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차(13일)는 종일 항공 이동하는 날이다. 오전 11시 30분 경 과테말라시티 공항을 출발하여 2시간 반쯤 비행해 멕시코시티에 도착, 18시 30분에 환승하여 쿠바 아바나로 간다. 가이드 알렉스를 만나 석식 후 호텔에 숙박.
14일 아침 전용버스로 약 3시간을 달려 체게바라의 도시 산타 클라라에 도착한다. 체게바라 기념관, 비달 공원, 로마 델 까피로 전망대 등 주요 포인트를 답사한 후, 약 2시간을 달려 트리니다드 인근의 안콘 해변에 있는 호텔로 가 숙박한다.
체 게바라를 빼고 쿠바를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의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중남미 여행을 통해 제국주의에 의해 핍받받는 가련한 민중들의 현실을 보고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가 혁명에 나서기 전까지 쿠바가 처한 상황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스페인인들의 아메리카 대륙 진출에 관문 역할을 한 쿠바에는 당시 약 11만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정복 전쟁 기간 중 학살로 인해 1550년 경 3천 명으로 줄었고, 1560년 경 거의 전멸했다. 스페인 군대와 일부 선교사들은 소위 진보와 문명화와 기독교 사업을 추진한다는 명목으로 쿠바를 피로 물들였다.
체가 큰 영향을 받았던 파블로 네루다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인 라스카사스 신부는 1542년 그의 저서 '인디아의 파괴에 대한 보고서'에서 그가 직접 목격한 참상들을 고발하고 있다. '병사들은 단지 재미로 인디오들의 귀, 코, 손을 잘랐고, 안전 보장을 약속해 불러들여 불태워 죽였다. 젖먹이 어린애를 어머니에게서 빼앗아 축구공처럼 찼다. 군견을 동원해 그들을 사냥하고, 그들을 죽여 시체를 군견의 먹이로 던져주었다.'
신부는 스페인 국왕에게 '인디오들도 인간이며, 하느님의 형제로 인정해야 한다;고 호소했으나, 실질적인 조치는 얻지 못하고, 오히려 귀족계층에게 더욱 심한 박해만 받게 되었다.
콜롬부스가 도착한 10월 12일을 미국은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다. 과연 이날이 경축할 만한 날인가?
인디오들이 거의 전멸하자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데려온다. 스페인인들은 흑인 여성 노예들을 성 노리개로 취급했고, 그 결과 부계는 백인, 모계는 흑인인 일방적 혼혈인이 양산된다. 인디오, 스페인인, 흑인, 이들 사이의 다양한 혼혈인 메스티조, 믈라토, 삼보 등이 출현했고, 19세기 이후 중국, 일본, 필리핀 등 아시아계 이민까지 더해져 쿠바는 거의 인종 박물관이 되었다.
1898년 아바나에서 정박 중이던 미국 선박 메인호에서 원인 미상의 화재가 났다. 미국은 스페인에게 책임을 돌려 선전포고를 했다. 어디선가 많이 듣고 본 일 같지 않은가? 미국의 승리로 파리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쿠바는 독립하게 된다. 그러나 1902년까지 미 군정이 실시되고, 양키들로 주인이 바뀌었을 뿐 쿠바 민중들의 삶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미국의 꼭두각시인 바티스타 정권의 독재 아래 여전히 민중들의 자유와 권익이 짓밟혔다.
1956년 11월 26일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이끄는 82명의 쿠바 해방군은 나무 요트 그란마를 타고 멕시코를 떠나 쿠바로 출발했다. 12월 23일 쿠바에 도착했으나 정부군의 거의 일방적인 공격을 받고 대부분 전사하거나 체포되고 겨우 12명만 살아 남는다. 체도 총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 숨어들어 게릴라 활동을 펼치며 혁명군을 모으기 시작한다. 악전고투 끝에 마침내 1958년 12월 독재자 바티스타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혁명을 완성한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부패한 정부군이 쉽게 투항한 때문이기도 하다.
쿠바 혁명에 성공한 뒤 체는 부동의 2인자였다. 그러나 그는 권력과 부에 연연하지 않고 또 다른 혁명을 위해 아프리카 콩고 전선으로 달려간다. 그때 동지 피델에게 당시 심경을 담아 보낸 편지가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산타 클라라의 기념관 위에 있는 석상에 새겨져 있다. '지구상의 다른 곳에서 나의 미천한 힘을 요구하는군. 자네는 쿠바의 영도자로 남아 책임을 다해야 하니, 이 일은 내 몫이라 생각하네. 나는 내 사랑하는 것들 중 가장 사랑하는 것을 여기에 두고 떠나네.'
'물레방아를 향해 질주하는 돈키호테처럼 결코 녹슬지 않는 창을 가슴에 지닌 채 자유를 얻는 그날까지 달려갈 것'이라던 그의 외침처럼 그는 불굴의 의지를 보이며 또 다른 혁명 전선에 뛰어든다. 간혹 그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이데올로기에 갇힌 인물이 아니었다.
학창 시절 그는 엄청난 독서광이었고, 어머니로부터 시적 감수성을 물려받았다.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도 시를 읽고 썼다. 그가 추구한 것은 핍박 받는 민중들을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키고 궁핍을 해소하려는 것이었지, 이데올로기로 정의내리는 데 있지 않았다. 그는 로맨티스트이며 휴머니스트였다.
체 게바라 기념관 외관이다. 내부에는 그의 유품과 무기, 그와 동지들의 사진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고, 그의 유해도 안치되어 있다. 카메라나 작은 손가방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쿠바인들에게 체 게바라는 거의 신적 존재다.
위 사진들은 체 게바라가 정부군의 무기 운송 열차를 저지하기 위해 불도저로 선로를 끊어 열차를 전복시킨 전공을 세운 곳에 세운 기념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