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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톰 후퍼 감독, 뮤지컬 드라마, 영국, 158분, 2012년
요즘 유행한 뮤지컬영화 <레미제라블>을 보고, 1998년에 빌어거스트 감독이 만든 <레미제라블>도 보았다. 뮤지컬는 강렬하다. 선악의 전형과 대비를 극대화하고 웅장한 스펙타클을 제공해 비장하고 숭고한 느낌을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풍성하게 제공한다. 이런 효과와 이야기가 만나니 웅장하다. 뮤지컬이 가진 대중성의 힘을 새삼 확인했다. 한편 빌 어거스트의 <레미제라블>은 좀 더 섬세하다. 자베르와 쟝발장의 콤플렉스를 같은 무게로 조명해준다. 두 영화 모두 사랑과 용서에 의해 회심하는 내용을 웅장한 묘사로 보여주고 있다. 단 한순간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사회이지만, 단 한순간의 진정한 사랑과 용서로 전생애가 바뀔 수 있다는 이야기를 쟝발장처럼 강렬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기독교적 인간애가 소설 속에 가장 웅장하게 그려진 예일 것이다. 용서에 대해 예수는 베드로에게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다. 또한 아무도 사람이 사람을 심판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넘어선 사랑이어야 된다. 신부가 쟝발장에게 물려준 것이 바로 그것이리라. 물론 이 영화들의 주제는 혁명이 아니다. 왕정과 공화정으로, 그리고 다시 왕정으로 복귀된 19세기 프랑스의 혼란과 극에 달한 계급과 자본주의 모순은 역사적 배경을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 왕정의 복고로 불리는 박근혜대통령의 당선으로 멘붕을 느끼는 이들에겐 배경이 오히려 전경이 되기도 해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좋은 작품은 사람을 격려하는 힘도 강한 것 같다. <레미제라블>이 말하고자 하는 혁명은 아마도 내적 혁명일 것이다. 한 점 온기 없이 국가의 기계가 되어 결국 스스로를 파멸시켜야 했던 자베르의 결말에 대해서도 강한 여운으로 생각해볼 일이다. 그조차 파멸이 아니라 결국 변성과 구원의 길을 가게 된다면 지나치게 낭만적인 해피엔딩일까? 우리는 자살 사회를 살고 있다 스스로를 벌하는 자베르처럼. 의미와 희망을 잃은 채. 희망 없는 자살 사회에서 위안과 희망의 불이 거듭 피어나길 바란다.
= 시놉시스 =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의 감옥살이를 한 장발장(휴 잭맨). 우연히 만난 신부의 손길 아래 구원을 받고 새로운 삶을 결심한다. 정체를 숨기고 마들렌이라는 새 이름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우던 장발장은 운명의 여인, 판틴(앤 해서웨이)과 마주치고, 죽음을 눈앞에 둔 판틴은 자신의 유일한 희망인 딸 코제트(아만다 사이프리드)를 장발장에게 부탁한다. 그러나 코제트를 만나기도 전에 경감 자베르(러셀 크로우)는 장발장의 진짜 정체를 알아차리고, 오래된 누명으로 다시 체포된 장발장은 코제트를 찾아 탈옥을 감행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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