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대문집 팔순 할아버지의 오래 묵은 영혼이 검게 저무는 제 몸을 빠져 나오던 날
―막은골 이야기
이은봉
싸락눈이 싸락싸락 창호지문을 쳐대는 저녁나절이었다.
큰대문집 팔순 할아버지의 오래 묵은 영혼이 저승사자의 손아귀에 고의춤을 붙잡혀 검게 저무는 제 몸을 빠져 나오고 있는 즈음이었다
울고불고 하는 집안 식구들과는 이내 손을 흔들어 하직인사를 했다
큰대문집 팔순 할아버지의 영혼이 노을빛 동구 밖 큰길을 아주 빠져나가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우선은 맏사위 명현 씨가 지붕 위에 올라가 왼손으로 흰 옷가지를 하늘로 집어던지며 혼을 불렀다
학생부군 이선진 복이요! 이선진 복이요! 이선진 복이요!
혼을 부르는 소리는 슬프면서도 맑았다
이어 이웃집 인덕 씨가 달려와 허청에 쌓여 있는 참나무 장작더미를 헐어 화톳불부터 피웠다
제법 화톳불이 타오르자 동네청년들이 상엿집의 차일을 꺼내와 안마당에 쳤다.
그런대로 상청이 차려지자 상주인 주하 씨는 한편으로는 소리 내어 어이 어이 곡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저것 제례를 지시하느라 가슴에서 콩알이 튀었다
우왕좌왕하는 중에도 마을 이장인 재희 씨가 호상을 맡기로 했다
성환이 아버지 재동 씨는 외상주 주하 씨의 의견을 따라 서둘러 울간의 도야지 중에서 가장 굵고 실한 놈을 골라 산내끼로 앞다리와 뒷다리를 묶었다
그악스럽게 울어대는 이놈 도야지라니!
이내 동네청년들이 달려들어 도야지를 목도로 매고 공동으로 쓰는 회당 앞 시암으로 옮겼다
회당 앞 시암 옆 텃밭에 내건 가마솥에서는 어느새 펄펄 물이 끓고 있었다
온몸을 비틀며 발광하듯 울어대는 이놈 도야지의 목덜미에 시퍼렇게 날선 칼을 찔러 넣은 것은 이번에도 음짓말 전 씨였다
대강 칼질이 끝나자 추수 끝난 텃논 위를 달리는 동네 아이들의 발끝에는 축구공 대신 도야지의 오줌보가 멋지게 걷어 채이고 있었다
싸락눈은 미처 아이들의 어깨 위에 닿기도 전에 하얀 김으로 바뀌었다
동네 사람들한테 바보라고 늘 골림을 받는 머래의 희주도 어느새 달려와 일을 거들었고, 동네 사람들한테 숙맥이라고 늘 퉁망을 먹는 참샘골의 봉핵이도 벌써 달려와 일을 거들었다
희주는 물심부름을 맡아 회당 앞 시암에서 물지게를 지고 달리고 뛰느라 바빴고, 봉핵이는 화톳불을 맡아 밤새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장작개비를 지르느라 바빴다
이마빡의 소똥이 채 벗겨지지도 않은 강망치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저승사자가 큰대문집 할아버지의 늙은 영혼을 오랏줄로 꽁꽁 묶어 동구 밖 큰길로 끌고 가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보았다고 빡빡 우겨댔다
남녀노소 없이 동네 사람들은 괜히 마음이 어정스러워 그만 바깥일에는 손을 놓아버렸다
어떤 집에서는 팥죽을 쑤어 동이 째 머리에 이고 왔고 어떤 집에서는 시루떡을 쪄 함지박 째 지게에 지고 왔다
어떤 집에서는 두부를 해 소래기 째 옆구리에 끼고 왔고, 어떤 집에서는 고사리나물 도라지나물을 삶아 소쿠리 째 머리에 이고 왔다
살기가 좀 힘든 집에서는 김장독을 헐어 짠지며 진잎 따위를 한 파내기 가슴으로 안고 오기도 했다
초상집에서 직접 삶고 찌고 익혀 장만하지 않은 음식들만으로도 과방은 금세 그들먹했다
제사 때 쓸 것들이 아니라 조문 온 사람들에게 급하게 상을 낼 때 쓸 것들이었다
호상을 맡은 재희 씨의 청이 떨어지기 무섭게 엄고개 술도가의 진 서방은 다섯 개가 넘는 한 말들이 막걸리통을 짐자전거에 싣고 달려왔다
미처 부고를 돌리기도 전이고, 채 땅거미가 깔리기도 전이건만 군데군데 호롱불이 켜져 있는 큰대문집 울안은 벌써부터 입 소문을 듣고 찾아온 문상객들로 흥성거렸다
동네 어른들이 버르르 나서다 보니 아이들까지 버르르 나서게 되어 큰대문집 울안은 더욱 복작거렸다
이미 때가 지났으므로 아이들에게도 흥건한 도야지국밥이 한 바가지씩 나뉘어졌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아이들은 허발을 하고 도야지국밥 바가지를 향해 수저질을 해댔다
손으로 집어먹는 담근 지 얼마 안 되는 짠지와 진잎, 동치미만으로도 아이들의 저녁밥은 황홀했다
밤이 깊어지자 바람도 차츰 싸늘해졌고 눈발도 차츰 굵어졌다
부엌일이 남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동네 아주머니들도 일단 집으로 돌아가 발을 뻗고 좀 쉬기로 했다
투기를 좋아하는 인근의 자칭 건달들만 차일 속에 자리를 편 채 질화로 하나씩을 껴안고 화투장을 조이며 장땡을 기다리고 있었다
큰대문집 할아버지 선진 씨가 가장 기대고 의지하던 이 집 맏손주 은봉 씨도 이제는 상청 뒷벽에 기대 앉아 잠시 졸기로 했다
마당가의 화톳불은 한껏 사위어가면서도 가끔씩 불티를 피워 올려 제 역할을 확인하고는 했다
꼬리를 바짝 내리고 안채 마루 밑의 제 집에 숨어 슬슬 눈치나 살피고 있던 덕구도 이윽고 잠에 들었다
그날 이후 막은골에서는 사흘 밤 사흘 낮을 두고 푸짐한 도야지 국밥 잔치가 벌어졌다.
―《현대시학》 2009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