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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건국신화로 풀어보는 고대일본의 건국’
-제7차 코리안드림 역사문화포럼 방청기
정운종(시사문제연구소 대표)
코리안드림역사연구소와 평화통일사상연구소가 주관한 제7차 코리안드림 역사문화포럼이 4월 29일 오후 2시 강동구 피스센터 2층 강당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
‘한민족 건국신화로 풀어보는 고대일본의 건국’이란 주제로 제1부 규슈지역과 일본신화(발표 : 한국고대사연구소 소장 오순재박사) 제2부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천손강림신화에 기술된 강림지들에 대한 비교와 한국관련 배경연구‘(발표 : 평화통일사상연구소 윤정하대표)로 나누어 개최된 이번 문화포럼에는 사회 각계에서 150여명이 참석해 약 두 시간 동안 진지한 분위기에서 발표를 듣고 종합토론을 벌였다.
일본 교과서의 한국사왜곡 편성과 반민족 친일사관에 매몰된 일부 일본학자들과 이에 맹목적으로 부화뇌동해 온 일부 국내 친일 사학자들의 그릇된 역사인식이 도마 위에 오르곤 했던 상황에서 ‘한민족 건국신화로 풀어보는 고대일본의 건국’ 주제의 역사문화포럼은 많은 면에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날 발표된 논문 요지를 소개한다.
* 제1주제 큐슈(九州)지역과 일본신화(오순제 한국고대사연구소 소장)
1. 논농사를 처음 전해준 이다쯔케(板付) 유적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큐슈의 후쿠오카시(福岡市) 하카다구(博多區)이다쯔케(板付)에는 야요이시대(彌生時代)에 한반도에서 논농사를 전해준 이다쯔케(板付) 유적이 남아있으며, 그 옆에 이다쯔케유적야요이관(板付遺跡彌生館)이 세워져 있다.
한국인의 주식인 쌀은 단립벼(短粒稻)로 중국 남부와 동남아지역에서 먹고 있는 장립벼(長粒稻)와는 그 종자가 틀린데, 충청북도 청원군 소로리에서 나온 단립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1만 500년 전으로 우리민족이 세계에서 최초로 단립벼를 재배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후쿠오카현의 야요이시대 패총아나 이타츠케유적의 수전 유적지에서 발견된 탄화된 단립미는 한반도 철기시대 유적지인 경남 김해패총, 경기도 여주, 충남 부여 송국리 유적 등에서 발견된 탄화된 단립미의 볍씨와 동일한 탄화미이다. 이처럼 볍씨가 동일할 뿐 아니라 벼농사가 큐슈 북부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그 출발지가 한반도남부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2. 후쿠와카 하카다의 아마테라스를 모신 쿠시다진사(櫛田神社)
큐슈 후쿠오카(福岡)의 하카다만(博多灣) 안쪽 중앙부에는 아마데라스(天照大神)를 모시고 있는 쿠시다진자(櫛田神社)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신사가 자리잡고 있는 '博多'는 우리 말로 '박다'로 발음한다. 이것은 ‘밝달=光明'을 나타내는 것으로 태양신(太陽神)이었던 아마테라스를 상징하는 '거울'과 상통하는 것이다. 즉 광명사상을 가진 고조선의 일파가 쓰시마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아마저류신사에서 시작하여 이곳으로 건너와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3. 아마테라스의 광명신화를 간직한 아마노이와토진자(天岩戶神社)
일본 신화에는 이자나기(伊弉諾尊)와 이자나미(伊弉册尊)가 낳은 일신(日神)인 아마테라스(天照大神), 월신(月神)인 쓰쿠요미(月讀神), 해신(海神)인 스사노오(素殘嗚尊) 등의 신이 있다. 이중에 스사노오가 난동을 부리자 아마테라스가 동굴 속에 숨어버려 세상이 암흑으로 변하였다. 신들이 동굴 앞에 모여 아메노우즈메(天宇受賣命)가 춤을 추자 이것을 본 팔백만의 신들이 일제히 크게 웃었다. 궁금해진 아마테라스가 동굴의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자, 이때를 놓치지 않고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메노타지카라오카미(天手力男神)가 아마테라스를 잡아서 동굴 밖으로 꺼냈다. 후토 다마노 미코토가 동굴 입구에 금줄을 쳐서 다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이로 인해 세상에 빛이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신들이 스사노오를 타카마가하라(高天原)에서 추방하자 이즈모(出雲)로 내려가 그 땅을 어지럽히던 머리 여덟 개의 커다란 뱀 야마타노오로치(八岐大蛇)를 퇴치하여 다스리게 된다.
