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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 조동화는 할머니 할아버지 합장봉분은 8/15 말끔히 이발을 해 드렸고,
어머니 아버지 봉분은 8/19 이발을 해 드렸다.
다음달 10일이면 추석이라 산소를 미리 벌초를 해 드리는 것이 자식된 도리를 하는것이지.
올해 여름 들어 세 번째 벌초인디 티뿔이와 잡초가 어찌나 빨리 자라는지 봉분이 보기가 민망하여 추석이 오기전 일찌감치 이발을 해 드릴려고 날씨가 구름이 잔뜩 끼었으나 비가 오지 않을 것 같아 부랴 부랴 낫을 철물점에 가서 7,000원에 사서 오늘 이발을 해 드린게 기분이 가뿐하고 감개무량하구먼.
낫은 중국산이 있고 국산이 있는디 국산이 가격이 조금 비쌋으나 국산을 구입했제.
부모님은 만고풍상 겪으시고
어머님 하늘나라 가신지 26년 아버지는 23년이 되신다.
파란만장한 삶을 사시다 가시어 양지 바른곳에 봉분을 모시었으나
17년전 납골당 설치시, 잔디로 잘 조성 해 놓았으나 잡초와 티불이가 번성하여 몇번씩 이발시켜 느리기가 힘이 드는구나.
내가 어려서는 어머니가 책포로 목을 둘러 머리를 집이서 깍아주시던 생각이 난다.
추석이 20여일 앞으로 닥아와 벌초를 하는 것은 조상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핵가족 개인주의시대에 벌초하는 것이 어려워서, 봉분과 묘역 전체를 시멘트로 덮어 버리는 묘역도 종종 본다.
7/4일 깔끔하게 할아버지 할머니 합장봉분과 아버지 어머니 봉분을 벌초했고, 납골당주변을 깨끗허게 단장했으나 잡초와 풀이 무성하게 자라, 8/15에 낫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합장봉분은 풀을 깎아 시원하게 단장하였고, 아버지 어머니 봉분은 8/19 산소를 찾아 이발을 해 드렸지.
내가 현직에 근무할때는 맡기여 벌초하거나 예초기로 벌초했는데 예초기가 고장이 난후 내가 직접 낫으로 벌초하며 하늘나라에 계신 조상님들을 기억하며 추모하지.
나의 조상님들은 장손이 자주 산소에 들리여 봉분을 다듬어 감사한 마음을 좋아하시리라.
조동화는 왜 장손이 되었을까?
타고난 운명을 어찌할꺼여.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 곰곰 생각해 본다.
우리 어머님 연일 정씨 정순봉은 나를 1950년 전쟁중에 잉태하여 이땅에 보내시여 바른길로 가도록 인도하고 보호해 주셨기에 현재의 조동화가 존재할수 있게 해 주시었다.
조동화는 6.25 전쟁의 와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세월을 이기지 못하여 어느덧 석양의 노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수다.
조동화가 이세상에 왜 온줄 알아
김제조씨 가문을 위하여 필요한 사람인게 이세상에 온거여.
좋은 마음 착한마음으로 조상을 받들어야제.
개인주의 핵가족 시대에 누가 와서 벌초 허겋어.
사는일이 바쁘고 취미생활허기 바쁜디 산소에다가 신경쓰는이 없어.
헐수 없이 벌초는 장손인 내몫이여.
봄 가을에 벌초 했다가는 산소 풀밭되야.
요새 젊은 사람들 별초다 뭐다 제사 같은 것 없어.
조동화는 장손이라 조상님 받든다고 봉분을 깨끗하게 벌초하고 다듬는 자세가 되얐다.
땀흘리고 벌초하는일, 몸안의 독소를 배출하여 좋은점도 있구먼.
아버지 어머니 봉분에 자란 머리 깎아 주었다고 생각헌게 마음이 편하구먼.
