 존재한다(I am)는 것과 나의 한 부분이 우주를 지탱한다는 것을 그냥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