타카치호초(高千穗町)에는 아마노이와토진자(天岩戶神社)는 아마데라의 동굴신사가 묘사하고 있듯이 냇물이 흐르고 그 옆에 커다란 동굴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는 니니기가 내려왔다는 타카치호노미네(高千穗峰)과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두 개의 신화가 광명사상과 천손강림사상의 전혀 다른 배경에서 탄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곳에서는 안내판과 같이 천손이 강림했다는 타카치호봉이 전혀 보이지 않으며 저 멀리 조모산, 고조모산이라는 산들이 보이고 있다. 이 동굴의 뒤쪽에 자리 잡고 있는 소보산(祖母山), 후루소보산(古祖母山)이라는 지명은 한반도에서 삼국시대 이전의 지명에 존재하고 있는 할미산, 대모산(大母山), 고모산(姑母山), 노고산(老姑山)과 같은 뜻으로 이곳에서는 아마데라스가 바로 할머니(祖母) 또는 고조모(古祖母)가 된 것이다.
왜냐하면 아마데라스(天照大神)의 신화는 환웅신화(桓雄神話)에서 보이는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자 원하여 마늘과 파를 주어 100일간 동굴에 들어가 있으면 된다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빛과 어둠을 상징하는 광명사상(光明思想)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아마데라스의 이름인 '천조(天照)'는 '하늘의 빛'이며 그 세력들이 도착한 곳 또한 '하카타(博多: 붉다)'라는 지명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민족을 상징하는 ‘배달(倍達)'이 '밝달'로 광명을 상징하고 있으며 중국의 『산해경(山海經)』에서도 우리민족을 '백민(白民)'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것은 태양의 빛인 흰색을 상징하는 것으로 부여, 은나라, 아즈텍 등은 흰색을 숭상하였고 흰옷을 즐겨 입었던 백의민족(白衣民族)이었다. 더구나 고조선의 국호인 '조선(朝鮮)'이나 그 당시 도읍을 지칭하였던 ‘아사달(阿斯達)' 또한 '아침 해가 처음으로 비추던 곳'이라는 뜻이며 부여의 왕이었던 해모수, 해부루 등은 태양을 뜻하는 '해(解)'를 성으로 삼을 정도로 광명을 숭상하고 있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박(朴)'이라는 성씨는 그가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났기에 '밝음'을 상징하는 것을 성으로 삼았다. 이러한 사상은 중국으로 들어가 산동, 절강 지역에 살았던 우리 겨레인 동이족들이 남긴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의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에 그려져 있는 해가 떠오르는 모양의 회화문자(繪畵文字)와 '양곡(腸谷)'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는데, 이것은 '해가 처음으로 비추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광명사상을 가지고 우리조상들도 일본으로 건너와 최초로 나라를 건국하였음을 알수 있다.
4. 환웅을 모신 히코쿠신궁(英彦山神宮)
히코산신궁(英彦山神宮)은 후쿠오카현(福岡縣) 타가와군(田川郡) 소에다정(添田町)와 오이타현(大分縣) 나카쓰시(中津市) 야마쿠니정(山国町)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해발 1,199m의 히코산(英彦山)에 자리잡고 있는 신사로 북악(北岳), 중악(中岳), 남악(南岳)으로 되어있는데 중악(中岳)에는 히코산신궁(英彦山神宮)의 상진궁(上津宮)이 자리잡고 있다.
히코산(英彦山)은 야마가타현(山形縣)의 하구로산(羽黒山), 나라켄(奈良縣) 쿠마노노오오미네산(熊野大峰山)과 더불어 '일본삼대수험산(日本三大修験山)'으로 꼽히는 영험한 산이다. 지금은 후니쿨라로 쉽게 올라갈 수가 있다.
한국정신문화원의 박성수 교수는 후쿠오카켄(福岡縣) 소에다(添田)에 있는 해발 1200m인 히코산(英彦山)에 있는 히코산진구(英彦山神宮)에서 환웅(桓雄)의 그림 한 점과 목각상 한 점을 발견하였다. 소에다의 옛 지명은 '소호리(會褒里)'로 우리말로 서울을 나타내는 '소부리(所夫里)'였으며, 히코산의 '히코'라는 말도 '하늘의 아들(日子)'이라는 뜻임을 밝혔다.