조상님들이여 이세상에서 못다 이룬 꿈 저세상에서는 후손들을 위하여 성원하고 행복하소서.
납골당에 계시는
고조할아버지 옥현 20세손 1840.1.21.-1896.5.24.(57세 사망)
고조할머니 전주이씨 1844.3.3.-1894.1.25.(51세 사망)
증조부(상할아버지) 철만 21세손 1868.4.1.-1946.4.1.(79세 사망)
증조모(상할머니) 보성오씨 오성녀 1882.10.5.-1964.6.16.(음력 1964.5.7. 83세 사망)
숙모 작은어머니 박금례 1938.10.3.-1965.9.4.(28세 사망)
봉분 합장
조부(할아버지) 조갑동 22세손 1906.11.24.-1983.8.3.(음력 1983.6.25. 78세 사망)
조모(할머니) 전주유씨 유보림 1907.1.19.-1964.5.16.(음력 1964.4.5. 58세 사망)
별도봉분
부친 조병옥 23세손 1926.4.11.-1999.1.22.(음력 1999.12. 5. 74세 사망)
모친 정순봉 1928.8.15.-1996.5.5.( 음력 1996.3.18. 69세 사망)
김제와룡 김제조씨 조선식문중 묘역에서
2022년8월은 장마와 무더운 혹서기로 묘역에는 몇번을 벌초 했어도 띠뿔이와 잡초로 무성하다.
조선식은 나의 조부이시며 1983년8월3일 하늘의 부름을 받아 저세상으로 가시었다.
묘역에는 납골당을 조성하여 고조부 증조부 작은어머니의 유골함이 안치되여 있고, 봉분으로는 조부님과 할머니합장봉분이 있으며 나의 부친과 모친봉분이 있으시다.
납골당은 2005.12.3. 건립하여 17년 세월이 흘러갔구나.
金堤趙氏竹西公波臥龍家族之墓
西紀2005년12월3일 建立
상석에 세긴 글씨도 세세년년 비바람에 희미해졌구나.
작은어머니는 남원에서 시집온 박금례님이시다.
숙부에게 박금례님은 시집와서 딸과 아들을 낳았으나 아들 기승을 낳고 2년만에 저세상으로 가시었으니, 커 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지하에서 얼마나 통한의 시간을 보내시었겠는가.
숙부 조병무님과 숙모 박금례님은 신혼의 보금자리를 시골집에서 대가족이 함께 같이 살았기에 금실이 좋은 모습을 보아왔다.
세월은 덧없고 무정하여 그 아들도 장성하여 아들 둘을 둔 아버지로 변하였다.
숙모 작은어머님이 살아계시었다며 풀지못한 이야기를 풀수 있을텐데 사람의 운명은 어찌할 수가 없구나.
사랑을 받지 못하고 50대 후반의 사촌아우의 건승을 빈다.
<여그가 우리 어머님 아버님 봉분이다.
봉분을 벌초하면서 많은 생각에 잠기었다.
아들들 잘 되기만은 바라셨던 부모님 불효한 죄를 사모곡으로 대신합니다.
어머님은 1996년3월18일 69세 돌아가시었고
아버님은 1999년12월5일 74세 돌아가시었다.
감기증세로 낫겠지 하다가 낫지 않아 두어달만에 원대병원에 입원 진찰을 받아보니 폐암으로 판명되여 일주일만에 돌아가시었는데, 나의 세째동생 도권이 걱정을 많이 하시었었다.
봉분을 벌초하며 어머니 생각을 하다가 내 눈가에는 눈물이 촉촉해지고 말았구나.
잘해드리고 싶어도 이세상에 아니 계시기 때문에 목이 메어 어찌할 수가 없구나.
어머니라는 말보다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말이 있을까?
어머님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님 !
비가 오나 눈이오나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오직 자식걱정에 밤낮을 고생만 하시었던 어머니 연일정씨 정순봉님이시여!
시골사실적에 밥도 한상에서 먹지 않으시고 부억한켠에서 누른밥으로 끼니를 때우시던 어머님 모습이 눈에 선하여, 불효한 이자식은 눈물로 참회합니다.
하늘나라에서 아프지 말고 행복의 꿈나라에서 영생불멸하세요.>
조동화의 어머니의 여한가(餘恨歌)
우리어머님 정순봉님이 이세상에 아니계시고 저세상으로 가시고 어머니의 회한가를 읆어봅니다.
인간의 근본은 어머니로부터 세상에 나왔기에 어머니는 이세상을 떠나갔지만 언제나 어머니를 사모하면서 세상을 개척하며 살아간다.
나의 어머님 연일정씨(延日鄭氏) 정순봉(鄭順奉)께서는 모현동 옥호동에서 1928년도(소화3년) 음력 8월15일(양력 9월28일)에 태어나 1996년5월5일(양력, 음력은3월18일) 69세에 사망하시었다.
나의 어머님께서는 두 살때 아버지(나의 외할아버지)를 여의었고 어머니(나의 외할머니)를 26살 때 여의시었다.
어머님 정순봉님은 21살 꽃 다울제 숙명 처럼 혼인하여 6.25사변통에 장남 조동화를 이세상에 보내여 두 세 살씩 터울 두고 육남매 기르느라 철 지나고 해 가는 줄 모르는 채 살았구나!
꿈속에서도 그리던 어머니 사랑합니다.
어머니는 조동화를 잉태하여 이세상에 보내여 주셨으니, 이세상 항해하며 행복한 세상을 항해 하는것이지.
어머니는 사랑의 여신(女神)이고, 희망(希望)의 여신이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다 품어 주시고, 애간장을 녹이며 모든 것을 내어주시었다.
어머니 정순봉(鄭順奉) "어머니" 라는 이름은 영원한 향수이며, 불러도 불러도 가슴속에 사무쳐 자꾸만 그리운 이름이여.
어머니의 마음 아들을 구하기 위하여 불구덩이도 들어가는 용기를 나는 압니다.
어머니의 고귀한 사랑...............................
★★★봄 여름에 누에치고, 목화 따서 길쌈하고
콩을 갈아 두부 쑤고, 메주 띄워 장 담그고
땡감 따서 곶감 치고, 배추 절여 김장하고
호박고지 무말랭이 넉넉하게 말려두고
어포 육포 유밀과 과일주에 조청까지
정갈하게 갈무리해 다락 높이 간직하네
찹쌀 쪄서 술 담그어 노릇하게 익어지면
용수 박아 제일 먼저 제주부터 봉해두고
시아버님 반주꺼리 맑은 술로 떠낸 다음
청수 붓고 휘휘 저어 막걸 리로 걸러내서
들 일 하는 일꾼네들 새참으로 내보내고
나머지는 시루 걸고 소주 내려 묻어두네.★★★
옮겨온 글로 할머니 어머니들의 삶이었다.
기차길옆 내고향 옛집 와룡이여!
호랑이 담배피우던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호남선 기차길 옆 내고향 옛집 와룡이여!
내가 결혼하여 신혼때 교통이 불편한 와룡에서 익산까지(약15km) 출퇴근을 하였는데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였다.
호남선 와룡역은 작은 간이역으로 하루에 열차가 완행열차만 2-3개열차만 정차하였다.
버스도 없던 그시절 교통수단은 오직 열차만 있으니 신혼부부의 애환을 상상해 봅시다.
우리집에서 50여미터 떨어진 호남선 철길은 기차가 매일 수십차례 달린다.
내가 신혼시절 호남선 철길을 지나는 화물열차에 승무시 기관조사 조동화의 편리를 위하여 기관사님은 잠시 나의집 앞 철길에 기차를 정차시키면,
아내는 도시락을 기관차로 가지고 오던 추억이 있었다.