두 유물은 어깨죽지에 등(藤)나무 잎이 늘어져 있어 후지와라쯔네오(藤原恒雄)라고 부르며 그 모습이 우리나라의 단군상과 다를 데가 없는데 이곳에 대한 가장 오랜 6세기 당시의 기록인 「언산류기(彦山流記)』와 『언산연기(彦山緣起)』에 따르면 최초로 이 산에 들어가 입산 수도한 개산도사(開山道士)가 히코산에서 환웅을 만났으며, 이 도를 가르켜 슈겐도(修險道)라 하는데 그것은 환웅(桓雄)을 하느님(桓因)의 아들로 숭배하는 것이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수험도의 전성기에는 신도의 수가 42만 명에 이르러 큐슈의 총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했으며 그 신도들을 ‘단카(檀家)'라 하였는데 그 뜻은 ‘단군을 믿는 집, 단골집'이라 자칭하였다. 그 수도자들은 일본인들이 먹지 않는 마늘을 즐겨 먹었으며 지금도 이 부근의 소에다(添田) 지역에서는 마늘장아찌를 먹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환인을 마늘을 가르키는 니니쿠(忍辱)이라 부르는 것은 단군설화에 나오는 마늘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5. 무나카타(宗像)신사와 오키노시마(沖之島)
쓰시마의 카미쓰시마초(上對馬町) 오마수(大増)있는 무나카타신사는 무나카타산조신(宗像三女神 : 田心姫神, 湍津姫神)을 모시는 신사로 이 세 여신은 일본에서 대륙과 고대 한반도의 해상으로 전국 각지에 같은 이름의 신사들 중 총본사는 후와카현 무나카타시에 있는 무나카타타이(宗像大社)이다. 이것은 북규쥬의 현해탄 바다 가운데 있는 오키쓰미야(沖津宮)는 오키시마(沖 / 島), 나카쓰미야(中宮)는 지쿠젠오시마(筑前大), 헤쓰미야(辺津宮)는 무나카타시마(宗像田島)의 섬에 모셔져 있는데 야마토 조정에 의해 오래전부터 중시된 신들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던 신사이기에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 연안과 긴키(近畿) 지방 바닷가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는 백제의 고왕이 일본지역을 점령하고 음신천황을 오사카지역에 세우게 되면서 쓰시마 이키시마를 거쳐 후쿠오카로 진출했던 세력과 달리 쓰시마(대마도)에서 오끼노시마를 거쳐 세토나이카이로 진입하게 되면서 오키노시마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된다.
진자부터 무쓰가다케(六岳)의 이동(https://blog.goo.ne.jp/bdwy88ws)
아마데라스(天照大神)가 나라 만들기 전에 태어난 이 세 명의 여신에게 큐슈에서 한반도로 이어지는 북쪽의 바닷길에 내려가 역대 천황을 도와줌과 동시에 역대 천황에서 독실한 축제를 받들라고 명령하였다. 이 때문에 세 여신은 현재 각각의 땅에 강림하여 분사되었다. 이것이 무나카타타이샤(宗像大社)가 모시는 오키쓰미야(沖津宮), 나카쓰미야(中津宮), 헤쓰미야(辺津宮)이다.
백제의 고이왕이 일본지역을 점령하고 응신천황을 오사카지역에 세우게 되면서 쓰시마, 이키시마를 거쳐 후쿠오카로 진출했던 세력과 달리 쓰시마(對馬島)에서 오끼노시마(沖/島)를 거쳐 세토나이카이로 진입하게 되면서 오키노시마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된다.
『삼국지(三國志)』위지, 동이전, 왜조에 히미코(卑弥呼)가 있었던 아마타이국(邪馬台国)을 가기 위하여 대방군에서 출발하여 구야한국인 김해(金海)에서 출발하여 대마국이 있었던 쓰시마와 일대국이 있었던 이키시마를 거쳐 말로국(末盧國)이 있었던 현재 큐슈의 가라쯔(唐津)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500리를 가면 이도국이 있었던 이토시마(糸島)에 당도했는데 그곳은 그 당시 대외창구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야마대국의 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특히 가라쓰시(唐津市)에 있는 야요이시대(彌生時代) 나바타케유적(茶畑遺跡)은 이다쯔께유적과 함께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논농사(水田) 유적으로 이곳에서는 수혈건물지와 논유적을 비롯하여 탄화한 쌀, 반달돌칼, 가래(), 돌도끼 등이 발견되었다.