김제 와룡의 나의 어린시절은 우리의 전통사회 씨족 3대4대가 살았기에 우리집도 상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아버지 어머니 나 동생들과 대가족이 살아왔으나, 핵가족 개인주의 시대로변한 한국사회상은 세집중 한집은 혼자사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하네요.
조동화가 와룡에서 태어났을적 나의 둘째고모 조병례님은 나를 안고 엎고 귀여워 하시다 김제로 시집을 가시였다.
나의 둘째고모 조병례님께서 2021.3.5. 91세로 세상을 떠나시여 풀지못한 이야기를 풀길 없어 아쉬움이 사무쳐 온다.
나는 김제에 사시었던 조병례 고모님 살아생전 한달에 한두번 늘 아내와 방문하여 문안을 드리곤 하였다.
나의 고모님과 고무부님이 안치된 유해가 성남시 분당구 새나리오79번지에 있으니 하늘에 계신 고모 조병례, 참전용사이셨던 고모부 홍이표님을 뵈러 간다 하고 가지 못하고 있다.
장조카인 나를 안고 엎고 그렇게 이뻐하시었던 고모 조병례님이 저 세상에 가고 없으니, 온갖 아쉬움으로 점철된 조동화의 인생사 지나간 날을 회상하며 고모부 홍이표님이 내가 문안하고 나오면 차 뒤 꽁무니가 안 보일때까지 배응하던 하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아! 8월은 조동화에게 세상사 속세의 잡념을 버리고 조상에 대한 참회의 시간이 되어 감개무량하다.
이세상에 아니계신 님들이여 하늘나라에서 편히 잠드소서.
<천주교 전주교구 김제 요촌성당 와룡공소 와룡공소장 최영범선생과 와룡신도들이 기념사진을 남기어 오래된 사진으로 보이는데 칼라사진이 있었구나.
나이드신 어르신분들은 저세상으로 가시고 한용친구 어머님만 살아계시구먼.
우리어머님 모습도 보이네.
와룡공소 역사는 요촌성당 관할로
71.8.15 신설(이때는 미사공간이 없어 아마 집에서 미사집전 했을거여)
77.9.21 성당기공식(요촌성당 박창신신부님 부임후 예산배정으로 기공식)
79.2.18 준공.
와룡공소는 공소장 최영범선생의 작고와 더불어 신도도 줄어들어 어느때 폐소하고 말았제.>
<옛날 옛적의 사진속 고향 어른들은 모두가 저세상 하늘 나라로 가시었으나 추억을 세기고자 회상해 보았다.
맨좌측에 서 계시는 안경쓰신 어른이 조동화의 아버지이시다.
시력이 좋으셨는데 아마도 멋이 있으라고 안경을 쓰신 것 같다.
아버님께서 이세상에 오시여 조동화를 만드시었다.
조동화의 아버지 조병옥님은 여느 아버지와 같이 큰아들 동화가 잘되라고 인도하고 기도하시었다.
키는 크지 않으셨지만 멋쟁이셨다.
늘 아버지는 양복차림에 넥타이를 메고 외출하시었다.
농촌에 사시면서도 일은 많이 하지 않으셨다.
이리도 한세상 저리도 한세상 즐거웁게 사시다 가시었으면 되얐지요.
인생이 100년도 못살면서 1000년어치의 걱정을 하고 살면 않되지요.
조동화의 아버지는 멋지신 분이었지요.
염문도 많이 뿌리시었으나 아들사랑은 극진 하시었지요.
사진속 와룡 동네 어르신들은 모두가 이세상을 떠나시었지만,
남원 광할루 구경을 가시었나 상상해 봅니다.
정구형 아버님도 우리아버님 옆에 서 계시는데 정구형 한번 알아맞추어 봐요.
정구형 아버님은 동네 세멘일을 하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네요.
하도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정구형 아버님 조남이 "점자 동자"가 맞으신지 모르겠네요.
내가 머리를 헤메이다가 기억을 되살려 보았네요.
그러고 윗줄 오른쪽 첫번째 서 계시는 윤상용(1935년생)고향 어른도 보이네요.
조동화보다는 15세 더 드시었다.
조동화의 아버님은 자식들에게 훌륭히 되라고 기대를 많이 하시었는데, 어디 자식들이 부모마음처럼 잘 따라줍니까.
양념딸 월선이를 많이 사랑해주고 아끼었다. 이세상에 아니계시니 잘 해드릴수 없네.
인생의 시계를 되돌릴수 있다면 아버지의 회한가를 부르지 않을텐데 조동화는 눈물로 참회하며 지극하신 아버님의 마음을 압니다.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은 아버지 존경합니다.>
아버지의 눈물
시인-이채
남자로 태어나 한평생 멋지게 살고 싶었다.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하며 떳떳하게 정의롭게 사나이답게 보란 듯이 살고 싶었다.
남자보다 강한 것이 아버지라 했던가!
나 하나만을 의지하며 살아온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위해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하지 못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 세상살이더라.
오늘이 어제와 같을지라도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란 희망으로
하루를 걸어온 길 끝에서 피곤한 밤손님을 비추는 달빛 아래 쓴 소주잔을 기울이면 소주보다 더 쓴 것이 인생살이더라.
변변한 옷 한 벌 없어도 번듯한 집 한 채 없어도 내 몸 같은 아내와 금쪽 같은 자식을 위해 이 한 몸 던질 각오로 살아온 세월.
애당초 사치스런 자존심은 버린 지 오래구나
하늘을 보면 생각이 많고 땅을 보면 마음이 복잡한 것은 누가 건네준 짐도 아니건만 바위보다 무거운 무겁다 한들 내려놓을 수도 없는 힘들다 한들 마다할 수도 없는 짐을 진 까닭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울어도 소리가 없고 소리가 없으니 목이 메일 수밖에 용기를 잃은 것도 열정이 사라진 것도 아니건만 쉬운 일보다 어려운 일이 더 많아 살아가는 일은 버겁고 무엇하나 만만치 않아도 책임이라는 말로 인내를 배우고 도리라는 말로 노릇을 다할 뿐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울어도 눈물이 없고 눈물이 없으니 가슴으로 울 수밖에 아버지가 되어본 사람은 안다.
아버지는 고달프고 고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버지는 가정을 지키는 수호신이기에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약해서도 울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그래서 아버지는 혼자서 운다.
아무도 몰래 혼자서 운다.
하늘만 알고 아버지만 아는........................
조동화는 알어 아버지가 되어봐서 아버지는 아무한테도 말못하고 혼자서 울지.
아버지는 강해야 되니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고인이 되얐는데, 우리어머니는 솜리떡 양국떡 송방리떡도 보이는구먼. 떡이 뭐여 댁이 맞은데 사투리 떡으로 불리었지.
동네 어른들이 부부동반으로 놀러 나가시었는데 관망대 같기도 하다.
남자어른들은 여떫분인데 여자분들은 여섯분이여.
두분 어디갔어. >
<오래된 사진인데 정구형 어머님도 보이네.
순박한 시골 와룡의 아낙네들이여.
조동화어머님도 계시고.
흰저고리가 놀러가는데 외출복이었구먼.
어머님들은 거의 대부분 저세상에 가시었고 사진속 아가씨는 좋은 인연만나 어디엔가 시집가서 잘 살고 있으리라.
안고 있는 아기가 누구인지 장성하여 시집가서 자식 낳고 살고 있겠지.
석종이가 보이는데 가방을 메고 있구먼. 고인이 되였지만 선들아주머니(선들떡)도 보이고.>
<내가 어린시절 나의 할아버지가 비슷한 동네 어르신들과 사진을 찍어었구먼.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어디 금산사 가서 찍은 사진 같소이다.>
<나보다 16살 더 드신 숙부님의 신혼시절 사진이다.