6. 가야인 '가라파(河童: 加羅輩)'가 도착한 야스시로(八代)
큐슈의 서북쪽에 있는 '가라쯔(唐津)'는 '가라인이 도착한 나루터'라는 뜻으로 가야인들이 항해의 표적으로 삼았던 높은 산이 이토시마(絲島)의 '가야산(可也山)'이다. 가야인들은 후쿠오카(福岡) 쪽으로 동진하려 했으나 이미 그곳을 선점하고 있었던 진무(神武)세력의 저항에 부딪치게 되자 방향을 바꾸어 큐슈의 서쪽 해안을 따라 내려가서 아리아케해(有名海)로 들어가 야스시로(八代)에 상륙하게 된다.
이곳에는 가라파(河童)의 전설이 남아있는데 '가라파는 ‘가라배(加羅輩)'라는 뜻으로 '가야에서 온 무리들'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거북이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들을 모신 신사가 묘겐구(妙見宮)이다.
이 신사는 야시로신사(八代神社)라고도 부르며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신라로 아스카시대(飛鳥時代)인 680년에 타케하라쓰(竹原津)에 진조한 것을 시작으로 한다. 이곳에 모셔져 있는 것은 북극성(北極星)과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신격화한 천어중주신(天御中主神)과 국상입존(国常立尊)을 모시고 있는데 이들은 천손 니니기(瓊瓊杵尊)가 떠난 하늘나라였던 고천원(高天原)에 있었던 신들이다.
이곳에 남아있는 전설을 보면 옛날에 묘견신(妙見神)이 거북이(亀)와 뱀(蛇)이 합체된 상상의 동물인 키타(蛇)의 등에 올라타서 바다를 건너왔다는 전설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항구를 중심으로 번영했던 곳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야스시로에 남아있는 가라파(河童)의 모습을 보면 거북이의 형태인데, '가라파'란 '가야의 무리(加羅輩)'라는 뜻으로 그 당시 수많은 가라파들이 바다에서 강을 타고 올라와 이곳에 도착했다고 전한다.
이것은 가야의 김수로왕을 맞이하기 위하여 변한의 구간들이 거북이의 머리에 해당하는 구지봉(龜旨峯)모여 그를 영접하기 위하여 "거북아 거북아~~"하면서 구지가(龜旨歌)를 불렀던 것으로 보아 가야가 거북이(龜)와 매우 밀접한 해양세력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7. 가야계 니니기가 천손강림한 타카치호봉(高千穗峰)
일본신화에 니니기(邇邇藝命)가 하늘로부터 강림한 구시후루다케(久士布流多氣)는 미야자키(宮崎)의 1574m 타카치호노미네(高千穗峰)에 남아있다. 이곳 정상에는 그가 가지고 내려왔다는 아마노사카호코(天逆鉾)가 꽂혀 있는 데 이것은 무기인 동시에 한국의 샤먼들이 자주 쓰는 삼지창(三枝槍)이다.
더구나 이 신화는 가야(加耶)를 건국한 김수로왕의 구지봉(龜旨峯) 신화와 매우 흡사하다. 천손인 니니기의 무덤은 현재 가고시마켄(鹿児島県) 사쓰마센다이시(薩摩川内市) 미야우치초(宮内町)에 있는 니따진자(新田神社)의 경내 신구산(神亀山)을 그가 묻힌 가애산릉(可愛山陵)으로 보고 있다.
변한구야국 또는 가야족인 니니기의 손자가 바로 스진천황이다. 니니기(邇邇藝命)가 하늘로부터 강림했다고 하는 구시후루다케(久士布流多氣)가 바로 큐슈 미야자키 (宮崎)의 1574m 타카치호봉(高千穗峰)으로 이들의 성산(聖山)이었으며, 그 옆에는 '가라구니다케(韓國岳)'가 자리잡고 있어 이들이 '가라(加羅)'에서 왔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나라시대에 중앙의 찬황가에서 천손강림의 이 신화를 진무(神武)의 아마데라스(天照大神)와 연결을 시켜 하나로 만들면서 니니기(邇邇藝命)의 증손자인 스진(崇神)천황을 초대의 진무(神武)천황으로 조작해 버렸다.
* 제2주제「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천손강림신화에 기술된 강림지들에 대한 비교와 한국 관련 배경 연구
(발표: 평화·통일사상연구소 윤정하 대표)
고대 조선인들은 한반도에서 두 경로로 큐슈에 도달했다. 하나는 쓰시마-이키시마-마츠우라 반도, 다른 하나는 쓰시마-오키노시마-북큐슈에서 도달하여 동북부인 지금의 오이타와 미야자키로 이동하였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천손강림신화에서는 아시하라나카츠쿠니를 여러 차례에 걸쳐 정벌하고 스사노오의 후손으로부터 이즈모 지역의 국토를 양도받는다. 이러한 준비작업을 마친 뒤, 천황의 황조신 아마테라스와 다카미무스히는 천손 니니기를 하강하도록 명한다.