내가 결혼하여 신방을 꾸린 그방에서 숙부님께서도 신방을 꾸며 사시었다.
금실좋은 사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으나 아이 둘을 남기고 작은 어머니는 하늘나라에 1965. 9. 4 일찍 가시었다.
생모가 살아계시었더라면 안고 있는 저 딸도 운명이 달라졌으리라.
이세상을 항해하며 어머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눈물도 많이 흘렸으리라.
숙부님은 1934년생으로 금년 89세이시다.
많이 걷고 운동하시어도 건강이 예전같지 못하다.>
<조동화의 둘째고모 조병례님이시다.
고모님은 2021.3.5. 91세로 세상을 떠나시여 풀지못한 이야기를 풀길 없어 아쉬움이 사무쳐 온다.
조동화가 와룡에서 태어났을적 1살때 나의 둘째고모 조병례님은 나를 엎고 댕기며 귀여워 하시다 김제로 시집을 가시였다.
나의 고모님과 고무부님이 안치된 유해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새나리오79번지에 있다.>
<조동화가 신방을 차린 와룡 고향집 아랫채에서 찍은 사진이구나.
꿈 많던 젊은이도 세월을 못 이기고 황혼의 노을이 되였구나.
1969년도 철도학교 시절 나의 모습이여.
나의 옛날 이름은 조재곤이라 하였고 김제조씨 시조 조연벽의 24세손으로 문량공 조간의 후손이다.
김제 와룡의 기차길옆 나의집에서 어린시절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기차가 검은연기를 내품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렁차게 움직이는 기차의 기관사의 꿈을 갖었었는데, 아버지께서는 국립철도학교 원서를 월연대에 사시었던 조찬익종친(운전조역)으로 부터 가지고 와 기관사과에 지원 합격후 1년간의 교육을 마치고 철도청공무원으로 발령받아 근무하다가 군에 입대 3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1975년 복직하여 40여년 철도를 천직으로 알고 2009년 정년퇴직했다.>
♣불변의 세가지 진리♣
● 제행무상(諸行無常)
태어나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 형태 있는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 '나도 꼭 죽는다' 라고 인정하고 세상을 살아라.
죽음을 감지하는 속도는 나이 별로 다르다고 한다. 청년에게 죽음을 설파한들...자기 일 아니라고 팔짱을 끼지만 노인에게 죽음은 버스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림과 같나니 하늘. 부모. 남편. 아내라 할지라도 그 길을 막아주지 못하고 대신 가지 못하고함께 가지 못한다.
하루하루, 촌음을 아끼고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외길이다.
●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나면 헤어짐이 세상사의 법칙이다. 사랑하는 사람. 애인. 남편. 부인. 자식. 명예. 부귀영화. 영원히 움켜쥐고 싶지만... 하나 둘 모두 내 곁을 떠나간다.
인생살이가 한때의 흐름인 줄 알라. 끄달리고 집착하고 놓고 싶지 않는 그 마음이 바로 괴로움의 원인이며 만병의 시초이니 마음을 새털같이 가볍게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 원증회고(怨憎會苦)
미운 사람, 피하고 싶은 것들과 반드시 만나게 된다.
원수. 가해자. 아픔을 준 사람. 피하고 싶은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며, 가난. 불행. 병고. 이별. 죽음 등 내가 바라지 않은 일도 종종 나를 찾아온다.
세상은 주기적 사이클 나도 자연의 일부인 만큼 작은 사이클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이를 '라이프 사이클(life cycle)'이라 한다.
현명하고 지혜롭고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은 능히 헤쳐나가지만우둔하고 어리석고 매사에 소극적인 사람은 파도에 휩쓸리나니 늘 마음을 비우고 베풀며 살라.
- 좋은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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