고대 조선인들의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이동경로나, 문헌상의 천손강림신화의 스토리 구성상, 천손 니니기는 이즈모 또는 큐슈 북부 지역으로 강림해야 한다. 그러나 강림후 가고시마 남단에 위치한 카사사의 곶으로 향한다고 기록함으로써 고사기와 일본서기문헌상으로 추론해 볼 때, 니니기는 이즈모와 북큐슈와 멀리 떨어져 있는 큐슈 남부지역으로 강림한다.
준비한 강림지와 하강한 강림지 사이 발생하는 모순은 한반도에서의 백제의 멸망과 백촌강 전투이후, 진행된 천황을 중심한 고대 율령체제와 이데올로기의 확립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천손 니니기의 '강림신화'와 진무천황의 동정에 의한 '건국신화'는 천황제 확립이라는 단일한 목적을 위해 잘 짜여진 일련의 신화이다. 천손 니니기는 큐슈의 남단에 강림하고, 이어서 그 손자인 진무천황은 큐슈를 동부에서 출발하여 세토내해를 지나 지금의 오사카와 나라 지역인 야마토에 이르러 건국을 한다. 이러한 일련의 신화를 통해서 태고에서부터 이즈모를 비롯한 큐슈남단에서 야마토 지역 전체가 황손의 후손인 천황에게 천양무궁의 신칙으로 주어졌다는 천황 지배권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신화로서 편집된 것이다.
천황을 중심한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기 위해 찬술된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씨족과 부족의 조상신들을 천황가 궁정의례로 흡수하는 한편, 한반도와 관련된 부분은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변조하고 외면하고 있다.
근대적 학문의 방법론으로 고대 조선과 일본의 신화를 연구한 미시나 아키히데를 비롯한 마츠무라 다케오, 우에다 마사아키 등 대부분의 학자들은 천손강림신화가 고대 조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강림지에 대한 기록들이 변조되었거나 왜곡된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고 있다.
강림지 가운데, 구시후루타케(久士布流多氣,櫶觸峯, 櫶日)가 김수로왕 신화의 구지봉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미시나를 비롯한 일본 신화학자들의 대부분이 인정하고 있다. 소시시와 소호리야마(添山)는 '황량하고 거친 땅'이라는 의미와 소호리야마(曾褒里能耶麻)로 변조되어 이 또한 원래의 의미를 후대에 이르러 알기 어렵게 되었으나, 우에다, 미시나, 오야마 등의 학자들은 소시시와 소호리는 백제의 수도 泗沘 '소부리', 신라의 경주 伐 '소후루'와 유사하여 고대 조선어에서 유래하였음을 지적한다. 가라쿠니(韓國)는 가라쿠니(空國), 무나쿠니(空國), 무나소쿠니(胸副國)로 변조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원형을 알 수 없게 되었으나, 이 가라쿠니에 대한 부분은 어떠한 일본 학자들도 언급이 없었다. 다만 시라이시 다이치로는 '가라는 고대시대에는 가야로, 그 이후 중국 唐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의미가 확대되어 외국(外邦)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터무니없는 해석을 하였다.
한국 신화학자들은 신화소의 비교 분석과 강림지 비정에 집중한 나머지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찬술된 천손강림신화의 의도와 배경에 대한 조명이 많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후련과 김채수와 같은 학자들은 천손강림신화가 일본의 고대 중세 근세를 거치면서 천황제 이데올로기로 재생산되어온 맥락을 이론적으로 정리했으나, 일본 정치사 전공 학자들은 일본 고대신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고 고대 조선과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해명은 부족해 보인다.
천손강림신화는 고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이동한 이주민들의 것으로 천황제 체제와 이데올로기의 확립을 위해 천황을 중심으로 편집되어 탄생한다. 이후 중세시대에 기타바타케치가후사(北畠親房)에 의해 '신국사상(神國思想)'이, 근세에는 모토오리노리나가(本居宣長)와 미토학파의 아이자와 세이시사이(会沢正志斉)에 의해 '국체론(國體論)'이 고대신화인 천손강림신화와 건국신화를 기저로 하여 재생산된다. 이러한 재생산은 냉전체제의 해체이후, 현재에도 일본에서 헌법개정, 교육기본법의 개정, 자위대법의 개정, 자유주의사관에 의한 과거사 부정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